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5

07 문명론의접합으로본최병헌의종교담론* 李 幸 勳(Lee, Haenghoon)



문명론의접합으로본최병헌의종교담론*

李 幸 勳(Lee, Haenghoon)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Ⅰ. 계몽과 구원의 빛

Ⅱ. 문명론과 종교

Ⅲ. 기독교와 종교 변증

Ⅳ. 타자의 내면화와 주체의 재구성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 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07-361-AM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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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요약>

기독교 수용의 역사성에 비해 회심을 단행한 지식인들의 사유 변화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독교 토착화과정에서 유교적 지식인들은 기독교 관련 문서 번역과 교리 전파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최병헌 의 삶은 당대 유교적 지식인의 기독교 경험과 실천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의 종교 담론은 문명론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만나는 지점에 서 형성되었다. 한국에서 활동한 당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과 달리 종교와 정치를 상호 보완적 관계로 파악했다. 이처럼 종교와 정치를 불 가분의 관계로 보면서도 종교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은 유 교의 정치ᆞ사회적 전통과 기독교 문명론의 영향이다. 정교일치 관념은 사회적 기능을 다한 유교 대신에 기독교 수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작 동했다. 최병헌이 선유활동의 명분으로 제시한 신민의 도리, 정치와 종교 의 보완, 기독교 인애의 실천 등도 문명론과 정교관의 연장선에 있다. 문명론과 기독교 세계관의 접합을 확인할 수 있는 초기 저술로 성산 명경을 들 수 있다. 대화체 몽유록 소설 형식을 차용한 성산명경은 자 신의 개종 체험을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불도와 기독교 간의 대화 는 세계 창조론, 인간 영혼론, 내세론 등으로 이어졌는데, 유교도가 기독 교를 인정한 이유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기독교 문명의 힘 때문이었다. 이는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최병헌의 기독교 수용과 개종 이 철저하게 서양 문명론 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증거이다. 최병헌의 회심 은 유교 지식체계의 균열에서 비롯되었지만 유교의 가치를 전복하는 데 로 나아가지 않았다.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확신했지만 동양 고전과 재래 학술사상의 가치에 대한 인정은, 그를 단순한 서구주의자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주제어 : 최병헌, 문명론, 유교, 기독교, 성산명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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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계몽과 구원의 빛

대한제국은 중화질서의 종말과 함께 성립했다. 서양에 무릎 끓은 중화 문명에 대한 날선 비판의 화살은 유교를 과녁으로 삼았다. 서양 신학문으로 문명개화하자는 주장이 사회적 담론으로 부상하면서 유교와의 충돌이 점증 했다.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 고종의 교육조서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부강’ 과 ‘실용’의 기치 아래 놓인 전통 가치체계는 더 이상 광휘를 발하기 어려웠 다. 유교의 폐단에 대한 비판이 유교적 가치 전반에 대한 회의로 확대되었 고 중화의 위상을 서양 문명이 대체해 나갔다. 유교적 가치 체계의 해체는 근대식 학제 도입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었다. 부강이 문명과 동일시되고 ‘식산’과 ‘교육’이 개화와 자강의 시대적 과제가 되면서 도덕과 윤리를 중시 했던 교육도 농ㆍ공ㆍ상을 강조하는 실용 학문 뒤로 밀려났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 수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1) 개신

교 선교사들은 서양 근대 학문의 전파뿐만 아니라 구미에 한국을 알리는 가교였다.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토착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들의 역 할도 중요했다. 신도들 가운데는 선교사들의 초기 성서번역 작업에 참여 하기도 했고, 권서(勸書)가 되어 기독교 교리를 확산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2) 서양 문명의 열매가 과학기술이라면 그 뿌리는 종교라는 논리가 개화의 한 방편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서양 국가들처럼 문명하고 부강 하기 위해서는 기술만 배워서는 안 되고 정치ㆍ사회 제도와 더불어 그들 의 종교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국가의 종교로 기독교가 소개되었 고, 서양 중심의 문명론은 기독교를 ‘세계 종교’, ‘보편 종교’로 하는 지배 담론 형성에 일조했다. 기독교를 정점으로 하는 ‘종교’ 개념과 문명 담론



1) 본고에서는 천주교와 특별히 구분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기독 교로 칭한다.

2) 이광린은 기독교가 빠르게 토착화할 수 있었던 데는 최병헌과 같은 유교적 지식인의 역할이 컸다고 지적했다.(「濯斯 崔炳憲(1859∼1927)」, 開化期의 人物,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이 상호의존하면서 식민주의와 공모하였다. 생물진화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진화론과 창조론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의 기묘한 결합 속에서 공 고화된 문명론은 한편으로 재래 종교를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여 식민지 인들의 재래종교에 대한 폄하와 부정을 강제했다.3)

18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개신교 선교사들의 교육 및 의료사업은 기 독교 현지화의 촉매였다. 한국 감리교회의 3번째 목사이며, 최초의 신학 자로 평가받는 탁사 최병헌(濯斯 崔炳憲, 1858∼1927)은 본래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유교적 지식인이었다. 다수의 한 시를 남겼고, 선조의 글을 모아 낙납집(洛南集)을 간행할 때는 직접 발문을 썼으며,4) 성산명경(聖

山明鏡)(1909), 만종일련(萬宗一臠)(1922), 한철집요(漢哲輯要)(1922) 등

3대 저작은 전통 학문과 재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상당했음을 증명한다. 그가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1880년에 친구가 상해에서 가져 온 영환 지략(瀛環志略)을 통해서였다. 윤치호의 소개로 1889년 미국 선교사 존스

(George Heber Jones, 趙元時, 1867~1919)5)에게 한문과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면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기독교는 부모와 임금을 모 르는 종교요, 선교사와는 삼강오륜을 논할 수 없다고 했다.6) 이렇게 기독 교를 불온한 사상으로 여겨 개종을 거부했던 그가 결국 회심에 이르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종교적 갈등으로 잠조차 제대로 못 이루다가 개종에 이르 게 된 것은 아펜젤러로부터 얻은 한문성경을 경학처럼 연구하고,7) 만국통



3) 선교사들은 문명을 야만-미개화-반개화-문명의 4등급으로 구분했고, 조선은 청이나 인도와 함께 반개화한 나라로 인식했다. 개화의 등급을 인종론과 연

결하여 피부색이 밝을수록 상위 문명에 속한다는 비과학적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인죵과 화의 등급」, 그리스도신문, 1901.9.12.)

4) ‘洛南’은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崔山輝(1585~1637)의 호다. 최병헌은 그의 9 대손으로 편집을 맡았고, 崔炳年이 1927년에 文集을 간행하였다.

5) 존스 목사는 미국 북감리회의 개척 선교사 중 한명으로 1888년 5월에 내한하 여 20년간 서울과 인천과 강화 지역에서 활동했다.(G. H. 존스 지음, 옥성득 번역, 한국교회형성사, 홍성사, 2013, 11쪽)

6) 노블 부인 편, 승리의 생활, 조선기독교 창문사, 1927, 15쪽.

7) 한문 성경의 전래는 귀츨라프(1832)와 토머스(1866)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성

감(萬國通鑑), 태서신사(泰西新史), 서정총서(西政叢書), 지리약해(地理略解), 격물탐원(格物探源), 천도소원(天道溯源), 심령학(心靈學), 자 서조동(自西徂東) 등을 통해 확인한 서양 문명의 발달상은 신학문에 대한 의욕을 고취하였고, 기독교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8)

그는 1893년 2월 35세 때 기독교에 입교하였고,9) 9월에는 감리교회 전

도사가 되어 정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으며, 1902년 5월 목사 안수 후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12년간 봉직했다.10) 회갑 을 맞아서는 “일찍이 유교의 명목만을 취하여 꿈결을 헤매다가, 늦게야 천리를 쫓아 참 진리를 괴었네(早盜儒名多醉夢, 晩從天理愛眞光)”11)라고



경의 번역은 역관 최창현의 성경직해광익(1784)가 최초이다. 이 책은 천주 교 조선교구에서 성경직해(1897)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는데 성경 1/3정도 만 발췌 번역한 것이었다. 1882년에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서 한문 성경을 전수받은 서상륜, 백홍준 등이 번역한 <예수 셩교누가복음젼셔>, 1885년에는 일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수정을 중심으 로 번역한 <마가의 전복음셔언해>가 나왔다. 한글로 완역한 최초의 성경은 1911년 출간된 셩경젼셔이다.

8) 최병헌의 일화 중에서 개종의 동기를 찾는 경우도 있다. 첫째, 버려진 환자를 제중원의 서양 의사가 데려다 치료해 고쳤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에 대한 의식이 바뀌었고, 둘째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정동의 선교사 집으 로 피신해 보호를 받은 것, 셋째는 1892년 다시 과거에 응시했다가 실패하면 서 종교철학 연구에 전념했다는 것이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211쪽)

9) 이승만, 이상재, 안국선 등 독립협회 회원과 정부고관들이 옥중에서 개신교 를 받아들인 1904년이 한국 교회에 본격적으로 지식인들이 입교한 시기라고 할 때, 최병헌의 입교와 세례는 10년 이상 앞섰다.(최익제, 「한말ㆍ일제강점 기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원대 박사논문, 2009, 23쪽 참조.)

10) 목회 활동 외에도 교육 및 대중 계몽에 힘썼는데, 1895년 배재학당 안에 독 립협회 전신인 協成會 조직에 참여했고, 아펜젤러와 조선회보를 간행했으 며, 순한글 제국신문을 창간하고(1897), 1898년 성서번역에 참여하여 1900 년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 발간에 공헌했다. 1902년에는 존스 박사와 신학월 보를 창간하였고, 황성신문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국민교육회 정동교회 지부인 懿法會 회장을 맡았고, 進明義塾을 직접 운영하여 15세 이상 30세 이 하를 대상으로 한문, 일어, 산술 등을 가르쳤으며, 1906년에는 관립 외국어학 교에서 한학을 교수했다.

소회를 [1]밝혔다. 최병헌의 기독교 수용은 재래 종교 특히 형해화된 유교적 가치와 임계에 다다른 유교 문명 너머에 대한 사유에서 촉발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기독교는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서 계몽과 구원의 빛이었다.

최병헌에 대한 선행연구는 한국 교회사나 기독교 연구에서 주로 이루 어졌으며,[2]) 한국 문학 분야에서는 대화체ㆍ몽유록 소설로서 성산명경 에 주목했다.[3]) 최익제는 최병헌의 종교 인식을 성취설과 보유론적 종교 다원주의 그리고 종교변증론으로 요약했다.[4]) 류대영은 선교사의 활동과 관점에서 기독교 전파를 다루기보다는 서구 문명을 수용하려고 했던 당 대의 개화적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과 입장에 주목할 필요를 제기하였 다.[5]) 본고에서는 유교적 지식이었던 최병헌의 개종과 기독교 수용을 문 명론과의 접합이라는 관점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정치와 종교의 상관성 에 대한 이해나 의병선유의 시세론도 문명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문명 론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수용은 재래 종교와 기독교 변증으로 전개되었

다. 유ㆍ불ㆍ도와 기독교의 대화로 이뤄진 성산명경은 전도를 목적으로 집필되었으나, 개종을 감행한 자신의 회심과정을 담고 있다. 이는 전통 학 문에 박학했던 지식인의 개종이 성령에 의한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학문 적 차원에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성산명경에서 재래 종교가 기독교로 귀의하여 진리를 성취한다는 서사는 문명론과 종교 담론의 접합에서 비 롯된다. 이런 경향은 1920년대 들어서면서 다소 약화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중심의 문명론의 파열이 시작됐고, 기독교의 토착화가 진척됨 에 따라 기독교 성취론이 만종일련의 종교관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따 라서 본 연구에서는 1909년 출판된 성산명경과 이를 전후하여 발표된 문명론적 색채의 글을 중심으로 문명론과 종교 담론의 접합을 고찰할 것 이다. 이는 근대전환기 유교적 지식인이 타자를 내면화함으로써 주체를 재구성한 하나의 전형으로써 기독교 수용에 따른 유교 의미장의 균열과 위상 변화를 확인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Ⅱ. 문명론과 종교
1. 역사인식과 문명론

앞선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의 전래는 중화질서의 해체와 서양 문명론 의 확산 속에서 반발과 저항을 줄일 수 있었다. 20세기 전후 동아시아 사 회에서 사회진화론은 자연의 공리처럼 받아들여졌다. 진화론은 식민지 주 체의 역사와 문화를 전복하여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윤 치호처럼 일부 지식인들의 경우 문명한 강국에 지배당하는 편이 낫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동도서기적 사고는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하는 방식으로 도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내세웠지만, 서양 문명에 대한 두려움과 선망은 동양을 뒤떨어지고 정체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태서신서를 통해 서양 근대의 성취를 간접 체험했던 최병헌은 1898년 일본 방문에서 그 실상을 직접 목도하였고, 정치 개혁과 실용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

다.16) 실업교육을 결여한 채 문화적 교육만으로는 자강과 개화의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실업교육으로 실력을 키우고 나서 정치, 법


[6][7], 경제, 리학, 문학 등으로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 경전이 빈한한 선비에 게 옷을 제공하지 못한다거나, ‘철학’이 고명한 선비의 굶주림을 채워주지 는 못한다는 등 구학문의 비실용성이 부각되었다.17)

위기의식에서 촉발된 서양 문명 수용은 한편으로 타자의 내면화를 수반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명의 두 흐름은 기독교를 만나는 지점에서 합류한다. 세계는 유신학술을 통해 우승열패하며 경쟁과 생존이 천연의 공례(公例)임을 강제하는 상황이고, 만국인민들이 이익과 권리를 날로 다 투어 서로 경쟁하며, 세계 모든 곳에서 문명개화에 진보하기 위하여 교육 에 힘쓰는 때라는 시대 인식은[8]) 개화를 주창한 동시대 지식인과 마찬가 지로 사회진화론의 수용을 보여준다. 동시에 꺼져가는 등불 뒤로 태양이 솟아오르고, 거짓 도는 사라지고 진리대도가 흥왕하며 천국이 가까이 다 가와 영생의 문이 열린 때[9])라는 시대 인식은 기독교 세계관의 반영이다. 문명론과 기독교를 접할 할 수 있었던 근인은 한학과 유교적 소양 때문이 다. 실용학문이 현실적 위기를 해결하는 방책이긴 하나, 학문의 근본은 아 니라는 인식이 저변에 있었다. 사람의 성품을 물에 비유하면서 ‘충효의 도 리’와 ‘신의의 행실’을 가르쳐야 한다거나,[10]) ‘도학’을 교육의 근본으로 제 시한[11]) 유교사상의 기반은 실용학문을 넘어서 기독교를 학문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으며, 문명의 실체로 인식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사회진화론적 발전사관과 기독교적 역사인식의 결합은 상고, 중고, 현

금, 장래로 시대를 구분하고 각각을 야매(野昧), 문명, 지혜, 성결(聖潔)로 규정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금 시대는 우승열패의 경쟁으로 각국이 각축하지만 장래는 온 인류가 기독교 진리에 귀의하는 성결한 황금시대 가 되리라 낙관적 전망도 양자의 결합을 보여준다.[12]) 그는 동양과 서양의 학술이 각각의 특징을 갖고 발전해 왔지만 현재의 문명의 형세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았다. 동서양의 역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문명 발전을 인 류 전체의 역사 변동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가령 ‘천원지방’과 ‘천동지 정’의 설은 한대 이후 격치학의 쇠퇴와 서양의 과학기술에 뒤쳐진 대표적 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었는데, 최병헌은 서양 고대의 우주관도 동양처럼 매우 허황된 것이었음을 예증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고인의 소견은 대개가 억설로서 황탄한 것이었고 지금 세상 사람들이 논하는 것은 실체 를 측량하고 진리를 연구한 것이니 신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다.[13]) 이는 ‘구본신참’, ‘신구절충’, ‘신구참작’ 등에서 신구가 상징하는 공간적 이 항 대립을 고금의 시간으로 재배열함으로써 지식의 축적에 따른 발전을 상정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하는 동도서기 입장에

반대하면서 기독교 수용 논리를 전개할 수 있었다.

서양의 기계만을 취하고 종교는 높일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는데 이는 (종교 를) 이단으로 여겨서 참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라의 형세를 개탄하는 자들 이 매양 서양 기계의 이로움을 말하면서 교도(종교)가 미풍이 아니라고 배척하 며, 외국이 강하다고만 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게 된 근원은 살피지 않으니 참으 로 한탄할 일이다. 대개 大道는 방국에 국한되지 않고 진리는 중외에 통용 가능 한 것이다. 서양의 하늘이 곧 동양의 하늘이고, 천하(세계)로 보면 모두가 一家 이며, 사해가 형제라 할 수 있다. 상제를 공경하고 인민을 아낀 점에 이른다면 어느 누가 마땅한 ‘윤리’라고 하지 않겠는가.24)

국가의 [14]경계를 넘어 세계에 통용되는 참된 진리와 서양 문명의 근원으 로 꼽은 ‘종교’는 모두 기독교를 가리킨다. ‘서천 즉 동천’이고, ‘천하 일가’, ‘사해 형제’라는 확대된 인식지평으로 동도서기를 반박하였는데, ‘서천동천 일야론’은 중국 기독교와 한문 전도문서 천도소원(天道溯原), 덕혜입문 (德惠入文), 자서조동(自西徂東) 등에서 주장되던 변증론으로서, ‘동도’ 인 유교나 불교가 가진 기독교와의 연속성을 ‘복음에의 준비’로 수용하면 서, 기독교로써 ‘동도’의 부족함을 완성ㆍ성취하려는 포괄적인 문명ㆍ종교 논리였다.[15]) 동양 고대의 인격천을 연상시키는 ‘상제’도 여기서는 기독교 의 하느님을 지칭한다. 동일한 기표이나 발화자에 따라 지시 대상이 다를 수 있다.[16]) 동시대 신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종교 지평의 확대와 보 편성 주장과 유사한 논리지만 실제는 서도서기를 지향한다는 점에 주의해 야 한다. 아울러 기독교 복음주의에 기초한 문명론이 결국 기독교를 정점 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론적 위계화라는 비판을 불러 올 수 있지만, 기독교 개종주의의 입장이 아니라 성취론적 관점에서 재래 종교를 포괄한다는 점 에서 급진적 개화론자들의 문명론과 구분해야 한다. 최병헌의 문명 개화론 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교육과 정치 중심의 보편적 담론의 틀로부터 기독교 중심의 종교적 담론의 틀로 재구성한 것이고,[17]) 동서의 구분을 넘 어서 보편적 진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서도서기와 구별해야 한다. 최병헌은 「고금시대의 진화」[18])에서 동양의 물질문명은 상고시대 이후

부진했지만 정신문명은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서양문명과 차별화했다. 정 신문명을 동양의 특성으로 내세워 서양의 충격을 상쇄하려는 시도는 1920 년대 물질과 정신을 이원화하는 문명론과 ‘문화’ 개념의 부상과 무관하지 않다. 신문명, 현대문명 등은 물질문명으로 한정짓고 문명을 낳는 원천으 로서 정신적 문명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문화가 부상한 것이다. 부강이 여 전히 문명의 필요조건이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물질문명에 상응하 는 종교와 도덕, 정치와 사회제도 등이 요구되었다.[19]) 서구 근대 발명품 가운데 ‘혁명’과 ‘계급타파’에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정체, 상하 계급 타파를 통한 평등 실현을 문명의 중요한 표상으 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귀함과 천함의 구별을 자연스런 사회 현상으로 보면서, ‘데모크라시’의 민권 자유 주장과 공산주의의 재산 공유, 남녀의 정조 타파, 부자의 윤리를 멸시하는 행위를 나열하면서 이런 ‘자 유’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비판의 근거로 유교 윤리와 기독교 교리를 함께 제시하고 있는 데에서도 최병헌의 기독교 수용에 유교의 사상적 토 대가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30)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했던 선교 사들과 달리 정치와 종교의 상호 보완을 중시했던 태도도 이와 같은 관점 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정치와 종교의 관계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예조참의 김홍집은 주일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고종에게 보고했다. 이 글의 핵심은 러시 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20]) 중국이나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적 교류가 있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 조선에게는 멀고 낯선 나라였다. 황준헌은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종교 가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교이며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선교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고자 하였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것도 곧 야소교인데 천주교와 근원은 같지만 종파가 각 기 달라서 마치 우리 유교에 주자학과 육학이 있는 것과 같다. 야소교의 종지는 정사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며, 그 교인들도 순박하고 선량한 자가 많다. 중국이 통상한 이래로 선교사를 살해한 사건이 여러 번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의 야소교인도 없었다는 점도 우려할만한 게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 교의 교 의는 사람을 착해지도록 권하는 데 있으니, 우리 중국의 주공과 공자의 도보다 몇 만 배 낫지 않겠는가. 조선은 우리 유교를 따르고 익혀 이미 깊은 경지에 이 르렀으니, 불초한 무리가 이를 따르더라도 교목에서 내려와 유곡으로 들어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전교를 내버려 둔다한들 무엇 이 해롭겠는가.32)

천주교는 정교일치이므로 폐해가 많고, 개신교는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니 받아들여도 해될 게 없다는 인식이 이로부터 확산되었다. 불과 2년 후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1883년 여름에는 보빙대사로 민영 익을 미국에 파견했다. 개신교 선교사의 최초 입국은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메클레이(R. S. Maclay)에 의해 1884년 6월 24일 이루어졌다. 메클레 이 목사는 서울에 도착하여 김옥균과 함께 고종을 알현하였고, 교육과 의 료사업을 윤허 받았다. 이후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그리 고 베레드, 게일 등이 선교를 목적으로 들어왔다. 한국에 개신교를 전파한 선교사들의 입장은 교회의 비정치화, 비사회화였다. 그들은 유교의 현실 참여적 특성을 경계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식민지 지배권력도 마찬가지였 다. 그들에게 “유교를 종교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예정된 것 이었다. 그것은 유교의 정치적 역할 때문이었다. 유교가 이른바 ‘종교’가



32) 황준헌 저, 조일문 역주, 조선책략, 건국대학교출판부, 1988, 115쪽.

들어오던 시대에도 여전히 동아시아 사회의 지배적인 믿음 혹은 이데올 로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1])

일본의 경우, 1877년 이후 국민 통합에 적합한 종교란 어떤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식 정교분리’가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과학 과 종교의 대립(메이지 10년대 후반), 국가와 종교의 대립(메이지 20년대 초 기)에 관한 논쟁을 거치면서 ‘공적인 도덕과 사적인 종교의 분리=정교분리’ 라는 인식이 형성되어갔다.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가 도덕ㆍ철학이 종교보다 우위를 점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국민도덕론을 주창한 것은 이 시기의 전형적인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호응하여 종교계에서 도 윤리화ㆍ합리화가 진행되었고 정부 측에서는 신사신도 비종교론=도 덕론이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교(불교, 기독 교 등)’, 도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도’, ‘학(신도, 유학, 황도)’의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22][23]) 윤치호의 일기에는 후쿠자와, 김옥균, 박영호가 나눈 종교에 관한 대화가 실려 있다. 후쿠자와가 종교란 결국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족하며 살게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하자, 김옥균과 박영효가 동의했다. 특히 박영효는 종교는 정치의 수단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맞받았다.[24]) 후쿠자와, 김옥균, 박영효는 종교를 국가 운영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정치와 종교를 상호 보완 관계로 본 최병헌은 종교를 사적영역에 국한

하거나 정치의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지만, 종교는 만물의 조종이고 천지의 주재이며, ‘국가의 명맥’,

‘입국의 근본’, ‘진화의 근원’, ‘정치의 근기’로 표상된다. 자연히 종교는 근 본이고 정치는 말단에 속한다. 그러므로 종교가 쇠퇴하면 정치가 어지러 워질 수밖에 없다. 최병헌의 정교관을 담고 있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36) 는 ① 교리와 정체의 본원 ② 정령과 교회의 발용 ③ 교도의 침미와 정령 의 괴란 ④ 종교와 정치는 표리 등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①은 종교가 정치의 본원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종교는 다신교 에서 유일신교로, 정체는 군주정체, 입헌정체, 민주정체로 발전해왔다고 하고, ②는 종교가 복음과 진리로써 백성을 교화하여 성역에 들어가게 한 다면, 정치는 위로 군주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구제하여 함께 문명 에 나아가게 하는데 작용하며, ③은 뿌리인 종교가 쇠퇴하면 줄기와 열매 인 정치가 어지러울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면서, ‘공맹의 죄인’으로 매관매 직, 현실도피, 무책임, 배타성을 들고, 국내의 모든 이권이 외국인에게 양 도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④는 정치와 종교는 표리 관계임을 차륜(車輪)과 순치(脣齒)가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것에 비유하고, 인애와 덕화로 백성을 감복시키고, 정령과 형법으로는 악한 백성들을 징치하여 서로 보완한다고 했다. 그 사례로 도적이 감화를 받고 선인이 된 일화를 소개하면서 정치 가 못하는 것을 종교가 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敎道]는 ‘몸을 닦 는 근본(修身之本)’이고, 정치[政體]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治國之用)’라 는 게 그의 결론이다.

종교를 ‘교도(敎道)’와 같이 사용하거나 종교와 정치를 체용ㆍ본말ㆍ표리

관계로 보고 마차와 수레바퀴, 입술과 치아에 비유하는 것은 유교적 지식인 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정형적인 논리이다. 대학의 8조목인 격물-치지-성 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시간적 선후를 가리키지 않지만 근본을 강조한 까닭은 근본이 제대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발현된 양태가 온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병헌은 정교관은 종교와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서 서 로를 보완하지만 종교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학문의 근본



36) 皇城基督敎靑年會에서 1906년 9월 27일 행한 연설로서 강연 내용은 황성신 문 10.4~6, 대한매일신보 5~9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황성신문 의 기사를 토대로 분석하였다.

으로 도학을 거론하고, 법률에 의한 정치보다 교화에 의한 정치를 높이 평 가한 점은 유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가 쇠퇴한 까닭은 요순 공맹의 본의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니, 국가의 혼란을 가져온 쇠퇴한 유교 대신 구미 열강의 문명화를 가져온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치와 기예만 익히고 종교에 힘쓰지 않으면 결코 문명에 이를 수 없다는 논 리로 기독교 수용을 반대하고 서양의 이기만을 취하려는 동도서기는 근본 에 힘쓰지 않고 말단만 취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3. 의병선유와 정교관

국망이 현실화되어 감에 따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봉기는 국가 차원 의 문제로 비화하였다. 정부에서 기독교인을 선유사(宣諭使)로 임명한 것 은 1907년 8월 정미의병운동 때였다. 동년 12월 25일 선유사를 일부 교체 했는데, 이 때 정동교회 최병헌 목사와 송기용이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선 유위원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최병헌은 송기용과 함께 1908년 1월 20일 서울 정동교회 교인들이 베푼 환송회에 참석한 후 교회 일을 현순 목사에 게 위임하고 2월 6일 서울을 출발했다.[25][26]) 당시 다수의 신문은 선유활동에 관심을 보이며 이들의 행적과 정부 보고 내용들을 게재했다. 최병헌의 선 유활동은 정교분리와 정교불가분의 원칙이 충돌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선유위원으로 임명된 서상륜은 정미 7적을 향해 매국 행위 10조목을

들어 내각 사퇴를 촉구하고, 기독교 교인들의 선유활동에 대해서도 비판 했다.[27]) 또한 정부에 선유위원 사면을 청원하면서 폭동의 원인으로 내각 을 지목하고 내각에서 물러나 지방 각지의 의병 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목 숨을 맡기라고 했다.39) 선유위원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이 점점 비등하 자40) 최병헌은 ‘통곡할 네 가지(痛哭者四)’라는 제목의 반박 기사를 황성 신문에 실었다.

첫째, 정부의 정치가 잘 못되어 국가가 위태로워지고 백성의 도탄이 극도

에 달함.

둘째, 의를 외치는 자들이 시의에 밝지 못하고 망동하여 동포를 해치고 마

을을 불살라 시름이 가득함.

셋째, 종교사상이 정치를 배태하여 전체 혁명의 원동력이 되어 온 세계 역

사와 우주 대세를 깨닫지 못하고 좁은 소견으로 교인들을 위협함.

넷째, 동포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한 일신의 희생이 자선과 신앙의 실천임 을 모름.41)

첫째에서 든 정부의 실책은 1907년 8월 1일 강제 군대해산으로 한일신 협약(정미7조약)에 격앙하여 경향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봉기를 확산시켰 다는 것이다. 둘째에서 시의에 어둡다고 한 근거는 정부를 일본의 기관이 라 하고 관리들은 누구랄 것 없이 원수로 보며 일진회를 일본의 귀신으로 부른 것이고, 자유권을 되찾는다고 일어났으나 도리어 조국에 해를 입히



고 良民을 多數誤殺야도 緘口不言고 袖手樂觀이오 第八皇太子殿下 셔 日本에 遊學케 이오 第九 自衛團을 組織야 地方人民의게 侵虐을 橫加야도 其橫暴를 放任이오 第十 司法權 警察權等을 一切日人의게 讓渡이오”

39) 徐相崙, 「上內閣大臣書」, 대한매일신보, 1908.01.23.

40)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도 선유 관련 사항을 지속해서 보도했는데, 특 히 공립신보의 기사는 선유활동에 대해 비판 논조를 이어갔다. 1908년에는

최병헌과 송기용을 직접 지목해 선유활동의 부당함을 역설했다.(「파병션유」,

1907.9.27.; 「宣諭使改差」, 1907.10.4.; 「관동선유사의 사보」, 1907.12.6.; 「션유 사 아니라 토벌사」, 1907.12.6.; 「션유사의 약뎜」, 1907.12.6.; 「션교사 션유」, 1908.2.5.; 댱긔찬, 「션유위원 최송 량 목사의게 튱고」, 1908.2.19.; 「션유쇼 환」, 1908.3.18.; 「션유위원 볼기마자」, 1908.5.13.)

41) 崔炳憲, 「奇書 痛哭者四」, 황성신문, 1908.1.26.

니 망동이라는 것이다. 특히 모신문 기사에서 선유활동에 대해, 교인을 이 용하여 일인에게 아첨하는 것이고, 진실한 신도들이 호응할리 없으며, 매 국적의 사냥개일 뿐 교인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비판에 대해 일일이 반론 을 제기했다. 신하된 자로서 왕명에 응함이 마땅하고, 그 목적은 오직 도 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라는 점을 들어 선유활동을 정당화했다. 특히 종교와 정치가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불통’, ‘고루’로 폄하하 면서, 구미 역사의 사례를 들어 종교가 정치를 배태하며 혁명의 원동력임 을 강조했다. 또한 자신의 선유활동을 인애와 자비로 동포의 사망을 구제 하기 위한 희생이며 신자된 도리로 규정하고, 여타 교인들도 대한의 신민 으로서 조국의 위급함을 염려하고 인민이 사망에 이르는 일을 규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론 기사에서 최병헌은 의병운동의 폐해를 열거하면서도 호칭만큼은 ‘의도(義徒)’를 고수했지만, 실제 선유활동 시 정부에 제출한 선유활동 보 고와 민인을 대상으로 한 효유문에서는 이들을 ‘비도(匪徒)’, ‘폭도(暴徒)’로 불렀다.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되고 친일 내각을 만들어 국정을 농단한 상황을 감안할 때, 정부정책에 호응할 수밖에 없다는 신민의 도리와 동족 살육과 국가 혼란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신자의 의무는 본래 의도 와 무관하게 친일행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된다. 선유활동 기간 지 은 두 종의 <효유문>과 한글 가사 형태의 <권유문>에서는 의병운동의 원인으로 정부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악행을 지목했다. 그러나 교회와 거 리에서 행한 집회에서는 의병운동이 절대적인 열세와 약탈 행위로 주민 의 지지를 얻지 못하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민지 계발과 실력 양성이 국권 회복과 민족 자강의 기초임을 강조했다. 최병헌의 선유활동 은 교인들을 상대로 한 설교나 계몽강연 위주였고,[28]) 나중에는 동행했던 일본 경찰이 역으로 그를 감시 통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43)

자신을 기독교 신자이자 국민의 일분자라고 밝힌 공립신보의 기사에 서는 선유활동을 국민된 도리, 기독교 신자의 본분에 어긋나는 행위로 규 정하고, 국가와 민족이 멸망에 이른 이때에 의병운동을 독려하지 못할망 정 시세, 능력, 형편을 들어 해산을 권유하는 행위는 왜적의 앞잡이요 벼 슬을 바라는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비판했다.44) 특히 「선유낭패」라는 제하 의 기사는 선유활동에 반대하는 의병 한 사람의 편지가 미국 장로교 목사 게일과 감리교 존스 목사에게 전달되어 적지 않은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 음을 보도했다. 선유위원으로 참여한 교인들을 소환하여 선유활동을 멈추 게 하지 않으면 교인과 선교사들에게 위해를 가하겠다는 협박으로 인해 선교사들은 미국, 영국 공사관에 연락하고 통감부와 교섭하여 최병헌에게 귀환을 명령하였다.45) 실제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에서 오히려 정교유착으로 전환했다. 존스는 ‘한국인에게 지금 필요한 것 은 잘 정의된 법의식과 합법적으로 확립된 권위에 대한 존경’이라고 하여 정교분리 내지 정치적 중립보다 정교유착으로 선회했다.46)

선유활동에 대한 비판이 선유사에게 직접 전달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

는다. 그러나 이 기사를 통해 기독교 목사들의 선유활동 참여를 제어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선교본부를 지목한 것은 분명하다. 이에 최병헌은 선유 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평양으로 이동하여 존스를 만나 그 편지는 호사자 의 일시적인 악취미일 뿐 염두에 둘 일이 아니라고 설득하고, 2월 18일



선유활동, 넷째, 일반 주민을 상대로 한 선유활동으로 구분했다.(한국 토착 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184~190쪽.)

43) “효유문”, 융희 2년 1월, <충청남도선유문안>, 1908; “충남효유”, 황성신문, 1908.2.14. “권유문”, 융희 2년 2월, <충청남도선유문안>, 1908; 이덕주, 한 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184~190쪽 참조.

44) 댱긔찬, 「션유위원 최송 량 목사의게 튱고」, 공립신보, 1908.2.19.

45) 「션유랑패」, 대한매일신보, 1908.2.18.

46) 최익제, 「한말ㆍ일제강점기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원대 박사논 문, 2009, 75쪽.

서울에서 게일을 만나 선유의 이해를 논한 후 19일에 조치원으로 귀환하 여 선유활동 재개하였다. 최병헌은 1908년 3월 26일 병세를 이유로 선유 를 마치고 인장 등을 반납했으며, 동년 4월 8일 선유위원에서 해촉됐다. 서구화를 지향하는 계몽주의 지식인 및 일제 식민주의 관료는 종교의 사 사화를 주장하였으며, 개신교 선교사들도 종교의 탈정치화를 강력하게 주 장하였다. 반면 일제에 저항하는 지식인과 개신교 평신도들은 종교를 국 권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애썼고, 개인의 내면에 묶어두려고 하지 않았다.[29][30]) 기독교 통해 자강의 방책으로 삼은 논설에서는, 문명진화 론을 유형의 자강으로, 종교를 무형의 자강으로 구분하여 국권회복과 자 주독립의 기반으로 기독교를 제시하기도 했다.48)

민족주의 관점에서 선유활동은 용납할 수 없는 친일행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적 ‘종교’ 개념은 정교분리를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최병헌이 주장한 종교는 그들의 주장처럼 사적이고 내면으로 회귀하는 것일 수 없었다. 그에게 종교는 공적인 역할을 담당해야하는 책 무가 있었고, 한국 기독교도로서의 신념이었다. 그가 지은 「독립가」[31])나 정포은의 충의를 애국심과 연결한 사례, 또 정동교회 의법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일진회로부터 일본의 지도와 보호를 요청한 선언서가 날아들을 때, 지도 아래에는 국권이 없으며, 보호 아래에는 독립이 없다[32][33])고 회신한 사례들은 그를 친일부역자로 매도할 수만은 없게 한다. 비록 국권회복을 위한 현실 참여는 부족했지만 1913년 행한 일련의 설교에서 기독교 진리 로 일본에 승리할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을 피력하기도 했다.51) 

Ⅲ. 기독교와 종교 변증
1. 삼인문답 에서 성산명경으로


성산명경은 최병헌의 초기 신학사상의 결정체로서, 한국 최초의 신 학잡지인 신학월보에 1907년 제5권 1호부터 제5권 4ㆍ5호까지 총4회에 걸쳐 연재한 「셩산유람긔」를 증보하여 1909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 다.[34]) 성산명경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신문 광고는, 종교의 진리와 인 격의 요소와 물체의 원인을 반복연구하고 설명하여 독자들이 일대 심경 을 이루게 한다고 소개하였다.[35]) 이 책은 유교를 대변하는 진도(眞道), 불 교를 대변하는 원각(圓覺), 도교를 대변하는 백운(白雲), 기독교를 대변하 는 신천옹(信天翁)이 성산의 영대에 모여 사흘간 벌인 토론을 통해 개종 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주만물의 발생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주제 로 한 대화는 기독교의 가치를 승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유교의 존심양성하는 윤상지리와 석가의 명심견성하는 공공한 법과 선가의 수심연성하는 현현한 술법을 심형으로 저울질”하다가 기독 교인이 된 뒤,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성신의 능력을 얻어 유도와 선도와 불도 중 고명한 선비들에게 전도하여 믿는 무리를 많이 얻을까 생각하다 가” 꿈 속에서 성산의 영대에 이르러 네 사람이 토론하는 모습을 기록했 다는 최병헌 자신의 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존스는 이 책을 번연의  천로역정[36])에 비견하면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어 종교변증서로서 한국의 종교 [37]발전을 선도한 최병헌 목사가 기독교 신앙이 동양의 여러 타종교보 다 탁월함을 밝혔고, 자국 민족이 일통 기독교인이 될 것을 예언했다고 높이 평가했다.55)

성산명경은 당시 개화기 문학으로 유행했던 토론체소설의 양식과 몽유록의 특징을 활용했다. 토론 양식이 종교간 비교와 변증을 위한 체 계와 논리를 갖추기 위한 통로였다면, 몽유록적 형식은 일반적으로 이 해하기 어려운 종교 교리의 형이상학적 내용을 감성적으로 수용하도록 신비적 연출을 하는 데 일조했다.[38]) 이와 같은 대화체 토론은 앞서 발표 한 「삼인문답」에서도 활용되었다. 북촌 양반집에서 처음 만난 세 사람 의 대화는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기독교를 외래종교로 배척하던 세태 에 대한 대응 논리가 담겨 있다. 타국에서 유래한 유불선 삼교는 우리 종교라고 하면서, 대한과 같은 주에서 발원한 기독교만 유독 외국종교 로 배척하고 거부하느냐는 것이다.[39]) 기독교를 유불선과 마찬가지로 동 양의 종교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려한 시도라 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천하만민 간에 문명교화가 여러 길로 나뉘어 있 음은 각기 역사적 근원이 있다. 그 여러 근원들을 상고해 본즉 다 종교 에서 생겨난 것이다.”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사고에 대해서는 “구세주 예 수께서는 공맹이나 노자, 석가와 같은 성현이 아니라 곧 하느님이시니 … 범상한 성인과 비교해서 말할 수 없다.”는 기독교 절대주의로 반박하 였다.[40]) 이처럼 ‘기독교 외래 종교론’과 종교다원주의에 입각한 ‘종교 등 가론’은 최병헌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 할 장벽이었다.[41]) 「삼인문답」을 발전시킨 성산명경은 기독교가 지닌 외래성을 불식시키 고 한국인이 기독교를 보편적 진리를 지닌 종교로 인식하게 하는 지성 적 [42]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아울러 종교적 배타성과 개종주의를 극복하고 본격적으로 종교간 대화를 통해 종교인식의 변화 가능성을 추구한 구체 적 결실로 평가된다.60)

20세기 초 서구식 문명개화를 주장했던 지식인들은 대체로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개화의 방책으로 보는가 아니면 신앙에 이르는가는 차이가 있었다. 이승만은 기독교 국가론을 제시한 바 있고,[43]) 김대희는 종 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국민 통합을 위해서, 유교, 천도교, 기독 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좋겠다고 했다. 김대희와 「대한 금일의 선후 책」을 논한 안국선은, 동양의 유교는 인륜만 말할 뿐, 사람과 천주의 관계 [천륜], 사람과 물의 관계[물륜]은 밝히지 못했고,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 라고 단언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44]) 유교를 비종 교로 구분하는 관점은 서양 종교 개념 수용 때문이다. 성산명경의 종교 변증에 나타난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2. 기독교와 유교

최병헌이 성산명경에서 진행한 종교 변증 가운데 가장 많은 공을 들 인 대상은 바로 유교다. 최병헌 자신이 개종 이전에 유교적 소양을 갖추 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의 변증은 불교나 도교에 비해 더 상세하다. 무엇 보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당시 사회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던 유 교의 장벽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자회개」에서 기독교 진리를 거부 하는 유교와 불교 지식인을 눈 있는 소경과 귀 밝은 농자로 규정하기도 했고,63) 「고집불통」에서 “공자 말씀하시길, 내가 뭇사람을 쫓겠다하셨으 니, 만일 대한 온 나라가 다 예수도를 믿는다면 나도 믿겠노라”64)라고 한 대목은 유교적 지식인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는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따 라서 최병헌은 충효사상과 같은 동양사상의 여러 개념들과 동양 고전의 예화를 활용하여 기독교와의 이질성을 최소화하면서 종교간 대화를 시도 하였다.65) 동양 고전 이해와 유교적 소양을 적극 활용한 기독교 전도는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최병헌이 담임했던 교회 신도 가운데 양반 비율은 여타 교회보다 높았다.

성산명경은 각각의 종교가 지닌 특색을 드러내어 서로 비교하는 방 식을 취했다. 백운은 육체와 영혼의 이원적 구조와 영혼불멸설을 통해 도 교의 불로장생설과 신선불사설의 허망함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하고, 원각 은 인간의 윤리를 저버리는 점, 윤회와 업보의 논리가 지닌 문제점, 창조 설의 부재, 출가로 인한 반사회성 등의 비판을 듣고 개종한다. 유교를 대 표하는 진도는 마지막까지 개종을 거부하다가 종교적 교리에 설복하는 게 아니라 일등문명국의 종교적 기반으로서 기독교의 가치가 치국평천하 의 도리와 정치학술 상 유교보다 우월함을 인정함으로써 개종하게 된다.

유교와 기독교의 변증은 크게 천지의 생성, 인성론, 윤리론, 내세론 등 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변증은 세계의 생성에 관한 문제다. 진도는 만물 의 생성과 변화를 유교적 관점에서 제시하였다.

주역에 가로되 ‘대재라 건원이여, 만물을 비롯하며, 지재라 곤원이여, 만물 을 생한다’하였으니 건도는 양이 되고 곤도는 음이 되어 음양의 이기로 만물이 생생하는 것이다. 주부자(朱夫子)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 니시니, 사람이 그 가운데 생하여 다 천지의 자식이 된다.’하시고, 주렴계는 ‘무 극이 태극이며, 조화의 추기(樞機)를 이루니, 태극의 이치로 양의와 사상이 생하 고 오행의 기운으로 만물이 생성한다’ 하였다.66) 이에 대해 기독교를 대변하는 신천옹은, ‘태극’, ‘음양’, ‘오행’으로 만물



64) 「고집불통」,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899.3.8.

65) 「효자행적」,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1.6.20.

66) 성산명경, 동양서원, 1911, 10쪽.

이 화생한다는 유교의 생성론에 대해 주희의 격치서를 근거로, 태극은 이치일 뿐이고 정의, 계교, 조작이 없으므로 지혜와 신령도 없는 것이니 어떻게 허령지각을 지닌 사람과 만물을 생성할 수 있느냐고 회의하면서, 건곤이기와 음양오행은 당초 어디서 생겨난 것이냐고 반문한다. 태극과 리를 기독교의 창조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비판한 유래는 일찍이 16세기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친 쿠플레(柏應理, Philippe Couplet, 1623~1693)가 편찬한 중국철학가공자(中國哲學家孔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도 공자의 상제관과 천관은 긍정하는 반면, 태극과 리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의 창조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언어ㆍ이문 화권 간의 번역이 자신의 선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선진유교의 상제를 천주와 동일시하고 송대 신유학의 태극론과 이기론을 창조주의 관점에서 부정한 것은 이렇게 보면 자연스 런 일이 된다. 신(Deus)의 이미지를 상제에서 찾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태 극’과 ‘리’ 개념을 들어 주희를 무신론자라고 비판한 것은 왜곡이 아니라 대타성의 산물이다. 예수회의 유교 경전 번역은 자문화의 유사한 개념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한 일종의 격의(格義)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일종의 왜곡은 번역상의 ‘오류’나 ‘불완전함’이라기보다는 선이 해에 따른 의미의 전유로 봐야 한다. 성산명경이 보유론에 입각한 적응 주의적 선교 논리를 계승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유교지식인의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대한 이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만 유교를 포함한 제반 종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이러한 양가성 은 기독교 외에 여타 종교를 비종교 영역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읽힌다.

최병헌은 신천옹의 입을 빌어 기독교의 창조론에 입각해 만물은 전지

전능한 하느님의 창조로 생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조화로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 음양오행은 천지일 월과 금목수화토를 가리킨 것이지만, … 음양은 물건이 있은 후에 이름 지어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천지일월과 주야, 한서, 남녀 자웅이 없다면, 음양이기 라는 것을 어디에 붙여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물건이 생긴 연후에 있는 음양이 물건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금목수화토’ 오행이 한 물질이니 사람이 날 로 쓰고 먹고 마시는 물건이다. … 반드시 사람의 손에 의지하여 내왕도 하고 그릇도 이루는 것이니 이러한 물질이 어떻게 만물을 내겠는가.67)

음양은 만물이 생성된 후에야 겨우 명명할 수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

만물을 생성할 수는 없다. 음양의 조화란 결국 만물의 생성에 대한 인간 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생성은 오직 창조주의 몫인데, 사물과 영혼 두 가지로 대변된다. 사물은 오행 같은 것으로 일용할 물건이 되고, 영혼 은 허령감각과 양지양능이 있어서 만들고 추측하며 배양하는 역할을 담 당한다. 허령한 지각을 지닌 인간은 사물과 자연을 활용하고 양지양능은 도덕적 판단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여타 생물과 사람을 구별 하는 기준이 된다. 성서 번역위원으로도 활동하였던 최병헌의 기독교 이 해는 유교를 비롯한 전통 학술 개념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병헌은 신천옹의 입을 빌려 유교의 천 개념에는 주재천과 자연천의

의미가 모두 있는데, 이를 엄밀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여 혼돈을 초래했 다고 비판한다. 선진유교에 보이는 상제와 기독교의 상제를 동일한 것으 로 보는 관점은 적응주의 보유론의 입장을 견지했던 중국의 마테오 리치 등 앞선 선교사들의 이해의 연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 교에 상주라 상제라 대주재라 하나님이라 함은 유가서에서 상제라 함과 음성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름이 없다”68)는 기독교 계열 잡지에서도 확인된다.

두 번째 변증은 사람의 성품 문제다. 신천옹이 중용 천명지위성장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성품에 대해 묻자, 진도는 논어의 ‘성품은 서로 가까 우나 익히는 것이 서로 멀다’와 맹자 「고자」 상편의 ‘사람 성품의 선한 것이 물이 아래로 가는 것 같아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답했



67) 성산명경, 11~12쪽.

68) 「동방 성인들도 하나님을 공경하였소」,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899.

다. 신천옹은 요순 같은 성현의 자식들이 불초함과 세상에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많음을 들어 반문한다. 진도는 재차 상지와 하우를 예로 들면서 본성의 선함을 옹호하고 악행을 물욕에 가려진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신천옹은 상지와 하우, 성인과 악인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라면 교 육도 소용없고, 문명 진보도 불가능하다면서 사람의 천성은 하느님께 받 은 것으로 지우현불초를 막론하고 모두 같으며 등급의 우열이 없다는 주 장을 펼쳤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기질청탁과 심재유무에 달려 있는 것이 지 성품 때문이 아니며, 성현과 완악한 자의 나뉨은 그 사람이 천명을 쫓 아가는데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 변증은 윤리론과 관련된다. 여기서는 공자의 행적 네 가지에 대해 비판하였는데, 첫째, 권도를 쓰는 것 둘째, 간계를 쓰는 자에게 또한 간계를 행한 것 셋째, 부모의 도가 그를지라도 삼 년을 고치지 못하는 것 넷째, 공자가 인도만 말하고 천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네 번 째 변증은 내세론이다. 천당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진도는 끝끝내 의구심 을 버리지 않았는데, 신천옹은 후세 사람들이 옛 성현의 글과 행적을 보 고 그 성현이 실재했음을 믿는 것처럼 반드시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이상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진도는 자신의 유교적 관점을 굽히지 않는 다. 결국 유교도의 기독교 귀의는 기독교의 교리나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 라 서양 국가의 문명함이 예수교의 덕화 때문이라는 점을 승인함으로써 가능했다. 기독교의 교리나 신앙을 강제하기 보다는 현세계 문명의 흐름 과 세계 판도의 변환을 이끈 기독교의 현실적 유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교리 체계와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마무리되는 유교와의 대화는 기독교를 완강히 거부하는 당대 유교 지식인들을 위한 안배로 볼 수 있다.

성산명경의 종교 변증을 종교학이나 유교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심도 있는 논의라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와 비교되는 개별 종교들의 자 체 교리를 그 핵심에서부터 변증하기보다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일치와 불 일치 점을 찾고, 불일치하는 부분을 결여되고 미흡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고 개 신교의 절대성을 배타적으로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종교에 부 분적으로 들어 있는 긍정적 측면이 개신교 안에 모두 들어 있음을 강조하 는 방식으로 논지를 펴나갔다. 이런 입장을 취할 경우, 개신교와 타종교가 극단적인 적대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어진다.[45]) 최병헌은 모든 종교를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의 문화현상으로 파악하고 그 가운데 기독교를 모든 종교의 도달점이자 완성점이라는 논리를 제시했다.[46][47]) 그러나 기독교 외 타 종교의 가치를 인정했다고 해서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종 교가 기독교를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즉 성취론적 관점에서 여타 종교를 인정한 것으로 봐야한다.71) 

Ⅳ. 타자의 내면화와 주체의 재구성

중국 중심의 역내 질서 해체는 새로운 문명 강자에 대한 두려움과 선 망을 불러 일으켰다. 급박한 세계정세의 전변 속에 만국공법체제에 걸었 던 기대는 무너졌고 자강만이 살길이라는 위기의식이 고양되었다. 제국을 향한 굴절된 선망은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를 세계대세이자 자연법칙으로 각인한 주체에게 자연스런 일이었다. 자강을 실행할 주체는 교육을 통해 서 새롭게 각성되어야 했다. 위기를 초래한 전통 학문을 실용 학문으로 대체하고,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원천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신채호 도 기독교가 신국민의 종교가 될 만하다고 평가했다.[48]) 20세기를 전후한 개신교 수용의 토대는 이렇게 마련되었다. 최병헌의 종교 담론은 문명론 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었다.

최병헌의 삶은 당대 유교적 지식인의 기독교 경험과 실천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서구주의자의 길을 가지 않 았고,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확신했지만 전통적인 사상의 의의를 부정 하지도 않았으며, 친일적 성향의 개신교 선교사들과 함께 목회활동을 했 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도 잊지 않았다. 제자 최상현은 탁사 1주 기를 추모하면서, “선생은 한학자이면서도 동양문화만 고집하지 않으셨고 개국론자의 거두이시면서도 서양문명에 중독되지는 않으셨다. 오로지 대 의를 주창하여 동서문화의 장점을 취하신 것이 선생의 위대한 지개라 할 것이다.”[49])라고 스승의 업적을 기록했다.

유교가 종교인가에 따라 그를 개종자로 명명할 수도 있겠으나, 한학에

바탕한 전통적 사유체계 위에 새겨진 복음주의는 3대 종교 관념으로 제시 한 유신론, 내세론, 신앙론에서 유신론과 내세론보다는 신앙론에 무게를 두게 한다. 이렇게 보면 참된 진리를 향해 가는 길에 놓인 서로 다른 문 명, 인종, 종교의 차이는 큰 걸림돌이 아니게 된다. 진리의 보편성은 서양 의 하늘과 동양의 하늘이 다르지 않다는 지평 확장으로 나아간다. 기독교 와 문명론이 합류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이항대립을 소거한다. 그의 신학 사상은 종교가 정치의 근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양자의 상호 보완 을 통한 사회개혁론을 개진한다.

그의 신앙체계는 철저하게 현실의 정체와 결부되고, 자신이 배우고 익

힌 재래의 철학, 윤리, 문화는 그 뿌리와 줄기를 형성한다. 다만 이때의 전통 지식체계는 성경현전에 근거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예비 한다. 성산명경의 종교간 대화는 기독교 토착화 과정이 전통 지식체계 에 대한 재편을 가속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서양 중심 문명론의 타자 성을 주체성으로 환기하는 데 기독교가 중요한 고리가 되었음에 틀림없 다. 최병헌은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과 완전성을 신앙하였지만 다른 종교 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목적론적 역사관 속에 서 문명의 다변성과 종교의 다층성을 인식 지평으로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나름의 성찰 때문이다.

한국 근대전환기 경험공간은 주체와 타자의 기대지평이 뒤엉킨 혼돈의

시기였다. 최병헌의 문명론과 종교 변증은 타자의 내면화와 주체 재구성 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주체를 인정할 때 양자의 교호는 새 로운 주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병헌이 타자의 내면화를 넘어서 주체를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는가는 속단하기 어렵다. 우리의 인 식 틀은 여전히 근대성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타자의 모방과 내면 화는 자칫 주체의 상실과 타자화를 야기하기 쉽고, 제국과 식민이 상호 의존하며 근대 세계를 구축했다는 상식화된 역사 이해에서 식민성의 문 제는 간과되기 쉽다.74)

최병헌의 회심과 기독교 수용은 전통과 현대의 절합이자 근현대 한국



74) 이소마에 준이치는 트랜스내셔널 히스트리로서 제국사는 국민국가나 민족의 순수성이란 관념을 전제로 한 역사서술을 배격하며, 지배자와 식민지민이 공 모하고 또 상극하는, 그리고 동화 자체가 그대로 저항 행위가 될 수 있는 장 으로서 이해한다. 제국과 식민지 교섭사 연구는 민족/친일의 이분법으로 포 착되지 않는 면을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화 자체가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논증은 부족하다. 가령 윤치호의 서구주의를 제국과 식 민지의 교호 내지 세계대세, 문명론의 내면화로 읽을 수는 있지만 동시에 그 결과가 과연 저항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이소마에 준이치, 「제국사로

종교를 논하다: 제국사적 관점에서」, 윤해동ㆍ이소마에 준이치 엮음, 종교

와 식민지 근대, 책과함께, 2013, 14~15쪽.)

사상사의 불연속한 연속을 보여준다. 주체와 타자의 소통은 국가나 민족 의 정념과 선악의 기준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다종의 경로를 만들어냈다. ‘사물’을 주체의 규준에 따라 측정하고 주체의 필요에 맞도록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활동을 ‘표상’이라고 할 때,[50]) 종교나 철학의 영역 은 쉽게 가시화되지 않고 주체를 무한한 사유의 바다로 이끈다. 지류 장 강이 흘러 바다에 이르면 서로를 가르던 구분도 사라진다. 근대의 다기한 기대지평 속에 감춰졌던 서로 다른 주체에 대한 속박을 걷어내고 광대하 고 심원한 바다를 유영하는 복류가 되면 좋지 않을까.


※ 이 논문은 2015년 6월 1일에 투고되어, 2015년 6월 15일에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15년 6월 25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5년 6 월 26일에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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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hoe Byeong-heon’s Religious View Coalesced with His Theory of Civilization / Lee, Haenghoon(HK Professor at Hallym Academy of Sciences, Hallym Univ.)

Relatively very little attention has been given to the changes of thought that the converted intellectuals went through, compared to the historicity of the acceptance of Christianity. During the naturalization of Christianity, Confucian intellectuals played a vital role in translating its literature and propagating its doctrines. The life of Cheo Byeong-heon shows clearly the typical experience and practice of a contemporary intellectual. His religious view was formed at the intersection of the theory of civilization and the Christian world view. Unlike missionaries of the day adhering to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he grasped them as complementary. It was the coalescence of Confucian political and social tradition and the civilization paradigm of Christianity that led him to see the indivisible relation between religion and politics, and to stress religion as basic to politics. The unity of church and state functioned as a logic justifying the acceptance of Christianity in place of Confucianism which lost its social validity. What he suggested as reasons for his activities as royal commissioner, including the duty of subjects, the complimentary relation between politics and religion, and the practice of Christian benevolence, are also closely related to his view about civilization and the relation of church and state.

This coalescence of the theory of civilization and the Christian world view is most clearly revealed in his early work, Syeongsan Myeong Gyeong (The Clear Mirror of Sacred Mountain). This work, a dialogic novel of wondering-in-dreams, reflects his experience of conversion. The dialogue between the three traditions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and Christianity leads to the discussions about world creation, theory of human soul and afterlife. His reason for accepting Christianity is not about its creeds but about the hegemony of Christian civilization, showing that his conversion took place under the influence of the ideology of Western civilization. His change of heart originated from the crack of Confucianism, but it did not go as far as to subvert its values. Though assured of the absolute truth of Christianity, he can not be considered simply as an advocate of the West in that he approved the values of Oriental classics and traditional ideas.

Key words: Choe Byeong-Heon, theory of civilization, Confucianism, Christianity, Seongsan Myeong Gyeong (The Clear Mirror of Sacred Mountain).




[1] ) 「濯斯 崔炳憲先生의 壽筵」, 반도시론 제2권 4호, 1918.4.10, 48~53쪽.


[2] ) 최병헌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박종홍의 「西歐思想의 導入 批判과 攝取」(아 세아연구, 1969)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만종일련의 마지막 장인 기독교 도 리의 요소에서 기독교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한 내용을 소개하였고, 柳東植의 「濯斯崔炳憲과 그의 思想」(동방학지, 1978) 이후 송길섭, 日帝下監理敎會 三大星座, 성광문화사, 1982; ; 沈一燮, 韓國 土着化神學 形成史 論究, 국학자료원, 1995;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 사연구소, 2001 등의 연구가 있다.


[3] ) 김인섭, 「개화기소설 「성산명경(聖山明鏡)」에 나타난 기독교변증적 대화와 문학적 수사(修辭)」, 배달말 42호, 2008; 양진오, 「근대성으로서의 기독교와 기독교담론의 소설화: 「성산명경」과 「경세종」을 중심으로」, 어문학 92집, 2006; 이동하, 「한국 현대소설에 나타난 기독교의 수용양상 연구: 구한말ㆍ일 제초의 작품 聖山明鏡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103집, 1990 등이 있다.


[4] ) 최익제, 「한말ㆍ일제강점기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원대 박사논 문, 2009.


[5] ) 류대영,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2009, 17쪽.


[6] ) 일본 방문 기록은 「일본을 열람한 일」이라는 제목으로 대한그리스도인회보 제2권 21호, 1898. 5. 25부터 제2권 30호, 1898. 7. 27까지 총 10회에 걸쳐 연 재되었다.


[7] ) 「中央學會發起」, 황성신문, 1908.9.17.


[8] ) 「永昌學校趣旨書」, 황성신문, 1907.2.23.


[9] ) 최병헌, 「공부를 부지러니 할 때」, 신학월보 10권 4호, 1904.


[10] ) 「사의 셩픔이 물의 셩픔과 하」, 협성회회보, 1898.1.22.


[11] ) 개화를 말하는 사람마다 인재 배양을 역설하지만, 교육의 근본이 도학임을 모르고 가르친다고 비판하였다.(「 학당 학원 젼 쥬 최병헌씨가 화론

을 지여」, 독립신문 1897.08.21.)


[12] ) 이주익 역편 몽양원, 탁사, 1999, 23~30쪽.


[13] ) 서양 고대에는 해와 달을 부부나 형제와 자매로 상상했음을 예로 들었다.(崔炳憲, 「學有新舊辨其虛實」, 畿湖興學會月報 제1권 4호, 1908.11.25., 12~14쪽.)


[14] ) 崔炳憲, 「奇書」, 황성신문, 1903.12.22.


[15] ) 옥성득, 「‘한일합병’ 전후 최병헌 목사의 시대 인식-계축년(1913) 설교를 중심 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13호, 2000, 46쪽.


[16] ) 「격물학의 근원」에서는 “구셰주의 도학”이 “격치 학문”을 깨닫게 한다고 하 여, 는 구절이다.(그리도인회보 1898.4.20.)


[17] ) 최익제, 「한말ㆍ일제강점기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원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2009, 38쪽.


[18] ) 1925년 神學世界 제10권 2호부터 5호까지 총 4회에 걸쳐 연재.


[19] ) 최병헌의 기독교적 문명론은 문명한 선진이 후진에 행할 직분으로 도덕, 공 업, 말삼 세 가지를 제시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말삼’은 복음 즉 기독교를 지칭한다.(「선진이 후진에 행할 직분」, 신학월보 2권 7호, 1902.7) 30) 「平等의 好多」, 神學世界 제8권 5호, 1923.


[20] ) 이를 계기로 1881년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만인소 등 유림의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났지만 개방정책 및 서양 문물 수용을 촉진하는 전기가 되었다. 특히 이 글에 실려 있는 ‘공법’, ‘균세’, ‘공화’, ‘민주’ 등의 개념 초기 수용 사 례로서 의의가 있다.


[21] ) 윤해동ㆍ이소마에 준이치 엮음, 종교와 식민지 근대, 책과함께, 2013, 5쪽.


[22] ) 가쓰라지마 노부히로, 「종교 개념과 국가신도론: ‘제국=식민지’를 중심으로」, 윤해동ㆍ이소마에 준이치 엮음, 종교와 식민지 근대, 책과함께, 2013,


[23] ~156쪽.


[24] ) Oct. 31, 1893, YunD; 류대영,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제국주의 침략, 개 화자강, 그리고 미국 선교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379~380쪽 참조.


[25] ) 「委員餞別」, 대한매일신보, 1908.121.; 「傳道委托」, 대한매일신보, 1908.2.9. ;


[26] .2.11.


[27] ) 「內閣諸氏退去矣」, 대한매일신보, 1908.1.22. “第一 太皇帝陛下 禪位심

을 請이오 第二一切行政에 日本統監의 同意 要이오 第三政府椅子에 外賓을 迎入이오 第四不多軍隊도 何石章碍 因인지 一朝에 解散을 行 이오 第五一進會 奬勵야 勢力을 擴張케 이오 第六人民의 惡憾을 惹起야 義兵을 蜂起케 이오 第七 義兵이 起 日兵이 義兵을 勦平다


[28] ) 당시 선유사들이 의병과 직접 대면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들의 활동은 대 체로 대민 안무에 치중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덕주는 선유활동을 첫째, 군 수ㆍ관찰사 등 지방관리들로부터 의병 상황 청취, 둘째, 지방 행정 조직을 통 한 조칙 및 효유문 배포, 셋째, 면장ㆍ이장 등 지방 하급 관리들을 상대로 한


[29] ) 장석만, 「일제시대 종교 개념의 편성: 종교 개념의 제도화와 내면화」, 윤해동ㆍ이 소마에 준이치 엮음, 종교와 식민지 근대, 책과함께, 2013, 75쪽.


[30] ) 「信敎自强」, 대한매일신보, 1905.12.1.


[31] ) 농샹 공부 쥬 최병헌, 「독립가」, 독립신문, 1896.10.31.


[32] ) 「懿會函一會」, 황성신문, 1905.11.15. “貴宣言書中 有依其指導據其保護之說殊甚滋惑 指導之下 焉有國權保護之下 豈有獨立此一大欵恐是僉尊之誤筭也”


[33] ) 옥성득, 「‘한일합병’ 전후 최병헌 목사의 시대 인식-계축년(1913) 설교를 중심 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13호, 2000, 61~62쪽.


[34] ) 성산명경의 초판은 1909년 3월 20일 貞洞皇華書齋에서 발행하였고, 재판은 1911년 8월 3일 東洋書院에서 발행하였으며, 3판은 1912년 朝鮮耶蘇敎書會에 서 출판하였다.


[35] ) 聖山明鏡은 황성신문 1909년 4월 8일자부터 동년 5월 22일자까지 총 31 회에 걸쳐 판매 광고가 게재되었다.


[36] ) 존 버니언 저, 제임스 게일 역, 텬로력뎡(天路歷程), 배재학당 삼문출판사, 1895. 당시 풍속화가 箕山 金俊根이 그린 총 42장의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37] ) 옥성득, 「‘한일합병’ 전후 최병헌 목사의 시대 인식-계축년(1913) 설교를 중심 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13호, 2000, 51쪽 참조.


[38] ) 성산명경, 한국고등신학연구원, 2010, 104쪽.


[39] ) 「삼인문답」,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0.3.21.


[40] ) 「사교고략」, 신학월보, 1909.


[41] )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215~216쪽.


[42] ) 최익제, 「한말ㆍ일제강점기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원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2009, 78~79쪽.


[43] ) 이승만, 「예수교가 대한의 장래」, 신학월보, 1903.8.


[44] ) 김대희, 二十世紀朝鮮論, 일신사, 1907. 63) 「병자회개」, 신학월보 2권 6호, 1902.6.


[45]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2. 근현대, 역사비평사, 2009, 52쪽.


[46] ) 최익제, 「한말ㆍ일제강점기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원대 박사논 문, 2009, 2쪽.


[47] ) 존스는 1910년 6월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제4위원 회인 “비기독교 종교와 관련한 서교 메시지” 토론에 참여했다. 이 위원회 보 고서에 천명된 성취론은 마태복음 5장 17절에 기초하여 타종교에도 계시의 흔적이 있으므로 타종교를 일방적으로 파괴하고 기독교로 대체할 것이 아니 라, 기독교와 타종교 간의 접촉점을 찾아서 타종교의 예언, 염원, 갈망, 의식 등을 더 우월한 종교인 기독교로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스는 성취론 입장에서 한국 종교와 기독교 간의 접촉점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곧 신론에서 하나님, 유교와 불교가 가르치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 제사와 굿 등 의 종교의식에서 드러나는 신 공경과 숭배, 보편적인 기도, 그리고 영혼불멸 설과 제사 등의 접촉점을 통해 타종교가 기독교를 통해 더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전도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선교가 성공했다고 본다.(G. H. 존스 지음, 옥성득 번역, 한국교회형성사, 홍성사, 2013, 15~16쪽.)


[48] ) 신채호, 「이십셰기 새국민」, 대한매일신보, 1910.3.3.


[49] ) 최상현, 「추억탁사선생」, 긔독신보 제648호, 1928.5.9.


[50] ) 서동욱, 차이와 타자, 문학과 지성, 2000; 강영안, 「비표상적 사유 가능성을 탐색한 현대 유럽철학 연구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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