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0

알라딘: 새로 읽는 논어

알라딘: 새로 읽는 논어






오구라 기조 (지은이), 조영렬 (옮긴이) 교유서가 2016-05-09


268쪽
책소개
논어는 이제껏 오독되어왔다. 왜냐하면 공자를 샤먼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실제의 논어는 샤머니즘이 아니라 애니미즘적 세계관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주자학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애니미즘을 부정하고, <논어>와 유교 전반을 범령론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범령론이 애니미즘을 몰아낸 최종단계였다. 그것을 <논어> 텍스트를 통해 밝히면서, 동아시아 애니미즘의 복권에 관해 철학적으로 논의한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논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인과 예, 군자와 소인 같은 개념을 재정의하는 한편, 공자 본연의 사상을 재구축하고 동아시아의 고층에 자리잡은 정신풍토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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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제1장 동아시아의 두 가지 생명관



제2장 공자는 누구인가

1. 공자는 샤먼이었는가/ 2. 공자와 〈애니미즘〉/ 3. 균형감각이 뛰어난 사람, 공자



제3장 인이란 무엇인가

1. 〈생명〉으로서의 인/ 2. 〈제3의 생명〉과 인



제4장 군자와 소인

1. 군자라는 이상理想/ 2. 군자와 소인/ 3. 군자의 위기



제5장 공자의 세계관

1. 인과 예/ 2. 지각상知覺像 지상주의至上主義/ 3. 공자와 〈범령론〉



제6장 공자의 방법론

1. 지각상―공자의 인식론/ 2. 배우는 것과 생각하는 것/ 3.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



제7장 공자의 위기

1. 〈범령론〉의 대두와 침투/ 2. 그뒤의 중국사상/ 3. 일본의 경우



제8장 제3의 생명

1. 〈제3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2. 시와 〈생명〉/ 3. 〈제3의 생명〉의 부활을 향하여



맺으며/ 역자 후기/ 『논어』 편명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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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24
공자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을 혐오하던 글로벌한 세력은 보편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을 채택했다. 그것이 도가道家에서 맹자孟子, 순자荀子, 법가法家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도가’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귀납적인 〈애니미즘〉이 아니라 〈범령론〉적인 ‘도道’라는 궁극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상집단이다. ‘도’는 완전히 보편적이며, 모든 것은 거기에서 생겨나고 거기로 돌아간다. ‘도’와 ‘개별적 존재’ 사이에는 일체의 매개물(습관·규범·문화 따위)이 없다. 이것은 오랜 씨족사회와 향당사회를 해체하려는 글로벌한 세력과 친근성이 있는 사상이다.

P.63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는 ‘『논어』라는 책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공자 이후에 세력을 확장한 다양한 사상이 거기에 섞여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고 있고,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공자가 죽은 뒤 수백 년에 걸쳐 『논어』가 한창 편찬되고 있을 때, 전국시대의 다양한 사상의 단편이 공자라는 인물에 가탁假託되어 편입되었다. 거기에는 공자가 죽은 뒤 분열된 제자들의 다양한 학문경향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논어』에서 공자가 한 발언 중 상당 부분은 실제로 공자가 한 말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논어』가 지닌 하이브리티를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P.85
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세금을 적당히 징수하면, 인민은 귀순한다’는 것은 ‘세금을 적당히 징수’할 때 그 나라의 〈생명〉이 빛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이나 중용은 어디까지나 통치의 논리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후세에 내려오면 기호記號의 성격을 띠게 된다. 『예기』에 적힌 방대한 규칙은 사람들에게서 〈제3의 생명〉을 앗아갔다. 인간이 기호가 되고, 사회와 공동체와 국가가 기호 자체가 된다.

P.121
다음에 이어지는 ‘유붕자원방래’는 보통 ‘벗이 있어 원방遠方에서 온다’든지 ‘벗이 원방에서 옴이 있다’ 등으로 읽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대목도 또한 ‘배우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이밍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마땅히 ‘벗이 먼 데서 바야흐로 옴이 있다’거나 혹은 ‘벗이 있어 먼 데서 바야흐로 온다’고 읽어야 한다. 이것 또한 벗이 먼 데서 오는 바로 그 순간에 ‘락樂(즐겁다, 즐기다)’이라는 〈생명〉이 드러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P.168
공자의 세계관에는 이미 나중에 등장할 도가적 요소가 섞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도가적 요소는 공자가 죽은 뒤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양성되고, 전국시대에서 한대漢代에 걸쳐 확고한 철학으로 정비된다. 그러나 공자 시대에는 아직 철학으로서 정돈되지 않았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예를 물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도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이다. 하지만 『논어』에는 아직 철학으로 정돈되기 훨씬 이전의, 말하자면 ‘원시도가’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사람들의 사상이 귀중한 에피소드로 삽입되어 있다.

P.228~229
그러나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 시대가 되면서 맹자는 부활했다. 특히 송학 또는 주자학이나 정주학 등으로 불리는 학파에 이르면, 그 ‘유교’는 거의 맹자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 학파가 원나라 이후의 중국, 조선왕조 이후의 조선을 거의 사상적으로 지배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 시대 이후의 동아시아는 맹자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공자가 망각되었던 시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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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새로 읽는 논어, 다시 만나는 공자



저자 소개

지은이: 오구라 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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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새로 읽는 논어>,<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 총 3종 (모두보기)
1959년에 동경에서 태어나서 1983년에 동경대학교 독일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덴츠(電通)’라는 광고회사에 근무하다가 한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8년 동안 한국철학을 연구한 뒤에, 귀국하여 동해대학교 조교수와 ‘NHK 한글강좌’ 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지금은 교토대학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일을 오가며 서로의 사상과 문화를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이 책 이외에『한국, 사랑과 사상의 여행』,『주자학화하는 일본 근대』,『창조하는 동아시아』,『조선사상전사』등이 있고,『새로 읽는 논어』는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옮긴이: 조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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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약을 끊어야 병이 낫는다 (보급판 문고본)> … 총 30종 (모두보기)
1969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199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2011년 고려대학교대학원 중일어문학과 일본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역서로 『새로 읽는 논어』(2016), 『시를 쓴다는 것』(2015), 『독서의 학』(2014),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2010),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 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2009)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논어』 2천 년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전복적 해석


“행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時)이다”
왜 공자는 ‘때’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이제껏 우리는 공자를 오해해왔고 『논어』를 오독해왔다
한·중·일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공자 이해에서 완전히 벗어나,
후대의 해석으로 본 공자가 아니라 공자 그 사람의 세계관에 다가선다!

논어는 이제껏 오독되어왔다. 왜냐하면 공자를 샤먼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논어는 샤머니즘이 아니라 〈애니미즘〉적 세계관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삼라만상에 생명이 깃든다는 세계관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생명〉이 드러난다는 사상이다. 이 책은 논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인과 예, 군자와 소인 같은 개념을 재정의하는 한편, 공자 본연의 사상을 재구축하고 동아시아의 고층에 자리잡은 정신풍토를 추적한다.

기존 통설을 뒤집으며 『논어』를 수미일관하게 재해석
공자라는 철학자는 무엇을 말한 사람이었을까? 이 책은 중국·한국·일본에서 이루어져온 기존의 해석과 달리, 완전히 새롭게 공자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키워드는 〈애니미즘〉이다. 저자는 『논어』의 세계관에는 〈애니미즘〉의 색채가 짙다고 본다. 그러나 주자학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애니미즘〉을 부정하고, 『논어』와 유교 전반을 〈범령론〉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범령론〉이 〈애니미즘〉을 몰아낸 최종단계였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논어』 텍스트를 통해 밝히면서, 동아시아 〈애니미즘〉의 복권에 관해 철학적으로 논의한다.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애니미즘〉이 새로운 해석의 출발점
저자는 우선 〈애니미즘〉에 주목한다. ‘공자의 세계관’은 맹자와 달리 성性(인간성)과 천天(초월성)을 한데 묶지 않는다. 초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말을 하는 방식이나 낯빛, 날짐승과 들짐승의 울음소리, 다양한 것들이 서 있고 움직이는 방식 등을 중시하고, 형용사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공자가 죽은 뒤 맹자 시대쯤부터 이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도전을 받았고, 마침내 파괴되어버렸다. ‘성과 천’을 직결시켜, ‘인간’을 초월성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게 되었다. 그 완성형이 『맹자』와 『중용』이라고 저자는 본다. 송대 이래의 중국, 그리고 조선왕조 이래의 조선에서는 『맹자』적 세계관이 거의 모든 것을 지배했고, 또 주자학 이래로 『논어』를 『맹자』적으로, 즉 〈범령론〉적으로 바꾸어 읽었다. 그리고 공자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을 『논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그러나 『논어』의 본래 모습을 복원해보면, 주자학 이후의 독법과는 전혀 다른 〈애니미즘〉적 세계관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애니미즘〉, 〈범령론〉, 샤머니즘
공자는 〈생명〉에 대한 동아시아의 두 가지 해석, 즉 〈애니미즘〉과 〈범령론〉에서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범령론〉을 ‘범신론’이라 해도 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신神’이라는 글자가 일신교적 신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범령론〉이라 부른다. 〈범령론〉이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靈(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도 큰 의미에서는 〈범령론〉인데, 동양에서는 ‘기氣 사상’이 대표적인 〈범령론〉이다. 왜냐하면 ‘기’라는 것은 순수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나 넋을 포함한 ‘영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되어 있다고 보는 도가나 유가 등의 기 사상은 〈범령론〉이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전제한다. 또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역시 자주 혼동되지만 전혀 다른 사상이라고 저자는 주의를 환기시킨다. 샤머니즘은 ‘하늘(天)’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믿고, 하늘과 지상地上을 매개하는 샤먼이 지상에 군림한다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샤먼은 하늘의 대리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공자가 『논어』 곳곳에서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다면서, ‘군자’를 〈애니미즘〉적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소인’을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소유자라고 본다. 그러면서 소인은 모든 것을 ‘하늘’의 보편적 가치에서 연역演繹하여 세속사회에 적용하려 들지만, 군자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 따위를 무조건 믿거나 하지 않는다고 양쪽을 구별한다.

공자와 『논어』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키워드, 〈제3의 생명〉
이 책에서 저자는 〈제3의 생명〉이라는 말을 제시한다. 이것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명관이다. 저자는 상이한 차원의 다양한 생명관을 인류정신사에서 추출하고 그것들을 종합하여 〈제3의 생명〉이라 부르는데, 〈제3의 생명〉이란 생물학적 생명도 종교적 생명도 아닌, 〈애니미즘〉에서의 생명관이다. 〈제1의 생명〉이란 육체적·생물학적 생명이고, 〈제2의 생명〉이란 정신적·종교적 생명이다. 공자가 외친 ‘인仁’이라는 개념도 흔히 ‘도덕’이나 ‘사랑’으로 이해하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관계성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파악한다. 즉 공자의 ‘인’은 〈사이의 생명〉이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자적 〈애니미즘〉 역시 〈제3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에 비해, 〈범령론〉은 〈제2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 책에서 〈범령론〉은 세계(우주)에 하나의 보편적이고 비육체적인 생명이 가득하다고 보는 사상 일반을 가리킨다. 애니미즘이라는 단어는 흔히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을 가리키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주관共同主觀에 의해 〈생명〉을 문득 드러내는’ 세계관을 괄호를 붙여 〈애니미즘〉이라 일컫는다. 그러면서 이런 〈애니미즘〉을 보통의 애니미즘과 구별하기 위해 〈소울리즘soulism〉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공자 이후의 사상
저자가 해석하기에, 공자의 이러한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씨족사회나 향당사회가 무너지고 강대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한 공자의 세계관을 혐오하던 세력은 보편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을 채택했는데, 그것이 도가에서 맹자, 순자, 법가로 이어지는 계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도가’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귀납적인 〈애니미즘〉이 아니라 〈범령론〉적인 ‘도道’라는 궁극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상집단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공자 학단의 후예이면서 도가의 영향을 받은 맹자는 유가의 세계관을 크게 바꿔버렸고, 공자와 같은 귀납적 방법론을 버리고 도가에서 배운 연역적 방법론을 과감하게 펼쳤는데, 그것이 인의仁義라고 본다. 중국에서는 그뒤 공자의 〈애니미즘〉적 생명관과 도가나 맹자의 〈범령론〉적 생명관이 길항하다가 마침내 〈애니미즘〉적 생명관은 망각되었고,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말도 어느 사이엔가 의미가 분명치 않은 어떤 것이 되어버렸으며, 이후의 주자학과 양명학은 〈범령론〉적 생명관의 완성형이라고 지적한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군자’의 참모습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군자’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사람이나 교양인이 아니다. 그저 ‘아무리 비천한 일일지라도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최고의 〈생명〉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군자불기君子不器’(「위정」)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천 년 동안에 이 대목을 ‘군자는 그릇처럼 특정한 용도가 미리 정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군자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왔는데, 이 말의 핵심은 오히려 군자는 특정한 일에서만 인仁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든 하찮은 일이든 구별 없이 모든 일에서 ‘인仁이라는 〈사이의 생명〉’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저자는 달리 해석한다. 저자는 또 이렇게 지적한다. “‘군자는 제너럴리스트이다’라고 해석해버리면, 마치 군자는 개개의 특수한 일에서는 스페셜리스트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훗날 맹자가 ‘대인大人’이라는 개념으로 도덕적 제너럴리스트를 정립한 것에 영향을 받은 ‘군자 해석’이다. 또한 유자들이 황제의 관료로서 통일제국의 정치·행정·사법을 한 손에 담당했던 시대에 자기들을 도덕적인 반反스페셜리스트로 규정하고 싶은 욕구에 딱 들어맞는 해석이었다. 유교사회에서 기술자를 멸시하게 된 근원인 것이다.”

「향당」 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왜 공자는 ‘때’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인’은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흔히들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해온 「향당」 편의 한 대목(色斯擧矣, 翔而後集. 曰, 山梁雌雉, 時哉時哉. 子路共之. 三嗅而作.)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별도의 의미를 드러내 보인다.

〈내 번역은 다음과 같다.

공자 일행이 길을 가는데, 인기척을 느낀 암꿩이 하늘로 날아올라 한참 있다 나무에 앉았다. 선생은 말했다. “산기슭의 암꿩은 때를 아는구나. 때를 아는구나.” 이 말을 듣고 자로는 꿩에게 먹이를 주어보았다. 그러자 꿩은 먹이를 세 번 냄새 맡고 날아갔다.

즉 공자는 꿩이 ‘때’를 알고 있음을 상찬했다. 인간의 출처진퇴에 비겨서 생각해도 좋을 이 대목은 좀더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논어』 개권 제1장에서 ‘배워서 때로 이것을 익힌다(學而時習之)’고 할 때의 ‘습習’은 바로 새끼새가 날갯짓을 하며 날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새끼새가 많은 학습과 경험을 쌓아, 이 「향당」 편 최종장의 꿩이 되어 ‘날아오르고(翔)’ 있는 것이다(습習과 상翔의 대비). 처음에는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은 〈생명〉의 실천이지만, 오랜 기간의 숙련을 통해서, 반성지反省知를 매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명〉의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재시재時哉時哉(때이구나, 때이구나)”인 것이다.〉 _본문 205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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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9.0



독서중 2016-06-21

미야자키 이치사다, 시라카와 시즈카 등의 <논어>해설과 공자의 생애를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번에 59년생의 학자인 오구다 기조의 새로운 접근법에 일단 놀랐다. 그가 공자와 <논어>를 해석하는 키워드는 `소울리즘`이라는 면에서의 <애니미즘>과 `사이` 개념으로의 `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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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7-01-19

제3의 생명이라는 개념이 애매모호하다.1이 육체적, 2가 정신적, 종교적 생명이고 3은 간주관적, 애니미즘적,문득 드러나는 아우라와 같은 생명이라는 이야긴데 공자의 仁이 이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일면 설득력은있어보인다공자가노자와다르다는점에서는. 다만 그것이 3생명인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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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커피 2016-05-12

공자라는 인간, 그의 세계관을 바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논어 읽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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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wave21 2017-01-07

정통 유가 사상인 공맹 사상에서 <애니미즘=소울리즘=제3의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공자의 세계관을 분리해서 논어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 저자의 참신한 시야로 공자의 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은 기쁜 일이나 개념의 모호성으로 과도한 해석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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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lan 2017-01-29

원시유교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이나 표현의 래디컬함을 괄호치면 새로울 것이 별로 없는듯함.다만 논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하는 효과는 있음. 저자는 샤먼니즘적 제2생명과 애니미즘적제3생명을 대비하나 현대는 오히려 제1생명(생물학적, 물질적 의미)이 모든것을 압도하는 시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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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번뇌보이 2017-02-04



책 제목만 봐서는 식상하기 이를 데 없다. "00살에 읽는 논어" 등의 책이 유행 한 지가 한참 지나서 이렇게 평범한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라면 외면하기 일쑤다. 로쟈님과 같은 너무나도 감사한 책 길라잡이가 없었으면 그냥 스쳐 지나 갔을 책 이었지만 로쟈님의 추천을 놓치지 않고(여전히 반신반의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책을 읽어 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는 누구인가? 노나라 출신의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가의 창시자로서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특히 한국)의 문화와 관습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공자의 사상을 일컫는 유교는 과거 주나라 왕조의 규범이었던 예를 회복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고, 예를 내면화했을 때 인(仁)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인간을 소인과 대비한 군자라고 지칭하며 칭송했다. 그러한 공자의 사상과 어록을 모아 제자들이 집대성하여 만든 게 [논어]라고 우리는 흔히 알고 있다. 논어 각 장의 해석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의 규범으로서의 유교의 역할론을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공자를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규정한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애니미즘이라니? 저자가 말하는 <애니미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생명>에 대한 해석을 들어봐야 한다.

"내 생각에 공자는 생명에 대한 동아시아의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한쪽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두 가지 해석이란 <애니미즘>과 <범령론>이다. 그리고 공자는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던 것이다. <범령론>이라는 단어는 귀에 익은 말이 아닐 것이다. '범신론'이라 해도 좋겠지만, '신'이라는 글자가 일신교적 신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신'이라는 글자를 피하여 여기서는 <범령론>이라 부르기로 한다. <범령론>이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p18-

그럼 저자가 말하는 <애니미즘>은 기존의 우리가 말하는 애니미즘과 같은 개념일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애니미즘이라는 세계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보통 애니미즘이라는 것을 '삼라만상에 생명, 아니마, 신 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고, 그래서 바위나 나무 등에도 생명,아니마,신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할까.(중략) 그렇다면 무엇이 '생명이나 신'이 되고, 무엇이 생명이나 신이 되지 않는 것일까. '하늘'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마을이나 지역, 공동체 등의 구성원 다수가 어떤 돌에서 모종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이 귀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작동하는 인식에 따라 공동주관적으로 권위를 받으면 '생명이나 신'이 되는 것이다. -p21-



"공자는 <애니미즘> 사상가였다고 내가 한 말을 부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제 1장에서 말한 것을 다시 되풀이하자면, 내가 <>를 붙여 <애니미즘>이라 한 것은 종래에 사람들이 흔히 애니미즘이라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종래의 애니미즘은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는 세계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이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아니마이다'라는 유형의 애니미즘과는 명벽히 다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별도로 <애니미즘>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p62-



저자가 말하는 <애니미즘>과 연관하여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개념이 바로 <제 3의 생명>이다. <애니미즘>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며 이 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제 1의 생명>, <제 2의 생명>과 대비시켜 <애니미즘>을 추동한다.



"<제3의 생명>이란 이제까지 인류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을 가리킨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명관을 가리킨다.(중략) 인류가 이제까지 명확하게 인식해온 생명은 크게 나누면 ① 육체적,생물학적 생명 ② 정신적,종교적 생명, 두 종류였다.

이제 이 두 가지 생명관을 각각 <제1의 생명>, <제2의 생명>이라 부르기로 하자. <제1의 생명>이란 육체적,생물학적 생명이고, <제2의 생명>이란 정신적, 종교적 생명이다.(중략)

<제 3의 생명>이란 생물학적 생명도 종교적 생명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애니미즘>에서의 생명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적 <애니미즘>에서는 마을 등의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어떤 돌에서 모종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이 공동주관적으로 권위를 받으면 '생명이나 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은 육체적,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며, 어떤 보편성을 표방하는 종교적 생명도 아니다. 우연성,우발성의 지배를 받은, 관계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지 알 수 어떨지 예측할 수 없은 <생명>이다. 이 책에는 그것을 <제 3의 생명>이라 부르기로 한다"-p28-



낯선 개념이라서 단번에 이해하기는 여렵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지배하는(혹은 그 속에 내재하는) 공통된 "기"나 "영"이 있다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범령론>과 연관되는 <제2의 생명>론이라면, 공자로 대표되는 <애니미즘>은 <제3의 생명>관이다. 저자는 공자가 외친 "인仁"이라는 개념은 흔히 '도덕'이나 '사랑'등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관계성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인人"은 <사이의 생명>이라 설명한다.



저자는 기존의 '예禮'라는 개념도 전복시킨다.



"공자 자신이 귀족이 아니어서, 군주의 통치에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중략) 훗날 노나라 종묘에 처음 들어갔을 때, 비천한 신분에서 갑자기 출세한 공자는 진짜 군자들에게 '이런 기본적인 예도 모르느냐'고 모멸당하는 굴욕을 겪었다.(중략) 그 대신 공자가 직접 몸으로 알고 있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향당에서 보이는 장로들의 행동거지, 예의범절, 세간에서 일을 결정하는 방법 따위였다. 향당이라는 것을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며 지역에서 정해둔 일, 연중행사, 제사,교육 등을 공동으로 행하는 일정한 규모의 집단이다. 젊은 공구가 실제로 경험하고 알았던 것은 군주가 종묘나 조정에서 행하는 정치와 의식이 아니라, 지역의 자치회 같은 조직에서 보이는 일상적인 풍습 전반이다."-p109-



"예부터 전해져온 '예'라는 형식은 결코 획일화를 위한 형식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 아래서 어떻게 할 때 <생명>이 가장 두르러지게 빛을 발하고, 공동체가 아름다움과 생명을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가 축적된 체계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예'라는 것은 사람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적인 <생명>을 자유롭게 개방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을 알아차렸다"-p47-



유교라 하면 획일화되고 그 유래도 아는 사람이 없는 제사와 같은 '예'와 동일시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다. 저자에 따르면 본래 공자에게 '예'는 인을 빛내기 위한 법칙성이었다. 인은 우연적인 성질이 있기 때문에, 그 우연성에 완전히 맡겨버리면 공동체의 질서가 성립되지 않아 <제3의 생명>으로서의 인을 컨트롤하고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예를 배우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3의 생명>으로서의 인을 컨트롤하고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예를 배우는 것이 필요했으며, 그 예란 위에서 말한대로 향당이나 자치회 등의 작은 공동체에서 벌인 일상적인 풍습의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공자가 죽은뒤 예의 규범성을 고정화하고 기호화하는 세력이 출현했다. 이들은 예를 획일화 시켰으며, 예를 규범화하여,(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개념인)예를 통해 인을 내면화 할 수 있다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자는 군자와 소인의 개념도 이러한 논리로 해석한다.

예를 하나 보자



子曰, 君子上達, 小人下達[헌문]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군자는 고상한 것으로 통하지만, 소인은 비천한 것에 통한다"(가나야 오사무)고 해석한다고 한다. 우노 데쏘토는 주자의 신주에 충실히 따라, "군자는 평소 바른 도를 따르므로, 그 덕이 날로 향상되어, 고명의 극에 도달한다. 소인은 평소 사욕을 따르므로, 그 덕이 날로 내려가 오하의 극에 도달한다"번역했다.[논어신역]



하지만 저자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군자의 세계인식은 자잘하고 구체적인 것(下)을 귀납적으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뒤풀어 하면서 도를 향해 올라가는 것이 '군자는 상달한다'는 문장의 의미이다. 구체적인 사물에서 배우는 것에서 도라는 추상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소인들은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더딘 일을 하지 않는다. 이미 진리가 어딘가 있다면, 재빠르게 그 위에 있는 권위적인 가치를 연역적으로 아래로 끌어내려서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가르치려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다."-p126-



저자가 이러한 소인들의 이데로올기를 만들고 공자의 <애니미즘> 사상을 현재의 <범령론>적 사상으로 왜곡시킨 장본인으로 맹자를 지목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맹자는 공자의 계승자가 아니라 논어를 왜곡하여 현재의 논어의 주류적 세계관을 확립시킨 인물이라 평가하다.



"논어의 <애니미즘=소울리즘>적 세계관은 맹자에 이르러 일변한다. 보통은 논어와 맹자 혹은 '공자와 맹자'하는 식으로 둘을 병칭하여 마치 같은 사상인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 나는 분명 거기에 유교라는 것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공자는 <애니미즘=소울리즘>이라는 방에, 맹자는 <범령론>이라는 방에 살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공자는 <제3의 생명>을 믿었고, 맹자는 <제2의 생명>을 믿었다. 공자가 죽은 뒤 중국사상사는 극적인 전개를 보였다. 이미 몇 번이나 서술한 대로, <범령론>이 대두한 것이다.(중략) 중국에서 <범령론>의 대두는 명백히 도가라는 사상 집단이 주도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도'와 '기'는 양쪽 다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궁극존재이고 영적인 물질이다."-p214-



"맹자의 세계관은 보편적이고 또한 수직적이다. '인간 한명 한명의 신체,마음과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생겼다고 보는 사고'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왕과 성인과 대인은 그 보편적인 세계에서 샤먼처럼 영적인 존재로서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수직적이다.

공자의 경우, 보편적인 인간관은 아직 '기'라는 물질성이나 '성선'이라는 도덕성에 의해 뒷받침디고 있지 않았다. 공자의 <애니미즘=소울리즘>은 인간이나 자연에 대해 영적인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이었다"-p215-



"공자가 죽은 후 전국시대를 거쳐 진한 통일제국이 탄생하기 까지 수백년 간, 공자의 사상은 오해되고, 곡해당하고 비판받고 부정당했으며, 타도의 대상이고 웃음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걷어차이며 멸시당했다"-p222-





공자와 유교에 대한 멸시의 분위기는 8~90년 대 우리나라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독재 정권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유교는 6~70년 대 획일화된 규범/예절을 앞세워 그 영향력을 공고히 했으며 권위주의적 시대가 물러가고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한 8~90년대에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주의로 낙인찍힌 시기였다.

공자의 논어가 다시 부활한 건 신자유주의 이데로올기 부흥을 위한 도구로서 자기 계발서로(200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의 피로감을 덜고 상처를 보듬는 힐링/명상서(2010년 대)로서였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그 역할도 계속 바뀌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대의 논어와 공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저자의 공자에 대한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가 규정한 공자의 <애니미즘> 사상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가 말한 공자의 <애니미즘>은 가라타진 고진이 세계사의 구조에서 얘기한 교환양식에 근거한 사회구성체의 원리 中 '교환양식 A'와 닮아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교환양식에 근거한 사회 구성체 원리를 네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교환양식 A'는 증여와 답례 같은 상호부조적인 공동체의 호수성을 원리에 기반한 사회 구성체를 의미한다. 제국의 확립되기 전, 그러니까 향당/씨족 공동체의 생활규범의 주된 생활 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약탈과 재분배의 교환 양식을 '교환양식B'로 규정했다. 이는 제국의 주된 체제 논리로 볼 수 있다. 또한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 논리를 상품 '교환양식C'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진은 '교환양식 D'를 덧붙인다. 이 사회구성체 원리는 국가를 뛰어넘는 이론인데, 자유로운 개인들이 호수성의 원리를 근거로 하는 사회구성체를 말하는다. 교환양식 A의 증여/답례의 원리를 계승하되, 그것을 뛰어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애니미즘-교환양식 A>를 승계하되, 세계적인 연대/공동체로 발전시키는 것(교환양식 D). 이러한 논리에 근거를 부여하는 게 신자유주의의 한계에 봉착한 현재, 가장 필요한 공자와 논어의 시대적 역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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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6-06-16


이번 달 출판문화(60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을 옮겨놓는다(지면의 오탈자는 바로잡았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교유서가, 2016)를 읽은 소감을 일부 적었다. 기대 이상의 자극으로 던져주는 책인데, 공자와 <논어>를 보는 시각으로는 내가 읽은 범위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새롭다(덕분에 공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핵심은 맹자와 주자도 공자를 잘못 읽었다는 것. 주자의 <논어집주>를 신주 모시듯 해온 이땅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견해다(이수태의 <공자의 발견>(바오, 2015)도 부제는 '탈주자(脫朱子) 논어학'이다). 그래서 희귀하며 계발적이다. 저자의 책이 더 번역되면 좋겠다.







출판문화(16년 6월) 논어의 재해석



동양 고전으로 <논어>만큼 유명하며 많이 읽히는 책은 달리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가 특히 그러한 듯싶은데, 고전 읽기 강좌라면 으레 <논어> 읽기를 출발점으로 하며 <논어>에 대한 이해가 동양사상, 혹은 중국사상에 대한 이해의 기본으로 간주된다. 한때 중국에서는 공자와 유교에 대한 비판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적도 있지만 한국에서 공자는 성인의 지위를 잃어본 적이 없고 <논어>는 경전의 자리에서 내쳐진 적이 없다. 물론 ‘공자왈’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어서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은 있지만 말이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논어>에 대한 이미지도 두 가지로 양분되는 듯싶다. 절대적인 존숭과 경탄의 대상이거나 구닥다리 같은 구시대적 인물과 낡은 사상의 대명사이거나. 즉 선생이거나 꼰대거나. 그 사이의 태도도 가능할까? 다수의 <논어> 번역본과 주석서를 읽고 때로 서평도 쓴 적이 있는 만큼 나는 <논어>를 고전으로서 예우해온 편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논어>를 열심히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논어>에 대한 나의 독서는 언제나 발췌독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읽을 시간이 없다거나 재미가 없다거나 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다. <논어>를 읽어도 안 읽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그 이유니까.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에 차이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건 <논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여 아직도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논어>의 미스터리인데, 일단 ‘어록’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논어>는 굉장히 쉬운 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의 한문학적 지식을 갖고 있으면 일반인도 해석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쉽게 읽히는 문장들이 여전히 모호하거나 자주 모순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구절만 하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말인지 모호하다. 게다가 '시’(時)라는 말의 뜻이 ‘때에 따라’인지 ‘때때로’인지 아니면 ‘계속’인지, 확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의 견해가 그렇듯 다르기 때문이다. ‘위정’편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란 구절도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라고 읽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로 새기기도 한다. 정반대의 해석이 양립가능하다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까?


또 ‘자한’ 편에는 “나는 여색을 좋아하듯이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대목의 색(色)을 여색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겉모습에 치중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여색’과 ‘겉모습’이 반대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완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런 식이면 <논어>는 읽어도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을 맛보기 어렵다.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계속 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논어>에 대한 온전한 독서는 미래의 일로 미뤄두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논어>를 읽는 눈을 새로 뜨게 해주는 책과 만났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교유서가)다.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제이앤씨)란 소책자가 지난해에 나오긴 했으나 그것도 따로 검색해서 알게 된 사실이고 우리에겐 생소한 저자다. 일본에도 공자와 <논어>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권위자들이 없지 않다. 시라카와 시즈카나 미야자키 이치사다 등이 국내에는 소개된 바 있다. 오구라 기조는 그런 대가급은 아니지만 흥미롭게도 한국에 8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 ‘지한파’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 적을 두고 공부한 8년간의 수학 경험 때문에 책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그는 일본과 한국 ‘사이’를 체험했고 이 체험이 <새로 읽는 논어>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오구라 기조의 <논어> 해석에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사이’다. 일단 그는 공자의 세계관을 생명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아주 대범한 구도를 제시하는데, 그가 보기에 동아시아에는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대립해왔다. 바로 ‘애니미즘’과 ‘범령론’이고, 이 가운데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바로 공자라는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범령론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도 범령론에 속하고, 동양에서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되어 있다고 보는 도가나 유가의 기(氣)사상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공자는 “생명을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나 감성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는 독특한 생명관을 갖고 있었다. 이를 일컬어 저자는 ‘애니미즘’이라고 부르는데, 통상적인 의미의 애니미즘과는 구별되기에 소울리즘(soulism)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혼(soul)과 혼(soul)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는 세계관을 가리킨다.


이런 새로운 개념(용어)들의 타당성은 물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논어>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을 저자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논어>를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 <논어>에서 공자는 인에 관해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통상 인에 관한 공자의 산발적인 발언들을 취합하여 인의 통일적인 의미를 추출해보려고 애쓴 것이 기존의 독법이었다. 하지만 오구라 기조는 이런 관행을 뒤집는다. 공자가 말하는 인이 통일적인 정의나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인에는 그런 정의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소울리즘)은 우연성이란 관점에서 생명에 접근하기에 무엇이 ‘생명’인지 보편적‧연역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즉 인은 지극히 우연적이면서 우발적인 성격을 갖는다.


흔히 인에 대한 정의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인데, 이 또한 저자가 보기에는 인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아니다. 극기복례할 때 거기에 인이라는 생명이 반짝인다는 뜻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생명’이고, 그 ‘사이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의지력”이다. 그리고 어진 사람으로서 인자(仁者)란 그러한 ‘사이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의지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실 인(仁)란 한자 자체가 ‘인(人)’과 ‘이(二)’의 합성어이며 본래는 ‘친하다’는 뜻이라 한다. 그 원래적 의미에 따르더라도 인은 ‘두 사람 사이’를 가리키며,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오구라 기조는 인을 ‘사이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을 내면화하거나 인격화할 때 발생한다. 바로 맹자가 한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사상사에서 마음을 내재화한 이는 공자가 아니라 맹자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덕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내면에 선한 도덕적 본성이 내재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발현된다고 본 것이다. 오구라 기조가 보기에 이것은 공자의 사상이 아니다. 공자의 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개인의 마음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군자 또한 특정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즉 “어떤 사람이 인을 실현할 때 가끔 군자가 되는 것”이어서 공자가 이상으로 여긴 것은 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군자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극기복례’란 말도 다르게 해석된다. 주자는 극기(克己)를 ‘사욕을 이겨내다’로 해석하고 ‘복례(復禮)’는 ‘천리(天理)로 돌아가다’로 해석했지만, 오구라 기조는 자기 한 사람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예라는 공동주관적 공간(사이)으로 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한자의 어의를 좇자면, 인(仁)은 ‘사람들 사이’를 가리키는 ‘인간(人間)’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까. 곧 인간을 그러한 ‘사이적 존재’로 본 것이 공자의 인간관이자 생명관이라는 게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한편 ‘인간’을 일컬어 영어로는 ‘human being’이라고 옮기는데, 그 의미를 살리자면 ‘interhuman’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이 두 용어를 원용하자면, 맹자는 공자가 말한 ‘인터휴먼’을 ‘휴먼비잉’으로 곡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덧붙이자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둘의 무대’이자 ‘둘의 진리’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인(仁)의 정의에 바로 부합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인을 가르친 공자는 ‘사랑의 철학자’로 다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 덕분에 도덕군자가 아닌 '사랑의 철학자'로서 공자를 다시 만난다.



16.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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