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Bong-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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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계투가 보여주는 니전투구의 양상과 효과]
관련 기록의 번역.
"소문에 의하면 泉籍人의 무리가 溪洲를 점령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고, 泉人과 奧人 모두 漳人이 무리를 믿고 강폭하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또한 泉人이 溪 북쪽의 埔地를 나누기 전에 奧人을 속여 많은 땅을 취하고 奧人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떨 때는 泉人, 奧人의 땅을 漳人에게 빼앗긴 경우가 적지 않으나 단 그것의 증거를 확인할 길이 없을 뿐입니다."
"산에서 漳·泉人간의 械鬪가 있었는데 泉人이 그들에게 온 원주민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또한 漳人과 싸우면서 阿里史諸番와 奧人, 그리고 그 땅의 토착 원주민들까지 연합하여 漳人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泉人의 땅은 모두 漳人에게 들어갔고 근근이 溪洲만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시작된 지 1년이 지나서나 그쳤고 阿里史諸杜은 (漳人에 패하여 밀려나) 羅東을 개척하여 거기에 살았으며 潘賢文을 우두머리로 삼았습니다".
3년 뒤,
"漳人과 泉人이 다시 싸웠습니다. 漳人의 林標, 黃添, 李觀興 각 壯丁 100명을 이끌고 吳全, 李佑가 길을 인도하여 叭哩沙喃潛이 羅東에서 나온 틈을 타 야습을 감행했습니다. 阿里史의 무리들은 놀라 도주하여 원주민 촌락으로 도망쳐 들어갔으며 羅東은 漳人들 손에 들어갔습니다. 사태가 진정된 후, (漳人에게 밀려) 泉人은 溪洲沿海에서부터 大湖까지 땅을 개간할 수밖에 없었고 奧人은 東勢에서 冬瓜山 一帶를 개간하여 거기에 살았습니다".
"陳씨, 林씨, 李씨, 이 三性 간에 械鬪가 일어났습니다. 羅東과 冬山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林, 李 이 두 성의 사람들은 賭博으로 인해 시비가 일어 陳씨가 사는 거주지에서 당사자들 간에 조정을 시도했으나 林씨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陳씨와 李씨가 연합하여 林씨에 대항했습니다. 그러자 林씨는 林玉堂을 지도자로 뽑았고, 李씨는 李進時을, 陳씨는 陳幸을 지도자로 선출하였습니다. 각 집단은 무리를 모아 서로 대항하였으며 폭도나 무뢰배들도 거기에 참가하게 되어 械鬪의 형세가 크게 커졌습니다. 그 여파가 羅東 일대에만 그치지 않고 蘭陽(噶瑪蘭)의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또 그 영향을 받아 (噶瑪蘭의)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그칠 줄을 모르자, 당시 정부는 부득이 하게 파병을 결심하여 진압에 나섰습니다. 주동자와 械鬪의 핵심인물을 붙잡아 징계했습니다. 후세에 "三字性判"이라 불리는 것은 이 일을 일컫는 것입니다".
즉, 대만의 계투는 대륙의 계투와는 달리, 출신을 구심점으로 하는 집단 간의 충돌뿐만 아니라 원주민(혹은 원주민이 아닌 선주민)까지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승자독식의 구조와 패배한 쪽은 바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을 떠나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즉 계투는 황무지의 개척이 가속시킨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계투는 천주와 장주 출신의 이주민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동치연간에는 계투의 규모가 확대됨과 동시에 출신지역보다는 지역의 유력 가문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정착과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이주민들이 토착세력으로 변하면서 계투 역시 이주민이 아닌 토착세력 간의 갈등과 충돌로 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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