2019-06-25

‘동막골’을 그리며 오인동

박걸
2 hrs ·



Insook Lee
3 hrs


오래전에 오인동선생님이 쓰신것을 이메일로 보내오셨는데 지금도 감동적이기에 올려봅니다.

‘동막골’을 그리며
오인동
(정형외과 의사, 로스앤젤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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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골은 이상향이었다. 동막골은 환상의 마을이었다. 동막골은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한 두메산골 사람들의 순결한 삶과 훈훈한 인정에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 사람들의 얘기에 관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동화 같은 세계에 나는 다녀왔다.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난 그 해 가을, 그런 줄도 모르는 평화스러운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 동막골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는 뜻의 제목이다. 전투 중 이탈되어 동막골에 흘러 들어온 국군 소위와 위생병, 그리고 산간을 헤매던 세 명의 인민군 낙오병이 마을에서 마주치게 되자 이들은 본능적으로 총부리를 겨누고 대결한다. 

동막골 사람들은 같은 얼굴색의 사내들이 왜 서로 눈을 부라리는지도 총의 위력도 모르는 채 이 낯선 장면을 멀뚱하게 쳐다만 본다. 서로가 팽팽하게 대치하던 중 떨어져 굴러가던 수류탄이 옥수수 곳간에서 폭발하자 튀겨진 하얀 강냉이가 눈처럼 하늘에서 흩어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때 아닌 강냉이 눈발을 바라보며 신기해 깡충깡충 뛰는 아이들과 넋 잃은 여인네들, 곳간의 양식을 다 날려버린 것도 모르고 쳐다만 보는 남정네들. 얼마 전 추락한 전투기에서 살아나온 미국 공군조종사도 이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본다. 그리고 머쓱해진 남과 북의 군인들은 슬그머니 총들을 내려 놓았다.

이렇게 함께 하게 된 미군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국군과 인민군의 이념과 신념은 서로 달랐 지만 천진난만한 마을사람들과 동거하며 식량 마련을 위해 모두 농사일을 거들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준 농사꾼 옷을 입고 지내다 보니, 적군도 아군도 동맹군의 구분도 모두 희미해졌고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에 자연 속의 인간으로 빠져들어 갔다. 부상 당한 파란 눈의 미군 조종사를 제 아들처럼 보살피는 마을 노파, 백치처럼 티 없이 맑고 커다란 눈의 마을 소녀에게 마음 쏠리는 북한군 소년병사. 쾌활하고 놀이끼가 잔뜩 밴 남한군 위생병이 아저씨 뻘의 구수한 북한군 하사와 형제지의를 맺게 되고,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다리를 폭파함으로써 피난민들을 살상케 한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지적인 남한군 소위, 과묵하고 듬직한 북한 군관 에게 보내는 마을 과부의 아련한 눈길이 그림 같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펼쳐진다.

전쟁을 잊은 채 평온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커다란 멧돼지가 감자 밭을 헤집기 시작했다. 돌팔매질로 쫓아 버리려던 인민군 소년병사에 갑자기 뛰어드는 멧돼지에 떠받힐 찰나에 국군 소위가 몸을 던져 구해 낸다. 이에 다시 멧돼지가 소위를 향해 돌진해 가자 인민군 군관이 밧줄을 잽싸게 맞은 편으로 던졌다. 인민군하사와 국군위생병이 함께 밧줄을 맞잡아 당겨 달려가던 멧돼지를 넘어 뜨린다. 때 마침 재빠르게 미군 조종사가 던져 준 곡괭이 자루를 잡아 쥔 인민군 군관이 멧돼지를 내려쳐 눕혔다. 아스아슬하게 숨 막히는 장면이 느린 동영상으로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남의 국군, 북의 인민군, 미군이 모두 피를 나눈 형제처럼 함께 위기를 이겨냈다.

그날 밤, 남과 북의 병사들은 멧돼지 고기를 구워 주민들과 나눠 먹으며 어울려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밤 잔치를 벌였다. 이 장면을 지켜보다 피곤해 잠든 노파를 등에 업고 가는 훤칠하게 키 큰 미군 조종사의 굽은 등이 크게 확대되어 관객들 눈에 다가 왔다. 이들 모두는 어느덧 한 가족이 된듯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가 되어갔다. 이 대로이고 만 싶게 평온하던 동막골에, 그러나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미군 조종사를 구하려 한미합동특공대가 동막골로 들이닥쳤다. 북측 병사를 가려내려고 주민들을 다그치며 머리칼 짧은 인민군 하사를 먼저 지목하자 내 아들이라고 선뜻 나서는 마을 노인부부. 다음으로 인민군 군관이 지목되자 서슴없이 어린 아들과 함께 바짝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내 남편이라고 외치는 과부. 한편 무참하게 매맞고 있는 마을 촌장을 보며 격노한 국군 소위가 특공대원을 후려치자 그를 보호하려는 국군 위생병에 총을 겨누는 미군 특공대원 을 이번에는 미군 조종사가 돌로 내려치자 총격전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인민군 군관이 특공대를 해치우는 장면들이 관객의 숨을 멈추게 한다.

그 와중에 특공대원의 총을 맞은 커다란 눈의 천진한 그 소녀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안타깝게 죽어갔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막골에 인민군 대공포대가 있다는 오보에 따라 미군이 공중폭격 한다는 작전계획을 사로 잡힌 특공대원으로부터 알아냈다.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미군 조종사가 산간에 추락한 그의 수송기에서 대공총포를 찾아냈다. 각기 총포를 들고 미군,남군,북군 병사들이 비행기 폭격을 동막골 아닌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그 동안에 미군조종사와 친해진 마을 소년이 멀어져 가는 그를 향해 “스미스 아씨, 스미스 아씨요!” 하고 질러대는 외침이 산 골짜기에 기일게 메아리 쳤다.

연상의 북 군관이 남한 소위에게 지휘권을 넘겨 주자 그는 1차 공격은 그들이 막아내고 2차 공중폭격이라도 저지시키기 위해서 미군 조종사를 아랫 마을 미군 부대로 내려 보낸다. 눈 쌓인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기다리던 그 밤, 드디어 멀리서 우웅~웅 거리며 닦아오는 미군 폭격기 들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여기가 방공포대라는 것을 거짓으로 알리기 위해 장병들은 다가오는 폭격기에 먼저 총포를 쏘아댔다. 다시 돌아와 공격해 오는 폭격기에 마주 쏘아대는 남과 북의 병사들. 생의 최후가 될지 모르는 그 순간에 병사들이 주고받는 말들,

“우리도 연합군이 아닙네까? 아니면 분명 북남 합작군은 되디요?”
라던 북군 소년 병사의 외침. 폭탄이 한 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가운데,
"이렇게 말고, 다른 데서 다르게 만났으면 우리 진짜 재미있었을 텐데요! 안 그래요?"
라고 북 군관을 향해 외치던 남한 장교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한편2차 폭격을 저지시키려 죽을 힘을 다해 아래 마을로 뛰어 내려가던 미군 조종사가 미처 부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남.북 합작군에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폭탄을 멀리서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 전쟁의 냉혹 앞에서 하나씩 허무하게 져버리는 젊은 생명과 그들의 꿈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인간 본연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분단의 어리석음과 아픔을 아직도 안고 있는 조국이다. 남과 북은 너무 오랜 세월을 헛되이 대결하고 있다. 동막골에서처럼 이라면 모두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을. 남한에서는 1천만이 이 영화를 보았단다. 미국에서 뒤늦게, 나도 그 1천만 대열 뒤에 섰다. 문명의 세계에 살면서 동막골 같은 이상향을 그리는 것은 이율배반인가?

 미국 중앙일보 2006년 3월16일,
* 한국 월간문예지 <한국산문>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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