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9

내선일체의 모순 -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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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일체의 모순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이전에 1910년 이래 일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표방되어 온 동화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내선일체는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보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화된 것임은 틀림없지만, 이전의 동화주의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사유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병합 이전부터 홋카이도, 오키나와, 대만 등을 식민화하고 식민지에 대해 일시동인(一視同仁),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 일선동화(日鮮同化)를 표방해왔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통치방침도 기존의 동화주의의 연장이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방식은 식민지에서 자치하게 하는 방법, 동화시키는 방법, 종속시켜서 위임통치를 하게 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학자들은 동화주의에 대해서 서로 다른 규정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는 동화정책을 식민지를 완전히 본국화하는 것으로, 식민지민과 식민지사회의 독자성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통치책으로 규정한다. 한편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은 “동화주의는 식민지에 대하여 완전히 동일한 대우를 부여하는 정책이다. 식민지민은 본국국민과 동일한 자격과 신분을 갖기 때문에 본국에서와 동일한 권리, 보장, 자유를 부여받는다. 식민지는 본국의 연장이기 때문에 식민자와 똑같은 법률, 경제, 사회적 제도에 따르게 한다. 동화주의 식민통치는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으로 이미 본국적이고 본국중심으로 한다”고 그 개념을 규정하였다.

니토베 이나조의 견해와 야나이하라 타다오의 견해는 동화주의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식민지를 본국화시키는 것은 식민지 본래의 문화와 관습을 말살시키는 폭압적 통치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다른 한편 동일한 법률을 적용한다는 의미는 식민모국의 사람들과 식민지의 사람들이 균질하다는, 다시 말하면 “법 아래 평등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1918년까지 일본은 동화주의를 실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하에서 식민지민들의 반발을 완화시키기 위해 식민지의 관습을 인정하는 관습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8년 식민지들을 일본과 동일한 법아래 통치한다는 소위 「공통법」이 시행되면서 동화주의의 양면성은 식민정책의 모순으로 작동하게 된다.

식민지들이 일본과 동일한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을 때, 식민지나 일본에서 가장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참정권”이다. 1918년 1월에서 3월까지 열린 제 40회 제국의회에서는 「공통법」을 둘러싸고 식민지민들의 참정권 획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통법은 일본과 식민지 사이의 법을 통일하는 것이다. 특히 민사·형사부분에 있어서 “이법지역 간의 연락통일을 도모하며…법률질서의 조화적 적용범위의 확정을 목적”으로 하고, “존거법의 확정”과 “사안의 실질법적 해결”을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 ·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는 일본의 메이지 헌법과 다른 법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식민모국과 식민지 사이의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 공통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제국의회에서는 공통법이 시행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식민지민들의 참정권에 대한 요구를 어떻게 제지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한다.

기존 메이지 헌법에서는 중의원 의원선거법과 시정촌제(市町村制)의 선거인 자격규정에 따라 “제국신민인 남자”가 선거권을 부여받는다. 문제는 이제 공통법이 적용될 경우 모든 식민지인들도 “제국신민”이 된다는 것이다. 조선인과 대만인을 제국신민이면서도 피선거권자가 아닌 존재로 규정할 것인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제국국민의 권리와 의무는 그들의 문명화의 대가로 인식되던 시대에, 야만으로 규정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식민화할 수 있던 식민지민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의무가 부여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통법의 해석과정에서 식민지민들의 선거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8년 2월 9일에 내무성 지방국장은 각 부현지사들에게 통첩을 발령하는데, 소에타 통첩(添田通牒)이라고 불리는 이 통첩은 식민지에 거주하는 식민지민 뿐만 아니라 내지에 있는 식민지민들의 공민권을 부인하고 있다.


문 : 조선인 · 대만인으로 내지에 주소를 갖고 있는 자가 법정 요건을 구비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공민권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귀 관할에서 실제로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알려주기 바란다.

답 : 선거법에 제국신민은 내지인 신민을 지칭한다. 징병령에서 말하는 제국신민은 내지인 신민을 말하며, 새로운 신민을 포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만인 · 조선인은 그 주소지에서는 자치능력을 인정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지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인정할 이유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통첩에서 참정권과 더불어 “징병”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고이소[小磯]총독시대에 대한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정무총감의 회상에 따르면 징병제가 당시 참정권부여여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징병제문제…는 틀림없이 일본의 전국(戰局)과 중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갈 때까지는 지원병 훈련소를 설치하여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징병제와는 별 관계 없이 ‘조선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라’는 요구가 이미 훨씬 이전부터 조선인들 사이에 있었습니다.…그것에 대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조선인은 납세야 하고 있지만 혈세(血稅 :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지는 않으니 일본인과 똑같은 참정권을 주라는 요구는 무리라는 그런 의견이 매우 많았습니다.

( 다나카 다케오 정무총감의 회상. 미야타 세쓰코 해설·감수, 정재정 번역,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혜안, 2002 중)


일제는 문명-야만의 대조를 통해, 다시 말하자면 조선인을 조선인으로 남겨둠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문명-야만의 대립은 동화주의라는 식민정책의 시행과 논리적 모순관계-혹은 양자가 논리적 연장으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에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야만을 개화시켜 문명국으로 만든다는 것이 식민통치의 정당성이라면, 어느 정도 교육받고 경제력을 갖게 된 식민지민들을 여전히 야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식민통치의 성과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식민지민들이 야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면, 게다가 조세의 의무까지 이행하고 있다면 동화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은 참정권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병역의 의무였다면, 일본이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조선인들도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참정권문제는 묵살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가 되었을 것이다.

징병제는 42년 이전 각의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그리고 44년부터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징병제가 시행되기 이전인 38년부터 조선에서는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의 황민화가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징병제는 황민화 교육을 받고 있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정교육에서 아동의 황혼(皇魂 : 천황정신)이 학교 교육과 서로 합치되어”(『朝鮮人志願兵制度ニ關スル意見』朝鮮軍司令部, 1937. 6.) 징병제를 실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5월 징병제는 각의에서 결정되고 1943년 3월 1일에는 법률 제 4호로서 공포되어 8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징병제문제는 참정권문제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총독부에서는 ‘병역이란 황민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임을 강조함으로써 일관되게 병역과 참정권 문제를 분리하는 방침을 취해왔다. 그런데 고이소가 총독이 되고 징병제가 실시되자, 참정권 문제는 현실의 문제가 됐다. 그러나 일본 쪽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1944년 7월, 갑자기 고이소에게 내각을 조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에 따라 고이소가 내각총리대신이 되고 다나카가 내각서기관장에 취임하게 되었고, 강력한 군의 지지에 따라 조선인의 참정권문제는 갑자기 현실문제가 되었다.


고이소 총독은…혈세를 내게 하여 전장에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그 대가로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론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 다나카 다케오 정무총감의 회상. 미야타 세쓰코 해설·감수, 
정재정 번역,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혜안, 2002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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