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페이스북을 보면서 마음이 참 착잡합니다.
홍콩사태에 대한 전 세계의 공분 (여러 모순 때문에, 진보보수/좌우를 막론한... 링크글 한번 참고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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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각 홍콩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홍콩 시민들이 겪는 억압에 대해 공분하고 연대해야 하지만, 동시에 언급되지 않고 지나치는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곤란함을 안고 있다.
오늘날 홍콩에서 벌어지는 억압은 결코 중국공산당 혹은 시진핑이 발명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지금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것은 홍콩을 99년 간 식민 통치한 제국주의 영국에 의해 발명된 것이었고, 홍콩의 민중들은 오랫동안 이에 맞서서 저항했었다.
주지하다시피 홍콩은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홍콩에 거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많은 차별과 학대를 당했고, 선박 노동자의 경우, 영국인 선원들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백인 선원의 20%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1922년 홍콩의 선박 노동자들이 결성한 홍콩선원노조의 파업은 불과 1년 전 결성된 중국공산당의 혁명 여정과 광둥성 지역 노동운동을 촉발시킨 역사적 저항이었다. 당시 홍콩 시민들을 가혹하게 통치하고 있던 영국 식민당국은 위력적인 파업에 한수접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투쟁은 당시 광둥성 곳곳을 분할 통치하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홍콩은 아시아 금융시장의 허브이고, 관광과 쇼핑의 도시인데다, 한때는 어떤 변종된 아시아 문화의 수도 같은 곳이었지만, 면적으로는 아주 작다. 그러니 이 도시를 일반적인 다른 '국가단위'와 비교해 완전히 독립적인 체제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니다. 이곳에 도입된 극도의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외양상 많은 모순을 감춘다. 그곳에 있던 무수한 빈부격차를 감추고, 억압의 역사를 감추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니,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엔 잘 살았고 민주주의였지만, 중국 반환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되었다는 식의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 식민지배 시절에 민주주의의 호혜를 입고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에 가깝다. 적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려면 영국 본토에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전무했다고 말할 뻔뻔함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고 사기칠 뻔뻔함도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홍콩의 끔찍한 빈부격차를 낳은 것은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광둥의 전통적 자본가들의 공모였지, 중국 대륙의 통치자들은 아니었다. 60~70년대 홍콩에서 벌어진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자본주의적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그 역사적 억압의 주체는 국가자본주의의 억압자로 변이한 중국공산당 엘리트들로 치환되어버렸다. 홍콩에서 '자유'를 말한다는 것은 즉 공산당에 맞서 저항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서구의 매스미디어와 지배엘리트들이 홍콩의 투쟁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심지어 남한에서 박정희를 추앙하는 자들도 홍콩 시민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오늘날 홍콩의 많은 시민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의 홍콩깃발'을 흔드는 일부 시민들과도 함께 시위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홍콩 시민들의 투쟁을 지지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어떤 이름이, 어떠한 모순들이 감추어져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면 당연히도 설명충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걸 감춰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국내에서는 <우산혁명>이란 이름으로 공개된, 넷플릭스에서 배급하는 <조슈아 웡>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영화는 서구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선으로 홍콩의 우산 시위를 담고 있는데, 당연히도 많은 역사적 모순을 감추고 있다. 게다가 우산혁명이 안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계급적 한계 역시 모른 척 한다.
현재 중국 당국의 강경대응, 일국양제 약속이 폐기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상황은 대다수 홍콩 시민들을 불안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나아가 홍콩 경제가 안고 있던 장기간의 경기침체, 빈부격차도 그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런 불만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모른 척하고, 단순하게 법제의 강화와 강경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홍콩 시민들의 저항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투쟁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는 우산혁명의 실패 이후에 왜 빈곤층은 친중으로 돌아섰고, 중산층만이 반중으로 남아있었는지, '데모시스토'처럼 이 운동을 선두에서 급진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조직들이 갖고 있는 '홍콩내셔널리즘'의 한계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들은 다른 홍콩 좌파들과 달리, 역사적 모순이나 노동 억압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우산혁명 당시 홍콩 시민들이 갖고 있던 본토 출신 중국인 노동자 및 여행객들에 대한 일정한 혐오 정서에 대해서도 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홍콩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진보'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지역주의 및 독립노선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 '절대권력의 억압에 대한 숭고한 저항'처럼 느껴지고, 또 전달되는 것은 어딘가 많은 걸 빼먹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해방과도 거리가 멀다.
그런 역사적 모순들에 대해 사고하지 않으면, 실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에서 좌우 막론하고, 홍콩 시민에 대한 연대의 마음이 하나의 목소리로 뭉개지는 것은 이것이 '순수한 저항'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역사와 정세에 대해 별로 엄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시아 식민지배의 원죄를 안고 있는 영국, 미국 등 서구 강대국들의 위선이 역겹다. 지금의 역사적 모순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됐고, 우리는 그것을 잊어선 안 된다.
오늘날 홍콩에서 벌어지는 억압은 결코 중국공산당 혹은 시진핑이 발명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지금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것은 홍콩을 99년 간 식민 통치한 제국주의 영국에 의해 발명된 것이었고, 홍콩의 민중들은 오랫동안 이에 맞서서 저항했었다.
주지하다시피 홍콩은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홍콩에 거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많은 차별과 학대를 당했고, 선박 노동자의 경우, 영국인 선원들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백인 선원의 20%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1922년 홍콩의 선박 노동자들이 결성한 홍콩선원노조의 파업은 불과 1년 전 결성된 중국공산당의 혁명 여정과 광둥성 지역 노동운동을 촉발시킨 역사적 저항이었다. 당시 홍콩 시민들을 가혹하게 통치하고 있던 영국 식민당국은 위력적인 파업에 한수접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투쟁은 당시 광둥성 곳곳을 분할 통치하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홍콩은 아시아 금융시장의 허브이고, 관광과 쇼핑의 도시인데다, 한때는 어떤 변종된 아시아 문화의 수도 같은 곳이었지만, 면적으로는 아주 작다. 그러니 이 도시를 일반적인 다른 '국가단위'와 비교해 완전히 독립적인 체제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니다. 이곳에 도입된 극도의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외양상 많은 모순을 감춘다. 그곳에 있던 무수한 빈부격차를 감추고, 억압의 역사를 감추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니,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엔 잘 살았고 민주주의였지만, 중국 반환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되었다는 식의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 식민지배 시절에 민주주의의 호혜를 입고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에 가깝다. 적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려면 영국 본토에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전무했다고 말할 뻔뻔함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고 사기칠 뻔뻔함도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홍콩의 끔찍한 빈부격차를 낳은 것은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광둥의 전통적 자본가들의 공모였지, 중국 대륙의 통치자들은 아니었다. 60~70년대 홍콩에서 벌어진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자본주의적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그 역사적 억압의 주체는 국가자본주의의 억압자로 변이한 중국공산당 엘리트들로 치환되어버렸다. 홍콩에서 '자유'를 말한다는 것은 즉 공산당에 맞서 저항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서구의 매스미디어와 지배엘리트들이 홍콩의 투쟁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심지어 남한에서 박정희를 추앙하는 자들도 홍콩 시민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오늘날 홍콩의 많은 시민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의 홍콩깃발'을 흔드는 일부 시민들과도 함께 시위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홍콩 시민들의 투쟁을 지지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어떤 이름이, 어떠한 모순들이 감추어져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면 당연히도 설명충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걸 감춰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국내에서는 <우산혁명>이란 이름으로 공개된, 넷플릭스에서 배급하는 <조슈아 웡>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영화는 서구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선으로 홍콩의 우산 시위를 담고 있는데, 당연히도 많은 역사적 모순을 감추고 있다. 게다가 우산혁명이 안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계급적 한계 역시 모른 척 한다.
현재 중국 당국의 강경대응, 일국양제 약속이 폐기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상황은 대다수 홍콩 시민들을 불안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나아가 홍콩 경제가 안고 있던 장기간의 경기침체, 빈부격차도 그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런 불만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모른 척하고, 단순하게 법제의 강화와 강경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홍콩 시민들의 저항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투쟁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는 우산혁명의 실패 이후에 왜 빈곤층은 친중으로 돌아섰고, 중산층만이 반중으로 남아있었는지, '데모시스토'처럼 이 운동을 선두에서 급진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조직들이 갖고 있는 '홍콩내셔널리즘'의 한계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들은 다른 홍콩 좌파들과 달리, 역사적 모순이나 노동 억압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우산혁명 당시 홍콩 시민들이 갖고 있던 본토 출신 중국인 노동자 및 여행객들에 대한 일정한 혐오 정서에 대해서도 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홍콩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진보'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지역주의 및 독립노선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 '절대권력의 억압에 대한 숭고한 저항'처럼 느껴지고, 또 전달되는 것은 어딘가 많은 걸 빼먹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해방과도 거리가 멀다.
그런 역사적 모순들에 대해 사고하지 않으면, 실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에서 좌우 막론하고, 홍콩 시민에 대한 연대의 마음이 하나의 목소리로 뭉개지는 것은 이것이 '순수한 저항'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역사와 정세에 대해 별로 엄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시아 식민지배의 원죄를 안고 있는 영국, 미국 등 서구 강대국들의 위선이 역겹다. 지금의 역사적 모순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됐고, 우리는 그것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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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홍콩에서 150키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 광저우의 평화로움, 즉 이 거대한 단절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또 바깥에 계신 분들은 중국의 야만적인 언론 통제와 공안 통치 때문이라고 아주 쉽게 답변하시겠지만, 제가 보기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가상역사소설을 써 보면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부산(홍콩)과, 제주도(대만)가 광복 후 여전히 일본 통치령으로 남았다 (부산과 제주도 시민 여러분께 제 무례한 상상에 대해 미리 사과를 드립니다). 아니, 제주도는 나중에
우여 곡절끝에 별도의 독립국가가 됐는데 한반도의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엔 여전히 박정희/전두환의 후예들이 이끄는 단일 독재 정부가 유지돼 왔다. 그런데, 일사분란한 국가자본주의 덕에 경제도 꽤 괜찮은 편이다. 일본이 20년전에 부산은 한반도에 돌려줘서 부산과 한반도는 일국양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령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리던 부산시민들이 갈수록 한반도 독재정권의 압력 때문에 부담을 느끼다가,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반도인이 아니라 부산인이다.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돌려달라. 이런 주장을 한다면, 한반도인들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할까요 ? 부산인들이 한반도인들을 증오하면서 (한반도의 독재 정부가 아니라) 우리는 일본인들, 혹은 과거 피플파워를 보여준 필리핀인들, 혹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자들에게 더 큰 연대의식과 공감을 느낀다. 이런 말을 한다면... 저는 한반도인이지만 (유사)자유주의자로서 (저는 자유주의를 꼭 지지하지는 않지만, 내면에 그런 기질이 고착화 돼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듯합니다. ) 그들의 판단을 존중할 겁니다 . 설사 대승적 측면에서, 혹은 역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판단이 그다지 아름답게 들리지 않아도요. 정말로 싫으면 그리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물론 한반도의 독재정부가 그것을 허용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고요. 사실 반도에게 외면 당해온 역사가 길었던 제주도민들이 그런 결정을 한다면, 특히나 그건 존중 받아야 하겠죠. 그런데, 지금 홍콩 사태에 흥분하시는 다른 한국인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지.... 홍콩인들의 정당한 요구는 (권리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대상이지만, 그게 혐중 감정에서 비롯되거나, 단순히 홍콩인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주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한류열광 논리, 혹은 홍콩인들의 독립요구는 압제자에 대한 피압박민의 정당한 요구다라는 맥락을 무시한 판단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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