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7

1904년 11월 중순 뤼순 전역의 일본 육군 제3군 사령부에서 두남자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1904년 11월 중순 뤼순 전역의 일본 육군 제3군 사령부에서 두남자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 원수의 명을 받들어 두 아들 가쓰쓰케 중위와 오쓰쓰케 소위를 전장에서 잃은 후 정상적인 지휘가 어려워진 노기 마레스케 대장의 지휘권을 임시로 인수한 만주군 사령부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 대장과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3군의 세부작전을 이끌었던 참모장 이치지 고스케 소장이었습니다.
280mm 중유탄포의 근접화력지원을 받으며 잔존병력을 재편성한 혼성전투단이 203고지를 점령한다는 고다마 대장의 작전은 당시 포병운영술로는 막대한 병력손실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3군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의 반발은 당연히 강했으며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이치지 참모장의 입을 향하였습니다.
'폐하의 백성이기도 한 병사들을 아군의 포격으로 희생시킬수는 없습니다!'
고다마 대장은 이치지 참모장의 일성에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응시하며 나지막히 지적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폐하의 백성들을 허무하게 희생시켜 왔던게 누구인가? 바로 너희들 아닌가!
러일전쟁은 203고지 전투 이후에도 만주에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으며 1차 대전 이전까지 거의 최대 규모의 근대전이었습니다. 이 치열한 패권전쟁을 이끌었던 일본의 수뇌부들의 마지막 역시 대부분 비극적이었습니다. 만주군 총참모장으로 러일전쟁을 이끈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1906년 지병으로 급사하였고 전장에서 두 아들을 모두 잃고 영혼이 부서져내린 아내를 보살피며 살던 3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는 자결을 만류하던 메이지천황의 붕어를 접한 후 아내와 함께 할복하였습니다. 어전 원로로써 전쟁을 이끈 前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역시 1909년 하얼빈에서 암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온건파이며 평소 정한론에 부정적이던 이토의 사후 한일합방이 당겨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일본군은 패권전쟁에서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1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산둥반도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으며 일본해군은 지중해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적백내전 당시에는 국제개입군의 일원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백군을 지원하며 전투를 하였고 1924년까지 시베리아에 주둔 하였습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며 중국전선에서 싸웠고 1937년에는 노몽한에서 소련군/몽골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군이라고하면 미군에게 형편없이 패하는 전근대적인 군대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노몽한전투를 제외하면 근대 이후 미군 이외에 거의 패한 적이 없는 강군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열강의 군대들은 일본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독일제국군은 1차대전중에 산둥반도에서 영웅적인 항전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일본군에게 항복하여야만 했고 프랑스군 역시 1945년 인도차이나반도에서 패전이 임박하였던 일본군에게 간단히 제압되었습니다.
영국군도 1942년 말레이반도 전투에서 2배의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연전연패를 거듭한 후에 싱가포르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미군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1년 필리핀에서 상당수가 전시소집된 예비군으로 구성된 일본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하여 미,필리핀 연합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병사들과 휘하 장교들을 남겨둔 채 가족과 증국인 보모만을 대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하여야 하였으며 남은 자들은 바탄의 비극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식민사를 보면 지배국은 식민지에서 많은 병력동원을 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영국군은 대규모로 식민지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운영했고 프랑스군도 주아브병을 비롯한 식민지 동원군대를 운영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일본군의 경우 19세기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극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일본국내에서도 행정력 부족으로 많은 병역기피가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조선인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일본군 수뇌부의 근본적인 불신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인들이 근세이후 조선인들의 군사적 역량을 직접적으로 확인한 것은 동학군 2만명과 일본군 후비보병 1개중대 200명이 정면으로 격돌한 우금치 전투일 것입니다. 전투의지가 현격히 떨어지는 조선관군 3500명이 있었고 수동송탄 방식의 케틀링기관총이 있었다지만 이 정도 병력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동학군 역시 상당수가 조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고 일본군 역시 단발수동장전식 무라다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단순히 한세대 앞선 장비가 무조건적인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에티오피아군 8만과 근대화된 무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 2만이 격돌하여 에티오피아군의 승리로 끝난 아도와 전투에서 증명된 바가 있습니다.
숫적 우위의 동학군은 최초 접촉에서만 전투의지를 보였을 뿐 일본군의 정확한 사격으로 전열이 붕괴되면서 손쉽게 와해되고 역으로 일본군에게 전과확대의 기회만 줄뿐 허무하게 패하고 맙니다. 한일합병 이후 당시 기준으로 한세대가 훨씬 지나서도 조선인이 군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극소수의 대한제국 무관학교 생도가 일본육사에 편입하거나 일본육사에 합격한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내에 병력자원이 항상 풍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행정력의 부족으로 병역기피 사례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조선인특별지원병 제도가 생길 때까지 조선인이 총을 들 일은 없었습니다. 사실 일본군 내에서도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인이 병역의무를 수행한다면 자연스럽게 참정권을 보장할 수 밖에 없다는 인식도 있어왔고 소란스럽지만 위기상황에서 겁많고 나약한 조선인들이 군인으로써 적합한지에 대한 회의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고민끝에 1937년에 가서야 겨우 강화된 중대규모로 조선인 특별지원병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엄청난 지원율을 기록하여 오히려 군관계자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이미 합병후 많은 시간이 지난 일본국 조선부에 태어난 청년들에게는 인생의 기회로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실험적 성격의 규모인 만큼 엄격히 교육 훈련을 한 결과 어느정도 군인정신은 갖출 수 있다고 판단을 하고 정원을 해마다 늘려갔으나 기록을 확인해 보면 아주 조심스럽게 증가시켜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해군은 조선인에 대한 기피가 상당하여 이러한 지원병제도를 운영하지 않았고 에다지마의 해군병학교 졸업생중 조선인은 아직까지도 확인된 적이 없습니다. 병사의 경우 44년중순에 징병 이후에도 함상근무는 거의 배치하지 않았고 육상근무나 육전대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최정예로 불린 간도특설대원들과 함께 광복후 한국해병대의 초기 맴버가 되셨습니다. 특별지원병등이 점차 편제를 깆춰가면서 전장에 투입된 후 상당한 전과를 올려갔고 조선인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재인식도 점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화된 군대에서 교육훈련을 충실히 받았고 실전경험 역시 충분하였던 이들은 광복후 한국군의 핵심인적자원이 되었고 후에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세계식민사에 상당히 특이한 특징이 일제시대에 있었는데 식민지 평민이 지배국 정규사관학교나 기타 다른 장교양성기관을 통해 임관하여 지배국 출신 병사, 부사관, 장교들을 실지휘한 점입니다. 제국주의시대 인도의 수드라나 바이샤 계급이 서민이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임관한 후에 왕립 스코틀랜드 기병연대나, 왕립 근위연대에서 영국군장병을 지휘하는 것은 상상하시기 어려우실 것 입니다. 총197명의 조선인이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임관을 하였고 1944년 징병제 실시후 육군예비사관학교를 통하여 임관한 경우도 상당하였습니다. 이들은 상징적 의미로 왕족들에 한해 교육받고 명예직으로 계급을 받는 다른 식민국가들과는 달리 실제로 전선에 보내져 지배국 출신 병사들을 지휘하고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무관학교 펀입생을 제외하고는 육사에 진학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소학교/중학교 5.5 학제를 마련하고 근대화된 국민교육을 한 일본과는 달리 유교경전을 암송하는 서당교육 수준에 머물다가 일제시대에 들어서서야 사실상 국민교육을 실시한 조선의 경우 학력수준차이가 엄연히 있었을 것이고 외국어의 장벽도 상당하였으므로 식민통치가 한세대 정도 지난 후에야 어느 정도 의미있는 수의 학생들이 진학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조선출신 장교들은 초급장교에만 머문것이 아니라 평민출신으로 중장까지 진급한 홍사익 장군을 비롯하여 중일전쟁에서 용명을 떨친 김석원 대좌 등 좌관급 장교들도 일선에서 다수 근무했습니다. 의외로 인사상 상당히 공정하였고 계급우선주위에 입각하여 조선인일지라도 장교로써 존중받았습니다.
광복후 이들은 바로 대한민국 군대의 중추가 되었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광복군, 장개석군 출신들도 함께 근무를 하였으나 곧바로 발발한 한국전쟁 기간동안 일본군 출신들은 현리 참패의 유재흥이나 채병덕 같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대체적으로 우수한 근무역량을 보였고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화를 이끈 핵심인력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기간중 일본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근무하였던 미군장교들의 심경은 상당히 복잡하였을 것 입니다. 일본군의 경우 장교들은 군복은 물론 군도와 권총까지도 자신의 급여로 구매하도록 되어있었고 대부분 한국군에 근무할 당시에도 군도를 그대로 휴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많은 미군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지만 당시 한국군내에서 만큼은 가장 현대화되고 고등교육을 받은 집단인 만큼 자연스럽게 존중되어갔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학교에서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 친일파이며 반민족주의자로만 배웠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조금씩 역사를 넓게 공부해 갈수록 친일파라는 3글자로만 정의하기에는 그 족적과 시대상황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반일마케팅 소재로만 자극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깊이있고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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