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3

Hojae Lee 한국 기독교 성경해석과 신앙패러다임 전환 요청

한국기독교 성경해석과 신앙패러다임 전환 요청 1

Hojae Lee


Hojae Lee
19 July at 20:27 ·



 1.

1. 다양한 경전을 읽었지만 신학 책은 그렇게 많이 읽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여유가 있어 신학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을 시간이 생겨 공부를 하다보니 문득 일전에 연세대의 모 교수와 통화한 내용이 새삼 떠오른다. '신학과 교회사이에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지식이 교회의 평신도에게 전혀 전달이 안되는 일종의 부도체현상이 현장목회의 모습가운데 일부라는 것이다.

2. 사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도대체 서구신학자들의 주장이 어떠한데 한국 교회는 이렇게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교회가 되어가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많이 생겼다. 그런데 서구신학자는 다양한 신학적 자유를 누리며 성경해석에서 자유로웠다. 반면 한국의 신학자 혹은 신학교수는 교단소속의 대학에서 교단의 신학적 사유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학자의 선택이니 탓 할 이유도 없다. 다만 누가 성경의 정신과 가까운 신앙을 실천하느냐로 대중이 판단할 뿐이다.


3. 이런 서구신학 일변도의 한국 신학계의 생태계에 파열음을 내며 변찬린은 아픈 몸을 이끌고 성경해석의 새 지평을 열어제치려 성경해석에 나선다.

"신학에 의해 난도질당한 성경, 그리하여 핵분열처럼 찢어진 무수한 교파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갈보의 의상모양 재단되어 나온 교리들, 이 묵은 교리들을 휴지처럼 쓰레기통에 폐기하고 교파의 와실(蝸室)을 부숴버리고 절대자유한 대인(大人)들이 되어 대식견(大識見)의 날개로 비상하자. 낡은 유대교에서 탈출한 갈릴리의 어부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듯 낡은 기독교에서 탈출한 산 자들만이 다시 오시는 어린 양의 신부가 될 것이다.(중략) 서양신학에 오염되지 않은 무지하고 염담(恬淡)한 마음으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비경(秘境)인 성경의 산으로 입산하였다. 번개와 피와 아픔으로 쓴 글임을 고백한다. 《성경의 원리》가 새 종교의 새벽을 예고하는 예루살렘의 홰쳐 우는 닭소리가 되길 바란다. 빛은 동방으로 부터 비칠 것이다." (변찬린. 성경의 원리(상). 한국신학연구소, 2019. 머릿말에서)

4.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려고 성경이라는 문서를 우리에게 준 것은 아니다. 또한 성경텍스트에서도 예수는 인간을 자기와 동등한 친구라는 친구신앙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자(녀)신앙으로 만들어주었는데 왜 직업종교인은 신자를 건물교회의 노예로 만드는가! 노예신앙에서 벗어나 신자가 주인이 되는 주인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바울의 종신앙에서 예수의 친구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율법, 죄, 사망의 복음에서 사랑, 생명, 부활의 신앙으로 새로나야 한다.

5. 하늘나라의 초대를 받은 그리스도교인은 재림주에게 버림을 받지 않도록 바른 신앙을 하여야 한다. 예수를 구주로 신앙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친구로 동행하며 살면 되는 것이지 왜 건물교회에 가서 자신의 영성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가. 예수는 우리의 친구다 예수의 친구로서 그리스도교인의 품위를 갖추라 예수가 말하였다 !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4)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3)


6. 한국의 주류인 보수문자근본주의자들인 기독교인은 위의 두 성구를 문자그대로 행하라. 그럼 한국 교회는 '빛'처럼 빛나고 '소금'처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할 것이다. 비틀어 말하면 예수가 명하는 대로 하지 않아서 바울이 말한 종신앙을 하는 것이고, 하늘나라 가기 싫어서 재물을 좋아하는 가? 단지 두 성구지만 성경의 맥락에 흐르는 성경의 정신은 '하나님이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이고, 재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경고한 것이 성경의 밑바탕이다. 종의 신분으로 재물을 건물교회에 갖다바쳐서 오늘날 사회적 문제가 된 교회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예수의 복음을 지켜 친구로서 재물이 아니고 하나님을 신앙한 크리스챤만 있는데도 적지 않은 교회가 사회의 우려를 받는 현상이 발생하였겠는가! 무거운 마음으로 하기 힘든 말을 한다.




142Sung Deuk Oak, 김호 and 14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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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20 July at 09:45 ·



한국기독교 성경해석과 신앙패러다임 전환 요청 2

1. 한국 기독교의 전래는 북경 천주교 북당에서 세례받은 이승훈으로 비롯되며, 개신교의 역사는 알렌과 아펜젤러가 들어온 시점으로 잡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옥성득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 교회사"에서 시각을 교정해야 하는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2.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서구의 선교사가 한국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며 한국 근대기에 신분해방, 한글애용, 교육, 의료 등의 부분에 일정부분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개신교 목사는 아주 소수의 목사를 빼고는 신사참배를 하는 우상숭배를 하였고,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지시에 순종하며 신사참배를 하였다. 이런 역사적 우상숭배도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자. 자질구레한 이런 내용은 다 아실테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3.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의 부패에 항거한 루터, 캘빈, 쯔빙글리 등에 의해 유럽 중세를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 개신교는 무엇보다 바울신학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지향하였다. 예를 들면 루터의 "로마서주석"이 그 예이다. 내노라하는 서구 신학자 가운데 특히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요"는 유명하다. 바울신학의 핵심이 바로 '칭의' 그 유명한 '오직 믿음만으로'!!! 그래서 날잡아 성경에서 '믿음'에 관련되는 모든 성구를 찾아본 적이 있다. 적지않은 양이다. 그리고 길희성 교수의 "보살예수'도 바로 바울신학의 '믿음'과 '정토교'를 비교하면서 바로 '믿음'이라는 점에서 논거를 찾고 있다.

4. 그런데 나의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래 '믿음', '은혜', '은총' 다 좋은데 그게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달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다. 아래 댓글에서 어느 선생님이 그랬지만 '교회안에는 대화가 없다' 일방적인 설교만 있다. 어느 기독교 언론사 사장목사는 나에게 한국에는 두 인간형이 있다. '하나는 일주일마다 일방적으로 복음을 듣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생각해 보라. 모노로그, 죄인의 입장에서, 종의 신분에서, 믿음이 부족한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매주 최소한 일정시간을 수십년 들어보라. 무어가 맞고 틀리는 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솔직해 지자. 칭의신앙 다 좋은데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서 무엇인가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런 믿음좋은 사람이 보인 교회가 왜 이 모양인가? 예를 들면 강호숙 교수는 페북에서 여성신학자의 교회내 위상과 차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눈물겹다. 손원영교수는 어제 결심공판이 있었다는데 잘 끝났는지 모르겠다.(아니 개신교 신자가 불상을 훼손해서 기독교인으로 미안함을 표하고 모금하여 보상하려는 종교적 행위로 해임시키는 교육기관이 어디에 있는가)

5. 서구 신학과 서구 성경해석에 포로가 된 한국 교회에 세계 신약학회 회장을 지낸 제임스 던의 말을 들어보자. 유명 서구 신학자의 말이라 권위가 서는 식민식학을 하는 한국이니 말이다. (최근에 이상목 교수가 번역한 "예수, 바울, 복음"도 틈이 있으면 읽어보시라. 얼마나 서구신학자는 폭 넓은 신학적 사유를 하는지)

"바울의 사상에서 얼핏보면 칭의가 더 부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부각된 원인은 바울이 그의 동료들인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맞서 자신의 칭의 이해를 논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칭의 주제에 관한 논의는 대체로 바울이 그의 이방 선교를 변호할 필요가 있었던 서신들(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한정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령의 수여에 대해서는 바울이 그 사실을 논증할 필요가 없었다. 성령 수여의 사실은 바울이 편지를 썼던 모든 공동체를과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토대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바울의 선교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던 사실이었다는 말이다: 성령받음은 회심이라는 결정적 전환에서 결정적인 요소였고, 삶속에서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소유로 주장된 삶을 가장 뚜렷하게 정의할 수 있는 특징이다."
(제임스 던. 박문제 역. 바울신학. 2019. 580-581.)

즉 이신칭의신앙보다는 바울신학의 밑바탕은 성령신앙이다. 성령으로 회심하면 당연히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국 교회를 점령하고 있고 신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말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 22-2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형체도 보이지 않는 이신칭의신앙에서 독백하지 말고, 온유한 열매가 맺히는 눈에 보이는 성령신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

ps) 제 페북 글은 어느 글이나 본문 수정없이 공유하여도 됩니다. (단 인물이 들어간 사진은 제외)




119Sunghwan Jo, Sung Luke Kim and 11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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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kyoung jung 오직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한국교회가 보여준건 땅사서 집짓고 우리끼리 잘 먹고......
문동환 박사님의 '예수냐 바울이냐'를 읽었을때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왜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불교, 회교, 힌두교 지역을 여행하면서 믿음이란 종교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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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규 replied · 1 reply


조성익 만약 기독교가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라면 그렇게 지독한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에 반하여 맹목적으로 믿어야했다면 기독교는 선교지에 학교나 병원을 세우지 않고 예배당이나 기도원만 세웠을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만이 주실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로 나타난 성령받은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그들을 보고 일컫는 말이었지요 이신칭의에 목매달고 있는 사람들은 칭의에 구원이 달려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정의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거짓 성령체험자들이 받았다고 우기는 바람에 정말로 '믿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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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은혜와 믿음의 균형적인 삶이 그리스인이라 생각듬니다. 귀한 말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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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주 교회를 벗어난 성령신앙이라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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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19 July at 20:55 ·



평신도는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성경텍스트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해 준다. 예수도 3년의 공생애 가운데 자신의 종교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직업종교인에게 질문을 받는다. 이를 본받아 직업종교인에게 '너희는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기독교 평신도는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묻지도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하는 평신도는 자기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준다는 기복신앙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한국 교회의 실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문제다.


평신도는 반드시 자기가 다니는 목사에게 '무슨 종교적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파견하고 왕을 세울때 증거를 준다. 그런데 현대의 직업종교인은 하나님 혹은 성령으로부터 혹은 예수그리스도로 부터 무슨 소명을 부여받았기에 건물교회를 만들고 종교의례를 행하는가? 더구나 종교개혁이 '만인사제설'을 기본으로 탄생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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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11장, 마태 21장, 누가 20장의 유사한 성구를 묵상해 보자. 그리고 성서에서 하나님이 선지자 혹은 예언자, 소명자를 어떻게 파견하는지를 조사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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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28-33절

당시 바리새파 직업종교인은 예수에게 묻는다.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는 역으로 질문한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러자 직업종교인들은 서로 상의해 본다. 우리의 권위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그러자 예수도 나도 말하지 않으련다.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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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소명을 받았다면 하나님 혹은 예수그리스도 혹은 성령의 열매를 평신도인 나한테 보여달라고 해라. 굳이 그럴필요도 없다. 댓글에 있듯이 참 하나님을 신앙하는지, 그리고 그 신앙의 외형적 표현이 성경의 맥락에서 예수처럼 경제적으로 무소유하고, 사회적으로 겸손한 자리에서 사회적 약자와 같이 더불어 사는지 여부만 보면 된다. 교회라는게 '예수처럼 살기' 공동체 아닌가? 복잡하게 칼 바르트의 교회론은 들먹일 필요없다.

그리고 평신도는 성찰해 보라.
오늘날 교단에서 만든 교육시스템에 의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직업종교인이 배출되는 것이 성서적 맥락에서 정당한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물어보아야 한다. 일반 학자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 교수가 되는 것과는 다른 루트아닌가? 하물며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종교적 구호가 '만인제사설'이 아닌가?

직업종교인 가운데 정말 소명을 받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런 목사들을 나도 적지 않게 알고 있다. 예수팔아 종교적 장사하는 일부 직업종교인때문에 참 크리스찬과 참 목사는 시련의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작금의 일부 직업종교인의 행태가 기독교 내부에서 정화되지 못하는 사태는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공동책임이다. 교회안에는 신행일치하는 참 크리스챤과 참 직업종교인만이 있어야 한다. 가라지 직업종교인은 건물교회에서 추방하라.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기독교로의 회복은 평신도가 성경을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건강한 신앙생활에서 비롯한다.

한국의 평신도들이여 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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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Ok 물을 기회를 원천 봉쇄하죠...
한국 교회의 문화가 “물으면 이상한 놈” 취급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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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san Min replied · 5 replies


백영기 이미 아시다시피,
성서 서간에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지체를 이룬다''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존재와 기능과 역할들이 그리고 교회의 개념들(구약에서 부터 신약까지 성서 곳곳에 관련 표현들이 있기는 하지만)이 함축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듯 합니다.
사역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에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그렇게 이어진 더욱 구체적인 그 권위는 신약에 와서 성령을 받고 성령에 봉사하는 권위로 표현되고…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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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replied · 3 replies


홍정욱 묻는다는 말은 영어로 구한다는 말과 같지요.
구한다는 말은 기도를 의미하고요.
즉 구하려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만한 권위를 가지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자신들의 눈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봐드렸어야 했지요. 하지만 이미 바리새인들의 맘속엔 헛된 가치를 추구하는 정욕으로 가득찼으니 어찌 권위의 출처를 알겠습니까?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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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욱 replied · 6 replies


Jong Sang Gabriel Kim 경공부를 거의 하지 않죠. 신도나 성도나 신자나 승려나 목사나 신부나..... 지금까지 그런 분들만 봐왔을지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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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e Lee replied · 1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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