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1

경계인의 사색 - 재독 철학자 송두율의 분단시대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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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의 사색 - 재독 철학자 송두율의 분단시대 세상읽기
송두율 (지은이) | 한겨레출판 | 200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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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친북인사로 분류되어 1967년 독일로 출국한 이래 계속 한국 입국을 거부당하고 있는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2002년 책. 분단시대 한반도의 현실과 전망을 숙고한 글들을 모았다(1부에 실린 글들은 문학잡지 '내일을 여는 작가'에 실렸던 것들이다). 그는 2002년 10월에도 또 한차례 입국을 거부당했다.

저자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한반도가 통일을 향한 희망을 가지는 길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신실히 이행해나가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만이, 흡수나 지배가 아니라 '타자'를 인정하는 방식으로의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2, 3부에서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조명과 전망, 북한 개혁개방 정책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관을 분석하고, 4부에서는 또 하나의 경계인 동서양의 문제를 짚어본다. 5부는 2001년 신문지면을 통해 벌어졌던 송두율 교수와 보수세력의 논쟁을 송두율 교수의 입장에서 정리한 글과, 5개 신문칼럼을 함께 실었다.

책머리에

1부 동/서/남/북의 만화경
베를린에서 바라보는 세상 - 잘못된 추론들
일본과 미국을 다시 생각한다
반동, 보수주의 그리고 정치의 미학
인간의 길
헤어짐과 만남의 모습들

2부 통일시대를 위한 성찰
6.15 공동선언의 철학적 조명
'통일시대'의 실험과 실천
'통일공학'이냐 '실천'이냐
통일시대의 걸림돌과 디딤돌
분단시대의 민족주의
통일의 피뢰침
'우리'는 누구인가?

3부 또다시 '내재적'으로 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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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조는 이스라엘은 남한이고 팔레스타인은 북한이라는 식의 대비를 전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해법을 풀어가는 데 있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의 테러 분자들이 위협하기 때문에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중동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네타냐후의 지론에 젊은 정치학자도 맞장구쳤다.그러나 오늘처럼 악화 일로를 걷는 사태는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이 빚어낸 것이다. 힘에만 의존하면 상대방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쪽
- dream
유대인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사망한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는 "나는 타자의 인질이다"라는 윤리의 원칙만이 타자가 자신을 제약하는 것으로만 보는 정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해결, 또 이제 막 화해의 장이 펼쳐지는 한반도의 평화정책과 통일도 타자가 나와 관계없는 존재-영.독.불어에서는 이 말을 자주 쓰지만(That's none of my business: Es geht mich nichts an; ll n'est 갸두 pour moi)-가 아니라, 상생(相生)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과 철학이 자리잡지 않고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18쪽
- dream
어릴 때부터 미국이나 일본 지향적인 교육만 받아온 데다 문화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성장한 탓에 제3세계라는 말만 들어도 '야만', '무지', '가난' 같은 표상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국 유학생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서구와 같은 '타자'는 내가 지향하고 동일화할 대상이지만, 제3세계는 그야말로 '악한 야만'이기에 배척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지배의 환영(幻影)'속에서만 그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19쪽
- dream

이명원 (문학평론가)
: 주마간산 책읽기의 묘미

저자 : 송두율
 최근작 : <경계도시 1.2 SE (2disc + 책자48P)>,<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경계인의 사색> … 총 9종 (모두보기)
 소개 :
1967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경제사를 전공했다. 1972년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하버마스의 지도 아래 철학 박사학위를 1982년 윈스터대학에서 사회학 교수자격을 받았다. 1972년부터 뮌스터대학, 베를린자유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미국 롱아일랜드대학,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철학, 사회철학, 사회학을 강의해왔다.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과 교수(현)
초대 독일 반유신단체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의장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

독일어 저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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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의 한 마디
이들에 비하면 나의 처지는 꽤나 복잡하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반세기 넘게 갈라져 사는 조국의 남과 북, '지구촌'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동과 서, 남과 북의 사이에서 상생의 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찾아 긴장 속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2001년 봄에는 보수세력의 집중포화도 맞았다. 경계의 이쪽에도, 경계의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 있는 탓에 경계인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마치 좁은 수평대 위에 서 있는 체조선수처럼 말이다.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넓은 수평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상념들을 그때 그때 기록해 두었는데, 이 기록들을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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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자의 인질이다  새창으로 보기
dream   ㅣ 2007-12-17 ㅣ 공감(0) ㅣ 댓글 (0)

그 기조는 이스라엘은 남한이고 팔레스타인은 북한이라는 식의 대비를 전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해법을 풀어가는 데 있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의 테러 분자들이 위협하기 때문에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중동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네타냐후의 지론에 젊은 정치학자도 맞장구쳤다.그러나 오늘처럼 악화 일로를 걷는 사태는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이 빚어낸 것이다. 힘에만 의존하면 상대방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쪽

유대인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사망한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는 "나는 타자의 인질이다"라는 윤리의 원칙만이 타자가 자신을 제약하는 것으로만 보는 정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해결, 또 이제 막 화해의 장이 펼쳐지는 한반도의 평화정책과 통일도 타자가 나와 관계없는 존재-영.독.불어에서는 이 말을 자주 쓰지만(That's none of my business: Es geht mich nichts an; ll n'est 갸두 pour moi)-가 아니라, 상생(相生)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과 철학이 자리잡지 않고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18쪽

어릴 때부터 미국이나 일본 지향적인 교육만 받아온 데다 문화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성장한 탓에 제3세계라는 말만 들어도 '야만', '무지', '가난' 같은 표상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국 유학생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서구와 같은 '타자'는 내가 지향하고 동일화할 대상이지만, 제3세계는 그야말로 '악한 야만'이기에 배척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지배의 환영(幻影)'속에서만 그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19쪽

북에서는 항상 '남.남 협조'-제3세계만의 상호 협조-를 강조하는 데 비해, 남은 이보다는 선진국 대열에 동참하고 이들 나라와 관계를 개선하는 문제를 경제와 외교,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제일차적 과제로 보고 있다. 가난한 나라와 장사해 보아야 별로 생길 것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지 모르나, 그런 자세로 매사에 임하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나타나는 것 같다. 비근한 예로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당하는 설움과 분노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이해 없이 세계로 나아가 보아야 느는 것은 갈등과 충돌뿐이다.-19쪽

얼마 전 뉴욕에서 강연이 있어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업을 하고 있는 맨해튼 34번가에 들러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식당 앞에서 노조원들이 구호판을 앞세우고 전단을 뿌리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동행했던 사람에게 물으니, 동포 업주들이 라틴계 불법체류자들을 채용한 뒤 최저 임금마저 주지 않고 부려먹기 때문에 노조의 공격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20쪽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의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남북 주민이 어울려 살 때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지금부터라도 '타자'와 공존하는 삶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헤겔이 '타자'를, 이 '타자'가 지니는 '차이'를 '인정(anerkennung)'하는 원칙으로 내세운 '연대적 직접성으로서의 간주관성(間主觀性)'을 떠올리게 된다. 나와 '타자'가 연대하기 위해서 관점의 차이를 바꾸어 볼 수 있는 관용 없이는 '타자'는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20쪽

문화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의 긴장

문화가 "한 민족의 모든 삶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양식의 총체성"이라는 니체의 정의는 분명 문화가 지니는 통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문화 자체의 기능도 분화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인 정황에 따라, 또 여러 문화 간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다원화 되고 있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통용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이 최초로 하나의 종합을 이룬 상태는 이른바 '고대 문명'-이집트, 그리스, 중국 등- 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러한 종합도 산업화와 더불어 새로운 긴장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221쪽

여러 민족성원이 이주해서 함께 살고 있는 미국, 오랫동안 식민지를 지배한 경험 때문에 타민족과의 공존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나 프랑스, 이들에 비해 타민족과의 공존을 경험한 시간이 아주 짧거나 굴절된 독일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만 보아도 문화의 통일성과 다양성이 안고 있는 긴장에서 파생하는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하며, 이에 따라 '문명충돌'까지 야기되는 상황이다. 최근까지도 독일에서는 '주도문화(主導文化, Leitkultur)'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야기되었다. -221쪽

이는 독일에 이주한 외국인 노동자들-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 온-도 독일의 주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리아 출신 정치학자 티비(B. TiBi)의 주장에 보수적인 기민당(CDU)이 적극 호응해서 이를 당의 외국인 정책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데서 파생한 논쟁이었다. 문화의 다양성을 내세우는 '다문화주의'에 대하여 문화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입장은 영미의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민족 이해에서 특히 혈연적.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해 왔고, 한 민족의 가치를 그들의 유일무이한 특성에서 찾는 역사주의적. 낭만주의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는 아직까지도 당연시하고 있다. -222쪽

단일민족임을 항상 강조해 온 우리의 문화 이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문화가 지니는 다양한 속성에 대한 이해에 상당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남아 출신 노동자, 심지어 같은 민족성원이라는 조선족에 대한 비인간적인 태도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222쪽

'타자'에 대한 이러한 무지와 경멸이 '우리 안의 파시즘'의 한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임은 틀림없으나, '타자'라고 하더라도 가령 미국이나 서구 또는 일본은 대부분의 경우 분명히 달리 대접받고 있다. 이들은 멸시해야 할 '타자'가 아니라 무조건 따라 배워야 할 선망의 대상인 '타자'인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무지와 자기 중심적인 문화가 낳은 '우리 안의 파시즘'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비화와 자기 상실을 끝없이 재생산해 온 '우리 안의 사대주의'도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이기는 마찬가지다.
-222쪽

루소(J. J. Rousseau)는 언어의 기원과 관련하여 "인간을 연구하려면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 자체를 연구하려면 시야를 먼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며, 자신과의 '분리(detachment)'가 인류학의 진정한 출발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분리' 속에서 등장하는 '타자'는 구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내 속에 완전히 용해된 것도 아니고, 구별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나와 완전히 격리된 것도 아닌, 상호 연계된 긴장의 구조 속에 있다고 메를로 퐁티(Merleau-Ponty)는 보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같음[同]'은 '다름[異]'이 있어야 드러나고 다름은 같음이 있을 때 드러난다는 원효(元曉)의 <금강삼매경론>의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223쪽

민족문화의 통일성과 다원성 사이에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같음 속에 다름이 있고 다름 속에 같음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 없이는 우리가 종종 보편적이라고 느끼는 문화나 예술-대개 뉴욕이나 파리, 도쿄에서 시작된-을 그대로 재생할 수 있다고 믿거나, 이와는 정반대로 그러한 문화나 예술을 애당초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애써 폄하하려는 태도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223쪽

그러한 긴장을 예술이라는 범주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전달한 사람으로 우리는 먼저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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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인의 사색  새창으로 보기
jmkslyk ㅣ 2004-01-06 ㅣ 공감(0) ㅣ 댓글 (0)
비판이 긍정적이려면 균형감각이 있어야한다.남한이 가진 부정적인 면은 인정하나,그것이 북한에 대한 긍정으로 귀착되는것은 이해할수가 없다.송교수의 북한에대한 시각인 내재적이라는것을 남한에도 적용시킨다면,남한이 받는폄하된 비판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북한은 통일에 혈안이 된자들이고, 남한은 그반대라고,왜 항상우리는그렇게믿어야되는가?권력의 속성상, 북한권력층 또한 통일을 바랄이유가 전혀없다고 생각하는것이 당연한것 아닌가?북한에는 감성이라는 잣대(자기나름으로는 학문적)를 들이대어 그모든것을이해해주려하고,그자신이가진 감상적인 좋고 나쁨을 학문이라는미명하에 정당시하는것을보면 학문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게되나,다행히도 그가가진 남북한관은 자신의 명성을이용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북한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그가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칭한것은 도저히이해할수없다공부를한사람의 식견이라는것이 고작 이정도밖에 안되다니,정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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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선은 둘이 공존할 수 있는 곳이다...  새창으로 보기
달팽이   ㅣ 2002-12-10 ㅣ 공감(3) ㅣ 댓글 (0)
자신만을 고집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타자에게 열린 친절함만이 상호간의 문제를 화해와 협력으로 이끈다. 재독 철학자 송두율교수는 남북간의 통일문제를 미국과 일본의 논리에 따른 남한 지배층의 논리에 반대하며 북한을 바라보는 새로운 입장과 통일의 조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우선 북한 사회를 파악하는 관점으로는 50년대 이후 있어왔던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로는 어떤 설명도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세계화의 관점을 가지고서도 볼 수 없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북한을 개방시켜 시장경제원리에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관심은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체제로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에 의거하여 그는 북한의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한다. 북한 스스로의 발전 방향에 입각하여 북한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나 세계화의 안경으로 북한을 보지 않게 되고 그러할 때 남북한의 교류와 화해협력의 올바른 토대가 형성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의 통일방안도 상대방의 입장과 현실에서 출발해야 합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와 세계화의 논리가 마치 진리인양 무조건적으로 추종했다고 볼 수 있다.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의 절대주의와 사대주의에 비판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유럽 사회와 독일의 예를 통해 우리 나라의 입장정립에 이정표를 제공해주고 나아가서는 여러 이론과 예술분야를 끌어들여 서양적인 이성과 합리성의 관점이 아닌 우리의 동양사상과 민족사상으로 서양의 한계점을 극복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입장이 자신의 목소리만을 고집할 때 맞게 되는 상황은 갈등과 대립일 수밖에 없다. 열려 있지 않은 이상, 서로의 관점이 공존하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통일은 없다.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물아일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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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인을 기다리며...  새창으로 보기
꿈을살면곧현실이다 ㅣ 2003-11-04 ㅣ 공감(0) ㅣ 댓글 (0)
송두율 교수를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막 입학한 때였다. 그의 저서 <역사는 끝났는가.>는 한 번쯤 통독해 볼만한 책이었다. 그 후 몇 년동안 후배들에게 권해주기도 했다. 그가 던진 화두가 무척 신선하고 내게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시끄럽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란은 건강함의 증거라 생각한다. 거물 간첩으로 몰락한 그의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죄와 학문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지...

송두율 교수의 입국이 계속 무산되면서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신간으로 애면글면 위안을 삼았다. 기다린 만큼 필요한 때 그의 글을 접했으면서도 역시 글과 책으로써는 한계가 있어 아쉬웠다. 그 아쉬움은 독자의 미흡한 독해능력 탓도 있겠지만, 송두율의 글쓰기를 제한하는 경계인의 현실이리라.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 <경계인의 사색>은 그의 민족애와 철학의 깊이가 느껴지는 책이다. 비단 남·북 간의 통일문제 뿐 아니라, 디지털시대의 미학과 종교 동양사상 등 그의 폭넓은 지적탐험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가 '독자의 직관적 이해를 도우려'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정하듯 '압축적이고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시 경계인으로서 불립문자의 마음을 전하기란 어려운가보다.

다양한 글들 중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내재적 방법'에 의해 북한의 '개건(改建)'을 평가하는 부분이다.(3부 또 다시 '내재적'으로 본 북한.) 이 부분에서 '엄격한 자기 비판'을 전제로 할 때만 진정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그가 주장했던 내재적 방법에 근거해 북한의 개건을 바라보고 있다.

송두율은 북한이 '평균주의에 따른, 낮은 수준의 국가에 의한 분배보다는 일정 정도 차등화를 유도하는 물질적 자극'을 선택했다고 인정하며,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제 운영의 개선책보다는 '인민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동고동락한다는 일체감'이라고 주장한다.

덧붙여 북한 스스로가 사회주의적 소유형식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점을 들어 중국의 '개혁'과 북한의 개건은 다른 것이라 전제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북한의 개건수준이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로 '천안문사태' 등 중국의 개혁과정에서 드러난 부작용들을 제시함으로써 중국과 북한의 연관성에 대해서 완전한 부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북한 개건 성공의 관건은 '제국주의 련합세력의 포위'라는 '힘든 조건'을 헤쳐나가는 데 있으며 이것이 중국의 사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북한의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개건 성공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건은 남한이며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통일의 물질적 기반을 닦는' 과제임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한발 앞선 것은 그러한 지원이전에 북한이 '어떠한 사회를 꾸리려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앞서 언급했듯이, 글이 갖고 있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 6·15공동선언에서 나타난 '자주'에 대한 논의, 남북 통일방안의 공통성에 대한 그의 내재적 방법이 객관성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검토하였으나, 명확히 결론까지 도달하지 않는 것은 경계인으로서 현실이 제한한 탓이 크다. 그에게 '오컴의 면도날'은 애초에 그 스스로 거부했거나, 아직까지는 부담스러운 도구라 생각된다.

내면의 외침과 외부의 메아리가 다를 때 육신은 그 경계에 서게 된다. 그곳은 서로 다른 주파수의 음파들이 어지럽게 충돌하는 혼란과 부담의 공간이다. 그는 글쓰기와 몸을 지치게 했던 그 경계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만하면 이제 내면의 외침과 외부의 메아리가 공명하는 것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지성계는 '송두율'이라는 공명장치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으로 인해 혜택을 볼 것이다.

송두율 교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는 곳은 경계의 날 위다. 실존의 한계상황이다. 물론 누군가는 무당의 '작두타기'처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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