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5

우리역사넷 중일전쟁 이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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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 1)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 (2) 1930년대 북미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총설
고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대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42권 대한제국


43권 국권회복운동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45권 신문화 운동Ⅰ


46권 신문화운동 Ⅱ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개요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1)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1) 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2) 1930년대 북미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3) 1940년대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2) 일본지역 민족운동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마. 중일전쟁 이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1930년대 후반 북미지역 한인사회는 국민회 중심의 합동운동이 성과를 보임에 따라 새로운 활기를 되찾았다. 이런 가운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회는 현 시국을 비상시기로 인식하고 임시정부후원활동을 추진하였다. 국민회는 1937년 9월 제4계 중앙집행위원회의에서 임정후원을 위한 특별의연금과 중국항일전쟁후원금(또는 ‘중국항일동정금’으로 불림) 그리고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항구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국민부담금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1938년 9월 국민회 제3계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중앙상무부 안에 시사위원회를 두어 원동정세와 재미한인의 임무 및 대내외의 선전방침을 연구하게 하고 국민회 대표 1인을 원동으로 특파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825) 또 국민회는 비상시기에 하와이 각 단체들과 일치된 행동을 도모하고자 같은해 9월 14일로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에 공문을 보내 행동통일을 요청하였다.826) 1939년 국민회는 임시정부에 인구세와 국민부담금 1,500원을 송금한 것을 비롯하여, 한인동포의 미국 입·출입 주선, 쿠바재류동포에 대한 구제금 송부, 한인유학생의 미국 체류권 청원활동, 그리고 원동에 있는 한인 각 당들에게 통일 및 연합활동의 재촉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827) 아울러 김용중 등 2세 한인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재해로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국내 한인들을 돕기 위해 1939년 12월 20일 발기한 內地旱災救濟會에 대해 국민회는 적극 지원하였다.828)

한편 중일전쟁 발발 이후 북미 한인사회에는 국민회 조직과는 별도로 각지에서 한인 연합으로 설립한 중국후원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37년 말부터 그 이듬해 초까지 뉴욕한인연합중국후원회·나성한인연합중국후원회·시카고한인연합중국후원회 등이 결성되어 일화배척운동과 후원금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각지에서 한인 연합으로 결성된 중국후원회는 결성 초기 후원회 안에 국민회 주요 임원들과 회원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기존 국민회 조직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창설소식이 미주에 알려진 1938년 11월 이후부터,829) 중국후원회의 개별활동은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국민회는 1939년 1월 22일과 2월 16일 중국후원회 문제를 검토한 뒤 국민회가 직접 후원회를 관할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830) 하지만 중국후원회는 1939년부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이하 ‘의용대후원회’ 또는 ‘후원회’로 약함)로 개편하면서 국민회와 점차 분리해 나갔다.

조선의용대 후원문제가 처음 대두되는 것은 1939년 6월 나성한인연합중국후원회를 대표한 변준호가 조선의용대 후원을 목적으로 로스엔젤레스에 한인 소집을 허락해 줄 것을 국민회 당국에 요청하면서다. 이것은 조선의용대 후원문제를 기존의 국민회·동지회와 같은 기성단체들과 연합해서 공동후원하자는 의도에서였다.831)

하지만 기존의 북미 국민회와 동지회측은 조선의용대 창설문제에 별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동안 두 단체 모두가 처음부터 오직 임시정부 중심으로만 활동해 임시정부와 무관한 조선의용대에 대해 탐탐치 않게 생각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朝鮮民族革命黨이 그 동안 임시정부를 否定 또는 不關해 온 현실이 미주 한인사회에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를 후원할수록 임시정부에 대한 후원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마땅치 않았다.

이에 따라 국민회는 6월 29일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변준호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유는, 지난 4월 6일 국민회 제2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와 어긋난다는 것이다.832) 즉 재미한인은 국민회의 통솔하에 인구세와 국민부담금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상납하는 것이 원동활동을 돕는 바른 길이요 在來의 規例인데, 이 규례를 버리고 조선의용대를 직접 후원한다면 사무진행의 계통을 문란케 하는 것이므로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민회 입장은 북미 한인사회를 철저하게 임시정부 중심과 국민회 중심으로 주도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회의 태도에 대해 중국후원회는 간섭과 통제만 있고 활동이 미약한 국민회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 단체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자 중국후원회측은 활동범위를 점차 확대해 가면서 소속단체를 불문한 개인별 후원에 의존하였다. 그런 후 1939년 8월 27일 로스엔젤레스의 중국후원회는 안석중 등 40명의 명의로 자체를 해소하고<조선의용대후원회 성립선언문>을 발표하였고,833) 10월 7일 中·美人들과 함께 로스엔젤레스 일본영사관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후원회 설립을 대외적으로 기념하였다.834)

조선의용대후원회 조직은 나성지역 외에 이미 1939년 4월과 9월에 뉴욕과 시카고에서도 각각 설립되고 있었지만 현재 자료미비로 그 정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형편이다.835) 다만 이들 후원회 단체들은 1940년 5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연합회(이하 ‘조선의용대후원회’로 약함)로 통합되면서 통일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의용대후원회는 중한민중동맹단 대표인 한길수의 외교선전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반일시위운동이나 반일선전강연 등 대외활동과 조선의용대 지원을 위한 재정모금운동 등에 주력하였다.

조선의용대후원회는 조선의용대 후원을 주목적으로 하였지만 여기에만 한정하지 않으려 했다. 즉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하는 모든 군사운동에 대해 후원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다만 임정의 광복군이 창설 중일 때 후원회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광복군을 후원한다는 원칙을 가졌으나 이왕이면 이미 조직된 의용군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836)

조선의용대후원회는 스스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한 임시적인 기관이며 기존의 국민회와 전혀 대립적인 조직이 아니라고 강조하였지만, 자체 회관을 마련하고 1940년 1월부터 기관지≪의용보≫를 발간하는 등 항구적인 정치단체로 자리잡아 갔다. 그 결과 의용대후원회는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 북미지역 한인사회의 한 대표로 국민회와 함께 참여하였고, 1942년 10월에는 자체를 해소하고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로 개편,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837)

825) 이 때 선정된 시사위원 7인은 초기엔 한재명·김성락·임병직·김강·김탁·안정수·장세운으로 결정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김성락·임병직이 빠지고 박재형·심행호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원동특파원 선정은 곽림대와 김강이 후보로 선임되었으나 경비부족으로 취소되었다(≪新韓民報≫, 1938년 9월 8일,<제3회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과 1939년 1월 19일,<사업성적서>·4월 13일, 논설<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안에 대하여>참조).
826) 당시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홍선표, 앞의 글(1998) 참조.
827) ≪新韓民報≫, 1939년 9월 14일,<사업성적보고서>·12월 28일,<민21대사기>및 1940년 1월 18일,<민국이십일년도 사업성적서>참조.
828) ≪新韓民報≫, 1939년 12월 28일,<국민회총회 청원서>·<인준장>·<제이세 청년의 장거 내지한재구제회>참조.
829) 조선의용대 창설소식이 미주에 알려진 것은≪新韓民報≫, 1938년 11월 3일,<한구에서 조선의용대 정식성립>이라는 기사에서부터다.
830) ≪新韓民報≫, 1939년 3월 23일,<중앙상무위원회의 중요결의>.
831) ≪의용보≫, 1941년 3월호,<질의문답>.
832) ≪新韓民報≫, 1939년 7월 6일,<의용대후원에 관한 중상결의>·1940년 1월 18일,<민국 21년도 사업성적서>참조.
833) <朝鮮義勇隊後援會成立宣言>,≪朝鮮義勇隊通訊≫제28기(1939. 11). 후원회 회원은 60여 명이었고, 집행위원으로는 위원장은 안석중, 위원 김강·최능익·신두식·정지영·변준호·김혜란·곽림대·최봉윤·선우학원·이창희·최영순·이경선이었다(김혜란,<중일전쟁 이후 재미동포 해방운동의 회고>(2),≪독립≫, 1946년 9월 25일).
834) ≪新韓民報≫, 1939년 10월 12일, 잡보<조선의용대후원회의 나성 왜영사관에 피케팅>. 그런데 김혜란의 위의 글에서는 조선의용대후원회 설립시기를 10월 18일로 보고 있고, 최기영,<조선의용대와 미주 한인사회>(≪한국근현대사연구≫11, 1999)에서는 최능익의<의용대후원회와 과거의 활동>이라는 글을 통해 나성의 조선의용대후원회 설립시기를 1939년 10월 10일로 하여 모두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소식을 가장 가까이서 보도했던≪新韓民報≫의 기사를 따랐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날(1939년 10월 7일) 피케팅 행사는 조선의용대후원회 성립기념식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835) ≪의용보≫, 1941년 1월호,<의용대후원회의 유래>참조.
836) ≪의용보≫, 1940년 3월호,<질의문답>참조.
837) ≪독립≫, 1943년 10월 27일.<의용대 후원회와 과거의 활동>.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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