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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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95t SpOocnsctobe3rmf 2020d1t ·
위안부 문제로 일본 정부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극도로 안 좋지만, 국가가 개인에게 행한 폭력을 인정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것은 한국 역시 대단히 인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우성씨도 여지껏 간첩혐의 누명 벗는데 다 쓰고 그 누명을 씌운 범죄에 대해 이제 겨우 재판이 시작되고 무림사건은 이제사 반공법 위반에 무죄가 나오지 않나. 그런 걸음마 단계의 책임에 관한 내용이다. 과거엔 민주화운동 보상금 받으면 국가와 화해한 걸로 간해 고문 등에 국가 상대 손배소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다. 그 과거가 최근이고...

M.KHAN.CO.KR
[단독]‘민주화운동 정신적 배상 가능’ 헌재 결정 부정한 판결,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지난해 9월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고문 등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는 가...
26정승국 and 2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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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19 JauSt80nuonarys 2g90ld1i1h7 ·
위안부 소녀상.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있어선 안 될 존재가 힘겹게 그 존재를 알렸고, 여기까지 오는데 하나의 마침표로 세워졌다. 위안부 피해자를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에 가둔다는 비판도 타당하나 쉬운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성 노예'가 좀 더 적확한 개념이라도 1920년대 태어난 할머니들이 그 표현을 끔찍하게 여기고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해 '종군' 떼고 '위안부'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사자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은 고려할 것들이 많다. 소녀상 있다고 학술적으로 다른 연구 안 된 것도 아니고.
소녀상은 일종의 이정표라고 생각한다. 이정표에 집착하면 곤란하지만 불필요하다고 보진 않는다. 수요집회와 소녀상이 세워지는 과정을 보며 이를 문제의 해결 과정이라 인지하고 중국, 대만, 그리고 우간다 등 내전 지역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용기를 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녀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주관적이고 제각각 아닌가. 나는 이 소녀상의 통통한 볼과 쌍꺼풀 없는 눈매를 보며 '갸날프다'기 보단 '고집 되게 세게 생겼네'라고 생각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단 느낌도 들고. 소녀상을 보면서 젊은 시절을 보상받는 듯 위로받는다는 할머니들도 있고. 그러하니 '돈 줄게 소녀상 치우고 다신 한 마디도 하지마'란 일본 정부의 태도를 용인할 수 없지만, 또 독도에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건 뭐냐. 반일반한감정만 자극하고 본말을 뒤섞는 것...... ㅜ.ㅜ
이런 사태를 야기한 협정의 근원적 문제는 정부가 해선 안 될 약속을 해버렸단 것. 사법부와 행정부의 판단으로 본 위안부 협의의 역사랄까. 짧은 칼럼 안에 잘 요약돼 있다. 핵심은 요거다.
"‘정의의 회복’이라는 낭만적인 발상의 재협상 요구는 ‘조센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프레임에 뛰어드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프레임은 ‘약속의 절대성’이 아니라 ‘청구권의 유효성’이다. "
공부용으로 권합니다.

NEWS.KHAN.CO.KR
[기자칼럼]조센진의 거짓말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맘때쯤 신년회가 있었다. 예약한 중국집이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이라 오후 5시45분에 전철역에서 모여 가기로 했다. 5시35분쯤 도착하니 개찰구 앞에 상당수가 있었고, 5시44분에 마지막 멤버까지 40여명이 모두 모였다. 당시 어느 변호사단체의 옵서버이기도 했다. 여름 총회에서 2년 임기 회장을 새로 뽑았다. 이날 이사진이 모여 2년치 이사회 날짜도 정했다. 수첩들을 펼쳐 약속이 없는 날짜를 맞춰 가는데, 다다음해 봄의 약속이 잡힌 사람이 여럿이었다.
107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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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h2t1o M79s92aayg 200g2dlmli10 ·
2014년 8월 엄청 더웠던 어느 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는 광화문광장에 왔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의 이름으로 세월호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 위해.
지면과 기자 노동시간과 대중의 관심사에는 한도가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도 겨우 재점화돼 알려진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뒷전으로 밀리긴 할 텐데 괜찮냐"라고 내가 물어보니 그가 답하기를 "당대에 아이들이 죽어간 사건도 해결 못 하는 사회가 30년 전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마음에 쿵 박힌 말이었다. 이렇게 적으니 굉장히 쿨해 보이지만 굉장히 힘든 상황에서 힘든 과정을 거쳐 나온 말이었다.
한종선씨를 알게 된 건 어떤 세미나에서. 진도 어부 간첩 조작사건 등 재심이 이뤄지던 국가폭력 사건 피해자들 트라우마 관한 세미나였는데, 진실의 힘 재단 이사 강용주씨가 소개해줬다. 광주, 간첩조작 사건, 형제복지원, 세월호 등이 연결돼 있고 운동의 진행 방식에 공통점도 있으면서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다른 사건이니까 당연한데. 위안부 운동도 그렇다. 국가를 상대로 한 당사자 운동에 획은 그은 사건은 정대협 출현과 위안부 운동의 시작이다. 이 운동은 고백은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집단이 있어야 운동이 된단 사실을 알게 했고(위안부 커밍아웃은 1975년부터 있었으나 정대협이 결성되고 나서야 김학순씨의 증언이 사회적 힘을 발휘했다) 운동이 물신화와 성역화로 어딘가 어긋나는 과정도 보여줬다. 그리고 피해자는 단수나 아니고, 제각기 의견이 달라. 피해생존자 당사자 운동은 항상 그 지난한 과정을 떠안는 이의 헌신을 요구했다. 이 과정은 앞서 언급한 모든 사건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사회운동을 취재하는 건 그래서 인간의 헌신과 인간에 대한 환멸을 동시 느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걸 딛고 세상이 좋아진다.
하여 거꾸로, 형제복지원 문제를 해결한다면 다른 문제인들 해결을 못 하겠나 싶은 것이다.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그 마음으로 이뤄낸 한 발짝이다. 이 역시 해결까지는 지난하고 무수한 난관이 있겠지만 시민 A로서라도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M.HANKOOKILBO.COM
[속보] 국회, 과거사법 통과… ‘형제복지원 재조사’ 길 열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등을 위한 과거사법 처리를 요구하며 지난 5일부터 국회 의원회관에서 고공 농성을 하던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씨(오른쪽)가 7일 오후 농성을 풀고 지상으로 내려온 뒤 4.9통일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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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11t 0t9S1ep9ntg7emlmhob9herlr 2017 ·
엄청 중요한 거 하네요. 마감이라 못 가는데 ㅠ.ㅠ 한일 여성들이 학술적으로 논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게 가장 기쁩니다. 정의기억재단도 주최 측에! '위안부' 문제의 기원은 요시와라(유곽)를 낭만화하는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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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20u7iS Fe1brua5rylr 201d5 ·
'위안부제도'라는 용어보다는 '위안소제도'라는 용어가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더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라고 하면 한 개인, 여성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이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큰 틀의 구조에 초점을 맞춰서 인식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대협'이 평화비를 세움으로써, 소녀가 아닌 피해자들은 "내가 피해자다"라고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에서의 인식의 문제에서 비롯된 일이다. 여기에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위안소 문제'라는 이름으로 복잡하게 표현해야 했던 개념을 단칼에 정리. ㄱ- 인터뷰도 잘 했다. 그리고 속 쓰려...

PRESSIAN.COM
"위안부 아니라 위안소 문제, 명백한 국가 범죄"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을 짚어보는 두 번째 순서는 충남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 윤명숙 전임연구원 인터뷰다. 윤 전임연구원은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던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 증언 이후
58Greg Kim and 5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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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9 0NSp1ov3efmsb0er7 20o1274 ·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1937년 5월. 안창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에서 검사에게 한 말.
80년이 지난 시점에서 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다. 일본 정부가 정상회담 만찬에 독도새우를 올리고 위안부 생존자를 초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에 분개하거들랑 말해주고 싶다. 그러게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원한 품은 2천만을 국민으로 포함시켜 좋을 게 없다고.
냉전 이후 동북아 세계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구도로 흘러온 것 같지만 의외로 이건 잘 되지 않았는데 변수는 한국의 반일감정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끊임없이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를 ‘국민정서’ 차원에서 뒤흔들었고, 그 책임은 결국 일본에 있고 일본이 패전국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 되는 과정에 있다.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도 생각했으나 안창호 선생의 글을 보니 100년 전부터 예정된 것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유관할 것을 보이는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한국인의, 나아가 피식민 국가의 ‘원한’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그것은 대통령이 흑인인 것과 무관하게 20세기 백인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임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한국 정부는 저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피식민 국가로서의 존재를 드러내는 게 '탈민족주의'를 내건 화해보다 인류의 야만에 경종을 울리는 것 아닌가.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위안부 피해생존자 이용수씨 포옹 장면 사진은 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게 하는 사진이다. 그것은 트럼프가 ‘여혐’의 선도주자여서만은 아니다. 다음은 지난 7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위안부 모습이 담긴 영상을 찾아낸 학자 3명의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그것이 왜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발견됐을까?
강성현 연구원은 “2차대전 때 미군에게 위안부는 ‘심리전’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미군이 남긴 기록을 보면 미군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드러난다. 1942년 12월 미군 보고서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가 어렴풋이 언급되지만 미군은 정확한 실체를 몰랐다. 당시에는 위안부를 prostitute(매춘부), 게이샤 걸 등으로 표현했다. 1944년쯤 되면 미군은 위안부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용어도 위안부(comfort women)로 바뀐다. “조선인의 분노를 자아내 반일 폭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는 소재라 파악하고 이를 위해 기록을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흐지부지된다. 종전 후 새롭게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미국의 적에서 공산진영에 맞설 협력자로 변했다. 미국은 ‘위안부’와 같은 소재를 자극하지 않는 쪽이 한·미·일 안보체제 구축에 낫다고 판단했다. 위안부 문제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유 중 하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위안부의 설립과 운영은 일본의 군사주의-국가주의-가부장주의와 식민지 차별까지 결합된 문제다만, 위안부의 은폐는 단순히 한국의 가부장주의와 순결주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을 때도 한편으로는 살짝 괘씸했다. 미국의 책임을 전혀 안 말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니까 국가 미국과 분리해야 하지만, 또한 역사학자니까 1940년대 미국의 태평양 전략을 모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분명 인권에 친화적인 오바마 같은 사람의 동북아 전략을 승인한 게 아닌가.
국가 한미일의 각각의 이해와 전략이 담긴 제도의 위압을 뚫고 드디어 위안부 문제 해결이란 집단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부를 만들어낸 데까지 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진은 결국 ‘딸을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를 몰아내고, ‘누이를 지켜줄 오빠’를 대신 세워둬서 만든 연출. 프란치스코 교황이 명동성당에서 고개를 숙여 위안부 생존자들의 손을 맞잡은 사진으로 이미지 연출을 했던 것에 비교하면 답답한 일이다. 외교의 논리란 그런 것이고 모로가도 해결만 한다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저것은 위안부 운동이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했던 ‘전도된 가부장주의’의 연출을 증명하는 것이 돼 버렸고, 정대협에서 저 기획안을 통과시켰느냐는 비난도 나오는데, 청와대 이미지 연출가들이 그런 이미지 연출 전에 협의하지도 않고, 정대협에 권한도 없을 텐데...?
아, 물론 우에노 치즈코상이 역시 위안부 운동은 전도된 가부장주의와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 일단은 욕부터 하고 싶지만, (니가 전도된 국가주의다!!!) 저기요...당신이 자발성의 이름으로 외면하는 일본 내 여성인권운동을 지금 한국 위안부 운동가가 대신 얘기하고 있어요. 그 다음은 <안창호 평전>을 읽어보시고요. 국가주의는 안창호 선생이 일본에 먼저 경고 했어요. (안창호-이토 히로부미 대담에도 나옵니다)여하간에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만드는 이미지 연출은 싫다. 정유재란 때 진린을 접대하는 이순신의 심정 정도가 이해의 한도이다.
탈식민 여성주의의 길은 너무나 힘든 것. 탈식민 민주까지 해낸 국가에서 해도 그 끝을 봐야 하지 않겠냐마는.

NEWS.KHAN.CO.KR
“공감 이뤄내는 진실의 힘” …위안부 연구팀 3인이 전하는 영상 발굴 풀스토리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는 근·현대 문서가 100억장, 영상 필름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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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25 Novp96ne8m1biger40 20m190 ·
지난 넉 달 동안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동’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실력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태의 전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를 소홀히 다루다가 한·일 갈등에 미국까지 끌어들이는 자충수를 둔 끝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사태의 핵심인 강제징용 문제는 여전히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제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외교안보라인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 이 사람들에게 더 이상 국가 안보를 맡길 수는 없다.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911242207015
기자칼럼의 처음과 마지막 문단. 더불어 정의당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분노를 금치 못하겠다. 지소미아 파기와 수출규제와 위안부•강제징용 문제를 세트로 엮는 것이 진보적 입장이라고 믿어도 문제고 믿게 만들었다는 것도 문제다. 정치의 역할을 적극 활용해야 할 진보정당이 국회의원 세비 축소•완전 개방형 국민경선 이야기 따위나 하고 있고. 누구의 판단인가.

M.KHAN.CO.KR
[기자메모]한국 외교실력 드러낸 ‘GSOMIA 파동’
지난 넉 달 동안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동’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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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via 경향신문
154t cA0Sugg8ounss1oet0 20315 ·
1982년 10월 스물여덟 살의 초등학교 교사 장솽빙(張雙兵·61)은 새로 발령난 중국 산시성 가오좡촌(高庄村)의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늘 혼자였던 허우둥어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이날도 너른 논에서 혼자 일하고 있었다. 가난한 농촌마을에선 이 할머니의 소문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주홍글씨가 할머니를 옥죄고 있었다. 장솽빙은 할머니의 비극적인 삶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쓸데없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매일 할머니를 찾아갔다. 1992년 6월 어느 날, 할머니는 “지옥 같았던 인생 들어서 뭐하게 이 사람아”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힘겹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 중국 위안부 피해자들을 끄집어 낸 중국 활동가들이 지난 13일 경향신문을 찾았습니다. 중국의 이 할머니도 듣는다는 사람이 나타난 상태에서도 말하기까지10년이 걸렸습니다.

NEWS.KHAN.CO.KR
“한·중 정부,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만든 대책으로 일본 압박해야”
중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위안부 피해 연구가 시작됐다. 전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격화된 것도 전쟁범죄 피해자들을 조기에 치유하지 못한 요인이다.
16Maria Kim and 1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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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014a6c 0Julg1olny714d 020319 ·
문제를 좁히지도 키우지도 않는, 명확하고 디테일한 글. 다음 대목들이 인상적이다.
1. 그러나 제한된 자원을 갖고 고속성장을 해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던 우리 경제가 만약 중간 단계까지 모두 국산화를 해가면서 전진하고자 했다면 지난 50년간의 고속성장은 과연 가능했을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품, 소재 산업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의존이 전 세계적인 공급망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하고 있었고 그러한 공급망의 확대를 통해서 우리는 물론 일본도 이득을 봤다는 사실이다.
2. 쉽게 말해 아베 총리는 이번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는 한국 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상응조치라는 것이다. (중략) 물론 우리 측으로서는 우리 나름의 설명을 할 수 있다. 위안부 합의의 경우에는 성립 과정에서 근본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지킬 수 없었다든가, 징용 문제의 경우에는 우리 정부가 해석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든가 설명을 제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엄연히 자기 입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외면하고 ‘일본의 조치에는 국내 정치적 의도가 있을 거야’, 혹은 ‘우리 경제를 파괴하려는 의도가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추리만 거듭하는 것도 진지한 협상을 바라는 입장이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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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아베 공세가 선거용이 아닌 이유
장부승 관서외국어대 교수·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박사 한·일 간 경제전쟁이 개시됐다. 외교적 갈등이 경제를 수단으로 하는 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지난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대한국 수출관리 운용방식 개정 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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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hyun Beck
811 Juiunceio3 84s20ru920 ·
박은하
토요일에 위안부 문제를 하루 종일 이고 있다가 e역사관에서 증언들을 읽었다. 마음이 아픈데 흥미로웠고 뭔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증언에 증언자의 얼굴이 있었달까. 공통의 비참을 증언하면서도 각자의 결이 달랐다. 그 결이 만든 틈새에 실마리가 있었다. 그 증언을 정리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용수씨 기자회견 이후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불확실한 팩트들이 있고 나도 품고 있는 의심이 있고 취재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알려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당분간 이번 사태에 관한 글은 안 쓰려 한다.
1. 김학순
김학순은 자신의 삶을 두고 “부모 복이 없더니 남편 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다”고 말했다. 김학순이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딸에게 “애비 잡아먹었다”며 화풀이를 했다. 어머니가 의지한 곳은 교회였다. 김학순도 교회 다니던 시절이 좋았다 했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재밌었고, 언니, 오빠들이 예뻐해주니까. 어머니 재혼 상대인 의붓 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해 불화가 더 벌어졌고, 아버지가 그를 40원 받고 평양권번에 팔았을 때 차라리 불편한 집보다 권번에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17살에 권번을 졸업했으나 조선에서는 19세가 돼야 기생 영업이 가능했다. 양아버지(권번 주인)는 규제가 느슨한 만주에 가서 영업좀 시켜보려 두 양딸(즉 기생)을 데리고 기차에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헌에 붙잡히고, 김학순은 위안소로 넘겨진다.
위안소 생활 중 조선인 남자가 김학순의 방에 들어온다. 군인들이 출정 나간 틈을 타 강간하러 들어온 것이었지만, 김학순은 “나갈 때, 나를 함께 데려가지 않으면 소리지르겠다”고 하여 남자의 잠입 루트대로 위안소를 탈출한다. 마약상으로 추정되는 이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아들 보는 앞에서도 “일본군에게 몸 팔았다”며 김학순을 학대했다. 딸은 1945년 귀국 뒤 콜레라로, 남편은 1953년에 사망했다. 아들은 12살 때 바다에서 놀다 익사했다. 김학순은 이 때 삶을 놓아버리려했지만, 어떻게든 살 마음을 먹고 버티어 1991년 첫 증언자가 된다. 여성을 사고 파는 식민지 자본주의 시장에서 ‘아버지들’의 뜻에 따라 거래돼며 위안소까지 갔지만, 탈출하고, 살아남기로 하고, 증언하기로 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었다.
김학순은 일본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정의연의 운동 목표가 됐다. 그의 증언은 구조적 폭력이 발톱을 드러내고 삶을 할퀴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 상흔은 가난, 전쟁, 빈곤, 폭력, 여성의 문제를 너무 뚜렷히 드러내고 있다. 반일의 도상에 발걸음이 멈출 수가 없는, 쉽사리 화해로 덮어비릴 수 없도록 한다. 운동의 운명은 여기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2, 문옥주
문옥주는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이다. 대구 양반가에서 태어난 듯하고, 7~8세 때 사망한 아버지는 학식있는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지나가다 총검 든 군인에게 붙잡힌 뒤 헌병대에 넘겨져 중국의 한 위안소로 보내진다. 탈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언제나 비정상적 방법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일까. 힘들 때마다 유행가를 열심히 불렀다. 자신에게 칼부림하려던 병사의 칼을 빼앗아(“내가 널 위안하러 왔는데 감히 날 죽이려 하느냐?”며 상대방을 움찔하게 했다) 가슴팍에 꽂아 살해하는 바람에 재판에 넘겨졌는데 여기서도 “천황폐하가 하사한 칼로 황군을 위안하러 온 여자를 죽이려 하다니 마땅히 그가 죽을 만했다”는 논리로 무죄방면받는다. 위안소를 나가 살림을 차라자는 장교에게 “부모님이 보고 싶으니 조선에 들렀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약조를 하고 외출 허가증을 받은 뒤 대구로 돌아온다.
이런 명민한 여자가 위안소를 두 번 갔다. 돌아왔지만 가난에 지쳤고 어차피 버린 몸, 돈이나 벌자는 생각에 부산의 식당일 광고에 응해 배를 탔다. 미얀마 위안소로 가는 배였다. 여기에서도 문옥주는 주요 포스트들과 친하게 지내며 연회 등에 초대받아 팁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만들고, 받은 팁은 악착같이 우체국에 저축했지만 통장을 잃어버려 찾지 못했다. 훗날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자 문옥주는 일본 정부 상대로 저축한 돈을 이자처서 내놓으라고 소송을 건다.
해방 후 집안의 수치가 돼 대구의 권번에 들어간다. 한 사업가의 계처로 들어갔는데, 이 남자는 사업이 실패하자 “무책임하게 죽어버린다”. 다시 기생일을 하다 세 살 연하의 과자공장 주인과 살림을 차린다. 두 집 살림이었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이었다 한다.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깨 살았다는 증언이 나온 건 내가 사례 중엔 유일했다. 이 남자도 일찍 죽는다. 문옥주는 기생일을 하면서 무려 세 가구를 먹여살린다. 어머니와, 전 남편의 자녀들 및 시부모 제사까지 봉양하고 두번째 남편의 본처 소생 자녀까지 키워냈다.
이영훈은 문옥주의 사례에서 욕망에 눈 뜬 자발적 인간상을 발견한다.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읽어내고 위안소 운영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하다. 그는 문옥주가 유행가를 부를 때의 표정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증언에 나섰는지도 상상하지 못하는 거 같다. 그것이 고 문옥주를 해칠 수 없다. 1990년대생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콘텐츠 만드는 시대가 되면 문옥주의 이야기는 멋지게 소설이나 영화가 되지 않을까 . 그런 영화도 만들어지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 운동의 결과였으면 한다.
3. 이용수
이용수의 증언에는 다른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등장한다. 죽기 전날 밤 이용수 방에 들어온 군인이 대표적이다.(영혼결혼식 형태로 위령제 지내준 사람과는 다른 이로 보인다) 그는 “신죽을 떠나서 금파를 헤치고 죽으러 간다. 울어주는 이는 도시꼬(이용수) 너뿐이다”란 가사의 노래를 가르쳐 줬다. “너에게 성병을 옮았는데 네가 주는 선물로 여기련다”는 말을 한다. 이 무슨 개소리인가. 헌데 황국신민이란 이유로 끌려와 죽음을 눈 앞에 둔 젊은이의 두려움, 억울함, 죽고 싶지 않은 심정, 그 와중에도 아니 그 와중이니까 부리는 허세와 가오, 몸부림 등을 처음으로 상상해봤다. 그래 봤자 전시 강간범인데. 이용수 증언이 갖는 이상한 힘이다. 인간의 복합성이 증언에서 살아난다.
위안부 운동은 처음부터 국제연대 운동이었다. ‘기생관광’에 대한 한일 여성들의 반대운동이 있었고, 1980년대 미국 턱밑까지 추격하던 경제대국으로서 자신감도 있었고 당시만 해도 일본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선봉이었으며, 한국은 막 민주화를 해낸 (하지만 군사정권의 인사가 대통령이 된) 나라의 울분과 에너지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인들도 2차 대전의 참화에 대해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이 주효했을 거 같다.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낸 <천황의 전쟁 책임>에는 전쟁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평화헌법 체제로 들어가버린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혼란이 잘 나온다. “난 분명 천황 폐하를 위해 전쟁에 나갔는데, 지금에 와서 전쟁은 안 된다 하고 천황의 책임도 아니라 하면 나는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그 고통스로운 경험을 했단 말인가!”라며 1970년대 중반 일왕 히로히토의 순시에 난입한 한 남자의 사례도 나온다. 도시꼬 어쩌고 하던 놈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한일연대의 곤란함이 나오는데, 일본에서 전쟁의 잔혹함을 가장 깊이 겪은 사람은 참전군인들이고, 그들이 위안소의 이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천황의 책임이 은폐된 일본에서 전쟁을 반성하는 이야기는 쉽사리 자기연민으로 이어지고 이는 한국인들이 납득할 수 없는 태도가 되고 만다. 동시에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같은 전쟁의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안 겪은 한국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간극과 구조적 모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아시아여성기금-사이토안-2015년 한 위안부 합의 등 제도적 노력이 잇달아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한·일은 점점 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위안부 피해자 뿐만 아니라 2차대전 경험자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뜬다. 잃어버린 20년 거치며 일본에는 제국주의형 극우가 아니라 ‘억울충’형 극우가 늘었다. 정대협 책임인가? 2차 대전 강제동원된 황국신민을 같은 전쟁범죄 피해자의 대열에 놓지 않는 것은 개인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의 논리도 있지만, 위안소 내에서 강간 가해-피해 관계를 응시하는 페미니즘 논리도 있다. 그리하여 정대협은 국가주의를 싫어하는 좌파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우파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왔다. 이 난감한 상황의 책임은 미일동맹 체제를 위해 천황의 전쟁책임을 덮은 미국에도 있다. 그러기에 나는 미국의 힘을 이용해 일본을 압박,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나도 정대협에게 왜 운동을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천황제 민주주의와 미국이 압박한 평화헌법 체제의 모순부터 온갖 구조적 문제들을 정대협이 뒤집어 쓴 것도 안다.
정대협은 위안부 합의가 있기 전에도 세계로 나아갔다. 전 세계인에 2차 대전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우간다 등 전쟁 피해자 등을 돕는 방식으로, 위안부 운동을 세계적 운동으로 만들려고 해다. 2015년까지는 세계적으로 형성된 여론이 다시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됐다. 하지만 미국이 (결국은 한미일 동맹 체제의 완성을 위해) 압박한 합의는 결국 ‘파행’으로 귀결됐다. 한국에서의 과거사법처럼 일본 의회에서 ‘화해를 위한 식민지배 및 위안부 사죄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지 않는 한 한국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무조건 안 되는 일이 어딨겠는가. 언젠가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사죄와 배상이, 화해가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먼 훗날의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일본과의 대화 없는 일본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가 시작됐다. 여기엔 정부의 방기 책임도 크나, 일본을 상대하지 않는 사죄요구 운동이 시작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제 윤미향 당선자는 여당 의원이고.
정의연은 장기전을 준비한다. 김학순-김복동의 뜻을 잇는 것.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그들을 기억하는 것. 국내 소녀상의 보급과 해외 김복동센터(전시생존자 쉼터 겸 동아시아-태평양전쟁 중심 2차대전 사료관)건립. 그 외의 사업들이 있다만....가장 잘 알려진 각종 건립 운동은 돈 문제에 휘말리기 쉽다. 단체 역량 만큼 하고 있나. 운동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있다. 소녀상 보급 운동을 하면 일본에서 소녀상 설치 반대운동을 한다. 미국, 독일 등 제 3국 시민의 입장에선 피곤하다. 뭔지 모르겠는데 갈등에 휘말리는 게 싫으니 일본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그걸 막으려면 더 센 ‘일본 망신주기’ 전략이 필요한데, 내가 보기 이건 운동 이전에 활동가부터 망가뜨린다. 김복동 센터도, 비유하자면 남아공에 김대중 센터를 짓는 것보다 현지인들이 만델라 센터를 짓는 걸 돕고, 김대중 센터랑 교류하는 게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내 의견이 반드시 맞다는 보장도 없고, 정의연이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합당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허나 쉬는 날 사료관 일부러 찾아보고 이렇게 주구장창 글을 올리는 사람이 회의를 품으면 설득의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이용수는 “김학순이 시작한 운동을 이용수가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나섰다.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용수 역시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에서 강경파이다. 윤미향 당선인을 둘러싼 언사는 오해가 상당 있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더 밝혀져야 할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일본과의 대화 없는 일본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 세계로 나아가는 역사전쟁, 모금과 건립. 그리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 위안부 당사자. 이 눈으로 현실을 보려고 상상해보자.
대부분 증언들은 괴로움이 뚝뚝 묻어나지만 말하고 나니 후련하다고 끝난다. 이용수는 한 줄 덧대 기회를 준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에 대한 감사까지 덧붙인다. 그는 남에게 관심이 많다. 대체 위안부로 끌려온 사람이 누굴 연민하냐 싶게 죽음을 앞둔 일본 병사에 대한 관찰을 굳이 기억하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보니 1990년대부터 공회전한 이 모순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4.
위안부 문제는 한동안 꽁꽁 숨겨져있어서 문제였지만, 막상 드러나고 보니 너무나 복잡한 이슈였다. 한·일양국에서 ‘연대의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 일본의 2차대전 경험자들이 동시 사라져간다. 이런 상황에서 해야 하는 건 ‘보이는 상징’을 찾아헤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경험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을 복원하도록 만드는 사고력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반일 종족주의를 논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김학순과 문옥주의, 그 외 사람들의 증언을 직접 읽고 상상하고 토론하는 것 아닐까. (몇가지 책을 더 읽으면 좋고) 텍스트 읽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위안부 e역사관 가서 랜덤으로 아무거나 읽으라고 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누구의 증언이든 두 문단쯤 읽고 나면 계속 읽게 될 것이며, 우리는 사죄와 배상을 원하는데 그 사좌와 배상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다. 난 누구나 그 정도 능력은 있다 생각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게 있으면 그 지루한 과정을 견디는 능력이다. 그것이 따지고보면 2015년 합의로도 내몬 셈이다. 밀어붙일 수 있는 건 거의 다 해보았다. 반대로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가, 방치했던 문제에 천착하는 모습을 본다면, 눈앞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더라도 좀 더 후련하지 않을까. 이것 역시 가지 않은 길이다.
이렇게 써 놓으면 내가 위안부 운동 30년사를 실패로 규정한 거 같지만, 그런 판단을 내릴 자격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한국의 성폭력에 대한 관점을 불가역적으로 바꿨고, 이 땅을 사는 여성인 나는 그 수혜자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을 역사의 보호를 받는 '닫힌 정의'로 규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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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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