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남 할머니 세 번 죽인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
유희남 할머니 세 번 죽인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
입력 2016-07-12 00:00:49 | 수정 7일전
▲ 10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 빈소에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는 10일 오전 8시23분께 향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뉴시스·여성신문
일
본군‘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가 향년 88세의 나이로 10일 별세했다. 올들어 ‘꽃할머니들’이 우리 곁을 한 명 두 명 떠나면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는 불과 40명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겪지만 ‘꽃할머니들’은 소녀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이루 말 못할 고초를 겪은 이들이라 제수명을 다 못 살았을 것같은 안타까움이 크다.
할머니들의 아픈 삶을 그린 영화 ‘귀향’을 본 359만명의 관객, 정부 재단에 맞서 공식 출범한 정의기억재단에 참여한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은 ‘꽃할머니들’을 보내는 마음이 아프고 저리다. 이들은 군국주의 국가가 저지른 제도적 성폭력에 희생됐고, 결국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언자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은 같은 여성으로서 전시 성폭력 피해 생존자인 이들의 아픔과 회한, 동질감과 유대감을 더욱 진하게 느끼고 있다.
유희남 할머니는 1928년 충남 아산군 선장에서 태어나 15살이 되던 1943년에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60리 넘는 곳으로 도망다니다가 붙잡혀 시모노세키로 끌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성노예’로 고통을 겪었다. 해방 후 보따리 장사 등 온갖 힘든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2012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 입소한 후 여러 활동과 증언을 통해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해왔다.
인권운동가 유희남 할머니는 평소 평화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러면서 당시 위안소 생활이 끔찍했고 불면증과 소화불량, 가슴이 뛰는 심장병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다. 다시는 이러한 아픈 역사가 반복돼선 안 된다는 게 할머니의 바람이었다. 전 세계인에게 이를 알리려면 피해 역사를 반드시 유네스코에 등록해야 한다는 말도 남겼다.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유희남 할머니는 생전에 폐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반인권적이고 반역사적인 책을 써서 할머니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박유하 교수와의 재판에 열정을 가지고 싸웠다”며 “그러다 끝내 폐암으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운명하셨다”고 전했다.
할머니의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다. 12일 발인식 날까지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는 할머니와 마지막 이별을 하려는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런데 장례 기간인 11일 뜻밖에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자신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재일사학자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의 책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박 교수는 이 기자회견에서 “(정 교수의 책은) 의도된 오독”이라며 “나는 국가의 책임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내 책은 ‘성’과 ‘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해 재판 중인 박 교수가 굳이 위안부 피해자의 장례 기간에 기자회견을 열 필요가 있었는지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기자회견이 그렇게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을까. 힘겨운 생을 마감한 할머니의 장례 기간에 맞춰 굳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그런 회견을 열 필요가 있을까.
요즘이야 49제나 100일 탈상으로 끝내지만 예전에는 3년상 의례가 있었다. 물론 친부모에 한한 이야기이긴 해도 상중에 있을 때는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것이 오랜 전통 풍습이다. 그런데 발인도 끝나기 전에, 유희남 할머니가 무덤 속에 가지도 않았는데 위안부 할머니에게 또 다른 아픔을 주는 기자회견을 연 것은 고인을 욕되게 하고, 국민의 정서에도 반하는 일이다.
▲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가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연구자·활동가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 항의하며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할머니는 지난해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 교수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현했다. “박유하 교수는 한국 여성 아닌가요? 폐기처분할 책을 어떻게 삭제판으로 다시 내놓을 생각을 했나요?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지요.” 할머니는 “박 교수가 일본 현지에선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제국의 위안부』가 논리적 근거를 대줬기 때문”이라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책 파는 게 다가 아니잖아….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할머니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박 교수를 지켜봤다면 이런 말을 남겼을 것 같다. “위안부 피해자 상중에 할머니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자회견을 연 당신은 할머니들을 세 번 죽인 사람”이라고….
유희남 할머니 세 번 죽인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
입력 2016-07-12 00:00:49 | 수정 7일전
▲ 10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 빈소에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는 10일 오전 8시23분께 향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뉴시스·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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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군‘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가 향년 88세의 나이로 10일 별세했다. 올들어 ‘꽃할머니들’이 우리 곁을 한 명 두 명 떠나면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는 불과 40명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겪지만 ‘꽃할머니들’은 소녀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이루 말 못할 고초를 겪은 이들이라 제수명을 다 못 살았을 것같은 안타까움이 크다.
할머니들의 아픈 삶을 그린 영화 ‘귀향’을 본 359만명의 관객, 정부 재단에 맞서 공식 출범한 정의기억재단에 참여한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은 ‘꽃할머니들’을 보내는 마음이 아프고 저리다. 이들은 군국주의 국가가 저지른 제도적 성폭력에 희생됐고, 결국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언자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은 같은 여성으로서 전시 성폭력 피해 생존자인 이들의 아픔과 회한, 동질감과 유대감을 더욱 진하게 느끼고 있다.
유희남 할머니는 1928년 충남 아산군 선장에서 태어나 15살이 되던 1943년에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60리 넘는 곳으로 도망다니다가 붙잡혀 시모노세키로 끌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성노예’로 고통을 겪었다. 해방 후 보따리 장사 등 온갖 힘든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2012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 입소한 후 여러 활동과 증언을 통해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해왔다.
인권운동가 유희남 할머니는 평소 평화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러면서 당시 위안소 생활이 끔찍했고 불면증과 소화불량, 가슴이 뛰는 심장병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다. 다시는 이러한 아픈 역사가 반복돼선 안 된다는 게 할머니의 바람이었다. 전 세계인에게 이를 알리려면 피해 역사를 반드시 유네스코에 등록해야 한다는 말도 남겼다.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유희남 할머니는 생전에 폐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반인권적이고 반역사적인 책을 써서 할머니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박유하 교수와의 재판에 열정을 가지고 싸웠다”며 “그러다 끝내 폐암으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운명하셨다”고 전했다.
할머니의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다. 12일 발인식 날까지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는 할머니와 마지막 이별을 하려는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런데 장례 기간인 11일 뜻밖에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자신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재일사학자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의 책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박 교수는 이 기자회견에서 “(정 교수의 책은) 의도된 오독”이라며 “나는 국가의 책임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내 책은 ‘성’과 ‘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해 재판 중인 박 교수가 굳이 위안부 피해자의 장례 기간에 기자회견을 열 필요가 있었는지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기자회견이 그렇게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을까. 힘겨운 생을 마감한 할머니의 장례 기간에 맞춰 굳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그런 회견을 열 필요가 있을까.
요즘이야 49제나 100일 탈상으로 끝내지만 예전에는 3년상 의례가 있었다. 물론 친부모에 한한 이야기이긴 해도 상중에 있을 때는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것이 오랜 전통 풍습이다. 그런데 발인도 끝나기 전에, 유희남 할머니가 무덤 속에 가지도 않았는데 위안부 할머니에게 또 다른 아픔을 주는 기자회견을 연 것은 고인을 욕되게 하고, 국민의 정서에도 반하는 일이다.
▲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가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연구자·활동가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 항의하며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할머니는 지난해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 교수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현했다. “박유하 교수는 한국 여성 아닌가요? 폐기처분할 책을 어떻게 삭제판으로 다시 내놓을 생각을 했나요?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지요.” 할머니는 “박 교수가 일본 현지에선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제국의 위안부』가 논리적 근거를 대줬기 때문”이라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책 파는 게 다가 아니잖아….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할머니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박 교수를 지켜봤다면 이런 말을 남겼을 것 같다. “위안부 피해자 상중에 할머니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자회견을 연 당신은 할머니들을 세 번 죽인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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