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논쟁·①] <제국의 위안부>저자 박유하 교수 인터뷰
지난 16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종대학교 박유하 교수와 출판사 '뿌리와이파리'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 교수가 본인의 저서인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가 동지적 관계였으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매춘'으로 매도했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이 소송은 문창극 전 국무총리 지명자의 친일 발언과 맞물려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박 교수를 문 전 총리 지명자와 동일 선상에 놓고 '친일파', '매국노'라고 손가락질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으나, 일각에서는 박 교수의 지적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서로를 설득시키지 못한 채, 양극단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측을 둘러싼 여러 이슈 가운데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꼽힌다. 책 한 권에서 촉발된 이번 논쟁은 다만 학술 논쟁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 외교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프레시안>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금 각 논쟁점을 차분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첫 번째 순서는 현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인터뷰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지난 20년 동안 일부 지원단체의 주도로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흘러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실은 그 옛날의 '강제로 끌려간 소녀'도 지금의 투사도 '위안부'의 전부는 아니다. '위안부'의 그 모든 모습을 보지 않고는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박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조정할 것을 요청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쟁의 문제가 아닌 '제국'의 문제이며, '자본'의 문제라는 것이다. 책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으로,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를 '동지적 관계'로 표현하기를 마다치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그는 최근 누리꾼들로부터 인신공격을 받고 있다는 괴로운 심정을 밝히며, 그러나 오해가 풀릴 때까지 감내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지난 25일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 논쟁이 불거진 이후 박 교수가 심도 있는 인터뷰로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기획 시리즈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건강한 담론 형성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이 소송은 문창극 전 국무총리 지명자의 친일 발언과 맞물려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박 교수를 문 전 총리 지명자와 동일 선상에 놓고 '친일파', '매국노'라고 손가락질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으나, 일각에서는 박 교수의 지적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서로를 설득시키지 못한 채, 양극단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측을 둘러싼 여러 이슈 가운데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꼽힌다. 책 한 권에서 촉발된 이번 논쟁은 다만 학술 논쟁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 외교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프레시안>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금 각 논쟁점을 차분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첫 번째 순서는 현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인터뷰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지난 20년 동안 일부 지원단체의 주도로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흘러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실은 그 옛날의 '강제로 끌려간 소녀'도 지금의 투사도 '위안부'의 전부는 아니다. '위안부'의 그 모든 모습을 보지 않고는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박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조정할 것을 요청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쟁의 문제가 아닌 '제국'의 문제이며, '자본'의 문제라는 것이다. 책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으로,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를 '동지적 관계'로 표현하기를 마다치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그는 최근 누리꾼들로부터 인신공격을 받고 있다는 괴로운 심정을 밝히며, 그러나 오해가 풀릴 때까지 감내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지난 25일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 논쟁이 불거진 이후 박 교수가 심도 있는 인터뷰로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기획 시리즈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건강한 담론 형성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정대협 눈치 보는 한국 정부, '이건 아니다' 싶었다"
프레시안 : 역사학이나 젠더학이 아닌 일본 문학을 전공했다. 위안부 문제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박유하 : 일본에서 오래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생활 끄트머리였던 1991~1992년께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을 하셨다. 저에게 마침 의뢰가 와서 자원봉사로 동시통역을 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할머니들의 호소를 바로 옆에서 들은 입장에서 마음이 아팠다.
저는 1990년대 여성 문제가 민족주의화 되는 걸 경계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본 운동 방향이 '글쎄다' 싶었다. 한국 운동의 중심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있다. 정대협은 1980년대 민주화 투쟁, 이화여대, 기독교, 이 세 가지 접점이 만나서 생긴 조직이다. 저는 그중 무엇과도 인연이 없다. 그래서 정대협 주도의 움직임에 관여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2001년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 인식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일어났다. 일본 헌법, 천황제 반대에 대한 양심적 목소리를 내는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교과서 문제나 그런 문제들을 논의했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올바른 이야기들이 여기(한국)에서 소화되는 문맥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갖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동시적으로 탈민족주의 연구하는 모임이 있었다. 학문적 모임으로는 훌륭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 보고 싶어서 2004년부터 '한일, 연대 21'이라는 모임을 시작했다. 제가 이 모임에서 가장 다루고 싶었던 것은 위안부 문제였다. 일본의 고모리 요이치와 함께 시작했는데 우에노 치즈코 교수에게 참여를 권유한 것도 나였다. 우에노 교수는 한국에도 잘 알려졌듯이 1990년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재일교포 서경식 교수 등과 각각 민족주의적 입장과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사상적 대립을 일으키고 있었다.
와다 하루키 선생과는 2005년 가을 심포지엄을 앞두고 처음 뵈었는데, 한국에서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게 처음이라고 하셨다. 와다 선생은 한국에서도 정말 많은 분들이 알고 있었는데 직접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 이들이 없었다는 얘기여서 충격받았다. 한마디로 원천적으로 거부당했던 것이다. 그 즈음에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나왔고, 와다 선생이 번역을 하고 높이 평가되면서 서서히 비판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봄, 서경식 선생도 함께하던 일본의 연구 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서평회를 열어주어 일본에 간 적이 있다. 우에노 선생, 야마시타 영애 선생 등이 토론자로 나서주었지만 비판자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그 연구모임은 내 책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그때 마침 외국인기자클럽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 여성 기금)' 해산 기념으로 와다 선생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제가 거기에 참석해 10분 정도 발언을 했다. 그때 저는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그 내용이 앞뒤 문맥이 잘린 채로 YTN에 방송돼 비난을 받았다. 학교에도 항의전화가 와서 해명을 해야 했다. 이때 <프레시안>에 발언 전문과 해명글을 실으면서 한 차례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 원문 보기 : "위안부 문제, '일본 때리기'만이 능사인가") (☞ 반박글 보기 : "'화해'는 그녀들의 몫이 아닙니다")
박유하 : 일본에서 오래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생활 끄트머리였던 1991~1992년께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을 하셨다. 저에게 마침 의뢰가 와서 자원봉사로 동시통역을 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할머니들의 호소를 바로 옆에서 들은 입장에서 마음이 아팠다.
저는 1990년대 여성 문제가 민족주의화 되는 걸 경계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본 운동 방향이 '글쎄다' 싶었다. 한국 운동의 중심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있다. 정대협은 1980년대 민주화 투쟁, 이화여대, 기독교, 이 세 가지 접점이 만나서 생긴 조직이다. 저는 그중 무엇과도 인연이 없다. 그래서 정대협 주도의 움직임에 관여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2001년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 인식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일어났다. 일본 헌법, 천황제 반대에 대한 양심적 목소리를 내는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교과서 문제나 그런 문제들을 논의했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올바른 이야기들이 여기(한국)에서 소화되는 문맥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갖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동시적으로 탈민족주의 연구하는 모임이 있었다. 학문적 모임으로는 훌륭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 보고 싶어서 2004년부터 '한일, 연대 21'이라는 모임을 시작했다. 제가 이 모임에서 가장 다루고 싶었던 것은 위안부 문제였다. 일본의 고모리 요이치와 함께 시작했는데 우에노 치즈코 교수에게 참여를 권유한 것도 나였다. 우에노 교수는 한국에도 잘 알려졌듯이 1990년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재일교포 서경식 교수 등과 각각 민족주의적 입장과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사상적 대립을 일으키고 있었다.
와다 하루키 선생과는 2005년 가을 심포지엄을 앞두고 처음 뵈었는데, 한국에서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게 처음이라고 하셨다. 와다 선생은 한국에서도 정말 많은 분들이 알고 있었는데 직접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 이들이 없었다는 얘기여서 충격받았다. 한마디로 원천적으로 거부당했던 것이다. 그 즈음에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나왔고, 와다 선생이 번역을 하고 높이 평가되면서 서서히 비판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봄, 서경식 선생도 함께하던 일본의 연구 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서평회를 열어주어 일본에 간 적이 있다. 우에노 선생, 야마시타 영애 선생 등이 토론자로 나서주었지만 비판자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그 연구모임은 내 책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그때 마침 외국인기자클럽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 여성 기금)' 해산 기념으로 와다 선생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제가 거기에 참석해 10분 정도 발언을 했다. 그때 저는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그 내용이 앞뒤 문맥이 잘린 채로 YTN에 방송돼 비난을 받았다. 학교에도 항의전화가 와서 해명을 해야 했다. 이때 <프레시안>에 발언 전문과 해명글을 실으면서 한 차례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 원문 보기 : "위안부 문제, '일본 때리기'만이 능사인가") (☞ 반박글 보기 : "'화해'는 그녀들의 몫이 아닙니다")
<화해를 위해서>에서 위안부 문제는 한 단원밖에 안 됐고, 이후로도 한 권짜리 책을 쓸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일본어로 <식민 지배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평화비가 나오고 그 다음 해 소녀상이 일본대사관에 세워질 무렵 일본 인터넷 잡지에 연재글을 쓰게 됐다.
저는 1990년대의 일본의 보상 움직임을 높게 평가하는 입장이었는데, 2012년 봄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안을 제안했으나 청와대가 지원단체의 반응에 신경을 쓰느라 거부했다는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해 3월에도 이명박 대통령이 인도적 조치를 하자고 했는데 정대협의 비판을 받으면서 거부됐고, 8월에는 대통령이 독도에 갔다. 그러면서 최근 2년 동안 한일 관계가 아주 힘들어졌다. 이 구조는 다시 한 번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2년 가을부터 새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전쟁 문제 아니라 제국의 문제"
박유하 : 첫째, 위안부 문제는 그동안 '전쟁 문제'로 다뤄졌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를 '제국의 문제'로 초점을 맞췄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부분이다. 제국이 세력을 확장할 때 그 과정에서 많은 국민이 자의든 타의든 이동한다. 장기 주둔하는 군인 같은 일본의 식민자들도 조선에 많이 건너왔다. 말 그대로 식민자들을 통해 경계를 넓혔고, 식민지로 넘어온 남성들이 향수에 젖지 않게 여성이 동원되는 구조였다. 합방 이전에도 많이 일본인이 왔다. 제국의 확장에 동원된 희생당한 피해자로서 개인이라는 문맥을 본 거다.
둘째, 사람들이 제일 불편해하는 대목이다. 한국이 피해자였지만, 분명히 '이동 국민'으로서 제국인의 얼굴을 한 흔적이 많이 보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해방 이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안 좋았다. 우리는 모르는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작년에 제 책과 비슷한 시기에 안병직 교수의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식민 시대 당시 버마가 배경인데 조선인이 버마 노동자들을 부리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구조를 보면서 좋든 싫든 제국의 일원으로서 기억을 잊어도 되는가. 그게 저의 문제의식이다. 그동안 위안부에 한정하지 않고 식민 시대를 총체적으로 보는 작업을 그동안 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제국이라는 단어에는 피해와 가해의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책 표지도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반만 나온다. 그건 (조선인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인이었지만 결코 일본인일 수 없었던 차별 구조를 담은 그림이다.
"'동지적 관계', 일본 입장에서 적의 여자와 우리 여자 구별 위한 표현"
프레시안 : 책 내용으로 넘어가 보자. 소송 제기한 쪽에서도 가장 문제 삼는 게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이다. 본질과 무관하게 몇 개 에피소드를 가지고 일반화했다는 비판도 있고. 일본군과 조선군 위안부가 동지였다는 거에 대해 피해자들이 불편해한다. 섹스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선인 여성과 그걸 향유하는 일본군이 동지가 될 수 있나.
박유하 : 일단 이 얘기부터 드리고 싶다. 제 책에 오류가 있을 순 있다. 그런데 제일 처음 문제를 일으킨 것은 '나눔의 집'에서 책 가처분 신청, 소송 입장을 밝히면서 만든 보도자료 때문이다. 보도자료에 나온 몇 줄의 요약이 대중에 선입견을 갖게 했다. '동지'라는 말이 그 보도자료에서 그런 식으로 해석됐다.
제가 동지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전체 문맥 보면 아시겠지만, 일본군과의 관계가 다른 나라의 위안부와는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입장에서 적이냐 우리 편이냐. 조선인은 다른 위안부들과 달리 표면적으로 일본인이라는 틀을 갖고 있었다. 그런 차이가 간과됐다. 제가 동지라고 한 건 일본 입장에서 적의 여자와 우리 쪽 여자라는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여러 층위의 위안부들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쓴 거라고 이해해주셔야 한다. 마치 일본군과 조선인 여성의 관계를 똑같이 취급한 것처럼 간주해서 더 반발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런 측면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실제 해결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 책은 사실 독자가 분열된 책이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말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말했다. 반절은 일본을 향한 책이다. 책에서도 일본군이 얼마나 한국인 여성을 물건으로 취급했는지 비판했다. 근데 그런 점은 도외시한다. 제가 일본 쪽 자료를 쓴 것도 문제 삼는다. '소설을 쓴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본을 편 들기 위해 썼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제가 굳이 일본 쪽 자료를 쓴 것은 "(일본인에게) 당신네 선배들, 군인들의 자료를 사용해서 쓴 거다"라고 말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프레시안 : 정대협에 의해 박제화된 위안부상에 대해 비판했다. 그런데 독자들은 박유하 교수 역시 위안부 피해 여성 개인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위안부와 일본군을 '동지적 관계'라는 하나의 상으로 일반화시켰다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정대협과 반대 측면에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다는 지적이다.
박유하 : 너무 단락적인 독해다. 위안부란 누군가를 먼저 살펴보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일본 사죄와 보상은 어떤 형태가 좋은지 논하자는 것이다. 동지적 관계는 그런 문맥에서만 썼을 뿐이다. 더 중요한 건 사태를 정확히 알고 일본의 문제를 제대로 비판하자는 설득적인 논리로 일본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읽는 분들도 불편하겠지만, 책을 쓰는 저도 불편했다.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불편함을 끌어안을 필요 있고, 그걸 넘어서야만 우리가 진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제대로 보지 않으니 계속 들끓는 거다. 그리고 단순히 제국의 갈등뿐 아니라 그간 냉전 이후 분열이 만든 갈등, 그 구도를 보려고 했다.
저도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이 책에서 진보 페미니즘의 얼굴을 한 운동을 비판했다. 그동안은 아무도 에고(자아) 비판을 안 했다. 그런데 저에게 "우익에 친화적"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빈곤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강제 연행'이 아니라,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 물어야"
프레시안 : 일본의 책임 문제 관련해 조선인 포주와 업자에 대한 문제 제기도 논란이 되고 있다. 혹자는 '포주, 업자의 재발견'이라고 한다. 조선인 위안부 여성을 끌고 간 게 조선인 업자라 하더라도 결국 그러한 구조를 제공한 일본에 책임이 있는데, 이같은 지적이 이 책에서는 뒤로 밀려나 있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조선인 업자나 포주 얘기를 부각시킴으로써 이런 큰 구조를 해체했다는 비판이다. 문제의식에 비해 서술 방식이 따라오지 못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박유하 : 우선 첫째. 저는 업자 이야기를 이미 <화해를 위해서>에서 했다. 출간 당시 많이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때 그걸 제가 처음 이야기했다고 생각하고, 그전에 이야기 한 사람은 그저 (위안부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번에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업자 문제에 새삼스레 주안점을 둘 필요가 없었다. 저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업자 얘기를 쓴 건 정대협 등 지원단체의 주장이 '법적 책임'의 요구였고, 그와 연결돼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쓴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보면, 철저하게 황국신민이 된 업자가 나온다. 1월 1일 되면 "천황폐하 만수무강하시라"는 내용까지 나온다. 1905년에 태어났으니 완벽하게 식민 일제 시대에 살아서 자신은 일본인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위안부를 언제 데려왔고, 군대 가서 필요한 거 받아오고. 본인은 다른 위안소 가서 자고 오기도 하고 그런 내용이 아주 담담하게 적혀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악한 것도 아니고 유별난 친일주의자도 아니다. 저는 그게 위안부와 같은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일제에 엄청나게 저항한 사람이나 엄청나게 친일한 사람만 기억한다. 저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의 존재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협력자, 종군업자라는 말도 썼는데 위안부들에게 가장 가혹한 상황을 만든 80%를 만든 것은 업자라고 본다. 당시에도 그 사람들은 유괴나 사기가 적발되면 처벌을 받았다. 법적 책임을 이야기할 때 그들을 간과해도 되나, 그게 저의 문제의식이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국가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가.
박유하 : 법적 책임이란, 일본 국회를 통해 법을 만들어서 보상하는 것이다. 그게 과거 20년 동안 안 됐다. 안 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보상이 1965년에 끝났다는 것, 또 하나는 강제 연행을 안 했다는 것이다. 과거 여러 번 국회에 발의됐으나 계속 폐기됐던 건 '강제 연행을 안 했는데, 그게 국가의 죄가 되느냐' 때문이었다. 우린 일본이 책임지기 싫어서라고만 알고 있지 않느냐. 저는 이점을 알리고 싶었다.
책에서도 강조하는 건, 크게는 국가가 국민을 동원했다는 거다. 자발일 수도 있고 강제일 수도 있다. 강제냐 아니냐, 매춘이냐 아니냐는 이 문제를 보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강제가 아니라도 이런 구조를 만들고 (위안소) 수요를 만들었다는 게 중요하다. 관동대지진 피해자들을 포함해서, 구조적으로 대한 식민 지배가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 내지 사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는 그들을 더 설득할 논리를 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965년에 일본이 조선인 일본군에 보상한 것은 중일전쟁에 동원된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식민에 대한 보상은 안 했다. 당시 끌려간 조선인 일본군에 대해선 죽을 때 보상에 대한 법이 있었다. 문제는 위안부 일을 했던 여성을 위한 법이 없었다. 이른바 매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호부, 정신대에게는 그런 보상 체계가 다 있었다. 위안부가 어쩌면 가장 참혹한 일을 했는데 그들에게는 그냥 돈만 줬다. 그녀들을 위한 법이 없었다. '법적 책임지라'고 하고 싶어도 조선인 군인처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도 욕망을 가진 인간… 당사자의 솔직한 얘기 들어야"
박유하 : 일단 '선택적 사과'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미 많은 논란이 있었다. 우에노 치즈코 교수의 경우, 비판하다가 나중엔 긍정했다. 그분 논지는 일본이 기금 설립 당시보다 우경화돼있으니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그냥 보상금을 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물론 천황이 와서 무릎 꿇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입장을 조정을 해야 하는데, 한국 논의에선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무엇을 원하는가가 빠져있다. 그 당시 기금에 반대했던 지원단체 관계자 한 분은 지금 할머니들이 계속 돌아가시는 걸 보면서 '돈이라도 받게 할 걸'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신다. 당사자를 위한다면 그런 생각도 존중되어야 한다.
프레시안 : 와다 하루키 교수 등과 4월 말에 서울에서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 심포지엄을 열었다. 박유하 교수가 그간 펼쳐온 논의의 연장선상으로 보면 되는 것인가.
박유하 : 지난해 책이 출간됐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 없었고,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그리고 한일 관계는 더 나빠졌다. 저는 그러는 사이 '법적 책임 같은 거 모른다. 사죄와 보상만 받으면 된다'고 하시는 할머니들 6~7분을 뵈었다. 그게 옳다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 한국에서 나오는 것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이 묻혔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프레시안 : 할머니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고소한 분들이 반발하는 건 '돈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과가 중요하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자고 '동지적 관계'나 '매춘'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하는 건가, 그런 문제의식인 것 같다.
박유하 : 사실 저는 '할머니들'도 거대한 논의의 테마라고 본다. 할머니를 '투사 소녀'라고 하는데, 그들도 다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다. 그게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상황도 다르다. 가족이 있느냐 없느냐, 자신의 성격이 어떤가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도 다르다. 솔직한 목소리를 우선은 모두 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나눔의 집'이다. 제가 처음 나눔의 집에 갔을 때. 그쪽에서 저에게 서류를 한 장 보여줬다. "우린 '당사자주의'로 간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법적 책임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보상 관련 재판을 받기 위한 서류에 할머니들이 사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나눔의 집과는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러 번 접촉을 한 건데. 최근 한두 달 갑자기 입장이 바뀐 것 같다. 정대협이 하는 법적 모임도 같이 한 것 같다. 한 편으론 법적 책임에 구애받지 않는 할머니 열두 분이 계시다는 기사를 최근 보기도 했다.
"고(故) 배춘희 할머니, 생전에 '나 혼자면 용서할 텐데'라고 말해"
프레시안 : <제국의 위안부> 논쟁이 책 발간된 지 한참 지나서 갑자기 부각된 측면이 있다. 좀 전에 나눔의 집 보도자료가 선입견을 가지도록 조장했다고 했다. 그게 주된 원인이라고 보는 건가.
박유하 : 직접적으론 그렇다. 사실 최근 얼마 전 돌아가신 고(故) 배춘희 할머니와 깊이 교류하면서 경계를 당했다. 그분은 나눔의 집에 계신 다른 할머니들과 좀 달랐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 TV를 보면서 다른 할머니들은 아베를 욕하는데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배춘희 할머니는 '우리가 먼저 (용서)하면 저들도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셨다. 제 페이스북에도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영상들을 올리기도 했다. 배춘희 할머니는 기억력도 좋으시고 할머니들 중에선 엘리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눔의 집에서는 '배춘희 할머니가 연로해서 오락가락한다. 이야기를 믿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했고, 제가 할머니와 만나지 못하게 했다.
프레시안 : 배춘희 할머니와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건가.
박유하 : 우연히 나눔의 집에 찾아갔다가 식사 자리에서 한자리에 앉게 돼 알게 됐다. 같은 자리에 일본인도 있어서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가 '나 혼자 같으면 용서할 텐데',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하시며 주위 눈치를 보셨다. 그래서 대단히 흥미로웠다. 왜 그런 생각 하느냐고 했더니 '내가 불교도라서 그렇다'고 이야기하셨다. 나눔의 집에선 제가 할머니와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쪽에서 굉장히 경계하길래 두어 번 만난 후로 전화 통화를 종종 했다. 저에게 사후 본인의 재산 처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하소연할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그래서 저는 주로 할머니 얘기를 그냥 들어줬다. 그러면서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이다.
프레시안 : 최근 일본 <산케이 신문>에서 배춘희 할머니에 대한 보도가 나갔다. 배춘희 할머니 별세 소식을 타전하면서, 주변인의 언급을 통해 '일본에 호의적인 분이었다'는 식으로 소개했다. 그 주변인이 본인인가.
박유하 : 저도 그 보도는 나중에야 알았다. 아마도 한국의 기사를 인용해서 쓴 것 같던데, 거기서 인용된 이야기는 이미 제가 제3의 목소리 심포지엄에서 한 이야기고, 페이스북에도 올린 이야기다.
"일본 우익이 나를 좋아한다? 결코 나쁜 일 아니다"
프레시안 : 최근 논쟁이 불거지면서 비판 여론이 많다. 대체로 둘로 나뉘는 것 같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극단적인 서술이라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극우적 논리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 극우에 이용될만한 논리라는 것이다. 이번에 박 교수 언급을 인용한 <산케이 신문>도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극우에 이용당할 것이란 우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박유하 : '매춘'이냐, '강제 연행'이냐,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제 결론이다. 그런데 그 문제들을 문제 삼는 것 같다. 실제로 매춘은 위안부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주로 쓴다. 그런데 저는 매춘이라는 단어를 국가에 의한 여성의 착취란 의미로 썼다. 그걸 쓴 문맥을 봐야 하는데, 매춘이라고 하면 무조건 다 위안부 존재를 부정한다고 보고 반응하는 거다. '부정하는 사람들이나 쓰는 매춘이라는 말을 쓴다고?'인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런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처음엔 화류계 사람들이 위안부로 갔다는 내용이 신문에도 실렸다. 그런 차별 의식이 화류계 사람들을 타국에 보낸 거다.
저는 일본어 트위터도 한다. 분위기를 보니, '한반도 유사시에 조선인을 사냥하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이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익적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이야기를 시도했다. 반응은 여러 가지다. 저에게 '죽어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분들은 '감화된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보통 순진한 좌파보다 더 악질'이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우익 같은 사람들이 저를 좋아한다고 치자. 그런데 저는 그게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이 아베 정권을 지탱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이들을 제가 설득할 수 있다면. '매춘이라고 한 게 위안부를 부정하기 위한 게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프레시안 : 강제 연행이 아니었고, 매춘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박유하 교수의 논리가 한국 뉴라이트 계열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있다.
박유하 : 사실 뉴라이트 논리도 하나가 아니다. 안병직 교수는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 연행이고 성노예라고 썼다. 저는 안 교수가 입장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이건 박근혜 정부를 의식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건 좀 아닌데' 싶었다. 서평을 써 달라기에 뉴라이트 계열 잡지였지만 일기 발굴 작업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응했는데, '독해가 틀렸다'고 썼다가 결국 퇴짜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는 그런 잡지 편집자의 행태에 대해 격노를 했다. 이렇게 서로 생각이 다르다. 뉴라이트 비판도 결이 섬세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저는 그들이 취하는 '나는 사실만 말한다. 누군가 내 논리를 이용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에는 비판적이다. 저는 나름대로 문맥에 대해 신경 쓰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저는 '강제 연행 없다'고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와 뉴라이트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제 책을 보지 않은 것이다.
일본 우익도 층이 넓다. 강제 연행을 안 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제 연행을 안 한 것 같지만 그래도 좀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있다. 그걸 여러 입장들을 우리가 전부 부정해버리면, 후자, '좀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도 내치게 된다. 그래서 혐한(嫌韓)으로 이어진 것이다. 1990년대에는 일본 국민이 전반적으로 모금도 참여하고 사죄 의식이 아주 높았던 때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이라면 절대로 기금도 못 할 거다. 혐한 기운이 퍼지면서 이제 일본 여론은 양극단으로 가고 있다. 우익은 우익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근거 정보들을 많은 사람과 공유한다. 그러면서 중간층이 혐한 감정을 교류하면서 그 폭이 좁아진 상황이다.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층이 다시 넓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상황에 대해 누군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제가 책을 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이번 논쟁이 위안부 논쟁에 대한 일본 내 스펙트럼을 다시 넓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보는 건가.
박유하 :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이야기를 공적으로 여러 번 반복적으로 하면 가능하다고 믿는다.
"내가 나눔의 집에 가서 무릎 꿇는다고 끝날 문제 아냐"
프레시안 : 일본 내 혐한을 조장하고, 한일 양국 관계를 꼬이게 만든 원인으로 정대협의 극단적 움직임을 꼽았다. 그럼 앞으로 한일 양국간 위안부 논의의 테이블에서 정대협이 빠져야 한다는 입장인가.
박유하 : 그건 아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는 여러 주체가 난상토론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박유하 :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무시되고 있다. 학자들, 지원단체에서 불러주는 일이 없다. 오히려 일본에서 평가받으니까 그래서 더 비판을 받았다. 애석한 것은, <화해를 위해서>에서부터 이미 제가 문제를 제기한 게 거의 10년이 됐다. <화해를 위해서>에서도 저는 논의의 지평을 바꿔보자고 했다. 이 문제를 알기 위한 정보를 더 모으고 거기에 근거해서 얘기하자는 것이 저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저의 이야기가 완전히 무시됐기 때문에 그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지금 세계적으로 성공한 운동처럼 보이지만 일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은 곧 운동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셈이다.
프레시안 : 문제의식의 시작점은 '화해'인가. 일본과 '화해를 위해서' 지금까지 논쟁을 벌여온 것인가.
박유하 : 아니다. 제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상적인 형태로 관계가 정립되긴 어려울 것이다. 화해에 이르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도 어떤 목표를 두고 끝없이 노력하지 않나. 저는 화해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도, '용서를 하란 말이냐'고 묻는 분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안보, 경제 쪽 전문가들은 '빨리빨리 한일 관계가 좋아져야 한다'고 하는데, 전 그런 식의 경제, 정치 안보주의식 접근에는 반대한다. 평화를 지향하기는 하지만, 보다 좋은 상태를 만드는 것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제국의 위안부>가 곧 일본에서 출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인가?
박유하 : 한두 달 내로 출판될 예정이었는데, 소송 추이도 출판 시기에 영향을 끼칠 것 같다.
프레시안 : 근 10년 가까이 '비주류 담론'을 자처하며 그동안 학자들과 논쟁을 해왔다. 앞서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도 했다. 자신의 입장을 수정 혹은 보완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적 없나.
박유하 : 반론이 들어오면 필요한 부분은 재반론을 할 생각이다. 일본판을 내면서 추가하거나 삭제할 내용은 있지만 지금까지 받은 비판에 영향을 받아서 책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완할 계획은 없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제국의 위안부> 출간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있다. 박유하 교수에게 '2차 피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응이 필요할 것 같다.
박유하 :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분들이 제 책을 제대로 읽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전달자의 문제로 빚어진 일이다. '쟤가 너를 이렇게 말하더라'고 해서 화를 내시는 것이다. 만일 제가 할머니들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다면 설명해드릴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건 제가 나눔의 집에 가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건 올바른 사죄가 아니다. 그런 방식은 누구를 위해서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설명을 할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오해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저 역시 온라인상에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듣고, 그래서 잘 때 가위에 눌린다. 이번 사건으로 깊이 상처받았고, 가장 피해가 컸던 게 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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