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7

[와다 하루끼] '김대중과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 강연 전문 - 광주in



[와다 하루끼] '김대중과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 강연 전문



[와다 하루끼] '김대중과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 강연 전문

광주in
승인 2010.08.13 15:18


아래 강연문은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학자인 와다 하루끼 도쿄대학 명예교수가 전남대학교 '김대중학술상' 수상자로 시상을 받은 후 지난 12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 학술대회'에서 강연한 내용 전문입니다./ 광주in

'김대중과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

와다 하루끼(和田 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신지 1년, 대통령의 이름을 딴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한국 민주주의 혁명의 성지인 이곳 광주에서 수상한다는 것은 저에게 매우 명예스러운 일이고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상을 주신 전남대학교 교수님들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한국과 일본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1953년 한일 회담에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 貫一郎) 대표의 발언이 한국 정치권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회담이 결렬되었을 때 일본 정부, 신문, 야당들은 하나같이 한국 측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당시 저는 지방도시의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비난 일색은 옳지 않다, 과거에 대한 잘못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한일 교섭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한 한국 측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일본 내의 주 여론과는 고립되어 있는 이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저의 지식인으로서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학자인 와다 하루끼 도쿄대학 명예교수가 12일 오후 전남대학교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 한후 추모강연을 마치고 객석에서 '김대중 평화사상과 남북관계' 학술토론회를 지켜보고 있다. ⓒ광주인러시아사 연구의 길에 오른 저는 역사가로서 당연히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비판 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만, 이후, 베트남 전쟁 반대 시민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1965년 이후의 한국 상황, 한국과 일본 관계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청년 정치가가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크게 선전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듣고는 있었습니다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1973년 8월 8일 한국의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가 대낮에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되어 생사가 불분명하게 된 사건이 저에게 준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사건 자체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제가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전혀 예상도 못했으며, 이 사건으로 고난 받은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무지(無知)가 저에게 충격을 준 것입니다.

납치당한 사람의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는 그날 발매된 잡지『세계(世界)』를 사서 김대중 씨의 인터뷰를 읽고 처음으로 그 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야스에 료스케(安江 良介) 편집장과 나눈 그 분의 말씀은 제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은 “왜 이렇게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 하는가”라고 물으시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우리들의 자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전통이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켜가는 주체 세력과 국민의 자각의식이 부족한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흘리면서 쟁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군사정권의 앞잡이에게 폭력적으로 납치되어 살해당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타협 없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강한 결의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김대중 씨는 “우리 한국인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반드시 일어선다”, “저는 역사에서의 정의의 불패를 믿는다”라고도 하셨습니다. 본인은 대낮에 납치되어 완전히 뭉개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투쟁이 최후에는 승리한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표명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에서 “박정희 씨 개인에 대해 증오심도 없고 복수심도 없다”, “저는 나라를 위해 그의 장래를 우려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고 김대중 씨의 정신적인 도량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일 후, 김대중 씨는 자택 근처에 내동이 쳐졌습니다. 상처투성이로 울고 계셨습니다. 거대한 권력의 폭력에 휘둘린 우리와 같은 약한 몸을 가진 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일본인은 이때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한국인을 보았습니다. 김대중 씨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한국인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들의 한국 민주화 투쟁에 대해 강한 외경심을 갖고 이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도쿄에서 개최된 김대중 선생님의 추도식에서 말씀드린 대로 “김대중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하신 행동, 겪어낸 고난――그 모든 것을 보고 배우면서 일본인도 성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간 우리들은 김대중 선생님의 학교에서 배움을 얻는 것입니다.”

수차례의 좌절이 있었고, 수차례의 고난이 있었기에 우리는 1979년 10월 이후 한국의 변화를 환영했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의 정치 활동 재개를 기뻐하며, 5월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학생들의 시위에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새로운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장군의 쿠데타가 감행되었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의 체포, 전국 대학 폐쇄를 알리는 5월 18일의 신문을 저는 멍하게 읽었습니다. 쿠데타라는 것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길거리에 배치하여 공포를 조성하여 사람들의 저항 의욕을 분쇄하는 것입니다. 쿠데타는 저항을 상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때 광주의 학생과 시민이 일어선 것입니다. 굴하지 않는 의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한국인의 모습이 광주 땅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쿠데타 군인은 필사적인 위세로 저항을 짓누르려 했습니다. 자유 광주는 여기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포기하지 않고 저항 의지를 보였습니다.

자유 광주는 최후에는 제압되었지만 “광주에서의 저항을 통해 얻는 자유의 공간은, 혁명이 승리하여, 전국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새로운 질서의 본보기였다”, 쿠데타 세력의 지배는 “오래 계속될 수 없다”, “1980년 5월은 한국에서의 『국민민주혁명』들의 시작이며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저는 6월초에 출판된 잡지 『세계(世界)』에 그렇게 썼습니다.

자유 광주가 제압된 후, 김대중 선생님께 사형을 구형한 쿠데타 측의 군법 회의에서 선생님의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은 그간 일관되게 굴하지 않는 의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한국 국민의 자세를 대표하셨습니다.

80년 5월부터 다음해인 81년 1월까지 일본에 있는 우리들은 김대중 선생님을 죽이지 말라고 필사적인 운동을 펼쳤고, 우리들은 그 운동이 한국 국민의 바람과 일치한다고 믿었습니다. 다행히 김대중 선생님의 사형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후, 감형되어 후에 선생님은 감옥을 나와 미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저는 1984년 12월 Washington을 방문하여 김대중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나 뵈었습니다. 당시 망명 생활은 이미 2년에 이르러 김대중 선생은 한국으로 귀국을 강행하는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계시는 것에 새삼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은 1985년 2월 Washington을 출발하여 귀국 길에 오르셨습니다. 여기엔 83년 8월 귀국하여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된 필리핀 정치인 아키노 씨의 전례를 우려하여 미국인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2명의 하원의원을 포함하여 20명에 가까운 사람들 속에 저의 친구인 역사가 Bruce Cumings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와 함께 일본정부의 위임을 받아 김대중 선생님 일행을 나리타공항에서 맞이하였습니다. 그날 밤 호텔방에서 『세계(世界)』편집장이었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씨와 저는 김대중 선생님과 한때를 보냈습니다. 야스에(安江) 씨도 저도 불안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이겨내고 김대중 선생님과 한국 국민은 1987년 6월 드디어 민주혁명을 실현하였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위대한 승리였고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혁명은 대통령 선거를 포괄하는 혁명의 국면으로 들었습니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10년간은 많은 우여 곡절이 있었던 과정이었습니다만, 민주혁명 후 10년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된 김대중 선생의 정치는 김대중 혁명이라고도 일컬을 만한 커다란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선생님의 정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 단호히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선생님께서 대외 정책으로 하신 첫 번째 일은 한일 관계 정상화, 한일 협력 관계의 선언이었습니다.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하여 오부치(小渕) 수상과 함께 한일 공동 선언을 발표하셨습니다. 오부치(小渕) 수상이 무라야마(村山) 담화를 계승하여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손해와 고통을 주시해서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표명한 것을 “국민간의 화해와 선린 우호를 지향하는 일본정부와 국민의 마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구축한다”고 결의를 선언한 것입니다.

한국 국내의 일본문화 개방도 약속하셨습니다. 일본 국회에서 대통령의 연설은 모든 의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 본인의 성공을 선생님께서는 이 연설에서 ‘기적’이라 부르며 “기적은 기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한국 국민의 피와 땀으로 실현한 것임을 강조하시고 일본 국민과 언론 그리고 일본 정부의 원조에 감사하셨습니다.

실로 한일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게 양국의 정상적인 협력 관계의 확립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화해를 향한 결정적인 전환을 만드셨습니다. 대통령 취임 이래 획기적인 ‘햇볕 정책’, ‘포옹 정책’을 도입하셔서 계속 노력하신 후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하셨습니다. 김정일 국방 위원장과 회담하고 역사적인 남북 공동 선언에 조인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무거운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것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큰 의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남북회담이 있었기 때문에 2002년 9월 고이즈미(小泉) 수상의 북한 방문, 북일 정상회담, 북일 평양선언 조인이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양 정상은 신속한 북일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하면서 고이즈미(小泉) 수상은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손해와 고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고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납치 사건과 공작선 파견을 인정하고 이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일본은 국교 수립 후 반성과 사죄에 입각하여 경제 협력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남북한, 북한과 일본――이 3국간의 평화적인 협력 관계 구축이 동북아시아의 지역 협력의 중핵이 된다.”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청사진입니다. 이 3국을 둘러싸고 중국, 러시아, 미국이라는 대국이 포진해 있는 형태입니다.

저는 1990년 이후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구상을 본격적으로는 1995년 이후 제안해왔습니다. 1995년 봄 『창작과 비평(創作と批評)』지에 발표한 논문「『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과 한반도(『東北アジア共同の家』と朝鮮半島)」에서는 동북아시아 구성에는 중국, 대만, 러시아, 남북한, 일본, 미국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사회적・문화적・심리적으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평화적 협력 경험은 세계로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반도는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가교였다’고 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의 공존 공생을 위한 중심은 한반도이자 남북한의 블록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의 결과, 이 지역 모든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이 ‘동북아시아의 인간적, 평화적 협력을 위해 일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주체’라고 제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은 공동의 안전 보장, 공동 성장, 공동 환경 보호, 공동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학자의 개인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 협력이 가시화된 후 2003년 2월 25일에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정책 구상의 첫 번째로 ‘동북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맞아 ‘동북아시아’의 ‘번영공동체’, ‘평화공동체’ 지향을 내걸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유럽연합과 같은 평화와 공생의 질서가 동북아에도 구축되는 것이 저의 오랜 꿈입니다.”

북한과의 남북관계를 해결한 후 앞으로 나아갈 목표로 동북아시아 공동체 창설이라는 구상을 내세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업의 중심에 한반도가 있고 한국이 주도권을 잡고 나아가기로 선언한 것입니다. 마침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의 구상은 현실적인 정치 문제가 될 때가 왔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2003년 저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신지역주의 선언(東北アジア共同の家-新地域主義宣言)』(平凡社)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2004년 이원덕 씨의 번역으로 일조각(一潮閣)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6개국에 몽골을 멤버로 추가하고, 준 멤버로 이 지역의 큰 섬인 대만, 오키나와, 사할린, 하와이의 행정 책임자도 초대하도록 주장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주도도 추가하도록 수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라는 사태가 발생하여 이 문제를 다루는 지역적인 기구가 생겨났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멈추게 하고 북한을 안정시켜 주변국과의 협력 관계를 원활히 하여 경제적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2003년 8월에 출범한 6자 회담입니다.

제2회가 2004년 2월, 제3회가 동년 6월에 열렸습니다만 이렇다 할만한 진전이 없었고 2005년 2월에는 북한 외무성이 6자 회담 참가의 무기한 중단을 발표하고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관계국들은 진지하게 대응하여 동년 9월 19일에 6자 회담 제4차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북한은 핵무기 개발 포기를 약속하고 미국은 핵무기나 일반 무기로 북한을 공격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여 미국과 북한은 평화 공존하고 국교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일본과 북한은 과거 청산, 현안 문제 해결에 의거하여 국교 정상화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와 함께 ‘6자는 동북아시아와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약속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안전 보장면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방책에 대해 제안해 나가기로 합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6개국 정부의 역사적인 합의입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가 해결되면 동북아시아 6개국은 안전보장 협력체를 만들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공동체입니다.

그 후 사태는 혼란해 빠져 북한은 2번의 핵실험을 하게 되고 6자 회담도 폐쇄된 상태입니다. 과거 10년간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후에 형성된 남북 협력관계에 의해 무조건 보장되었습니다. 미국의 정책은 동요가 심하고 불안정했습니다. 일본은 거의 어떠한 노력도 어떠한 희생도 치르지 않고 이익을 향수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최근 긴장되어 끝내 초계함인 천안함 사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쉽게 개선을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선 미국과 일본이 어떻게 노력하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일본과 북한의 관계는 최악이기 때문에 이것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전환한다면 적지 않을 효과가 잇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지금은 일본의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태 타개가 어렵다 하더라도 2005년 9월 19일의 동북아시아 6개국 정부의 공동 성명의 의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어떤 미래가 이 지역에 펼쳐질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해결 방향으로 만들어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협력기구에서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동북아시아 공동체로의 전진은 북한 핵문제 해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만큼 그만큼의 노력을 집중시키지 않고서는 목적 달성은 불가능합니다. 이 지역의 지역 주의적 협력 추진을 위해서는 다른 움직임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이 중요한 활약을 하셨습니다.

1997년부터 아세안(ASEAN)+한중일 정상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듬해 제2회 하노이 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1997년 이후 아시아 통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의견교환을 목적으로 ‘동아시아 경제협력 비전 그룹’ 창설을 제안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2001년 11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제5회 회의에서 ‘동아사아 비전 그룹’의 보고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하여-평화・번영・진보의 지역」이 제출되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 the people of East Asia은 지역 내 모든 국민의 전면적인 발전을 바탕으로 한 평화, 번영, 진보의 동아시아 공동체 East Asian community를 상상하는 것을 희구한다.” 이것이 보고서의 모두에 있는 문구입니다.

‘동아시아’라는 말은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동아시아’는 대체로 동남아시아와 중국, 한국, 일본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협력의 테마로서는 경제에 중점을 두고 경제 통합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여 최종적으로는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로 이끈다’는 것이 제안되어 있습니다. 당면 동아시아자유무역지역(EAFTA)의 형성, ‘동아시아 통화기금’의 창설이 제안된 상태입니다. 정치적, 안전보장상의 협력으로서는 ‘동아시아 정상회의’의 개최가 거론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해서 김대중 대통령의 지휘 하에 출현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아세안 정상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일거에 논의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중국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일본은 뒤처지면 안 된다며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중국에서 동아시아 싱크탱크 네트워크(NEAT) 창설 회의가 열려 그 사무국을 중국사회과학원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몹시 당황한 사람이 일본 싱크탱크 대표로서 베이징 회의에 참석한 국제포럼이사장인 이토 겐이치(伊藤 憲一) 씨입니다. 이토 씨가 주축이 되어 일본정부 외무성과 논의를 거쳐 2004년 5월 18일에 민관일체인 일본 동아시아 공동체 평의회가 출범하였습니다. 회장에 나카소네(中曾根) 전 수상이 취임했습니다.

외무성은 다나카 히토시(田中 均) 심의관을 선두로 열심히 몰두하였습니다. 제1회 정책회의에서 다나카 씨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해 세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일본의 중장기적 국익에 맞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과 협력하는 시스템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표적이 없는 국가주의’, ‘매우 불건전한 국가주의’의 횡행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생각은 타당한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5년 1월 고이즈미(小泉) 수상은 국회 소신연설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에 적극적인 역할을 다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완전히 무시당했습니다. 그것은 고이즈미(小泉)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靖国 神社) 참배 건으로 중국과 결렬 상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수상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 따위는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한편 미국은 ‘동아시아 공동체’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느끼고 이 논의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아미티지(Armitage) 전 국무부장관은 공공연하게 동아시아 공동체에 반대한다고 표명했습니다(아사히, 2005년 5월 1일). 우익적인 논자는 ‘공론(空論)・동아시아 공동체’로서 “중국의 의도가 미국을 배제한 공동체 구상에 일본을 끌어들여 상호우호적인 미일 관계에 쐐기를 박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는 등의 주장을 하였습니다(요미우리, 2005년 3월 27일).

이 상황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평의회에서는 다나카 아키히코(田中 明彦) 리포트「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의 현상, 배경과 일본의 국가 전략」이 정리되었습니다만 발표되지 못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동아시아 공동체에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시키도록 주장하면서 아세안과 한중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중국과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12월 1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아세안 +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려 “동아시아 공동체를 장기적 목표로 실현해나가는 공통의 결의를 다시 한 번 표명하고, 아세안 + 한중일 정상회의 과정은 계속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거기서는 아세안이 추진력이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틀 후 12월 14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동아시아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여기에는 ASEAN 국가와 한중일 외에 인도, 호주, 뉴질랜드 3국도 초대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대립은 타협으로 완화되어 선언에는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이 지역의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견해를 공유한다”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이 들어간 것에 그쳤습니다. 이후 충돌은 심해져 오랜 대립의 냉각기간이 지속되었습니다.

새로운 움직임은 2009년 일본 정권 교체로 정권을 잡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수상이 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내세워 그것이 미국으로부터의 자립, 아시아 중시 외교와 연결되면서 주목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자신들은 아시아 태평양 국가라고 주장하면서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참가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하토야마 수상의 자세는 갑자기 타협적으로 선회하여 “동아시아 공동체의 전제는 우선 미일 동맹이고 앞으로도 동맹을 통한 협력관계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2010년 3월 17일 일본 국제문제연구소 심포지엄에서의 발언)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의 강한 요구로 올해 7월, 아세안 외무장관 회의에서는 미국과 러시아를 동아시아 정상회담에 참여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중국은 불만을 내비치며 아세안이 중심이 되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 지역에서 중국의 힘은 눈에 띄게 강합니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한국 등은 인도나 미국 등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는 노선을 취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밸런스 오브 파워적 생각입니다. 지역주의의 생각 하에서는 모든 공동체 참가자는 큰 나라건 작은 나라건 평등하게 행동하는 것이 기본이고 어떠한 대국도 패권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국과 한일 양국은 이 같은 정신으로 서로 교육해야만 비로소 공동의 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 공동체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평의회 의장 이토 겐이치(伊藤 憲一) 씨는 올해 5월에 쓴 칼럼에서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성에 대해서도 아직 아무런 합의가 없다며 이러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없다’라고 할 수도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세안 제국은 2003년 10월 Bali Concord Ⅱ에서 2020년까지 아세안 공동체를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세안을 안전보장공동체, 경제공동체, 사회문화공동체로서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2007년 1월이 되자 목표 연도를 2015년으로 앞당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년 11월에는 아세안 헌장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아세안 제국은 순조롭게 공동체를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북아시아에서도 사태를 타개하고 동남아시아 공동체와 동북아시아 공동체, 공동의 집이 나란히 건설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2개의 공동체 위에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층 구조 속에서 1층 주인과 2충 주인이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에 들어 있지만 동아시아 공동체와의 관계는 달라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자각적으로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와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두 가지를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양자를 적절히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강해지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김대중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기신 유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번역: 이이다 사오리(전남대학교)
/추모강연문 제공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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