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9

박찬승 <반민특위와 ‘친일’ 변명 담론의 형성>


박찬승
6 June at 22:16 ·



오늘 뉴스에서 반민특위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6월 6일, 1949년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지 70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죠. 10년 전쯤 <반민특위와 ‘친일’ 변명 담론의 형성>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아래는 그 논문의 결론 부분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서 주로 참고한 자료는 <반민특위재판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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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일제하에 관료, 공직자, 종교인으로서 친일 행위가 있어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피의자로서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던 이들의 신문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관료 3명, 공직자 2명, 목사 2명, 언론인 2명 등 모두 9명의 사례로써 일반화를 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일단 이들의 사례를 들어 그들의 친일변명 담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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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관료의 경우, 피의자들은 일본의 지시를 받는 관리가 되어 총독정치에 협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반성의 빛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민족적 양심에 입각하여 공민의 복리를 위해 노력해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비록 총독부의 지시를 받아 행정에 참여했지만, 민족을 위하여 일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심지어는 총독부 정책에 반대하여 저항하기도 했다고 주장하였다. 또 자신들은 당장 국권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서히 실력을 기르면서 민족을 지도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전쟁 협력 등 불리한 측면에 대해서는 총독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했다면서 책임을 회피하였다. 중추원 참의가 된 것도 이를 거절하면 배일혐의자로 볼까봐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사위원회나 검찰부에서 증언한 증인들도 피의자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즉 민족을 위하여, 민중을 위하여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검찰부는 이와 같은 피의자와 증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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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원이나 도회의원을 맡았거나 더 나아가 중추원 참의에 이르렀던 공직자의 경우, 피의자들은 일제에 협력했다는 점에 대해서 부끄럽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회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에는 ‘민의 창달’을 위해 참여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변명하기도 하였다. 또 도회 의원을 여러 번 지내고 지방 몫으로 중추원참의가 된 이는 자신의 본의보다 도지사의 추천에 의해 중추원 참의를 맡게 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거물 면장을 지낸 이는 일제말기 면민들에게 과도한 공출을 강요한 데 대해서는 심히 부끄럽다고 반성의 빛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민중의 원한을 살만한 일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결국 개전의 정을 보였다 하여 검찰부로부터 공소 취소를 받거나, 주위 사람들이 교육사업에 공로가 많은 이라는 진정서를 올려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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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특히 목사로서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나 황민화정책에 적극 협력한 이들은 어떠하였을까. 그들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의식이었으며, 일본 국민으로서 국가의식에 불참하는 엄중한 처단을 받았기 때문에 부득이 참여하였다고 변명하였다.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면 교회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신사참배는 본의가 아니었으며, 일제 정책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부 증인들이 기도와 강연시에 속히 황민이 되어 지원병으로 출정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 데 대해서는 이는 ‘중상 모략’이라고 부인하였다. 어떤 목사는 증인들로부터 ‘밀정’의 혐의까지 받았지만, 당사자는 이를 극력 부인하였다. 그리고 조사위에서는 피의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증인들도 검찰에서는 몸을 사리고 증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였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피의자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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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에 근무했던 친일 언론인들의 경우,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매일신보에 근무하였다는 식으로 자신을 변명하였다. 어떤 이는 ‘과거를 악몽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식으로 반성의 빛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매일신보 간부로서 징병과 징용을 위한 강연을 한 것에 대해서는 “화랑도 정신으로 대동아전쟁을 완수하자”는 의미로 강연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검찰은 이러한 진술을 토대로 개전의 정이 현저하다면서 그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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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본 것처럼 총독부 관리, 공직자, 종교인, 언론인 등 사회적으로 일정한 신분을 갖고 있던 이들로서 부일 협력의 길을 걸은 이들은 그러한 직책을 맡은 것에 대해 일부 후회하면서 부끄럽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고, 대부분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자의가 아니었다’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거나,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민족을 위하여 일하려 한 것이었으며, 민족정신을 망각한 일은 전혀 없었다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하여 민족을 팔고 양심을 팔아 친일행위를 하였다고 반성한 이는 전혀 없었다. 일제의 지배정책, 침략전쟁에 협력한 행위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득이하였다’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식으로 상황 논리를 펴서 책임을 모면하려 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적극적인 협력, 특히 전쟁협력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극력 부인하였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검찰부에서는 완강하게 자신을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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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증인들은 처음 조사위에는 적극적인 협력 행위를 증언하였으나, 1949년 6월 이후 검찰부로 넘어간 뒤에는 피의자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는 6월 이승만정부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고 반민특위의 구성을 개편하자 증인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피의자들은 그해 6월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정황 위에서 검찰은 그해 가을 대부분 ‘개전의 정이 현저하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보면, 반민 피의자들에 대한 처벌을 무산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49년 6월 이승만정부의 반민특위 무력화와 개편 작업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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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반민특위는 반민 피의자들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의 기회를 만들어주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는 옹호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로 하여금 친일에 대한 변명과 옹호의 ‘담론’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친일 협력자들이 현실 속에서 여전히 힘을 갖게 됨에 따라 친일에 대한 변명 담론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은 그들의 후예에 의해 오늘날에도 재생산되면서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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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7, 대통령소속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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