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4

손민석 - 박정희의 정신은 “자조(自助), 자립(自立), 자주(自主)”로 표현될 수 있다.



(31) 손민석 - 박정희의 정신은 “자조(自助), 자립(自立), 자주(自主)”로 표현될 수 있다.

스스로 돕는 자를 정부가...


손민석
10 July at 12:21 ·



박정희의 정신은 “자조(自助), 자립(自立), 자주(自主)”로 표현될 수 있다. 스스로 돕는 자를 정부가 도와주어야 자립경제를 영위할 수 있고, 그런 자립경제를 영위하는 국가만이 국방을 할 수 있고, 그런 국방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자주적인 국가와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수출을 행하는 기업에게 국가가 금융지대를 보조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경제개발이 어느정도 수준에 이르자 자주국방을 시도하였다. 그는 왜 이런 정책을 펼쳤을까.

그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한민족의 부흥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한민족을 몰락의 구텅이에 빠뜨린 양반사족, 문인들을 혐오했다. 무관인 자신이 한민족의 중흥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물질적 근대화 - 자주국방이라는 두 축을 세워놓고, 세부적으로 물질적 근대화에 1) 자립경제 건설, 2) 공업입국, 3) 국토개발, 4) 복지사회 구현, 5) 기술혁신, 6) 새마을운동을, 자주국방에는 1) 군현대화, 2) 멸공평화통일 달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양반사족들의 습속에 젖어 있는 한국민들을 새로운 형태의 인간으로 ‘개조’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 목표가 바로 “자조”하는 인간이었다. 교육을 통해 근대성을 체현한 인간,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 농촌적 습속에서 벗어나 도시적 습속을 갖춘 인간 등으로 새롭게 주조되어야 했다. 그것이 관에 의한 통제책이었다고는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인간주조를 향한 박정희의 의지가 바로 구현된 정책이었다.

박정희의 사고는 나름대로 체계성을 갖추고 있으며 메시지가 간결했다. 그리고 이 목표들은 그가 볼 때 너무나도 근원적인 욕구에서 나왔으며, 그것들은 당연히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목표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이론(異論)이 나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위대한 국가와 민족이 되는 것, 양반적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근대적 인간을 창출하는 것 등은 조선 역사 5천년의 퇴폐가 모인 조선왕조라는 역사의 구덩이에서 한민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하는 문인 무리들을 그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가난으로 인해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개인의 것에서 벗어나 민족의 역사로 승화되어 나타났다. 이 나라, 이 민족은 어째서 다른 민족과 국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는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는 그에게 있어 민족으로 확장된 비대하고 상처받은 자아를 구원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이 기본적인 동인이고, 다른 동인으로는 문화적인 것도 있는 것 같다.

조갑제는 박정희가 유교적 선비관과 사무라이 정신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이라 했는데 나는 후자가 결국 전자에 종속된다고 본다. 여기서 핵심은 유교적 세계관은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무상감, 허무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은 인간의 내세에 대한 욕구, 인생에서 느껴지는 무상함 등을 채워줄 수 있는 정신적 양식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이 세계관은 그러한 허망함을 현실에서의 업적추구로 해소하라 유도한다.

김대중 대통령만 해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나오는 수많은 비애, 허망함 등을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겠지만 박정희는 그러한 방법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러한 것이 그를 더 업적에로, 권력에로 몰아넣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비대해진 자아는 본인을 국가, 민족과 동일시하며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의 권력과 업적에 대한 그 강렬한 욕망은 이런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이 그토록 강렬하게 중앙으로의 귀속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비슷한 원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의 사고체계는 나름대로 정합성 있었고 간결했다.

나는 그의 사고와 사상을 농민적 세계관의 일면으로 파악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농민적 세계관은 그것이 보다 정치하게 표현된 유교적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기묘하게도 건실한 측면과 퇴폐적인 측면이 쌍을 이루며 통합되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세계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농번기와 일을 할 수가 없는 농한기의 차이가 그러한 성향을 낳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식민지기 민속지에는 농한기의 농민들이 얼마나 퇴폐적인지에 대한 자세한 보고들이 많다. 그것을 조선민족성으로 파악하는 잘못만 제외한다면 농민세계의 퇴폐성에 대한 보고로는 훌륭한 기술이 많다.

박정희는 이 농민적 세계관에서 상대적으로 건실한 측면을 자신의 아버지, 형 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성을 체현한 일본제국의 통치 속에서 체현한 것 같다. 실제로 그도 부정부패도 많고 그랬지만 다른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건실한 측면이 많았다. 그리고 그 건실한 측면을 통해 한국사회 전반을 자신의 인격과 같은 형태로 개조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그의 사상을 농민적 세계관이 낳은 한 유형으로 파악하면서 비교사적으로 다른 농업사회의 지도자들과 비교해보고 싶다. 개인의 정신세계의 내밀한 지점까지 정치경제사적 맥락에서 조망해보고 싶은 욕망이 크다. 아직 이론틀이 만들어지지 않아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마무리해보고 싶다.

앞의 것과 다른 맥락에서도 박정희에 대해 관심이 있는데, 사실 나는 그의 자조, 자립, 자주라는 표어가 사회주의하고도 많이 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진보좌파는 복지국가에 대한 긍정을 굉장히 쉽게 하지만,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복지국가를 긍정한 적이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유지고 뭐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의 완전한 자립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멸해야 하는 것이지, 개인이 거기에 의존하며 존속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하이에크보다도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박정희는 개인의 자립이 국가와 민족의 자립, 위대함으로 연결되는데 반해 마르크스의 것은 그것들의 지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겠다. 이 차이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겠으나 어찌됐든 박정희가 개인의 자립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시키려 했던 점은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경영하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참고할만한 지점이 많다.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국가를 통해 사회화시키려는 유럽식의 복지모델과 개인화시키지만 어찌됐든 개인의 자립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한국형 혹은 영미식 모델 중 어찌됐든 우리는 후자에 속해 있기에 여기서의 사회주의의 전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박정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박정희라는 개인을 어떻게 하면 보다 정치하게,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아직도 많다.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계속해서 고민해왔지만 아직도 답을 내지 못했다. 그의 강렬한 국가주의와 반국가주의의 기묘한 통합은 개인의 자주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그 개인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것이 박정희 개인의 경험뿐만 아니라 농민적 세계관에서 파생되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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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석 박정희는 따봉입니다
일본불매운동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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