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3

0907 박충수 하나님의 교회를 자유케 하라!(전문) - 기독교타임즈

하나님의 교회를 자유케 하라!(전문) - 기독교타임즈

하나님의 교회를 자유케 하라!(전문)

기독교타임즈
작성 2009.07.29 22:56

감독회장 선거사태 이후 법원의 감독회장 직무대행 지명으로 감리회는 법정 관리체제하에 놓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법원이 인정한 합의조정안에 따라 감독회장 재선거에 대한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감독회의는 오는 13일에 총회실행부위원회를 열자는 의지를 표명해 앞으로 진행될 감리회 정상화 과정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본지는 기독교윤리학자인 박충구 교수(감신대)가 바라본 감리회 사태의 발생 원인과 해결책 모색을 위한 견해를 7-8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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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평과 비난을 넘어서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라는 표제어를 내 걸고 시작했던 4년제 감독의 실험무대는 감리교회의 고질적인 파당성, 반인권적인 불법과 절차를 무시하는 행태 그리고 비판이 아닌 비난 일색의 경색구조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 표류하고 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한 교단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교회를 섬기기는커녕 한국 감리교회의 전도와 선교를 가로막는 현실로 드러나게 된 것은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주님을 섬기며 한국 감리교회의 위상을 지켜온 무수한 목회자 평신도들에게 참으로 유감스러울 뿐 아니라 통탄스러운 느낌을 남기고 있다. 교회법과 사회법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단 정치가들의 법정시비남발 사태로 인하여 한국 감리교회는 솔로몬의 재판을 견주어 말한다면 어린 생명을 차라리 쪼개 나누자는 무자비한 어미에 볼모 잡힌 듯하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우리들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심”을 경험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감리교회 정치구조가 묵인해 온 죄와 허물과 거짓과 파당성이 이처럼 골고루 드러난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인간의 죄악의 구조보다 훨씬 크고 깊다”는 어거스틴의 명제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제아무리 우리들의 죄가 깊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깊다는 믿음만이 오늘의 감리교회를 진흙탕 속에서 건져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불러오는 데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태도가 있다. 첫째는 불평불만 하는 냉소적 태도다. 사건과 문제를 지적하며 나열은 하는 데 정작 본인은 책임의 구조에서 빠지는 경우다. 불평불만과 원망을 늘어놓으며 사람들을 선동해 놓고 막상 책임적인 변화를 도모할 자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말과 행위가 다른 무책임한 이들이다. 둘째, 상대의 약점과 허물을 낱낱이 드러내며 도덕주의적인 비난을 일삼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과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이들은 저열한 이들이다. 주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이들이 상대편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가지는 습성이다. 이런 행위는 근본적으로 부도덕하며 불신앙적이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이런 행위에 익숙한 이들이 우리 감리교회에서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파당적 집단을 등에 업고 교단정치를 해온 이들이 언제나 감리교회의 교권을 장악해 왔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야말로 교회를 타락시켜온 가장 위험한 집단이요 기독교 선교를 방해하는 내부의 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감리교회의 어지러운 형세는 바로 이런 이들이 교단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벌려온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입장이 있다. 보다 넓은 하나님의 은총을 인정하는 세계관의 지평에서 우리의 허물과 오류를 비판하는 이들이다. 정당한 비판은 오류를 바로잡고 거짓을 버리게 하며, 회개를 통하여 피차에 더불어 진실을 직면하게 하는 나침판이다. 하지만 비난이란 그것이 정치적 목적에 결부될 때 사실판단보다는 정치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감정을 섞어 부풀리고 확대한 추정적 판단을 동원하는 습성을 가진다. 비난자들은 그러므로 간혹 도덕주의적인 논리나 거짓과 거짓증언까지 동원한다. 하지만 진정한 비판을 제기하는 이들은 사실판단에 사유를 근거 짓는다. 사실에 근거한 판단만이 진실한 것이며 공동체의 정당함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독일 본 대학의 신학자 마틴 호네커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판단근거는 반드시 두 가지 위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사실과 성서”다. 진실한 사실에 적합한 판단 그리고 성서에 적합한 판단만이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사실에 근거하여 비판을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공동체라 할지라도 비판담론을 가로막는 행위는 스스로 부패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비신학적인 위선이 된다. 비판담론이 열려있는 공동체는 비판을 통하여 보다 공정하고, 진실하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신앙 공동체로 성숙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판적 사고를 혼란이라고 과장하고, 보다 나은 길을 제안하는 것을 권한침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기초상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뿌리 깊은 오류가 된다.


II. 파당성에 눈이 먼 지도력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선의의 공동체를 가장 위협해 온 악의 힘은 파당성이다. 사탄의 역사는 개인의 범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파당적 판단과 힘을 통해서 전개되어 왔다. 교회 역시 파당성에 의하여 그 존재의 위기를 수없이 맞아왔다. 인간 공동체가 운용해 온 파당성의 기초 공리는 혈연과 지연과 학연 그리고 이와 맞물린 이해관계이다. 우리의 지난 역사가 입증해 주듯, 그리고 근대 한국 정치사가 입증해 주듯 혈연은 부자지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의 가치구조와 맞물려 있고, 혈연을 중심하여 뭉쳐진 관계가 지연이며, 이 위에 학연이 더해지면 매우 강력한 접착력을 발휘해 왔다. 이렇게 뭉쳐진 집단은 집단의 크기에 따라 정비례하는 권력을 생산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기독교적 인간관에 근거하여 “개인은 다소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은 부도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감리교회 안에 기생하는 무수한 정치적 집단은 니버의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 부도덕하다. 이런 부도덕한 집단에 의하여 생산되는 교회 정치가가 도덕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판단은 교회 지도력을 매도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집단은 부도덕한 것일까? 집단의 권력구조가 부도덕할 수 있는 것은 파당적 집단이 가지는 반민주성 때문이다. 파당적 집단의 수장들은 전근대적인 억압적 구조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파당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파 구성원과 타인을 차별하는 데 민첩해야 한다. 즉 자파에게는 관심과 이익을 타파에게는 무관심해야 그 집단의 수장으로서 존재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파당성의 핵심이 아니라 파당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 민주적 절차와 정의와 진실을 압도 하는 계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파당성만 있으면 무능한 이도 지도자로 옹위되고, 아무리 유능한 이라 할지라도 파당성이 없으면 도태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파당성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선한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파당성을 구성하는 논리는 매우 원시적이다. 충성과 복종의 관계를 통하여 그 파당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자가 유능한 구성원으로 이해되고, 이런 자들에게 이해관계의 떡고물을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파당적 판단으로 인하여 무능한 목회자들이 아름다운 교회에 부임하여 그 교회를 황폐화시켰던 사례가 한둘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선거철마다 누군가의 앞잡이가 되어 동분서주하는 이를 보라. 그를 움직이는 것은 장차 권력을 부여잡을 이를 시중들면 그 권력자가 주는 권력의 부스러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도덕한 파당성은 인류사회가 이루어 온 정의와 진실과 민주적 절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민주적 질서란 다양한 가치판단과 이해를 전제한다. 따라서 보다 나은 선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필요로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로를 설득함으로써 보다 합리적인 합의에 이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성숙과 진보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사회의 구성원은 사회적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파당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보다 나은 합의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절차와 과정이 생략된다. 파당성에 소속된 이들은 이미 이익집단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파에 이익이 되는 것은 선이고, 자파에 해가 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악이라고 분류하는 습성에 빠져있다.

그들은 차이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것은 악이나 거짓이나 자신들의 권위를 거부하는 적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수사(修辭)하는 진리와 정의와 자유와 공정함이란 명분상의 표현일 뿐이다. 파당성은 오로지 자파를 강화하고, 자파에게 가장 커다란 이해관계를 불러올 수 있는 정치권력의 형성이 선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파당성은 궁극적으로 감리교회 구성원 전체의 민의를 배반하고, 보다 나은 성숙을 가로막게 되기 때문에 이에 위배될 수밖에 없다. 소심한 자들은 파당성이 강한 수장의 그늘 아래 서 있을 경우 신분과 자리가 보장되는 안전을 직감하다. 가끔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의 결과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파당성의 위험은 파당성이 사탄의 도구가 되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망신주고, 파괴하며, 선교의 길을 가로막는 데 있다. 오늘의 감리교회를 보라. 오늘의 감리교회는 사람들의 신뢰와 믿음의 대상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감리교회 구성원들조차도 수치와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가? 결국 오늘의 감리교회의 현주소는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한 한국 교회의 한 실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 구성원 각자가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입으로는 진리와 사랑과 정의를 외쳐왔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런 능력이 고갈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들끼리 상대를 불리하게 하기 위한 전략전술로서 사회법을 이용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벌리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는 까닭이다. 과연 이런 이들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요 영혼의 교사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은 파당적 정치로도 모자라서 교회의 자율적 능력을 훼손하더니 이제는 사회법에 제 편을 들어달라는 판단을 구하고 있는 가난한 영혼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일 년간 감리교회 안에 있는 파당성은 무수한 죄와 악을 범하면서도 그것을 진실로, 정직으로, 그리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후안무치한 역사를 초래해 왔다. 누가보아도 상대에게 불리하게 법을 만들고, 교회의 법과 절차를 무시할 뿐 아니라 언어적 물리적 폭력까지 동원하는 자리가 될 정도로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켰다. 이것이 어느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나는 이런 모든 일이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거룩함에서 떠난 파당적 집단의 본질, 부도덕성의 표현일 뿐이다. 그 결과 이제는 교회의 젊은이들조차 감리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예의와 존경과 신뢰를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 주님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 아니라 저들은 파당적 권력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일소(一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파당성을 등에 업고 이합집단하면서 서로간의 이해관계를 주고받기로 합의하는 내용이 우리 감리교회를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위태롭게 만들어 온 것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III. 교회법을 부정하는 파당성

감리교회 정치의 파당성을 가장 노골화한 객관적 표현을 나는 감리교회의 교리장정에서 읽는다. 감리교회의 부도덕한 파당성은 교회 정치의 핵심인 감독 선거에 그 초점이 모아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파당자들은 어느 법이 자파의 수장을 모시기에 적합한 것인지 파당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년제 감독이 2년제 단임 감독제로 바뀐 것은 누가 보아도 나누어먹기 식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어느 감리교회가 감독을 2년제 감독으로 선출하고 단임제로 규정하는 데가 있는가? 2년제 단기 감독 제도는 교단정책과 운용에 있어서 지속성과 교단 선교의 장기비젼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는 바 감리교회의 본원지인 영국감리교회는 권위주의적인 감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연합감리교회는 감독을 뽑되 종신제 감독으로 선출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2년제 단임 감독을 선호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교회 지도력의 항구성과 정당성을 우리 스스로 믿지 못하고 부정해 왔기 때문이다. 감독으로 선임된 이들이 감리교회의 신학과 유산을 지키고, 교회를 돌보아야 한다는 감리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파당적 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피차에 노골적으로 인정한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4년제 감독제로 법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은 또다시 2년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 반대의 주요 논리는 결국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파당적 지도자가 4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합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4년제 감독이 파당적일 경우 그 폐해가 더욱 극심하기 때문에 그 임기를 단축시켜서 권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파당성의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2년제 감독제도안에서의 파당성은 이제 어떻게 자리를 잡을 것인가? 감리교회 의회 정치는 증발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보다 사분오열된 교회정치의 파당성안에 갇혀진 것이 본질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그 많은 감리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정작 파당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앙적 결단과 양심을 가지고 판단할 지성적, 도덕적, 영적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많은 이들이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를 막론하고 파당적 정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교회의 각종 지도자로 피선되기도 어렵고, 그 직을 수행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이런 현실을 아는 이들은 이 현실에 순응하여 강한 파당성을 가진 이들을 선출해야 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정작 스스로 질문해야 할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능력은 막상막하 그 떡이나 이 떡이나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노골적인 파당성이 도덕적이며 영적인 판단을 압도하게 된 것이 오늘의 감리교회의 현주소다. 이렇게 되면 보다 나은 교회를 위한 변화와 갱신이란 선거를 위한 허구적 표현일 뿐 진정한 개혁을 위한 비판담론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비판담론이 재갈 물려지게 되면 모든 의회 제도를 지배하는 파당성의 정치가 불러오는 교회법 부정현상이 만연해 진다는 것이다. 감리교회의 법은 일종의 교회법으로서 신앙 공동체의 교리와 교회의 존립을 지키기 위한 자치법이다. 크게 보아 감리교회의 장정은 교회 조직을 규정하는 법과 교회의 존립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규범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 헌법과 선거법 그리고 재판법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법은 합리적 토론을 통해 감리교회의 민의를 수렴하는 각종 의회제도에 맡겨져 있다. 그런데 감리교회의 법에 의한 자치능력이 파당적 교회 정치에 볼모잡혀 버린 셈이다. 파당적 권력은 자파 구성원들에게는 제아무리 부도덕해도 결코 해를 끼치지 않으며, 파당적 거래를 통하여 교회 규칙 적용의 원칙을 부정하기도 한다. 교회법에 의하여 범법행위를 한 사실이 명료하게 드러나도, 파당성에 사로잡힌 교회의 권위자들은 이를 치리할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들은 파당적 권력간의 거래를 통하여 모든 의회 제도를 뛰어넘는 야합과 밀약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치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란 그저 파당성의 구조에 속하지 못한 어설픈 약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파당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정의와 공평이 사라지고 무자비한 폭력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도 행사된다. 파당성을 등에 업고 교단 정치를 하는 이들이 내리는 판단에서 이해관계가 나누어지고, 관심과 무관심의 영역이 나누어지고, 자리다툼의 우열성이 나누어질 때 필연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파당적인 인사들은 정의와 공정함에 관한 신앙적 물음을 파당성안에서 굴절시키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공정함에 의하여 고통을 겪는 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불의하지만 하나의 현실적인 공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를 하나의 공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교회의 일치와 거룩함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IV. 교회법을 부정한 지도자들

그렇다면 이번 감독선거의 최대 쟁점을 분석해 보자. 많은 이들이 교회법과 실정법(사회법)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혼란을 느끼고 있다. 우선 오늘날 교회법은 지난 중세와는 달리 민, 형사적 강제력이 결여되어 있다. 교회법은 오직 교회의 교리와 직제를 보존하고 교회 내 질서를 자치하기 위한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교회법은 우리나라 헌법과 실정법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칼바르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국법 아래 있으면서 동시에 교회 구성원으로서 교회법의 저촉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법에 교회가 호소할 경우 국가의 법은 일단 교회의 자치법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한계 안에서 판단을 내릴 뿐이다. 다만 그 판단의 적법성과 타당성은 3심 제도를 통한 절차 속에서 일회적 판단에 전적인 무게를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법원의 최종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다툼의 당사자인 양자(兩者)가 법정의 판단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1심 판단이나 2심 판단의 유효성은 유보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툼이 종료되지 않을 경우 법원의 1심 그리고 2심 판단은 잠정적 판단일 수밖에 없다. 이런 잠정적 판단의 성격으로 인해 우리는 사안에 대한 법원의 최종적인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번 감독 선거 후 교회법과 사회법 파장이 일어난 소이를 살핀다면 이는 결국 교회법을 제대로 준수 했는가 못했는가의 문제가 사회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 것인데 이런 법적 다툼이 생긴 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의 지도력이 교회 자치법의 자율성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증거가 되거나, 무능하여 이를 포기한 경우를 의미한다. 더구나 사회법의 판단 주체인 판사의 소양과 교회법에 대한 인식의 정도, 그리고 종교와 정치의 야합구조에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정황을 참작할 경우 세상의 법정에서 내린 판단을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보다, 교회 의회의 판단보다 더욱 신봉하여 우위의 선이라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반(反)교회적이며, 불신앙이고, 심지어 어리석은 일이다. 더구나 교회법의 자구(字句)들에는 매우 애매한 표현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회법의 1심 혹은 2심 판단의 적절성은 대법원 판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감리교회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파당적 판단을 강화함으로써 교회법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힘의 대립을 초래한 결과다. 법정 시비를 벌린 이들은 사회법이라는 힘을 불러들인 것이고, 감리교회의 다양한 의회제도의 기능과 역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평소의 습성을 보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사회법에 대한 법정 시비는 수년에 걸친 지루한 법정논란을 불러올 뿐이며 이 기간 중 교회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거나 박제화 될 수 있다. 따라서 교리나 교회직제 혹은 선거에 관한 사회 법정 시비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벌려서는 안 되는 법정 게임이다. 평화주의를 신앙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퀘이커들은 사회법정에 호소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법정에 호소하는 행위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은 감리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들이 벌리는 법정시비에 감리교회의 전 구성원이 볼모로 잡힌 모양이 되고 말았다. 사회법 시비 그것은 파당성에 볼모잡힌 교회정치의 무능이 불러올 결과일 뿐 감리교회와 모든 구성원을 위하여 아무런 실익(實益)이 없다. 솔로몬의 재판에는 자비로운 어머니가 등장했건만, 우리 감리교회에는 과연 무자비한 아버지들만 있는 것인가?


V. 감독회장선거법의 위헌성

교회법은 만능이 아니다. 교회가 국가의 보호아래 있듯이 교회법은 사회법의 감독과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교회법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경우 교회법을 이유로 그 법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시하여 모든 민주국가의 헌법은 국가권력의 소재를 국민들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위법하거나 위헌사항으로 규정하고 이를 법으로 다스리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법도 모든 권위와 권력의 소재를 의회 제도를 통한 합의에 근거를 둔, 교회법에 규정된 민주적 절차에 두고 있다. 따라서 교회법은 교회 구성원의 인권을 침해하는 규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교회 법의 실질적 내용과 그 법을 제정한 법리적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능력이 결여될 때 교회 지도자들이 간혹 법리에 어긋난 상식 밖의 판단을 옹호하는 실수를 범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망신시키게 된다.

비록 다수결의 합의를 얻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여도 민주사회에서는 민주적 원칙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예컨대 국회에서 어떤 법을 여야(與野)가 합의하여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하여도 그 법이 헌법에 위배될 경우 위헌적인 것이 되어 그 법의 유효성과 타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법은 사회에서 최소의 규범을 규정하고 있지만, 종교 공동체는 종교적 이상을 담고 있어서 높은 신앙과 양심에서 우러난 덕과 영적 가치들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교회법은 더 높은 인권옹호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법은 헌법과 실정법에 상위할 도덕적 당위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만일 교회법 자체가 다른 이의 인권을 침해하고 훼손할 수 있는 조항들을 두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교회의 법이 인간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정신에 하위할 경우 교회법은 사회법의 저촉을 받고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교회법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일반 상식을 파괴하게 되어 그 반인권성으로 인해 온 사회의 지탄과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서울 YMCA가 여성참정권을 부정하는 규정을 옹호하다가 세계 YMCA연맹으로부터 강제 탈퇴를 당한 수치를 당했다. 이런 수치를 당해도 파당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특권을 옹호하는 후안무치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런 부끄러운 결정의 주도자들이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YMCA이사들이 인류가 이루어온 평등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거부한 것은 다름 아닌 당파적 판단에 그들이 몸을 던진 까닭이다. 남성중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졸렬한 판단이라는 점에서 온 사회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에는 몇 가지 위헌적 조항들이 담겨있다.

그 첫째는 부부목회 금지 조항이다. 이 조항은 결혼한 신분이나 관계를 빌미로 하여 부부의 공동 목회 가능성을 부정한 평등권 침해 조항이다. 비록 입법총회에서 대다수인 남성총대들이 부부목회의 부정적 측면을 그르다 여기고 이에 합의했다 할지라도 부부의 공동 목회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은 부부 이전에 목회자로서 개인의 인격과 소명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합리적 판단의 결과라고 볼 수 없다. 구세군의 경우 그들은 기본적으로 성서적 전례를 들어 부부목회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부부목회 금지 조항이 어떻게 성서적 전통과 감리교 전통 그리고 현대 인권사상에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 입법의회 총대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했던 것이 아닐까? 둘째는 감독회장 후보 자격에 대한 소급입법 문제다. 현 교리와 장정이 명시하고 있는 감독회장의 입후보 자격에서 25년간 무흠해야 한다는 조항을 만들고 이를 사회법에서 약식 기소되어 벌금을 선고받은 것까지 포함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까지 소급하여 그 자격의 유무를 판단하겠다는 졸렬한 소급입법적 사고의 결과다. 과연 이러한 법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한 조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급입법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면 그 경우는 오직 그 법을 제정하는 정신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경우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소급입법이 어느 누군가의 자격과 신분을 제한할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질 경우 이는 법적다툼의 소지가 있고, 위헌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소급입법은 교회가 이용할 법정신이 아니다. 흠이 없는 이를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러한 소급입법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할지라도 나는 이런 법은 이미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비록 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있을지라도 선거권자들이 공동체의 대표를 선출하기 위하여 선관위가 입후보자의 전과사실을 나열하고 밝히는 것은 투표에 앞서 후보자들의 진면목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다소 공익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사회법에 저촉된 범과가 그 법에 의하여 징계 효과가 오래 전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법이 그 죽은 효과를 다시 살려내어 교회 안에서 한 개인의 사회권, 참정권, 피선거권을 영구히 제한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우리 헌법은 제13조 1·2항에서 ‘① 모든 국민은 행위 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訴追)되지 아니하며…, ②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 또는 재산권의 박탈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은 행위 당시의 법에 의하여 형법이 적용된다는 죄형법정주의의 의미와 상관되는 법적 원리로서 25년 전의 행위를 빌미로 신분을 제약하기 위하여 오늘 법을 만들어 특정인의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제한한다든지 혹은 재산권을 박탈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보다 도덕적인 감독회장을 뽑겠다는 취지를 가졌다는 궁색한 변명을 할지라도 25년 전의 행위까지 소급하여 신분을 제한하고 개인의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법리적 타당성이 없는 일이다. 교회법이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교회 구성원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이 차별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

교회가 지켜야 할 법은 사랑과 용서에 근거한 거룩한 법이다. 사람을 차별하는 법을 만들어 두고 이를 소수의 약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정치적인 파당성이나 인권감수성이 무디어진 집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사회나 심지어 사법영리단체인 회사에서도 차별금지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 데, 어찌 교회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보편적인 인권옹호의 정신을 훼손할 수 있는가? 전과가 있거나 허물이 있는 이들을 영원히 구제불능의 사람으로 낙인찍는 행위는 복음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거늘 어찌 감리교회가 이런 법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에 부끄러움을 자초하는지 마음이 참으로 무겁다.

VI. 교회지도자의 권위남용의 문제

국가를 비롯하여 한 집단의 수뇌로 피선된 이들은 당연히 법적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감리교회의 수장이 되는 감독이나 감독회장은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한 공동체의 대표나 지도자로 선임된 이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특권처럼 오용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행사하는 권위가 어떤 권위인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인류 역사가 증언하는 권위는 다양했다. 세속적인 권위를 비하하며 성직의 권위를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높였던 중세의 교권은 명시적으로 추락했다. 개신교 전통은 그러한 신적 권위를 옹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권위에 저항하고 부단한 개혁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위의 소재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감리교회와 교인들을 섬기라고 부여된 권위다. 간혹 시대 착오성에 빠진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에 비하여 한없이 보잘것없는 인간의 일회적인 생명에 온갖 특권과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영혼을 파는 이들도 있다. 상속적 권위란 중세시대의 귀족들이나 행세하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권위는 민주적 권위다. 어떤 이는 교회와 신앙의 세계가 주장하는 진리는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며 신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만의 지위와 사고만이 신적이며 신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릇된 이들이다. 기독교 신앙의 신본주의는 인간들 집단 안에서는 모든 개인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민주적 의식의 기초가 되는 법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 특히 개신교적 사고에는 성자(聖者)란 없다.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신본적인 교회 구조와 성직자 우월주의를 옹호하고 있어 성직자들이 교도(敎道)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개신교회는 성직자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우월성을 강조해 온 가톨릭의 교도권을 교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틴 루터의 그 유명한 명제,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는 교설이 인간 본성의 깊이를 통찰하는 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구태여 개신교회라는 것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신교의 인간론은 영웅이나 도덕적인 우수한 종자를 찾지 않는다. 그런 논리는 성서의 인간론에 위배된다. 오직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 앞에 존재할 뿐이다.”

교회의 수장이 되고 감독이 되면 그 본성이 변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큰 유혹에 직면한다. 오랜 기간 진실함을 찾아온 깊은 영적인 내공이 없다면 그들의 자색 옷은 위선과 탐욕의 기회를 확대할 뿐이다. 목사가 평신도보다 우월하지 않고, 감리사와 감독이 일반 목회자에 비하여 우월하지 않으며, 남성 목회자가 여성 목회자보다 더 질이 좋은 종자인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죄인으로서 복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직무가 다르고 주어진 권위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주어진 권위는 오직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데 그 존재이유가 있다. 그런데 파당적 지도자는 이 권위를 주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파를 위한 것으로 삼아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므로 파당성이 불러오는 편협함은 보편적 진리를 거부하게 되어 있고, 정의와 진실과 공평함과 공정함을 쫒기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이미 공정한 룰을 버리고 파당성에 몸을 던진 이들이 어찌 공정과 공평을 외칠 수 있을까?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고 복음에 대하여 깊은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남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뿌리고, 조직을 움직이는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뽑히는 한 교회법의 높은 정신이 존중될 리가 없다. 교회법에 의한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법은 은연중 버려질 수밖에 없다. 교회법이 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버려지면 교회는 불법이 판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 감리교회의 법적 무능이 세속 재판정에 걸려있지 아니한가?

이렇게 되면 법은 있으나 권력을 가진 집단에 의하여 무시되고,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인식될 수 있는 기반이 부정당할 뿐 아니라 진실과 정의를 이행하는 속도가 늦어지거나 방임된다. 파당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교회의 선교를 위한 신앙적 의무와 책무를 이행하라고 주어진 직무와 권위를 자파의 영달과 이익을 위하여 남용한다. 국가라면 국력의 낭비라 할 것이지만 교회이므로 거룩한 교회의 능력을 헛되이 소모하는 것이다. 이들은 교회가 헌금하여 보낸 공금을 자신의 쌈짓돈을 쓰듯 남용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벨사살의 길을 가고 있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판공비가 개인적 판단에 따라 한없이 낭비되도록 구조화 되어 있다는 점은 참으로 전근대적이며 반민주적이다. 그러므로 사용(私用)할 수 있도록 방임되어 있는 이런 저런 판공비야말로 또 하나의 반민주적인 특권과 권위의 남용구조라 아니할 수 없다. 권력의 주변인들은 이런 판공비를 자꾸 확대하려 든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물질적 특권을 보장하고 이 특권구조에서 자신들의 잔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독일의 교단장이나 학교장은 개인적인 용도로 공금을 사용할 수 없다. 하다못해 자신의 개인적인 용무로 해외에 전화를 걸어도 공과 사를 구별하도록 요구받는다. 미국연합감리교회의 목사들은 이런 원칙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은 일단 권력을 잡으면 공과 사의 간격을 애써 못 본 체 한다. 그러니 자신의 권위를 행사함에 있어서 사견과 공적 견해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업무추진비, 개인 판공비, 특별 판공비 명목을 만들어 공금을 개인적 판단과 요구에 따라 물같이 쓰는 것이다. 이런 물질적 특권을 향유하는 습성에 물든 이들은 결국 영혼에 깊은 병이 들 수밖에 없다. 구시대 왕족들이 누리던 특권을 현대 사회에서 이어받고 있는 모양이니 어지간이 양심적인 인사가 아닌 한 이 특권의 유혹에서 벗어날 자 누구겠는가? 무엇이 공의로운 것인지에 대하여 신념을 가지지 못한 심약한 이들은 이를 부러워하고 장차 그런 특권을 가질 수 있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미국인 교회에 초청되어 설교를 부탁받은 적이 있다. 어느 주일 폭우가 쏟아지는 길을 뚫고 처음 가는 교회를 한 시간 여 헤매다가 간신히 교회를 찾아 설교를 마치고 받은 사례비는 50불이었다. 마음에 적잖은 실망을 했지만 그 교회가 누구에게나 그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담임 목사의 설명을 듣고서 오히려 실망한 자신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 미국교회의 감독들이나 감리사들이 교회의 치리를 위하여 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는 사례비나 교통비를 준비하지 않는다. 논리는 간단하다. 감리사는 감리사 봉급을, 감독은 감독의 봉급을 받고 있으므로 설교를 하러 오가는 것은 그의 직무의 연장이기 때문에 별도의 사례비를 받거나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감독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감리사이기 때문에 조금은 더 신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대접하려 한다. 감독과 감리사의 직무가 공적인 봉사인가 아니면 사적인 봉사인가 우리는 물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일반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습성이 교회의 민주적 절차와 공적 직무의 한계를 소홀히 인식하게 한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민주적 권위는 공과 사를 구별하고, 주어진 권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못하도록 감독과 감시를 받는 원칙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의 판공비가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대하여 우리는 형식적인 감사만 할 뿐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어진 목사의 권위와 특권을 사사롭게 행사하는 이들은 직무를 남용을 하는 이들이다. 이런 행위를 방임하는 한 특권의 오용은 증가할 것이고, 그 특권을 둘러싼 싸움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이들이 교단 정치를 위하여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VII. 감독선거를 전후한 절차의 문제

이제는 해가 바뀐 감독선거 현장으로 돌아가 우리가 얼마나 절차를 존중했는지에 대하여 비판적인 이해를 해 보자. 감독선거 당일 연회마다 혼란이 일어났다. 한 후보자가 자격이 없다는 대자보가 붙어 있는 곳도 있고, 어느 투표소에서는 그런 대자보를 누군가가 제거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법원의 판결문이 투표 당일을 앞두고 나왔다는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자격박탈이 이루어지지 않은 모 후보의 자격사항이 다른 후보의 법정시비로 박탈되었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를 감독회장이 선관위에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으나 선관위는 이를 무시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감독회장은 선관위의 고유 업무에 직권으로 개입하여 모후보의 자격을 박탈했을 뿐 아니라, 모 후보에게 투표한 절대 다수의 표를 死票(사표)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장정에도 없는 논리를 만들어 차점자를 감독회장 당선자라고 선언했다. 그런가하면 감독회장에 의하여 임명된 선관위위원장은 감독회장의 직권에 의하여 불신임되었다고 했으나 감독회장의 선관위 업무 개입을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모후보의 다수 득표를 유효한 것으로 선언하고 모후보가 감독회장이 되었다고 공표하였다. 이로서 감리교회는 두 감독회장이 출현하여 혼란이 촉발되었다.

이 일을 두고 모 후보의 자격시비를 중대한 사안으로 보는 견해와 다수표를 사표화한 감독회장의 권위가 얼마나 민주적인 절차를 거쳤는지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다. 이 와중에 감독회장 측에서 인정한 갑후보와 선관위에서 인정한 을후보가 서로 정당한 감독회장이라고 주장하며 한 후보측에서 교단 본부를 물리적으로 점거하는 극한 대립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여기서 감독회장은 어느 편에 선 것일까? 교회의 법적 치리를 바르게 하려는 의중을 가졌을까 아니면 을후보를 버리고 갑후보를 선택한 것일까? 적어도 교회의 치리를 담당한 감독회장이라면 제아무리 사법부의 판단이라 할지라도 일심 판단 자체에 감리교회의 운명을 거는 일은 경솔한 일이거나 적어도 파당적 결정이었다는 의혹을 벗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주변의 율사들조차 파당적 판단을 옹호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법원의 일심 판단이 교회법의 구조와 특성을 압도하게 만든다면 이 순간 감독회장에 의하여 교회법은 버려진 것과 다름이 없다. 게다가 을후보의 인격과 성품에 대한 항간의 비판이 파다하고, 학연이나 지연이 달라 견해가 다른 이들도 있을지라도 감독회장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사회법 수용에 있어서 신중했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감독회장이 선거기간에 선관위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선관위를 대행할 이들을 새로 임명하는 것이 적법한 절차였을까? 그 순간이 지나가면 불법적인 것이 합법적인 것으로 화학반응이라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왜 감독회장은 감리교회의 의회제도와 그 무수한 결정기관의 합리적 판단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일까? 선거 순간이 지나가면 부당함을 바로잡을 수 없는 현실적인 세력이 구성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 때문일까? 나는 여기서 파당성에 피차 물든 정신을 가진 이들이 가진 교회 법치적 신념의 증발을 본다. 나는 이들에게서 합리적으로는 불법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읽고 감리교 내부에서 일어난 교회 법치의 부재를 본다. 법치보다는 권모술수가 유효하다고 본 것일까?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파당적 정치에 익숙한 이들은 일단 사건이 지나가면 힘의 정치만 남아 파당적 힘이 정의와 진실을 재갈 물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고에 익숙하다. 그러므로 매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선관위의 기능을 파기하고 긴급조치를 내린 것이다. 그 당시 감독회장은 만의 하나 선관위가 불법을 행했을 경우 이를 절차적인 합리성을 통하여 바로 잡을 능력이나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이런 개인의 직권개입 행위는 감독회장에게 주어진 권위 행사의 바른 방법이 아니다. 감독회장에게 주어진 권한은 교회법의 수호에 있고, 교회법이 규정하는 각종 의회의 기능을 통해 교회의 법치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면 그는 감독회장직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감독회장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회장은 교회를 위하여 오직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법원은 감독회장이 대행으로 긴급 구성한 선관위에 의하여 감독회장으로 선출되었다고 공표한 갑후보의 감독직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온 감리교회가 기대를 걸고 4년제 감독으로 선임되었던 한 교회의 수장으로서 크나큰 역사적 오류를 남긴 셈이다. 같은 공리(사회법)를 가지고 상대를 침묵시켰는데, 그 공리가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부정한 것이다. 이 책임을 이제 그가 어떻게 질 것인가? 그런데도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리를 파당적인 비난이라고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절대 다수의 총대 표를 死票(사표)화시킨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1심 법원의 판단에 따라서 교회의 질서를 파기하고 법원의 종복이 된 결과 무수한 총대들의 표를 사표로 만들었다면, 그 감독회장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직무를 가진 것인가? 법원의 판단에 충실하게 복종하여 갑후보의 감독회장직 조차 보존되지 않고 상실되거나 유보되었다면 이는 결국 감리교회의 감독선거 표 모두가 사표(死票)처리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나는 이 점에서 이번 선거는 매우 잘못된 소수자의 판단에 의하여 엄청난 재난을 초래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파당성의 보호막아래 있는 이들은 공동체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서도 무사할 수 있다. 파당성의 전사로 추앙되기 때문에 그를 파당성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만일 선관위가 장정에 따라 감독회장 자격심사를 정확하게 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면, 그리하여 감독회장이 그릇 선출되었다면 과연 감리교회는 이런 오류를 바로잡을 의회적 역량이 없다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절대다수의 표를 획득한 을후보를 추대하는 총대들을 의식하는 한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절차와 과정보다는 권모술수를 택하고 주어진 권위를 남용하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감리교회의 수장으로서는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경우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도 위헌적 행위를 했을 경우 탄핵대에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우리들이 아닌가? 상대편의 자격이 문제가 된다면 왜 그것을 감독회장이 개입하여 막아야 했는가? 과연 감독회장은 그런 긴급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권위가 부여된 사람일까? 나는 이런 비민주적인 권위행사의 본질을 인정할 수 없다.

감독회장 선거를 앞두고 감리교회 안에 을후보를 비난하는 비공식적인 고발문건들이 파다하게 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을후보가 절대다수의 표를 얻었다면 비록 자파의 사람들이 을후보에 강한 반대의지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감독회장은 민의를 존중하는 방향을 선택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감독회장 스스로 바로 그 총회의 총대들 표를 받고 감독회장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의무를 가져야 했다. 비록 을후보가 다양한 전력이 있다 할지라도 선관위는 공식적으로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무수한 비난 여론이 있었을지라도 총대들이 그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자신들의 도덕적 파단에 반해 그 많은 총대들을 싸잡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민주적인 견해라 볼 수 없다. 또한 을후보는 종신직이 아니라 민의에 따라 선택되어 4년 단임제 감독회장이라는 직무를 수행해야 할 책무를 가질 뿐이다. 심지어 그가 흠과가 있다고 하여 소급 입법한 법을 앞 세위 올가미를 만든 것은 법정신과 인권이해에 무리가 있는 것이다. 감리교회의 혼란은 이렇듯 소급하여 법을 입법한 그 시점부터 불행의 씨앗이 뿌려져 있던 것이라고 나는 본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코 영웅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간에 죄를 향한 경향성을 인식하고 서로 서로 선의의 비판을 제기하며 견제하면서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는 절대 권력의 형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리교회의 교회정치의 습성은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는 권위의 오용을 옹호하는 파당적 구습에 찌들어 있다. 이 파당성이 감리교회를 유린해 왔고, 감리교회를 망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파당성을 쫒는 이들이 권력 장악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엇이 교회를 지키는 것인가? 그 답은 매우 단순하다. 사상과 신념도 없이 개인적 권력욕을 앞세우는 이들을 지도자로 세우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아마도 이 길은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야 하는 멀고 먼 길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이 길을 가야 한다. 사상과 신념이 결여된 인사를 교단의 대표자로 세우면 그 주변인들이 기득권을 나누기 쉽고, 파당성이 짙은 인사를 대표자로 세우면 파당자들의 이익이 증대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모욕하며 비하하는 파당성에 눈이 먼 이들이 존재하는 한 교회 지도력은 혼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VIII. 법정관리에 들어간 감리교회

법원이 결정한 임시방편으로 현재 감리교회의 총대들이 뽑지 않은 대행자가 그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임시 대행자는 민의에 의하여 선출된 민주적인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한 교단의 헌법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모아야 한다. 임시 대행이란 영어로 말한다면 “interim authority”다. 옛것은 가고 아직 새것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 그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임시대행의 직무는 과거를 반복하려 하거나 혹은 새 것이 되려하거나 이를 대치하라는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임시대행체제는 대내외적인 교단적 정상 기능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과정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행 체제가 짧으면 짧을수록 혼란과 행정 공백이 덜할 것이다. 임시대행 체제가 오래 갈수록 정상적인 교단의 업무가 지체될 것이므로 감리교회가 더욱 더 표류할 수밖에 없다.

소수자의 표를 유효표로 인정하여 무리한 절차에 의하여 인정을 받아 부분적 감독회장이 되었던 이는 반드시 민의를 되물을 자신을 가져야 하고, 다수자의 지지를 받았으나 불합리한 교회법을 주장하는 소리에 부정당하여 역시 부분적으로 감독회장이 된 이는 법적 절차를 통하여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난 일 년 동안 두 후보는 감리교회의 헌법적 절차와 과정을 버리고 상대를 법적 위하력을 이용하여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정시비를 벌림으로써 감리교회의 자치능력을 스스로 부정해 온 과오를 가지게 되었다. 교회의 자치능력에 호소하지 않고 여전히 법정시비를 벌리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회의 권위와 자율성을 지킬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매우 단순한 논리이지만 나는 감리교회를 이리도 병들게 한 사탄의 책략은 우리 안에 있는 뿌리 깊은 파당성을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탄의 종이 아닌 우리는 이제 파당성에서 자유한 겸비한 주의 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감리교회를 병들게 해 온 혈연, 지연, 학연의 파당성에 몸을 담는 이들을 서로 경계하고 서로 권면하여 편협한 파당성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파당성은 정의와 공평과 진실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고, 민주사회 안에서 개인의 자유와 양심과 존엄함을 박탈하고 파당적 가치의 노예로 전락시켜왔기 때문이다. 감리교회의 지도자들이 파당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자유로울 수 없다. 대다수의 목사와 장로들이 우리 안에 있는 뿌리 깊은 파당성의 유혹을 버리지 못한다면 감리교회의 변혁은 불가능하다. 감리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파당성을 버릴 때에만 비로소 정의와 공평과 진리의 정신이 감리교회를 강하고 견고하게 바로 세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006년 나는 대만의 한 시장(市長)의 초청을 받아 “쟈이 시(市)”의 의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쟈이 의회 의원들의 선서문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보았다: “나는 나의 친척이나 친구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 “혈연, 인연, 지연에 얽혀 일하던 관습을 끊겠다는 선언이다. 이런 선언이 왜 필요했을까? 필리핀 유니온 신학대학 도서관에 담긴 학생들의 선언문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우리 학문 공동체에서 나의 동료를 구설수에 올리지 않는다.“ 동료의 인격과 성품을 비하하는 생활태도를 버리자는 학생들의 합의이다. 이런 합의는 그릇된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게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는 희망의 등대가 되기 위하여 우리 감리교회의 모든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정신력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옛것을 보내고 새것이 오는 하나님의 미래는 과연 어떤 사유와 판단을 통하여 열리는 것일까?

IX. 대안적 사고와 실천가능성

기존의 감리교회 체제의 무능은 그동안 드러난 비인격적인 폭력성을 초래했고, 감리교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등 혼란을 가중시켰다. 누가 이런 현실에 대하여 도덕적이고 영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누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가? 급진적인 개혁적인 의식을 가진 이들은 한결같이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그 기능을 혁명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혁총회 혹은 입법총회라는 방법을 요구하는 입장이다.

또 다른 견해는 총회의 성격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총회를 구성하는 기존의 총대들에게 더 이상 신뢰를 보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 구조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논리에 동의한다. 그 주장은 옳다. 모든 감리교회 구성원들이 교단정치 구조의 변혁과 변화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사회에 존재하는 교회로서 이런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지킬 수 있는지 어려움을 느낀다. 군대와 경찰과 같은 합법적인 폭력구조를 두고 있지 않은 교회에서는 구테타적인 헌법정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면 누가 나서서 감리교 기존의 의회 제도를 파기하거나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인가? 떼를 쓸 것인가? 아니면 기존 세력을 향하여 비난과 모욕을 던짐으로써 뜻을 관철시킬 것인가? 이런 방법은 기존 총대나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 방식 자체가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이다. 따라서 합리적 실천 가능성은 없다.

같은 목표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경우가 있다면 모든 총대들이 오늘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총대들의 자격을 무시하고 새로 총대를 구성하는 방식도 감리교 교회법상 절차적 문제가 있다. 또한 새로운 총대를 구성을 하는 과정에 고질적인 파당성이 개입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다. 파당성에서 벗어난 이들로 총대들이 구성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온갖 도덕주의적인 비난을 던지면서 개혁 총회를 요구한다 하여도 정작 합법적인 투표권을 가진 이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문제 해결의 길을 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의 감리교 사태에 대하여 변화를 도모하는 이들이 전원 나서서 서로 서로 파당성을 버리고 모든 기존의 총대들을 설득하는 방법이 가장 민주적이며 절차상의 하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워싱톤이나 유엔에서 무수한 로비스트들이 활동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방법이다. 그러나 개혁 의지를 가진 이들이 스스로 파당성을 구성하는 일은 반대다. 그들의 도덕적 정당성이 의심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문제에 대하여 비판은 제기하되 현재의 의회 제도와 총대들을 더 이상 비난하거나, 모욕하지 말고 신앙과 민주적 관점에서 진지한 비판을 제기함으로써 오늘의 사태를 불러온 책임 앞에 신앙을 가지고 설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에 의하여 합리적인 결정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법만이 감리교회를 위하여 공동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공동의 미래를 열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의 악습을 폐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과 법안도 논의되어야 한다. 참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하여 나로서는 다음과 같은 5대 과제를 제시하고 싶다. 한국 감리교회의 영성이 민주적 틀 위에서 성숙하기 위하여 긴급히 요구되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전근대적인 요소를 해체하는 길로서 탈파당화, 탈서열화, 탈특권화를 통한 교단정치의 민주화와 투명성을 담보하는 길이다.

이를 풀어 제안한다면 첫째, 교회의 대의(代議)성에 있어서 민주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반민주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연장 서열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총대 구성은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 파당적 총대 구성의 가능성도 근본적으로 막아야 한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처럼 매 2년마다 대표들을 순환시킬 수 있도록 연차적인 대표를 3조 선정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이들이 교회 정치에 탈서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감독선거에 제비뽑기를 도입하는 것은 다소 무책임할 수 있으므로 나는 반대한다. 그러나 총대들을 3반으로 나누어 제비뽑기로 뽑은 것은 가능할 것이다.

둘째, 정직과 청렴함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따라서 눈먼 돈으로 그릇된 교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용될 수 있는 판공비는 최대한 삭감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개교회와 교단의 모든 예산은 구체적으로 공개되어야 한다. 한 편으로는 교회 지도자의 경제적 특권을 약화시키되 다른 편으로는 합리적인 결정과정을 통하여 예산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교회의 기능을 원활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당파성 있는 인사가 교단장이 되어 자파 기용을 위한 권력 남용, 인사권 남용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를 근본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이런 비민주적인 인사권 남용을 차단하기 위하여 최소의 기능을 위한 인사권을 제외한 교단장 인사 특권을 폐기해야 한다. 교단장이 바뀔 때마다 임직원들의 신분이 공공연하게 위협받는다면 교단을 위하여 일하는 임직원들이 어떻게 감독 후보자들을 개관적인 눈으로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넷째, 공교회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교회의 매도 매수 관행, 불처럼 번지는 변칙적 교권 세습 관행을 합리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 세워져야 한다. 또한 세습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들어 부자간의 건실한 목회나 교회의 진지한 합의조차 묵살하려는 논리도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모든 교회와 교단의 회의록은 최대한 공개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무책임하고 비성서적인 행위를 한 이들에 대한 치리가 파당성을 넘어 현실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파당성에 관여해 온 인사들을 교단 재판위원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섯째, 민형사상의 고발 고소를 제외한 교회적 다툼을 사회법정으로 가져가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교회법에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 재판을 통하지 않고 사회법의 위하력을 불러들이는 행위는 교회 정치가로서 부적절한 행위임을 감리교회 공동체가 이번 일을 계기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째, 신앙 공동체 집단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교리와 장정을 전면 검토하고 감리교회의 성화적 전통을 담은 교회법을 제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거법을 강화하되 범법행위가 있는 후보자의 범법사실을 공시하는 한편, 당사자에게는 이를 공개 소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회법의 기능과 효과를 교회법이 과장 확대하여 이용하는 것은 파당적 사고의 결과다. 따라서 파당적인 사전 선거 운동과 금권 정치적 합의를 도모하는 이들에게는 교단 임직원으로 임명될 자격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제제 조치도 명시되어야 한다.

이 밖에도 파당성을 극소화하고, 서열문화를 넘어서 특권화된 종교 귀족을 더 이상 옹위하지 않는 이상적인 교회가 되기 위한 조치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새로운 의회적 기능은 비의회적인 담합에 근거한 폭력과 위협과 야합의 시대를 마감하고 정직, 공정, 평화, 생명 가치를 옹호하기 위하여 교회의 건전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폭력적 권위나 권력보다 교회 지도자들의 인격과 신앙적 가치가 높여지고, 판단과 절차에 대한 신뢰가 확립된다면 2년제 혹은 4년제 감독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종신제 감독을 두어도 공정함과 신뢰가 있는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나는 우리 감리교회가 오늘의 불행을 딛고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비약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감독을 선임하려는 총회는 하나님께서 이번에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신 뜻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겨 반대한다. 국가 선관위에 그 절차와 과정을 맡기자는 주장도 있지만 그 절차와 과정에 대한 엄격한 감독이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으나 교회의 자율적 능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목적이 기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논리의 결과이므로 찬성하기 어렵다. 이럴 경우 역시 오늘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비판, 과오에 대한 책임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 총대들은 모든 파당성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길을 여는 소중한 직무를 수행할 새로운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사태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데 남은 힘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가 될 수 있다. 이제는 집단적 사리사욕을 앞세운 파당성에서 우리 스스로를 자유케 할 때다. 불평과 비난을 던지는 자리에서도 일어나야 할 때다. 우리 모두 파당적 행위를 버리고 진리와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모아 상처투성이인 감리교회를 끌어안아야 할 때다. 이제 모두 나서서 하나님의 교회를 자유케 하라!!







▲ 박충구 교수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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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등록
오직 예수 2009-09-20 12:59:24


좋은 내용인데 기독교 대한감리회 게시판에서는 주로 김국도 전 감독 회장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일명 반동(종파)분자들이 박교수님의 글을 비판하고 싫어하더라!!
특히 J목사와 S목사 원주K목사는 아에 입에 거품을 물지경이더라
왜 그럴까?
답은 자명하다 고수철 목사를 밀어내고 김국도 감독회장의 재 취임이 두련운 거다
투표로는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김국도 목사를 감독회장에 앉히는 순간 잔신들 입지가
줄어들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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