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5

알라딘: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알라딘: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은이)돌베개201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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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전쟁 기간에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저자는 마을에서 벌어진 상호 학살 사건의 과정과 원인을 치밀하게 파헤침으로써 한국전쟁의 미시사를 제시한다. 이 책에 실린 다섯 마을은 진도의 현풍 곽씨 동족마을, 금산군 부리면의 해평 길씨 동족마을 등 전라남도와 충청남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10여 년간 해당 지역을 현장 답사하며 관련자 구술을 채록하고 희생자 씨족 가문의 족보까지 꼼꼼히 조사하여 얻은 연구 결과물이다.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반도 전체에서 마을공동체라는 구체적 공간으로 좁힘으로써, 그동안 거시사 연구가 놓쳐왔던 마을 주민들 간의 신분·이념·종교·토지소유 등의 갈등까지 세밀하게 짚어낸다. 이들 사례 연구는 학살 사건의 마을들이 동일한 농촌 마을이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씨족 구성, 마을 지도자의 계급성향과 주민 장악력 등에 따라 그 충돌 양상은 많이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총론 마을에서 바라본 한국전쟁
1. 프롤로그
2. 전쟁과 마을 주민 간의 갈등 구조
3. 마을 지도자·국가권력과 전쟁
4. 전쟁 이후의 마을
5. 에필로그―복합적 갈등구조론

1 친족 간 학살의 비극, 진도 동족마을 X리
1. 진도에서 X리는 어떤 마을인가
2. 1930년대 X리 청년들의 민족·사회 운동 참여
3. 해방 직후 X리 현풍 곽씨의 동향
4. 한국전쟁기 친족 내 갈등의 폭발과 학살의 반복
5. 맺음말: 친족 내 갈등과 배후의 국가권력

2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마을의 시련
1. 두 양반가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2. 한말·일제강점기 영보마을의 민족·사회 운동
3. 해방에서 한국전쟁기까지 격동의 영보리
4. 맺음말: 전쟁은 마을에 무엇을 남겼나

3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1. 부여군 두 동족마을의 역사와 흔들리는 신분제
2. 한국전쟁기 두 동족마을의 충돌
3. 전쟁의 상처와 강호동지회의 발족
4. 맺음말: 신분 간 투쟁으로서의 마을 전쟁

4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1. 전쟁 이전 지주·마름과 소작인 간의 갈등
2. 한국전쟁기 마을 주민 간의 갈등
3. 맺음말: 계급·이념 간 대립으로서의 마을 전쟁

5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1. 금산군 부리면의 명문가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
2. 두 가문의 좌우 분화
3. 한국전쟁기 두 가문의 동향과 11·2사건
4.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
5. 맺음말: 좌우 이념 대립으로서의 마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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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찬승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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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와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에 연구원으로 있었으며, 한국사학계를 이끌어온 가장 오래된 연구 단체인 한국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30년간 독립운동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왔다. 특히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적인 독립국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사회' 수립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 주목해왔다. 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유와 평화, 정의와 평등을 외친 100년 전 그날을 돌아봄으로써, 오늘날 ... 더보기


최근작 : <1919 :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21세기 한국사학의 진로>,<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 - 중> … 총 2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마을에서 벌어진 갈등과 상호 학살을 통해 살펴본 한국전쟁의 미시사

한국전쟁 기간에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맞는 올해, 마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조명한 책이 출간됐다. 저자는 마을에서 벌어진 상호 학살 사건의 과정과 원인을 치밀하게 파헤침으로써 한국전쟁의 미시사를 제시한다. 이 책에 실린 사례는 진도의 현풍 곽씨 동족마을, 금산군 부리면의 해평 길씨 동족마을 등 전라남도와 충청남도의 다섯 마을이다. 저자가 10여 년간 해당 지역을 현장 답사하며 관련자 구술을 채록하고 희생자 씨족 가문의 족보까지 꼼꼼히 조사하여 얻은 연구 결과물이다.
기존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쟁의 발발 배경과 진행과정을 분석한 거시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한 한국전쟁 사망자 통계에서 알 수 있듯 실제 희생자 규모는 전선(戰線)이 아닌 후방에서 훨씬 더 컸다. 그것은 남북한군 간의 직접적인 교전과는 별개로 마을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주민들 간의 크고 작은 학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반도 전체에서 마을공동체라는 구체적 공간으로 좁힘으로써, 그동안 거시사 연구가 놓쳐왔던 마을 주민들 간의 신분·이념·종교·토지소유 등의 갈등까지 세밀하게 짚어낸다. 이들 사례 연구는 학살 사건의 마을들이 동일한 농촌 마을이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씨족 구성, 마을 지도자의 계급성향과 주민 장악력 등에 따라 그 충돌 양상은 많이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한국전쟁기 마을에서의 갈등 원인을 주로 이념과 계급 갈등으로 한정지어왔던 기성 학계의 통념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는 불모지와 다름없던 한국전쟁의 미시사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마을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마을로 내려간 국가권력, 전쟁 전 마을 갈등의 폭발

‘왜 한 마을의 주민들은 서로를 죽이려고 했을까?’, 저자의 일차적인 연구 동기이기도 한 이 물음은 이 책의 다양한 사례 연구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마을에서 벌어진 주민들 간의 상호 학살의 일차적인 책임을 마을로 침투한 남북한 국가권력에 돌리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민군은 점령 지역의 면 단위부터 내무서를 두고 인민위원회, 농민위원회, 부녀동맹 등의 단체를 만들어 마을 단위까지 통제했다. 토지개혁을 내세워 하층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인민재판으로 마을의 주요 우익 인사를 처형함으로써 마을의 질서를 해체시켰다. 반대로 인민군이 빠져나간 뒤에는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 인민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했다. 특히 우익 단체인 치안대와 청년단이 조직되어 부역자 대부분을 경찰에 넘기거나 경찰의 묵인하에 직접 처단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국가권력은 왜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침투하려 했을까? 저자는 국가권력이 마을 단위까지 침투하려고 애쓴 이유가 분단정부의 불안한 위치를 빠르게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국가권력은 마을 주민들에게 상호 학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려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국가권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마을에서 그렇게까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48년 남과 북에는 각각 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충성도가 그리 높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것은 양쪽 모두 분단정부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고, 남북 모두 국민들 사이에 좌우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국가권력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충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남북의 국가권력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직접 학살에 나서도록 몰아간 것은 주민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다른 쪽 편을 학살하는 행위는 곧 자신의 목숨을 어느 한쪽에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본문 p.49~p.50)

그러나 저자의 또 다른 고민은 아무리 한국전쟁기 남북의 국가권력의 침투가 강력하고 치밀하게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수백 년간 견고하게 유지됐던 마을 공동체가 그렇게 쉽게 국가권력에 조종당했을까 하는 의문점에 있다. 저자는 20세기 초 일제식민지하의 국내 환경 변화에서 그 점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한다. 당시 신분제와 지주제, 친족관계에 기반을 두고 그 나름의 질서와 규율을 갖고 있던 농촌 마을은 신분제의 이완과 함께 마을 내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 1910년대에 일제가 면사무소를 설치하고 부락연맹과 애국반 등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위한 말단조직들을 만들면서 국가권력의 의지가 마을 단위에서까지 강력히 관철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런 농촌 마을의 환경 변화가 국가권력의 침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 전쟁 이전 각 마을 공동체가 안고 있던 갈등이 현명하게 해소되지 못하고 한국전쟁 기간에서야 비로소 상호 학살의 형태 표출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이 책에 소개된 반촌마을과 민촌마을이 충돌했던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의 사례를 보면, 제도로서의 신분제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반촌 주민들은 공공연히 민촌 주민들을 하시(下視)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민촌 주민들의 불만은 한국전쟁기에 폭발했고, 좌우익으로 갈라선 두 마을은 거듭된 학살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또한 당진군 합덕면의 주민들 간의 대립은 지주와 머슴 간의 갈등, 마을 간의 농수와 소작지를 둘러싼 갈등, 경쟁 집안 간의 갈등 등 해묵은 갈등들이 전쟁기에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잠재되었던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의 틈을 남북의 국가권력이 잘 파고들어 이용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실제 인민군들은 마을의 하층민과 소외됐던 신분 계층을 이용하여 자주 인민재판을 진행시키곤 했다.


기성 학계의 한국전쟁기 민간 차원의 충돌 원인 연구는 재검토 필요
계급·이념 갈등보다는 친족·마을·신분 간 갈등이 더 중요

저자는 마을 학살 사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존 한국전쟁 연구가들이 민간 차원에서 벌어진 학살을 주로 계급·이념 갈등으로 국한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강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저자가 연구한 마을의 사례들은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 외에도,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이념 갈등과 같은 ‘복합적 갈등구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한국전쟁 연구의 고전이 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남부지방에서 일어난 지방 봉기의 원인을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부르스 커밍스가 주장한 갈등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관련 연구를 여전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일제하의 지주-소작관계에 주목하고, 이러한 오래된 계급관계에 기초한 깊은 원한은 해방 이후 남한에 혁명적 정세를 조성하였다고 보았다. 특히 1946년 10월 남부 지방의 봉기에 대해 이를 ‘추수봉기’라고 이름을 붙일 정도로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관계를 중시하였다. 하지만 1946년의 10월 봉기는 지주-소작인 간의 갈등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미군정의 공출제 실시나 친일경찰의 횡포 등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흔히 한국전쟁기에 가난한 소작농민계급이 지주층을 상대로 계급투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는 연구는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본문 p.222)

이는 우리 학계가 지금까지 한국전쟁에서의 민간 차원의 내전 연구를 깊이 있게 다뤄오지 못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구체적인 마을 사례까지 내려간 정밀한 연구 없이, 기존 학계의 주장을 단순하게 되풀이해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할 대목이다. 저자는 그간 연구한 마을 사례를 종합해보았을 때, 이념과 계급의 갈등보다는 친족, 마을, 신분 간의 갈등이 민간 차원의 학살에서 보다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서는 더 치밀하고 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것으로 앞으로 마을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쟁의 미시사 연구가 더 활발히 진행될 때 풀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벌어진 마을 학살 사건은 저자에게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은 곧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누적된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과 모순들이 폭발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남북분단은 마을 내의 갈등을 차근차근 해소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그렇게 갈등을 현명하게 풀어내지 못한 마을들은 국가권력의 침투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극단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돌아보며 하는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어느 사회든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갈등을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러한 점에서 미숙했으며, 그 결과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 오늘날 우리는 남북 간의 갈등, 남한 내 각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과연 얼마나 현명하게 풀어가고 있을까? 한국 사회는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기보다는 여전히 힘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 익숙한 것은 아닐까?” (책머리에 p.11)


각 장에서 다루는 주요 학살 사건

1장 진도 동족마을 X리의 친족 학살
5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진도의 현풍 곽씨 동족마을은 선대에 후손들이 갈라지면서 장파, 중파, 계파의 소문중을 형성했다. 이들 소문중 가운데 중파는 좌익, 계파에서는 우익으로 간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한국전쟁 초기 계파 쪽의 경찰이 중파 쪽 인물인 마을의 보도연맹원 5명을 학살하면서 그 갈등이 폭발하였다. 보도연맹원의 유가족들은 인민군들을 앞세워 우파 쪽에 보복을 시작했고, 특히 인민군이 철수하게 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우파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자행되었다. 거꾸로 경찰이 들어온 뒤에 이번에는 좌파에 대한 보복학살이 일어났다. 이렇게 한국전쟁기 이 마을에서는 인민군과 좌익 측에 의해 희생된 이가 110명, 입산한 이들이 37명, 경찰과 우익에 의해 희생된 이가 20명으로 모두 16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2장 영암군 영보마을의 노노동 학살
한국전쟁 때 영보리 내에서 있었던 큰 사건은 노노동에서의 학살이었다. 1951년경 유격대들이 야간에 내려와 식량을 요구하자 쌀가마니를 내어준 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쌀가마니에는 쥐가 쏠아서 생긴 작은 구멍이 있었다. 유격대는 쌀가마니를 지고 금정 쪽으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침 비가 와서 가마니 구멍으로 땅에 떨어진 쌀이 불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쉽게 유격대를 추적할 수 있었다. 결국 경찰은 유격대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고 유격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유격대 쪽에서 쌀을 내어놓은 이가 고의로 가마니에 구멍을 뚫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보복 행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유격대는 야간에 마을을 습격하여 세 가족 18명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는 한국전쟁기 영보에서 있었던 가장 큰 학살 사건이었다.


3장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부여의 한 평민 동성마을(A마을)은 오랜 세월 동안 이웃한 양반 동성마을(B마을)로부터 핍박과 설움을 당해왔다. 그리고 양반 동성마을은 해방 이후 우익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반면, 평민 동성마을은 식민지시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해왔고, 해방 이후에도 좌익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평민 동성마을의 좌익 활동가들은 이웃한 양반 동성마을의 우익 활동가와 경찰에 쫓기게 되었고, 결국 주요 인물들은 마을을 떠나 피신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A마을 가운데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던 이들 4명이 낙화암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 뒤 인민군이 들어오자 이들의 유가족은 B마을의 이장과 우익청년단 관계자를 인민재판에 부쳐 처형하였다. A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이 속한 면의 면당 위원장, 치안대장 등을 맡았다. 하지만 그해 9월 말 인민군이 물러간 뒤 A마을의 성인들은 경찰과 B마을 주민들에 의해 모두 체포되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B마을 사람 둘을 처형한 사건과 관련하여 1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6명이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또 면당위원장, 치안대장을 지낸 이들도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4장 당진군 합덕면 마을
당진의 합덕면 H마을은 천주교 신자 마을이었다. 합덕천주교회는 구한말에서 일제시기에 걸쳐 서울의 천주교구로부터 위탁을 받아 합덕면 일대에 대규모 토지를 사들였다. 1950년 농지개혁 당시 천주교회의 소유 토지는 195정보에 달했다. 합덕성당은 성당 바로 앞의 H마을에 농민들을 모아 교회의 땅을 소작시키면서 집까지 제공하였다. 대신 농민들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했다. 기존의 천주교인 혹은 가난한 농민들이 이 마을에 모여들었고, 이 지역은 결국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농민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소작권, 그리고 각박하지 않은 소작료 수취 등으로 인해 자기 땅을 사들여 자소작농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또 지역 사회에서 합덕성당의 외국인 신부의 위세는 대단하여 일본인 경찰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H마을은 점차 보수화되어갔다. 해방 이후에는 일부 농민들이 우익청년단에도 참여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합덕에 진주한 인민군은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신부와 신도회장, 복사 등을 붙잡아갔다. H마을 주민들도 마을 안에 인민위원회 등 협조 단체를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인근의 Y마을 주민들은 H마을을 우익마을로 간주하고 있었고, 결국 인민군 철수 시 H마을을 습격하여 주민 8명을 끌고 가 처형하였다. 9ㆍ28서울수복 이후 경찰이 진주하자 이번에는 H마을에서 Y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 대부분을 끌어다 징치하였고, 상당수가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넘겨져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5장 금산군 부리면의 두 양반가문
금산군 부리면은 28개 마을이 대부분 동족마을인 특이한 지역이다. 그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성씨는 길씨와 양씨였다. 이들은 모두 이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양반 성씨였다. 이들 두 성씨는 오랫동안 서로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 가운데 1920~1930년대 길씨 집안 청년들이 사회주의운동에 관계하였고, 이는 해방 이후의 좌익운동으로 이어졌다. 반면 양씨들은 해방 이후에 우익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커다란 충돌은 없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권력을 잡은 길씨들도 양씨들에게 큰 보복은 하지 않았다. 인민군이 후퇴한 뒤 양씨들도 길씨들에게 큰 보복은 하지 않았다. 이는 두 집안이 사돈관계 등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월 1일 우익들이 면민대회를 열어 주민들의 단합을 과시한 소식이 인근의 빨치산들에게 전해지자, 그날 밤 빨치산들은 부리면을 습격하여 78명을 학살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면민대회를 주도한 양씨가의 사람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 그리고 우익 쪽의 길씨들도 피해를 입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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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좌우파의 대립으로 인한 동족 살상의 역사, 그리고 그 배후의 친일파들~
램브란트 2010-06-30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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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한국전쟁
낮에뜬별 2016-01-1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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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아닌 각 지역 마을에서 벌어진 좌우 충돌 과정을 그린 한국 전쟁 미시사
windwave21 2011-07-3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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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마을로 간 한국전쟁


전쟁은 그 속성상 많은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다. 물론 병법서에서 피흘리지 않고 이기는 전쟁을 최고로 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국전쟁 역시 엄청난 희생을 낳았으며 그 피해는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책마다 다른 한국 전쟁의 희생자 수를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자가 더 많다는 점이다. 왜일까?

‘총알받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일반 상식으로는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군인이야말로 최대 희생자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또 다른 비극이다. 군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있지만 민간인 상호 간에도 살해가 있었다. 동족상잔의 아픔은 전방 뿐만 아니라 후방에도 있었던 셈이다. 아니 오히려 후방에서 더 컸던 것을 아래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지역 단위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 따라서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연구자들은 당시를 직접 겪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주장을 녹취할 수밖에 없었다. 구술사의 필요성은 이런 점에서 제기될 수 있다. 다만 그 증언자들이 이제 너무 연로하여 얼마 남지 않았은데다 많은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거나 상당히 주관적으로 변해 있다는 애로사항도 있다. 구술사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저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안고 현장에 직접 나가 증언을 녹취하고 관련 지역 자료들을 찾아 이 책을 완성하였다. 책상에 앉아 관련 사료만 뒤적이는 연구와는 다른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일반 상식과는 다른 결론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 전쟁이 이념이나 사상의 대립으로 큰 희생을 본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 내에 여러 갈등이 내재해 있었고, 그 갈등을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써 기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하게 폭발하였다는 것이다. 신분, 가문, 재산, 종교 등으로 인해 사회 갈등은 이미 지역 사회에 뿌리가 깊었다.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치며 이러한 갈등의 골은 깊어졌고 해결되지 못한데서 한국전쟁의 또다른 비극은 막이 올랐다.

내재해 있던 갈등이 표면화되어 살인에 이르게 된 경위는 오히려 단순했다. 그 출발은 대부분 보도연맹은 학살에서 시작된다. 이러 인민군의 진주와 우익 과련자들에 대한 보복이 가해졌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군경이 마을을 회복하면 다시 부역자와 좌파에 대한 보복으로 이어졌다. 군경에 의한 학살과 민간인들 상호간에 의한 학살도 심각했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현지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반면 좋은 친족 관계나 상호 협력을 유지한 마을은 비극을 벗어났다. 좌우의 대립도 그곳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위기의 순간에서도 서로를 보호했다. 어쩌면 이런 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아야할지 모르겠다. 갈등은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해결되지 않다는 점 말이다.

상당히 무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전쟁이 군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후방 민간인들 사이에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성 파괴와 인면수심의 일들이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음도 확인 가능하다. 그렇게 전쟁은 잔인하고 비열했다. 그런만큼 이땅에서 전쟁은 없어야겠고, 내면화된 일상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바로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는 좋은 기준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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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8-09-11 공감(20)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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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전쟁 연구의 시작




작년에 우연히 구술 프로젝트에 두 건이나 참여했다. 이전까지 구술 작업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던 터라,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구술자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일부터, 적절한 질문지 작성, 구술 녹음 자료의 검수까지 매 작업 단계마다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떤 구술자는 미리 약속했던 구술을 거부하거나, 구술한 며칠 뒤 2시간 넘게 구술 받은 것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구술 주제가 민감한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구술’하면 그냥 이야기를 듣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구술 작업을 토대로 연구 성과물을 만드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구술 자료를 사용할 때에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객관’과 ‘사실’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역사가들은, 구술 자료의 가능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위태로움을 걱정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술 자료는 매우 주관적이며-모든 자료가 주관적이라는 보호막을 쳐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듯이,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스러지고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왜곡하고 편집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술 자료는 매력적이지만 위험하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구술을 바탕으로 진행한 연구라는 점에서 다른 연구와 차별성을 지닌다. 당연하게도, 연구 방법이 다르니 연구결과도 달랐다. 한국전쟁의 큰 특징은 민간인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고 그 민간인 피해는 민간인끼리의 분쟁이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거시적 연구는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에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계급만이 쟁의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현미경을 들이대고 살펴보니 현실은 달랐다. 사상보다는 신분 갈등, 계급 갈등, 친족 내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종교 갈등이 사상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갈등은 존재했고 한국전쟁이 그 갈등을 극적으로 폭발시킨 것뿐이었다.




이 글에서는 과거의 양반-평민 간의 신분 갈등, 지주-소작인(혹은 머슴) 간의 계급 갈등,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 혹은 이념 갈등 등이 '복합적 갈등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56쪽)




이러한 한국전쟁의 이면은 새로운 연구 방법을 사용했기에 드러난 것이다. 구술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진행하고, 사료를 구에 적용하는 또 다른 차원의 지난한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연구사적 의의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의 민감함을 생각하면,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저자가 사학계의 중견 연구자임을 감안하면, 현장연구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쉽게 찾기가 힘들었다. 물론 반복되는 문장이 많고, 어떤 부분에서는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준 탓도 있다. 허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서의 미시사’가 가지는 문제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현미경을 들이대듯 자세하게 살핌으로써 거시사가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을 되살리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들에게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미시사의 가장 큰 장점이다. 서양에서의 미시사가들이 대부분 좌파인 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떠한가? 수많은 ‘일반인’들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들은 모두 주체가 아니라 정황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인명이 등장하지만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괴상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민감한 구술 자료를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적인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즉, 미시적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빚는 손길이 여전히 거시적 기법이라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윤택림의 2003년 저작,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와 대비된다. 윤택림은 애초에 연구 대상을 더 축소하여 한 걸음 더 마을로 들어간다. 또 족보처럼 기초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한 계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도식화하고 그 변화를 추적한다. 그래서 윤택림의 저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 가명임에도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존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연구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되살리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역사학 연구자의 강박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미시적 기법에 대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학자는 미시적 연구를 사례 연구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단턴이나 긴츠부르그, 데이비스의 연구를 보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하나하나의 연구가 ‘사례연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례‘들’을 합치면 큰 그림이 나올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한국인 개인의 역사를 모두 모으면 한국사가 되거나, 반대로 한국사를 분해하면 개인사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례 하나에 대한 연구자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례 하나를 깊게 분석하는 고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사례를 일반화할 수 있느냐?”라는 뻔한 질문에 대항할 용기도 필요하다. 어쩌면 이 민감한 주제야말로 구술사와 미시사가 꽃필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은, 저자의 중요한 문제 제기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총론에 언급한 다음의 주장을 살펴보자.




남과 북의 국가 권력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충성도를 높이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남북의 국가권력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직접 학살에 나서도록 한 것은 주민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50쪽)




여기서 우리는 국가권력이 마을에 그처럼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과연 마을 안팎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 즉, 국가권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간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민간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학살은 사실상 국가권력의 조장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51쪽)




이런 주장은 개연성이 높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이 문제 제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보이진 않는다. 국가 권력이 어떻게 침투해서 민간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는지, 구체적인 사례속에서 입증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입증하지 않는다면, 이 연구가 지적했던 기존 연구의 한계를 답습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연구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선구적 연구로 기억될만 하다. 특히 저자가 자신이 속한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구술 수집 작업은, 학생들에게 중요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 수집를 수집하여 더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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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뜬별 2016-04-0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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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마을비극사 연구




한국전쟁 60주년이 되었다. 올해는 한국전쟁에 대한 사회문화적 재조명의 시도가 어떤 때보다 활발했던 것 같다. 한국전쟁은 근대사에 가장 큰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걸맞는 진지한 성찰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너무도 참혹하였기에 의도적인 무관심이 발동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건일수록 객관적인 평가와 분석이 필요하다. 그래야만이 그 사회에 적합한 건전성을 정초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기념해에 맞춰 제작된 몇 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노근리 사건을 주제로 다룬 「작은연못」은 전쟁사에 대한 편협함을 인식시켰다. 그간 한국전쟁의 단면에만 집중해왔던 것 같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군대 경험은 전쟁의 개념을 ‘작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간 한국전쟁의 이미지는 정형화된 공방의 형태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전쟁의 민중사에 대한 문제에 궁금증이 생겨나던 중 본 서적을 구입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은 어느 시대나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갈등은 사회적 필연의 산물로 이해되고 있다. 통상 갈등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실증적으로 실시된 갈등에 대한 연구들은 이러한 편견에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까지 학문적으로 논의되어온 갈등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추려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적 갈등과 코우저의 기능론적 입장이 그것이다. 전자는 대립과 반목을 상정한 것이다. 반면 기능론에서의 갈등은 사회발전에 유용한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독서를 시작단계에서는 타이틀에 입각하여 마을 단위의 치열한 교전 장면을 염두해 두기도 했다. 책의 제목만으로는 그러한 추측이 가능할 수 있다. 전쟁이 마을로 갔으니 마을단위의 군사분계선이 이미지화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라는 키워드를 염출해내게 되었다. 이후부터 독서의 관점은 오로지 그것에만 모이게 되었다.

갈등이 사회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적절한 수준의 갈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등 수준이 전혀 없는 것도, 너무 많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이 없는 상황은 나태와 정체로 묘사될 수 있다. 반대로 갈등이 심각한 상황은 파멸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무렵 농촌에 내재된 갈등수준이 이러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의 갈등은 그 자체로 전쟁 전야와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 내부에 이미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갈등 요소들이 있었고 전쟁을 계기로 폭발”하는 메카니즘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신분, 토지, 이념, 지역전통, 집안 다툼 심지어 종교 까지도 첨예한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몇 가지씩 복합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할수록 학살의 기회가 더욱 잔혹하게 활용되었던 것이다.

역사읽기의 요체는 현재의 교훈을 찾아내어 실천하는 것에 있을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갈등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성은 이에 근거할 수 있다. 적절한 수준으로의 갈등의 관리는 국가운영에서 많은 고려가 요구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국가위기 상황이 봉착되는 경우 이를 극복하는 에너지는 갈등의 관리수준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안목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독서보람이 크다고 하겠다.

다만 일말의 아쉬움이 있었다. 집필형태가 연구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자칫 지루한 독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논문은 서론과 결론에 순서와 범위 그리고 요약하는 형식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형식은 동일한 문장을 반복시킬 수 있다. 같은 문장이 되풀이 되는 것은 교양서에서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교양서를 상정한 편집에 충실했다면 더 훌륭한 서적이 됐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 땅의 모든 비극을 감히 애도해보며 리뷰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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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sseau 2010-08-2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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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간 한국전쟁 / 박찬승


남북의 국가권력은 왜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일까.첫째,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최말단까지 요구함으로써 권력기반을 굳히려 했다.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직접 학살에 나서도록 한 것은 주민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학살을 목격한 사람들이 감히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노렸다. 둘째, 남북은 전쟁을 치르면서 최대한의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이 필요했다. 셋째, 전쟁 과정 및 이후를 대비하여 치안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nana35 2013-03-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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