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일본 지식사회의 퇴락”
[서평]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정영환 지음/ 푸른역사 펴냄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년 07월 09일 토요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일본정부(군)이 법적으로 배상책임을 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한일 외교장관의 위안부 ‘합의’나 일본 우익들의 주장은 일본정부(군)의 도덕적 책임만을 지겠다는 취지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일본정부의 법적 배상책임을 부정했다는 데서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을 다르게 서술했다. 박 교수는 한국과 일본 각 독자상황에 맞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최근 출간한 저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에서 교수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주요 지적 중 ‘일본 정부(군)의 법적책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국의 위안부 한국어판에는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책임은 졌다”며 “그러나 그것은 ‘전쟁후 처리’였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263쪽)고 돼있다. 반면 일본어판에는 “어디까지나 ‘전후 처리’(법적으로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로 여겨져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사죄와 보상’이 ‘식민지 지배후 처리’라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고 돼 있다. 즉 법적책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수정했다.
정 교수는 “양자 모두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보상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지만 일본어판에서는 ”‘만날 때마다 사죄’했으나 애매했다는 의미로 수정돼 전후 일본 역사가 사죄와 보상을 해온 역사로 변화했다”고 지적했다. 제국의 위안부의 독해는 한국어판, 일본어판의 차이까지 분석해야 해서 더 어렵다.
▲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지음/ 뿌리와 이파리 펴냄 |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군의 법적책임을 부정하는 데 주력한다. 일본 정부에게 도덕적 책임만 남았기 때문에 보상금으로 해결하려는 입장이다.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외무장관이 발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에서도 일본군의 위안부 징집에 대해 명확하게 책임지지 않고 “군의 관여” 정도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아베 수상은 지난 1월18일 국회(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군의 관여’에 대해 “위안부 모집에 대해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것을 담당했다”고 해 주요 책임이 업자에게 있는 것처럼 말했다. ‘우연히도’ 박 교수의 논리와 똑같다. 박 교수는 일본군의 책임을 어떻게 부정했을까?
제국의 위안부의 일본군 책임 부정 논리 : 업자주범설
박 교수는 “일본군은 장기간에 걸쳐 병사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발상하고 필요로 했다”고 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발상하고 수요를 만든 책임‘도’ 있다 혹은 수요를 만든 책임‘만’ 있다. 박 교수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일본국에게는 수요를 만든 책임(때로는 묵인한 책임)밖에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하는 배상 요구는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191쪽)는 박 교수의 주장은 아베 수상의 국회 발언과도 맥이 닿아있다.
이에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일본사)는 “군 위안부 제도의 창설, 유지, 운용, 관리의 주체는 군이고, 업자가 이용되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부차적인 역할이며, 만약 업자가 국외이송 목적 약취죄, 유괴죄, 인신매매죄, 국외이송죄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을 막지 않은 군에게 중대한 책임이 발생하게 된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 같은 연구를 박 교수가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일본군의 “좋은 관여”
“군이 위안부 모집과정에서 사기 등의 위법한 행위를 단속하려고 한 것은 군이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소비자 측에 의한 상품 품질의 ‘관리’에 해당한다.…불법적이고 강제적인 모집을 ‘단속한’ 것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한 군의 인지와 권력과 주체성을 나타낸다.”(151~152쪽)
일단, 위안부를 ‘품질 관리해야할 상품’으로 보는 관점이 불편하다. 박 교수는 일본군의 역할이 “업자의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모집을 단속한 것에 있다”고 이해한다. 그나마 인정하고 있던 “일본군이 업자의 불법행위를 묵인한 책임”이라는 주장도 뒤집는다. 어느새 일본군은 위안부 강제연행의 주체가 아니라 위안부 불법 강제연행을 단속한 주제가 됐다.
▲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정영환 지음/ 푸른역사 펴냄 |
국민동원론과 자발적 매춘부론의 공존
‘제국의 위안부’ 제1부 제1장의 결론은 조선인 위안부 모집에서 강제연행은 예외적이며 그것은 국민동원으로 간주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원’, ‘국민총동원’은 공권력에 의한 위안부의 징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 교수는 ‘공권력을 통한 연행’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300만명이 넘는 방대한 인원의 군대가 아시아 전역에 주둔하면서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황에 대처하도록 동원된 것이 위안부다. 그것은 ‘느슨한 국민동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45쪽)이라고 말한다. ‘느슨한 국민동원’은 또 무슨 말일까?
박 교수는 당시 신문에 실린 위안부 모집 광고에 대해 “위안부라는 존재가 공공연히 모집해도 되는 공적 존재였음을 나타내는 것”(32쪽)이라며 “신문에서 공모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위안소’라는 장소가 결코 지금처럼 인식되지는 않았던 것을 나타낸다”(33쪽)고 해석했다. 이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끌려갔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사용된다. 일본군은 강제로 위안부를 연행하진 않았으며 신문에 광고했을 뿐이다. ‘느슨한 국민동원’의 의미다.
박 교수는 “자발적으로 간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표면적인 자발성”이라며 “추업이라 불리는 일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그녀들 의지와는 무관한 사회구조, 그녀들을 그저 가난하거나 식민지에서 태어났거나 가부장제가 강한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립 가능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교육(문화자본)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고 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구조에서 약간의 자발성이 더해져 조선여성들이 일본군 국민동원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제국의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와 ‘국민동원’이라는 모순된 개념을 함께 설명한다.
성노예설 비판은 무엇이 문제인가
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군에 의한 성노예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위안부의 신체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는 의미에서 대부분의 위안부는 노예”였다는 점은 승인했지만 “물리적인 주인은 군대가 아니라 업자였다”(142쪽)고 주장했다. “그녀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직접적인 주체는 업자였다”(143쪽)는 업자주범설에 근거해 ‘군의 성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어 박 교수는 위안부가 노예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위안부=성노예가 ‘감금돼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성을 착취당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 조선인 위안부는 결코 그러한 ‘노예’는 아니다”(143)라고 성노예설을 부정한다. 이같은 주장은 뭐가 문제일까?
성노예는 어떤 방법·수단·목적으로 이동해왔는가가 아니라 본인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정 교수는 “위안부들이 도망이나 외출을 엄격히 제한받았고, 군과 업자가 노동의 과실을 수탈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안부는) 성노예제”라고 지적했다.
미성년자 징집의 경시와 페미니즘 담론의 차용
박 교수는 “자료나 증언으로 볼 때 소녀의 숫자는 소수이고 예외적이었다”(106)며 “소녀 이미지에 집착하는 자들은 매춘에 대한 격렬한 혐오와 차별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소녀이미지에 집착하는 자들’이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평화비 소녀상을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자를 돕는 이들을 말한다.
박 교수는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서도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로 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전체 중에서는 소수였던 것으로 보이는 소녀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라고 비판한다. 소녀이미지에 집착하는 자들이 매춘에 대한 혐오와 차별감정을 가지고 순결주의에 집착하기 때문에 잘못된 소녀 이미지가 유포됐다는 주장이다.
박유하는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에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기록을 근거로 평균연령이 25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부자 도쿄외국어대 교수(역사학)는 “포로가 된 당시(1944년 8월)의 연령과 징집 당시(1942년 8월) 연령을 혼동한 것”이라며 “20명 징집당시 평균연령은 21.15세이며 그중 12명이 국제법상 미성년인 20세 이하였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포로가 됐던 당시 평균연령도 23.15세로 25세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박유하는 피해자 증언으로부터 “소녀 위안부의 존재가 결코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다”(64쪽)도 하지만 증언한 조선인 피해자들 대다수는 징집당시 연령이 20세 이하였으며, 이름을 밝힌 피해자 52명 중 징집당시 연령이 20세 이하였던 사람은 46명에 이른다.
이에 정 교수는 “서울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도 미성년자의 징집이 많았던 사실에 입각해 제작된 것이지 제작자나 지원 단체의 순결주의를 투영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일본의 법적책임과 군의 범죄
▲ 지난 1일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에 대한 출판강연회에 화상으로 참여한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 사진=장슬기 기자 |
정 교수는 “박유하는 결론적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입장”이라고 봤다. 박 교수 주장은 ‘위안부 제도가 법에 반하는 제도였다는 것’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도 인정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박 교수는 위안부 제도를 위법으로 간주하는 법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교수는 “당시 형법에서도 국제이송 목적의 유괴나 인신매매는 범죄였으며 그 책임은 징모를 지시한 군대도 벗어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 ‘리버럴’의 몰락
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사태가 왜 발생했는지에 주목한다. 단순히 박유하 교수 한명이 교묘하게 주장해 혼란을 가져오는 문제를 넘어, 일본의 진보진영으로 불리는 ‘리버럴’ 지식사회의 퇴락으로 본다. 그는 ‘전후 일본’의 긍정을 바라는 리버럴 지식인의 민족주의가 없었다면 제국의위안부 사태도 없었다고 본다.
그동안 소녀상을 비판해온 ‘산케이 신문’ 등 극우 신문뿐 아니라, 중도계 미디어도 “획기적인 합의”(마이니치 신문 사설, 2015년 12월29일자),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귀중한 토대”(아사히 신문 사설, 2015년 12월29일자)라고 소녀상 철거도 포함해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제국의 위안부’가 제시한 화해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성공의 대가는 너무나 크다”며 “피해의 실태를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진정한 기억을 표현한게 아니다, 제국의 위안부야말로 진정한 기억이다, 이렇게 속삭이며 결과적으로 제국의 위안부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는 구실을 일본사회에 부여한 것은 아니었느냐”고 우려한다.
물론 정교수도 공권력에 의한 언론 제재가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보지만 이 문제는 일본 지식인들의 항의성명이 말한 것처럼 검찰에 의한 학문이나 언론의 자유의 침해로 옮겨갈 문제는 아니다.
정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처럼 국가 권력이 특정한 역사관을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여성들의 명예, 즉 개인적 법익이 침해당했다는 호소를 출발점으로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진지하고 솔직한말, 정직하고 순수한 태도, 정의에 대한 순수한 희구, 타자에 대한 동정과 공감, 성실한 반성과 자기 비판-이러한 것들을 많은 지식인이나 언론인들이 야유하고 냉소하는 사이에 퇴락은 가혹해졌다. 내셔널리즘이라든가 ‘규탄이다, 심문이다’라면서 타자의 비판이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이에 퇴락에서 벗어날 기회조차 붙잡지 못했다.”(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바로 서 교수가 말하는 일본 리버럴 퇴락의 종착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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