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 Kyung Park - 하시마동창회 명부에 없는 진실의 증언자, 구연철 -아베와 가토 코코 지난 4월 25일...

Su Kyung Park
18 July at 23:43 ·
하시마동창회 명부에 없는 진실의 증언자, 구연철
-아베와 가토 코코
지난 4월 25일 일본의 유명 주간지이며 아베 신조(安陪晋三)씨의 기관지라 할 주간 신초(『週刊新潮』)에 자칭 군함도 원주민이 날조한 징용공의 노예노동£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글쓴이는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록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현 내각관방참여 가토 코코(加藤康子)라는 인물로 아베 총리와는 가족끼리 오가는 어릴 적부터의 소꼽친구이다.그가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고자 할 때부터, 아베 총리가 전면적으로 지지할 것을 약속한 바 있기도 하다. 그는 지금도 자기주장에 맞는 원주민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위의 글을 통해서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구연철(88세)씨를 군함도에 살아본 적도 없는 날조된 원주민으로 매도하고 나선다.(유투브 https://www.youtube.com/watch?v=NjjtGyJr8to 군함도의 진실(1) 구연철은 과연 누구인가? 참고)
구연철 씨는 1931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1939년 9살 때 군함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하나밖에 없는 하시마국민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해방까지 6년간 거주하고 귀국하였다.젊은 시절에는 조선노동당에 들어가 빨치산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74년에 20년을 복역하고 출소하였다. 2011년에는 『신불산 빨치산 구연철 생애사』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최근 활동으로는 군함도에서 목격한 것을 토대로 강제 노동이라는 노동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가토 씨가 얼마나 황당무개하게 구연철 씨를 매도하는가를 소개하면서,지면이 할애되는 한까지 조목조목 비판하기로 한다.
-명부에 없는 구연철
가토 씨는 담배 한 가치 피우면 한 바퀴 다 돌정도로 좁은 군함도에서 학교는 하나밖에 없었으며, 전쟁 중 한 학년이 5,60명 되는 반도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가사키 하시마회의 회장 가지 히데오(加地英夫) 씨로부터 1894년부터 1947년까지 하시마국민학교를 졸업한 리스트인 『하시마교동창회명부』(1950년 출판)를 제공받아 구연철 씨의 이름을 확인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고 그를 날조된 인간으로 매도한다.
여기서 나는 가토 씨는 창씨개명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가 반문하고 싶다. 조선어 사용도 금지된 군함도에서 구연철 씨는 성을 마츠야마(松山)라고 창씨개명하였으니 구연철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제공받았다는 동창회명부 공개를 요구한다. 그의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는 같은 조선인인 내가 확인하고 싶다. 만약 다른 모든 일본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구연철 씨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면 이는 그에 대한 흔적, 기록마저 삭제한 배외주의가 아닌가.
나가사키 하시마회의 회장 가지 씨는 구연철 씨보다 한 학년 아래인 가쿠야마 용수(郭山龍守)라는 이름은 언급한 모양이다. 구연철 씨 또한 일본인 몇 명으로부터 ¢구£가 아닌 ¢우£라는 성으로 기억되고 있다.증언해 준 일본인들의 이름을 밝혀야 마땅하나 가토 씨와 같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둔 일본사회의 배외주의를 우려하여 이 글에서는 공개를 삼가한다.
-왜 구마모토라고 기억하고 있는가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군함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일체 입을 다무는 침묵의 상황이 전개된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섬 밖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조선인 친구에게로 피난시키기로 하는 데, 그곳을 구연철 씨는 구마모토라고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구마모토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하시마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곳이었으나(『신불산』 p.46)
가토 씨가 인터뷰한 군함도 원주민들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면서 구연철 씨를 반박한다. 일본인 원주민들의 말대로 군함도에서 구마모토는 보이지 않는다.구연철 씨가 말하는 구마모토란 노모 반도를 말하며, 그가 노모 반도를 구마모토로 인식하고 있음이 오히려 그가 군함도에 있었던 반증이 된다. 왜냐면,아시아 ・ 태평양전쟁 중 일본은 지리 정보를 올바르게 교육하고 있지 않았다. 지도를 그리거나 가르치는 것이 스파이로 몰릴 정도로,적에게 지리 정보가 누출될 것을 우려하고 있있다.
아이와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 탄광부들에게도 탈출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리에 대한 정보는 화제로도 삼지 못하게 하였다. 노모 반도를 당시 일본인들은 구연철 씨처럼 구마모토나 나가사키 반도 등 다른 이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당시 일본은 세계 지도는 정확하게 그릴지언정, 일본 국내 지도를 그리는 데는 헛점이 많았다. 가토 씨는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만들기 위해 군함도의 긴 역사를 1850년부터 1910년까지만 오려 내었듯이, 이번에도 앞뒤 맥락을 다 잘라버리고 구연철 씨와 원주민들의 단편적 발언만 가져왔다.
-천 명이라는 숫자
천황의 종전 선언 후의 상황을 구연철 씨는 아래와 같이 기억하고 있다.
섬에 남은 것은 조선인들과 오키나와 사람들뿐이었다. ((다들 고향에 돌아갈 생각에 들떠 사라진 중국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찾아보지 않았으나))참으로 기괴한 일이었다. 어른들은 일본인들이 사라지던 그날 밤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졌으리라 의혹은 가졌겠지만 천 명을 한꺼번에 죽인다는 것은 순박한 조선인들의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구연철은 그 당시에는 어려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이 중국인만 골라 일하라 하고 갱 속에 들여보내놓고 입구를 폭파해 몰살시킨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귀국길에 오른 조선인들이 탄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거나 전쟁터에 강제로 끌어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삼았던 조선과 중국의 여성들을 집단학살한 사례를 알게 된 후의 일이었다.))(『신불산』 pp.53-54)
위의 글 중에서 가토 씨는 (( )) 부분은 악의적으로 생략하여 인용하며, 패전 당시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학살당하는 일은 없었다고 사실과 다르다고 매도한다. 그러나 구연철은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한꺼번에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가 오독한 것이다. 특히 (( )) 부분을 같이 읽어보자.중국인만 골라 갱 속에 들여놓고 입구를 폭파한 것으로 의심한 것은 어렸던 그 당시도 아니고 성인이 된 후, 여러가지 정보 예를 들어 가정컨데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침몰 사건이라든지 조선인, 중국인 위안부를 집단학살한 일들을 듣고 난 후 혹시 그때도 그랬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가토 씨는 책을 읽기나 읽었는가.읽었다면 제대로 읽기 바란다.읽고 싶은 부분만 끌어와 주장하는 것을 한자로 견강부회(牽强附會),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한다.
다음으로 천 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전쟁 중 군함도 노동자 수는 약 2000명으로,1945년에는 조선인이 600명에서 800명 정도 있었으며, 중국인도 200명정도 체포되어 있었다. 탄광 노동자의 반은 조선인과 중국인이었다. 1945년 6월 25일 오키나와는 미군에 점령당하고 그후로 B29는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공습을 실행했다. B29가 일본본토로 가기 위해 상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군함도에서는 피난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군함도의 고층 아파트 지하에는 개미집처럼 방공호가 있어 거기로 피신을 해야 하는데, 계속되는 공습 경보로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쳐 자포자기하기에 이르렀다. 또 조선인이나 중국인은 미군이 상륙하는 것은 아닌가, 폭격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했다.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미쓰비시와 군대는 지칠대로 지쳐 피신마저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듣게 하는 한편 불안해 하는 이들을 안심시켜 강제 노동시키기 위해 많은 연합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으니 연합군은 군함도를 공격할 수 없다고 전했다. 연합군 포로란 중국인 200명을 말한다. 구연철 씨뿐만 아니라, 당시 15세로 작년에 작고한 최장섭 씨도 연합군 포로 이야기를 들었는데 2000명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이들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배웠다고 한다. 이런 증언은 경우에 따라 1000명, 2000명, 3000명으로 듣는다. 구연철 씨가 중국인의 숫자를 천 명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군함도에 살고 있었기에 알고 있는 내용으로,이야말로 그가 원주민이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가토 씨가 찾은 원주민들은 그런 증언을 해주지 않던 것인가,아니면 그 원주민들의 증언도 묵살한 것인가.하나의 가능성은 가토 씨가 찾은 원주민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다. 1945년 4월 학교제도가 변경되거나 전염병이 돌아 학교가 폐쇄되는 일이 생긴다. 구연철 씨가 당시 고등과 2년 때일이었다. 고등과는 4년제 약식 학부이다. 군함도는 국민학교밖에 없고 경제적 여우가 있는 사람들은 중학교는 나가사키 시내로 하숙을 하며 다녀야 했다.
-군함도와 기시 노부스케
가토 씨는 구연철 씨가 말했다는 천명 학살 발언에 반박하기 위해 『화인노무자조서보고서』(미쓰비시다카시마광업소하시마갱)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자료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이 보고서는 패전 1년 후인 1946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자료로, 2차 대전의 승전국 중국에 대응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일본은 4만명의 중국인을 일본으로 강제 연행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다. 중국은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인은 적국의 포로라는 신분이었는데, 이들을 강제 노동시킨 것이다. 이는 전쟁범죄로 보고서는 연합군(점령군)에게 폭로될 것이 두려워 작성된 것이다.
전쟁 중 조선인 강제동원, 중국인 강제연행을 계획한 책임자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씨였다. 아베 씨의 외할아버지이다. 기시 씨를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것을 면하기 위하여 기시의 부하들이 재판을 대비하여 조사하여 작성한 것이 이 보고서이다. 기시 씨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판을 면하게 되는데 그때 이 보고서가 더이상 필요없다고 판단한 외무성은 이 보고서 전부를 소각, 파기하기로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1993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은 이 보고서 중 군함도에 관계되는 부분을 군함도 탄광의 폐허 속에서 발견한다. 상세한 명부류를 포함하여 1년 후인 1994년 한권의 책으로 펴낸 것이 『녹슨 톱니바퀴를 돌리자』 이다. 이 보고서를 단초로 소위 나가사키중국인강제연행 재판이 열려 2015년 미쓰비시는 중국에 사죄 발언을 하게 된다. 사죄했다는 것은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이 보고서는 일본이 그 동안 부인해 왔던 중국인의 강제 동원을 입증한다. 200명의 강제 동원을 입증하는 이 보고서를 거론하며,1000명은 학살하지 않았다고 구연철 씨를 반박하는 가토 씨의 뻔뻔스러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 보고서를 그가 언급하고 있을 정도라면, 군함도에서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하여 사망률이 더 높음을 입증하는 화장매장인허증 소위 하시마 자료도 알고 있을 터이다. 이 자료는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1986년 발굴한 자료로 군함도 나아가 일본에서 일어난 조선인 강제노동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인 강제노동의 실태를 파악, 연구하는 단체는 비단 이곳뿐이 아니며, 일본 곳곳에 산재한다. 2012년 『사망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라는 긴 이름으로 한국에서 출판된 한 권의 책이 있는데, 이는 한일 교류가 생산한 군함도 관계 강제동원에 대한 최고의 역작이다. 한일, 한중, 중일 교류가 한창인 가운데, 피해자를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으로 분열시키는 가토 씨는 장사 속으로 세계를 보는 이상 유네스코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가 가족을 부른 이유
재일한국인이라는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씨는 군함도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전쟁 중에 하시마에서는 험한 꼴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어요. 주위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고,그렇게 나쁜, 부정적 이미지는 없어요. 지옥에서 두들겨 맞고 자주 린치 당하는 정말 그런 곳이었다면 그런 모습을 보이려고 (가족은)부를리 없지요.
그의 아버지는 당시 오장(伍長)이라는 직급을 가졌다.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미쓰비시는 당시 군수공장으로 지정되어, 더 이상 민간회사가 아닌 일본군대와 같이 되었다. 오장은 100명을 거느리는 군대의 소장으로 관리자 신분이다. 일본인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을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학대하는 앞잡이이다. 해방 후 그의 아버지는 왜 귀국 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것은 귀국하면 친일파로서 복수를 당하기 때문이다. 오장이라는 신분은 그런 신분인 것으로 그의 아버지의 행적이 매우 의심스럽다.
군함도는 지옥섬,감옥섬이라는 별명을 가지는데 이런 별명은 원래 일본인이 지었을 만큼 일본인에게도 이 섬은 가혹하였다. 1974년 발행 『아사히저널』을 살펴보면, 일용직 일본인 선장 야마구치 쓰요지(山口津代次 당시 78세)씨는 군함도를 견디지 못하고 헤엄쳐 건너려고 하는 일본인이 있는가 하면, 갱목으로 뗏목을 만들어 탈주하려는 일본인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조선인, 중국인에 대해서도 증언하는데 그들의 울음 소리가 귓가에 여전하다고 하였다. 일본인 작가 고자토 가쿠시(小里岳紫)씨는 『실화 군함도와 연합군대』(1998)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방이 바다라서 철창을 할 필요도 없고, 병원에 가도 진단서를 잘 써주지 않아서 무단으로 결근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두들겨 패 주면 된다. 매일 두들겨 맞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도망갈 줄도 모르고 덜덜 떨기만 하다 오줌까지 싼다.본보기로 제일 약한 사람을 골라 두들겨 패곤 했다. 특히 조선인이 뗏목을 타고 노모 반도로 탈출을 하면, 노모 반도 사람들이 회사에 알려 주어서 목도로 죽을 만큼 구타했다. 매일 누군가가 목도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조선인 기숙사에서는 우는 소리가 끊기는 날이 없었다. 섬 자체에 폭력이 만연하였으며, 조선인에 대한 폭력이 더 심하였음은 많은 일본인이 증언하고 있다.
구연철 씨의 가족은 어떤 경위로 군함도에 들어가게 되었나.할머니, 어머니와 세 여동생, 구연철 씨 6명은 1939년 군함도로 들어가게 되는데 가족까지 함께 살 수 있는 조선인은 드물었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약간의 돈도 모으고 단칸방이나마 사택도 얻어 가족을 초청하였다. 가족을 불러들이는 경우는 사할린의 탄광에서 강제 동원, 강제 노동당한 문갑진(1918년 생) 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갑진 씨는 1941년 대구에서 가라후토(樺太)로 이동,1944년 군함도로 이중징용당하는데, 가라후토로 이동하고 1년후인 1942년 ¢회사에서 인제 가족 모두 부를 사람부 르라고 카대요.그래서 불렀어요.£라고 증언한다. 구연철 씨의 아버지가 가족을 부른 것은 그가 군함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쓰비시가 가족을 부르게끔 한 것은 그를 군함도에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가족이 정착하게 되면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탄광부들은 더 열심히, 더 성실히 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채탄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주의 노림수인 것이다. 고자토 씨는 메이지 시대부터 군함도에 4대에 걸쳐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가족 단위로 살고 있었다 한다.
-군함도의 속사정과 가토 씨의 속내
군함도는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될 당시 2017년 12월 1일까지 군함도 견학자들에게 전쟁 중에 조선인이 강제 노동당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작년 12월 군함도에서 980km 떨어진 동경에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할 것으로 일본 정부가 발표한 바 있으나, 현재 이렇다 할 움직임은 감지되고 있지 않다. 움직임이 있다면, 군함도 상륙 크루주 선들이 더 이상 군함도의 홍보와 선전에 세계유산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가토 씨는 이런 글을 왜 쓰게 되었는가. 현재, 군함도는 기한이 2020년 8월까지인 인포메이션 센터 미건립으로 세계유산등록이 취소 위기에 몰리고 있다. 가토 씨는 이런 파국을 헤쳐나가기 위하여 구연철 씨를 날조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증언을 날조로 만들고 있다. 증언의 날조는 역사의 날조로 이어져, 이글은 인포메이션 센터 건립이 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끔 한다. 끝으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자면, 그가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만든 당사자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되는 책임자인만큼 그의 속내가 인포메이션 센터를 만들지 못하는 현상황에 대한 단순한 책임회피를 위해 이글을 적고 있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군함도는 침몰하고 있다.
-후기
군함도는 일본정부, 나가사키시, 원주민, 선박회사, 관광객 등 동상이몽의 여러 단체가 여러 이해 관계, 속사정에 얽혀 꼼짝도 못할 외통수에 걸려 있다. 그 하나의 표상이 현지 시간 7월 2일 있었던 군함도 원주민 사카모토 토토쿠 (坂本道徳)씨의 제네바 UN구주본부에서의 발언이다. 이들은 군함도를 지옥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해라고 반론하였다.사카모토 씨는 어떠한 경위로 제네바 무대까지 올랐는가. 그 속내를 읽어 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이상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장 시바타 토시아키의 감수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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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의 진실(1) 구연철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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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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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하시마회의 회장 가지 씨는 구연철 씨보다 한 학년 아래인 가쿠야마 용수(郭山龍守)라는 이름은 언급한 모양이다. 구연철 씨 또한 일본인 몇 명으로부터 ¢구£가 아닌 ¢우£라는 성으로 기억되고 있다.증언해 준 일본인들의 이름을 밝혀야 마땅하나 가토 씨와 같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둔 일본사회의 배외주의를 우려하여 이 글에서는 공개를 삼가한다.
-왜 구마모토라고 기억하고 있는가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군함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일체 입을 다무는 침묵의 상황이 전개된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섬 밖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조선인 친구에게로 피난시키기로 하는 데, 그곳을 구연철 씨는 구마모토라고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구마모토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하시마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곳이었으나(『신불산』 p.46)
가토 씨가 인터뷰한 군함도 원주민들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면서 구연철 씨를 반박한다. 일본인 원주민들의 말대로 군함도에서 구마모토는 보이지 않는다.구연철 씨가 말하는 구마모토란 노모 반도를 말하며, 그가 노모 반도를 구마모토로 인식하고 있음이 오히려 그가 군함도에 있었던 반증이 된다. 왜냐면,아시아 ・ 태평양전쟁 중 일본은 지리 정보를 올바르게 교육하고 있지 않았다. 지도를 그리거나 가르치는 것이 스파이로 몰릴 정도로,적에게 지리 정보가 누출될 것을 우려하고 있있다.
아이와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 탄광부들에게도 탈출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리에 대한 정보는 화제로도 삼지 못하게 하였다. 노모 반도를 당시 일본인들은 구연철 씨처럼 구마모토나 나가사키 반도 등 다른 이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당시 일본은 세계 지도는 정확하게 그릴지언정, 일본 국내 지도를 그리는 데는 헛점이 많았다. 가토 씨는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만들기 위해 군함도의 긴 역사를 1850년부터 1910년까지만 오려 내었듯이, 이번에도 앞뒤 맥락을 다 잘라버리고 구연철 씨와 원주민들의 단편적 발언만 가져왔다.
-천 명이라는 숫자
천황의 종전 선언 후의 상황을 구연철 씨는 아래와 같이 기억하고 있다.
섬에 남은 것은 조선인들과 오키나와 사람들뿐이었다. ((다들 고향에 돌아갈 생각에 들떠 사라진 중국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찾아보지 않았으나))참으로 기괴한 일이었다. 어른들은 일본인들이 사라지던 그날 밤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졌으리라 의혹은 가졌겠지만 천 명을 한꺼번에 죽인다는 것은 순박한 조선인들의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구연철은 그 당시에는 어려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이 중국인만 골라 일하라 하고 갱 속에 들여보내놓고 입구를 폭파해 몰살시킨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귀국길에 오른 조선인들이 탄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거나 전쟁터에 강제로 끌어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삼았던 조선과 중국의 여성들을 집단학살한 사례를 알게 된 후의 일이었다.))(『신불산』 pp.53-54)
위의 글 중에서 가토 씨는 (( )) 부분은 악의적으로 생략하여 인용하며, 패전 당시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학살당하는 일은 없었다고 사실과 다르다고 매도한다. 그러나 구연철은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한꺼번에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가 오독한 것이다. 특히 (( )) 부분을 같이 읽어보자.중국인만 골라 갱 속에 들여놓고 입구를 폭파한 것으로 의심한 것은 어렸던 그 당시도 아니고 성인이 된 후, 여러가지 정보 예를 들어 가정컨데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침몰 사건이라든지 조선인, 중국인 위안부를 집단학살한 일들을 듣고 난 후 혹시 그때도 그랬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가토 씨는 책을 읽기나 읽었는가.읽었다면 제대로 읽기 바란다.읽고 싶은 부분만 끌어와 주장하는 것을 한자로 견강부회(牽强附會),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한다.
다음으로 천 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전쟁 중 군함도 노동자 수는 약 2000명으로,1945년에는 조선인이 600명에서 800명 정도 있었으며, 중국인도 200명정도 체포되어 있었다. 탄광 노동자의 반은 조선인과 중국인이었다. 1945년 6월 25일 오키나와는 미군에 점령당하고 그후로 B29는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공습을 실행했다. B29가 일본본토로 가기 위해 상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군함도에서는 피난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군함도의 고층 아파트 지하에는 개미집처럼 방공호가 있어 거기로 피신을 해야 하는데, 계속되는 공습 경보로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쳐 자포자기하기에 이르렀다. 또 조선인이나 중국인은 미군이 상륙하는 것은 아닌가, 폭격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했다.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미쓰비시와 군대는 지칠대로 지쳐 피신마저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듣게 하는 한편 불안해 하는 이들을 안심시켜 강제 노동시키기 위해 많은 연합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으니 연합군은 군함도를 공격할 수 없다고 전했다. 연합군 포로란 중국인 200명을 말한다. 구연철 씨뿐만 아니라, 당시 15세로 작년에 작고한 최장섭 씨도 연합군 포로 이야기를 들었는데 2000명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이들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배웠다고 한다. 이런 증언은 경우에 따라 1000명, 2000명, 3000명으로 듣는다. 구연철 씨가 중국인의 숫자를 천 명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군함도에 살고 있었기에 알고 있는 내용으로,이야말로 그가 원주민이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가토 씨가 찾은 원주민들은 그런 증언을 해주지 않던 것인가,아니면 그 원주민들의 증언도 묵살한 것인가.하나의 가능성은 가토 씨가 찾은 원주민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다. 1945년 4월 학교제도가 변경되거나 전염병이 돌아 학교가 폐쇄되는 일이 생긴다. 구연철 씨가 당시 고등과 2년 때일이었다. 고등과는 4년제 약식 학부이다. 군함도는 국민학교밖에 없고 경제적 여우가 있는 사람들은 중학교는 나가사키 시내로 하숙을 하며 다녀야 했다.
-군함도와 기시 노부스케
가토 씨는 구연철 씨가 말했다는 천명 학살 발언에 반박하기 위해 『화인노무자조서보고서』(미쓰비시다카시마광업소하시마갱)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자료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이 보고서는 패전 1년 후인 1946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자료로, 2차 대전의 승전국 중국에 대응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일본은 4만명의 중국인을 일본으로 강제 연행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다. 중국은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인은 적국의 포로라는 신분이었는데, 이들을 강제 노동시킨 것이다. 이는 전쟁범죄로 보고서는 연합군(점령군)에게 폭로될 것이 두려워 작성된 것이다.
전쟁 중 조선인 강제동원, 중국인 강제연행을 계획한 책임자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씨였다. 아베 씨의 외할아버지이다. 기시 씨를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것을 면하기 위하여 기시의 부하들이 재판을 대비하여 조사하여 작성한 것이 이 보고서이다. 기시 씨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판을 면하게 되는데 그때 이 보고서가 더이상 필요없다고 판단한 외무성은 이 보고서 전부를 소각, 파기하기로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1993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은 이 보고서 중 군함도에 관계되는 부분을 군함도 탄광의 폐허 속에서 발견한다. 상세한 명부류를 포함하여 1년 후인 1994년 한권의 책으로 펴낸 것이 『녹슨 톱니바퀴를 돌리자』 이다. 이 보고서를 단초로 소위 나가사키중국인강제연행 재판이 열려 2015년 미쓰비시는 중국에 사죄 발언을 하게 된다. 사죄했다는 것은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이 보고서는 일본이 그 동안 부인해 왔던 중국인의 강제 동원을 입증한다. 200명의 강제 동원을 입증하는 이 보고서를 거론하며,1000명은 학살하지 않았다고 구연철 씨를 반박하는 가토 씨의 뻔뻔스러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 보고서를 그가 언급하고 있을 정도라면, 군함도에서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하여 사망률이 더 높음을 입증하는 화장매장인허증 소위 하시마 자료도 알고 있을 터이다. 이 자료는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1986년 발굴한 자료로 군함도 나아가 일본에서 일어난 조선인 강제노동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인 강제노동의 실태를 파악, 연구하는 단체는 비단 이곳뿐이 아니며, 일본 곳곳에 산재한다. 2012년 『사망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라는 긴 이름으로 한국에서 출판된 한 권의 책이 있는데, 이는 한일 교류가 생산한 군함도 관계 강제동원에 대한 최고의 역작이다. 한일, 한중, 중일 교류가 한창인 가운데, 피해자를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으로 분열시키는 가토 씨는 장사 속으로 세계를 보는 이상 유네스코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가 가족을 부른 이유
재일한국인이라는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씨는 군함도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전쟁 중에 하시마에서는 험한 꼴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어요. 주위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고,그렇게 나쁜, 부정적 이미지는 없어요. 지옥에서 두들겨 맞고 자주 린치 당하는 정말 그런 곳이었다면 그런 모습을 보이려고 (가족은)부를리 없지요.
그의 아버지는 당시 오장(伍長)이라는 직급을 가졌다.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미쓰비시는 당시 군수공장으로 지정되어, 더 이상 민간회사가 아닌 일본군대와 같이 되었다. 오장은 100명을 거느리는 군대의 소장으로 관리자 신분이다. 일본인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을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학대하는 앞잡이이다. 해방 후 그의 아버지는 왜 귀국 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것은 귀국하면 친일파로서 복수를 당하기 때문이다. 오장이라는 신분은 그런 신분인 것으로 그의 아버지의 행적이 매우 의심스럽다.
군함도는 지옥섬,감옥섬이라는 별명을 가지는데 이런 별명은 원래 일본인이 지었을 만큼 일본인에게도 이 섬은 가혹하였다. 1974년 발행 『아사히저널』을 살펴보면, 일용직 일본인 선장 야마구치 쓰요지(山口津代次 당시 78세)씨는 군함도를 견디지 못하고 헤엄쳐 건너려고 하는 일본인이 있는가 하면, 갱목으로 뗏목을 만들어 탈주하려는 일본인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조선인, 중국인에 대해서도 증언하는데 그들의 울음 소리가 귓가에 여전하다고 하였다. 일본인 작가 고자토 가쿠시(小里岳紫)씨는 『실화 군함도와 연합군대』(1998)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방이 바다라서 철창을 할 필요도 없고, 병원에 가도 진단서를 잘 써주지 않아서 무단으로 결근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두들겨 패 주면 된다. 매일 두들겨 맞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도망갈 줄도 모르고 덜덜 떨기만 하다 오줌까지 싼다.본보기로 제일 약한 사람을 골라 두들겨 패곤 했다. 특히 조선인이 뗏목을 타고 노모 반도로 탈출을 하면, 노모 반도 사람들이 회사에 알려 주어서 목도로 죽을 만큼 구타했다. 매일 누군가가 목도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조선인 기숙사에서는 우는 소리가 끊기는 날이 없었다. 섬 자체에 폭력이 만연하였으며, 조선인에 대한 폭력이 더 심하였음은 많은 일본인이 증언하고 있다.
구연철 씨의 가족은 어떤 경위로 군함도에 들어가게 되었나.할머니, 어머니와 세 여동생, 구연철 씨 6명은 1939년 군함도로 들어가게 되는데 가족까지 함께 살 수 있는 조선인은 드물었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약간의 돈도 모으고 단칸방이나마 사택도 얻어 가족을 초청하였다. 가족을 불러들이는 경우는 사할린의 탄광에서 강제 동원, 강제 노동당한 문갑진(1918년 생) 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갑진 씨는 1941년 대구에서 가라후토(樺太)로 이동,1944년 군함도로 이중징용당하는데, 가라후토로 이동하고 1년후인 1942년 ¢회사에서 인제 가족 모두 부를 사람부 르라고 카대요.그래서 불렀어요.£라고 증언한다. 구연철 씨의 아버지가 가족을 부른 것은 그가 군함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쓰비시가 가족을 부르게끔 한 것은 그를 군함도에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가족이 정착하게 되면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탄광부들은 더 열심히, 더 성실히 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채탄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주의 노림수인 것이다. 고자토 씨는 메이지 시대부터 군함도에 4대에 걸쳐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가족 단위로 살고 있었다 한다.
-군함도의 속사정과 가토 씨의 속내
군함도는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될 당시 2017년 12월 1일까지 군함도 견학자들에게 전쟁 중에 조선인이 강제 노동당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작년 12월 군함도에서 980km 떨어진 동경에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할 것으로 일본 정부가 발표한 바 있으나, 현재 이렇다 할 움직임은 감지되고 있지 않다. 움직임이 있다면, 군함도 상륙 크루주 선들이 더 이상 군함도의 홍보와 선전에 세계유산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가토 씨는 이런 글을 왜 쓰게 되었는가. 현재, 군함도는 기한이 2020년 8월까지인 인포메이션 센터 미건립으로 세계유산등록이 취소 위기에 몰리고 있다. 가토 씨는 이런 파국을 헤쳐나가기 위하여 구연철 씨를 날조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증언을 날조로 만들고 있다. 증언의 날조는 역사의 날조로 이어져, 이글은 인포메이션 센터 건립이 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끔 한다. 끝으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자면, 그가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만든 당사자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되는 책임자인만큼 그의 속내가 인포메이션 센터를 만들지 못하는 현상황에 대한 단순한 책임회피를 위해 이글을 적고 있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군함도는 침몰하고 있다.
-후기
군함도는 일본정부, 나가사키시, 원주민, 선박회사, 관광객 등 동상이몽의 여러 단체가 여러 이해 관계, 속사정에 얽혀 꼼짝도 못할 외통수에 걸려 있다. 그 하나의 표상이 현지 시간 7월 2일 있었던 군함도 원주민 사카모토 토토쿠 (坂本道徳)씨의 제네바 UN구주본부에서의 발언이다. 이들은 군함도를 지옥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해라고 반론하였다.사카모토 씨는 어떠한 경위로 제네바 무대까지 올랐는가. 그 속내를 읽어 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이상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장 시바타 토시아키의 감수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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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의 진실(1) 구연철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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