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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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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2t975 ftao1inM2ay 42oe0d20 ·
정신대와 위안부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인들은 누구나 정신대(전시 강제노역)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전쟁터 위안소와 위안부의 존재는 몰랐거나 모른 척했다. 정대협이란 명칭과 이용수씨의 회한 서린 원망과 분노도, 자신이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자각도 거기서 시작한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밝히면서 이번의 문제를 정리한 기사. 다음은 내가 따로 정리한 것.
이용수씨는 지금은 일부 여당 지지 성향 시민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지만 2018년만 해도 미디어워치에서 종북세력을 위해 거짓말하는 가짜 피해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실제 그녀는 자신이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 진술을 여러 번 번복한다.
첫 증언에 따르면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거의 방치되다시피 키워진 그는 16살 무렵 친구 김분순네 집에 놀러갔는데, 술장사하는 분순이 어머니는 입은 꼴이 그게 뭐냐고 분순이랑 누구 따라가면 잘 먹고, 잘 입고 다닌다 했다. 분순이 어머니 소개로 만난 국민복 차림의 아저씨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싼 보퉁이를 주며 따라오라했다. 혹해서 따라간 이용수는 기차 타고 바깥구경도 하고 설레다 이틀쯤 지나 엄마 보고 싶다고 옷 필요없다고 돌아가겠다 했으나... 다음은 알다시피이다. (분순이 어머니는 진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난 이 증언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 증언이고 가장 디테일하다. 이용수는 자신이 있던 곳에서 신죽, 가미카제 공군부대란 이름을 기억해 냈고 이는 학자들이 대만 위안소의 존재를 정확히 찾아내는데 기여했다.
이용수의 증언은 2000년대에는 14살, 집에서 잠 자다 총검을 든 군인에게 협박 당해 끌려갔다고 바뀐다. 영화 귀향에서 채택된 이 증언은 일관성이 없었고 증언할 때마다 내용이나 나이가 달라졌다. 군인이 총검을 들고 협박해 여성을 위안부로 끌고 간 사례는 학계 연구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용수가 이런 증언을 할 때마다 국내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그는 한일 극우파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몰렸다. 그걸 30년 가까이 해 왔다.
이용수의 증언은 가난한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빈곤에 의해 약취유인당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초의 증언자 김학순도 비슷했다. 그는 만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의붓아비가 그를 평양권번(기생학교)에 팔아버렸고, 거기서 다시 위안부로 가게 된다.
다른 경로도 있다. 자수가 취미였던 중학생 심미자는 무궁화로 된 한반도 지도 자수를 칭찬받고 일본열도 자수도 해 보라는 교사의 권유에 나팔꽃 일본 자수를 만들었지만, 왜 멀쩡한 일본의 국화 사쿠라를 두고 나팔꽃이냐고 사상이 불순하다는 의심을 받고 정신 교육이 필요하다며 위안부로 끌려간다. 심미자의 아버지는 가출해 행방불명 상태라 경찰이 요주의로 보아오던 터였다. 김복동은 14살 무렵 정신대에 끌려 갈 판이 됐고 딸 못 내놓겠다는 엄마가 맞아 죽을 판이 되자 가겠다 나섰는데 공장이 아니라 위안소에 배치된다. 심미자는 정대협과 대립했고 김복동은 정대협과 함께 했다.
종합해보면 위안부는 식민지 여성 중에서도 가난하고 가족의 보호를 못 받고, 정상성의 범주에 벗어나 있다 여겨진 사람들이 갔다. 취업사기 형태도 있고 정신대 차출자 중에 일부도 포함됐다. 정신대 차출은 흔히 알려진 학교를 통한 강압의 과정이 있었고 12살의 아주 어린 소녀들도 동원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위안부 이야기랑 가깝다. 정신대 자체도 국가가 벌일 수 있는 극악의 폭력이다. 위안부의 경우 전쟁을 벌이고 사회 가장 말단의 여성을 착취하도록 업자들과 거래한 국가 '일본 제국'의 최종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어느 단계에서 기각됐고 이용수는 계속 바뀌는 증언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를 증언에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돈을 낸다. 이걸 봐온 이용수의 심정은?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는 한국 사회는 이러한 현실을 사려 깊게 성찰할 수 없었고, 정신대의 기억이 섞이고, 양공주라고 불린 기지촌 성매매 여성에 대한 혐오감 등이 겹치먼서, 혹은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고 결과가 중요하단 운동 방법론(?)에 의해 이용수나 김학순의 첫 증언은 서사로서 기각되고, 김복동의 증언이 좀 더 과장을 거쳐 대표 서사로 채택된다. 이용수의 증언이 바뀌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위안부 운동진영의 큰 책임이 있다. 정신대에서 위안부를 분리해낸 계기를 제공한 건 정대협의 공로이고, 정대협 활동이 커지면서 성매매 이론 연구나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도 목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정대협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남성 지식인들이 여기 딱히 뭘 기여했나 싶다. 원래 식민지 조선 민족주의 활동가들은 전세계 피압박민족에 대한 동질감이 있던 세계주의자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용수가 첫 증언과 배치되는 진술을 하게 만든 과정은 반드시 규명돼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억울하다, 이용당했다, 정대협은 고쳐서 못 쓴다는 본질이 이것 아닐까. 이유가 뭐가 됐든 이 역시나 한 인간에 대한 폭력이자, 위안부 운동을 위태롭게 만든 요인이다. 그리고 이용수 진술을 채택하면 극우에 이용된다는(실제 공창, 자발적 매춘 얘기가 나온다) 발상으로 그랬다면 그게 운동이 망하는 이유다. 회계 문제도 그런 발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극우를 꺾는 게 이 운동의 본질인가. 그때 한국사회가 너무 보수적이라 그랬다. 그런 사과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안 그러먼 이용수 첫 증언이 틀렸디고 입증하거나. 이런 식으로 대의만 강조하는 운동이 개인을 구원할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으니 뭉갤수록 위태로운 건 정대협의 역사다.
1998년 언론이 가십뉴스로 다룬 이용수의 영혼 결혼식 재조명되며 미디어워치 이상의 막말이 또 쏟이지고 있다. 대만 위안소 시절 이용수는 맞아서 초주검이 됐는데 한 일본군 병사가 뒷산에 묻어주겠다며 빼돌려 몰래 돌봐줬고, 내가 죽어서 네가 고향에 무사히 가도록 돕는 신이 되겠다는 (일본 신토 종교관에 따른) 말을 해 줬다 한다. 이름도 모르던 그 병사와의 영혼 결혼식을 올렸단 것이다.(정확히는 이용수씨랑 그 병사와 올렸다는 게 아니라 영혼결혼식 형태로 위령제를 지내줬다) 이용수씨 뭐랄까...참 다채롭고 재밌는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그 일본군 병사도 강제로 끌려왔거나 황국신민 사상으로 자원했어도 전쟁참화에서 이건 아니다 후회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옥같은 상황서 너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저 한 마디가 17살 이용수의 기억에 크게 남은 듯 하다. 이걸 일반화해서 낭만적 관계로 포장하는 건 위험하다. 심미자에게도 잘해준 일본군 장교가 있었고 심미자는 그에게 자신을 데리고 나가 줄 것을 부탁도 했지만, 장교와 함께 외출했다 평온하게 연애하는 일본 젊은이 남녀를 보고 분노를 느낀다. 김복동은 사랑과 관해선 평생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다 했다. 이용수의 사례도 주검 직전이 되도록 맞았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즉, 강제로 끌려온 황국신민 군인이 속아서 끌려온 식민지 조선인 위안부를 학대하며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을 견뎠다는 것). 위안부 운동에 대한 한일 연대는 이래서 잘 안 되지만(일:우리 모두 전쟁의 피해자에요/한: 닥쳐. 너넨 성 구매재잖아) 전쟁이란 상황에서 개인이 겪는 절망과 고통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다.
첫 증언대로라멷 친구 엄마의 말과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혹해서 낯선 사람을 따라 간 가난하고 순진하고 소박한 물욕도 있었던 소녀. 스스로의 물욕에 얼마나 자학하는 삶을 살았을까 싶다. 그것이 정신대와 위안부 사이의 결정적 차이일지도 모른다. 정대협 결성 소식을 듣고 "내 친구 이용수가 겪었던 일"이라고 전화 걸었을 만큼 수치심을 느낀 것엔 가죽구두에 혹했던 자신에 대한 수치심도 포함된 거 아닐까. 반대로 가죽구두에 혹해 따라나선 이용수를 안아주고 미안해하고 그거 네 잘못 아니리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그리고 총검에 의해 끌려갔다고 말 하게 만들어서 미안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해걸된 거다.
그래서 나는 정의연이 이용수의 증언 변화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에 갇힌 운동입네 등 동의하지도 않고 손가락질하고 싶은 입장이 아니라 더욱 그렇다. 정대협의 권유에선지 기자의 농간인지, 본인이 사회 분위기에 눈치 본 걸 묵인한 건지. 정대협 바깥이 문제인데 정대협이 다 뒤집어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극 해명하지 않은 건 사실이고. 이용수는 총검에 협박당해 끌려간 순결한 누이가 아니라면 더욱 미안하고 감히 감사할 따름이다.
사학과 나오기도 했고, 정대협이 한때 취재처이기도 하여 이런저런 자료를 전부터 봐왔는데 이 기사가 한 조각 퍼즐이 됐다.
[정리뉴스]'위안부'는 소문과 괴담이던 시절...그들도 정신대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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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뉴스]'위안부'는 소문과 괴담이던 시절...그들도 정신대라 불렸다
“정신대와 위안부가 다르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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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1t 75Jftao1inu2ne 42oe0d20 ·
토요일에 위안부 문제를 하루 종일 이고 있다가 e역사관에서 증언들을 읽었다. 마음이 아픈데 흥미로웠고 뭔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증언에 증언자의 얼굴이 있었달까. 공통의 비참을 증언하면서도 각자의 결이 달랐다. 그 결이 만든 틈새에 실마리가 있었다. 그 증언을 정리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용수씨 기자회견 이후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불확실한 팩트들이 있고 나도 품고 있는 의심이 있고 취재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알려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당분간 이번 사태에 관한 글은 안 쓰려 한다.
1. 김학순
김학순은 자신의 삶을 두고 “부모 복이 없더니 남편 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다”고 말했다. 김학순이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딸에게 “애비 잡아먹었다”며 화풀이를 했다. 어머니가 의지한 곳은 교회였다. 김학순도 교회 다니던 시절이 좋았다 했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재밌었고, 언니, 오빠들이 예뻐해주니까. 어머니 재혼 상대인 의붓 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해 불화가 더 벌어졌고, 아버지가 그를 40원 받고 평양권번에 팔았을 때 차라리 불편한 집보다 권번에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17살에 권번을 졸업했으나 조선에서는 19세가 돼야 기생 영업이 가능했다. 양아버지(권번 주인)는 규제가 느슨한 만주에 가서 영업좀 시켜보려 두 양딸(즉 기생)을 데리고 기차에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헌에 붙잡히고, 김학순은 위안소로 넘겨진다.
위안소 생활 중 조선인 남자가 김학순의 방에 들어온다. 군인들이 출정 나간 틈을 타 강간하러 들어온 것이었지만, 김학순은 “나갈 때, 나를 함께 데려가지 않으면 소리지르겠다”고 하여 남자의 잠입 루트대로 위안소를 탈출한다. 마약상으로 추정되는 이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아들 보는 앞에서도 “일본군에게 몸 팔았다”며 김학순을 학대했다. 딸은 1945년 귀국 뒤 콜레라로, 남편은 1953년에 사망했다. 아들은 12살 때 바다에서 놀다 익사했다. 김학순은 이 때 삶을 놓아버리려했지만, 어떻게든 살 마음을 먹고 버티어 1991년 첫 증언자가 된다. 여성을 사고 파는 식민지 자본주의 시장에서 ‘아버지들’의 뜻에 따라 거래돼며 위안소까지 갔지만, 탈출하고, 살아남기로 하고, 증언하기로 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었다.
김학순은 일본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정의연의 운동 목표가 됐다. 그의 증언은 구조적 폭력이 발톱을 드러내고 삶을 할퀴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 상흔은 가난, 전쟁, 빈곤, 폭력, 여성의 문제를 너무 뚜렷히 드러내고 있다. 반일의 도상에 발걸음이 멈출 수가 없는, 쉽사리 화해로 덮어비릴 수 없도록 한다. 운동의 운명은 여기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2, 문옥주
문옥주는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이다. 대구 양반가에서 태어난 듯하고, 7~8세 때 사망한 아버지는 학식있는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지나가다 총검 든 군인에게 붙잡힌 뒤 헌병대에 넘겨져 중국의 한 위안소로 보내진다. 탈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언제나 비정상적 방법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일까. 힘들 때마다 유행가를 열심히 불렀다. 자신에게 칼부림하려던 병사의 칼을 빼앗아(“내가 널 위안하러 왔는데 감히 날 죽이려 하느냐?”며 상대방을 움찔하게 했다) 가슴팍에 꽂아 살해하는 바람에 재판에 넘겨졌는데 여기서도 “천황폐하가 하사한 칼로 황군을 위안하러 온 여자를 죽이려 하다니 마땅히 그가 죽을 만했다”는 논리로 무죄방면받는다. 위안소를 나가 살림을 차라자는 장교에게 “부모님이 보고 싶으니 조선에 들렀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약조를 하고 외출 허가증을 받은 뒤 대구로 돌아온다.
이런 명민한 여자가 위안소를 두 번 갔다. 돌아왔지만 가난에 지쳤고 어차피 버린 몸, 돈이나 벌자는 생각에 부산의 식당일 광고에 응해 배를 탔다. 미얀마 위안소로 가는 배였다. 여기에서도 문옥주는 주요 포스트들과 친하게 지내며 연회 등에 초대받아 팁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만들고, 받은 팁은 악착같이 우체국에 저축했지만 통장을 잃어버려 찾지 못했다. 훗날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자 문옥주는 일본 정부 상대로 저축한 돈을 이자처서 내놓으라고 소송을 건다.
해방 후 집안의 수치가 돼 대구의 권번에 들어간다. 한 사업가의 계처로 들어갔는데, 이 남자는 사업이 실패하자 “무책임하게 죽어버린다”. 다시 기생일을 하다 세 살 연하의 과자공장 주인과 살림을 차린다. 두 집 살림이었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이었다 한다.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깨 살았다는 증언이 나온 건 내가 사례 중엔 유일했다. 이 남자도 일찍 죽는다. 문옥주는 기생일을 하면서 무려 세 가구를 먹여살린다. 어머니와, 전 남편의 자녀들 및 시부모 제사까지 봉양하고 두번째 남편의 본처 소생 자녀까지 키워냈다.
이영훈은 문옥주의 사례에서 욕망에 눈 뜬 자발적 인간상을 발견한다.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읽어내고 위안소 운영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하다. 그는 문옥주가 유행가를 부를 때의 표정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증언에 나섰는지도 상상하지 못하는 거 같다. 그것이 고 문옥주를 해칠 수 없다. 1990년대생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콘텐츠 만드는 시대가 되면 문옥주의 이야기는 멋지게 소설이나 영화가 되지 않을까 . 그런 영화도 만들어지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 운동의 결과였으면 한다.
3. 이용수
이용수의 증언에는 다른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등장한다. 죽기 전날 밤 이용수 방에 들어온 군인이 대표적이다.(영혼결혼식 형태로 위령제 지내준 사람과는 다른 이로 보인다) 그는 “신죽을 떠나서 금파를 헤치고 죽으러 간다. 울어주는 이는 도시꼬(이용수) 너뿐이다”란 가사의 노래를 가르쳐 줬다. “너에게 성병을 옮았는데 네가 주는 선물로 여기련다”는 말을 한다. 이 무슨 개소리인가. 헌데 황국신민이란 이유로 끌려와 죽음을 눈 앞에 둔 젊은이의 두려움, 억울함, 죽고 싶지 않은 심정, 그 와중에도 아니 그 와중이니까 부리는 허세와 가오, 몸부림 등을 처음으로 상상해봤다. 그래 봤자 전시 강간범인데. 이용수 증언이 갖는 이상한 힘이다. 인간의 복합성이 증언에서 살아난다.
위안부 운동은 처음부터 국제연대 운동이었다. ‘기생관광’에 대한 한일 여성들의 반대운동이 있었고, 1980년대 미국 턱밑까지 추격하던 경제대국으로서 자신감도 있었고 당시만 해도 일본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선봉이었으며, 한국은 막 민주화를 해낸 (하지만 군사정권의 인사가 대통령이 된) 나라의 울분과 에너지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인들도 2차 대전의 참화에 대해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이 주효했을 거 같다.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낸 <천황의 전쟁 책임>에는 전쟁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평화헌법 체제로 들어가버린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혼란이 잘 나온다. “난 분명 천황 폐하를 위해 전쟁에 나갔는데, 지금에 와서 전쟁은 안 된다 하고 천황의 책임도 아니라 하면 나는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그 고통스로운 경험을 했단 말인가!”라며 1970년대 중반 일왕 히로히토의 순시에 난입한 한 남자의 사례도 나온다. 도시꼬 어쩌고 하던 놈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한일연대의 곤란함이 나오는데, 일본에서 전쟁의 잔혹함을 가장 깊이 겪은 사람은 참전군인들이고, 그들이 위안소의 이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천황의 책임이 은폐된 일본에서 전쟁을 반성하는 이야기는 쉽사리 자기연민으로 이어지고 이는 한국인들이 납득할 수 없는 태도가 되고 만다. 동시에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같은 전쟁의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안 겪은 한국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간극과 구조적 모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아시아여성기금-사이토안-2015년 한 위안부 합의 등 제도적 노력이 잇달아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한·일은 점점 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위안부 피해자 뿐만 아니라 2차대전 경험자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뜬다. 잃어버린 20년 거치며 일본에는 제국주의형 극우가 아니라 ‘억울충’형 극우가 늘었다. 정대협 책임인가? 2차 대전 강제동원된 황국신민을 같은 전쟁범죄 피해자의 대열에 놓지 않는 것은 개인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의 논리도 있지만, 위안소 내에서 강간 가해-피해 관계를 응시하는 페미니즘 논리도 있다. 그리하여 정대협은 국가주의를 싫어하는 좌파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우파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왔다. 이 난감한 상황의 책임은 미일동맹 체제를 위해 천황의 전쟁책임을 덮은 미국에도 있다. 그러기에 나는 미국의 힘을 이용해 일본을 압박,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나도 정대협에게 왜 운동을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천황제 민주주의와 미국이 압박한 평화헌법 체제의 모순부터 온갖 구조적 문제들을 정대협이 뒤집어 쓴 것도 안다.
정대협은 위안부 합의가 있기 전에도 세계로 나아갔다. 전 세계인에 2차 대전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우간다 등 전쟁 피해자 등을 돕는 방식으로, 위안부 운동을 세계적 운동으로 만들려고 해다. 2015년까지는 세계적으로 형성된 여론이 다시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됐다. 하지만 미국이 (결국은 한미일 동맹 체제의 완성을 위해) 압박한 합의는 결국 ‘파행’으로 귀결됐다. 한국에서의 과거사법처럼 일본 의회에서 ‘화해를 위한 식민지배 및 위안부 사죄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지 않는 한 한국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무조건 안 되는 일이 어딨겠는가. 언젠가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사죄와 배상이, 화해가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먼 훗날의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일본과의 대화 없는 일본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가 시작됐다. 여기엔 정부의 방기 책임도 크나, 일본을 상대하지 않는 사죄요구 운동이 시작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제 윤미향 당선자는 여당 의원이고.
정의연은 장기전을 준비한다. 김학순-김복동의 뜻을 잇는 것.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그들을 기억하는 것. 국내 소녀상의 보급과 해외 김복동센터(전시생존자 쉼터 겸 동아시아-태평양전쟁 중심 2차대전 사료관)건립. 그 외의 사업들이 있다만....가장 잘 알려진 각종 건립 운동은 돈 문제에 휘말리기 쉽다. 단체 역량 만큼 하고 있나. 운동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있다. 소녀상 보급 운동을 하면 일본에서 소녀상 설치 반대운동을 한다. 미국, 독일 등 제 3국 시민의 입장에선 피곤하다. 뭔지 모르겠는데 갈등에 휘말리는 게 싫으니 일본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그걸 막으려면 더 센 ‘일본 망신주기’ 전략이 필요한데, 내가 보기 이건 운동 이전에 활동가부터 망가뜨린다. 김복동 센터도, 비유하자면 남아공에 김대중 센터를 짓는 것보다 현지인들이 만델라 센터를 짓는 걸 돕고, 김대중 센터랑 교류하는 게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내 의견이 반드시 맞다는 보장도 없고, 정의연이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합당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허나 쉬는 날 사료관 일부러 찾아보고 이렇게 주구장창 글을 올리는 사람이 회의를 품으면 설득의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이용수는 “김학순이 시작한 운동을 이용수가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나섰다.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용수 역시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에서 강경파이다. 윤미향 당선인을 둘러싼 언사는 오해가 상당 있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더 밝혀져야 할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일본과의 대화 없는 일본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 세계로 나아가는 역사전쟁, 모금과 건립. 그리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 위안부 당사자. 이 눈으로 현실을 보려고 상상해보자.
대부분 증언들은 괴로움이 뚝뚝 묻어나지만 말하고 나니 후련하다고 끝난다. 이용수는 한 줄 덧대 기회를 준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에 대한 감사까지 덧붙인다. 그는 남에게 관심이 많다. 대체 위안부로 끌려온 사람이 누굴 연민하냐 싶게 죽음을 앞둔 일본 병사에 대한 관찰을 굳이 기억하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보니 1990년대부터 공회전한 이 모순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4.
위안부 문제는 한동안 꽁꽁 숨겨져있어서 문제였지만, 막상 드러나고 보니 너무나 복잡한 이슈였다. 한·일양국에서 ‘연대의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 일본의 2차대전 경험자들이 동시 사라져간다. 이런 상황에서 해야 하는 건 ‘보이는 상징’을 찾아헤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경험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을 복원하도록 만드는 사고력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반일 종족주의를 논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김학순과 문옥주의, 그 외 사람들의 증언을 직접 읽고 상상하고 토론하는 것 아닐까. (몇가지 책을 더 읽으면 좋고) 텍스트 읽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위안부 e역사관 가서 랜덤으로 아무거나 읽으라고 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누구의 증언이든 두 문단쯤 읽고 나면 계속 읽게 될 것이며, 우리는 사죄와 배상을 원하는데 그 사좌와 배상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다. 난 누구나 그 정도 능력은 있다 생각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게 있으면 그 지루한 과정을 견디는 능력이다. 그것이 따지고보면 2015년 합의로도 내몬 셈이다. 밀어붙일 수 있는 건 거의 다 해보았다. 반대로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가, 방치했던 문제에 천착하는 모습을 본다면, 눈앞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더라도 좀 더 후련하지 않을까. 이것 역시 가지 않은 길이다.
이렇게 써 놓으면 내가 위안부 운동 30년사를 실패로 규정한 거 같지만, 그런 판단을 내릴 자격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한국의 성폭력에 대한 관점을 불가역적으로 바꿨고, 이 땅을 사는 여성인 나는 그 수혜자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을 역사의 보호를 받는 '닫힌 정의'로 규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HERMUSEUM.GO.KR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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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박은하
2t975 ftao1inM2ay 42oe0d20 ·
정신대와 위안부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인들은 누구나 정신대(전시 강제노역)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전쟁터 위안소와 위안부의 존재는 몰랐거나 모른 척했다. 정대협이란 명칭과 이용수씨의 회한 서린 원망과 분노도, 자신이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자각도 거기서 시작한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밝히면서 이번의 문제를 정리한 기사. 다음은 내가 따로 정리한 것.
이용수씨는 지금은 일부 여당 지지 성향 시민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지만 2018년만 해도 미디어워치에서 종북세력을 위해 거짓말하는 가짜 피해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실제 그녀는 자신이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 진술을 여러 번 번복한다.
첫 증언에 따르면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거의 방치되다시피 키워진 그는 16살 무렵 친구 김분순네 집에 놀러갔는데, 술장사하는 분순이 어머니는 입은 꼴이 그게 뭐냐고 분순이랑 누구 따라가면 잘 먹고, 잘 입고 다닌다 했다. 분순이 어머니 소개로 만난 국민복 차림의 아저씨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싼 보퉁이를 주며 따라오라했다. 혹해서 따라간 이용수는 기차 타고 바깥구경도 하고 설레다 이틀쯤 지나 엄마 보고 싶다고 옷 필요없다고 돌아가겠다 했으나... 다음은 알다시피이다. (분순이 어머니는 진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난 이 증언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 증언이고 가장 디테일하다. 이용수는 자신이 있던 곳에서 신죽, 가미카제 공군부대란 이름을 기억해 냈고 이는 학자들이 대만 위안소의 존재를 정확히 찾아내는데 기여했다.
이용수의 증언은 2000년대에는 14살, 집에서 잠 자다 총검을 든 군인에게 협박 당해 끌려갔다고 바뀐다. 영화 귀향에서 채택된 이 증언은 일관성이 없었고 증언할 때마다 내용이나 나이가 달라졌다. 군인이 총검을 들고 협박해 여성을 위안부로 끌고 간 사례는 학계 연구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용수가 이런 증언을 할 때마다 국내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그는 한일 극우파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몰렸다. 그걸 30년 가까이 해 왔다.
이용수의 증언은 가난한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빈곤에 의해 약취유인당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초의 증언자 김학순도 비슷했다. 그는 만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의붓아비가 그를 평양권번(기생학교)에 팔아버렸고, 거기서 다시 위안부로 가게 된다.
다른 경로도 있다. 자수가 취미였던 중학생 심미자는 무궁화로 된 한반도 지도 자수를 칭찬받고 일본열도 자수도 해 보라는 교사의 권유에 나팔꽃 일본 자수를 만들었지만, 왜 멀쩡한 일본의 국화 사쿠라를 두고 나팔꽃이냐고 사상이 불순하다는 의심을 받고 정신 교육이 필요하다며 위안부로 끌려간다. 심미자의 아버지는 가출해 행방불명 상태라 경찰이 요주의로 보아오던 터였다. 김복동은 14살 무렵 정신대에 끌려 갈 판이 됐고 딸 못 내놓겠다는 엄마가 맞아 죽을 판이 되자 가겠다 나섰는데 공장이 아니라 위안소에 배치된다. 심미자는 정대협과 대립했고 김복동은 정대협과 함께 했다.
종합해보면 위안부는 식민지 여성 중에서도 가난하고 가족의 보호를 못 받고, 정상성의 범주에 벗어나 있다 여겨진 사람들이 갔다. 취업사기 형태도 있고 정신대 차출자 중에 일부도 포함됐다. 정신대 차출은 흔히 알려진 학교를 통한 강압의 과정이 있었고 12살의 아주 어린 소녀들도 동원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위안부 이야기랑 가깝다. 정신대 자체도 국가가 벌일 수 있는 극악의 폭력이다. 위안부의 경우 전쟁을 벌이고 사회 가장 말단의 여성을 착취하도록 업자들과 거래한 국가 '일본 제국'의 최종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어느 단계에서 기각됐고 이용수는 계속 바뀌는 증언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를 증언에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돈을 낸다. 이걸 봐온 이용수의 심정은?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는 한국 사회는 이러한 현실을 사려 깊게 성찰할 수 없었고, 정신대의 기억이 섞이고, 양공주라고 불린 기지촌 성매매 여성에 대한 혐오감 등이 겹치먼서, 혹은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고 결과가 중요하단 운동 방법론(?)에 의해 이용수나 김학순의 첫 증언은 서사로서 기각되고, 김복동의 증언이 좀 더 과장을 거쳐 대표 서사로 채택된다. 이용수의 증언이 바뀌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위안부 운동진영의 큰 책임이 있다. 정신대에서 위안부를 분리해낸 계기를 제공한 건 정대협의 공로이고, 정대협 활동이 커지면서 성매매 이론 연구나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도 목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정대협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남성 지식인들이 여기 딱히 뭘 기여했나 싶다. 원래 식민지 조선 민족주의 활동가들은 전세계 피압박민족에 대한 동질감이 있던 세계주의자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용수가 첫 증언과 배치되는 진술을 하게 만든 과정은 반드시 규명돼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억울하다, 이용당했다, 정대협은 고쳐서 못 쓴다는 본질이 이것 아닐까. 이유가 뭐가 됐든 이 역시나 한 인간에 대한 폭력이자, 위안부 운동을 위태롭게 만든 요인이다. 그리고 이용수 진술을 채택하면 극우에 이용된다는(실제 공창, 자발적 매춘 얘기가 나온다) 발상으로 그랬다면 그게 운동이 망하는 이유다. 회계 문제도 그런 발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극우를 꺾는 게 이 운동의 본질인가. 그때 한국사회가 너무 보수적이라 그랬다. 그런 사과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안 그러먼 이용수 첫 증언이 틀렸디고 입증하거나. 이런 식으로 대의만 강조하는 운동이 개인을 구원할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으니 뭉갤수록 위태로운 건 정대협의 역사다.
1998년 언론이 가십뉴스로 다룬 이용수의 영혼 결혼식 재조명되며 미디어워치 이상의 막말이 또 쏟이지고 있다. 대만 위안소 시절 이용수는 맞아서 초주검이 됐는데 한 일본군 병사가 뒷산에 묻어주겠다며 빼돌려 몰래 돌봐줬고, 내가 죽어서 네가 고향에 무사히 가도록 돕는 신이 되겠다는 (일본 신토 종교관에 따른) 말을 해 줬다 한다. 이름도 모르던 그 병사와의 영혼 결혼식을 올렸단 것이다.(정확히는 이용수씨랑 그 병사와 올렸다는 게 아니라 영혼결혼식 형태로 위령제를 지내줬다) 이용수씨 뭐랄까...참 다채롭고 재밌는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그 일본군 병사도 강제로 끌려왔거나 황국신민 사상으로 자원했어도 전쟁참화에서 이건 아니다 후회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옥같은 상황서 너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저 한 마디가 17살 이용수의 기억에 크게 남은 듯 하다. 이걸 일반화해서 낭만적 관계로 포장하는 건 위험하다. 심미자에게도 잘해준 일본군 장교가 있었고 심미자는 그에게 자신을 데리고 나가 줄 것을 부탁도 했지만, 장교와 함께 외출했다 평온하게 연애하는 일본 젊은이 남녀를 보고 분노를 느낀다. 김복동은 사랑과 관해선 평생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다 했다. 이용수의 사례도 주검 직전이 되도록 맞았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즉, 강제로 끌려온 황국신민 군인이 속아서 끌려온 식민지 조선인 위안부를 학대하며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을 견뎠다는 것). 위안부 운동에 대한 한일 연대는 이래서 잘 안 되지만(일:우리 모두 전쟁의 피해자에요/한: 닥쳐. 너넨 성 구매재잖아) 전쟁이란 상황에서 개인이 겪는 절망과 고통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다.
첫 증언대로라멷 친구 엄마의 말과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혹해서 낯선 사람을 따라 간 가난하고 순진하고 소박한 물욕도 있었던 소녀. 스스로의 물욕에 얼마나 자학하는 삶을 살았을까 싶다. 그것이 정신대와 위안부 사이의 결정적 차이일지도 모른다. 정대협 결성 소식을 듣고 "내 친구 이용수가 겪었던 일"이라고 전화 걸었을 만큼 수치심을 느낀 것엔 가죽구두에 혹했던 자신에 대한 수치심도 포함된 거 아닐까. 반대로 가죽구두에 혹해 따라나선 이용수를 안아주고 미안해하고 그거 네 잘못 아니리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그리고 총검에 의해 끌려갔다고 말 하게 만들어서 미안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해걸된 거다.
그래서 나는 정의연이 이용수의 증언 변화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에 갇힌 운동입네 등 동의하지도 않고 손가락질하고 싶은 입장이 아니라 더욱 그렇다. 정대협의 권유에선지 기자의 농간인지, 본인이 사회 분위기에 눈치 본 걸 묵인한 건지. 정대협 바깥이 문제인데 정대협이 다 뒤집어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극 해명하지 않은 건 사실이고. 이용수는 총검에 협박당해 끌려간 순결한 누이가 아니라면 더욱 미안하고 감히 감사할 따름이다.
사학과 나오기도 했고, 정대협이 한때 취재처이기도 하여 이런저런 자료를 전부터 봐왔는데 이 기사가 한 조각 퍼즐이 됐다.

H2.KHAN.CO.KR
[정리뉴스]'위안부'는 소문과 괴담이던 시절...그들도 정신대라 불렸다
“정신대와 위안부가 다르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부끄럽습니다”
309Insu Bae, 정승국 and 30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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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1t 75Jftao1inu2ne 42oe0d20 ·
토요일에 위안부 문제를 하루 종일 이고 있다가 e역사관에서 증언들을 읽었다. 마음이 아픈데 흥미로웠고 뭔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증언에 증언자의 얼굴이 있었달까. 공통의 비참을 증언하면서도 각자의 결이 달랐다. 그 결이 만든 틈새에 실마리가 있었다. 그 증언을 정리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용수씨 기자회견 이후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불확실한 팩트들이 있고 나도 품고 있는 의심이 있고 취재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알려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당분간 이번 사태에 관한 글은 안 쓰려 한다.
1. 김학순
김학순은 자신의 삶을 두고 “부모 복이 없더니 남편 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다”고 말했다. 김학순이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딸에게 “애비 잡아먹었다”며 화풀이를 했다. 어머니가 의지한 곳은 교회였다. 김학순도 교회 다니던 시절이 좋았다 했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재밌었고, 언니, 오빠들이 예뻐해주니까. 어머니 재혼 상대인 의붓 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해 불화가 더 벌어졌고, 아버지가 그를 40원 받고 평양권번에 팔았을 때 차라리 불편한 집보다 권번에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17살에 권번을 졸업했으나 조선에서는 19세가 돼야 기생 영업이 가능했다. 양아버지(권번 주인)는 규제가 느슨한 만주에 가서 영업좀 시켜보려 두 양딸(즉 기생)을 데리고 기차에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헌에 붙잡히고, 김학순은 위안소로 넘겨진다.
위안소 생활 중 조선인 남자가 김학순의 방에 들어온다. 군인들이 출정 나간 틈을 타 강간하러 들어온 것이었지만, 김학순은 “나갈 때, 나를 함께 데려가지 않으면 소리지르겠다”고 하여 남자의 잠입 루트대로 위안소를 탈출한다. 마약상으로 추정되는 이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아들 보는 앞에서도 “일본군에게 몸 팔았다”며 김학순을 학대했다. 딸은 1945년 귀국 뒤 콜레라로, 남편은 1953년에 사망했다. 아들은 12살 때 바다에서 놀다 익사했다. 김학순은 이 때 삶을 놓아버리려했지만, 어떻게든 살 마음을 먹고 버티어 1991년 첫 증언자가 된다. 여성을 사고 파는 식민지 자본주의 시장에서 ‘아버지들’의 뜻에 따라 거래돼며 위안소까지 갔지만, 탈출하고, 살아남기로 하고, 증언하기로 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었다.
김학순은 일본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정의연의 운동 목표가 됐다. 그의 증언은 구조적 폭력이 발톱을 드러내고 삶을 할퀴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 상흔은 가난, 전쟁, 빈곤, 폭력, 여성의 문제를 너무 뚜렷히 드러내고 있다. 반일의 도상에 발걸음이 멈출 수가 없는, 쉽사리 화해로 덮어비릴 수 없도록 한다. 운동의 운명은 여기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2, 문옥주
문옥주는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이다. 대구 양반가에서 태어난 듯하고, 7~8세 때 사망한 아버지는 학식있는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지나가다 총검 든 군인에게 붙잡힌 뒤 헌병대에 넘겨져 중국의 한 위안소로 보내진다. 탈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언제나 비정상적 방법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일까. 힘들 때마다 유행가를 열심히 불렀다. 자신에게 칼부림하려던 병사의 칼을 빼앗아(“내가 널 위안하러 왔는데 감히 날 죽이려 하느냐?”며 상대방을 움찔하게 했다) 가슴팍에 꽂아 살해하는 바람에 재판에 넘겨졌는데 여기서도 “천황폐하가 하사한 칼로 황군을 위안하러 온 여자를 죽이려 하다니 마땅히 그가 죽을 만했다”는 논리로 무죄방면받는다. 위안소를 나가 살림을 차라자는 장교에게 “부모님이 보고 싶으니 조선에 들렀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약조를 하고 외출 허가증을 받은 뒤 대구로 돌아온다.
이런 명민한 여자가 위안소를 두 번 갔다. 돌아왔지만 가난에 지쳤고 어차피 버린 몸, 돈이나 벌자는 생각에 부산의 식당일 광고에 응해 배를 탔다. 미얀마 위안소로 가는 배였다. 여기에서도 문옥주는 주요 포스트들과 친하게 지내며 연회 등에 초대받아 팁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만들고, 받은 팁은 악착같이 우체국에 저축했지만 통장을 잃어버려 찾지 못했다. 훗날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자 문옥주는 일본 정부 상대로 저축한 돈을 이자처서 내놓으라고 소송을 건다.
해방 후 집안의 수치가 돼 대구의 권번에 들어간다. 한 사업가의 계처로 들어갔는데, 이 남자는 사업이 실패하자 “무책임하게 죽어버린다”. 다시 기생일을 하다 세 살 연하의 과자공장 주인과 살림을 차린다. 두 집 살림이었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이었다 한다.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깨 살았다는 증언이 나온 건 내가 사례 중엔 유일했다. 이 남자도 일찍 죽는다. 문옥주는 기생일을 하면서 무려 세 가구를 먹여살린다. 어머니와, 전 남편의 자녀들 및 시부모 제사까지 봉양하고 두번째 남편의 본처 소생 자녀까지 키워냈다.
이영훈은 문옥주의 사례에서 욕망에 눈 뜬 자발적 인간상을 발견한다.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읽어내고 위안소 운영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하다. 그는 문옥주가 유행가를 부를 때의 표정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증언에 나섰는지도 상상하지 못하는 거 같다. 그것이 고 문옥주를 해칠 수 없다. 1990년대생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콘텐츠 만드는 시대가 되면 문옥주의 이야기는 멋지게 소설이나 영화가 되지 않을까 . 그런 영화도 만들어지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 운동의 결과였으면 한다.
3. 이용수
이용수의 증언에는 다른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등장한다. 죽기 전날 밤 이용수 방에 들어온 군인이 대표적이다.(영혼결혼식 형태로 위령제 지내준 사람과는 다른 이로 보인다) 그는 “신죽을 떠나서 금파를 헤치고 죽으러 간다. 울어주는 이는 도시꼬(이용수) 너뿐이다”란 가사의 노래를 가르쳐 줬다. “너에게 성병을 옮았는데 네가 주는 선물로 여기련다”는 말을 한다. 이 무슨 개소리인가. 헌데 황국신민이란 이유로 끌려와 죽음을 눈 앞에 둔 젊은이의 두려움, 억울함, 죽고 싶지 않은 심정, 그 와중에도 아니 그 와중이니까 부리는 허세와 가오, 몸부림 등을 처음으로 상상해봤다. 그래 봤자 전시 강간범인데. 이용수 증언이 갖는 이상한 힘이다. 인간의 복합성이 증언에서 살아난다.
위안부 운동은 처음부터 국제연대 운동이었다. ‘기생관광’에 대한 한일 여성들의 반대운동이 있었고, 1980년대 미국 턱밑까지 추격하던 경제대국으로서 자신감도 있었고 당시만 해도 일본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선봉이었으며, 한국은 막 민주화를 해낸 (하지만 군사정권의 인사가 대통령이 된) 나라의 울분과 에너지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인들도 2차 대전의 참화에 대해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이 주효했을 거 같다.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낸 <천황의 전쟁 책임>에는 전쟁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평화헌법 체제로 들어가버린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혼란이 잘 나온다. “난 분명 천황 폐하를 위해 전쟁에 나갔는데, 지금에 와서 전쟁은 안 된다 하고 천황의 책임도 아니라 하면 나는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그 고통스로운 경험을 했단 말인가!”라며 1970년대 중반 일왕 히로히토의 순시에 난입한 한 남자의 사례도 나온다. 도시꼬 어쩌고 하던 놈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한일연대의 곤란함이 나오는데, 일본에서 전쟁의 잔혹함을 가장 깊이 겪은 사람은 참전군인들이고, 그들이 위안소의 이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천황의 책임이 은폐된 일본에서 전쟁을 반성하는 이야기는 쉽사리 자기연민으로 이어지고 이는 한국인들이 납득할 수 없는 태도가 되고 만다. 동시에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같은 전쟁의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안 겪은 한국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간극과 구조적 모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아시아여성기금-사이토안-2015년 한 위안부 합의 등 제도적 노력이 잇달아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한·일은 점점 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위안부 피해자 뿐만 아니라 2차대전 경험자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뜬다. 잃어버린 20년 거치며 일본에는 제국주의형 극우가 아니라 ‘억울충’형 극우가 늘었다. 정대협 책임인가? 2차 대전 강제동원된 황국신민을 같은 전쟁범죄 피해자의 대열에 놓지 않는 것은 개인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의 논리도 있지만, 위안소 내에서 강간 가해-피해 관계를 응시하는 페미니즘 논리도 있다. 그리하여 정대협은 국가주의를 싫어하는 좌파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우파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왔다. 이 난감한 상황의 책임은 미일동맹 체제를 위해 천황의 전쟁책임을 덮은 미국에도 있다. 그러기에 나는 미국의 힘을 이용해 일본을 압박,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나도 정대협에게 왜 운동을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천황제 민주주의와 미국이 압박한 평화헌법 체제의 모순부터 온갖 구조적 문제들을 정대협이 뒤집어 쓴 것도 안다.
정대협은 위안부 합의가 있기 전에도 세계로 나아갔다. 전 세계인에 2차 대전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우간다 등 전쟁 피해자 등을 돕는 방식으로, 위안부 운동을 세계적 운동으로 만들려고 해다. 2015년까지는 세계적으로 형성된 여론이 다시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됐다. 하지만 미국이 (결국은 한미일 동맹 체제의 완성을 위해) 압박한 합의는 결국 ‘파행’으로 귀결됐다. 한국에서의 과거사법처럼 일본 의회에서 ‘화해를 위한 식민지배 및 위안부 사죄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지 않는 한 한국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무조건 안 되는 일이 어딨겠는가. 언젠가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사죄와 배상이, 화해가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먼 훗날의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일본과의 대화 없는 일본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가 시작됐다. 여기엔 정부의 방기 책임도 크나, 일본을 상대하지 않는 사죄요구 운동이 시작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제 윤미향 당선자는 여당 의원이고.
정의연은 장기전을 준비한다. 김학순-김복동의 뜻을 잇는 것.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그들을 기억하는 것. 국내 소녀상의 보급과 해외 김복동센터(전시생존자 쉼터 겸 동아시아-태평양전쟁 중심 2차대전 사료관)건립. 그 외의 사업들이 있다만....가장 잘 알려진 각종 건립 운동은 돈 문제에 휘말리기 쉽다. 단체 역량 만큼 하고 있나. 운동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있다. 소녀상 보급 운동을 하면 일본에서 소녀상 설치 반대운동을 한다. 미국, 독일 등 제 3국 시민의 입장에선 피곤하다. 뭔지 모르겠는데 갈등에 휘말리는 게 싫으니 일본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그걸 막으려면 더 센 ‘일본 망신주기’ 전략이 필요한데, 내가 보기 이건 운동 이전에 활동가부터 망가뜨린다. 김복동 센터도, 비유하자면 남아공에 김대중 센터를 짓는 것보다 현지인들이 만델라 센터를 짓는 걸 돕고, 김대중 센터랑 교류하는 게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내 의견이 반드시 맞다는 보장도 없고, 정의연이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합당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허나 쉬는 날 사료관 일부러 찾아보고 이렇게 주구장창 글을 올리는 사람이 회의를 품으면 설득의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이용수는 “김학순이 시작한 운동을 이용수가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나섰다.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용수 역시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에서 강경파이다. 윤미향 당선인을 둘러싼 언사는 오해가 상당 있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더 밝혀져야 할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일본과의 대화 없는 일본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 세계로 나아가는 역사전쟁, 모금과 건립. 그리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 위안부 당사자. 이 눈으로 현실을 보려고 상상해보자.
대부분 증언들은 괴로움이 뚝뚝 묻어나지만 말하고 나니 후련하다고 끝난다. 이용수는 한 줄 덧대 기회를 준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에 대한 감사까지 덧붙인다. 그는 남에게 관심이 많다. 대체 위안부로 끌려온 사람이 누굴 연민하냐 싶게 죽음을 앞둔 일본 병사에 대한 관찰을 굳이 기억하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보니 1990년대부터 공회전한 이 모순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4.
위안부 문제는 한동안 꽁꽁 숨겨져있어서 문제였지만, 막상 드러나고 보니 너무나 복잡한 이슈였다. 한·일양국에서 ‘연대의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 일본의 2차대전 경험자들이 동시 사라져간다. 이런 상황에서 해야 하는 건 ‘보이는 상징’을 찾아헤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경험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을 복원하도록 만드는 사고력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반일 종족주의를 논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김학순과 문옥주의, 그 외 사람들의 증언을 직접 읽고 상상하고 토론하는 것 아닐까. (몇가지 책을 더 읽으면 좋고) 텍스트 읽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위안부 e역사관 가서 랜덤으로 아무거나 읽으라고 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누구의 증언이든 두 문단쯤 읽고 나면 계속 읽게 될 것이며, 우리는 사죄와 배상을 원하는데 그 사좌와 배상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다. 난 누구나 그 정도 능력은 있다 생각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게 있으면 그 지루한 과정을 견디는 능력이다. 그것이 따지고보면 2015년 합의로도 내몬 셈이다. 밀어붙일 수 있는 건 거의 다 해보았다. 반대로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가, 방치했던 문제에 천착하는 모습을 본다면, 눈앞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더라도 좀 더 후련하지 않을까. 이것 역시 가지 않은 길이다.
이렇게 써 놓으면 내가 위안부 운동 30년사를 실패로 규정한 거 같지만, 그런 판단을 내릴 자격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한국의 성폭력에 대한 관점을 불가역적으로 바꿨고, 이 땅을 사는 여성인 나는 그 수혜자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을 역사의 보호를 받는 '닫힌 정의'로 규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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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243정승국, YoonSeok Heo and 24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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