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7

02 <달라이 라마와 도올…> 내고 강연회 연 김용옥씨/청년 붓다의 앎과 깨달음 설파

아시아에 녹색당 ‘큰 깃발’ 꽂다 - 시사저널

불교는 과학이요 무신론이다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승인 200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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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 도올…> 내고 강연회 연 김용옥씨/청년 붓다의 앎과 깨달음 설파




객석은 물론 통로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현대사를 압축한 비디오 상영이 끝나자 도올 김용옥씨가 무대 앞 왼쪽에 등장했다. 카메라들이 하얀 두루마기 앞으로 몰려들었다. 지난해 5월, 방송 강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를 돌연 중단하고 ‘잠적’한 지 1년3개월 만에 대중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토요일 오후, 빗줄기를 뚫고 서울 장충동 동국대 중강당을 찾은 청중은 천명이 넘어 보였다. 도올은 통로를 가득 메운 청중을 무대 위로 올라오게 했다. 지난 8월10일 오후 3시, 참여불교재가연대가 주최한 도올 강연회에는 불교학자와 스님 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최근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전 3권, 통나무>을 펴낸 도올은 강연 주제를 초기 불교, 즉 불교의 본래 모습에 맞추고 있었다.


종교는 이성의 시련을 거쳐야 한다


도올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과 부처의 고뇌를 비교하면서 2천5백여 년 전 ‘역사적인 부처, 고민하는 청년 싯다르타’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갔다. “<레 미제라블>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 비참’이다. 부처의 고민이었던 ‘일체개고’와 무관하지 않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이 제기한 불평등 문제는 부처가 맞서야 했던 당시 인도 사회의 카스트 제도와 다르지 않았다. 위고의 고민은 신의 휘하에 있던 중세적 고민이 아니었다. 근대적 인간의 고민이었다.


도올의 이 날 강연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는 과연 어떤 종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파격적인 지적 탐사였다. 도올은 초기 불교와 현재 한국 불교, 불교와 기독교의 현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가차없이 비판했다. 한국 불교는 부처의 ‘깨달음’을 오해한 나머지 앎(지식)을 폄하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한국 사회를 광적인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도올의 키워드는 근대적 인간, 즉 합리적(과학적) 이성이었다. 도올에 따르면 ‘무신론을 위한 신론’ 즉 ‘과학으로서의 종교’가 현대 종교가 안고 있는 역기능들을 개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정적 인간을 근대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 신자였다고 밝힌 도올은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이 지켜 보는 세계는 얼마나 무서운가”라며 신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타율적 의지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도올은 달라이 라마와 나눈 대화를 소개하며 불교의 본래 모습을 이야기했다. “불교는 무신론인가?”(도올) “물론이다. 무신론이다”(달라이 라마). “불교는 그럼 종교가 아닌가?”(도올) “과학이다”(달라이 라마). (이 장면은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제3권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도올은 “많은 사람이 무신론을 오해하는데, 무신론은 가장 완벽한 신론의 한 형태이다. 초월적 존재를 거부하는 순간 우주는 스스로 작동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도올은 수시로 ‘내 책 안에 다 있다’고 말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강연에서 도올은 ‘과연 부처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부분에서 카랑카랑한 쇳소리를 냈다. 도올이 보기에, 붓다는 깨달은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아는 자’였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안 것은 욕망 제어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청년 붓다가 진정으로 안 것은 바로 연기(緣起)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론은, 이 세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철저한 과학적 통찰이었다. 도올은 “붓다는 2천5백여 년 전에 과학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영성을 부여했다”라고 말했다.


도올에 따르면, 유교의 시각에서 보면, 불교와 기독교는 유사성이 강하다. 예컨대 주어, 즉 ‘나’라는 존재가 선명하게 전제되는 언어(산스크리스트-팔리어와 인도-유럽어는 같은 뿌리다)라며, 싯다르타의 위대한 혁명은 주어와 술어의 주종 관계를 역전시켜, 술어를 통해 주어(나; 아트만)를 규정하면서 ‘무아론’을 제창한 데 있다(이번 책의 ‘잔디밭의 비유’에 해당한다).


도올은 “기독교는 과학적 사유와 종교적 사유가 서로 대립하지만, 불교는 과학적으로 사유(연기)할수록 영성이 높아진다”라고 말했다. 도올은 선불교의 전통을 이어온 한국 불교에 양보할 수 없는 위대성이 있지만 <팔리어삼장>(서기 25년께 스리랑카에 전승, 기록된 초기 경전. <팔만대장경>의 <아함경>과 내용이 같다)으로 보는 초기 불교는 현재 불교와 다를 수 있다면서, 한국 불교는 앎(지식)과 깨달음을 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의 시련을 거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달라이 라마의 ‘법어’를 인용한 도올은, ‘바른 원칙(계) 바른 집중(정) 바른 지식(혜)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불교 이상의 복음의 메시지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날 강연은 파격적인 내용에 견주어 약간 산만했다. 도올이 강의안을 준비하지 않은 최초의 대중 강연이어서 자신도 강의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밝혔듯이, 실제로 두세 차례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청중은 강연 내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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