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6

“안중근 의사가 일깨운 일본의 양심, 일본 혁명군의 천황 암살시도로 이어져” - 교수신문



“안중근 의사가 일깨운 일본의 양심, 일본 혁명군의 천황 암살시도로 이어져” - 교수신문



“안중근 의사가 일깨운 일본의 양심, 일본 혁명군의 천황 암살시도로 이어져”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근대문학
승인 2013.11.25
경색된 한일관계 해법, 소설에서 선례 찾다


다음달 4일 일본 주오대에서 열리는 공개강연회에서 ‘한국인 시점에서 본 근대일본문학’을 주제로 발표하는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근대문학)의 글은 잘 알려진 일본 소설가(나쓰메 소세키, 고바야시 다키지, 마쓰다 도키코)를 한국인의 시각에서 고찰하고 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 강연인 김 교수는 이번 발표에서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작가 나쓰메 소세키 작품 속에 그려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사건을 분석하고, 안 의사와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의 인연을 추적한다. 주목할만한 한일교류의 선례로 대역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가 조선의 독립운동가인 안 의사에게 영향을 받은 점과 고토쿠 등의 일본 혁명가들이 조선침략을 반대한「독립선언문」내용은 논의의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발췌 개재한다.

안중근이 영면한 뒤 광풍이 일본 전역을 강타한다. 서거(3월 26일) 2개월 후인 1910년 5월 25일 미야시타 다키치 등이 폭탄을 제조해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이른바 대역사건이 발발하는데, 당시 일본 정부는 미야시타 다키치, 니무라 다다오, 후루카와 리키사쿠, 니따 도오루 등 4명을 검거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한다. 이 검거를 시발점으로 삼아 조사를 전국으로 확대,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해 버린다. 거기에는 고토쿠 슈스이는 물론, 그의 처 간노 수가코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분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폭탄을 시험하고 천황타도 결의를 한 시기는 1909년으로 안중근이 일제의 조선,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화 책동에 직접 행동으로 옮긴 시기와 겹친다.(……) 관헌의 조사 자료에 남아 있는 간노 스가코의 증언은 1909년 평민사에서 이미 준비행동에 대해 논의한 사실을 분명히 뒷받침하고 있다.(……) 미야시타 다키지 한 사람의 試궅이었지만, 폭탄으로 폭파시킨 것은 안중근이 결기한 8일 후였다.” (가메다 히로시 씨 증언, 『비록 대역사건 상』, 춘추사, 1959년, 123페이지)

평민사의 혁명가들이 안중근의 결의에 자극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증언인데, 여기에 더욱 분명한 증거가 있다.

“놀랍게도 고토쿠가 체포됐을 때 그의 압수물에서 안중근 사진과 안중근의 거사를 칭송한 고토쿠의 한시가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간자키 교시는 그 한시와 안중근의 사진을 새긴 그림엽서 실물이 명치학원대학 도서관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념문고에 소장돼 있다고 밝혔다.” (간자키 교시『혁명전설 대역사건의 사람들 3』, 하가서점, 1969년)

이 사실은 고토쿠가 안중근의 투쟁심에 깊은 감명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뒷받침한다. 즉 그 한시와 엽서는 고토쿠 뿐만 아니라 고토쿠와 연을 맺고 있던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것이다. 전쟁반대와 동양평화를 절실히 기원하던 안중근의 혼백을 고토쿠도 흉중에 품고 있었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안중근의 결의와 사상을 흠모하고 있었다고 보면 지나친 추측일까. 안중근의 의거를 칭송한 고토쿠의 한시는 다음과 같다.

“舍生取義 / 殺身成仁 / 安君一擧 / 天地皆震” 얼마나 고토쿠가 안중근의 정신에 고무되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고토쿠가 인정한 것처럼 의사는‘생’을 버리고‘의’를 선택했으며, 몸을 바쳐 도리를 추구했다. 고토쿠는 의사의 ‘일거’에 ‘천지’가 진동했다고 표현했는데, 과연 그도 목숨을 걸고 안중근의 발자취를 좇으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일까. 아무튼 안중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고토쿠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중근의 사상은 고토쿠의 사상과 통하는 데가 있다. 고토쿠가 인류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서 투쟁했다면 안중근은 민족독립운동에서 출발했지만, 민족주의를 초월, 휴머니즘에 다가서고 있었다. 반전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해방 정신, 또한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은 두 사람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모든 이가 대역사건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도쿠도미 로카가 고토쿠 슈스이를 구원하기 위해 가쓰라 총리에게 사형판결을 재고하도록 청원편지를 보내고, 제1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강연을 통해‘모반론’을 역설하는 내용을 언급한다. “제군들이여, 모반을 두려워하지 마라. 모반인을 두려워하지 말라. 스스로 모반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변혁은 항상 모반으로부터 온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용기 있는 처사였다. 고토쿠 슈스이가 천황암살제의 명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터에 그를구제하기위해편지를보냈고, “모반을두려워하지 마라”는 언급을 하는 등 천황제 절대 권력에 맞서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발설한 것은 고토쿠 슈스이의 활동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특히 대역사건의 주역 고토쿠 슈스이와 평민사 활동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던 비전론에는 동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세키가『문』을 발표하기 3년 전인 1907년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직접행동파와 의회주의파로 분열돼 있었으나 7월 21일 ‘조선 식민지배 강화에 대한 항의성명’까지 발표했다.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의 권리를 존중하며 이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책은 세계평민계급의 공동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당연히 보증해야하고 그 언행과 책무에 충실하기를 바란다.”(<오사카평민신문> 5호, 1907년 8월 1일)

고토쿠는 사카이 도시히코 등과 연명으로 이 결의를 발표했는데, 당시엔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들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것은 국익에 반하는 행동이었고, 아무리 혁명전사라 할지라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팽창주의가 강요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일본사회의 변혁을 위해 직진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그와 같은 결의를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움직임은 고토쿠, 장계 등의 사회주의자와‘亞州和親會’의 활동, 조선 지배를 비판하는 잡지 발행 등에 자극을 줬다.

한국의 시점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재독하다보면 한국관련 시대적 배경이 중요함은 물론, 거기에 한일교류의 훌륭한 선례가 존재함을 확인하게 된다. 한일관계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분위기에서 한국의 시점에서 본 나쓰메 소세키 논의가 한일교류의 발전을 모색하는 동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근대문학
일본 간사이가쿠인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소세키(漱石)와 조선』,『 소세키(漱石) 남성의언사·여성의처사』, 논문으로「마쓰다 도키코‘하나오카 사건 각서’고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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