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과 NGO
증오와 분노의 반공주의를 넘어선 평화통일운동가, 김상근 목사
-인민군에 살해당한 아버지, 김일성을 죽이고 싶었다-
-철저한 반공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 서다-
북한이 죽도록 싫었고, 김일성은 정말 죽이고 싶었다. 북에 대한 분노를 가득 안고 있었지만, 결국 북을 끌어안는 포용력을 발휘하며 이 시대의 대표적인 평화통일운동가로 한평생을 살아온 김상근 목사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진짜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한, 열정적인 활동가이자 큰 인물이었다.
인민군에 의해 돌아가신 아버지
1939년생인 김상근 목사는 12살 때 한국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군산이 고향인 그는 한국전쟁 기간 중에 아버지를 잃었다. 인민군에게 총살당하셨던 것이다.
"6월 25일 아침 일찍 서울에 사는 큰 매형 댁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때 매형은 중앙정부의 과장이었는데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다음날인 월요일까지만 해도 학교 가서 친구들과 전쟁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다들 피난을 간다고 보따리를 싸더라구요. 저희도 짐을 간단히 싸서 어머니와 5남매가 피난길을 떠났죠.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들과 같이 가지 않으셨어요. 그때만 해도 왜 그런지 몰랐죠."
군산 시내를 떠난 김 목사의 가족들은 마땅한 피난처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친구 분이라는 군산 인근 시골집으로 갔다.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룻밤을 그 집 부엌에서 지내고 아침 일찍 그 집을 나왔다. 이후 일본이 전쟁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방공호를 찾았지만 여기에서도 쫓겨났다. 다행히 어느 한 시골집에서 머무를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김 목사의 어머니는 결단을 내렸다. 군산 시내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며칠 후 매형이라며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한두 시쯤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식구들이 모두 나갔는데, 행방을 몰랐던 김 목사의 아버지도 이 소리를 듣고 대문으로 뛰어나왔다.
그렇게 현관문을 연 순간, 김 목사의 가족들은 매형이 아닌, 인민군의 총부리를 마주했다. 인민군은 김 목사의 아버지를 포박하고 가택 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전 어린 생각에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인민군은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죠."
아버지가 잡혀간 뒤 김 목사 가족들은 집을 버리고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김 목사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혼자 집에서 피신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피난을 나오는 걸로 위장을 하고 아버지가 혼자 집에 계셨던 것 같아요. 우리 집이 군산에서 유일한 3층 집이었는데 3층 천장 위에 있는 다락에 숨어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본인보다는 서울에 있는 큰딸과 사위 걱정을 하셨던 거죠. 그러니까 매형 이름을 듣고 맨발로 뛰어나오신 거구요."
그렇게 또다시 기약 없는 피난 생활이 시작됐다. 그사이 김 목사의 아버지는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있었다. 왜 잡혀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던 김 목사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어머니에게 간청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못 만난다고 하시더라구요. 아버지 계신 곳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지나가는 것 정도는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보위부 건물 맞은편에서 아침부터 서서 계속 기다렸죠. 심문을 받거나 하면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오후에 건물을 지나가시는 걸 봤어요. 그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한데, 그게 제가 살아있는 아버지를 뵌 마지막 순간이 됐습니다."
이후 3년이 지난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으로 접어들면서 곳곳에서 주검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김 목사의 식구들은 혹시나 아버지가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로 아버지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던 중 군산 경찰서에서 인상착의가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 발견됐다는 연락이 왔다.
"월명산 공원에서 시신 8구가 발견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도 뭔가 예감을 하셨는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으셨는데 공원 가기 전에 졸도를 하시더라구요. 어머니를 부축해서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가서 보니까 형무소에 있는 사람 중에 8명을 총살했더라구요. 그런데 이미 너무 부패해서 시신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나무 자리를 구해다가 시신을 말고 그 위에 태극기를 덮고 그 자리에 봉분을 덮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한데, 아버지를 찾고 보니까 분명 총은 가슴에 맞았는데 얼굴이 없는 거예요. 보니까 시신 주위에 회칼이 있더라구요. 이 칼로 얼굴을 난도질을 해놓은 겁니다. 이걸 보고 저는 제가 어른이 되기만 하면 김일성 너를 우리 아버지처럼 죽이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
죠."
김 목사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죽물공장을 운영했다. 대나무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해방 전에 일본이 쇠라는 쇠는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 버려 조선에 있는 사람들은 농기구마저 마련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김 목사의 아버지는 대나무를 휘어 갈고리를 만들었다. 이걸 당시에 '레기'라고 불렀는데, 이 특허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종의 지방 유지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에서 군산 관제서 서장을 맡기기도 했구요. 또 한국독립당 활동도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전쟁이 나서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면 본인은 분명히 잡혔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전쟁의 참화에 눈을 뜨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은 김 목사는 가슴 한편에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담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됐다. 반공주의를 넘어서 일종의 증오심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가세가 기울면서 김 목사는 수학여행이나 졸업앨범 등 별도의 돈이 들어가는 학교 활동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이럴 때마다, 김일성이나 북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 건 김일성 때문이라는 생각이었죠.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그런 분노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던 그는 1980년 5.18을 겪으면서 전쟁의 진짜 모습에 대해 알게 됐다. 김 목사는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나타난 미국의 행태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갖게 됐고, 이는 한국 전쟁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나아갔다.
"전쟁 당시만 해도 미군을 해방자라고 생각했어요. 피난 시절에 미군이 탱크를 몰고 오는 것을 보면서 '아이고 이제 살았다'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미국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던 김 목사는 북한에서 기록한 그들의 근대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북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우리도 사람을 죽였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그 정도로 반공의식이 철저했다는 것이죠. 전쟁을 하고 북진도 했었는데 우리는, 미군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러면서 한국 전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일종의 '사상의 전환'을 겪은 김 목사는 분단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소책자 10권을 펴냈다. 우리가 분단된 이유는 무엇이고, 분단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한 책이었다.
"1982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총무가 됐어요. 제가 속한 기장 교단이 저와 같은 사고의 대전환을 이룩하는 교단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1983년 기독교교회협의회(NCC)에 통일 문제 연구 위원회를 만들었고 기장도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10권의 소책자를 냈는데요. 분단의 이유, 실체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이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상당한 위험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송건호 선생님이 강사로 자주 오셨는데, 그분이 기장 교단이니까 가능한 일이라며 힘을 실어 주셨어요. 그래서 출판까지 하게 됐죠."
김 목사는 한국 전쟁의 역사를 알고 난 뒤에는 기독교 자체에 깃들어 있는 친미문화를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인식을 공유하겠다는 생각에 책을 출간하고 서울 시내에서 목회하는 젊은 목사들과 함께 한국사 공부를 시작했다. 젊은 목사들부터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김일성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교회에 목회 일을 하면서 평화와 통일 운동을 했던 김상근 목사는 평양에도 방문했다. 1997년 북한에 홍수 피해가 생겨 이를 돕기 위한 활동을 벌였고, 이후 1998년 당시 조선기독교도연맹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평양에 발을 디뎠다.
"제가 당시 가기 전에 조건을 걸었어요. 그때는 이미 평화운동에 뛰어들었고 북을 위한 구호 운동을 했는데도 이런 조건을 걸었죠. '나는 북에 가서 김일성 주검에 참배하지 않겠다, 김일성 동상에 가서 머리 숙이지 않겠다'라구요. 만약에 이것이 조건이라면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 해도 좋다고 하더라구요.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그는 북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마음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1994년인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세계 교회가 주최하는 콘퍼런스가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이 콘퍼런스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을 만났던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북한 사람들이 포옹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이놈들이 포옹을 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때만 해도 마음속에 미움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가슴 속에 있는 말을 한 번은 하고 풀어야겠다, 그냥 포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포옹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포옹을 먼저 하는 북한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구요(웃음)."
콘퍼런스 중간 휴식 시간에 김 목사는 북한 대표들을 인근 카페에서 따로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모습은 어땠고,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왜 북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두 털어 놓았다.
"북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누군가의 죄를 대신해서 사죄를 비는 기능이 있는 곳이라구요. 나는 우리가 당신들에게 저지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해달라고 빌 책임이 있는 남쪽의 종교인이고, 당신들은 당신들이, 당신 나라가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사죄를 받아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북에도 교회가 있는 것이라면서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그게 제 마음속에 있는 말이었고, 그렇게 다 해놓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습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품기까지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증오를 가진 '반공주의자'였던 김 목사는 당대의 반공주의자와는 다소 다른 길을 걸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반공주의자였다.
"한국신학대학교가 저의 세계관을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처음에는 다른 학교 공대를 다녔는데 학교를 다니다 보니 이건 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뭘 해야 할까, 도무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는데, 어느 날 '기독교의 기본 원리'라는 책자를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김재준 목사였는데, 이화여대에서 강연하던 걸 묶어서 만든 책자였습니다.
그걸 읽고 눈이 번쩍 뜨였어요. 이렇게 사는 삶도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죠. 그래서 김재준 목사 밑에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국신학대학교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그때는 이 학교가 어느 교단에 속한 학교인지도 잘 몰랐구요. 그저 김재준 목사한테 배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집에서는 김 목사가 대학을 빨리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에 어려운 가정 경제를 일으켜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대에 진학했는데, 갑자기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신학 대학을 가겠다고 한 것이다.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시험을 보기 직전에 집에다가 2학기 등록금을 다 내놓았습니다. 집에서 원하는 것을 못하니까 집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도울 수 있을 때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죠. 공대 입학했을 때 집에서 맞춰준 양복과 구두도 벗어놓고 고등학교 때 입고 다니던 작업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선택했던 한국신학대학교는 생각보다 상당히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학교 분위기가 굉장히 자주적이고 자율적이고 학문적이었습니다. 한국신학대학교를 다니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의식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과의 인연
김 목사는 김대중 대통령 납치 사건 이후 김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1969년 대학생 선거 참관인단 활동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만났지만, 납치사건이 일어난 뒤에 서로 본격적으로 왕래하는 사이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납치 사건 이후 한국에 들어왔을 때 몇몇 목사들과 동교동을 방문했습니다. 박해와 고난을 받는 정치인이자 박정희 독재와 맞서 싸우는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성직자들이 제일 잘하는 것이 기도잖아요? 그래서 저를 비롯한 목사들은 기도로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본격적인 인연이 돼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왕래를 하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김대중 정부 이후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터졌던 대북 송금 특검 때문이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열심히 지지했지만 이후에 대북 송금 특검 문제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어떻게 했는지를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 한 길을 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이 정말 큰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우리 같으면 그 속에 있는 감정을 다 털고 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걸 다 털고 더 큰 것을 위해서 손을 잡고 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을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지만, 김 목사는 여전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2006년의 어느 여름날, 노무현 대통령은 김 목사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다.
"오찬에 가기 전에 청와대에서 저한테 건배사를 준비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자주 만날 것 같지는 않은데 속에 있는 말을 해야겠다 싶어서 A4 용지 종이에 준비해서 청와대로 갔습니다. 그런데 오찬장에 가서 보니까 제가 노무현 대통령 바로 옆자리인 거예요. 종이를 펼쳐놓고 말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준비해온 대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이제 그만 풀고 지냅시다'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겁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많이 감정이 누그러져 있을 때였구요. 그래서 저도 굳이 각을 세울 것까지는 없겠다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의 수석부의장을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했어요. 교회 목사가 자꾸 바깥으로 나가서 다른 일 하다가 도로 교회로 오는 게 목사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상당히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오더라구요. 축하한다고. 그래서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언론에 발령 보도가 되었던 겁니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벌어졌는데 안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수석부의장을 맡게 됐죠."
그가 민주평통에 들어가서 했던 첫 번째 일은 청와대 비서실의 지나친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김 목사는 이렇게 청와대의 통제가 심하면 국민적인 운동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청와대에서 지시나 간섭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청와대의 행정관이 민주평통에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또 하나의 주요한 사업은 민주평통의 지역 운영위원이 단순한 '감투'가 아닌, 평화와 통일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김 목사가 직접 강연을 다녔다.
"민주평통 지역 운영위원들을 보니까 평화 통일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안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자발성을 촉발 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강연을 엄청 많이 다녔어요. 우리가 평화 통일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또 다른 문제는 민주평통이 아직도 지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지역의 자치단체와 협력관계가 생기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지자체 안에 민주평통 사무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없어지고 있는 추세라고 하더라구요(웃음)."
앞장서는 교단을 만들기까지
평화 통일운동에 국가 기구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는 김 목사의 진짜 직업은 성직자다.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활동 중에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총무로 재직했던 8년을 꼽았다.
"가장 뜻 깊었던 일은 기장을 역사의 앞에 서는 교단으로 성격 지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기장 교단은 한국 교회 교단 중에 가장 진보적이고 개방적이고 자유적인 곳입니다. 교단이 이런 성격을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제가 총무가 됐을 때 김재준 목사님이 해외로 민주화 운동의 장을 옮기셨습니다. 김재준 목사한테 총무로 일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적어 편지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김 목사가 저에게 답장을 건넸습니다.
기장은 한국 교회라는 화살의 '촉' 부분에 해당한다면서, '기장은 한국교회라는 화살의 촉이다. 화살은 촉을 따라가는 것이니 이 점을 명심하라'구요. 저는 총무 직책을 수행하면서 이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기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것이 한국 역사에서 일정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보는데, 이게 저에게는 가장 값지고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픈 한국 전쟁을 겪고 북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가득 찼지만, 이를 평화통일운동으로 승화한 김상근 목사. 김 목사는 증오와 분노만으로는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진리를 몸소 실천한 산증인이다.
이재호 (프레시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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