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9

[현대사 인물발굴]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 월간조선



[현대사 인물발굴]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 월간조선




[현대사 인물발굴]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조선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일본의 쉰들러’


글 : 이규수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

⊙ 2·8독립선언 사건을 시작으로, 조선공산당 사건, 의열단, 박열 사건 등 변호
⊙ 조선농민운동 지원, 간토(關東)대지진 학살 규탄 앞장서
⊙ 2004년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건국훈장 받아
⊙ “옳고 약한 자를 위해 나를 강하게 만들어라. 나는 양심(良心)을 믿는다”

李圭洙
⊙ 1962년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日히토쓰바시대(一橋大) 박사(한일관계사).
⊙ 현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
⊙ 저서 :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곡의 역사>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등.

‘일본의 쉰들러’로 불리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

2010년 여름, 한국에서는 강제병합(倂合) 100주년을 계기로 각종 행사로 분주하다. 역사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식민주의의 극복과 미래지향의 한일(韓日)관계 구축,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정착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과 전망을 제시하는 심포지엄 등이 연이어 개최되고 있다. 강제병합 100년의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 바람직한 동아시아의 미래상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강제병합 조약의 무효를 주장한 ‘지식인 선언’을 비롯해 다양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의 하나는 순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와 우호를 모색하자는 의도에서 기획된 일본 법조인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년)의 일생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기록영화의 완성일 것이다.

후세 다쓰지라는 법조인은 과연 누구인가? 왜 그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본보기로 거론되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후세 다쓰지와 조선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후세가 당시 재판에 회부된 조선인 ‘피고인’들을 접견하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일본인으로서 자민족(自民族)의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검토하는 일은 한일 연대(連帶)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를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기 위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일본인



후세 다쓰지의 메이지법대 졸업장.

우리 정부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建國)에 공로가 큰 사람이나 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목숨을 바쳐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인물 가운데 일본인이 있다. 후세 다쓰지는 지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은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사람들은 그를 독일 나치 치하에서 죽어 가던 유대인들을 도왔던 쉰들러(Schindler)에 비유해 ‘일본인 쉰들러’라고도 부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각종 인쇄물에서 후세를 ‘우리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라 지칭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아낌없이 나타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후세는 일본인으로서 건국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한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을까?

후세는 “옳고 약한 자를 위해 나를 강하게 만들어라. 나는 양심(良心)을 믿는다”며 일생동안 자유 평등 민권이라는 이념을 실천한 인권변호사로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일생은 묘비명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라는 좌우명(座右銘)으로 일관하여 일본 민중뿐만 아니라 당시 피(被)압박 조선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후세는 전(全) 생애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조선인과 관계를 맺었다. 후세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대표되는 치안유지법 사건 관련 변호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법조활동뿐만 아니라 간토(關東)대지진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일본관헌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와 항의활동에 주력했고, 조선인 유학생이 주최한 추도회에서도 이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 밖에도 후세는 ‘이재조선인구원회(罹災朝鮮人救援會)’ 고문, 미에현(三重縣) 기노모토초(木本町)의 조선인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활동, 수해이재자의 구원활동, 조선인이 주최한 각종 강연회 연설, ‘재일조선인 노동 산업희생자 구원회’의 결성, 형평사대회에서의 강연 등 그의 활약상은 ‘일본 무산(無産)계급의 맹장(猛將)’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다방면에 걸쳐 있다. 조선인 활동가들은 후세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일본인으로 평가했다.


묵자의 兼愛사상에 영향



후세 다쓰지에게 영향을 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변호사로서의 후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후세의 장남이 집필한 두 권의 전기(傳記)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후세는 일본 내에서 1928년 3·15 공산당 사건과 1929년의 4·16 공산당 사건의 변호를 담당했고, 1931년에는 공산당재판 중앙통일공판투쟁의 실질적인 변호단장으로 활약하여 치안당국으로부터 소위 ‘적색(赤色)변호사’로 간주되었다. 또 스스로도 신문지법 위반과 노농(勞農)변호사단 사건에 연루되어 징계재판에 회부되거나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세 번에 걸쳐 검거 투옥되었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후세는 일본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좌익(左翼)변호사’ 혹은 ‘인권·민중변호사’로 인식되었다. 그의 인도주의에 의거한 변호사로서의 실천활동과 특히 식민지 민중에 대한 높은 관심을 고려하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후세는 1880년 미야기현(宮城縣) 오시카군(牡鹿郡) 헤비타무라(蛇田村)에 있는 한 농가(農家)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과에 진학하지 않고 한자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도 묵자(墨子)의 겸애주의(兼愛主義)에 관심을 가졌다. 또 자유민권운동의 지지자였던 부친 에이지로(榮二郞)의 영향을 받아 부친이 소장한 전기, 역사, 소설은 물론 동서양의 철학서적을 탐독하고 그리스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후세는 특히 한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후세는 후술하듯이 사법관시보(試補)를 그만둘 때 발표한 <사직의 글(桂冠の辭)>에서 ‘사회정책으로서의 겸애주의’라는 표현을 자주 인용했다.

후세는 자신과 타자(他者)를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주의에서 인간의 평등성을 발견하고, 이에 기초하여 당시의 조선인을 일본으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받는 이민족(異民族)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이후 행적을 바라보면 인간의 평등성, 즉 ‘자신과 타자에 대한 동일한 사랑의 논리’는 민족의 평등성, 즉 ‘자민족과 이민족에 대한 동일한 사랑’으로 발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검사 직책은 늑대와 같은 일’

후세는 1899년 고향을 떠나 도쿄에 상경하여 메이지법률학교(明治法律學校)에 입학했다. 후세가 대학에 진학한 것은 박애의 이상(理想) 아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실을 없애고, 이를 실행시킬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법률은 도덕과 더불어 사회생활의 원리이기 때문에 법을 배우는 것은 자신의 철학연구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후세는 입신출세(立身出世)가 아니라 청빈(淸貧)을 실천하며 철학을 배워야 한다는 소년기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재학 중 후세는 아시아의 유학생과 많은 교류를 나누었다. 조선인과의 첫 만남도 그때 이루어졌다. 후세가 유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들 역시 자신의 입신출세보다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후세는 나중에 타이완(臺灣)과 조선에 건너가 변호활동을 전개하는데, 여기에는 대학시절의 인간적인 유대가 크게 작용했다.

도쿄에 상경한 후세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등의 그리스도교 사상과 운동에 관여하면서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 가타야마 센(片山潛),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등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성격이 농후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후세는 또 부친을 통해 자유민권운동의 민권의식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사상과 운동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테러리스트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郞) 등의 사상을 비롯하여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사회악(社會惡)을 증오하는 것이라면 폭넓게 수용했다. 후세의 다양한 체험은 이후 그의 활동영역이 일본을 넘어 조선에까지 확장되는 데에 크게 작용했다.

후세는 1902년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판사검사등용시험(判事檢事登用試驗)에 합격하여 1903년 4월에 사법관시보로서 우쓰노미야(宇都宮) 지방법원에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같은 해 8월 사법관시보를 사직한다. 사직의 직접적인 이유는 모녀(母女) 동반자살을 기도한 모친을 살인미수로 기소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후세는 검사의 직책에 대해 ‘늑대와도 같은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직의 글>을 발표하고 도쿄에서 변호사명부에 등록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

후세는 이 시기부터 톨스토이의 ‘노일비전론(露日非戰論)’에 깊이 공감하여 휴머니즘 입장에서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후세는 톨스토이 휴머니즘의 가장 충실한 제자로서, 1910년대 초에 부친이 서재에 걸어 둔 톨스토이의 사진 앞에서 기도하면서 자신을 강하게 해 달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후세는 1906년의 ‘도쿄시 전차 인상반대 시민대회사건’으로 사회주의자 야마구치 요시미(山口義三)를 변호함으로써 처음으로 사회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또 1910년에는 메이지(明治) 천황의 암살을 계획한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 등의 대역사건(大逆事件)에서 간노 수가(管野スガ)의 변호를 자청했지만, 주임변호사로부터 법정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거절당했다. 이 밖에도 후세는 각종 노동쟁의와 쌀소동 등의 재판에 관여하고, 보통선거 요구운동과 공창(公娼) 폐지운동도 전개했다.

후세가 1918년과 1919년에 담당한 수임(受任) 건수는 1918년에는 형사 190건·민사 26건, 1919년에는 형사 192건·민사 27건에 달했다. 여기에 취하된 사건까지 포함하면 1년에 취급한 사건 수는 250건이 넘었다. 1개월간의 법정출정 횟수는 많을 때는 135회, 적을 때에도 90회를 상회하는 것으로 1일 평균 4회 정도였다. 변호사로서 정력적인 활동이었다.

후세는 강제병합을 전후로 조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후세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을 비난하고 조선인과 조선독립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1911년에 작성한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이 문제되어 검사국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후세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드러낸 것은 3·1 운동을 전후한 시기이다. 1920년 5월에 후세는 사회적으로 분출된 보통선거 운동과 사회단체의 결성을 계기로 ‘전통적인 변호사’로부터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하겠다는 장문(長文)의 <자기혁명의 고백>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변호사로서의 입신출세를 거부하고 사회의 약자와 더불어 살아 나가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후세는 <자기혁명의 고백>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 국내의 사회문제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에도 직접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인만이 아니라 조선인과 대만인을 향한 양심선언이었다. 일본인 운동가와 사상가의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로 식민지 문제와 피억압 민족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는데, 이 점에서도 후세는 그 누구보다 앞선 선각자였다.

후세가 조선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배경에는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거행된 조선청년독립단의 2·8 독립선언과, 이어서 조선 각지에 전개된 3·1 운동의 여파가 크게 작용했다. <자기혁명의 고백>의 선언 이후, 후세는 일본 내 노동운동, 농민운동, 무산정당운동, 수평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고베(神戶)의 미쓰비시(三菱)·가와사키(川崎) 조선소의 쟁의 지원을 계기로 야마사키 게사야(山崎今朝彌)와 함께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변호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8 독립선언사건 관련자 변호



메이지대 법대에 있는 후세 다쓰지의 유품전시실.
후세의 활동영역은 변호에 그치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법률상담과 시사강연회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사법제도 혁신을 위한 판결과 변론 등을 공개하기 위해 <법정으로부터 사회로>(法廷より社會へ·1920년 6월~1921년 8월), <생활운동>(生活運動·1922년 11월~1927년 5월), <법률전선>(法律戰線·1927년 7월~1930년 11월)을 10년에 걸쳐 간행하는 등 개인 저작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자기혁명의 고백>을 통해 변호사로서의 부귀영화를 미련없이 버리고 식민지 문제를 포함한 사회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후세는 <자기혁명의 고백>을 전후로 2·8 독립선언으로 검거된 최팔용(崔八鏞), 백관수(白寬洙) 등 9명에 대한 ‘출판법 위반사건’ 제2심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재판의 결과는 징역 9개월 이하의 유죄(有罪)판결을 받았지만, 조선인들은 무료로 변호를 담당한 후세에게 커다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후세는 이후 조선인 관련사건 변호와 각종 구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20년 9월에 후세는 <조선의 모 피고에게>(朝鮮の某被告に宛て)라는 편지에서 조선 방문을 통한 변호 의지를 표명했다. 편지의 수신자는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3·1 운동 관련으로 재판에 회부된 활동가였을 것이다. 후세는 조선 문제를 아주 크고 복잡하며 세계적이고 인도적인 문제로 인식했고, 조선인 또한 후세의 활동상을 익히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조선 문제를 엄정하게 비판하려는 후세의 시도는 조선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층 깊어 갔다.

<자기혁명의 고백> 이후 후세의 한국인식이 가장 잘 나타난 문장은 <아카하타>(赤旗) 1923년 4월호에 게재된 <무산계급으로부터 본 조선해방문제>(無産階級から見た朝鮮解放問題)에 대한 설문회답이다.

여기에서 후세는 ‘무대가 무대인 점’과 ‘특별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답변함으로써 무산계급 일반의 문제로는 해소할 수 없는 식민지 조선의 독자적인 문제로 간파하면서도, 조선에서의 극심한 착취는 무산계급 해방의 ‘도화선(導火線)’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1923년 7월 조선을 처음 방문했을 때, 조선 문제의 해결은 총독정치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세계 개조’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1923년 조선 방문, 의열단원 김시현 변호



한복 혼례복을 입고 재판을 받고 있는 박열(오른쪽)과 그의 애인 가네코 후미코(왼쪽).
후세는 조선인 활동가들이 주최한 환영석상에서 “조선인은 총독정치를 비판하거나 총독부의 정책을 논하는 등 조선통치에만 구애받고 있다. 현대의 적(敵)은 부분의 문제에 있지 않다. 세계 개조를 외치는 시대에 접어들었고 이러한 세계 개조에 따라 조선 문제도 해결될 것”(「北星會巡廻講演會入京ノ件」(京本高第5163號), 1923년 7월 31일)이라 말했다.

식민지문제, 즉 민족문제는 계급해방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 준 말이다. 후세가 말하는 ‘세계 개조’란 물론 러시아혁명 이후의 신사조(新思潮), 지주와 자본가를 타도하여 농민과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를 추구한 계급해방투쟁을 말한다. 후세 또한 이러한 당시 사조에 충실히 순응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 활동가들이 후세를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식민지라는 폭압(暴壓)체제 속에서 피압박민족의 이익을 몸소 대변하려는 후세의 성실한 자세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세는 1923년 7월 말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조선인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가 주관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하기순회강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성회원인 김종범(金鍾範), 백무(白武), 정태신(鄭泰信)과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북성회 회원들은 일본 내(內)에서 후세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조선에 초청하여 조선 문제를 국제적으로 여론화시키려 했을 것이다.

조선 내 11단체 60여명은 후세의 방문 당시 서울역에 각 단체 깃발을 내걸고 강연단을 환영했다. <동아일보>는 서울에서의 첫 강연에서 열변을 토하는 후세의 사진을 게재하고, 사설을 통해 “금번 후세가 조선을 보고 발표한 감상담 중에는 극히 작은 부분이지만은 조선인적 감정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新人의 朝鮮印象 : 布施辰治氏의 感想談>,<동아일보>1923년 8월 3일자)며 후세의 발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선인 활동가들은 직접 처음으로 대면하는 후세의 언동을 통해 ‘극히 작은 부분’이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려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세를 중심으로 한 강연단은 8월 1일 서울에서의 강연을 시작으로 12일까지 남부 각지에서 10여 회에 걸쳐 강연회를 개최했다. <동아일보>는 ‘인간생활의 개조운동과 조선민족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강연 기록을 일요판 특집으로 게재했다. 후세는 강연활동을 통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성실한 모습을 조선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강연단이 갈 수 없었던 마산에서는 후세가 단독으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후세는 또 체재 기간 중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의 재판을 변호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규탄

후세는 강연일정 때문에 김해(金海)에서 담당변호사였던 이인(李仁)에게 “사법재판의 권위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초월한 인격독립의 사상대책을 기대한다”는 변론요지와 김시현에게 위문전보를 보냈다.

후세가 일본에 귀국하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건은 간토대지진이었다. 1923년 9월 지진이 발생하자, 후세는 조선인 학살사건을 조사 고발하기 위해 자유법조단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다. 하지만 자유법조단은 당국의 방해공작으로 학살의 진상을 정확히 규명할 수 없었고 조사결과도 발표할 수 없었다.

한편 후세는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10월에 결성한 ‘도쿄지방이재조선인후원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後援會)’에 고문으로 참가했고, 12월에 개최된 ‘피살동포추모회’에서 추모연설을 하였다. 후세는 조선인 학살에 대해 당국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특히, 그중에는 조선에서 온 동포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 저는 애도할 말이 없습니다. 또 어떤 말로 추도하더라도 조선동포 6000의 영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슬퍼하는 1000만 개의 추도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무념에 가득 찬 그 사람들의 마지막을 추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大東公論>2-2, 1924년 11월호)라고 말했다.

후세의 연설문은 당시 조선인 학살을 규탄하는 문장 중에서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학살에 대한 분노와 아쉬움이 추도사 전문에 가득 차 있다. 후세는 조선인 학살문제를 인재(人災)로 인식했다.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후세는 도착 직후 간토대지진에 대한 사죄의 글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각각 우송했다.


천황 암살 기도한 박열 변호

조선 방문 이후, 후세와 조선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후세는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폭발물취체벌칙위반사건’의 변호(1924년), 박열(朴烈)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대역사건’ 재판의 변호(1926년), 조선수해이재민구원운동(1925년), 조선인 폭동을 상정한 오타루 고등상업학교(小樽高等商業學敎)의 군사교련에 대한 항의운동(1925년), 미에현(三重縣) 기노모토초(木本町)에서의 조선인 살해사건의 진상조사(1926년) 등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변호활동을 전개했다.

후세의 일생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박열과의 만남이었다. 박열은 1921년 동지들을 모아 혈권단(血卷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도쿄 유학생들 가운데 반민족 친일 부패분자들을 습격해 폭력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박열은 관헌에 체포되었는데, 후세의 변론으로 정식재판을 청구해 무죄 석방되는 인연을 맺었다.

후세와 박열의 관계는 당시 박열을 무죄로 석방해 준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후세는 박열이 1923년 ‘대역사건’으로 기소된 후 3년여간의 재판과정에서 그에 대한 무죄를 시종일관 주장했다. 일본의 국체(國體)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박열의 변호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법정투쟁이었다. 더구나 변론과정에서 옥사(獄死)한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를 몸소 거두어 박열의 고향으로 운구하는 등 끈끈한 우정의 관계를 맺어 나갔다.

후세는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하여 전남 나주군의 궁삼면 토지사건을 조사했다. 궁삼면 토지회수운동은 조선후기부터 식민지기에 걸쳐 봉건지배층과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상대로 전개된 토지탈환 투쟁이었다.

궁삼면 농민들은 동척(東拓)의 불법적인 토지매수에 맞서 ‘토지소유권 확인소송’과 ‘토지소유권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재판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토지조사사업’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재판은 동척의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정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농민들은 일본에 대표를 파견하여 토지문제의 상담과 소송을 의뢰하기 위해 후세를 방문했다.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친구, 변호사계의 반역자 후세 다쓰지’라는 광고를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세는 농민대표의 의뢰를 받아들여 1926년 3월 2일부터 11일까지 조선을 방문했다. 후세는 농민들이 작성한 ‘서약서’와 ‘토지회수불납동맹혈서’를 보고 농민들의 열정에 감격했다. 이 두 번째 조선 방문은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을 변호하겠다는 자기실천 과정이기도 했다. 후세는 토지문제를 조사하면서 식민지 농촌문제의 심각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후세는 “조선무산계급 농민의 생활고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또 소위 식민지정책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압박에 분개할 수밖에 없다. 사회문제 중의 사회문제이고 인도문제 중의 인도문제”(<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6쪽)라며 애절한 감회를 토로했다.


조선공산당 사건 변호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크게 보도한 1927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 사진 왼쪽이 가네코 후미코, 오른쪽이 박열의 모습이다.
1927년 후세는 세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다. 방문목적은 박헌영(朴憲永) 등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공산당 사건의 변호인단은 이인(李仁), 김병로(金炳魯), 허헌(許憲) 등을 중심으로 일본으로부터 후세와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가 가세했다. 후세는 자유법조단, 후루야는 노동농민당(勞動農民黨)으로부터의 파견이라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고려할 때 후세는 조직의 결정이 아니더라도 사건 변호를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공판 개시를 앞두고 후세는 사건 관련자 101명에게 장문의 편지를 발송했다. 후세는 이 편지와 함께 ‘변호참고사건조서’를 동봉하여 기재를 요청했는데, 변호를 위한 철저한 준비와 성실함을 엿볼 수 있다. 공판은 9월 13일부터 일반방청이 금지된 상태에서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사이 후세는 도쿄에서 대기하면서 재일조선인이 개최한 ‘조선총독폭압정치비판연설회’에 연사로 참가했다.

후세는 공산당사건을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으로 간주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정당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조선공산당 사건의 공판은 피고에 대한 고문이 폭로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후세는 1주일 정도 조선에 머물다 일본에 귀국하여 항의운동의 선두에 섰다. 재일조선인과 함께 총독부 정무총감 유아사 구라헤이(湯淺倉平)를 방문하여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12월에는 네 번째로 조선을 방문하여 공판의 최후변론을 맡았다. 최종판결은 12명을 제외하고 전원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또 왔다! 일본무산계급의 맹장”

후세는 1922년 박열(朴烈)이 발행한 잡지 <불령선인>(太い鮮人) 제2호에 ‘프롤레타리아의 친구, 변호사계의 반역자 후세 다쓰지’라는 광고를 게재했다. 후세가 이러한 광고를 게재한 것은 ‘자기혁명의 고백’의 실천방안으로 내세웠던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에 스스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후세와 조선과의 관계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조선인 활동가만이 아니라 현장의 일반 대중에게도 애정 어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제관헌(日帝官憲)은 후세의 조선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 번째 방문 시에는 후세의 방문이 농민을 자극하고 동척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며 경찰 권력을 동원해 농민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후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현지에 도착하여 곧바로 개별조사와 실지답사를 실시했다. 조사방법은 후세가 미리 준비한 두 종류의 조사표 용지에 의한 것이었다. 조사표 내용은 먼저 실지면적을 조사하고 민유지라는 근거, 동척으로의 편입과정, 앞으로의 토지문제 해결방안 등을 묻는 것이었다. 후세의 사건에 대한 철저한 준비성을 새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후세는 현지조사와 더불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각종 강연과 조사활동도 전개했다. 대구, 대전, 광주, 전주, 서울 등지에서 조선인 활동가의 주최로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광주노동연맹 등이 주최한 강연회에서는 “용이하게 듣지 못하는 기회에 오라! 왔다! 왔다! 후세 씨! 또 왔다! 일본무산계급의 맹장!”이라는 선전벽보를 통해 후세의 강연회를 널리 알렸다.

후세는 각지로 이동하면서 각지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는 성실함을 보였다. 전주지역의 이도전주청년회, 전주신문배달인조합, 전주양화직공조합, 전주철공조합, 전주여자청년회, 금요회, 전주인쇄공조합, 전북청년연맹의 상황 등을 자세히 조사했다. 상상을 초월한 강행군 속에서 이루어진 조선 민중에 대한 애정의 발로였다.


‘식민지 근대화’의 모순 지적



<후세 다츠지> 책 표지.
일본에 귀국한 후세는 1926년 4월 ‘조선문제강연회’를 통해 토지문제 조사결과를 밝혔다. 식민지와 농촌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강연이었다. 먼저 후세는 식민지 조선 문제를 조선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즉, “조선 문제는 국제적인 분규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면서 전 인류의 문제이다”(<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6쪽)라고 지적했다. 후세는 이어서 일본 제국의회에서 이루어진 조선 문제 관련 질의응답을 조사하여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논조를 비판했다.

후세가 이처럼 정치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를 구분하여 식민지 통치를 적절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농업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후세는 비록 관헌 측 문헌이지만, 각종 간행물을 통해 조선농업의 문제를 상세히 파악했다. 농업지대, 기후, 주요농산물 등에 대한 사전 지식을 겸비했고, 토지 소유관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후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지적은 식민지 일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에 의거한 비판이었다.

후세는 조선을 방문하고 귀국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조선인의 상황과 그들이 소지한 금액까지도 면밀히 조사했다. 그의 조사기록에 의하면 승선인원 760여명 가운데 조선인은 640여명이고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는데, 조선인 중 유학생은 10명, 나머지는 모두 노동자였다. 노동자 중에서 150여명은 일시귀국자이고, 나머지 500여명은 처음으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조선농민의 해외로의 유출(流出)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자세가 돋보인다.

후세는 이러한 조사의 결과 “도항(渡航)노동자는 조선 농촌에 살 수 없게 된 무산계급 농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헌 측은 도항자에 대해 준비금을 철저히 조사하고 부족한 자에 대해 도항금지를 내리는 등 엄격한 취체(取締)를 실시하고 있다. 조선 노동자는 조선에 있어도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고, 살아 나갈 수 없는 생활고에 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36쪽)고 밝히고 있다. 후세의 인식은 관련서적만이 아니라 현장조사를 통해 습득된 생동감 있는 인식이었다.

후세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당시의 농업정책인 ‘산미(産米)증식계획’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했다. 후세는 결국 식민지 농업정책이 결과적으로 일본의 인구와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총독부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는 조선인의 농촌사회로부터의 유출을 가속화시킬 뿐, 조선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했다.


1932년 법정모독 이유로 변호사 자격 박탈

후세는 일찍이 일본 국내의 각종 소작(小作)쟁의사건 변호도 담당했다. 농민운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자비(自費)출판 형태로 1930년에 <소작쟁의의 전술과 조정법의 역용>(小作爭議の戰術と調停法の逆用)과 효과적인 법정투쟁의 길잡이로 <소작쟁의 법정전술 교과서>(小作爭議法廷戰術敎科書)를 각각 출판했다. 후세의 농민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후세는 <자기혁명 고백> 이후 자유법조단,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단, 일본노농변호사단을 거점으로 전투적이고 파란만장한 활동을 전개했다. 투쟁의 상대는 발흥하는 일본 파시즘이었다.

후세는 1928년 합법적으로 가장 좌익이었던 노동농민당(勞動農民黨)에 입당한다.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단의 법률부장으로서 일본의 ‘3·15 공산당사건’과 1929년의 ‘4·16 공산당사건’의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당시는 치안유지법에 의한 공산당 탄압사건이 계속된 시기였다. 후세는 이들 재판의 변호를 위해 분주히 활동했는데, 이것은 후세가 추구하는 인도주의, 인권옹호, 사상의 존중이라는 정치노선의 실천과정이었다.

후세는 1932년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계재판에 회부되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1933년 후세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기소당하여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직후 일본노농변호사단 일제검거사건에 연루된 것도 치안유지법 관련 재판에서의 격렬한 변호활동 때문이었다.

후세에게 이 시기는 고심에 찬 나날들이었다. 후세는 함께 검거된 동료 변호사 중 홀로 법정투쟁을 지속했다. 하지만 1939년에는 결국 노농변호사단 사건의 상고심이 기각되어 징역 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당연히 변호사 등록도 말소되었다.

1944년 후세의 셋째 아들 모리오(杜生)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교토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후세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픔을 경험했다.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후세는 아들의 변호도 할 수 없었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더욱이 ‘성전(聖戰)’에의 협력을 강요받은 심리적 압박 속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후세는 일본 동북지방의 농촌과 산촌을 조사하거나 농민문학에 관한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패전 이후에도 인권변호사로 활약

일본의 패전(敗戰)과 더불어 후세는 다시 웅대한 모습으로 민중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출옥 자유전사 환영 인민대회’에 참가하여 연설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자유법조단을 재결성하여 변호사로서 다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후세는 새로운 평화헌법의 보급과 계몽에 힘쓰고 미(美)점령군과 일본정부의 횡포로부터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획득하려는 투쟁에 전력했다.

후세는 1946년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朝鮮建國憲法草案私稿)를 조선인들과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것은 재일(在日)조선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집필한 것이다. ‘해방’ 이후 민족독립의 상징인 신헌법을 구상할 수 있는 일본인은 물론 후세 이외에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해방’ 이전부터 조선 문제를 다뤄 오던 후세다운 모습이었다.

또 <운명의 승리자 박열>(運命の勝利者朴烈)을 출판하고, 1947년에는 <간토대진재 백색테러의 진상>(關東大震災白色テロルの眞相)에 원고를 기고하는 등 재일조선인과 변함없는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변호활동으로는 1948년의 한신(阪神) 교육투쟁에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이 밖에도 후세는 1953년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후카가와(深川)사건, 조련(朝連)·민청(民靑) 해산사건, 도쿄 조선고등학교 사건, 다이토(台東)회관 사건 등 일련의 군사재판에서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또 한국전쟁 시기에는 공안조례 폐지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인도 연루된 메이데이 사건과 수이타(吹田)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후세는 조선인이 관련된 거의 모든 사건의 변호를 담당한 셈이다.


인류애의 소산

1949년 11월 도쿄에서 개최된 ‘후세 다쓰지 탄생 70년 축하 인권옹호선언대회’에서 한 조선인 활동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후세의 생애를 잘 대변해 준다.

<후세 다쓰지 선생의 투쟁심은 조선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독립·평화·평등·호혜의 정신에 의거한 참 정의를 사랑하는 선생의 세계관에서, 용솟음치는 인류애에서 나왔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타민족의 기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자민족의 독립이나 인권은 결코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타민족의 독립과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고 오히려 유린하려는 사람이 자민족의 문화와 교육도 아무 거리낌 없이 유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의 애국자를 도와주신 선생에 대해, 또 일본의 독립을 위해, 일본 인민의 기본적 인권의 옹호를 위해 싸워 온 선생에 대해 우리는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후세는 1953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이 고별식 장의위원으로 참가했다. 당시 조선인들의 평가대로 후세는 ‘일본무산운동의 맹장’이었다. 후세와 조선인의 관계는 한일연대투쟁의 거울과도 같은 모습이다. 후세는 식민지 민중의 ‘벗’으로서, 때로는 ‘동지’로서 영원히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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