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4

알라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알라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은이),김경원 (옮긴이)원더박스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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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쪽
148*210mm (A5)


책소개
문학, 철학, 교육,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비판적 지성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진행한 마지막 강의 ‘창조적 글쓰기’를 책으로 엮었다. 전공인 불문학자로서의 내공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이 책에 대해서 저자 자신도 “언어와 문학에 대해 사유해온 것을 모조리 쏟아 붓고자 한 야심찬 수업”이었다고 소개한다.

‘독자에 대한 경의와 사랑’, ‘반드시 전달되는 메시지’, ‘살아남기 위한 언어 능력’, ‘살아 숨 쉬는 말과 글’ 등을 주제로 뿜어져 나오는 열정적 강의를 접하다보면, 어느새 읽기와 쓰기의 문제에서 한 단계 깊어진 자신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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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1강 말과 글의 영역에서 사랑이란?
제2강 하루키가 문학의 ‘광맥’과 만난 순간
제3강 전자책을 읽는 방식과 소녀만화를 읽는 방식
제4강 시인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제5강 아직 쓰이지 않은 글이 나를 이끈다
제6강 세계문학, 하루키는 되고 료타로는 안 되는 이유
제7강 계층적인 사회와 언어
제8강 어째서 프랑스 철학자는 글을 어렵게 쓸까?
제9강 가장 강한 메시지는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다
제10강 살아남기 위한 언어 능력과 글쓰기
제11강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하여
제12강 창조성은 불균형에서 나온다
제13강 기성의 언어와 새로운 언어
제14강 ‘전해지는 말’ 그리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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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4 말이 잘 통하지 않은 사람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필사적으로 손짓발짓과 다양한 표정을 동원하고 온갖 언어 표현을 시도하겠지요.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 ‘마음을 다하는’ 태도야말로 독자를 향한 경의의 표시인 동시에 언어가 지닌 창조성의 실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접기

P. 68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정보 취득만을 위한 독서]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씹고, 핥고, 후룩후룩 마시기도 하는 식도락처럼 책에서 최대한의 열락을 끌어내려는 독자가 빠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책 읽는 방식은 ‘심심해서 어쩔 줄 모르는’ 환경에서만 허용되니까요. 할 일 없이 빈둥대는 비오는 일요일 오후라든가, 친구가 놀러 오지 않는 여름방학의 어느 날 대낮이라든가, 눈 내리는 밤 아랫목 방구들이라든가, 시간이 남아돌아 몸이 배배 뒤틀릴 때, 우리는 책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끌어내기 위해 창의적으로 궁리합니다. 이 상태를 독서의 초기 설정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말 할 것 없이 내가 그렇습니다. 접기

P. 207-208 경기 회복만 이루어지면 고용 조건도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얘기라면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성공 체험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맛을 들인 기업이 고용하는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용 환경의 변화를 바랄 리 없습니다. 그런 현실에 가망이 없다고 보고 악성 기업에는 취직하지 않는다든가 더 즐거운 일을 찾겠다는 방향으로 돌아서려는 시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건강한 사람’이 이렇게 불합리한 상태를 참고만 있을 리 없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핏대를 세우고 취직에 매달리는 일은 명확한 잘못입니다.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 ‘말이 안 돼, 말이 안 돼서 못해먹겠어.’ 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리터러시’에서 볼 때 올바른 반응입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살아남기 위한 리터러시’가 없는 사람입니다. _ 접기

P. 264 언어는 도구가 아닙니다. 돈을 긁어모으거나 자신의 지위와 위신을 추어올리거나 스스로를 문화자본으로 장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이렇게 욕망하는 주체 자체를 해체하는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것입니다. 생생한 언어를 습득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신의 외부에 있는 타자에 동기화하는 것, 그것을 통해 기존의 자아를 일단 해체하고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자아로 재편성하는 것, 이런 과정이야말로 생명의 자연에 적합합니다. 따라서 일부러 이익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인간은 자연스레 타자의 언어에 가상적으로 동일화하고 타자에 동기화하려고 합니다. 이익의 유도는 도리어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방해한다고 봅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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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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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 년 동안 합기도를 수련하며 레비나스 철학을 연구해오면서 신체와 윤리의 관련성에 천착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철학, 문학, 정치, 문화 등 일본 사회 전방위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을 백여 권 펴내기도 했다. 다양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길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 ‘개풍관’이라는 공간을 열어 무도와 철학을 함께 배우는 배움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기도 하다. 국내 출간된 책으로는 『하류지향』, 『교사를 춤추게 하라』, 『스승은 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 더보기


최근작 : <소통하는 신체>,<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거리의 현대사상> … 총 198종 (모두보기)

김경원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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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홋카이도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와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에서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동서문학상 평론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후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했다. 현재는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공저)가 있으며, 《가난뱅이의 역습》, 《경계에 선 여인들》,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우린 행복하려고 태어난 거야》, 《문학가라는 병》,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다부치 요시오, 숲에서 생활하다... 더보기


최근작 : <나비를 잡는 아버지 「현덕」>,<학마을 사람들 「이범선」>,<만세전 「염상섭」> … 총 9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스승은 있다』, 『하류지향』, 『곤란한 결혼』 등을 쓴 일본 최고 지성 우치다 다쓰루
더 좋은 글쓰기를 고민하는 당신에게 그가 30년 내공을 담아 전하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모든 것

문학, 철학, 교육,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비판적 지성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진행한 마지막 강의 ‘창조적 글쓰기’를 책으로 엮었다.
전공인 불문학자로서의 내공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이 책에 대해서 저자 자신도 “언어와 문학에 대해 사유해온 것을 모조리 쏟아 붓고자 한 야심찬 수업”이었다고 소개한다.
‘독자에 대한 경의와 사랑’, ‘반드시 전달되는 메시지’, ‘살아남기 위한 언어 능력’, ‘살아 숨 쉬는 말과 글’ 등을 주제로 뿜어져 나오는 열정적 강의를 접하다보면, 어느새 읽기와 쓰기의 문제에서 한 단계 깊어진 자신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왜 나의 글은 재미가 없을까?”
“사랑 받는 글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더 좋은 글쓰기를 고민하는 당신에게
일본 최고 지성이 30년 내공을 담아 전하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모든 것

우치다 다쓰루(타츠루)는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스승은 있다』, 『하류지향』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다.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논설과 교육문제에 대한 통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전공은 불문학이다. 이 책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는 불문학 교수로서 정년퇴임 전 마지막 학기에 진행한 ‘창조적 글쓰기’라는 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가 문학과 언어에 대해 ‘이제까지 우치다 다쓰루가 이야기한 것의 종합’이라고 생각해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단순한 글쓰기 강의를 넘어 읽기와 쓰기, 그리고 언어생활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진다.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
수십 년에 걸쳐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채 신물 날 정도로 다양한 글을 읽고 또 스스로 대량의 글을 써온 결과, 나는 ‘글쓰기’의 본질이 ‘독자에 대한 경의’에 귀착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실천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_25쪽

저자는 첫 강의에서부터 이렇게 불쑥 결론을 밝혀버린다. 그러곤 덧붙인다. “이렇게 간명하게 단언해도 여러분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이 결론에 대해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앞으로 반년 동안 강의할 테니까요.”
실제로 저자는 끈질기고 또한 친절하게, 그렇게 마음을 다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평가의 함정’에서 벗어나라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며 저자는 지난 강의에서 내준 과제에 대한 감상을 전한다. 그의 평은 혹독하다. “내심 짐작은 했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왜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쓸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평가의 함정’에 갇혀 있는 게 문제다. ‘어떤 글을 쓸까’ 하는 것보다 ‘몇 점을 받을까’ 하는 것이 우선되다보니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합격 최저선’을 목표로 ‘평범함의 경계선’에 갇혀서는 글을 쓰는 일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며,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 즉 우리 내면의 ‘평범함의 경계선’을 뚫고 나가는 것이라고 전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글을 쓸 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프린트아웃’ 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는 글을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체력을 소진하고 몸을 혹사하는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새로 일일이 굴을 깊이 파야 한다.’고, 또 그렇게 ‘새로운 수맥’을 찾아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에 열렬히 호응한다. 우치다 다쓰루 역시 창작이란 그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신체적 실감이 동반된다는 점, 그리고 그 끝에 결국 어떤 흐름과 만난다는 점에 깊이 동의한다.
문제는 ‘흐름’을 붙잡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붙잡을’ 따름이다. 하지만 ‘흐름을 붙잡는’ 데는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어떤 것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어떤 것을 붙잡으려면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라고 전한다.

가장 강한 메시지는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다

그것이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라는 것을 알면, 비록 그것이 아무리 문맥이 불분명하고 의미조차 불분명하더라도 인간은 귀를 기울여 경청합니다. 경청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기 자신의 이해의 틀 자체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안에 깊이 내면화된 인류학적 명령입니다. _189쪽

갓난아기는 아직 엄마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만 그 말에 적절한 반응을 한다. 그 말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내용보다도 ‘수신자’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독자는 자신에게 간절히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본인의 전공이 된 레비나스의 저서를 처음 접했던 때를 이야기한다. 20대가 끝나갈 무렵 처음 집어든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는 당시에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치 내 멱살을 움켜쥐고, ‘제발 부탁이야, 내 말 좀 이해해줘.’ 하고 몸을 흔들어대는 느낌”만은 전해졌다. 저자가 가진 ‘전해지는 언어’에 대한 원체험인데, 전해지는 것은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를 전달하고 싶다는 열의라는 것, 또한 그것은 뇌가 아니라 피부로 전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계기라고 전한다.

내 안의 타자와 함께 쓰는 글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할 때란 비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 안에 그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어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 때, 언어는 가장 생기가 넘칩니다. 가장 창조적이 됩니다. 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입니다. _35쪽

우치다 다쓰루는 글짓기의 과정이 내적인 타자와의 협동이라고 이야기한다. 자기 안에 여러 유형의 독자를 갖고 있는 것이 ‘읽기 쉬운’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도 하고,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언어가 폭주하며 겹쳐지면서 화음을 이루는 글을 쓰라고도 권한다. 풍부한 내적 타자를 갖추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는다. ‘타인의 마음을 아는’ 사람, 즉 타자와의 가상적인 동일화를 잘 할 수 있는 인간을 ‘어른’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242쪽) 우치다 다쓰루의 세계에서 ‘어른’이 되는 것과 ‘창조적 글쓰기’는 다른 것이 아니다.

혼에서 나온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진다

이번 학기 강의에서는 일관해서 ‘울림이 있는 언어’, ‘전해지는 언어’, ‘신체에 닿는 언어’란 어떤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풀어왔습니다. 우리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은 언어로 나타내면 아주 간단합니다. ‘혼에서 나온 언어’, ‘산 것에서 태어난 언어’가 그것입니다. _311쪽

반년에 걸친 ‘창조적 글쓰기’를 향한 대장정은 ‘혼’이라는 키워드로 마무리된다. ‘신체의 깊은 구석에 있으면서 언제나 펄떡펄떡 맥박치고 있는 생명의 파동’이 바로 저자가 보는 혼의 이미지다. 그는 언어와 신체적 실감 사이의 불균형 상태에서 언어가 탄생한다고(256쪽) 이야기한다. 또한 언어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모태로 생성된다고도(310쪽) 이야기한다. 여기에서의 ‘신체적 실감’이나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혼’이라고 볼 수 있다.
굳어버린 기성의 언어와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생생한 그 무엇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고, 생생한 그 무엇을 기어코 전달하고 말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동시에 언어가 지닌 창조성의 실질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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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와 조건

1
한동안 지치지 않고 읽었는데, 마침내 그가 돌아왔다. 슬럼프.

2
세 시 전에는 눕고, 아홉 시 전에는 침대에서 나오려 한다. 둘 다 잘 되지는 않는다.

일어나면 바로 커피를 마시고 싶다. 빈속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좋지 않은 것들이 세상엔 너무 많고, 그것들을 나는 잘도 해왔다. 좋지 않아도? 혹은 좋지 않아서?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3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눈이라도. 그리고 기왕 내릴 거라면 밤이나 새벽을 골라줬으면 좋겠다. 깊은 잠보다 얕은 잠이 나은 이유를 나는 딱 하나 알고 있는데, 빗소리에 귀가 젖어 잠깰 수 있다는 점이다. 눈을 비비며 창틀에 팔을 괴고 어둠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 일. 더운 여름의 밤에도, 싸늘한 늦가을의 새벽에도.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어쩐지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4
흥얼거림이 그대로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을 열쇠로 꽂아 남의 마음에 제 마음대로 침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노래의 바탕에 재능이 있었을 것이되 재능이 모든 일을 하진 않았을 것이며, 노력이 있었을 것이되 노력만으로 전부 얻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툭툭 던져놓은 글 토막이 아름다워 심장을 얻어맞고, 그렇게 맞은 자리를 어루만질 때마다 부럽고 부끄럽다. 눈과 손과 용기와 끈기. 아름다운 글을 낳는 부모는 아무래도 이렇게 넷인 것 같다. 그저 짐작일 따름이다. 저 넷을 다 모아 본 적이 없으니.

5
행복은 늘 창밖에 내린다. 비를 기다리다 잠든 이가 빗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었을 때, 창밖으로 팔을 뻗어 비를 만질 때, 그는 내민 팔만큼만 겨우 젖는다. 흉내를 내겠다고 손바닥으로 빗물을 받아 얼굴에 바를 수도 있다. 하지만 창 안으로 넘어온 빗물은 더 이상 비가 아니다. 젖으려면 이 창틀을 밟고 넘어 저 밖으로 나가야 하리라는 것을 다 알지만, 그건 쉽지가 않은 일이다. 빨랫감이 늘어날까봐 창밖으로 나가기 겁난다. 감기에 걸릴까봐 젖기 두렵다. 지금 비는 하염없이 내리지만 언젠간 그칠 것이다. 지금 나는 하염없이 빗소리를 듣지만 언젠간 다시 누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비 개인 아침, 빈속에 커피를 부어넣으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생각할 것이다. 손과 눈과 용기와 끈기에 관해서.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할 때란 비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 안에 그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어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 때, 언어는 가장 생기가 넘칩니다. 가장 창조적이 됩니다. 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입니다.

_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그거."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서 제어 불가능하게 그냥 흘러나오는 거 있잖아. 세상에서 오직 이 한 사람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그거."

개성의 광채. 나는 생각했다. 내적인 빛. 아니면 내적인 어둠. 비밀,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말 너머,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모든 것. 오래전, 내가 판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순진하게도 피고인이건 증인이건 내 앞에 선 모든 사람에게서 찾겠다고 맹세했던 것. 절대 무관심하지 않겠다고, 나의 판결의 출발점이 될 거라고 맹세했던 것.

_ 다비드 그로스만,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의젓해지려고 애쓰는 이 순간에도 삶도 글도 여전히 어렵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를 구성하는 것도, 하루를 통과하는 것도 어렵다. 다만 고요한 시간에 나와 대화해 보면 나는 여전히 나무를 닮은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 벽을 통과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 자주 있었으나, 그 경험으로 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나무에 찾아오는 바람처럼 글이라는 움직임이 굳는 성질인 나를 아주 굳지는 않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_ 이원, 『최소의 발견』



어떤 정보도 없이 만난 책이 정말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다음 책들도 챙겨보게 된다. 우치다 다쓰루가 내게는 바로 그런 작가다. 그를 알게 해준 첫 책이 바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이다. 제목만 봐도 뽀대가 나는 이 책을(맞다, 단지 뽀대가 나 보여서 선택한 책이다.) 어려워 끝까지 못 읽어낼 줄 알았는데 아주 재미나게 읽어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100%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완독을 하고 가끔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목록에 당당히 오른 이 책의 저자를 눈여겨본 건 안 비밀! 이후로 이 저자의 책 몇 권을 구입하고 도서관에서 대여도 했지만 완독까지는 가지 못했다는 것도 안 비밀. --;; 그러다 최근에 서재 이웃님의 리뷰를 보고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자칭 우치다 다쓰루의 팬이라고 생각했는데 출간 된지 반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읽다니... 그래도 읽은 게 어디냐... ㅎㅎㅎ;;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란 질문형 제목에 대해 저자는 참 다양한 이야기를 오가면서도(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의 마지막(이자 강의의 마지막 - 이 책은 저자가 퇴임 전 대학에서 강의한 창조적 글쓰기란 마지막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에는 제법 명쾌하게 답변을 해주고 있다. 답변은 시원하게 해주셨는데 사실 그것을 제대로 따르며 글을 쓸 수 있을지는... 그 답변이란 것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이번 학기 강의에서는 일관해서 ‘울림이 있는 언어’, ‘전해지는 언어’, ‘신체에 닿는 언어’란 어떤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풀어왔습니다. 우리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은 언어로 나타내면 아주 간단합니다. ‘혼에서 나온 언어’, ‘산 것에서 태어난 언어’가 그것입니다.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집니다. _ P.311



자신이 쓴 글이 상대에게 닿기를 바라는 절박함,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성숙함,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는 열린 마음, 모어(母語)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애정 등등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런 마음가짐과 능력을 갖추고 써야 그나마 글이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거다. 한마디로 먼저 여러모로 괜찮은(이 표현은 좀 많이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인간이 되어야 좋은 글도 쓸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라는 카피문구가 나올 수밖에...



그건 그렇고 이 책의 부작용이 있다면, 내 지적인 한계로 인해 일본 최고 지성인 중 한사람인 저자가 강의하는 내용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하여 자괴감이 든다는 것이 하나요. 또 하나는 읽고 싶은 책이 잔뜩 늘었다는 것!!! 저자는 이 강의록에서 정말이지 많은 작가와 책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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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목차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두 번이나 등장한다! 저자가 하루키란 작가를 좋아하고 높게 평가한다는 게 글에서 느껴질 정도다. 책의 첫 장서부터 하루키의 『1Q84』를 언급하더니 다음 장에서는 하루키의 인터뷰집을 인용한다.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나는 눈을 뜹니다』란 인터뷰집이라는데 지금 한국에 소개되어 있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는 아닌듯하다. 그런가 하면 하루키가 전문 작가로 살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 『양을 쫓는 모험』도 소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하루키의 세 번째 소설이지만 영어로는 데뷔작이라고 한다. 이 작품을 통해 하루키는 세계로 나가는 광맥을 만났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양을 쫓는 모험』의 선배 격인 선행 작품이 있다고 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레이몬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선행 작품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라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선행 작품으로 저자는 알랭 푸 르니에의 『대장 몬느』를 꼽고 있다.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바로 ‘소년기와의 결별’이라는 주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소년의 성장 서사(혹은 소년기의 상실 서사)는 인류에게 통하는 일종의 광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세계적으로 놀고 싶다면 이런 인류 공통의 광맥을 잘 찾아내서 자신만의 개성으로 글로 써야 한다는 것! 그러니 세계 무대를 노리는 글쟁이들이여. 인류를 관통하는 광맥을 세계문학을 통해 찾아내 보는 것도 좋을 듯! ~











이 책의 센스라면 제목도 그렇지만 각 챕터의 소제목 센스도 한몫 한다. 그중에서 확~ 끌렸던 챕터가 있었으니 ‘제8강 : 어째서 프랑스 철학자는 글을 어렵게 쓸까?’였다. 제목을 보자마자 너무 공감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었는데 읽어보니 내가 왜 그동안 산 프랑스 철학자의 책들을 10페이지도 못 넘겼는지 바로 수긍이 가더란 말이다. ㅎㅎㅎ;;;; 그러니까 프랑스 학자나 철학자들은 소수정예(한정된 엘리트)만을 위한 어법으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굳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상이나 철학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프랑스 철학자들의 기본 마인드란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도 프랑스 철학자의 글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읽을 생각조차 안한다고. ㅎㅎㅎ 그런데 나는 왜 읽으려고 했을까. 미셀 푸코, 모리스 블랑쇼며, 롤랑 바르트며, 자크 데리다며, 엠마뉴엘 레비나스며, 피에르 부르디외며, 알랭 바디우까지... 이게 다 지적 허영심 때문이지뭐. --;; 아무튼 집에 있는 프랑스 철학자나 사상가의 책들은 이제 고이 보관만 하련다. 그저 나는 우치다 다쓰루 같은 사람이 쓴 입문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련다. 그러니까 이런 책들 근처에는 가지도 않겠다는 말씀! -.-

















이 책에서 언급한 일본 작가들 중에 하루키를 빼고 기억에 남는 두 작가가 있으니 바로 나쓰메 소세키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사람의 작품이 비교적 많이 번역되어 있어 웬만한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일본작가들이다. 소세키의 경우는 현암사에서 전집이 출간 되었고 준이치로의 경우는 이번에 민음사에서 10권 선집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그중 7권은 이미 출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두 작가의 전집과 선집은 내용을 떠나서 표지만으로도 소장하고 싶은 그런 각이 아닐 수 없다!



준이치로의 경우 이 책에서는 세계문학을 언급하면서 나온 작가이다. 『세설』은 ‘아시야의 부르즈아 네 자매가 ‘슬슬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 싫어.’ 하면서 꽃구경을 간다든지, 산노미야로 밥을 먹으로 간다든지 하는 이야기만 꿰어나가는 소설’이라는데 이런 소설이 바로 ‘세계문학’이란다. 하루키나 준이치로나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아웃사이더이기에 세계와 통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말한다. ‘세계문학은 자신이 있는 곳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라고.. 읽고 있으면(문체가 강의투라 듣고 있는 것 같다!) 정말 고개가 절로 끄덕끄덕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다짐했다! 이번에 출간된 준이치로 선집을 꼭 사자고!! 하루키라는 아웃사이더 말고 준이치로라는 아웃사이더의 글이 왜 외국에 많이 번역되어 읽히는지 한번 파헤쳐보자고!!









그런가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다른 면에서 언급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준이치로와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언급되었다고나 할까. 저자는 소세키의 글쓰기는 메이지 시대의 청년을 일깨우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과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대의 일본인들(특히 청년들)과 나누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소세키의 글은 그래서 어쩌면 세계문학의 반열에는 오를 수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세키의 문학은 비록 세계문학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1900년대 일본의 선구자였던 소세키는 상아탑에만 빠져있는 죽은 지식인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실아 있는 지식인이고 그래서 일본에서는 존경받아 마땅한 작가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재미있게 읽다가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으니 원문을 옮겨보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유대문화론(사가판)』이라는 책과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이사카와 야스히로와 공저) 등은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이런 책의 한국어 번역이라니,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한국에서 번역 출간 제안이 왔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외래의 학술적 지식을 본고장의 언어로 환언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기술 자체에 대한 사회적 요청이 없는 것이 아닐까? 점잖은 학술서는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만 읽고 일반 시민은 읽지 않는데, 그 사이에 지적인 틈이 벌어져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옳든 그르든 다리를 놓지 않으면 거북하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별로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내 책 같은 작업이 드문 것일까?_p.151




그러니까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와 같이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는 외래의 학술적 지식에 대한 입문서를 국내 저자의 책으로 읽은 기억이 있던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읽은 기억이 없다. 이런 작업을 하는 학자가 분명 우리나라에도 있을 텐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우치다 다쓰루의 말 대로 우리나라 학자들은 전문지식과 일반인 사이에 ‘다리놓기’ 작업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혹여 저자의 지적이 맞는 말일지라도 일본 학자의 입에서 한국을 좀 무시하는 듯한 글을 보니 살짝 배알이 꼴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방인』을 읽은 사람은 번역문을 통해서도 카뮈의 시원하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문체의 하드보일드 감촉을 알아보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방인』은 기존의 소설과 동사의 사용법이 전혀 달랐습니다. 카뮈는 애당초 법정 저널리스트 출신이었고 나치 점령기에는 레지스탕스의 자하신문 『전투』의 주필이었기 때문에 당시 프랑스의 작가 중에서는 가장 ‘저널리스틱’한 문체를 구사했습니다. 장식적인 수사나 끈적끈적한 감정적인 표현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먼 곳에서 감정 개입 없이 바라보는 거리 두기의 입장도 아닙니다. 비인정이라고 하면 비인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난 몰라.’ 하는 무책임한 냉정함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뜨거운 마음과 용솟음치는 언어를 지긋이 억눌러서 달성한 한계치의 비인정입니다. 한가운데가 아니라 감정 과다와 무감동이라는 두 가지 양극성을 힘껏 되밀어 달성한 필사적인 ‘중간’인 것입니다. 나도 카뮈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데 롤랑 바르트도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_p.157-p.158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 바로 카뮈의 『이방인』이 그것인데, 저자는 롤랑 바르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롤랑 바르트가 ‘무구한 에크르튀르’가 이상적으로 도달한 성과로서의 글이 바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고 하니 저자와 롤랑 바라트가 높게 평가한 부분을 곰곰 생각하면서 읽다보면 분명 놓쳐버렸던 『이방인』만의 매력을 나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이방인』의 참된 매력을 알아본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과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한 작가들의 글을 함께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설해목 2018-08-16 공감 (3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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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글을 쓰는 법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다만 그 말을 하기까지 너무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을 엮은 책이라, 우리나라 현실이나 한국어와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내용도 있다.
잠자냥 2018-12-24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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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한때 국내에 글쓰기와 관련된 도서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었다. 서평 쓰는 법, 문장력 키우기 같은 책이 참 많이도 나왔지만 나는 이 책이 처음이다.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뭘 믿고 그러냐! 라고 하시겠다면 내가 청개구리라서 그렇습니다!는 대답과 함께 부담백배 윙크를 양쪽 눈으로 마구 쏴드리겠어. 고기가 땡기는데 한식뷔페가 웬 말이뇨. 솔잎 맛 밖에 모르는 송충이도 나비가 되면 알아서 꿀 찾아가는 겁니다. 이 우주 만물에는 다 때와 시기가 정해져있다지. 결국 이 책을 집어 든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이야. 허허허... 방금 건 너무 할배 말투인가? 근데 나도 이젠 눈 오면 무릎이 너무 아프다, 진짜로.



우리는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다양한 글을 쓰게 된다. 가장 흔한 일기 쓰기와 독후감, 백일장 글짓기, 발표 대본, 자기소개서와 같이 쓰기 싫어도 써야 하는 경우를 포함해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글을 쓰거나 가까이하며 산다. 그러나 저자는 학생들이 그저 점수를 잘 받기 위한,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밖에 쓸 줄 모른다는 말과 함께, ‘모어가 야위어 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심사위원 또는 채점자들이 좋아할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솔직한 자신의 글을 써볼 기회도 없었고, 실제로 글쓰기에 관하여 가르치는 학교나 학과도 없기 때문에 뭐가 잘못인지조차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글쓰기는 타고 나야 한다고 다들 믿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수많은 SNS의 글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공감을 받는다는 건 글을 쓸 때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다는 것이고, 독자에 대한 경의를 갖추었다는 말이 된다. 저자도 이 책의 1강부터 독자에 대한 사랑과 경의가 담긴 글을 쓰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떠올린다. 독자에 대한 경의가 있다, 없다를 내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썼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그런 글들은 금방 외면받는다. 마치, 너 아니어도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은 많아, 하는 기분도 들었는데, 저자는 이런 걸 가리켜 ‘독자를 깔보는 문서‘라고 정의했다. 간혹 TV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보면 참가자의 실력이 딱 봐도 별로인데 심사위원들이 손뼉 치며 엄마 미소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록 부족하더라도 진정 어린 모습이 살아남는 비결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독자에 대한 경의‘에 대해서 좀 더 기록하겠다. 만화책의 경우 중간 편부터 읽어도 대략 이해되도록 이전까지의 줄거리나 등장인물 소개란이 서두에 꼭 들어가 있다. 이런 게 없다면 1권부터 읽어야만 스토리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불편함이 따른다. 소설의 경우 더 조심해야 한다. 설명을 생략하는 작가가 너무 많아지고 있다. 의도한 경우는 분간이 되는데, 의도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분명 A 장면으로 시작했는데 갑자기 B 장면으로 끝나는 황당한 경우들. 그런데 그런 작품들이 또 분위기는 진지하고 근엄해요, 아주 그냥. 매번 말하지만 독자들은 절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까지 독자의 내공을 운운하시면 안 됩니다. 국내 문학을 한국인도 이해 못 시키면 외국인들은 더 이해 못할걸? 아마 이런 내용이겠지... 하고 추측해야 하는 글을 자주 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거 진짜 병이다. 뜻을 함축하는 시나, 소설의 열린 결말하고는 전혀 다르다. 국민작가 유시민은 쉬운 말을 두고 어렵게 쓰는 건 사기꾼들이나 그런 거라고 했다. 모든 글쟁이들은 이제껏 독자와 소통할 마음이 없는 글을 쓰지는 않았나 되돌아보자.



몇 장 안 읽었는데도 좋은 내용이 정말 많았다. 그중 베스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란 표현이었다. 내가 진짜 이 말에 백만 번 공감한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도 글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고, 시를 읽지 않아 문학적 감성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서 정치, 경제, 사회, 과학 같은 분야의 지식도 없다. 생각해 보니까 나 완전 맨땅에 헤딩하는 타입이었네? 암튼 없는 지식 안에서 쥐어짜내야만 하기 때문에 리뷰를 쓸 때마다 내 안의 벽을 넘어야만 했다. 지금도 그러하고. 워낙 문학적 감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을 신경 써왔다. 가독성, 습관적 단어, 반복 표현, 단어 순화, 비유, 공감 문장 같은 이런 것들. 그런데 어쩌면 나도 저자가 말하는 ‘평가의 함정‘에 갇힌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게 좋다, 좋다 하며 읽고 있는데 점점 주제에서 벗어나는 강의 내용이 나온다. 제목 그대로 ‘살아남는‘ 글에 대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존 언어들에 대한 연구 글이 더 많다. 그래서 실망했다. 똑같은 자모음으로 만든 애너그램, 프랑스어와 라틴어의 계층적인 언어 같은 내용을 굳이 꼭 알아야 살아남는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나는 필자의 입장에서 갖춰야 할 자세나 개념 같은 것을 배우길 원했다. 그런데 내 기준에 글쓰기와 관련 없는 내용들이 수두룩했다. 물론 당연히 연관이야 있겠지. 근데 독자가 이해될 내용을 말해야 머리에 집어넣고 적용하든가 하지, 아오! 작가가 13강 서두에 이런 말을 했다. ‘창조적 글쓰기‘를 말하겠다 하고 딴 얘기만 했다고. 본인도 알고는 있군요? 진짜 양심도 없는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14개의 강의 중에 3강 이후로는 눈에 들어오질 않았어요. 책 표지 뒷면에 있는 ‘왜 나의 글은 재미가 없을까?‘라는 문구를 보고 순간 피식했어요. 작가님 글도 재미는 없거든요...



살다 보면 가끔 주위에서 만나는 한 문장이 머리와 가슴에 박힌다. 그것은 유명인의 어록일 수도 있고, 어느 래퍼의 일부 가사나 시위운동가들의 슬로건일 수도 있고, 카카오톡의 프로필 상태 메시지 글이나 화장실 문에 붙어있는 글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야말로 진실한 혼이 담긴 창조적 글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입이나 글에서 ‘물감의 글 중에 이런 말이 있지‘ 같은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냥 작은 소망이다. 내 글이 생각나는 대로, 입에서 뱉어지는 대로 쓴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나름 고민도 하고 필터링도 합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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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12-14 공감(39)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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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사랑하는 글을 쓰기 위한 고민








글쓰기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 나는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러한 일련의 문맥을 눈으로 추적하다 보면 인간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의 세계관, 가치관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어있다. “나는 글을 쓴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은 글을 써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렇게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성찰의 과정인 동시에 자기표현의 산물이다. 타인의 자기표현을 읽는 행위는 자기 성찰을 위해 생각을 수렴하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제 생각을 글로 전하는 행위는 자기 정체성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다. 거기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글쓴이와 독자는 더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글을 잘 쓰기 위한 고민’을 하면서도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단지 ‘날(=글), 보러 와요’라고 강요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 아무리 문장이 좋고, 논리적으로 잘 써도 강파르게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 글을 읽는 독자는 소외되기 십상이다. 자기 정체성과 생각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데 급급한 자화자찬 글쓰기는 볼거리가 많지만,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화자찬 글쓰기를 위해 사용된 언어는 결국 ‘보여주는 언어’가 된다.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던 사람들이 우치다 다쓰루의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강연장을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자화자찬 글쓰기를 선호하는 ‘잘난 놈’의 특권의식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원더박스, 2018)는 총 14강으로 진행된 ‘창조적 글쓰기’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가벼운 호기심에 이 책을 읽다 보면 심기가 여간 불편해지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글쓴이가 가져야 할 책임성을 되묻게 하기도 한다.






‘독자를 깔보는’ 시선으로 글을 쓰는 능력 따위를 아무리 익히고 배운들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힘주어 말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아/무/런/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27쪽)





‘보여주는 언어’로 채워진 글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 바로 글쓴이 자신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책의 첫머리에 간곡히 당부했다. “제발 제1강까지는 읽어주기 바랍니다. 제1강을 읽었는데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책꽂이에 다시 꽂으셔도 좋습니다.” 저자는 1강에서 ‘독자를 깔보고 사랑하지 않는 글’을 혹평한다. 단지 ‘글을 정확하게 쓰는 비결’을 알고 싶거나 자화자찬 글쓰기를 고집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덮어도 좋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책을 덮을 뻔했다. 그동안 나는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고, 독자를 배려하지 못한 채 ‘재미없는 글’을 양산했다. 책 뒤표지에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의 글쓰기는 백전백패가 아니라 ‘천전천패(千戰千敗)’이다. 저자의 글쓰기론에 동의하지 않아서 책을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책에 나온 ‘내 이야기’, 즉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가 부끄러워서 책을 끝까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독자를 사랑하는 글’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메타 메시지’다. ‘메타 메시지’는 진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중요한 내용을 의미한다. 저자는 ‘메타 메시지’를 ‘사활이 걸린 중요한 정보’라고 말한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은 글쓴이의 메타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경의(敬意)의 자세로 독자에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경의의 자세는 이렇다. “부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꼭 들어주세요.” 독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글쓴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쉽게 쓴다. 앞서 나는 자화자찬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보여주는 언어’의 특징을 언급했다. 저자는 마지막 강의(제14강)에서 발언자, 즉 글쓴이의 절박함이 묻어있는 ‘바깥을 향하는 언어’야말로 ‘메타 메시지’이며 수신자(독자)에게 ‘전해지는 언어’라고 말한다. ‘바깥을 향하는 언어/전해지는 언어’의 반대말이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이고, 내가 설명한 ‘보여주는 언어’와 비슷하다. 따라서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보여주는 언어’는 독자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며 글쓴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는 독단적인 글이다. 이런 재미없는 글은 독자들이 외면하는 ‘죽은 글’이다. 이 글에는 글쓴이의 진정한 혼이 실려 있지 않다.



글 자체로는 완성도가 떨어져도 글에서 독자에게 나누고자 하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글’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다작(多作)해도 단 한 명의 독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독자가 외면한 글은 글쓴이와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한다. 글쓴이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리가 부실하거나 부재(不在)한 글은 읽을 만할 가치가 없다. 앞으로도 독자를 존경하는 글로써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나)을 쓰기 위한 고민’이 아닌 ‘독자를 사랑하는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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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14 공감(34) 댓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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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렵다. 쓰면 쓸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확 사로잡을 정도의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지 못해서, 아니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지 못해서?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도 말할지는 못하겠다. 도대체 글쓰기는 무엇일까?



얼마 전에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삶을 빗대어 읽기와 쓰기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말한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마음이다.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은 글쓰기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치지만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내게는 상당히 큰 충격을 준 내용이었다.



다산과 연암에 관한 책을 읽은 후 다시 한 번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일본의 대표 사상가로 문학, 철학, 교육, 정치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우치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이다.



대가들은 보는 시각은 비슷한 걸까?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글쓰기란 독자에 대한 경의, 즉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성인이 말한 글쓰기의 본질과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찾은 글쓰기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 세부적인 사항이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마음을 담은 글쓰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저자가 말하듯이, 현대 교육의 영향으로 적당히 최저점을 넘길 정도의 글쓰기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마음을 담아 자신을 뚫고 나아가는 글쓰기는 참으로 험난한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독자에 대한 경의(자신안의 타자이든 외부의 타인이든)를 담은 글쓰기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글이 될 것이다.



굉장히 피상적인 주제라고 생각해 어렵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어지간히 소설들보다 훨씬 술술 읽힌다. 저자가 고베여학원대학에서 진행한 강의 내용을 마치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것처럼 서술하였기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이 책을 저자의 의도에 많은 부분 공감하였다. 일본에서 점점 그 힘을 잃어가는 모국어의 모습을 보면서 이 책을 집필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온통 영어와 이상한 외계어가 판을 치는 우리나라에서도 영어가 한글의 힘이 점차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이런 시대에 모국어를 풍부하게 하여 지적 창조성을 키워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도 귀 기울여야 할 사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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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ato4 2018-03-19 공감(1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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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책 제목이 강렬하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책 제목처럼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쳐든다. 솔직히 책은 읽기에 친절하진 않았다. 글이 어렵지 않은 듯 싶다가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중심을 놓치곤 한다(이는 글을 읽는 나의 부족함과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고, 책의 전개 자체가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저자 스스로는 ‘알기 쉬운 언어’로 해설하고 설명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리 쉬운 내용은 아니다(이는 어쩌면 번역의 한계일 수도 있겠고, 저자의 글쓰기의 스타일일 수도 있으며, 또는 저자의 깊은 지적 수준에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간혹 주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내용들을 심심찮게 만나기도 한다. 이는 이 책이 저자의 실제 강의를 정리한 것이기 때문일 게다(책은 저자가 은퇴하기 전 마지막 강의 내용이다.). 책 속에서 저자 스스로 말하고 있듯, 저자는 강의를 꼼꼼하게 작성된 강의안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란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준비 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는 아닐 게다. 강의안이 없이 그때그때의 영감에 상당부분 의존한다는 의미일 게다.) 진행함으로 도리어 강의를 하는 본인 스스로도 놀랄 흥미로운 내용들을 만나게 된단다. 이런 게 어쩌면 저자가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텍스트가 먼저이고 작가가 다음이란 것과 일맥상통한 접근일지 모르겠다. 이런 시도는 언어가 언어를 낳고, 언어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단지, 단점은 이로 인해 때론 중구난방 횡설수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아닐까(사실 내 리뷰가 횡성수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럼에도 책을 그냥 덮어버리기엔 찝찝하다. 여전히 뭔가 꼭 알아야만 할 가르침이 담겨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짙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보물이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 때문이다. 아울러 주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내용들이라 할지라도 저자의 깊은 인문학적 소양이 오롯이 담겨 있기에 다소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곁가지로 빠진 글들조차 귀하게 느껴져 읽고 소화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아울러 결국엔 이런 곁가지의 주제들조차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갖춰야 할 소양일 테니 말이다.).



책을 읽어갈수록 뭔가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알게 되는 느낌이 들면서도 여전히 명확하진 않다(내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겠고, 저자의 가르침의 방법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희미하다고 해서 그저 포기하기엔 아까운 뭔가가 여전히 있다. 그래서 끝까지 읽는데 제법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몇 날을 조금씩 읽었다.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라는 부제답게 책은 혼을 담아내는 글쓰기에 대해 이런 저런 내용들을 전하고 있다. 설명하는 힘에 대해. 독자에 대한 경의와 사랑에 대해. ‘바보의 벽(적당주의)’ 글쓰기의 함정에 대해. 자기 내면을 향해 잠수해감으로 닿게 되는 ‘손이 닿지 않은 광맥’과의 만남에 대해. ‘읽고 있는 나’와 ‘다 읽은 나’의 만남에 대해. 애너그램에 대해.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바깥에서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능력, 그 글쓰기에 대해. 에크리튀르에 대해. ‘액자의 틀’인 메타 메시지에 대해. 타자와의 가상적인 동일화에 대해. 등등. 이런 다양한 내용들을 말하며, 혼이 담긴 글쓰기(창조적인 언어활동)는 어떻게 가능한지, 생성적인 언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혼을 담는 글쓰기’는 ‘울림이 있는 언어’, ‘전해지는 언어’, ‘신체에 닿는 언어’로의 글쓰기다. 그럼 이런 언어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혼에서 나온 언어’, ‘산 것에서 태어난 언어’다. 이것은 ‘언어를 경유해서는 건넬 수 없는’ 결여의 양태로, 또 ‘아무리 해도 그것에 대해 직접 이야기할 수 없는’ 불능의 양태로 전해진다고 저자는 결론 내린다. 여전히 어렵다. 아리송하다. 알 것 같은데, 확연하진 않다.



어쩜, 저자는 이것을 노린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번 읽은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럼 혹시 ‘손이 닿지 않은 광맥’을 만나게 될지 모르고, 그 광맥이 공급하는 울림이 있는 언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모를 뿐 이미 저자의 글을 통해 그런 광맥에 가까이 다가갔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의 간격을 둔 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오랜만에 학창시절로 돌아가 강의를 듣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소소한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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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이 2018-03-23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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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글쓰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쓴 글이 오랫동안 읽히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내가 쓴 글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히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러면서도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고른 것은 전자가 후자보다 크다는 방증일까.

이 책은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우치다 다쓰루가 정년 퇴임 전 대학에서 진행한 마지막 강의인 '창조적 글쓰기'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저자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전자책이 종이책을 이길 수 있는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 문학에 포함된 반면 시바 료타로는 세계 문학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프랑스 철학 책은 왜 어려운가 등등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한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라는 질문은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인 동시에 타인의 이해를 구하는 행위다. 주관식 시험을 볼 때 수험자로서는 아무리 답안을 잘 써도 채점자가 읽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 작가가 제 딴에는 아무리 잘 써도 독자가 그 글을 읽고 싶은 마음조차 가지지 않는다면 그 글은 '살아남는' 글이 될 수 없다. 작가는 자기표현, 자기만족을 위해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 또는 사회와 소통하는 방편으로 글을 쓰는 존재여야 한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이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이길 수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에 의하면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다 읽어버린 나'의 공동 작업"이다. 독자가 인내심을 가지고 종이책 한 권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다 읽은 나'의 모습이 가까워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전자책은 책장이 넘어가는 것을 물리적으로 실감하기도 어렵고(종이책은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왼손과 오른손이 각각 잡고 있는 책의 부피와 무게가 달라진다), 다 읽은 나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그렇다면 전자책 화면에 남은 페이지 수를 표시하는 기능을 추가하면 전자책의 인기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 문학에 포함된 반면 시바 료타로는 세계 문학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문학에 '외향(外向)'과 '내향(內向)'이 있다는 답을 내놓는다. 쉽게 말해 시바 료타로는 일본인을 편 드는 글을 쓰는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인을 편들지 않는 글을 쓴다. 시바 료타로는 노몬한 사건에 관한 글을 쓰려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생존 병사를 인터뷰했지만 자국을 욕하는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집필을 포기했다.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몬한 사건에 관해 끈기 있게 취재해 <태엽 감는 새>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치부를 드러내는 글을 쓰는 일은 힘들다. 위험도 따른다. 하지만 그런 글을 쓰는 작가는 그런 글을 쓰지 않는 작가보다 훨씬 강하다. 독자에게도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어느 집이라도 그 집 고유의 냄새가 나지만 그곳에 사는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집은 냄새가 안 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리고 자기 집 냄새를 '냄새'라고 느끼지 못하면 자기 집에 대해 '외부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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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8-04-16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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