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7

알라딘: 서울과 교토의 1만 년 - 교토를 통해 본 한일 관계사



알라딘: 서울과 교토의 1만 년 - 교토를 통해 본 한일 관계사




서울과 교토의 1만 년 - 교토를 통해 본 한일 관계사
정재정 (지은이)을유문화사201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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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504쪽

책소개
교토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일 관계사와 일본의 역사를 살펴본 책이다. 천 년 넘게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있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다.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한 도래인(이주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단행했던 곳이며, 윤동주와 정지용 등 우리 유학생들의 애환이 어린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노동자로 동원된 뒤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한일관계사의 권위자인 정재정 교수가 교토의 곳곳을 다니며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목차


저자의 말
한국과 일본의 시대구분

들어가기 전에 | 교토의 역사와 한일 교류
역사의 켜가 쌓인 교토 | 교토의 풍수지리 | 교토 문명의 탄생 | 헤이안쿄의 공간 구조와 시설 배치 | 무가의 도시가 된 교토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교토 개조 | 도쿠가와 막부가 이끈 교토 부흥 | 번영을 되찾은 교토 | 교토에서 찾는 한일 교류의 궤적

1 고대 | 교토의 시작과 도래인의 역할
1. 한국 문화의 일본 전파
문명의 교류와 인간의 이동 | 교류의 기원과 한국의 역할 | 빗살무늬토기와 조몬토기 | 벼농사의 전파와 야요이 문화 | 국가의 형성, ‘왜, 야마토, 일본’ |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 일본을 바꾼 도래 문화 | 통일 신라·발해와 일본의 교류 | 일본과 중국의 교류 | 일본 고대 문명에 대한 바른 시각 | 한일의 문명 전환과 교토
2. 교토를 개척한 도래인 집단
도래인의 물결과 그들의 활약 | 하타 씨의 가쓰라 지역 개척 | 고류지의 쌍둥이 미륵반가사유상 | 가쓰라 본궁에 깃든 하타노 가와카쓰와 쇼토쿠 태자의 일화 | 백제계 도래인이 창건한 기요미즈데라 | 일본 신앙의 원조가 된 도래인
3. 교토에 살아 있는 백제와 신라의 숨결
백제 왕실의 인척, 천황가 | 무역 제국 신라의 위대한 흔적 | 고승 엔닌과 무역왕 장보고 | 신라선신당과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미쓰

2 중세 | 무가의 득세와 선종의 융성
1. 무사의 시대, 교토의 변신
헤이안쿄에서 교토로 | 율령제를 대신한 장원공령제 | 전국적 무가 정권, 가마쿠라 막부 설치
2. 무로마치 막부와 선종 문화
무가의 권력 다툼에 멍든 교토 | 선종의 유행과 쇼코쿠지 | 긴카쿠지와 난젠지의 일본식 정원
3. 나라와 시대를 뛰어넘은 고승의 존경과 공감
고잔지와 묘에 스님 | 의상과 원효대사가 주인공인 두루마리 그림 |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 낭자의 연정 | 의상대사를 본받으려 한 묘에 스님

3 근세 | 교토의 개조와 교류의 확대
1. 통일 전쟁의 중심이 된 교토
오다 노부나가의 사라진 꿈 | 교토를 개조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2. 교토에 배어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욕
사치를 탐한 히데요시의 호화찬란한 저택, 주라쿠다이 | 임진왜란을 예고한 조선 통신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만남 | 도요토미 가의 멸망을 부른, 호코지 동종의 명문 | 한때 정치와 외교의 무대였던 후시미 성 | 히데요시가 벚꽃놀이를 즐긴 다이고지 | 히데요시와 센노 리큐의 비극적 교유
3. 임진왜란과 교토
최악의 침략 전쟁, 임진왜란의 발원지 교토 | 조선인의 원혼이 떠도는 이총 | 노예로 팔리거나 학대당한 조선인들 | 교토에서 유학을 가르친 조선의 학자들 | 계획적인 조선 문물 약탈과 보전 | 조선의 꽃나무까지 파 간 일본군 | 메이지 정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으로 부활시키다
4. 지략과 간계가 뒤엉킨 임진왜란 강화 회담
험난한 임진왜란 전후 처리 | 강화회담의 물꼬를 튼 송운대사 | 쓰시마 번의 조일 강화 중개 | 일본의 전문 외교관, 조선수문직 | 송운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시미 성 담판 | 서로를 알아 가는 한일 역사 기행
5. 실리를 위해 대결 구도를 피한 사절 외교
조선의 강화 조건과 쓰시마 번의 책략 | 궁리 끝에 보낸 외교 사절, 회답겸쇄환사 | 임진왜란의 전후 처리가 주는 교훈 | 지쇼인에 남은 조선 통신사의 흔적 | 장군은 일본 국왕인가, 일본국 대군인가 | 통신사 외교, 신의 속의 자존심 대결 | 통신사의 여정과 교유 | 통신사 외교의 변질과 종말 | 통신사 부활이 만든 지역 간 교류의 촉진과 세계기록유산 등록
6. 비단·인삼·은화의 3국 교역과 교토의 번영
조일 무역의 창구, 왜관 | 교토의 젖줄이 된 다카세가와 운하 | 무역의 결제 수단이 된 일본의 은화 | 교토의 비단과 염색 | 3국 무역의 최고 인기 상품, 조선 인삼 | 중계무역의 쇠퇴와 갈림길에 놓인 조선 | 외교 방식의 개편으로 궁지에 몰린 쓰시마 번

4 근대 1 | 메이지 유신과 재생을 위한 교토의 노력
1. 혁명의 도시가 된 교토
교토, 혁명의 도가니에 빠지다 | 조슈 군과 사쓰마 군의 전투, 불타 버린 교토 | 모반과 암살의 무대, 교토에 남은 유신의 사적들 | 메이지 유신 단행과 국가 개조 | 일본 애국의 성지, 료젠 묘역
2. 위기를 기회로 바꾼 교토의 저력
수도 이전이 가져온 교토의 위기 | 교토 부활의 바탕이 된 소수사업 | 교토의 저력을 과시한 정도(定都) 1,100년 기념사업 | 교토에 활력을 불어넣은 교토의 기발한 기획 - 영화, 춤, 벚꽃, 시장, 교육

4 근대 2 | 일본의 한국 지배와 한국인의 고투
1.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의 한국 강점
러일의 대립과 광무개혁의 좌절 | 강요된 협약 체결에 의한 대한제국 폐멸 | 합법을 가장한 병합 조약
2. 교토에 건재한 한국 침략의 유적
근대 일본의 상징 메이지 천황의 무덤 | 충신의 아이콘이 된 노기 마레스케 | 한국 강점을 정당화한 한국합병봉고제비 비문 | 일본의 대러정책을 결정한 곳, 무린안 |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별장, 간코다카세가와니조엔 |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황제의 영욕을 품은 조라쿠칸
3. 도일한 한국인의 비참한 생활
늘어난 재일 한국인 | 재일 한국인의 민족차별 속 생존 투쟁과 민족운동 | 간토 대지진과 한국인 학살을 부른 유언비어 | 한국인 동화 사업과 전시 동원 | 일본의 항복과 한국인의 귀환
4. 교토에서 고난을 헤쳐 나간 한국인의 자취
한국인 노동자와 니시진 | 비와 호 소수 공사에 참여한 한국인 노동자 | 돼지우리라고 불렸던 한국인 노동자의 집단 거주지 | 가파르게 늘어난 한국인 유학생 | 한국인 유학생의 활동과 민족운동 | 학도병 소집과 대일 협력 | 교토제국대학의 한국인 교수 | 윤동주의 시비를 세운 도시샤대학 | 교토제국대학의 송몽규와 독립운동 | 정지용과 교토의 시상(詩想)

5 현대 | 한일의 문명 전환과 평화 공영 모색
1. 일제의 패망과 남북에 남은 일제 유산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 미 · 소의 점령과 분단국가의 수립 | 일제의 유산 ⑴: 인적 자원의 활용과 처벌 | 일제의 유산 ⑵: 물적 자원의 분포와 대체 | 일제의 유산 ⑶: 법령 · 제도, 이념 · 체제의 계승과 개혁 | 남북한과 일본의 문명 전환
2. 일본의 체제 변혁과 경제 발전
연합군이 주입한 자유와 민주 | 동아시아의 냉전과 미일 안보조약 | 6·25 전쟁과 일본의 경제 부흥
3. 한일의 국교 재개와 교류 확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 | ‘평화선’의 철폐와 어업 지원 |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영주권 확보 | 문화재 반환과 문화 교류 | 독도 영유권 문제의 처리 | 남겨진 과제, 북일 수교 | 눈부시게 증가한 한일의 물적·인적 교류 | 서로에게 이익이 된 교류와 협력 | 자라나는 연대와 공감 의식
4. 한일 연대와 공생을 일깨우는 교토의 사적
일본인과 한국인을 함께 새긴 해방전사비 | 한국인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만주지 | 우키시마 호 순난자 추도비 | 우토로의 한국인 거주지 | 한국 문화의 멋을 보여 주는 고려미술관
5. 한일 관계의 새로운 이해와 『서울과 교토의 1만 년』

참고문헌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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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59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이야기할 때 조심할 사항이 하나 있다. 흔히 아시아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한반도 일대가 문화 교류에서 교량의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교량은 인간이 건너다니는 연결고리일 뿐,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한반도 일대는 옛날부터 한국인... 더보기
P. 103 일본에는 800만 이상의 신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 이렇게 신이 많은 것은 일본의 문화 풍토와 신앙 세계가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평생 한 구멍만 파고드는 일본인들의 전공 집착 의식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들은 신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공부, 싸움, 양조, ... 더보기
P. 234 메이지 유신은 한국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나아간 반면, 조선은 그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을 넣으면 메이지 유신의 무게는 더욱 묵직해진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철저하게 단행하여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반면에 중국은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뜨뜻미지근하게 전... 더보기
P. 354 메이지 천황은 일본이 보잘 것 없는 동양의 한 군주국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였다. 따라서 ‘메이지’는 단순한 연호가 아니라 일본의 잠재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세계로 뻗어나간 유신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상징인 메이지 천... 더보기
전쟁과 침략이라고 하는,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말이, 성전 혹은 협화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던 수많은 청년들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하고 읊었던 시인 윤동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이 공부했던 도시샤의 설립자 나지마 조는 “양심이 전신에 충만한 대장부들이 궐기할”것을 말했습니다만, 시인의 생전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하면서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그는 살았습니다. 그 치열한 삶의 모습을 우리는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 혹은 저지르지 않게 하기”위해서라도, 시인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싶은 것입니다. 접기 - 마키아벨리



저자 및 역자소개
정재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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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 한일관계사, 역사교육의 전문가이다. 서울대학교와 동경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박물관장, 시민대학장, 인문대학장, 대학원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사연구회, 경제사학회, 한일관계사학회 등에서 활약하고,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서울역사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등의 위원, 한일미래포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의 운영자문위원장을 맡았다. 한국과 일본, 중국, 북한, 독일, 미국 등의 역사공동연구에 참가하고, 한일 양국정부가 지원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1,2기)의 총간사를 겸임했다. 북해도대학, 동경대학 등의 특임교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동북대학, 에커트국제교과서연구소 등의 외국인 연구원으로서 교육과 연구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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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철도와 근대 서울>,<서울과 교토의 1만 년>,<그 후의 한일관계> … 총 3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교토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일 관계사와 일본의 역사를 살펴본 책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 1천 년 이상 일본의 수도로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교토는 일본의 문화 중심지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 책 한 권이면 일본의 역사와 한일 관계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훑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라!
서울과 교토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한일 관계사 전문가가 들려주는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이야기가 당신의 시야를 넓혀 준다. 일본, 이제 알고 떠나자!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 개성이 풍부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한국은 일본의 고대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은 한국의 근대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명의 교류는 평화롭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침략을 통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과 일본은 지구상에서 인종적, 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가 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문명사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라는 명저에서 이런 한국과 일본을 ‘유년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로 비유했다.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게 한일 관계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라고 촉구하는 그의 경구(警句)에 백 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지만 교토의 유적.유물에는 그런 충고를 뒷받침해 주는 사연이 너무나 많이 깃들어 있다. -저자의 말 중에서

일본인의 마음의 도시이자 1천 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문화 중심지 교토를 통해서 본 일본과 한국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두 나라가 육지로 연결돼 있던 약 6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해가 호수였던 시절부터 이어진 사이니 보통 관계는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일전만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앙숙 같은 사이가 돼 버렸을까.
곧바로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가 떠오른다. 임진왜란은 역사상 최악의 침략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아무런 명분 없이 쳐들어와 조선의 문물을 마구 약탈했는데, 여섯 개의 특수 부대까지 편성한 조직적인 약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승리의 증거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일제강점기는 그 깊은 상처와 갈등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채 해결되지 않고 있기에 더 말하지는 않겠다. 그런 일본이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가난에 쪼들릴 때 한국 전쟁 특수로 경제 회복을 넘어 경제 부흥을 이루게 됐으니 관계가 꽤나 복잡 미묘하긴 하다. 문명 전달의 관계 전환, 침략전쟁, 그럼에도 다시 시작한 교역…….

이러한 관계 변화의 한가운데에 교토가 있었다. 천 년 넘게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있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다.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한 도래인(이주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단행했던 곳이며, 윤동주와 정지용 등 우리 유학생들의 애환이 어린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노동자로 동원된 뒤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한일관계사의 권위자인 정재정 교수가 교토의 곳곳을 다니며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국은 받아들인 것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설사 문화’고,
일본은 받아들인 것을 꼭꼭 쌓아 두고 우려먹는 ‘변비 문화’다?!

이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두 나라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어떻게 다른 문화를 형성하게 됐는지 그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교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을까?

- 교토는 백제, 신라, 가야, 고구려 등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그들이 일본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 무가와 천황 간 정권 교체의 중심에 있었기에 이 정권 교체가 일본과 이웃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보여 준다. 또한 교토는 수도의 지위를 잃고도 거듭 변신을 꾀하며 발전해 왔는데, 이를 위한 교토시민의 다양한 노력을 볼 수 있다.
-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벌어졌던 곳이며, 세력가들이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을 때 이곳에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에 역사의 흔적이 담긴 유적·유물이 많다. ‘교토에서는 발에 차이는 게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 임진왜란의 시작점이기에 우리와는 악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은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이총과 순종황제를 황제 자리에서 쫓아낸 장본인인 메이지 천황의 묘가 있는 곳으로, 순종황제는 그 묘를 참배하는 능욕까지 겪었다. 우리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윤동주, 송몽규, 정지용 등이 유학했고, 많은 한국인 노동자가 일했던 곳이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살았던 한국인들의 활동과 행적을 읽을 수 있다.
- 지금도 시내에 1,600여 개의 사원과 400여 개의 신사가 성업하고 있는 곳으로, 일본의 독특한 종교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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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현대까지 교토를 중심으로 한 한일관계사와 일본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가 교토의 곳곳을 발품 팔며 취재한 글과 사진이 잘 정리되어있다.

파워리뷰어 2019-04-23 공감 (2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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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천년고도 교토에 벤치마킹하는 것도 한 방법, 지역화과 곧 세계화. 지역의 특색을 살리자는 말. 일본연구의 전문가가 들려주는 한일관계사의 압축판.
바람흙별 2016-09-1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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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교토 책2권하고 비교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게 미마와리 구미라고 책에 나오는데, 예전에는 신센구미 설이었지만 요즘 일본에서는 조슈와 사쓰마에서 죽였다는 설이 강하고, 료마는 죽어서 용이 되었고, 시바 료타로가 잊혀진 료마를 살려냈다.
히카루 2018-07-2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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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교토의 1만년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경주와 비슷한 위치인 천년 고도라 불리는 교토와 이 도시에 얽힌 역사를 알게 되다면 언젠가 한번은 일본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위안부 문제 등 많은 갈등이슈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일관계사를 읽다보면 처음 책을 집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졌던, 임진왜란부터 시작된 일본의 우리나라의 수탈에 대해서와, 현재까지 호위호식하고 우리나라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친일파 문제, 그리고 위안부 문제 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여러 이유로 이 책은 불편한 감정 없이는 읽기 힘든 것 같다.






사드나 위안부의 문제가 중국에 대비하기 위한 미국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 감정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과 우리를 묶어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예전부터 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글을 통해 이에 대한 서구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는 한국과 일본을 ‘유년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현제’로 비유했다. 우리나 일본사람이나 모두 이야기에 몸서리를 치면서 부정할 것 같긴 하지만, 두 나라만큼 서로 문화적 영향을 준 나라가 세계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인 듯하다.






천년고도라는 표현을 했지만 화재 등으로 고대 유적 등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은 조선을 침범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우리가슴을 가장 막막하게 하는 것은 정유재란 이후 일본군의 공적 확인을 위해 학살하고 베어온 조선 양민의 코와 귀를 묻은 무덤인 이총이다. 저자도 지적하였지만,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쌍방간의 대립이나 충돌이 원인이 아닌) 일방적인 침략과 학살의 증거를 번화한 대로변에 산더미처럼 묻어놓고 자랑하는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이나 사고방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교토에는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무덤도 있다. 우리와는 30~40년 정도 서양문물에 대한 개방하는 시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 나라는 보잘 것 없는 동양의 한 군주국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제국으로 성장하고, 한 나라는 몇 번에 걸친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5백년 사직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 책에서는 메이지천황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소개하였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를 침략자로 단정하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세계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왕조와는 다른 선택을 한 그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2016년을 사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외에도, 윤동주 시인이나 정지용 시인의 한글 시비가 이들이 공부한 교토에 소재한 도시샤대학 구내에 있는데, ‘윤동주 시비 건립 취지서’를 보면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뭉클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쟁과 침략이라고 하는,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말이, 성전 혹은 협화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던 수많은 청년들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하고 읊었던 시인 윤동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이 공부했던 도시샤의 설립자 나지마 조는 “양심이 전신에 충만한 대장부들이 궐기할”것을 말했습니다만, 시인의 생전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하면서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그는 살았습니다. 그 치열한 삶의 모습을 우리는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 혹은 저지르지 않게 하기”위해서라도, 시인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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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2016-09-17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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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교토의 1만 년







세계화가 곧 지역화란 말이 인상적이다. 세계의 문호는 개방되었고 국경의 심리적 장벽도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여기서 도태되지 않고 글로벌 기준을 충족하려면 지역의 특색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세계화에 부응하는 것이고, 구체적 방법론으론 선진 인접 이웃국가의 고유한 배울 점은 벤치마킹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일본 교토에 고유한 사실(Fact)로는 외적의 침입으로 교토가 피해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제2차세계대전 때 도쿄는 공격을 받았음)이 있고, 다만 내란, 지진, 지진으로 인한 대화재로 크게 파괴된 적은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교토를 가면 발로 차이는 게 유물이라는 말도 있다.






책의 컨셉은 '교토'라는 8세기말에서 메이지시대이전(19세기후반)까지 공식적으로 일본의 수도였던 약 1,100여년의 역사와 문화전통이 켜켜이 쌓인 역사적 무대를 한일관계사에 초점맞춰 조명하는 것이다.






<서울과 교토의 1만 년>이 표방하는 한일관계의 선린우호의 지속과 증진의 기치에 심히 공감하며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언급하는 '한일관계의 새로운 인식과 이해'에 관한 글은 과거 한-일간의 특수 관계가 보통관계가 된 역사적 배경 하에 한-일 모두 지난 앙금을 털어내고 보다 세계문명에 공동 기여하고 함께 번영의 길을 모색할 것을 제언한다. 그 속에서 작금의 한일관계의 표면적 경색을 우리 젊은 세대가 전환시킬 책무를 짊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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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흙별 2016-09-02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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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교토의 1만 년






일본의 천년고도(千年古都)인 교토는 외세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고, 내란과 재해에도 끊임없는 재건을 해와서 비교적 왕도(王都)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교토에서 보낸 시간을 바탕으로, 교토의 유적과 유물을 소재로 교토라는 도시의 역사에 주목했다. 거기에 고대부터 이루어진 한반도에서의 이주를 통한 문화 동화(文化同化)와 침략등으로 인한 문화충돌을 통해 문화혼합을 이루어온 한국과의 관계를 더해 <서울과 교토의 1만 년>이라는 책에 담아냈다. <총, 균, 쇠>의 저자인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유년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 책을 통해서 더욱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었다.



한반도의 국제 정세의 격변에 따라 일본 열도로 이주한 도래인들이 만들어낸 ‘도래문화’, 한국인들은 여기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웃나라간에 이루어진 사람과 문화의 교류를 바라보는 시선에 균형감각을 더하기를 바란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넘어온 문화 역시 한반도에서 수용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보 1호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아주 닮아 있다. 나 역시 적송이 일본에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알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도 일본의 소학생이 보낸 편지에 그렇게 답을 했다. 하지만 소학생들은 일본에서 적송이 자생했다며 그런 이유만으로 한반도에서 만들어 보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런 논쟁은 한국의 교과서 기술을 바꾸게 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리와 일본은 여기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한국은 받아들인 것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설사 문화’고, 일본은 받아들인 것을 꼭꼭 쌓아 두고 우려먹는 ‘변비 문화’다”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한다. 일본의 종교에 대한 부분이 이런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 여기에 비교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교화 혹은 근대화 과정이었다.



조선사람들은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며 청나라로,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일본으로 끌려갔었다. 그리고 성리학 원리주의에 사로잡혔던 조선은 다시 돌아온 사람들에게 도리어 박해를 가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 중에 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에 잡혀간 것을 절의를 잃은 것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은 문물 약탈 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에 대한 쇄환 정책에 도리어 소극적이었다니 안타깝기만 했다. 위에 언급한 ‘설사 문화’에 한 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단순한 교토의 역사가 아닌, 일본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일본의 역사를 따로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는 주로 근현대사부분에서 배웠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조금 더 과거의 시점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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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6-09-1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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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교토의 1만 년




1만년전, 일본과 한반도는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서로 아웅다웅 하지만 과거엔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그들은 서로 교류하고 있다. 이럽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본과 한국,저자는 일본의 교토와 한국의 서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도쿄가 아닌 교토일까, 또한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경주가 아닌 서울일까 궁금하였다. 일본의 교토가 신라의 경주처럼 천년고도로서 한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며, 서울보다는 경주가 더 적합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 두 나라의 수도는 서울과 도쿄 이기 때문에 비교하기에 적합할 수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통념에 벗어나 있다. 여기서 500년전 과거로 돌아가면 한반도와 일본 동시대에 현존했던 수도는 교토와 경주가 아닌, 도쿄와 한양이 아닌, 교토와 서울이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수도였다. 교토는 메이지 유신이 있기 전까지 1000년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그것이 저자가 교토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역사기행이며, 교토의 1만년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와 연결짓고 있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왕권이 교체되면, 난민이 발생하거나 유민이 생겨난다. 그들은 한반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며, 일본 열도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일본은 자기가 가진 문화에 대한 부족함을 알고 있었으며, 백제와 발해가 멸망하였을때 그들을 흡수하는 기회로 삼았고, 일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받아들였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그들이 가진 결핍이며,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런 일본의 모습에 대해서우리에게 유리한 역사 사관을 들이밀고 있지만, 그들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은 엄연히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들이 꿈꾸고 있는 것은 과거 칭키스칸이 전세계를 호령했던 것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길목을 막고 있는 한반도, 해양국가로서의 한계는 그들이 꿈꾸었던 야망을 번번히 무산시켰으며, 언제나 전쟁이후 스스로 그 후유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 우리는 임진왜란에 대해 이순신과 선조, 징비록을 쓴 류성룡,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승병과 농민들..우리가 알고 있는 건 우리가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국난을 어떻게 극복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모습과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의 모습이다. 임진왜란은 교토에서 시작되었으며, 교토에서 끝났다는 사실이다. 일본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이묘를 교토로 불러들였다. 그건 임진왜란을 일으켜 다이묘에게 나눠 주기 위함이며, 여기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운이 좋게도 빠지게 된다. 교토라는 한정된 공간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이묘가 모두 들어오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운명이 엇갈렸으며, 임진왜란이 일본에 의한 승리로 정리되었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으며, 도요토미 가문은 몰락하고,그 빈틈을 도요토미 이에야스가 차지하며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 담겨진 임진왜란의 뒷이야기이며, 그안에 천년고도 일본의 수도 교토가 있다.

교토의 운명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하여 수도가 도쿄로 옮겨갔으며,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의 정치 문화 경제가 다시 재편되었다. 그동안 교토에서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천왕이 도쿄로 이사함으로서 교토의 상징성이 위축되었으며,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교토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으며, 일본의 문화와 교육,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책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이라는 곳.그곳에는 조선인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죽은 조선인 10만명의 귀무덤 이총이 현존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지금 아베 정권의 뒷이야기와, 일본 유학길에 조선인의 이야기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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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6-09-1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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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교토의 1만 년




일본이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호칭하며 빼앗긴 자국 영토로 규정하고 이를 국제심판소에 제소하여 우리로 부터 빼앗으려하는 아베정권의 후안무치한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섬뜩하기는 커녕 가소롭기만 하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은 곳에서 우리에 대한 영향력을 재현 내지 강화하려는 움직임이나 미세한 것까지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나타날 때가 종종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일본의 고증이나 연구실적은 우리 사학계의 성과에 못지 않을 정도라고 하니 아무리 일제치하 강점기에 우리의 역사를 접할 기회가 많다고 하더라도 치밀함에 있어서는 일본인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일관계는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위치만큼이나 애증관계로 점철되어 있다. 거의 증오에 가깝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본은 그만큼 우리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오랜기간 교류해 왔고 영향을 끼쳐왔다. 고대문명의 전달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없었으면 지금의 일본 역사는 그만큼 오래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상으로나 정서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우리의 가슴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을 외면하기만 한다면 일본과의 전향적인 관계 설정에 있어서 더욱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일본은 결코 가까이 하기에 쉽지 않은 나라지만 그렇다고 멀리해서도 안될 존재임은 현재의 국제정세 속에서 더욱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분명한 사죄가 전제되어야지만.



도쿄가 일본의 수도이고 정치, 경제의 중심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교토다. 그만큼 교토는 우리와의 문화교류에 있어 가장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며 그 유적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라고 한다.



<서울과 교토의 1만년>은 한일교류사의 일본측 중심지였던 교토의 유적, 유물에 대한 답사기이다. 저자는 한일간 교류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쌓아온 역량을 이 책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일교류사가 물론 1만년이나 되지는 않았다. 그만큼 오래되고 또 긴밀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만큼 교토는 일본 역사의 정수이자 한국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상을 갖고 있음을 독자들이 인식했으면 하는 바램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백제, 신라, 가야, 고구려 등 한국의 도래인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 교토였으며 천년간 일본의 중심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레 그들이 일본 문명에 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토에는 한국의 영향이 남아있고 교류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위상을 갖고 있다.



교토 문물에 대한 다양한 사진, 삽화를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높이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흥미와 유용함 면에서 높은 가치를 가진 책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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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사내 2016-09-1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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