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1

[왜냐면] “분단체제 개념, 동아시아에 적용하려면 ‘대분단체제’가 적절” / 이삼성 : 왜냐면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왜냐면] “분단체제 개념, 동아시아에 적용하려면 ‘대분단체제’가 적절” / 이삼성 : 왜냐면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분단체제 개념, 동아시아에 적용하려면 ‘대분단체제’가 적절” / 이삼성

등록 :2014-03-19 19:11수정 :2014-03-19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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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교수의 ‘대분단체제’ 비판에 대한 반론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이삼성 한림대 교수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겨레> 3월11일치 인터뷰(‘통일은 단계적으로…그 과정서 시민참여가 가장 중요해요’)에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관련해 의견글을 보내왔다. 백 명예교수는 인터뷰에서 이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과 관련해 “(아시아의 현 상황을) 일본과 아시아 나머지가 대립하는 ‘체제’로 논하는 건 개념의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 기고문을 통해 “1980년대 초부터 ‘분단체제’가 한반도에 초점을 맞추어 사용된 만큼, (‘분단체제’ 개념을) 동아시아에 적용하려면 ‘대분단체제’가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기고문이 ‘통일담론 활성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1978년 ‘분단시대의 사학’이란 문제의식을 제기한 강만길 교수는 1983년 송건호 선생과 함께 <한국민족주의론 II>를 펴냈다. 필자가 접한 것 가운데 ‘분단체제’ 개념을 담은 첫 문헌이었다. 1994년 백낙청 교수는 세계체제론을 원용하여 ‘한반도 분단체제’ 개념에 체계성을 담으려 했다. 한편 필자는 ‘분단체제’ 개념을 한반도가 아닌 동아시아 지역질서 전반을 개념화하기 위해 채택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부터 ‘분단체제’가 한반도에 초점을 맞추어 사용된 만큼, 동아시아에 적용하려면 ‘대분단체제’가 적절해 보였다.



2012년 9월 중국과 일본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동중국해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주변 해역에서 일본 순시선들이 중국 함정(가운데)과 근접해 항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동아시아 질서의 통시적 연속성

필자는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고유성은 ‘냉전·탈냉전’이라는 일반적 도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통시적 연속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연속성의 구조를 개념화함으로써,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를 동아시아 질서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조,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그리고 과거에 대한 기억의 정치가 현재와 미래의 국제질서에 갖는 규정력, 이 세 차원을 함께 담아낼 수 있는 독자적인 개념화를 모색했다. 1999년 국내외의 평화회의와 학술회의에서 ‘대분단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 문제의식을 담았지만,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개념을 체계화해 발표한 것은 2004년 여름 한국정치학회 주최의 학술회의에서였다. 이후 국내외에서 발표한 여러 논문과 글에서 이 개념에 바탕한 동아시아 질서 인식을 제기해 왔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네 묶음의 논의이다. 첫째는 개념 자체의 논리적 구성이다. ‘체제’란 두가지의 설명을 요한다. 체제의 전체를 구성하는 인자들을 명확히 하고, 그 인자들 사이의 지속성 있는 상호작용 패턴을 설명해내야 한다. 둘째는 ‘동아시아 대분단선’에 놓여 있는 전략적 충돌 지점들과 이를 둘러싼 긴장의 양상에 대한 설명이다. 셋째는 대분단체제 안에서 한반도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 체제와의 연관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명하고 정책을 논하는 부분이다. 넷째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상호작용에 대한 논의이다. 이 글에서 네가지 모두를 언급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 같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논리적 구성을 밝히는 것에 집중하겠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이 ‘일본과 나머지, 혹은 일본과 아시아의 분단’ 식의 논리로 오해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기 때문이다.

  

청일전쟁~1945년은 동아시아 제국체제

필자는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 1945년까지의 반세기를 동아시아의 ‘제국체제’로 정의한다. 전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최소한 두가지 점에서 제국체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는 중국 경영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한편 갈등하되 큰 틀에서 상호적응하며 협력한 미-일 연합의 지정학적 전통이다. 이 연합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뒤이은 난징 학살 사태에도 불구하고 1940년 전후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에 대륙침략과 전쟁 수행에 불가결했던 폐철과 항공폭탄을 1938년까지, 전투기와 폭격기에 긴요한 항공유는 1940년 중엽까지 계속 공급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역시 결정적 전략물자인 석유의 대일본수출도 1941년 7월까지 지속했다. 1941년 12월 진주만 사태와 1945년 8월 원폭 투하라는 충격적인 이미지가 그 이전 반세기에 걸쳐 존재한 미-일 연합의 역사를 망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제국체제가 전후 동아시아 질서에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제국의 폭력에서 연유한 역사심리적 간극이다. 총력전으로 불린 두 차례의 대전에서 상호 파괴와 살상, 그리고 전대미문의 반인류적 범죄들은 동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웅장한 스케일로 벌어졌다. 그런데 이 역사적 상처는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 질서에 더 깊게 각인된다. 더욱이 전후 유럽 질서는 그 상처를 치유한 반면, 전후 동아시아 질서는 그 점에서도 제국체제와 연속성을 띤다. 제국체제의 역사적 상흔의 전후 계승은 대분단체제의 또다른 핵심 요소이다.

필자는 이 대분단체제를 개념화하기 위해 중층성, 다차원성, 그리고 상호작용성이라는 세가지 성격을 부각시켜왔다. 먼저 중층성이란 이 체제가 두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미-일의 연합, 그리고 이것과 중국 사이의 긴장 구조가 그 하나인데, 필자는 이것을 ‘대분단의 기축’이라 부른다. 다른 하나의 층위는 한반도의 휴전선, 대만해협, 그리고 전후 적어도 30년간 베트남을 갈라놓았던 17도선에 존재한 국지적 분단들이다. 민족분단 혹은 소분단체제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상호작용성

다차원성이란 분단을 구성하는 세가지 긴장 요소를 가리킨다. 그 첫째는 제국체제로부터 넘겨진 미-일 연합과 대륙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이다. 둘째는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에서의 균열 내지 이질성이다. 셋째는 역사심리적 간극이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대분단 ‘체제’이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중층성과 다차원성 모두에서 작동하는 상호작용성이다. 첫째, 대분단의 기축과 민족분단들이 서로를 유지시키는 패턴을 보인다. 1970년대 초 미국은 베트남의 수렁에서 명예로운 후퇴를 위해 소련 및 중국과 긴장 완화를 추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데탕트 국면에 부응하는 척했다. 그러나 곧 10월 유신을 단행해 한반도의 긴장은 오히려 증폭된다. 이것은 베트남의 상황과 결합하여 동아시아 질서의 전반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것은 베트남의 상황과 결합하여 동아시아 질서의 전반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1990년대에도 대분단의 기축에서 긴장 완화가 추구되지만 한반도 핵문제, 그리고 대만해협의 미사일 위기가 미-중 관계를 긴장시켰다. 2008년 대만 마잉주 정권의 등장은 양안관계에 훈풍을 몰고 오지만, 남중국해와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의 문제로 미-일 동맹과 대륙 사이의 기축 관계가 긴장했다. 그 여파로 대만의 미국 첨단무기 구매는 오히려 증가한다. 천안함 침몰이라는 한반도 내적 사건도 이 시기 대분단 구조 전반에 긴장을 보탰다. 모두 대분단의 기축과 소분단체제들 사이에 작동하는 상호유지 패턴을 예증한다.

둘째,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 그리고 역사심리적 간극이라는 세가지 차원의 인자들이 상호 지탱하고 보완하는 관계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전후 유럽과 동아시아의 또다른 근본적 차이가 확인된다. 유럽의 냉전체제는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장치였다.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서 다른 서방국가들과 연합하고 화해한다. 동독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통해서 소련과 폴란드 등 공산권 세계와 동맹하여 화해했다. 독일 전체와 나머지 세계 사이의 화해가 제도화된 것이다. 그 화해의 전제는 소련과 영국, 프랑스 등 전쟁의 피해자들이 전후 독일 재건의 결정 과정에 참여하여, 독일의 철저한 역사반성을 강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에서 전후사의 구조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미-일 간 전쟁의 상처는 재빨리 구축된 안보동맹에 의해 해소되지만, 제국체제의 최대 피해자였던 중국은 전후 일본의 재건 방식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없었다. 대분단체제는 역사적 상처를 해소하기는커녕 동결하고 응결시켰다. 미국 단독 점령체제하에서 일본은 천황제에 면책권을 부여받았고, 소수의 에이(A)급 전범만 제외하고 지배층이 그대로 전후 일본을 지도했다. 역사반성을 강제하는 시스템은 없었다. 오늘날 망언을 주도하는 정치인들이 속한 일본의 전후 세대는 다른 동아시아 사회들과의 역사 화해를 위한 반성적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역사반성 문제에서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민족성’의 문제로 돌릴 수 없는 이유이다.

  

중국 내전이 동아시아 질서를 결정

대분단체제 형성의 역사적 계기는 무엇인가. 전후 유럽의 질서는 미소냉전을 직접 투영했다. 그래서 미소냉전 해체와 함께 유럽 냉전체제는 즉각 해소된다. 동아시아 질서는 미-소 관계가 아닌 미-중 관계가 궁극적인 결정자였다. 미소냉전은 중국의 내면적 투쟁과 선택이라는 계기에 의해서만 동아시아 질서에 투영될 수 있었다. 중국 내적 투쟁은 1920년대 이래의 중국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오랜 역사에 기초한 것이지만, 특히 1945년 이후 4년에 걸친 중국 내전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기축을 결정했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의 정신적 기원이자 후원자였지만, 궁극적인 선택은 중국 사회의 몫이었다. 그렇게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은 평화적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길을 일찍 중단했다. 1949년 가을 대분단체제의 원형이 구성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그 형성기 대분단체제의 산물이었다. 이 전쟁은 역으로 대분단체제를 그 기축과 국지적 분단 모두에서 결정적으로 고착화시켰다. 결국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일차적 계기는 중국 사회의 선택과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었으며, 한국전쟁은 그 이차적 계기를 이룬다. 그런 가운데 대분단체제와 한국전쟁은 상호 견인의 관계에 있었다.

탈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는 유럽과 달리 질서의 연속성이 강했다. 유라시아 대륙 전반과 미국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은 소련 붕괴로 급변했지만 중국의 부국강병으로 지정학적 차원의 긴장이 재충전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완화되지만, 한국·대만·필리핀 등은 민주화된 반면 천안문(톈안먼) 사태로 중국과의 정치체제적 이질성이 재확인된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질성이 또다른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부상한 것이다. 대분단체제가 응결시켜 보존했던 역사심리적 간극은 탈냉전과 함께 해방된 역사 담론이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더 활성화되면서 지속된다. 과거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대체해 새롭게 중요한 정치적 이념 자원이 된 민족주의도 역사담론과 결합하면서 역사적 기억의 정치는 오히려 치열해진다. 아울러 대분단의 기축과 소분단들 사이의 상호유지적 상호작용 패턴이 한반도의 핵문제, 그리고 동중국해에서의 지정학적 경쟁 등과 합류하면서, 대분단체제는 여기에 그대로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라는 외관에 종종 가려진 채로.

  

대·소 분단체체 해소와 한국의 선택

진한(秦漢) 이래의 ‘천하체제’가 대륙 중심의 질서였다면, 청일전쟁 이래 반세기에 걸친 ‘제국체제’는 해양세력 우위의 질서였다. 대분단체제는 그 중심이 대륙과 해양으로 나뉘어 양립하는 질서이다. 한반도는 이 질서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분단된 채로 있다. 이 소분단이 스스로를 해체하여 대분단의 긴장을 통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대분단체제의 질곡을 유지시키는 고리로 남을지, 우리는 여전히 그 분수령에 서 있다. 동아시아는 오늘도 대분단체제의 완화와 소분단체제 해소에 함께 기여할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28958.html#csidxc171f074fbe4717a0b58c5e9f93a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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