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1

알라딘: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알라딘: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eBook]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역사가 이이화가 이야기해주는 한국불교사의 거의 모든 장면
이이화 (지은이) 불광출판사 2018-10-10
544쪽 (종이책 기준), 약 24.9만자, 약 7.6만 단어
ISBN : 9788974794750

책소개
한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 하나가 있다. 바로 불교사이다. 불교는 고대 고구려에 처음 전래되어 백제, 신라, 가야에 전해졌고, 고려, 조선에 이어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불교사에 대한 시각은 주로 사상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춰져왔다는 점, 그리고 학술적인 측면으로 다루어져왔다는 점으로 인해 대중들이 접근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가 지나온 유구한 세월을 이 책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책은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내는 재야학자' 이이화의 저서이다. 저자는 우리 불교사를 한국사 전체의 틀에서 통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특유의 이야기체로 풀어낸다. 그리하여 그동안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불교사를 한층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목차


머리말.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떤 과제를 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1부. 불교의 전래

1. 불교의 첫 전래, 고구려

2. 왕즉불사상과의 접목

3. 고구려불교와 도교의 충돌

4. 백제의 불교 수용

5. 백제의 미륵불은 국가 수호신

6. 뒤늦게 전래된 신라불교

7. 죽음으로 얻은 불법 공인

8. 남방불교의 요람, 가야



제2부. 화려한 신라의 불교사상

9. 신라 진호불교의 기반

10. 당당히 떠나는 신라의 유학승

11. 원효와 의상의 시대

12. 실천적 포교승, 의상

13. 민중 속으로 퍼진 정토.약사.관음신앙



제3부. 갈등과 새 바람

14. 타락하는 승려, 뒤로 부는 새 바람

15. 선문을 일으킨 선각자들

16. 구산선문 일어나 새 선풍 불다

17. 미륵 현세를 열망한 민중



제4부. 불교정치술

18. 신비에 싸인 도선과 풍수설

19. 궁예와 미륵 세력의 결합

20. 진훤의 불교 세력 이용

21. 다양한 사상을 수용한 왕건

22. 불교는 나라와 임금을 지켜야 한다



제5부. 반성하는 불교

23. 불법과 충돌하는 유학

24. 승려들이 장사를 벌이다

25. 의천과 천태종의 창종

26. 사원 토지의 확대와 지눌의 출현

27. 한뜻으로 전진하는 결사운동

28. 참수행 피우는 백련결사



제6부. 팔만대장경의 힘

29. 바야흐로 맞은 압박과 비애의 시대

30. 화려한 고려문화, 고려미술

31. 불탑의 변화와 불경 인쇄

32. 빛나는 민족유산, 팔만대장경의 조성



제7부. 불교와 성리학

33. 불교의 침체와 성리학자의 부상

34. 왕사 보우와 신돈의 개혁 정치

35. 신돈의 죽음, 이단론의 등장



제8부. 불교는 이단이다

36. 부처는 정신계의 주인이 아니다

37. 극렬해진 불교 이단 논쟁

38. 고려불교가 길들인 생활문화

39. 무학과 이성계의 만남



제9부. 불교정책의 이중성

40. 궁중불교와 유불선 합일사상

41. 세종 불교정책의 겉과 속

42. 세조가 편 불교진흥정책

43. 본격적인 불교 압제의 시작

44.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소용돌이

45. 문정왕후의 승과 부활



제10부. 호국불교와 민중불교

46. 조일전쟁과 호국불교의 전통

47. 조일전쟁?조청전쟁 뒤의 사정

48. 조선 후기 민중불교의 확산

49. 불안한 사회의 변혁 세력이 되다

50. 위경의 등장과 원당 금지



제11부. 승려의 자유와 실천

51. 정조의 타협적 불교정책

52. 탄압받는 서학·동학, 자생하는 불교

53. 개화운동과 승려의 현실 참여

54. 이동인과 탁정식의 죽음

55. 친일불교와 새로운 시련



제12부. 식민지 시기 불교와 해방 이후의 불교

56. 식민지 초기 불교의 친일화 과정

57. 민족불교와 친일불교의 갈등

58. 해방 뒤 비구-대처의 분쟁

59. 오늘날의 한국불교



주요 참고문헌

도판 출처



별지. 연표로 보는 한국불교사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우리나라 불교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 전래되었다.
P.24
그런데 고구려는 왜 불법을 아무 저항 없이 수용했을까? 열렬한 불교도이자 강력한 힘을 가진 부견에게 잘 보이려는 몸짓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부처님이 가르친 중생 제도 같은 자비사상을 전파하려는 목적이었을까? 여기에는 더 큰 목적이 따로 있었다고 볼 정황 증거가 많다.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접기

P.35
도림은 바둑을 잘 두었는데 개로왕도 정사를 밀쳐놓고 바둑 놀이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바둑으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도림은 개로왕에게 “백제는 천혜의 요새를 차지하고 있으나 성곽이 제대로 보수되지 않았고 궁궐이 퇴락하여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은근히 말했다. 개로왕은 이 건의에 따라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시켰다. 도림이 도망쳐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보고하자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했고 개로왕은 포로로 잡혀 한강가의 아차산성에서 처형되었다.

P.59
백제 사회를 정토의 터전으로 여기게 하고 무왕 자신이 미륵불의 도움을 받았거나 자신이 현세한 미륵이라는 암시를 풍겨,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현세의 희망을 주고 일체감을 다지며 귀족들을 억눌러 절대 왕권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P.62
눌지왕의 한 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으레 하던 대로 무의(巫醫, 무당)를 불러 치료하게 했으나 낫지 않았다. 그래서 묵호자를 불러들여 병을 치료하게 했다. 묵호자가 부처님 앞에서 향을 사르고 서원을 내자 공주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눌지왕은 기뻐하면서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묵호자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묵호자는 왜 행방을 감추었을까? 아마도 임금의 신임을 받은 그의 행동에 무의를 비롯한 샤머니즘 세력이 제약을 걸었을 것이다.

P.70
이렇게 해서 이차돈은 형장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처님이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외쳤다. 이윽고 그의 목을 칼로 내리치자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발 높이 솟았고 머리는 북쪽으로 날아가 경주 외곽에 있는 금강산 정상에 떨어졌다 한다. 또 햇빛이 사라져 갑자기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묘화(妙花)가 쏟아져 내렸으며 땅이 크게 울렸다. 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 동물과 식물도 움직였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두려움에 떨며 서로 마주서서 곡을 했다. 길에는 통곡 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다.

P.104
의상은 원효와 헤어진 뒤 661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조국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한참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어 당나라와 연합해 1차 평양 공격에 나섰다. 장안도 고구려 정벌로 소란스러웠다. 의상은 고국의 소식에 귀를 막았을 것이다.

P.115
정토신앙은 귀족과 노비에게도 유행을 탔다. 현세에서 부귀를 누리는 귀족들은 죽어서도 극락세계에 가서 영화로운 삶을 연장하고 싶었을 것이요, 노비들은 현세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 내세에는 극락세계에서 잘살아보겠다는 염원으로 아미타불을 신봉했다.

P.128
한편 왕자, 귀족 중에도 출가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서민들도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큰 절에는 수천 명, 작은 절에는 수백 명의 승려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위도식하는 무리들로, 선방에 누워 배를 긁으며 낮잠을 자고 게으름을 피웠으며 절 옆의 채전 일도 절에 딸린 종이나 신도들에게 맡겼다.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는 신흥 귀족이었다.

P.132
왕실과 귀족의 타락과 갈등으로 지방 호족은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민중도 민활하게 움직였다. 화엄학을 닦는 승려들은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왕실과 귀족들의 손가락질에 놀아나 어용으로 전락했으며 정토신앙과 관음신앙도 민중과 유리되었다. 이런 승려들은 중생 구제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잿밥에만 마음을 쏟아 평민 위에 군림했다.
선종은 이런 시대 분위기를 타고 일어났다.

P.147
농민전쟁의 주도 세력은 기층민이었다. 곧 하층 농민과 노비들이 그 기저를 이루었다. 이들은 산속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산사에도 출몰했으며 교종이나 선종의 사찰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불태웠다. 옥석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선승들은 한탄하면서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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