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4

알라딘: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 수업론 :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알라딘: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 수업론 :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 수업론 :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 아우름 5
우치다 타츠루 (지은이),박재현 (옮긴이)샘터사2015-04-07





























189쪽
133*198mm
24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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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각계 명사에게 ‘다음 세대에 꼭 전하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관한 응답을 담는 ‘아우름 시리즈’의 다섯 번째 주제는 ‘수업(修業)’이다. 수업(修業)의 사전적 의미는 ‘기술이나 학업을 익히고 닦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수업이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무엇을 가르쳐 줄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 밑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는’ 이상한 구조를 지닌다. 이것을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 받아들이는가로 사람은 ‘수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린다.

요즘같이 배움과 노력도 약삭빠른 거래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저자는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수업, ‘자아를 버리는’ 수업, ‘우열 경쟁을 다투지 않는’ 수업 등 비경제적이고 반시대적인 수업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수업이란 대체 무엇이며 왜 필요한 것일까?

일본의 철학자, 교육자이자 합기도 무도인이기도 한 저자는 그와 같은 수업 태도가 인생을 길고 넓고 길게 보았을 때 결국 ‘생존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생존에 유리한가 그렇지 않는가는 무도인인 저자에게 중요한 기준이다. 여기서 생존이란 나 개인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생존, 나아가 세계의 존속까지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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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여는 글. 한국 독자들에게 _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

0장. 초보 수업자를 위한 안내서
지금 왜 수업을 말하는가?

보상도 없고 처벌도 없다 / 해낸 후에야 알 수 있는 수업의 의미 / 수업은 ‘신체 단련’이 아니다 / 결승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트랙을 달린다

1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하나
무도와 수업, 두려워 말고 머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
무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무적이 되는가
‘약함’을 연구하다
‘안주’에서 벗어나기
생활 속에서 익히고 닦는 수련


2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둘
명상과 수업,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

명상이란 적절한 액자를 고르는 것
무도가가 본 명상의 이치
명상과 무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


3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셋
신앙과 수업, 살아 움직이는 몸에서 시작하라
레비나스와 합기도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나를 사로잡은 레비나스의 변신론
희미한 신호를 감지하려는 노력
예배당을 청소하는 의미
성숙해진다는 것

닫는 글 _ 세상에서 가장 약한 무도가가 살아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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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다행히 나는 25세 때 합기도의 다다 히로시(多田宏) 선생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삼장법사’ 같은 분이었지요. 무엇보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연장자와 참으로 오랜만에(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때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지요(참 이상하지요. 특별히 그 누구도 내게 나쁜 짓을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여하튼 다다 선생님과 만나 합기도라는 ‘뭔지 모르는 것’을 수업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대단한지는 좀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요.
무도 수업을 시작한 지 4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합기도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어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업이라는 건 수업하는 주체인 자신이 점차 변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제 ‘알았던’ 것을 오늘이 되어 ‘알 수 없게’ 되기도 하지요.
(여는 글. 한국 독자들에게)

한마디로 말해, 수업이라는 것은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 봤자 일단 알아듣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든 그 실용성과 가치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제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소비자’라 불리는 사람에게는 마땅한 행동입니다. 소비자는 상품에 대하여 반드시 스펙을 요구하게 마련이니까요. 상품을 집어 들고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 소비자의 질문을 받고서 ‘써보면 안다’고 답하는 장사꾼은 없겠지요(만약 있다고 해도 그런 상품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도가 모호한 상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지금 아이들은 그렇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그것을 하면 이런 좋은 일이 있다’고 설명하며 이익을 좇아 움직이도록 교육시킵니다.
(지금 왜 ‘수업’을 말하는가?)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이게 적’이라 생각하는 ‘나’를 지우면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것으로밖에 풀 수 없습니다.
‘나를 지운다.’
참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나를 지운 나’에 대하여 자기점검을 하고 얼마만큼 달성했는지를 체크하여 성과가 있다면 자화자찬하는 한 영원히 ‘나’를 벗어던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점검 금지, 자기평가 금지, 자화자찬 금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단초로 ‘나’의 변화(원하건대 ‘성장’)를 점검할 수 있을까요? (중략)
그것은 일단 ‘의사(意思)를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해도 좋고, ‘계획’이라 해도 좋고, ‘예단’이라 해도 좋고 혹은 ‘쓸데없는 근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견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여하튼 무적을 탐구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때에 실마리가 되는 ‘나’의 조건입니다.

(어떻게 무적이 되는가)

그것은 오랜 세월 교단에 서면서 깨달은 경험지(經驗知)와도 부합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학생들의 무지를 두고 지식 부족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학생들은 지식이나 정보,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내버려 둬도 놀랄 만큼 엄청난 기세로 지식을 익히고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술을 습득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배움’에 대한 근원적인 충동이 분명 존재합니다.
무지란,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지요. 배움을 저지하고 억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학 교육이란, 무언가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덧셈’으로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그렇다고 믿는 교사도 적지 않지만요). 그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충동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방해하는, 학생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안주’를 해제하는 것이지요.
학교 교육이 달성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학생들의 머리를 지식으로 그득 채우고 끈끈하게 옭아매는, 생동감 넘치는 ‘배움’의 운동을 방해하는 쓰레기 정보를 ‘벗는’ 것입니다.
(‘안주’에서 벗어나기)

여우도 타조도 아닌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명상’이 이 물음에 대한 기술적인 대답이 될 것입니다.
명상이란, 예비적 고찰에서 살펴보았듯이 ‘액자 설정’에 관한 기법입니다. ‘지금?여기?나’라는 부동의 정점에서 벗어나 ‘지금’이 아닌 시간, ‘여기’가 아닌 장소, ‘내’가 아닌 주체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지금?여기?나’가 조우한 사태를 관찰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합니다. 그것이 무도적인 의미의 명상입니다.
(무도가가 본 명상의 이치) 접기

(pp. 122~123)첫 번째 명제는 앞에서 다뤘는데, 잊었을지도 모르니 다시 한 번 적어 보지요.
액자를 간과한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간과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인간은 액자가 없으면 세계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액자를 고집하면 세계를 적절하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명제를 나란히 보면 명상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세 번째 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적절히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그때마다 세계 인식에 가장 적절한 액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접기 - 여름이



저자 및 역자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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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 년 동안 합기도를 수련하며 레비나스 철학을 연구해오면서 신체와 윤리의 관련성에 천착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철학, 문학, 정치, 문화 등 일본 사회 전방위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을 백여 권 펴내기도 했다. 다양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길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 ‘개풍관’이라는 공간을 열어 무도와 철학을 함께 배우는 배움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기도 하다. 국내 출간된 책으로는 『하류지향』, 『교사를 춤추게 하라』, 『스승은 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 더보기


최근작 : <소통하는 신체>,<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거리의 현대사상> … 총 198종 (모두보기)

박재현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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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상명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외국어전문학교 일한 통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도서 저작권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현재는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니체의 말》, 《괴테의 말》, 《하루에 한 번, 마음 돌아보기》,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버텨내는 용기》, 《노력은 외롭지 않아》,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등이 있다.


최근작 : … 총 15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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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꿈이 자라는 방>,<안아주는 정원>,<비밀 지도>등 총 405종
대표분야 : 에세이 5위 (브랜드 지수 611,642점), 정리/심플라이프 11위 (브랜드 지수 3,804점), 과학소설(SF) 14위 (브랜드 지수 27,645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다음 세대가 묻다
“무언가를 배울 때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요?”

우치다 타츠루가 답하다
“무지란, 변화를 방해하는 힘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어제에 안주하지 마세요. 지켜야 할 나를 버릴 때 천하무적이 됩니다.”

[수업修業] : 기술이나 학업을 익히고 닦는 것.
또는 무엇을 배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가르쳐 줄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

각계 명사에게 ‘다음 세대에 꼭 전하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관한 응답을 담는 ‘아우름 시리즈’의 다섯 번째 주제는 ‘수업(修業)’이다.
젊은 시절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데다 제법 달변이었던 저자는 누구든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는데, 마음 한편엔 누군가 자신의 폭주를 멈춰주었으면 하는 불안감이 늘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유기》의 주인공인 난폭한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만나 머리에 ‘금고아’라는 금속 띠를 두르게 되는데, 20대이던 저자에게는 자신의 머리에 금고아를 채워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는 이야기로 수업론(修業論)은 시작된다.

수업(修業)의 사전적 의미는 ‘기술이나 학업을 익히고 닦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수업이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무엇을 가르쳐 줄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 밑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는’ 이상한 구조를 지닌다. 이것을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 받아들이는가로 사람은 ‘수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린다.

요즘같이 배움과 노력도 약삭빠른 거래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저자는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수업, ‘자아를 버리는’ 수업, ‘우열 경쟁을 다투지 않는’ 수업 등 비경제적이고 반시대적인 수업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수업이란 대체 무엇이며 왜 필요한 것일까?


시장과 상품밖에 모르는 아이들아,
노력도 거래로 여기는 아이들아,
닥치고 잠자코 수업하자

일본의 철학자, 교육자이자 합기도 무도인이기도 한 저자는 그와 같은 수업 태도가 인생을 길고 넓고 길게 보았을 때 결국 ‘생존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생존에 유리한가 그렇지 않는가는 무도인인 저자에게 중요한 기준이다. 여기서 생존이란 나 개인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생존, 나아가 세계의 존속까지 포함한다.

이 책에서는 무도, 명상, 신앙의 세 분야로 나누어 수업의 필요성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본다.

무도(無道)의 최종 목표는 ‘무적(無敵)’이 되는 것인데, 무적이란 세상 모든 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나’를 버림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함과 무지(無知)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데, 무지란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지식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하며, 우리가 변화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힘이다. 수업이란 바로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천하무적이 되는 여정인 것이다.

무도인의 입장에서 본 명상이란, ‘액자 선택’의 기법이다. 사람은 세상을 인식할 때 일종의 액자를 필요로 하는데, 때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명상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을 길러주는 수업으로, 그러한 수업을 통해 ‘지금 여기 나’에 얽매이지 않고 적절한 액자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자신이 아닌 자가 되는 능력, 타자에 빙의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말한다.

무도인이 본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희미한 신호를 감지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신앙이든 그 외의 큰 신념이든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통해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가 연구해온 프랑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상을 살펴보면, 사회가 충분히 정의로우면서도 온화한 감촉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도도 명상도 신앙도 그에게는 결국 ‘살아가는 힘과 지혜’를 키우기 위한 바탕이다. 반대로 살아가는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무지, 안주, 미래에 대한 예견, 고정관념 등 나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다.
즉 수업(修業)이란, 무지를 벗고 난관을 돌파해 성숙에 이르는 여정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무도인의 난관 돌파법

주목할 만한 점은 무도인답게, 정신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무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명상도 신앙도 살아 숨 쉬는 육체에서 꽃피는 것이며 성숙도 철저하게 신체적인 경험이라는 것.
그렇다고 육체적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심장질환을 앓아 또래 친구들처럼 마음껏 뛰놀 수 없었던 저자는 오히려 ‘약함’이 자신의 전문분야라고 말하며 약함에 대해 연구한 바를 설파한다.
또한 생활이 끝나지 않으면 수업도 끝나지 않는다며 일상생활이 수련이고 수행인 듯이 살라고 권한다. 어차피 수업이란 삶의 현장에서 치러야 할 장거리달리기이므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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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챙겨보는 편. 이번에 나온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를 읽고 그동안 읽고도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던 주장이 무엇을 근간으로 나온 것인지를 비로소 이해한 것 같아서 좋았어요. 읽는 구절구절 수긍이 가는 내용. 무슨 일이든 미련스럽게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송송이 2015-05-0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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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나온 글을 모아놓아서 일관되지 못하다. 1, 2장은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태권도 철학 운운하던 김용옥 느낌이 나지만 3장은 나름 공감한다.
madwife 2015-05-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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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린 오징어




신묘한 책이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뜬구름 잡는 듯 하고 특별한 재미도 없는데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이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이 그렇다. 일본어를 모르니 이런 신묘한 느낌이 저자 탓인지 번역 탓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하류지향>을 읽고 '이 사람 뭐지?' 싶었다. 알 듯 말 듯 한 얘기를 동네 할아버지처럼 풀어놓는데, 단순하고 거친 표현 때문에 왠지 읽는 내가 혼나는 기분이랄까.(전혀 혼내고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 이상한 기분 때문에 신간도 나오자마자 구매했다. 읽고 나니 더 모르겠다. 신묘한 느낌만 커졌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는 제목이다.(원제는 ‘수업론(修業論)’) 어쩌면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계산해서 배우는 것은 진정한 배움이 아니니라. 배움이란 자고로 뭘 배울지, 뭘 얻을 수 있는지 모르고 배운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이란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부제가 ‘수업론: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이니, 수업하는 자세를 논하는 책인가.



책의 내용은 온통 무도(武道)에 관한 얘기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합기도 유단자로, 40년 이상 무도 수련의 길을 걸어왔으니 이상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무도 얘기만 나온다면 별 흥미가 없었을 테지만, 저자는 신체와 사상(?)이 별개라고 보지 않는 사람이다. 공부는 몸으로 해야 하는 것, 이론은 실천과 한 몸이라는 거다. 그 점에서 저자의 수업론은 무도의 관점에서 보아도 되지만 일반적인 공부론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문제는 내용이 어렵다는 것. 내 이해력이 몹시 달리는 것인지, 몇 번씩 되풀이해 읽은 부분이 많다. 그래도 어렴풋하다. 선명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더듬거리며 읽다 보면 조그만 깨달음이랄까, ‘아!’ 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그 순간이 극히 드물다는 게 문제지만)



배움은 효율성과 이해득실을 따지는 분야가 아니다. 무엇을 배운 것인지는 배운 후에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일률적인 잣대로 평가할 수 없고,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기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배움의 성과를 점수나 자격증 같은 수치 형태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수업은 동일한 트랙을 달리는 경주가 아니다. 수업은 각자의 특별한 트랙을 달리는 것. 저자의 말처럼 ‘결승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트랙을 달리는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자아 해체에 관한 부분이다. 나, 자아, 주체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요모조모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이게 적’이라 생각하는 ‘나’를 지우면 됩니다.”(62쪽)

경쟁 상대, 적, 타자는 결국 ‘나’가 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 적을 없애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지우면 적도 사라진다는 소리다. ‘나’라는 확고한 관념은 결국 아집이 되고, 아집은 곧 무지로 이어진다.

“인간은 잘 몰라서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사를 잘 알고 있어도 지금 자신이 채용한 정보처리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몸소 나서서 무지해집니다. 자신의 지적 틀을 바꾸도록 요구해 오는 정보의 입력을 거부하는 아집이 바로 무지라 불리는 것이지요.”(85쪽)

“따라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학 교육이란, 무언가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덧셈’으로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그렇다고 믿는 교사도 적지 않지만요). 그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충동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방해하는, 학생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안주’를 해제하는 것이지요.”(87쪽)



무지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나’를 해체하는 것이다.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도와 공부가 추구하는 방향이어야 하고, (책의 말미에서) 그것은 신앙과도 연결된다.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부친 서문의 제목이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많은 말을 했지만 여전히 어렵다. 저자는 나처럼 무식한 독자가 염려되었는지, 친절하게도 이런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그다지 읽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말린 오징어’ 같은 책이 되기를 원하기에, 앞으로도 이 책을 곁에 두고 때때로 ‘그것은 이걸 말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 책을 펼쳐 보길 바랍니다.”(182쪽)

말린 오징어 같은 책이라니. 턱이 나갈 수도 있으니 가끔씩 씹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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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5-05-06 공감(20)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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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샘터]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에 대한 수업론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샘터]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에 대한 수업론 수업은 가르침과 배움이 동시에 이뤄지는 상황이다. 수업하는 사람이라면 학습 목표를 알고 학습자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줘야 할 것이다. 합기도를 가르치는 우치다 타츠루는 합기도를 통해 무도와 철학을 수업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합기도 수업 현장에서 깨친 수업에 대한 남다른 통찰의 결과물이다. 평범한 합기도인이 수업을 하면서 얻은 철학적 사유다.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에 대한 수업론이다. &nbs... + 더보기
봄덕 2015-05-06 공감(8)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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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는 배우는 것이 지겹고 힘들어서인지 빨리 학업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다. 그 시간들이 끝나면 배우는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배워야할 것이 더 많아진다. 다행히도 학창시절에 비해서 그 시간들이 지겹거나 힘들지는 않은 것이다. 끝없이 배워야만 하는 우리들이기에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중요할 것이다. 배움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배우는 입장에서의 자세나 마음가짐은 중요할 것이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수업론 :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우리가 배우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조금더 지혜로운 모습을 갖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특색있는 제목만큼 책의 내용도 이전에 알고 있는 것과는 색다르게 다가온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교육가, 문화평론가인 저자는 합기도를 통해 수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은 아이가 오랫동안 합기도를 해서 친근한 운동이다. 단순히 운동이라 생각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움직임만을 생각했다. 스승에게 배운 합기도와 그에 따른 정신을 통해 우리들에게 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운동으로만 생각했던 우리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들은 보통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다. 나또한 또래에 비해 체격이 작은 아이를 위해 건강과 힘을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운동이다. 저자는 강해지기 위해 합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약함이 초래하는 재앙'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동기는 합기도뿐만 아니라 이후의 배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제는 강의를 듣는데 있어서도 쇼핑족이라는 말을 한다.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하는 쇼핑족처럼 자신이 원하는 강의를 듣는 강의 쇼핑족들이 있다는 말을 한다. 많은 정보가 있듯이 강의도 정말 다양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수 밖에 없다. 그런 고민을 하던차에 만나게되어 더 깊게 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에는 몰라서 못했지만 이제는 많이 알아서 문제인 경우가 있다.



인간은 잘 몰라서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사를 잘 알고 있어도 지금 자신이 채용한 정보처리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몸소 나서서 무지해집니다. 자신의 지적 틀을 바꾸도록 요구해 오는 정보의 입력을 거부하는 아집이 바로 무지라 불리는 것이지요. - 본문 85쪽



이 책은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데 있어서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지에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워도 늘 제자리 걸음인 것이다. 제목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읽고 나면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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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꼬마 2015-05-06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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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業論




수업론 :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원제가 [修業論]인데, 번역하면서 이런 제목이 붙은 것 같다. 아우름 시리즈의 앞 책들을 의미 있게 읽었기때문에 기대가 커서였을까? 일단은 이 책은 조금 나와는 맞지 않는 책이었던 것 같다.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교육가, 문화평론가라는 소개글을 읽었는데, 이 책은 무도, 즉 합기도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알고 느낀 것을 修業이라는 과정으로 보고 풀어놓았다.




수업이라는 한글만 놓고 보자면, 대부분이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일 즉, 授業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수업은 授業이 아니고, 修業이다. 저자는 수업을 무엇을 배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가르쳐 줄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0장, 초보수업자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수업이란 어떤 것이고, 어떤 목적을 위해 정비된 시스템인지, 어떤 실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수업'을 알지 못하는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누군가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p.15)으로 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지만, 설명이 조금 어렵다.




일단, 나는 합기도를 비롯한 무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몸의 균형을 잡고 사용하지 않는 신체기관 곳곳에 피를 돌게 하고 움직임을 주어 피로를 풀어보려는 생각에 선무도를 시작했던 적은 있으나, 무도에 대해 알고자 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무도에 대해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저자는 무도를 배움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반대로 자신의 '약함'에 초점을 두었다. 무도에서의 '약함'을 철학에서의'무지'와 같은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지란 무엇인가? [무지란 배우려는 것을 방해하는 힘이다](p.85) 저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자.




대다수 사람들은 학생들의 무지를 두고 지식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에게는 '배음'에 대한 근원적인 충동이 존재한다고 한다. 무지란, 배움을 저지하고 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학교교육에서 달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높이려는 노력과 상대의 능력을 끌어래리려는 노력 중 후자에 더 쉽게 매료된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어렵고 노고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무언가를 부수는 것은 쉬울 뿐 아니라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높이려는 노력보다는 상대의 노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내가 이겼다는 생각을 가지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무지'가 아닌가, 배우려는 것을 방해하는 그 힘!




1장까지는 어떻게든 붙잡아보려고 이렇게 이해하면서 왔는데, 2장과 3장에 들어가면 더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저자 자신도 자신의 책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했고, 한번이 아니라 어려번 곱씹으면서 의미를 알아가야 함을 이야기했으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아우름 시리즈가 쉽고 명확하게 주제를 풀어가는 재미가 있었다면, 솔직히 이 책은 그런 면은 많이 부족하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라는 제목과 책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나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려니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이 책은 샘터물방울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받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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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5-05 공감(4)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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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우치다 타츠루가 들려주는 '수업'




보통 책을 볼 때 제목으로 미루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는 제목과 함께 '수업론: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공부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책장을 넘기다보면 알 수 있다. 첫 페이지를 펼쳐보면 이런 글도 있다.

수업: 기술이나 학업을 익히고 닦는 것. 또는 무엇을 배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가르쳐 줄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



이 책의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25세 때 합기도의 다다히로시 선생님과 만났고, 합기도라는 '뭔지 모르는 것'을 수업하게 되었다. 무도 수업을 시작한 지 40년이 흘렀고, 지금도 합기도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어도 잘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수업이라는 건 수업하는 주체인 자신이 점차 변화하기에 어제 '알았던 것'을 오늘이 되어 '알 수 없게'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수업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났고, 그 청량감을 가능한 한 많은 젊은이가 경험해보길 바라며 이 책을 집필했다.



'배움'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 수업시간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은 나의 고정관념이었던 것인가?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에서 내게 주는 반전이었다. 짐작하던 내용이 아니어서 의아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았다. 그런 점이 이 책과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원하던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꾸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이 난해한 것은 세대차이인지, 문화의 차이인지, 관점의 차이인지 잘은 모르겠다. 어쩌면 합기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고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잘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약간 좌절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자의 마지막 '닫는 글'을 보면서였다.



마지막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다지 읽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말린 오징어'같은 책이 되기를 원하기에, 앞으로도 이 책을 곁에 두고 때때로 '그것은 이걸 말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 책을 펼쳐 읽어 보길 바랍니다. (182쪽)

저자가 합기도 전문지 <합기도 탐구>에 약 2년에 걸쳐 연재했던 내용을 1장에 담았고, <산가 제팬>이라는 불교계 잡지의 망상특집에 기고한 글을 2장에 담은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다양한 반찬이 담긴 도시락 같은 총서라고 이야기한다.



쉽게 읽히는 책이 있는 반면,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책이 있다. 지금까지 읽었던 아우름 시리즈의 책 중에서 유난히 다른 느낌을 받은 책이었다. 어느날 문득, 이 책 속의 문장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날이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합기도 수업을 시작한지 오래된 사람으로서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겠다는 의도로 이 책을 쓴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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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라스 2015-04-2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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