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논란, 화낼 만한 일에는 화내야 한다
- [기고] ‘제국의 위안부 논란, 모두 화가 나 있다’의 반론
첫째, 이 기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학술서'이므로 학술적, 논리적 비판 이외에 분노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되며 소송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부당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를 제대로 된 학술서라고 보기도 어렵지만(선행연구에 대한 검토도, 사료의 신뢰성과 의의에 대한 검증도 없고 '~했다고 보아야 한다' '~했을 듯하다'는 근거 없는 추측으로 점철된 책을 학자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학술서라고 부르는 것은 학문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나는 이것이 '학술'을 사실상 성역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고, 특히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자유를 포함하지 않는다. 학자가 책에 쓴 표현이라고 다를 수는 없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 군인들이 위안부에게 베푼 온정이나 양자 사이에 호의가 존재했던 약간의 경우를 엄청나게 과장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이 군인들의 ‘위안자’였고 여기서 모종의 보람을 느꼈다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이를 ‘피해의 기억’과 대비되는 ‘화해의 기억’이라고 포장하는데,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나 피해자의 경험과 감정에 대해 자의적인 서사를 퍼뜨리는 것이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으니 가해자를 단죄하고 처벌하려는 것을 그만두고 화해하라고 말하는 것은 2차 가해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폭력적인 유형에 해당한다. 하물며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은 그렇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가해를 중단시키고 이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는 것은 피해자의 완전히 정당한 권리이며, 이에 대한 공분과 비난 또한 (인격모독 등 또다른 언어폭력이 아니라면) 당연하고 필요한 반응이다.
둘째, 이 기사는 박유하 비판자들을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사람들로 싸잡아 폄하하는 데다가 이 과정에서 사실에 반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 기사에서 사실상 무비판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김규항의 발언들은 "정상적인 지적 접근이 어려운 상태", "화가 나 있고 흥분해 있다",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더욱 냉철하게 접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 토론할 여건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 “구체적 해결 방식에 대한 논의와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고 토론 자체가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 등 온갖 가지 말로 논의의 참여자들을 비난한다. 한 마디로 '모두 화만 낼 뿐 반론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사도 "박유하 교수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반론은 아직 없다."며 이러한 논평에 동조하고 있다.
사실 분노와 이성을 대립시키는 것 자체부터가 온당치 않다. 사회 문제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들은 많은 경우 그 문제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다. 분노가 곧 비이성을 의미한다면 “비판의 본질적인 파토스는 분노이며 그 본질적인 소임은 탄핵이다”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한 마르크스는 세계에서 가장 비이성적인 사람일 것이다. 박유하나 김규항의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이야말로 “화가 나 있고 흥분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설령 박유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화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틀렸다고 주장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기사는 정대협이 기금 거부를 택한 맥락은 삭제하고 막연한 반일감정 때문에 기금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너무나 편파적인 태도이다. 아시아평화기금은 범죄에 대한 법적 배상이라는 의미를 거부하고, 역사적 반성 대신 단순히 좋은 일을 위해 같이 돈을 모으자는 식의 시혜적 접근을 기저에 깐 기금이기 때문에, 위안부의 범죄성을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함으로써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으려면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금 수령을 거부하는 바람에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의 관계마저 차단"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일본 지형의 우경화를 피해당사자들과 운동의 탓으로 돌리는 피해자 유발론에 가깝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참세상이 노동자 투쟁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사실상 사측의 뜻대로 따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전시강간 피해자의 투쟁이라고 다른 입장을 취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책임을 명백히 하고 원조가 아닌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사회 정의와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그것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이러한 권리를 주장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싫어하게 된다면 이것은 반성을 거부하는 가해자의 잘못이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넷째, 이 기사는 대중을 우매하고 '운동 세력'에 휘둘리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대중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저항의 주체로 교육받아 왔고 그렇지 않은 주체, 다른 층위의 피해자들이 드러나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고 그래서 부정하는 것”, “정대협을 비롯한 운동 세력은 운동을 위해 민족주의의 틀로 그 인식을 이용해 왔다”는 박유하의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함으로써, 기사는 사실상 대중이 화내는 건 뭘 잘 모르고 못 알아들어서고, 정대협과 '운동 세력'은 이런 우매한 대중을 이용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지지한다. 민중을 이렇게 어리석고 무력한 존재로 취급하면서 왜, 그리고 무슨 수로 민중의 편에 서겠다는 것인가?
<제국의 위안부>가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정확하게 요약하면, '일본의 가해 책임을 묻는 것은 그만두고 화해하자'이다. 정의에 대한 피해자들의 요구를 침묵시키고 이루어지는 화해는 부조리에 대한 굴종에 불과하다. 이것은 국제주의도 아니고 보편주의도 아니다. 싸우지 말자는 주장이 다 평화주의인 것이 아니듯(만약 그렇다면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노사관계 선진화'를 외치는 조선일보와 종편이야말로 최고의 평화주의자들일 것이다) 민족이나 국가로 대립하지 말자는 주장이 다 보편주의고 국제주의인 것이 아니다. 국제주의는 (민족적 억압을 비롯하여) 보편적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폭력과 불의에 맞선 세계적인 연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여성 혐오를 비판하는 여성들에게 ‘성적대를 조장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이 양성평등주의가 아니라 남성중심주의인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전쟁 범죄를 비판하는 약소 민족의 민중에게 ‘갈등을 빚지 말라’고 설교하는 것은 국제주의가 아니라 강대국 중심주의다.
- [기고] ‘제국의 위안부 논란, 모두 화가 나 있다’의 반론
제국의 위안부 논란, 화낼 만한 일에는 화내야 한다
[기고] ‘제국의 위안부 논란, 모두 화가 나 있다’의 반론
[편집자 주] 참세상이 함께 만드는 주간 <워커스>의 18호 이슈는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한 논쟁을 다뤘다. 이 논쟁에 뛰어든 것은 다소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 논쟁에 대해 성찰하고 더 발전적이고 건강한 논의의 토대가 마련되길 바랐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을 한 독자가 기고 형태로 보내왔다. 이 기고문을 전재한다. 더불어 이 문제와 관련하여 (형식이 갖추어진) 어떤 글도 환영한다.
참세상의 <제국의 위안부 논란, 모두 화가 나 있다>를 보고 정말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해당 기사가 전체적으로 전혀 진보적이지도 민중적이지도 않은 시각을 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피해생존자들을 외면하는 옳지 못한 화해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보 언론이라는 매체에서 이런 내용을 설파한다면 인간 존엄성을 위해 싸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외롭고 막막해질 것 같다. 무엇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기고를 신청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서 많은 비판들이 나오고 있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만이라도 사람들과 나누어봤으면 한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책에 대해 몇 분만 검색해 봐도 수많은 서평과 논문, 단행본들을 찾을 수 있으며 개중에는 별로 격앙되지 않은 점잖은 비판도 많다. 역사학자, 법학자, 여성학자들이 전공자의 입장에서 쓴 학문적인 반론도 숱하게 있다. 그런데 김규항은 이런 비판들의 내용을 반박하는 대신 모든 의견이 다 비이성적인 진영 논리라고 일축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지적 접근'이라고 볼 수 없는 불성실하고 부당한 논평이다. 논의에서 한쪽을 마구 매도하기 전에 먼저 최소한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보도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이 기사는 아시아여성평화기금 수령자를 배제한다는 비판을 계속 반복하면서도 '배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정대협이“기금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과도 정대협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는데도 인터뷰를 부당하게 편집하여 마치 정대협이 답을 회피한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 정대협이 대체 뭘 어쨌다는 것인가? 기사만 읽었을 때는 '정대협은 나쁘다'는 결론을 내놓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체가 모호한 '배제'라는 말을 끌고 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동조합에서도 체불임금이나 산재 치료비, 피해보상 등을 요구했을 때 사측이 '노사협력기금' 등 책임을 회피하는 모호한 이름의 기금으로 대체하려 드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기사의 논지에 따르면 이것을 받을지 말지에 대해서 노조는 입장을 정하지 말거나 기금을 받아야 한다. 기금을 받지 말자고 선전하면 기금을 받기를 원하는 조합원들에 대한 배제가 되니 말이다. 사측이 강경한 자세로 나오면 '회사 내 온건파와의 관계마저 차단되었다'며 집행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학자의 말은 무조건 우호적으로 귀담아 들어야 하지만 대중의 여론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은 흔한 통념이지만 크게 잘못된 통념이다. 학자들은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연구하고 글 쓰는 법을 훈련받은 사람들일 뿐이지 뭔가 보통의 인간을 초월해 있고 언제나 합리적인 말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학자들도 완전히 틀린,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말을 할 수 있으며 특히 자기 특권이 걸려 있을 경우 자주 이렇게 한다.
반대로, 이러한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주입받은 대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자신의 양식과 지성으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그것이 늘 옳지는 않을지언정 대개의 사람들의 판단에는 합리적인 구석이 조금씩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특히 당사자들이 소리모아 분노하는 일에는 대개 합리적 핵심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러한 신뢰가 없다면 더 민주적인 사회에 대한 지향은 지탱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쓰겠지만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분노 역시 무식한 대중의 오해가 아니라 옳지 못한 일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며, 상대를 오해해서 핵심을 놓치고 있는 쪽은 오히려 지금 대중을 깔보고 무시하는 이들이다.
다섯째, 이 기사는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쟁점을 완전히 잘못 요약하고 있다. 기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획일적 인식을 깨뜨렸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으며, 국제주의와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대협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제국의 위안부>는 대부분이 기존의 위안부 연구자들의 저서를 재인용하고 편집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별로 새로운 인식을 던져주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이 책이 논란이 된 것은 당사자들의 다양한 삶의 맥락을 담아내기 위해 이루어졌던 작업들의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위안부의 전체 모습인 것처럼 과장하고, 이를 이용해 '기금을 수용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더 이상 묻지 말라'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려 들기 때문이다.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 계급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여성주의 진영에서 많이 나왔던 이야기이고 정대협에서도 십여 년 전부터 같은 관점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것을 민족 문제에 대한 제기를 허상이라고 비하하기 위해서 사용한다면 이것은 이중삼중으로 약자였던 피해생존자들의 위치에서 자의적으로 한 층위를 깎아냄으로써 피해생존자들의 경험맥락을 훼손하고 피해의 온전한 고발을 불가능하게 하는 억압이다. 전쟁 전후로 성매매 여성들이 받았던 억압과 위안부의 연속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역시 새로운 주장이 아니며 무리없이 인정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을 성매매와 전시강간의 차이를 흐리기 위해서 사용한다면 이것은 피해생존자의 핵심적 피해 경험을 마음대로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하고 피해생존자에게 사회적 낙인을 덧씌우는 2차 가해다. 수동적이고 획일적인 피해자의 상을 벗어나 주체로서의 피해생존자를 조명하기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관계가 완전히 적대로만 점철되어 있지는 않았다거나, 피해자들도 수동적으로 고통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상황에 대응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또한 기존의 위안부 연구에서 많이 시도했던 작업이며 소중하고 의미있는 접근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가해자의 책임회피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화해를 종용할 근거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피해생존자를 두 배 세 배로 상처입히는 경험과 언어의 찬탈이다. <제국의 위안부>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폭력의 피해생존자를 난도질하면서 그 위에서 화해를 설파하는 것을 보고도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감능력이 마비되어 있다는 뜻이다. 화낼 만한 일에는 화를 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모든 저항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덧붙이는 말
- 류한수진 :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에이젠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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