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4

알라딘: 스승은 있다 -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알라딘: 스승은 있다 -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스승은 있다 -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우치다 타츠루 (지은이),박동섭 (옮긴이)민들레2012-07-20

































159쪽
148*210mm (A5)
235g

------------

책소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하류지향>으로 우리 사회에도 꽤 알려진 우치다 타츠루는 ‘저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아이들의 성장’이라고 말한다. 그는 숱한 사회갈등 해결 방안의 접점을 ‘교육’에서 찾는다. 강단 위의 스승에서 일상의 스승으로 내려온 그의 ‘길거리 교육혁명’은 근본적이면서도 친숙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누군가를 제압하거나 조직 사회에서 자신의 위계를 올리기 위함이 아니다. “아이는 반드시 성장하며 모든 아이의 내면에는 잠재된 가능성이 개화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낙관적인 교육관의 소유자인 그는 획일화된 성공을 추구하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듯 진정한 배움의 길로 나아가려면 ‘스승은 있다’라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이민열
- <시사IN>이 선정한 올해의 책, 2012 행복한 책꽂이



저자 및 역자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지난 40여 년 동안 합기도를 수련하며 레비나스 철학을 연구해오면서 신체와 윤리의 관련성에 천착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철학, 문학, 정치, 문화 등 일본 사회 전방위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을 백여 권 펴내기도 했다. 다양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길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 ‘개풍관’이라는 공간을 열어 무도와 철학을 함께 배우는 배움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기도 하다. 국내 출간된 책으로는 『하류지향』, 『교사를 춤추게 하라』, 『스승은 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 더보기


최근작 : <소통하는 신체>,<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거리의 현대사상> … 총 198종 (모두보기)

박동섭 (옮긴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독립연구자 및 자율형통역자다. ‘일상’과 ‘보통’, ‘당연’ 그리고 ‘물론’을 비판적으로 응시하고 조준하고 해독하는 사람들의 사회학(에스노메소돌로지) 연구자의 입장에서 ‘트위스트 교육학’, ‘일상의 자명성·복잡성·일리성의 해부학’, ‘침대에서 읽는 비고츠키’, ‘어른학’ 강좌 시리즈를 이동하면서 수행하고 있다. ‘지적 괴물’인 우치다 타츠루의 임상철학과 ‘무사적 글쓰기의 대가’ 김영민의 『일리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인간, 사회, 심리, 교육 그리고 배움에 대한 새로운 밑그림 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해럴드 가핑... 더보기


최근작 : <회화분석 (큰글씨책)>,<회화분석>,<해럴드 가핑클 (큰글씨책)> … 총 3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민들레





˝자신이 이 세계에서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다른 것과 교환 할 수 없는)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배웁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말씀입니까!
꿈노마드 2012-07-20 공감 (3) 댓글 (0)
Thanks to
공감





가르치는 학생의 추천으로 읽고 감명 받은 책. 얇은 책이지만 책을 잡고 마지막 장까지 놓을 수 없었다. 스승은 어째서 훌륭한가? 무엇이 스승을 만드는가?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의 필독을 권한다
작은도서관 2019-02-20 공감 (1) 댓글 (0)
Thanks to
공감





이 양반... 묘한 설득력이 있어요. 정년 퇴임하고 무도관 하는 거나.....그게 어떤 건지 확인하는 것도 재미 있을듯.
madwife 2012-08-14 공감 (1) 댓글 (0)
Thanks to
공감





교육의 주체성은 ‘가르치는 자’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배우는 자’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들뢰즈&데리다류 철학을 교육이라는 주제에 적용한듯 보이기도 해요. 친절한 문체덕에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동네쿨가이 2018-07-01 공감 (1) 댓글 (0)
Thanks to
공감





오해가 없으면 배움도 스승도 없다. 제목부터 조심하라.
moon 2012-10-24 공감 (0) 댓글 (0)
Thanks to
-------------------




스승과 애인의 공통점은...




'선생님은 훌륭하다'가 이 책의 제목이다.

선생님은 훌륭하다.

이 명제에 대하여,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하고 분분할 것이다.

사실명제가 아니라 판단명제이기 때문이다.

선언한다고 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개개의 선생님에 대한 판단이 개입하기때문에 동감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훌륭하지 않은 선생님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이 목울대를 울컥거리기 때문이겠다.



그럼, 이건 어떨까?

책과 애인의 공통점은?



1. 보면 자고만 싶어진다.
2. 침 바르면 잘 넘어온다.
3. 가을이 되면 더 보고 싶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

책을 봐도 말똥말똥할 때도 있고, 책에 침 같은 거 바르면 싫어할 사람 알라딘에 많고,

가을이 아니래도 책은 늘 보고 싶은 사람들로 여긴 가득하니까...



이 책에선 스승과 애인의 공통점은? 이런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평범한 선생님은 '이걸 할 수 있으면 된 거야.' 정도로 만족하지만,

스승이라면,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한다.



기술에는 완성이 없다.

완벽을 벗어나는 방식에서 창조성이 생겨난다.(35)



이런 것이 가르침과 연애의 특성이다. '연애는 끝이 없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독창성을 발휘한다.



스승과 애인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이 사람의 진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믿음!



여느 사람이라면, 그 선생님을 평범한 어떨 땐 평범 이하인 사람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진가를 알고 있다고 믿는 이에게, 그는 걸출한 스승일 수밖에 없다.

애인 역시 그렇다. 그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나머지 조건들은... 우수리에 불과하다.

~~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할 수는 없는 거다.

'바로 그 사람'이기때문에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이유가 된다.



그러면, 스승과 애인은 왜 중요한가?

그 사람은 나를 어떤 사람인지 알아주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일까?



일이 일어나는 순서를 잘 기억해주세요.

당신이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생각했단 것은 당신은 정말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과 만났기 때문입니다.(49)



스승과 애인이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먼저 '나를 인정해주길 바라는 그'와 전면적으로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마주침'과 '만남'을 통해 '스승과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우발성', '우연성'으로 그 화학적 변화 과정이 일어난다면... 지하철에서 몸 부딫는 사람들 모두와 연인이 될 수 있지나 않을까? 두려웁게도~ ㅎㅎㅎ



우린 늘 이야기를 할 때,

듣는 이에게 내 말이 어떻게 닿을지 신경씁니다.

저 사람이 누구보다 나를 깊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를 더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경의를 표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신은 그때까지 자신에게도 숨겨왔던,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방이

애당초 당신에게 없었다는 애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들어줄 용의가 있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정말로 말하고 싶은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52)



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단 생각을 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난 다음에,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지고 궁금해하게 되는 것인데,

사실은,

사랑을 통해, 스승님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발견을 얻게 되는 것임을... 간과하며 사랑을 달리고 마는 것이다.

달려가면서 산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주마간산의 바보가 되는 것이다.



스승은 있다.

애인도 여기 있다.

그는 참 고마운 사람인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당신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 진심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둘 중 누구도 아닌 그 누군가입니다.(58)

지금까지 이야기를 이끌어온 것은,

처음으로 준비했던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욕망도 아니고,

그저 당신이 추측한 상대방의 '욕망'입니다.

당신이 이야기한 것은,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닐까'란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인 것.



사랑에 애태우고, 마음 졸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소통해야할지 모르겠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연애의 기술(실전편)으로 이름붙여도 멋진 책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강의를 해야하는 사람, 또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남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면 '리더'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리더십 지침서'로도 소용될 수 있어 보인다.

리더의 <소통>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거꾸로 알고 있기 쉽다.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대화'는,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먼저 있어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왔다갔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것.(68)



사랑하는 사람과는 무슨 이야기든 자주, 많이 하고 싶어진다.

그들 사이에선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보여줄 수 없으니... 말이 먼저 오고가는 것이겠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친절'이라고 말해버리면 너무 노골적이어서 함축성의 맛은 없다.

'마음 씀씀이', 그렇게 말해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작가가 마음을 다한 것이 독자에게 통했을 때 비로소 문학의 영원성이라든지

혹은 문학의 고마움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성립한다.(다자이 오사무, 여시아문, 113)



여기서 '오해'와 '이해'가 닿을 듯 말 듯 빠듯하게 접근하면서 절대 100페센트 이해되지 않게 쓰고 있는 것이 작가의 천재성이라고 말해도 좋겠죠.(115)



결국, 스승과 애인의 소중함은, 그 닿을듯 닿을듯 닿지 못하는 데서 간절함과

오해의 간극을 이해하려는 애씀에 달려있다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필승의 병법은 필패의 구조에 몸을 둔 자만이 터득할 수 있다.

이것을 소통의 이야기로 말하면,

'이해'는 메시지 내용을 적절하게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갖는 '오해'의 구조에 정통하게 되는 것(141)



이 책이 정말정말 맘에 드는 것은 이런 구절 때문이다.



오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는 일...

그래서 '필패의 구조'에 놓일 수밖에 없으니, '필승'을 위해 서로 한발 물러서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고 격려하는 일...

연애에서도, 스승님에게서도...

어떤 말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

거기서 오해도 생기지만, 이해의 가교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커뮤니케이션에 관하여,

또는 리더십에 관하여,

이 책에서 예를 들고 있는 사랑의 성취와 커뮤니케이션에 관하여,

심지어는 무도인의 필승 비법에 관하여,

얻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을 일이다.



이 책에서 가르쳐 주는 바는 없다. ^^

그러나, 배우는 바는 있을 것이니...
- 접기
글샘 2012-08-29 공감(12) 댓글(9)
Thanks to
공감




스승은 있다




아이들 가르치는 업을 가진다 보니 "스승"이 들어가는 책 제목은 유심히 봐 두는 편이다.

요즘 들어 화두가 된 "좋은 선생님"에 대해 늘 고민한다. 가르치기 때문에 돈을 받는데 잘 가르쳐야하고 좋은 교사라는 소리를 들어야할텐데 그러고 있는지, 매너리즘에 빠져 늘 하던대로 하는 건 아닌지.그러던 차에 도서관에 꼽혀 있는 노란색 표지의 예쁜 책을 발견했다. 사실 "스승은 있다"라는 큰 글씨보다는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운도 없는 당신에게"라는 작은 구절이 더 크게 보였다.

내가 어떻게 했냐를 따지기 전에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요즘, 사람들은 교사가 잘못한 것을 먼저 찾아내서 섭섭하다고 말하고 좋은 선생을 못 만났다, 선생운이 없다고 말하곤 한

다. 나는 이 책이 교육학책쯤 된다고 생각하고 읽어나가길 시작했다. 하지만 몇 장 읽지않아서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시리즈 중 한 권 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는 젊은이를 보고 안타까워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좋은 선생님은 "당신에게만 좋은 선생님일 뿐이다"라고 한다. 내가 좋은 선생님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아저씨이거나 아주머니일지도 모른다고...

아~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들어가는 말을 읽고서 말이다.

20명의 아이들에게 똑같은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결과물은 20가지로 다양하다.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배움의 주체성이다. 배움의 주체. 그렇기때문에 훌륭한 스승도 결국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작가는 근원적으로 생각하자며 배우는 것과 대화하는 것이 같은 것인지 물어본다. 옛날 소크라테스의 교육법이 대화법이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대화가 교육이 될 수는 없으나 어떤 대화는 교육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대화를 통해 사람 사이의 소통에 대해 말해준다.

"기분 좋은 대화란 말하는 측은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듣는 이는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전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P 67)"라고 한다.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대화라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먼저 있고,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말이 왔다갔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p 68)"

아~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다.

흔히 소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로를 잘 이해하기 위해 주고 받는 말, 행동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작가는 진정한 소통은 메세지의 정확한 전달이 아니라 메세지를 주고 받는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게 되면 커뮤니케이션은 멈추게 된다. 즉 "오해의 소지가 없는 소통이 아니라 오해의 여지가 확보된 소통이야말로 우리가 소통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P103)"

하하..

사랑하는 연인사이가 그렇지 않을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도 궁금하고 알고 싶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오해한 것은 없는지, 상대방은 혹시 오해하고 있지 않는지, 오해하고 있다면 제대로 알게 해 주어야지...

작가는 대화, 소통의 이야기에서 스승의 존재로 끌어간다.

"당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배워라. 스승을 만드는 것은 제자이므로.



우치다 타츠루라는 사람은 합기도 사범이기도 하고 대학교수이기도 한 분이다.

이 분은 결국 스승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사람은 제자이고 가르침의 주체보다 배움의 주체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흰 수염이 난 도사님과 선문답을 주고 받는 듯한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진정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

노선생님, 당신과의 대화는 정말 유쾌했습니다~

다음에 꼭 다른 책에서 만나 뵙도록 당신의 이름을 외워두겠습니다.
- 접기
그림책 2015-05-11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스승을 찾기 전에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원제가 "선생님은 훌륭하다"란다. 이런 제목을 스승은 있다로 바꾸었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듯이 스승은 도처에 있다. 단지 우리가 찾아내느냐 찾아내지 못하느냐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대화,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란 서로 소통하는 관계이고, 이 소통을 통해서 존재의 상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에는 오해가 깔려 있다고 한다. 즉 언어의 명징성으로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깔고 있는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소통을 한다고 한다. 너무도 명확한 언어는 우리의 소통을 오히려 방해한다는 언뜻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하기도 한다.



오해에 기반한 소통이라, 둘의 대화가 자명한 것들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고,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할 수밖에 없어진다는 뜻이다. 결국 이러한 오해는 수수께끼로 귀결이 되며, 수수께끼를 푸는 존재는 바로 제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승은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스스로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즉 자신이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스승은 절대로 발견되지 않고, 자신도 자신을 한 단계 상승시킬 수 없게 된다.



제자되기, 이는 의문을 가지기라고 할 수도 있다.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한 번쯤 다른 각도에서 보기, 의심을 하기.



이런 의심을 풀려는 과정에서 스승을 만날 수 있고, 제자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스승을 못 만났다고 한탄하지 말고, 과연 나는 제자가 되어 본 적이 있나 먼저 생각을 해보라는.



내가 제자가 되는 순간, 스승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발견되고, 나는 내 존재를 한 단계 상승시킬 수 있게 된다.



그래, 우리 먼저 제자가 되자. 의심하는 사람이 되자.
- 접기
kinye91 2012-09-25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스승은 있다


˝스승은 있다˝저자 : 우치다 타츠루˝사제 관계는 본질적으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본문 중-˝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의 저자 우치다 타트루의 새 책..깨달음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에 의해서 일어난다. 배움의 명제에 대해서 만큼은 책을 덮은 순간 아하~ 하고 무릅을 치게 된다. 얇고 읽기 쉬워서 반나절 투자하면 독파한다. 주말에 수준있는 책 한권 읽었다는 자위 및 포만감을 느끼고 싶다믄 추천이다.요즘 책인데 9,000이다. 얇다는 얘기다.
풍자 2015-11-26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대화? 끝없이 이어지는 배움의 과정!




‘배우는 것’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똑같은 것일까요? 우치다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배우는 것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알쏭달쏭하다. 대답을 유보한 채, 저자는 대화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정한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삼자인 것입니다. 대화할 때 제삼자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대화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말할 생각도 없던 이야기들이 끝없이 분출되는 듯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처음부터 형태를 갖춘 ‘내 생각’ 같은 미묘한 맛을 풍기는 말이 그 순간에는 넘쳐 나옵니다. 그런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58-59쪽).”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대화’라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먼저 있고,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말이 왔다갔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68쪽).”


“대화는 아주 평범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잘 생각해보면 두 가지 지점에서 희한한 사건입니다. 한 가지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한 그 말을 통해서 안다는 것.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말을 하도록 이끄는 것은 듣는 이의 욕망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89-90쪽).”


이어서 그는 소통을 언급한다. 교환되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잘 모를 때 오히려 소통은 활발해진다고.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되면 소통을 계속할 의욕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의 진정한 목적은 메시지의 정확한 전달이 아니라 메시지를 주고받는 그 자체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인류는 소통을 계속하기 위해 ‘의사소통이 간단하게 이뤄지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숨겨’ 왔으며, ‘소통은 늘 오해의 여지가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소통에서의 오해와 관련하여 그는 자크 라캉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은 불확실하고 애매한 위치에 멈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정정(訂正)의 길을 열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막히고 걸리고 주저하고 고쳐 말’하는 것처럼,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머뭇거림’과 ‘막힘’이 그대로 표현된 문장은 좋은 문장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문(問, 門)이 열린’ 문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말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장을 전진시키는 힘은 말이 생각을 채워주지 못하는 데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문장’. ‘버둥거리고’ 있는 만큼 ‘오해의 폭’이 확실히 확보된 문장의 예로 그는 다자이 오사무를 든다. ‘이해’와 ‘오해’가 닿을 듯 말 듯 빠듯하게 접근하면서 절대 100퍼센트 이해는 되지 않게 쓴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은 수수께끼와 같다.


‘한 권의 책에 심을 수 있는 수수께끼는 논리적으로 무한’하기에, ‘논리적으로 보자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는 무한대인 셈’이다. 인간의 창조 행위 역시 대화의 구조와 닮았다. ‘자신이 왜 작품을 만드는지,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 점이 새로운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따위의 것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인간은 결코 그 무엇도 창조하지 않았을’ 거라고.


저자에 따르면, 사제관계 역시 작품과 예술가, 대화와 닮은 구조다. “한 스승에게 여러 제자가 있지만 모두들 그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합니다. 바로 그 실패가 제자의 의무입니다. 실패 덕분에 스승과의 대화를(스승의 사후에도) 계속하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며 ‘수수께끼’에 관해 끊임없이 논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씩 정체성과 주체성이 기초 지어지는 것입니다(131쪽).” ‘실패하는 방식의 독창성’에 의해 다른 어떤 제자로도 대체될 수 없는 둘도 없는 사제 관계로 계보를 잇게 된다는 것.


『스승은 있다』는 제목과 달리 제자, 즉 배움에 관한 책으로 읽혔다. 소통, 소통.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소통을 문제 삼지만 정확한 정보의 전달은 오히려 소통을 단절시킨다는 것. 이해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오해의 폭을 확보함으로써 소통을 지속시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소통의 본래 목적이라는 것. 새삼스러웠다. 소통에 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내가 끊임없이 글쓰기에 홀리는 이유 역시 소통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해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오해로 인해 촉발되고 지속되는 대화, 즉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확장된 나로서의 당신, 즉 타자를 알아가게 되는 것인지도. 이렇게 대화를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배움의 과정 아닐까? 그러니 타츠루 선생이 앞서 던진 질문의 답은 자명해 보인다. 역시 ‘스승은 훌륭하다’(원제).


타츠루 선생님, 제 대답이 맞나요? 대답 대신 알쏭달쏭, 모호한 눈빛으로 바라볼 듯. 하여 대화는 지속되리라. 그러고 보면 독서 역시 길고 긴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오해의 커뮤니케이션’! 대화가 이어지는 한, 배움 역시 계속되리라.
- 접기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