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왜 피억압자의 말로 피억압자를 공격하나
[기고] 취업사기와 강제연행의 부적절한 대비… 강간과 성매매의 폭력적 등치, 이 책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류한수진·다른세상을향한연대 media@mediatoday.co.kr
2016년 07월 20일 수요일
‘서브알턴은 말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사회 주류적인 사고방식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이야기할 언어조차 없는 피억압자들의 존재를 폭로하는 가야트리 스피박의 이 유명한 질문은 피억압 집단에 대한 기존의 모든 재현들을, 특히 거시적 사회구조에 대한 ‘거대서사’들을 시험대에 올린다. (서브알턴이란 안토니오 그람시가 차별받는 대중을 지칭해 부른 말인데 포스트 식민주의 인도 학자들에 의해 서브알턴 연구라는 용어로 발전했다. 차위나 하위를 의미하는 서브알턴은 서구인들이 모는 아시아인이나 제3세계인들 또는 남성들이 모는 여성들을 의미한다. 편집자주. '퓨전시대의 새로운 문화읽기'에서 인용)
우리가 ‘민중’, ‘인민’, ‘민족’ 등의 단어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들에 여성, 소수민족, 유색인, 성소수자, 아동 등의 소수자 집단들은 들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누구의 삶, 누구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인가? 이 이야기를 누가 썼는가? 이해관계와 입장의 제약에서 벗어난 투명한 주체인가? 서브알턴 자신인가? 아니면 서브알턴을 외부에서 보고 있는 다수자인가? 그는 무엇을 목적으로 이야기를 썼는가? 전인류의 해방의 서사처럼 보이는 것이 기실 다수자의 관심과 이익에 맞게 재구성된 일부만의 이야기는 아닌가? 획일적인 접근과 사고틀을 고수하고 다양한 권력관계와 차이를 간과하는 데서 오는 인식의 공백을 메꾸고 왜곡을 바로잡는 데 이러한 질문은 강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대서사의 해체가 서브알턴의 입장에서 정말로 언제나 해방적인가? 거대서사를 작성하는 사람들의 위치가 투명하지 않다면,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위치는 어떤가? 해체주의자는 언제나 피억압자의 편인가? 모든 거대서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수자들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며, 이에 맞서 ‘개인’의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것이 서브알턴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그렇지 않다면, 서브알턴이 말할 수 있는 가능조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그린 그림 |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 피해자의 경험에 근거해 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서브알턴의 재현과 해석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사례를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를 어떤 식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법적 책임에 관한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특히 증언의 활용에 초점을 맞추어서 분석하고 비판할 것이다. 시간과 지면의 한계상 한일협정 등 종전 이후의 역사에 관한 부분은 생략하고 위안부에 대한 재현을 다루고 있는 1부로 분석의 대상을 한정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별로 지적 고양감을 주는 작업이 아니었다. '제국의 위안부'는 격을 갖춘 학술서로 대우하기에는 현상의 서술에 균형이 없으며 추론의 비약에 서슴이 없고 가치판단과 비난에 절제가 없다. 선행연구를 검토하고 자신이 여기에 무엇을 더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하게 밝혀 적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연구에 존재했던 관점과 담론들을 자신이 처음 제시한 것인 양 찬탈하고 있으며, 사료 하나하나의 맥락과 신뢰성을 신중히 평가하기는커녕 이미 정해진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료의 핵심 맥락을 사상하거나 왜곡하기에 바쁘고 종종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사료들을 핵심적 근거로 가져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담론들이 현실적으로 대중의 인식과 여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슬픈 일들은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만 줄어드는 법이다. 지식인이 서브알턴의 발화를 활용하는 현실적, 구체적 방식들에 대해 대중들 사이에 비판적 사고와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으면 서브알턴은 말해도 말할 수 없는 존재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이 책이 ‘서브알턴의 발화’라는 명분이 서브알턴의 의지를 기꺼워하지 않는 지식인의 손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급기야는 발화자에 반하여 활용될 수 있는지를 그만큼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박유하나 그녀를 지지하는 일부 논자들은 이 책이 불러일으킨 분노를 이견에 대한 불관용이나 오독, 심지어 기득권층의 분노 탓으로 돌리며, 박유하를 국가주의 정서의 무고한 희생자로 대우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이 책은 이미 학술적이고 정제된 비판들을 많이 받았다. 문제는 박유하가 이런 비판들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고 모두 오독이라고 일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사람과 진지한 학술적인 토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박유하 세종대 교수. 사진=ⓒ연합뉴스 |
더구나 이 책의 내용은 성폭력, 국가폭력의 피해생존자이자 증언자들에 대한 명백한 2차 가해를 포함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폭력까지 포괄하지 않는다. 학술 담론을 자처하는 표현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일부 누리꾼들이 박유하에게 퍼부은 인신공격이나 언어폭력은 물론 잘못되었지만, '제국의 위안부'가 사회적 비난과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는 사회적 폭력에 대한 2차 가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취급을 받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서브알턴의 경험과 언어를 찬탈하여 서브알턴 자신의 발화와 투쟁을 부당하고 비합리적이고 거짓된 것으로 매도하는 데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지식인이 지식 권력을 사용해 서브알턴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폭력이다.
마르크스는 비판에 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판의 본질적인 파토스는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인 임무는 탄핵이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비판에 대해서만 타당하다. 통상적 비판은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하여, 서로의 의견을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써 더 나은 인식에 이르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어떤 논변들은 정말로 철저하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을 위해 복무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완전히 부당한 논리 구조를 구축한다. 그것이 공론장에 올라 논의되는 상태 자체가 인간 존엄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분을 놓아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종류의 논변들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정말로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써서는 안 될 글들이 세상에는 있다. 어떤 논변들은 정말로 탄핵되어야만 한다. 나는 지금 탄핵을 위해 글을 쓴다.
1. 부적절한 대비: 취업사기와 강제연행, 업주와 일본군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논지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위안부는 군대에게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업주들에게 속아 취업을 하러 간 것이다’라는 지적이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취직을 시켜준다는 사람이 있으니 일본으로 같이 가자고 하였다. 조선에 있으나 일본에 있으나 고생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조선에서보다 살기가 좋다고 하길래 그 길로 살던 집을 나왔다.” (증언1집 : 62쪽; 박유하 2013 : 24에서 재인용)
하루는 애기를 재워놓고 그 동네 식모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조선인 남자 한 명과 일본인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나이는 젊어 보였다. 그들이 다가와 “광주에서 얼마 받느냐”고 물었다. “월급도 안 받고 밥 먹고 옷이나 얻어 입는다”고 대답했더니, “아이고 조선 사람들, 도둑놈들”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을 따라 일본 오사카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돈에 욕심이 나서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따라나섰다.(증언1집 : 110 ; 박유하 2013 : 24에서 재인용)
이것이 단순히 ‘물리력을 동원한 강제연행’이 다수가 아니었다는 지적에 그친다면, 별로 중요한 쟁점은 아니겠지만 타당한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박유하는 여기서 갑자기 강제성 자체에 대한 논의로 도약한다.
사실, 몇 권의 증언집 속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고 말하는 위안부는 오히려 소수다. 증언자의 대다수가 이런 식의 유혹을 받고 집을 떠났다고 말한다.
물론 ... ‘군’이 직접 업자에게 위안부 모집을 의뢰한 경우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기나 유인까지 해가면서 마구잡이로 끌어오라고 지시했다는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마구잡이로 모집하는 것을 금지한 자료라면 존재한다. (박유하 2013 : 25)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군의 수요를 자신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지배자의 요구에 호응해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다놓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위안부 문제’를 ‘범죄행위’로 규탄하는 이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업자들이야말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로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 당시에는 ‘죄’로 의식되지 않았던 행위와 이미 법적으로 규제되던 ‘범죄’를 구별해서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박유하 2013 : 25-27)
여기서 박유하가 주장하려는 바가 ‘위안부 모집에는 강제가 없었다’는 것인지 ‘강제로 모집이 이루어진 것은 맞지만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었다’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어느 쪽이든 지지할 수 없는 주장임은 마찬가지다.
첫째, 우선 사실관계부터가 의심스럽다. 니시노 루미코(2014a : 55)의 증언 분석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한 연행 방법을 보면 사기·감언에 의한 것이 52명 중 33명이지만 납치와 유사한 것도 11명이나 되며 인신매매도 8건 있었다. 납치에 해당하는 11건 중 8건에서는 군인·경찰이 납치에 가담하였다. 박유하가 인용하는 센다의 책에서도 “농촌에 주재하는 순사들이 ... 군의 어용매춘업자들의 압력기관으로서 칼소리를 내며 따라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센다 가코千田夏光 1973 : 102; 박유하, 2013 : 40에서 재인용)
물론 전면에서 과정을 주도한 것이 업주였을 수는 있으나, 적어도 강제가 없었다거나 군인, 경찰은 개입하지 않은 순전한 조선인 업주 책임이었다는 주장은 수십 명의 피해자들의 증언을 혼란, 과장, 거짓말로 취급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박유하는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결과’라며 사실상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 앞서의 기자나 재일교포 학자, 그리고 요시다에 이르기까지 강조된 강제연행은 우선은 정신대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박유하 2013 : 48)
정신대에서는 대대적인 강제동원이 이루어졌던 반면 위안부의 경우 취업사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추론까지는 타당하다 할 수 있다. 여기서도 문제는 사실이 아니라 박유하가 여기서 끌어내는 매우 무리한 결론이다.
“강제연행이 있었다면, 국가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정책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데려간 일반인이 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박유하 2013 : 48-49.)
정신대가 강제연행을 했다고 해서 정신대가 아닌 위안부는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초보적인 논리의 오류다. 게다가 박유하 자신도 인정하듯이, “위안부들의 증언에는 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박유하 2013 : 46)다. 그렇다면 결국 박유하의 서술만을 모두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강제연행으로 끌려가 위안부가 된 사람들은 있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위안부가 아니라 노동력으로 쓰려고 끌고 갔다가 마음을 바꾸어 위안부로 썼다면 법적 책임이 감해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정신대로 징발되었든 위안부로 징발되었든 끌려간 사람의 입장에서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박유하는 피해의 성격이나 책임소재와는 관련이 없는 ‘정보’를 들고 나와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논리를 꼬아놓음으로써, 엄연히 실재하는 강제연행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화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도 억지로 위안부 일을 하게 되었다’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황을 논의하는 데서는 강제연행과 취업사기를 대비해야 할 이유가 그다지 없다는 것이다. 손목을 잡혀 질질 끌려간 것이 아니라 성노예가 아닌 직장이라고 생각해서 따라나섰다고 해서 여성들에게 모종의 자발성이 생기는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히려 속임에 넘어가 날벼락같은 일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가 아닌가?
무엇보다, 박유하의 주장대로 여성들을 직접 끌고 가 넘긴 이가 모두 업주였다고 하더라도 이 사정을 알면서 여성들을 인수하여 성노예로 삼은 것은 일본군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현실적 강제성’은 업주의 책임이며 일본군은 잘못된 구조를 만들었을 뿐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일본군의 책임을 면해주기 위한 완전한 아전인수다. 이재승(2014)은 당시 형법을 기준으로 보아도 약취와 유괴와 인신매매, 즉 강제연행과 사기·기만은 동일하게 처벌받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법적 책임이 덜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박유하의 주장대로 위안부 모집의 직접 행위자가 전부 조선인 업주였다 하더라도 일본군은 범죄피해자를 인수한 방조범이기 때문에 분명히 법적으로 범죄자이다. 위안부의 대다수가 납치가 아닌 취업사기 피해자였다고 해서 박유하가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군에게 범죄 책임은 없고 ‘수요를 창출한’ 죄만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노예무역 시기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사냥하는 과정에서도 현지 흑인들을 매수하여 앞장세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사냥은 흑인에 의한 범죄이며 백인 노예주들에게는 구조적, 도의적 죄만 있었다’고 말하면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겠는가?
물론 박유하는 “마구잡이로 모집하는 것을 금지한 자료”가 있다며, “강제로 끌어간 군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공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 이재승(2014)은 조선총독부가 명목상으로는 약취유괴를 금지하면서 사실상 직업소개법을 소략하게 만들어 약취유괴가 있어도 단속할 수 없게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문제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입으로는 폭력에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묵인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정도의 겉치장은 지배 기법으로서는 드문 것이 아니다.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국제법정(이하 2000년법정)에서 남북한공동기소단에 참여했던 양현아(2009 : 186)는 “이러한 황당한 취업 사기와 납치, 유괴가 1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수만을 헤아리는 어린 여성들에게 자행될 수 있었던 사회적·정치적 상황도 주목된다. 만약 이러한 사기행각이 순순히 민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가정할지라도, 이러한 대대적인 여성 동원이 행정적,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은폐되고, 조장되고,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의 협조, 명령 내지 공모를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속거나 납치당해 끌려온 피해자들을 인수하여 강간했으며 이 행위를 군에서 관리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군이 납치·유괴·사기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명제와는 어떻게 해도 양립할 수 없다.
요컨대 실제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는 강제연행을 증언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으며 사실 위안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취업사기든 강제연행이든 마찬가지로 ‘강제적’이다. 그리고 위안부에서 벌어진 범죄에서 가장 핵심적인 강제, 추상적인 구조적 강제가 아니라 감금과 강간이라는 아주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강제에서 업주와 일본군은 공범 관계이지, 한 쪽은 범죄자이고 한 쪽은 수동적인 수요자인 것이 아니다.
박유하가 여기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사용하고 있는 방식은 증언 자체의 맥락을 살리기보다는 일본의 법적인 책임을 감면하는 것 이외에는 도무지 의미없는 구분선을 그어놓고 본인의 마음에 드는 증언만 골라 선의 한 쪽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가장 중요한 경험맥락, 즉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종군 및 군인과의 성관계를 강요당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라는 핵심적 피해사실은 박유하가 그어놓은 선을 따라 사정없이 절단나고 만다.
2. 위안부= 가라유키? 강간과 성매매의 폭력적 등치
'제국의 위안부'의 두 번째 주요한 주장은 위안부가 이전부터 존재했던 ‘가라유키’의 후신이며 ‘가라유키’와 마찬가지로 위안부의 경험 역시 매춘인지 강간인지 구분하기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들도 가라유키에게 성을 샀다는 점을 고려하면 책임은 가라유키나 위안부를 이용한 남성들이 아니라 빈곤, 가부장제, 국가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근대 초기부터, 어린 소녀들을 유괴하다시피 데려가 외국으로 팔아넘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 그들은 현해탄을 넘어 한국과 중국 각지에 만들어진 공창 – 국가의 허가를 받은 매춘시설 – 으로 팔려나갔고, 동남아시아와 인도로까지 떠돌았다. ... 그 결과로, 1920년대엔 이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가난한 처녀들이 하녀로 일하거나 매춘시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원래는 ‘해외로 돈 벌로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던 ‘가라유키상’은, 나중에는 바다 건너로 팔려간 여자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또 팔려간 여자들이 유곽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처럼 성을 제공해야 했던 전쟁터의 위안부도 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 그런 의미에서는 훗날의 ‘조선인 위안부’의 전신은 ‘가라유키상’, 즉 일본인 여성들이었다. 그들 역시 가난한 시골처녀들이었고, 감언이설에 속거나 부모의 뜻에 따라 팔려간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인 위안부’ 역시 가부장제와 국가의, ‘가난한 여성’ -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이들이 러일전쟁 때 이미 일본군을 ‘위안’했다는 것은, 일본군이 1930년대에 처음 만든 것처럼 알려진 위안소들이 실은 일찍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시발점에는 일본인 여성들이 있었고, 민간인이 경영하는 시설이 그 중심에 있었다.“(박유하 2013:27-30)
이들은 주로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을 상대했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을 상대하기로 했다. ... 철도 연변에서 유곽을 운영하던 사람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 이렇게 일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에는 근대 초기부터 조선인들도 깊이 관여했다. ... 물론 이런 사실들을 직시하는 일은 불편한 일이지만, ‘위안부’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조선인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의 고통과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점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차별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가 생기게 된 것은 이들의 위치를 조선인 여성들이 대체한 결과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한국의 식민지화와 식민지로 이식된 공창제도가 있었고, 중간매개자들은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존재였다. (박유하 2013 : 32-34)
말하자면 ‘위안부’로서 증언한 이들 중에는 군인이 중심이 된 곳에서 단순히 ‘성적 위안’만 제공한 이들 이외에도 매춘을 겸하는 요릿집 등에서 당시의 표현으로 하자면 ‘작부’나 ‘예기’로 일한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 국가의 영업허가를 받은 매춘시설인 ‘공창’뿐 아니라 허가를 받지 못한 ‘사창’도 존재했다. ... 90년대 이후 ‘위안소’로 알려진 곳들은, 그렇게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곽까지 포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군인들이 그 존재는 파악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이용하지 않았던 사창까지 포함된 것일 수도 있다. ... 말하자면 아시아 각지에 존재했던 매춘시설이 모두 ‘일본군 위안소’였던 것은 아니다. 여러 종류의 ‘공창’이나 ‘사창’이 존재했고, ‘일본군’이 관리하고 공식적으로 병사들이 이용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군이 허가한 ‘공창’뿐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 그렇게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던 여성들을 똑같이 ‘위안부’라고는 말할 수 없다. ... 일반적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가라유키상’ 같은 이중성을 지닌 존재로 보아야 한다. ... ‘현지 처녀들이 공창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모든 위안부가 똑같이 일본군에게 ‘유괴’나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말해준다. (박유하, 2013 : 35-38)
즉, 러일전쟁 시부터 이미 사회 최하층의 빈민이나 속아서 끌려온 여성들이 성매매를 하고 특히 군인을 상대로 ‘위안부’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위안부는 이들의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박유하의 논리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타당한 지적이다. 외견상 자발적인 ‘성매매’와 납치·유괴를 동원한 성노예 범죄의 기저에 같은 권력관계와 사회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난 폭력만을 문제삼을 뿐 비가시화된 폭력을 시야에서 놓치게 될 것이며, 또한 구조적 폭력에 의해 성매매의 길로 나서게 된 여성들의 피해를 드러내고 정의를 회복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이들을 배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라유키= 반쯤은 자발적인 성매매 여성 = 조선인 위안부’라는 도식을 세워놓고 이를 근거로 조선인 위안부에게도 모종의 자발성이 있었던 것처럼 암시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억지 주장이다.
첫째, 박유하 자신의 서술에 따르더라도 ‘가라유키’를 곧 ‘자발적 성판매 여성’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매춘적 강간’이니 ‘강간적 매춘’ 따위의 신조어를 들고 오려면 상황이 강제성을 입증하기 곤란해야 할 텐데, 상술했듯이 취업사기로 여성을 유괴하거나 인신매매범에게 인수하는 행위도(주체가 가족이든 납치한 범죄자이든) 강제적 납치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성관계를 강요하는 행위임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둘째,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라유키와 같은 처지라는 주장에 아무런 타당한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을 하고 있는 문단은 핵심 문장이 온통 근거를 알 수 없는 추정(‘~은 듯하다’, ‘~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일 수도 있다’)으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서 제시된 유일한 구체적인 근거는 ‘허가’를 받아 ‘간판’을 내걸었으며 민간인도 이용했던 위안소에서 생활했다는 증언 사례가 하나(그 많은 피해자 중에 단 하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박유하는 이것을 근거없이 “일반적인 위안부의 대다수”의 경우라고 확장해버린다.
설령 위안부의 많은 수가 군 부속시설이 아니라 공창이나 사창에서 생활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의사에 반해 성노예가 된 사람들이 당한 성적 유린의 성격이나 심각성을 따지는 데서 전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설령 자발적으로 위안부를 자처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자기 의사로 그만두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들 역시 감금, 강간의 피해자다. 캐더린 베리의 정의를 빌려오자면, 성노예는 “여성이나 소녀들이 자신의 존재의 직접적 조건(immediate condition)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모든 상황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 조건에 어떻게 들어갔느냐에 상관없이, 빠져나올 수 없을 때에, 그리고 그들이 성폭력과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에 존재한다.”(Barry, 1979 : 33; 양현아, 2014: 190에서 재인용)
물론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기 발로 찾아와 군인과 성관계를 맺었고 원한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여성 억압과 군국주의, 계급착취의 피해자이며 멸시나 비난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성판매 여성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해서 강간을 성매매로 바꿔치기하는 짓거리를 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동의를 서술에 구겨넣음으로써 피해자의 경험맥락을 왜곡하는 폭거이기 때문이다. ‘강간’도 ‘화간’이 되면 문제가 없다는 성폭력에 대한 끔찍한 사회적 통념에 편승하여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것은 ‘2차 가해’의 일종이기도 하다.
박유하가 ‘성매매와 성노예의 배후에 모두 공통의 구조가 있다’는 말을 하다가 슬쩍 ‘성매매와 성노예는 공통적이다’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글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어느 새 결론이 굉장히 말이 되는 새로운 관점처럼 보인다. 이것은 구조에 대한 논의를 악용할 수 있는 쉬운 방식 중 하나다. 즉 같은 구조 하에서도 분명히 다른 양상의 억압과 피해들이 발생하며, 그 각각은 다른 종류의 책임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동일한 구조로 인한 문제이므로 모두 구조의 책임으로 환원된다는 식으로 논의를 비약시키는 것이다.
박유하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으나, 그 어떤 문명 국가의 법정도 성범죄가 여성 억압적 구조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성범죄자의 가해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똑같이 여성 억압과 군국주의, 자본주의가 낳은 인권침해라 해도 성매매보다는 성노예가 훨씬 직접적인 강제와 폭력을 수반하며, 따라서 도덕적·법적 책임도 당연히 다르다. 박유하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에서 강제성을 사상하려고 그렇게 무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00년법정에서 남북한공동기소단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체계적 강간’과 ‘성노예제 범죄’로 언어화했는데, 당시 기소단으로 참여했던 양현아의 평가처럼 이것은 “자발적 매춘과의 불분명한 경계를 명확히” 해주었다. ‘체계적 강간’이란 목표 집단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정책에 기반을 둔 공격으로, 이러한 경우에는 높은 수준의 폭력과 강요적 상황에서는 피해자의 부동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추정 가능하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동의, 부동의를 문제삼지 않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
이는 위안소에 갇혀서 탈출이 불가능했던 피해생존자들로서는 저항해봐야 의미가 없어 항거불능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따라서 박유하가 말하는 ‘적대국 여성에 대한 강간’과 같은 식의 강간은 위안소에서는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사에 반하는 강요된 성관계였다는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준다.
또한 2000년 법정은 강제매춘이라는 단어가 어떤 정도의 자발성을 시사함으로써 범죄의 중대성을 흐리고 피해생존자에게 낙인을 찍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성노예라는 명칭을 채택했는데, 이는 박유하가 ‘강간적 매춘’ ‘매춘적 강간’이라는 말을 쓰며 애써 무력화하려 하는 자발적 매춘과의 구분을 이미 법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양현아 2014 :177, 192)
3. ‘소녀’는 허상이다? 서사의 해체는 무엇을 남기는가
‘소녀’로서 위안부의 이미지를 논하는 부분은 박유하가 당사자들의 증언을 다루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상론할 가치가 있다. 박유하에 따르면 위안부의 대부분은 성인이었고, 소녀는 소수의 예외사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정작 어린 소녀가 위안소에 되었을 때는 “어떤 군인이 몇 살이냐고 해서 열네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젖이나 더 먹고 오지, 부모형제 보고 싶어서 어떻게 왔느냐’”(《강제2》, 51쪽)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나이가 결코 평균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박유하 2013 : 51)
그러나 다시 니시다 루미코(2014a : 55)의 조사를 보면 총 52명의 증언자 중 45명이 미성년자로서 위안소에 끌려간 것으로 나온다. 위안소의 평균 나이가 몇이었건, 이 증언들을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줄기차게 기존의 서사를 공격하면서도, 박유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부합하는 증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체로 일반화한다. 바로 다음 단락에서 본인도 인정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증언한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박유하 2013 : 51)
그럼에도 이 사실이 우리의 박유하가 ‘소녀’의 이미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박유하 2013 : 51)
이재승(2014)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심적인 일본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소녀’가 아니라 ‘어른’으로 위안부를 표상할 경우, 최소한 성인보다 사회적으로도 약하고 신체적, 정신적 성장이 덜 끝난 미성년자를 표적으로 삼았던 비열함은 가려질 테니까. 다시 말하면 박유하는 일본군에 대한 비난을 감해주기 위해 피해자들이 당한 겹겹의 폭력에서 어떻게든 한 층위라도 지워버리려 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성년자인 상태에서 피해를 당했다는 것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 맥락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므로 굳이 ‘소녀’ 이미지의 대표성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위안부의 현실을 보여주는 데 ‘소녀’보다 더 나은 이미지가 있을 수도 있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들을 활용하는 것이 일괄적으로 ‘소녀’를 내세우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다. 사실 관점에 따라서는 ‘소녀’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순결한 여성’이었음을 호소함으로써 성녀-창녀 이분법에 편승하는 전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가 시도하는 것은 대안적인 이미지를 찾거나 이미지를 다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녀’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뿐이다. 거기에서는 ‘소녀’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정서적인 공감을 희석시킴으로써 문제를 상기시키는 작업을 방해하는 것 이외의 어떤 정치적인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해체한다는 작업 뒤에 숨겨질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억압적인 저의를 보여준다. 하나의 이야기, 특히 대중의 정서에 부합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당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제한하고, 도식에 맞지 않는 경험을 시야 외부로 밀어버리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안에 대한 선명하고 통일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많은 사람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사회적인 지지를 결집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모든 언어는 기본적으로 어떤 목적에 복무하면서 그 목적에 맞지 않는 부분을 부차화하거나 누락시키는 양가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불완전하다. ‘유린당한 소녀’라는 서사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사회에 직관적이고 대중적인 형태로 전달하는 방식이고, 또 그들의 경험에 꽤나 부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한계를 지적하고 끊임없이 극복을 시도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꼬투리삼아 이야기를 해체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것은 서브알턴에게서 목소리를 빼앗으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상처와 치유를 다룬 영화 <귀향>의 한 장면 |
4. 위안부와 일본군은 동지적 관계였나: ‘친밀성’과 ‘폭력성’의 성별주의적 이분법
2장 <풍화되는 기억- 위안소에서>는 당사자의 육성이 가장 많이 사용된 부분이고, 그만큼 책에서 가장 큰 호소력을 발휘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전체 논지와 가장 무관하고, 피해자들의 언어를 가장 많이 왜곡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박유하는 직접적 폭행과 괴롭힘은 주로 업자들이 했고 병사들과 위안부는 오히려 동지적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업자들의 행동이 비난받을 만한 것임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고, 박유하에게는 안됐지만 그 사실이 문제의 핵심인 체계적 강간과 성노예범죄에 관한 일본군의 법적 책임을 조금이라도 감하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록 하겠다. 이 장에서 박유하가 인용하는 증언의 논조는 대체로 아래와 같다.
오랜 주둔생활 기간에 같은 위안부들과 지내다 보면 부인 같은 느낌이 되는지 군인들도 그렇게 허겁지겁 욕망을 채우려 하지만은 않게 됩니다. ... 또 장식품이라고나 할까, 위안부가 없는 주둔부대는 과자를 갖고 있지 않은 아이처럼 폼이 안 난달까,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녀들을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위안부들도 그에 부응해서 휴일에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선물을 가지고 와서 빨래를 해주거나 진지 옆에서 기관총을 손질하는 군인 옆에서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거나 꽃을 꺾거나 하기도 했는데,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노래하니 평화로운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센다 가코千田夏光 1973:65-66; 박유하 2013 : p.56-57에서 재인용.)
간호원도 배운다고 배왔지. 미국 사람이 뭐시가(비행기가) 오는 것 같으면 총도 맞추면 이것 배우고.(증언집 5 : 139; 박유하 2013 : 57에서 재인용.)
전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은 다소 온순하고, 이제 자기는 필요없다고 잔돈 부스러기를 놓아두고 가기도 했다. 전투에 나가면서 무섭다고 우는 군인들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정말 살아서 다시 오면 반가워하고 기뻐했다. 이러는 중에 단골로 오는 군인들도 꽤 되었다. “사랑한다”, “결혼하자”는 말도 들었다. (증언집 5 : .53, 박유하 2013 : 65에서 재인용.)
거기에 내 애인이 있었어. 좋아하는 사람이. ... 그때만 해도 반갑드라고 아주. 허허. “오도록 부탁을 많이 했다, 오라고 부탁을 많이 했다”고 그래. (증언집 5 : 110; 박유하 2013 : 66에서 재인용.)
그 사람들은 뭐 저거 쌍시런 그런 거 취해서 오는 기 아니라 서로 얘기하고 놀고 그럴라고 저그 마음 위로하고 할라고 오지. ... 고향의 처자들 고향의 마누라들 생각나는지 얼마나 그런지 앉아 운당께. (증언집 5 : 36; 박유하 2013 : 69에서 재인용)
내가 울면 저희도 울고 먹던 것도 주고 그랬다. 고주부대 부대장은 나보고 고생한다면서 안쓰러워했고 중외도 내게 잘해주었다. (증언집 2 : 36; 박유하 2013 : 66에서 재인용)
박유하가 인용하는 증언과 사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 위안부는 성관계 이외에 간호나 전투 보조도 했다. 또한 적군의 여성처럼 무작정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온정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때로는 일본군 병사와 연애관계도 있었다. 일본군 병사 중에도 위안부를 동정해서 잘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박유하 자신의 말대로 부대나 상대에 따라 차이가 컸으니 이런 경우도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굳이 없다. 문제는 이 사실 자체가 아니라 박유하가 여기에서 도출하려는 정치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먼저, 박유하는 위안부가 일본군과 적이 아니라 동지적 관계에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내면화하고 긍정했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역할. 말하자면 ‘위안부’에게는 신체적 ‘위안’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까지도 요구되고 있었다. ... 그것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박유하 2013 : 61)
굳이 이렇게 ‘상상’해야 할 이유가 뭔지는 아무리 읽어도 알 수가 없다. 첨예한 폭력과 갈등의 역사 따위는 묻어버리고 화해만을 노래하고 싶은 사람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꼭 일본을 미워하기만 했던 건 아닐 거야’라고 ‘상상’하고 싶을 수 있겠다. 그렇게 ‘상상’하면서 자기만족을 얻는 것이야 당신들의 자유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열하고 뻔뻔한 일인지는 직시하고서 상상하시고, 제발 피해자들에게 그 ‘상상’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지는 마시길.
제국주의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을, 군인들의 간호와 빨래를 해주고 살아돌아오라고 빌어줬다고 해서 졸지에 긍지 있는 제국의 부역자로 만들다니 자기중심성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일부 위안부 여성이 군인에게 돌봄노동을 해준 것은 얼굴을 알고 같이 시간 보낸 사람에게 정이 붙은 결과일 수도, 인간적 연민의 표현일 수도, 군인들에게 밉보여서는 살기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택한 생존을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수없이 많은 가능한 추측들 중에 어떤 것이 제일 현실에 근접할지 나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국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긍지’가 가장 무리한 추측에 속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제국의 위안부 |
이 책에 제시된 증언 중에서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유일한 예는 ‘멋지게 죽어달라’는 한 위안부 여성의 발언인데, 이 여성은 일본인이었던 데다가 심지어 그 증언의 출처는 그 여성 자신이 아니라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인 병사이다. 이것을 ‘조선인 위안부의 기억’이랍시고 갖다대는 것은 그야말로 해석자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박유하는 증언에 대한 해석을 빙자해 원래 증언의 맥락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기의 주장을 증언에 억지로 덧씌우고 있다.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박유하 2013 : 63)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의 관계를 ‘사랑과 평화’로 묘사하다니, 헤아리기도 힘든 아전인수 가운데서도 그야말로 절정이 아닌가!
온정이 있다고 사랑이 아니고, 가시적 폭력이 없다고 평화가 아니다. 납치·유괴된 여성들을 날마다 돌아가며 강간하던 병사들 일부가 여성들에게 동정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들 간의 관계가 모종의 동료 관계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감금된 여성들이 항거를 포기해서 물리적 강제가 덜 필요해졌다고 해서 그 짓거리가 강간이 아니게 되지도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친밀감이 있는 것은 모순이다’라는 사회적 통념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합적으로 발화하지 못하고 상처받은 피해자와 화목한 파트너의 이분법에 맞게 자신을 잘라내고 재단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억압의 기제이기 때문에(이 이분법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 여성들은 ‘물리적 강제가 없었는데 강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 ‘성폭력이 있었는데 가해자와 그렇게 친밀하게 굴 수 있었느냐’, ‘정말로 상처를 입었다면 왜 가해자를 떠나지 않았느냐’ 같은 의심들에 시달리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상론할 필요가 있다.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폭력 관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친밀감을 보이는 경우는 자주 있으며, 그 이유는 극히 이해할 만하다. 같은 공간에서 살을 맞대고 같이 생활하는 인간이 한결같은 증오와 적대로 일관하기란 어떤 원수관계라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성폭력, 가정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양상이 아주 보편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그러한 친밀감을 허위의식이나 병리적 심리로 단정짓는 것은 맞지 않으며, ‘가해를 단죄한다’는 목적에 맞게 피해자의 경험맥락을 가위질하는 것은 ‘피해자의 상’에 맞지 않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의심을 부채질하고 ‘수동적으로 고통받기만 하는 피해자’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강화함으로써 피해자의 행위성(agency)을 박탈할 수 있다. 많은 피해 여성의 경험에서 친밀성과 폭력성은 실제로 공존하며 심지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강간이나 폭행을 당했다 하여 가해자에 대한 애착이나 친밀감이 꼭 ‘스톡홀름 신드롬’이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감정은 어떤 상황에서는 심지어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보호의 전략일 수도 있다.
역으로 말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애정과 유대가 존재했다고 해서 상황의 폭력성이나 강제성이 감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러한 애정과 유대 자체가 피해자의 고통과 모욕을 더 깊게 하는 피해 사실의 뗄 수 없는 일부일 수도 있다. 폭력성(다시 한 번 말하건대, 추상적 구조적 폭력성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성)과 친밀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 한 쪽의 진실성이 다른 쪽을 거짓이나 과장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여성에 대한 폭력에서 여성의 경험을 독해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인식이다. 이 인식을 전제하지 않으면, ‘친밀성’을 발굴하는 작업은 ‘폭력성’에 대한 고발을 침묵시키는 작업이 되고 만다.
이것은 일견 폭력의 기준을 혼란스럽고 비일관적으로 만드는 딜레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딜레마는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해 일말의 여지없이 적대적이고 상황에 대해 수동적이기만 해야 한다’는 잘못된 통념의 산물이며, 우리는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날 때 폭력을 보다 적절하게 규정하고 이해할 수 있다. 반성폭력 운동 진영은 ‘동의냐 부동의냐’ ‘친밀감이냐 적대냐’의 이분법을 넘어서 여성이 이 상황에서 자신의 몸의 통합성과 자율성, 행위성을 얼마나 어떻게 유지하고 행사할 수 있었느냐를 중심으로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해왔다.(변혜정, 2004)
위안소 경험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완전히 끔찍해했는지 부분적으로는 적응하고 받아들였는지, 군인들이 항상 적대적이고 폭력적이기만 했는지 아니면 종종 온정적이었는지가 아니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성과 신체에 대한 자율성과 통제권을 얼마나 행사할 수 있었는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온 세계가 경악할 정도의 성적 침해와 훼손이 있었으며 피해자들은 항거 불능에 빠질 만큼 압도적인 강제 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안부 피해의 본질이며,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의 핵심이다. 이것이 위안부 투쟁에 대한 전국적인, 심지어 범세계적인 지지와 연대가 가능했던 이유이다. 이것이 군국주의의 비인간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서 위안부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사실’을 다루겠다는 박유하는 막상 이 부분을 아주 철저하게 비가시화하고 삭제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적, 반복적 강간에 대한 끔찍한 증언들은 위안소를 다루는 장 전체에서 단 한 줄도 인용되지 않는다. 그 결과 박유하가 그려놓는 위안소의 풍경은,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박유하 2013 : 67)다는 식의 추상적인 언명들을 제외하면 꽤나 목가적이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박유하가 그렇게 처리함으로써 사실상 ‘소거’한 증언들을 같이 놓고 보면 이 그림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일요일에는 군인들이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하루에 20명, 30명, 40명 ……, 그걸 누가 다 세는가.(증언1집 : 78; 양현아 2009 : 180에서 재인용)
하루에 열댓 명이서 그렇게 겪는가 봐. 아유, 그런 어리니 무리하게 당했으니까 피가 그냥 이렇게 막 흘러갖고 며칠 아파갖고 오줌도 못 눴어. 막 그냥 울고, 밥도 못 먹겄고, 얼마나 참말로 죽겄던고. (황순이의 증언(증언3집 : 226, 양현아 2009 : p. 181에서 재인용)
배가 아프고 막 어째 몸이 고단하고 밥도 못 먹고 그랬어. 거 육군 병원인가 어딘가 난 몰라, 나를 데리고 가서 진찰을 해보더니, 애기라고, 배를, 이렇게 갈랐어. 이렇게 배를 갈라서 애기를 빼냈나벼, 난 몰러. 내가 가만 생각하면 그놈들이 잘못한 거 같아. 애기라고 피 긁어내고 배 째고.(김복동의 증언증언4집; 양현아 2009 : p. 181에서 재인용))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위안소는 군인들이 여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연애를 하라고 만들어놓은 장소가 아니라 하루 수십 명씩 돌아가며 여성을 강간하라고 만들어놓은 장소였다. 그러나 박유하는 이런 사실 앞에서 ‘이게 다가 아니야’라는 한 마디로 ‘다양성’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면서 본인도 ‘부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측면에만 돋보기를 들이댄다. 과연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어느 쪽인가?
“운동회 이후 일주일 동안”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빵따먹기 경주에서 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말했다”는 ‘위안부’들의 순수한 기쁨의 기억을 외부자들이 소거할 권리는 없다. (박유하 2013 : 2)
박유하는 이런 소소한 즐거움의 기억들이 그간 한국 사회에서 침묵당하고 은폐당해 왔다며, 이것이 “그녀의 기억들이 ‘피해자로서의 조선’에 균열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는 무의식적 양해사항” (박유하 2013 : 68)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리고 이것들을 ‘피해의 기억’과 대비되는 ‘화해의 기억’으로 내세운다. 마치 이런 기억이 그네들의 피해자성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처럼, 마치 이런 기억이 피해의 경험만큼 널리 회자되고 의미부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처럼. 가해자 중심주의도 정도가 있지. 사람을 끌고 가서 성노예로 삼아서는 하루에 수십 명씩 윤간을 했는데, 운동회에서 상품으로 빵 좀 줬다고 그게 사회적으로 널리널리 회자되면 도대체가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인가?
다시 한 번 노예제도에 비유를 해보자면, 흑인 노예와 백인 노예주 사이도 전적으로 적대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특히 유모나 하인 등의 가내 노예는 노예주와 유사 가족적 관계를 형성하고 제법 온정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극소수의 운 좋은 노예들은 심지어 백인 주인 밑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피해자로서의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노예제를 미화하거나 이러한 기억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인종 간의 화해를 도모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박유하가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 까닭은 노예제도와 달리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억압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여전히 은폐되고 있으며, 여전히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주인에게 저항하지 않았거나 적극적으로 충성했다고 노예를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강간 피해 여성은 극렬하게 저항하지 않거나 가해자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면 강간 경험이 연애의 일종으로 취급받는 끔찍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른바 ‘화간’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강간당한 뒤에 가해자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대가를 받았으니 성매매가 된다. 피해자의 순응이, 가해자의 온정이, 강간에서만큼은 아직도 가피해를 흐리고 화해를 설파할 근거가 된다.
물론 이런 인식은 하도 흔해서 진보주의자를 자임하는 사람들도 무의식중에 이런 인식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할 여지가 있으며, 비난하고 화를 내기보다는 토론하고 설득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닌 여성주의의 표상을 활용해서 이따위 설교를 하는 것은 인내하고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떤 페미니즘도 ‘화간’과 ‘성매매’ 신화에 편승하여 강간범의 가해 사실을 희석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설파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페미니즘’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찬탈이고 능욕이다. 진보 운동의 그 어디에도 이런 담론에 내어줄 자리는 없다.
5. ‘화해를 위하여’ - 해석자 박유하의 위치성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박유하는 도대체 왜 이런 무리를 하는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취사선택해 들어”옴으로써 “우리가 폭력적으로 소거시켜온 ”위안부의 모습을 복원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은폐되어온 서브알턴의 대변자’이자, ‘하나의 이야기’로부터 ‘다양한 개인들’을 구출해내려는 탐구자로서 자신을 위치지으며 논의를 이끌어간다. 그는 책 곳곳에서 집요하게 자신이 “정치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는” 주체임을 스스로 어필한다. 그리하여 박유하는, 우선 “‘위안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한다.(박유하, 2013 : 6)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을 때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야만 상황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정보에는 때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20년은 그중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취사 선택해서 들어왔고 그에 바탕해 위안부에 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온 세월이기도 했다. (박유하, 2013 : 6)
박유하는 심지어 기존의 서사가 “표면적인 피해 인식 외의 모든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박유하 213 : 134)고까지 비판한다. 통탄스럽고저! 민족주의가 서브알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침묵을 강요하고 제 욕망에 맞게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자신의 사회운동을 통해서조차 결코 말할 수 없는 실어증 환자로서, 해석하는 주체의 입맛에 맞게 조리되는 철저히 수동적인 텍스트로서 슬프게 거기에 누워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결코 “취사선택” 따위는 하지 않는 “총체적”이고 “복잡한” 진실의 대변자로서 지식인 박유하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강림한다. 그간에 민족주의자와 “진보좌파”들이 “말살”해왔던, 조명되지 않았던 사실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위안부의 “복잡한 구조”를 해명하고 “우리가 폭력적으로 소거시켜온 그녀들의 기억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가능한 한 많은 정보’는 박유하가 자신을 “화해를 지향”하는, “정치적 욕망에서 자유로운”, 전체를 보는 주체로 위치짓기 위해 끌고 오는 핵심적인 논거이다. 즉 단순히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작업은 사태 해결을 위한 순수한 선의인 것이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진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자신이 위안부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그런데 사실 이 ‘정보’의 많은 부분은 심지어 해석이나 추측이다. 순진한 실증주의자라는 명칭조차 박유하에게는 과분하다.)들을 쏟아붓는 것을, 그리고 그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이끌어낸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결론까지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타당하며 어떠한 당파성 없는 보편적인 사유로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포석을 놓는다.
그러나 ‘가능한 한 많은 정보’는 정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가치인가? 지난해 세월호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참사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때,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리기사와 시비가 붙어 폭행이 일어나자 언론은 이를 앞다투어 대서특필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단식을 하면서 국민들의 동정과 분노가 높아지자, 그가 아내와 이혼했고 아이와 따로 살고 있었다거나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다는 등의 ‘정보’가 유포되면서 그가 보상금을 노리고 떼를 쓴다는 보수언론과 우익의 프레임을 뒷받침했다.
여기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대리기사 폭행이나 김영오 씨의 가정사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상세하게 알아내서 유포하는 것은 중립적 작업이며, 이러한 정보들을 접함으로써 생기는 인식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가? 이것은 어쨌거나 ‘더 많은 정보’였으며, ‘선하고 흠결없는 피해자 대 악의 화신인 가해자’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 참사로 인해 돌연히 붕괴되었다’는 대중적인 서사- “하나의 이야기”- 에 ‘균열을 내고’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균열’은 도대체 무엇을 파괴하고, 그래서 누구를 도우며 누구를 해치는 것인가?
혹은 좀더 비근한 예로,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사건의 법적 책임을 논함에 있어 피해자가 평소 외도를 하고 있었다거나 가해자가 성실한 사람이었고 평상시 피해자에게 잘해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정보를 길게 늘어놓음으로써(가해자측의 변호인들은 실제로 이렇게 한다.) ‘결사적 저항을 무릅썼는데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였던 가해자에게 강제로 변을 당한 순결한 피해자’라는 “하나의 이야기”에 “균열을 내는”것은 어떤가? 그러한 정보들이 유도하는 판단은 올바른가? 여기에는 정치적 방향성이 들어있지 않은가?
사실 박유하야말로 누구보다 강한 “정치적 욕망”에서 글을 쓰고 있다. 위안부를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문제”라고 규정하는 것부터가 이미 고도로 정치적인 언술이다. 위안부 피해자들 및 지원자들과 일본 정부 간 이해와 입장의 대립을 ‘분열’이라 부를지 ‘투쟁’이라 부를지, 이것이 ‘극복’되어야 할 문제인지 ‘심판’되어야 할 문제인지는 명백하고 철저하게 정치적인 문제다.
그는 서문에서부터 이를 아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갈등을 조장하는 담론들”을 팔짱 끼고 보고 있을 수 없어, “양국의 이해를 위해, 나아가 동아시아의 상호 신뢰회복을 위해” “우리 안의 분열들, 동아시아의 분열을 극복하기”(박유하 2013 : 8-9) 위해서 책을 썼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즉, 그는 위안부 문제를 무엇보다도 ‘분열’로 규정하고 이것을 ‘해결’함으로써 한일간에 더 이상 이 문제로 마찰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주체이다. 이것은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나 전쟁범죄의 재발 방지보다 한일관계가 빨리 원활해지는 것을 더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지만, 중립적이고 이해관계를 초극해 있는 소망은 결코 아니다.
모든 인간집단이 그렇듯 위안부의 모습 또한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천차만별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와 인식은 그 다양성과 복잡성을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식은 현상에서 한 면을 추출해내는 추상의 과정이고, 추상의 과정은 곧 추상되는 면 이외의 다른 면들을 시야에서 밀어내는 사상의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다.
박유하 자신도 공언과 달리 위안부의 ‘모든 모습’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위안부의 강제성과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중간자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국가에 의한 동원과 감금이라는 질적 차이를 지우고 자발적 성매매와 일본군 성노예의 공통점을 강조하며, 위안소에서 매일같이 일어났던 집단 강간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군인들과의 유대감과 포주의 착취를 채워넣는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떠들어도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완전히 하나마나한 비판이다. 문제는 오히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누가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는가이다. 박유하는 도대체 왜 하필이면 이런 모습을 부각시켜 위안부를 재현하기를 요구하는가? 단순히 박유하가 마주친 자료들이 그런 모습을 많이 나타냈기 때문인가? 그렇다기에는 박유하 자신도 이런 사례는 소수에 불과함을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유하는 왜 하필이면 이 특정한 그림에 보편적 진리(그녀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복잡성” “총체성”)의 왕관을 씌워주고 싶어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피해의 기억”과 대비되는 “화해의 기억”(박유하 2013 : 122)이기 때문이다. 박유하는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 단체들이 ‘일본 사회를 자기들의 뜻대로 개혁하려는 정치적 욕망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 반감을 살 만한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고, ‘일본군에 강제연행되어 강간당한 순결한 소녀’라는 서사가 이 주장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박유하가 이 서사를 해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정대협과 지원단체들(그리고 사실 그들이 지원하고 있는 서브알턴들 본인)의 “정치적” 요구를 무력화하기 위한 일종의 사전작업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단순히 여태 알려지지 않았던 위안부의 새로운 면모들을 탐색해 보고자 쓴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일본의 법적 책임에 대한 명백히 당파적인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위안부에 대한 서사를 수정하고 있다. 즉, 박유하가 새로운 서사를 통해 뒷받침하고자 하는 결론은 “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강간이나 폭력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고 있었으니 ‘국가’가 그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박유하 2013 : 217)는 것 다시 말해 일본은 법적으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식적 사죄와 법적 보상이라는 정대협과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의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요구”일 뿐만 아니라 “근거도 충분치 않”게 된다.(박유하 2013 : 220) 왜냐하면 일본 정부는 적어도 조선에서는 “강제연행”을 한 사실이 없으며, 일본의 법적 배상 책임은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조항으로 완전히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협정 당시에 위안부 문제는 테이블에서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했고, 일본측은 위안소를 운영한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앞으로 일본측의 불법행위사실이 드러난다면 배상하겠다”고 공언했다. 더구나 위안부 문제는 “조직적이고 인도에 반하는 전쟁범죄”이며 “인간을 성적 노예화하는 ‘인간성 파괴행위’라는 중대한 인권침해이므로 조약의 충분한 동의의 본질이며, 근본적 사정변경을 발생”하는 바,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새롭게 발견되었는데 한일협정의 기존 조항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일본 정부만의 일방적인 입장이라고 보아야 한다.(이장희 2001 : 107, 117)
2011년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해결을 위해 정부가 외교적으로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함으로써, 한국 정부가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입장임은 명확해졌다. 물론 정대협을 한국의 담론질서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권력으로 생각하는 박유하는 이것 역시 사정을 제대로 모른 채 지원단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판결이라 비판하고 있다.(박유하 2013 : 238-239)
법적 책임 대신에, 박유하는 일본 정부에 ‘죄’ 즉 도의적, 구조적 책임이 있다는 관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기금”은, 일본 정부의 책임의 층위와 상응하는 매우 의미있는 조치가 된다. 이것이 정부의 공식적 책임 인정이라는 요구와 상충된다는 비판에 대해 박유하는 “전후배상에 관한 조약 때문에 직접적인 국가보상이 불가능했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말 그대로 ‘민간기금의 거죽옷을’ 입혀서, ‘간접보상’을 하려 했던 일본 정부의 궁여지책이었다”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해석으로 반론하고 있다. 비록 피해당사자들과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을 그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한일협정은 일본 정부가 국가 보상을 할 수 없도록 막아버림은 분명하므로, 선의에 찬 일본 정부는 실질적 국가 보상을 하기 위해서 국민기금이라는 형태로 위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2000년 당시 국민기금 부이사장이 “배상의 의미가 아니라 공적개발원조(ODA)와 마찬가지로 인도적 견지에서 일정의 지원협력”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한 등의 사실관계에도 어긋나거니와(니시노 루미코 2014b : 167), 철저히 일본 정부와 국민기금의 노력과 성의만을 확대해석하고 전면화하는 동시에 피해자 본인들의 의사는 오해나 억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깎아내리는 가해자 중심의 시각이다.
사실 상술한 법논리 자체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며, 일본 우파 논객들이나 정부가 그간 표방해온 입장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국의 위안부'를 그토록 논쟁적으로 만든 것은 이 책이 이러한 법적 입장을 피해자의 증언을 근거로, 즉 ‘서브알턴 본인의 이야기’라는 표상을 빌어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브알턴은 말할 수 있는가?’ '제국의 위안부' 논쟁에 부쳐, 이 질문을 몇 번이고 다시 던져야 하는 까닭이다.
6.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 그리고 서브알턴의 자기주체화와 당파성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경험을 획일화하는 거대서사가 이들을 지배하고 있어 다양한 목소리들은 드러나지 못했고 특히 약자들의 목소리는 억압되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거대서사의 허구성을 깨닫고 자기 나름대로의 작은 이야기들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유로워지고 평등해졌다.’
‘큰 이야기를 “해체”하는 작은 이야기들’이라는 프레임은 사실 이런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이야기’를 기반에 깔고 있다. 위안부의 ‘기쁨’이나 위안부와 일본군 사이의 ‘사랑과 연민’을 이야기함으로써 위안부들을 “운동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박유하 2013 : 257) 박유하의 야심찬 기획 역시 이러한 ‘서사’의 한 버전이다.
기실 그 이야기야말로, 아마도 오늘날 존재하는 그 어떤 거대서사보다도 허구적일 것이다. 인식은 본질적으로 취사선택이며, ‘전체적 인식’이란 다른 말로 하면 ‘물자체’를 파악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과제이다. ‘큰 이야기’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며 현실을 포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 ‘작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에 의해 빚어진 삶의 조건들은 사회와 시대를 말하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동원을 위탁받은 업주들을 직접 여성들을 만나서 데려간 주체라는 이유로 동원의 주 책임자로 지목하고, 위안소에서 군인과 위안부 피해자 여성 사이에 종종 존재했던 온정적인 관계를 일반화하여 마치 그들이 기본적으로 동지적 관계였던 것처럼 비약하는 식의 말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거시적 맥락의 사상과 삭제다.
서사가 거시적으로 쓰인다고 해서 서브알턴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인식이다. 언어의 당파성을 좌우하는 것은 서사의 층위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이다. 누구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더 많은 자원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된다. 누구의 목소리가 침묵당하고 배제되는가?
권력에 억눌려 있어 말을 하려면 보복을 감수해야 하는 이들, 자기 자신의 언어와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퍼뜨릴 자원이 없는 이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 체제에 의해 착취당하거나 주변화되어 있기에 자신의 이익과 열망을 표현하는 순간 사회의 질서를 거스르게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된다. 사회는 이들이 남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말과 실천을 조직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순간순간 계속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으며, 그들이 그러기를 멈추고 자신의 머리로 세계를 판단하고 자신의 판단을 말하기 시작하면 현존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때문이다. 한 페미니스트는 “한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하게 된다면 세상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역으로 말해, 세계의 질서가 서브알턴의 희생 위에서만 지탱되는 한 서브알턴은 그 질서를 흔들지 않고서는 말을 할 수 없다. 어떤 세련된 방법론을 가져오든, 선량한 지식인들이 서브알턴의 언어를 통역하는 방식으로 서브알턴이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헛된 기대다.
다시 한 번 마르크스 -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대인적으로 증명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되자마자 대인적으로 증명된다.” 기존의 담론에 균열을 내는 서브알턴의 발화는 그 질서에 균열을 내고 다른 질서를 창조하는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대담한 시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세상을 감히 파악하고 감히 우리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앎과 언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것이 서브알턴의 해방에 있어서 거대 서사만이 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다.
물론 거대서사에 우리의 언어를 가둘 필요는 없다. 인간의 삶은 본시 구조에 대한 몇 가지 도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들이 인간의 삶을 역으로 재단하게 되면 도식에 맞지 않는 경험들은 잘려나가고 만다. 더구나 거대 서사도 실은 하나가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민족’이나 ‘성별’, ‘계급’과 같은 여러 가지 거대서사들이 교차하고 있다. 모든 것을 ‘민족’ ‘성별’ ‘계급’ 등 하나의 요소로만 환원하려고 드는 것은 다른 층위의 억압들을 사상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렇게 되었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기존의 ‘도식’에 자신의 입장을 반영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하나가 아닌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 – 다시 말해 약자와 소수자들이다. 해방을 위한 거대서사가 또다른 억압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위험이 여기에 있다. 숱하게 다양한 ‘작은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정치적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서사 없는 해방의 기획은 불가능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대서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도구들이 그렇듯 위험을 인지하면서 조심스럽게,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거대서사를 거부하는 선택지 자체가 애초에 없다. 사회구조든 담론이든, 세계는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브알턴의 거대서사가 서지 못한 자리는 지배계급, 지배집단의 거대서사가 독점하게 된다. 그 자신 ‘가해자 일본과 싸우는 민족의 투사 위안부’라는 이미지를 해체하고 ‘한일 화해와 동북아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또다른 거대서사를 그 자리에 집어넣고 있는 박유하는 이 사실을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주지만, 사실 박유하 자신이 그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일단 서브알턴의 서사가 해체되고 나면 지배집단의 그 누구든 그 작업은 손쉽게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화해’와 ‘협력’, ‘상호신뢰’! 피지배자의 권리 주장을 ‘사회 갈등’으로 몰아붙이고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마찰 없이 작동하도록 관리하려는 지배자의 욕망을 포장하는 실로 한결같은 수사.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거대 담론. 식민지배의 피해에 항거하는 피해당사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해지는 ‘민족주의 비판’은 조금 더 아름다운 제국주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회의 지배질서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노자(2015)의 지적처럼, 일본 ‘황군’의 명예회복과 전쟁범죄의 축소 은폐는 지금 일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보통국가”화와 공세적인 군사 정책을 더욱 용이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을 것이며 이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상위파트너인 미국의 힘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문제는 서사의 층위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이고, 사회적 권력관계를 바꾸는 투쟁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투쟁의 주체인가? 현존 사회 질서의 문제를 누가 가장 자세하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서브알턴의 열망을 대리하거나 서브알턴을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면서 서브알턴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있는가?
물론 서브알턴 그 자신이다! 더 이상 ‘서브알턴’이 되기를 거부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서브알턴’, 영원한 인류의 미래, 자기해방을 위해 스스로 투쟁하는 인민 대중. 박유하는 ‘투사’의 이미지가 위안부의 다양한 욕망과 경험을 획일화하고 ‘투사답지 않은’ 모습을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사’로서의 피해생존자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피해생존자의 주체성과 긍지의 표현이며, 이에 대한 존경과 연대의 표현이다. 현존 질서에 대한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서들이다.
물론 모든 운동은 잘못될 수도 있고 또다른 억압으로 전화할 수도 있다. 또 설령 완벽하게 올바른 운동이 있다 해도 한 사람의 삶과 정체성이 오로지 운동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으며 만약 그런 환원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폭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서브알턴의 해방에 진지한 관심이 있는 누구도 그러한 위험을 구실삼아 모든 운동을 억압으로 딱지붙이고 해체하려 들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해방의 방식은 자기해방이며, 서브알턴의 자기해방이 무력화되었을 때 아무리 대단한 지식인이 아무리 많은 온정을 베풀어도 이 체제가 강요하는 거대한 억압은 끄덕없이, 공고하게 존속될 뿐이므로.
그것은 우리에게는 악몽이지만, 지배집단에게는 영원한 열망이다.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고 약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주체로서 도덕적 우위도 누리고 해석하고 발언할 수 있는 권력도 계속 독점하고 싶은 지식인에게도 마찬가지고. ‘거대서사의 해체를 통한 미시서사의 해방’이라는 서사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누구의 서사인가’를 먼저 묻지 않으면 그들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거기에 있다.
위안부를 ‘일본 민족 전체’ 대 ‘한국 민족 전체’의 문제로 생각하는 인식이 사회에서 여전히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체계적 강간’과 ‘성노예’ 등의 단어만으로 위안부를 설명하는 데는 조선인 여성을 동원한 위안소 운영이 적군에 대한 공격의 일종이라기보다 일본 군 시스템의 일부였음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허점이 있으므로 이 부분에서도 보완이 필요하다. 범죄 고발에 중점을 둔 언어가 그러한 목적에 맞지 않는 피해자들의 맥락을 사상하게 될 위험도 있다. (양현아 2009 : 199-200)
그러나 이러한 허점들은 민족주의를 버리거나 범죄 고발을 포기하지 않는 한 수정될 수 없는 근본적인 오류라기보다 당면한 목적에 맞게 언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한계이며 앞으로 제국주의 시스템 하에서 식민지인들의 피해에 대한 인식을 세밀화하고 젠더의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를 더 폭넓게 조직해 나가면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위안부 운동이 이미 20년 전부터 전쟁범죄로서 위안부 문제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민족, 국가를 넘어선 연대를 실천해왔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은 네 번째 증언집은 ‘범죄 피해자’라는 호칭에 다 담길 수 없는 개인의 생애를 기록하는 데 노력을 쏟고 있으며 (증언4집 :17)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을 다룬 생애사 연구들도 많이 나오는 등 학계에서도 위안부에 관한 서사를 다양화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손영미 2008, 최현실 2010 등)
박유하가 지적하는 ‘가라유키’를 비롯, 위안소가 아닌 공창이나 사창에서 이루어진 성매매와의 공통성에 천착하여 여기에서 공통으로 침해되었던 권리가 무엇인지 언어화하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 역시 성노예 범죄와 형식상 자발적인 성매매의 차이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져야 한다. ‘순결성’을 호소하지 않고도 피해를 발화하고 대중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더욱 넓혀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업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축소·왜곡하고 그들의 투쟁을 외부세력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폄하하며 가해자들과의 화해를 설교하는 지식인이 끼어들 구석은 한 치도 없다.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투쟁은 지식인들이 책상에 둘러앉아 평화롭게 고담준론을 나눔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피억압 당사자들과 그 연대주체들이 자신들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피해생존자들 자신의 주도 하에, 그들의 발화와 실천을 중심으로, 그들의 경험과 상황에 맞는 권리의 언어들과 요구를 더욱 풍부하게 발달시킴으로써만 – 요컨대 피해생존자들을 계속해서 임파워링(empowering)하는 방식으로만 성공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서브알턴의 발화의 가능조건이자 그것이 복무하는 과정, 이 개념을 둘러싼 모든 고민들이 궁극적으로 갈구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취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기반은 스스로 일어서는 서브알턴의 투쟁이다. 그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아주 큰 이야기와 아주 작은 이야기들을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여기엔 딜레마도 모순도 없다. 정확하고 풍부한 인식을 위해 우리가 가진 다양한 도구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는 고민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택일을 요구하는 질문은 ‘일부의 이야기냐 모든 이야기냐’ ‘큰 이야기냐 작은 이야기들이냐’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의 질서 위에서 말할 것인가, 피억압자들의 투쟁 속에서 말할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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