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일한연대’ 활동의 성격과 의미:일본 시민사회의 광주 5・18과 ‘김대중 구명운동’ 자료를 중심으로
The ‘Japan-Korea Solidarity’ activities in 1980: Analysis of documents about May 18 Gwangju Uprising and ‘Save Kim Dae-jung Movement’ in Japanese civil society
view options59p ~ 96p ISSN 1598-2114발행정보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9년피인용횟수1자료제공처NRF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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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참고문헌
초록
이 논문에서는 1980년 일본 시민사회에서 생산된 광주 5・18과 ‘김대중 구명운동’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일한연대’ 활동의 성격과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한일관계가 전후 최악의 수준이라는 오늘날,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다시금 ‘일한연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약 40년 전의 1980년 광주 5・18과 김대중의 생명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한연대’가 어떠한 성격과 의미를 지는지를 분석해 보는 것은, 일본 시민사회에 대한 분석, 광주 5・18과 ‘김대중 구명운동’의 초국적 성격, 그리고 시민사회로부터 형성되는 한일관계에 대한 다각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일본의 시민사회가 60년대의 ‘정치의 계절’을 거치며 어떤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검토하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본 시민사회에 가져온 파장과 ‘김대중’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간략히 논하겠다. 그 후 1980년 광주 5・18 및 ‘김대중 구명운동’과 관련해 재일한국인, 일본 기독자, 지식인, 활동가들에 의해 생산된 기록물을 중심으로 일본에서의 ‘일한연대’ 활동의 전개과정 및 담론을 분석했다. 분석결과 1980년 ‘김대중 구명운동’에서 논의된 ‘일한연대’는 ‘일본’이라는 공간에 위치지워진 이들의 민주주의 지향의 운동이었으며 이 바탕에는 재일한국인의 ‘민족운동’이라는 측면과 일본 지식인 및 활동가들의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책임의식’ 및 신식민주의적 한일관계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일본 민주주의의 근원적 과제인 식민지배의 과거청산 및 전쟁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못했으나 1980년의 ‘일한연대’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연대를 통해 일본 시민사회가 ‘민주주의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하나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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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일한연대’ 활동의 성격과 의미:*
일본 시민사회의 광주 5・18과
‘김대중 구명운동’
자료를 중심으로
이 미 숙**1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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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1980년 일본 시민사회에서
생산된 광주 5 |
* 이 논문은 2019년 5
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 릿쿄대학 Global Liberal Arts Program 조교수.
Ⅰ. 들어가며: 선행연구와 연구초점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외의 지원 및 연대활동에 대해 한국내
여러 기관들은 해외 민주인사 초청사업을 비롯하여 2000년대에 들어 사료수집 및 구술프로젝트 등을 활발히 진행해 왔다.
이들 해외 민주 화운동 자료를 모아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민주화운동자료 목록집 (2005)을 발간했으며,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김대중도서관
등 은 사료 및 구술자료를 오픈 아카이브 형태로 공개해오고 있다. 그러 나 이러한 사료수집 활동에 비해 이를 활용한
연구는 충분히 이뤄지 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특히, 외교문서 및 주요 언론 보도 등의 공 식적인 사료
및 기록물들에 비해, 시민사회 차원에서 제작 생산된 전 단지, 자료집,
소책자, 소식지, 이미지 및 영상물 등의 ‘비공식적’
기록 물에 대해서는, 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수집, 분류하는
작업도 충 분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에 본 연구는 이들 시민사회 에서 제작된 ‘비공식적’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에 의해, 어떠한 배경과 흐름 속에서,
그리고 어떠한 문제의식에서 한국 민주화운동 지원 및 연대 운동이 펼쳐졌으며, 더 나아가
이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1980년 광주 5
18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서구 언론의 관심과 더불어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국제여론이 폭넓게 형성된 중요
한 지점이 되었다. 특히 ‘65만명’(미야타
히로토, 1977)이라 일컬어졌 던 재일조선인이 거주하던 일본에서는 기독자 네트워크 등을 통해 한 국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정보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이 에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1973년 김대중납치사건 이후 형성되어 왔던 ‘일한연대’
활동이 더욱 폭넓게 이뤄지게 되었다(김영미, 2011). 일본 에서의 1980년대
‘김대중 구명운동’과 관련된 선행연구로는 정근주 (2013)의
연구가 있으며, 재일한국인의 한국 민주화운동 참가에 대해 서는 조현옥(2005), 조기은(2006),
1970~80년대의 ‘일한연대운동’에 대 해서는 이미숙(2014a,
2014b, 2018) 등의 선행연구가 있다. 정근주의
한국 민주화 지원운동과
한일관계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일본에
서의 구명운동을 중심으로
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일본 국회 기록물을 통해 본 일본 정부의 대응, 언론의
대응, 그리고 시민 사회의 ‘김대중 구명운동’(지식인 그룹,
기독자 그룹, ‘노동조합총평의 회’, 그리고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의 활동을 개략 적으로 정리 소개한 것으로, 일본 정부가
초기 ‘불개입’ 및 ‘정관’하는
자세에서 점차 ‘우려표명’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이들 적극적인 시민 운동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조현옥의 연구와 조기 은의 연구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영향 속에서 재외한국인의 정체성
형성 과 관련된 연구로, 조기은은 재일한국인 2세에게는 한국 민주화운동 참가와 권리획득운동이 민족이
겪고 있는 부조리를 없애는 ‘민족운동’ 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논했다.
이미숙의 연구는 1970~80 년대 일본에서 전개된 ‘일한연대운동’을
사례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해외 지원 및 연대세력을 연결하는 트랜스내셔널한 정보교환 네트워 크를 국경을
넘어 ‘공통인식’을 형성해 나가는 하나의 ‘트랜스내셔널
공론장’으로 논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 및 연대 활동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배 과거청산 문제와 재일한국인 등 의 지문날인거부운동 등으로 전개 및 규합되는 과정을 밝히고,
이를 타자와의 ‘연대’를 통한 ‘재귀적 민주주의’로 논했다.
이들 선행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 연구는 특히
1980년 광주 5
18
을 전후한 시기부터 1981년 1월
23일 김대중 무기징역 감형에 이르는 시기까지 일본 시민사회에서 제작된 광주 5
18과
‘김대중 구명운동’ 관련 기록물들을 통해 일본에서의 ‘일한연대’
활동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관련 기록물로는 전단지,
자료집, 포스터, 기 관지, 영상물
등으로, 이는 개별 시민활동가부터 지식인 그룹, 기독자
그룹, 노동자 그룹, 지역기반 ‘일한연대’ 그룹 등
다양한 시민사회의 주체에 의해 제작 생산되었다. 이하 본 논문에서는 먼저 일본의 시민 사회가 60년대의
‘정치의 계절’(요시미 순야, 2009)을 거치며 어떤 성 격을 갖게 되었는지
검토하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본 시민 사회에 가져온 파장과 ‘김대중’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간략히 논하겠다. 그 후 1980년에 전개된 ‘김대중 구명운동’
관련 시민사회 기록물의 분 석을 통해 ‘일한연대’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고찰하겠다.
본 연구에서 는 ‘한일연대’가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 쓰여졌던 용어 그대로 ‘일한연
대’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데, 이는 일본이라는 공간에 위치지워진 이 들에 의한 시점과 담론으로 전개된 ‘일한연대’
활동을 분석한다는 의 미에서 ‘일한연대’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기로 하겠다.
Ⅱ. 일본 시민사회와 ‘김대중’ - ‘일한연대’의 형성
1.
전후 일본 시민사회의 특징 - ‘탈권위적
탈중심적’ 성격으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및 1980년
5
18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시기의 일본 시민사회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김대중
구명운동’을 포함한 ‘일한연대’ 활동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는지 간략 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일본의 전후사회 및 사회운동사를 연구하 는 학자들은
‘1968년’을 사회운동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분수령으로 파 악하고 있다(무토
이치요, 1998; 오구마 에지, 2009; 안도 다케마사,
2013; 고스기
료코, 2018). ‘1968년’은 문자 그대로 1968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965년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하나의 시대를 상 징하는 개념으로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의 사회운동 패러다임이
크게 전환하게 되었다는 인식이다. 1960년대 전반기까지의 일본의 시민사 회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좌익’
정당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이 주류를 점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조합인 ‘노동조합총평의회’(이하,
총평)는 사 회당계열이며,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은
공산당(이후, 공산 당에서 분열해 나온 신좌익세력인 ‘분토’)의
지휘하에 있었다. 일본 역 사상 최대규모의 사회운동이었던 1960년의
‘안보투쟁’은 사회당, 총평, 분토 전학련의
“동상이몽의 연합에 의한 ‘대중정치투쟁’”(무토 이치요, 1998: 77)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지금의 일본 시민사회로서는 다소 상상하기 힘든, 정당 및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계열화된 중앙집중적 사회운동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8년’을
지나며 일본의 시민사회는 기존의 권위적이며 중
앙집중적인 사회운동으로부터 지역별,
이슈별 시민 그룹이 다양하게 활동하며 이들을 엮는 ‘연락망’의 역할을
하는 비조직적 네트워크형 그룹이 혼재하는, ‘탈권위적
탈중심적’
시민사회로 전환하게 된다. 이 배경으로는 1960년대 후반 특히 일본 유수의 대학에서
학생운동이 분 출하던 시기에, 기존의 사회당 및 공산당 계열의 조직을 중심으로 한 운동을 비판하면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좌익계열의 섹터 또는 정치적 섹터는 없으나 사회 및 정치 이슈에는 활발한 ‘논포리’라
불리우는 학생 및 운동가들이었다. 그러나 신좌익계열의 섹터는, 1967~69년에
이르는 시기의 ‘폭력적 항의행동’ (니시키도 마코토, 2008), 그리고
1970년대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난 ‘우치게바’라는 폭력적
파벌논쟁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게 되 었다. 또한, 이 시기는 1960년대
전반기의 경험을 살린 일본 경찰청에 의해 ‘폴리싱전략’이 더욱 교묘해지기도 했다.
일본의 ‘뉴레프트’를 분 석한 안도 다케마사는,
당시 일본 경찰청은 사회운동가란 “제 멋대로 의 잔혹한 ‘과격파’”(안도
다케마사, 2013: 135)라는 인상 만들기에 성 공했다고 한다. 이후 ‘1968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여전히 정 치와 사회문제에 참여하고자 한 지식인, 문화인, 또는 ‘논포리’
등의 학생운동가들은 기존의 ‘조직’적인 운동그룹과는 별개로 조금 더 ‘지역
적’이며 ‘생활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한 풀뿌리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시민사회를 형성해 나갔다.
‘1968년’ 이후의 ‘탈권위적
탈중심적’
시민사회는 소송, 진정, 청원행 동 등 기존의 ‘온건한
제도내 항의운동’(니시키도 마코토, 2008)을 전 개하면서도,
운동그룹의 형성과 더불어 이를 알리는 기관지 및 소식 지를 발간하고 집회, 결의,
성명서 등을 전단지 등의 형태로 생산하였 다. 이러한 시민 그룹에 의해 제작 생산된 정보지,
기관지, 전단지 등 을 일본에서는 ‘미니코미’라고 한다.
일부 문화인들은 ‘슬라이드’ 및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중심으로 ‘자주상영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의 일본 시민사회는 이렇듯 개별 과제를 중심으로 소규 모로 활동하는 시민운동이 사안에 따라 연계하는 네트워크형 시민사 회의 특징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사회운동을 사 회변혁을 이뤄낼 만큼의 ‘중심적’인
역량으로 키워나가는 것을 ‘기피’ 하게 되었다는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니시키도
마코토에 따르면, 80년대 이후의 사회 운동은 ‘운동의 초기단계의 행동’이
항의 행동 전체를 규정하게 되었다고 한다(니시키도 마코토, 2008: 16-18). 즉,
일본의 ‘탈권위적
탈중심적’
시민사회는 사회운동의 ‘초기적 양상’ 에 머무르며, 이를 ‘중심적
역량’으로 키워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기 피하는 측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68년’ 세대 이
후의 사회운동 후속 세대가 빈약한 현재의 일본 시민사회의 특징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2. ‘김대중’과 ‘일한연대’의 형성 -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1968년’을
거치며 사회운동의 패러다임이 변화해가는 시기, 일본에 서는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973년 8월 8일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국의 정치현실과 민주화운동 세력을 일본 대중이 처음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파급력이 있는 사건이었 다.
1970년대 초반, 일본의 일부 지식인과 문화인, 그리고
재일한국인 들이 한국의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김지하와 재일한국인 ‘정치범’으로 구속된
서승, 서준식 형제에 대한 ‘구원운동’을 시작했으나 아직 대부 분의 지식인들을 포함해 일반
대중들은 한국의 민주화운동 및 정치현
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김영미,
2011: 247). 그러나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 언론이 관련 사건을 비중있 게 다뤘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자 했던
재일한국인 그룹의 활발한 김대중 구명운동으로, 일본의 지식인 및 시민사회에서도 ‘김대중’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국 내의 군사정권에 비 판적인 민주화세력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지명관,
2005; 정재 준, 2006).
일본에는 전후 ‘65만’이라고
불리었던 재일조선인들이 살아가고 있 었으며, 이들은 일본에서의 민족교육과 민족의식 계승뿐만 아니라 그 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한반도의 정세에도 큰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 1960년의 4
19
학생운동 및 한일회담 반대운동도 이들 의 큰 관심사였으며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논점이 아닌 운동 세력의 시점을 담아 다양한 경로로
일본 혁신계 세력 및 시민사회에 전하고 있었다. 1969년~70년의 출입국관리법 제정 반대투쟁에서 1960년의
‘4
19’에
무지한 일본 학생운동가들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화 교청년투쟁위원회’의 결의문이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해 일본 지 식인들이 과연 진정으로 한국 민중이 이를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는 목소리에서도 한국의
정치정세와 시점을 일본 시민사 회에 전달하려 한 노력을 볼 수 있다(이미숙, 2018). 한편,
1968년 민 족차별을 규탄하며 납치사건을 일으켰던 ‘김희로 사건’과 1970년
‘히타 치 취직차별사건’ 등은 재일동포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생운 동 활동가들에게도 일본 내의 반민주적,
반인권적 민족차별문제에 대 해 자각하고 행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1973년의 김 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으며, 재일한국인 민주세력은 누구보다 빨리 이에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1960년대 말 이후 이들과 ‘연대’를
형성 하기 시작한 일부 일본 지식인, 문화인, 기독자, 그리고
학생운동가들 이 함께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대중이 재일한국인들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 후에 있었던 덤프트럭 교통사고와 관련해, 1972년 10월 치료 및 요양차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을 때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헌법개정 등의 내 용을 담은 특별선언을 했을 때 일본에 있었던 김대중은 이튿날 바로 이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다.
아사히신문(1972년
10월 19일)에 따르 면, 김대중은
이를 “헌법 위반행위이며, 조국통일을 성취하려고 하는 국민 염원을 짓밟는 것”이라고
항의하고 독재적 영구집권을 노리는 반민주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국내에서의 정치활동이 어렵게 된 김대중은 재외한국인과
결속하여 해외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자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1973년 7월
6일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 일촉진국민회의’를 결성했으며,
일본에서도 8월 ‘한국민주회복통일촉 진국민회의 일본본부’(이하,
한민통)를 결성하고자 했다. 일본에서의 결성과 관련해서는 재일한국인 민주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민단동경 본부, 가나가와현본부의 임원, 유지간담회, 재일한국청년동맹,
부인회 등과 논의해 왔다. 그러나 결성을 며칠 앞두고 1973년
8월 8일 중앙 정보부에 의해 납치된 것이다. 이에 재일한국인
민주세력은 먼저 ‘김 대중선생 구출대책위원회’(정재준, 2006)를
결성하고 곧바로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집회 투쟁을 이어나갔다. 김대중은 5일 후인
8월 13일 서울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해당 납치사건을
둘러싸고 이후 한일관계 는 악화, 진상규명과 김대중의 일본으로의 원상복귀를 요구하는 목소 리가 높아졌다(김영미,
2011; 정근주, 2013).
재일한국인 민주세력은 ‘김대중선생
구출대책위원회’(이하, 구출대 책위원회)의 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13일 한민통 발기대회를 개최하 고 김대중을 의장으로 한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했다.
한민통은 김 대중의 일본으로의 원상복귀 및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회복을 슬로건 으로 내세우면서, 납치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오 사카, 교토, 나고야
등의 각 지방에도 구출대책위원회가 조직되는 한 편 ‘재일한국청년동맹’(이하, 한청)과
‘재일본한국학생동맹’(이하, 한학 동)에서도 이러한
항의집회를 열고 김대중 구명운동을 더 확산시켜나 갔다. 활동내용으로는 한국대사관 앞 항의집회 및 데모,
일본 수상 및 각당 앞으로 보내는 성명, 일본 각계에 협력 요청, 서명운동,
국제연합 및 미 대통령 등에 보내는 메시지 발신 등이 있었다(정재준, 2006).
일본의 정치정당 및 시민사회에서는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국 정권
에 의한 ‘주권침해’이며,
이에 대응하는 일본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타국에서 공권력을 사용한 “무례한
한국 정부”에 대해 용서 할 수 없다는 강한 자세를 취할 것을 일본 정부에 주문한다는 논조가 아사히신문(1973년
8월 14일)을 포함해 주류 신문 및 잡지 등을 통 해 중심 논조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타국에서의 공권력 사용은 국 제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1967년
동백림사건 당시 “주권”을 관철시킨 서독일 사례를 들어 강한 태도에 임할 것을 정부에 요청하는 목소리 가 커졌다(이미숙,
2018: 105-106). 9월 초, 납치현장에서 주일한국대 사관 일등서기관이었던 김동운의 지문이 검출되는 등 김대중 납치사
건에 대한 한국 정부 및 중앙정보부의 관여의혹이 짙어지자, 일본 시 민사회에서는 한일간 ‘경제협력’의
성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 했다. 이에 9월 7일 열릴
예정이었던 일한각료회의는 개최 전날 연기 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당일 중의원본회의에서 다나카 가쿠에 수상
은 ‘한일우호 우선’ 및 ‘원조 중단 없음’(아사히신문 1973년
9월 8일) 등의 발언을 통해, 한국 정부
측의 지속적인 수사 노력을 조건으로 자택연금 상태의 김대중을 원상복귀된 상태로 간주하고, 납치사건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와 정치적 결착을 보게 된다. 이와 더불어 기존에 연기했었던 일한각료회의를 재개하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제[1]차
‘정치결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벌인 1973년 10월
2일 시위 등, 한국에서는 연이어 민주화 를 요구하는 운동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및 기독자 들이 관여한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개헌청원운동’과,
1,024명의 체포, 180여명의 구속과 기소가 이뤄진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 언론과 시민사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 아진 가운데 보도되어, 일본 대중사회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속적
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정치정당 및 시민사회에서는 1974 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1주년을 맞아, 사회당위원장, 공산당위원
장, 공명당위원장과 일본 지식인 아오치 신 및 오다 마코토가 참석한 회담을 열고 ‘공동 호소문’을
작성했다. 이 ‘공동 호소문’은 한국의
모 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고 일본의 ‘대한원조’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와 관련해 9월 중순 대규모 집회 및 데모를 촉구 하는 내용이었다(이미숙,
2018: 109).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9월 19 일,
“박정권에 전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본) 정부와 재계에 대한 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기
위한 9
19
국민대집회”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집회가 열리기 한달 전,
한국에서는 8월 15일 ‘문세광 사건’ 이 일어나게
되고 문세광과 총련 및 북한과의 관계, 그리고 수사 등에 ‘비협조적인’
일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국교단절의 위기까 지 갔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열린 “9.19
국민대집회”에 대해, 와다 하 루키는, 집회 발언
가운데에는 “이해하기 힘든 표현”1도 있었지만,
“한 국 민중의 투쟁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와다 하루키, 1975: 60)고 한다.
제1차 ‘정치결착’의
조건이었던 한국 측의 ‘지속적인 수사 노력’은 1975년
7월 22일 한국 측으로부터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에 대 한 조사결과로 ‘구상서’가
일본 정부 측에 전달, 일본 또한 이를 받아 들이면서 제2차 ‘정치결착’이
이뤄지게 된다. 한국 정부는 그간 한일관 계에서 문제가 됐던 김동운 서기관에 대해,
조사결과 “일본 측이 제시 한 의혹을 입증할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었기에 불기소 처분”한다고
하면서도 “김동운은 일본에서 의혹을 살 만한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자질과 품위에 저촉하기에 징계면직
처분했다”는 내 용의 구상서를 전달했다. 일본은 이에 한국에서 제시한 “김대중의
해 외에서의 언동은 일절 불문으로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김동운에 대해서는 이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즉 이것으로 문제가 정리됐다는 인식을 표했다(아사히신문 1975년 7월 25일).
이는 일본 정부도 한 국 정부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납치사건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관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제1차 그리고 제2차 ‘정치결착’을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한, 한일 정부 간의 현안이었던 ‘경제협력’에 대한
장애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결착은 일본의 일부
지식인, 시민들
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비춰졌다.
해당 사건이 일본에서 일어난 ‘주권침해’적 요소가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진상규명
을 포기, 한국 정부와 결탁한 것으로, 즉 일본 정부와 한국 군사정권 의 관계에
대한 성격, 그리고 일본의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의 구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종합잡지 세까이에
![]()
목소리가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9.19 집회에 대해 잡지 조선연구의 편집 부는 (한국의)
“민중은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한국) 정부는 안되겠다”는 인식을
9.19 집회에 갔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조선연구 편집부, 1974: 16).
김대중 납치사건 1주년을
뒤돌아보며, “일본 정부는, 그리고 사실상, 일본인의
대다수는 그들(진정한 민주주의자들)의 측에 서는 것이 아 니라,
그들을 말 그대로 압살하는 자들의 측에, 한국의 파시즘정권 측 에 서있다”(오에 겐자부로,
1974: 15)는 것이 이 1년간 더욱더 명확해 졌다고 문제 제기하고 있다. 즉,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정치적으로 결착한 정부, 그리고 이에 대해 무관심 또는 ‘불감증’한
시민사회에 대 해, 일본의 민주주의 자체가 시험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식을 공유하는 지식인 및 문화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시민사회는 김대중 납치사건 및 정치결착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연대하는 ‘일한연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70년대 중반이후,
다양한 시민사회의 주체들이 ‘일한연대’ 네트워 크를 형성, 확대해
나갔다. 한민통, 한청, 한학동
등의 재일한국인 그 룹,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 등의 한국 기독자들과 긴밀한 네트워크 를 형성하고
있던 기독자 그룹, ‘일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세우고 한국 민주화투쟁에 연대하는 일본연락회의’
등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그 룹, ‘재일한국인‘정치범’을 지원하는
모임 전국회의’ 등의 다양한 ‘정치 범’구원운동
그룹, 여성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아시아여성들의 모임’, 노동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일한민중연대수도권연락회의’, 그 외 지역 기반의 다양한 시민그룹이 ‘일한연대’의
주체가 되었다(이미숙, 2018). 이러한 가운데 1980년
광주 5
18과
김대중 재판에 대한 소식이 일본 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은 그 정치적 결착 과정을 포함해 일본의 시민사회에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서의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또한 일본 정부의 한국 군사정권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태도 및
일본의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일본 시민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다양한
주체들이 ‘일한연대’ 네트워크를 폭넓게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광주 5
18
및 김대중 등 의 피고인들에 대한 지원, 연대활동이 전개되었다.
Ⅲ. 광주 5・18과 ‘김대중 구명운동’ – 시민사회
기록물로부터
일본의 ‘탈권위적
탈중심적’
시민사회의 특성상, 이러한 기록물들은
어느 하나의 단체 또는 조직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그 전체를 이해 하기 힘들다.
이러한 점에서, 본연구는 1980년 광주 5
18을
전후한 시기부터 1981년 1월 23일 김대중
무기징역 감형에 이르는 시기까지 의 일본 시민사회에서 제작된 ‘김대중 구명운동’ 관련 기록물들을,
재 일한국인이 생산한 자료, 일본 기독자그룹이 생산한 자료, 일본 지식
인 및 시민운동가들이 생산한 자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혁신계 정당 및 조직과 연계한 시민사회운동 자료로 분류해 살펴보았다.
이 들 자료의 분석을 통해 일본 시민사회에서의 ‘김대중 구명운동’의 전 개과정
및 활동내용을 분석해 보겠다.
1. 재일한국인들의 기록물로부터
1970년대부터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하여
‘정치범’구원운동 및 한 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연대를 활발히 펼쳐온 재일한국인 민주세력들 은
광주 5
18
및 김대중 등의 사형 및 중형 판결의 위기를 맞아 다시 결집하게 된다. 한민통의 기관지 민족시보에 따르면 1980년
5월 18 일 이후, 초기에는 광주학살 및 항쟁의 진상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와 사진, 그리고 이에 대한 추모식 관련 기사가 중심이 되었으나, 1980년
7월 4일 이후, 김대중의 군법회의 회부 소식과 함께 ‘김대중
구명운동’ 이 활발해 짐에 따라 7월 이후는 5
18의
진상과 관련된 기사는 점차 줄어드는 대신, ‘김대중 구명운동’과 관련된 활동 소식이 중심적으로 실리게
된다.
7월 이후의 ‘김대중
구명운동’의 본격화 이전에 광주학살과 관련하 여 특기할 만한 점은 6월 10일
열린 ‘광주대학살규탄
희생자추모집회’
이다. 냉전체제 및 분단체제 속에 재일조선인들 또한 ‘민단’과
‘총련’으 로 분단되어 있었으나, 이 추모집회에는
‘민단’과 ‘총련’으로 나뉘어질
수 없는, ‘민단’과 ‘총련’이라는
벽을 넘어서서 개개인의 재일조선인들 이 조국 시민의 참상에 애도와 추모의 뜻을 표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 다. 이 집회
자체는 한민통 등 7개 재일한국인 민주단체가 주최한 것 으로, 이들은
한국 독재정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민단’의 민주화 를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 집회에 참여한 개개인들은 ‘분단’된 재일 동포사회에서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민단’과 ‘총련’의 벽을
넘어 개개인의 재일동포들이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한 민족임을 확인하 는 자리가 되었다.
이 추모집회에서는 피의
항쟁의 기록(통일사 프로덕션, 26분)이
라는 영상물이 상영되었다(자료 1). 본 영상물은 한민통이 제작한 것 으로,
영상은 4
19와
5
16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 한국 민중의 삶 을 그린 영상과 전통음악을 배경으로 ‘서민’의
고난, 부패한 권력과 위 정자, 그리고 저임금과 공해와 사양산업의 이권을 통한 일본의 착취 등을 문제시하고 있다.
유신체제, 박정희 암살사건, 전두환 군부세력
의 등장과 함께,
1980년 5 월에는 민주화운동이 서 울, 대전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그 흐름 속에 서 광주 5
18을
그려내고 있다. 영상물은 동학농민
자료 1. 피의 항쟁의 기록 시작화면 운동,
식민지하 광주학생
운동을 포함한 민중의 피의 ‘항쟁사’
속에 광주를 위치시키고,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대학 즉시
개방, 노동 3권 보장, 민주인사 석방 등 을 외치고 있다.
영상물의 마지막 해설은 “광주와 함께 전진하자, 통 일을 위하여”로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 주주의와 인권회복뿐만 아니라, 이는 더 나아가 냉전체제하 남북분단 의
고착화를 지양하는 민족통일 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지녔던 것을 명 확히 보여주고 있다.[2]
‘김대중 구명운동’은
7월 이후 본격화되는데 한민통은 이를 일본 시 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한
활동으로 규정하고 ‘일한연대’가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급속도로 커져가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민족시보 1980년 8월 11일자).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던 일본에서는 재일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의 시민사회도 ‘김대중’을
결단코 사형시 켜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며, 이에 각계각층의 성명과 구명운동 활동에의 참가가 활발히 이뤄지게 된 것이다.
한민통은 이 과정에서 특히 9월 김대중에 대한 ‘내란음모죄’가
한민통과의 관계, 즉, 일본에 서의 언동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반국가단체’[3]가
아니라 ‘반독재 및 반유신 단체’임을 밝히는 글을 민
족시보에 연이어 싣게 된다(민족시보 1980년
9월 11자, 12월 1일 자 등).
한민통의 경우 이와 같이 김대중 사형판결의 ‘근거’로 쓰이게
되면서 이에 항변하는 기사들을 싣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한민통을 포함해 재일한국인 사회는 일본 및 국제 연대세력과 교류,
협력하면 서 ‘김대중 구명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11월의
‘김대중씨구출국회청원 운동’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같은 시기 열린 것으로 청원 운동의 방식과 요구사항
등에 있어 국제적인 공조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재일한국인들의 ‘김대중 구명운동’은 세계적인
한국인 민주연 합조직의 결성 및 활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한민통, 한청 등의
재일민 주단체는 해외의 한국 민주단체와 더불어 1977년 8월 15일 ‘해외민족
통일해외한국인연합’(이하, 한민련)을 결성하고
그 첫 모임을 도쿄에 서 가졌다. 이러한 국제적인 네트워크는 1980년
8월 13일, 14일에 열 린 ‘김대중선생구출과
한국민주화를 위한 긴급해외한국인대표자회의’ 에도 연결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김대중선생구출
해외한국인연락협의 회’가 조직되었으며, ‘범해외한국인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대 표자회의에는 한민통의 배동호 의장을 포함해, 캐나다에서는
정재준, 미국에서는 임창영, 프랑스에서는 윤이상 등의 참가가 있었으며,
세계 8개국 백여명의 참가 가운데 열렸다고 한다(민족시보1980년
8월 25 일자). 이러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1980년의 ‘김대중 구명운동’ 은 세계적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국인들만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기독자, 지식인,
문화인 등의 연결망을 통해 다양 한 형태로 ‘김대중’과 관련된
국제회의가 연이어 이뤄지게 되는 한 배 경이 되기도 한다.
2. 일본 기독자그룹이 생산한 기록물로부터
일본 기독자그룹은 재일한국인들을 제외하고는 일본
시민사회에서
누구보다 더 빠르게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유 신체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남산부활절
사건’, ‘한국그리스도자선 언’, 그리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겪으면서 한국의 기독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움직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이미숙, 2012). 더 직접적인 배경으로는 일본 내에서의
재일대한기독교회 청년들의 한국 내 기독 교회 청년들과의 연대투쟁 등이 있었으며, 이들 기독자들의 한일각료 회의 반대 단식투쟁과
데모 행진 등으로부터 제기되는 일본을 향한 문제제기, 즉, 한국의 현 정치정세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지배와 현재
의 경제침략이 큰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일본 기독자들 은 “충격과 더불어 엄혹한 문제제기와 촉구”(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
1976: 76-77)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과 문제의식으로 ‘한국문제
기독자긴급회의’[4](이하,
긴급회의)는 1974년 1월 15일 결성되었으며,
긴급회의 실행위원으로는 나카지마 마사아키(대표), 핫토리
나오코, 이이지마 신, 모리오카 시게루, 오시오
세이노스케, 쇼지 츠토무, 야마 구치 아키코가 참여하게 된다.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의
기관지 한국통신(월간)을
보면, 5월 호, 6월호는 광주 5
18을
중심으로 그 성격과 진상에 대해 다양한 목 격자 증언을 전하고 있으며, 7월호부터는 김대중의 생명의 위기가 중 심적으로
다뤄지게 된다. 8월호 이후로는 긴급회의가 ‘일한연대위원회’
와 함께 7월 10일부터 개시한 ‘김대중을 죽이지마!
시민서명운동’의 소식을 중심으로 전하며, 12월호는 긴급회의가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 의회와
함께 주최한 12월 10일의 ‘김대중씨의
생명을 우려하는 긴급 국제회의’의 소식 등을 담고 있다. 이하,
광주 5
18의
성격에 대해,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서명운동’, 그리고
‘김대중씨의 생명을 우려 하는 긴급 국제회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먼저, 광주 5
18과
관련해, 일본기독교단총회의장과 일본기독교단 일한연대특별위원회의 이름으로 ‘광주의 비상사태에
대한 우리의 성
명’이 한국통신 제55호(1980년
5월 20일자, 실제 발행일은 5월말로 추정)에
게재됐다. 광주의 시민, 학생 데모에 대해 일본 언론 지상에 서도 쓰였던
‘폭동’이라는 용어에 대해, ‘한국민주기독자동지회’의
김재 준 위원장(캐나다주재)의 말을 빌려, “군대의
폭거가 학생 및 시민을 자극하여 스스로 무장해 자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시점을 공유한다 는 점과 더불어 광주 시민들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즉, 긴급회의가 해외 한국인 기독자 그룹과 긴밀한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초기부터 광주 5
18의
성격에 대해 정보 및 의 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성명에는 이하 네가 지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있다.
1. 우리들은 광주 시민,
학생의
데모를 포함해 민주화를 염원하는 저 항운동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이 투쟁을 지지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교회와 민중이
이 사태를 길 건너 불구경 식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 라, 일본인의 책임으로서 문제의 정확한 파악과 투쟁하는 시민,
학
생들에 대한 지원을 보낼 것을 호소합니다.
2. 한국 정부 당국은 광주를
포함해 전국의 시민, 학생 데모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체포자를 즉시 석방하고,
또한
민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엄령을 철폐할 것을 요구합니다.
3. 일본 정부는 이번 계엄군의
군사적 개입 및 폭행을 중지하도록 세 력을 발휘하고 나아가 김대중씨 납치사건의 ‘정치적 결착’을 폐기하 고 원상회복을
위한 노력 할 것을 요구합니다.
4. 미국은 한국의 계엄령 사태에
대한 협력을 즉각 중지하고 민중의 염원인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상의 요구사항과 시점은 기본적으로 이후의 ‘김대중
구명운동’에 도 공유되고 있다. 당시의 1번 요구사항의
‘일본인의 책임’이 무엇인 가 하는 것과, 3번의
일본 정부의 한국 군사정권에 대한 세력 발휘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은 다소 추상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을 중심으로 인식되었던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납치사건’을
흐지부지하게 군사정권과 정치적으로 결탁한 것 에 대한 ‘책임의식’이 이와
같은 성명으로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 한국통신 제59호(1980년
9월 20일자)에는 긴급회의가 일한연 대위원회와 전개한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서명운동’의 9월 17일
자 ‘성명’이 실려있는데, 이에는 일본 정부가 김대중에 대한 일본에서 의 언동(한민통과의
관계)을 문제시한 사형판결문이 나온 뒤에도 ‘정 치결착’ 때의 약속은
존중되고 있다고 한 점에 대해, ‘정치결착’을 백 지로 돌리고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재검토를
표명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7월호 이후로는 ‘김대중
구명운동’에 관한 기사가 늘어나게 된다. 한국통신 제58호(1980년
8월 20일)부터는 시민서명운동의 서명운동 상황 및 자금지원 호소
등 일한연대위원회와 공동으로 펼치고 있던 운동에 대해 게재하고 있다. 한국으로부터 전달되는 정보(피고
가족으로 부터의 호소문 등)와 해외 연대세력으로부터의 메시지, 구속자 리스트 와 실태 등의 정보가 게재되어
있다. 이 시민서명운동에 대해서는 다 음 절의 일한연대위원회의 기록물로부터 더욱 상세히 보도록 하겠다.
‘김대중씨의 생명을 우려하는 긴급 국제회의’는
일본기독교협의회와 일본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 주최로 12월 10일,
11일 이틀간 열렸 다. 준비기간이 채 2주도 되지 않았지만 긴급히 세계교회협의회의
네 트워크를 활용해 미국, 독일,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일본에서는 정치 가, 문화인, 기독자들이 참여해 김대중의 생명의 위기에 대한 국제여
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한국통신 제62호, 12월
20일
자). 한국통신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서 참석한 사람들의 발언은 김대중 재판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였 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다나카 이사지 의원은 “일본
정부가 ‘정치결착’ 으로 사안을 애매하게 만들어버린 것을 비난하며,
김대중씨의 원상복 귀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할 것”이라 했으며, 와다 하루키는
“김대중씨 의 고난은 단순히 한국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일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긴급회의는 이들 발언이 기본적으로 “윤리 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일본 시민운동에서의 이러한 “새로운 요소”,
즉, 일본이 걸어 나아가야 할 길, 일본인의 살아가는 방식 등이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한국 민주화투쟁에 의해 강 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인정해도 좋을 것”이며,
“김대중씨의 투쟁을 지지하는 운동을 통해 진실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소중함을 배워 왔다”고 말하고
있다.
3. 일본 지식인 및 시민운동가들의 기록물로부터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했던 일본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 중 일부는
일본 정부의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및 일본 기업의 전쟁물자 기여를 문제시해왔는데,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 부의 한국에 대한 원조 및 한일관계에도 그 관심을 돌리게 됐다.
김대 중 납치사건 이후 진상 조사 및 관련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한국 내 외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일본의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 의 민주인사에 대한 지원 및 연대활동을 네트워크화하는 그룹으로 ‘일 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잡고, 한국민주화투쟁에 연대하는 일본연락회의’ 를 1974년
4월 18일에 결성했다. 이 그룹은 한국 민주화투쟁 및 한일 관계와
관련해 활동하는 다양한 이슈별, 지역별 그룹을 네트워크화하 는 것으로, 대표로는
아오치 신, 사무국장으로는 와다 하루키가 중심 이 되어 활동했다. 이 조직은
1978년 ‘일한연대위원회’[5]로
조직을 개편 하게 되며, 1980년 ‘김대중 구명운동’에서는 기독자그룹
긴급회의와 함께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서명운동’을 전개한다.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서명운 동’은 1980년
7월 10일에 열린 시민 집회 ‘광주의 사자(死者)들, 김대중씨 와 우리들’(주최: 일한연대위원회,
한 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에서 공식 결 의된 것이다(자료2).
시민집회 결의 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와 기업은 7월 9일 127명으로
구성된 유례없는 대 형경제사절단을 한국에 파견한 상태 로, 일본 정부와 재계의 전두환 정권 승인과 광주 시민학살
및 김대중의 자료 2. 1980년 7월 10일 ‘광주의 사자 생명의 위기에 가담하고 있는 것을 (死者)들, 김대중씨와 우리들’ 안내
전 비판하면서 이에 ‘시민서명운동’을 개 단지. 강연, 시낭독, 도미야마 다에코의 슬라이드 상영 등이 이뤄졌다.
시했다고 한다.
아오치 신, 이치카와 후사에, 나카지마 마사아키의 이름으로 개시된 이 운동은 1)
김대중씨 를 죽이지 말 것, 2) 김대중씨를 포함한 군법회의 37명 피고를
석방할 것, 3) 일본 정부는 김대중씨를 죽이지 않도록 진지하게 노력할 것, 을 요청하고
있다. 이후, 길거리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전국에서
보내져 온 서명, 모금을 집계, 이에 대한 감사장과 영수증을 발송,
집 회 및 데모 안내 엽서, 서명운동뉴스 발행작업 등을 사무소로 찾아 온 일반 시민 지원가들과 함께 했다.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서명운동’은 서명운동뉴스(창간호 1980 년 11월 10일자)를
기관지로 발행하며, 광주 5
18
및 김대중 등의 재 판 소식을 전하며 시민서명운동의 활동일지와 앞으로의 집회 정보 등 을 전했다. 이 창간호의
편집후기에는 “전후 민주주의는 기성 사실의 쌓아 올림에 의해 형해화해 왔다. 김대중씨를
죽게 내버려 두고 부당 한 재판을 용인하는 것은 7년 전 일본에서 이뤄진 부정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며 우리의 민주주의도 죽이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명 기하고 싶다”로 글을 마치고 있다. 즉,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일 본의 ‘민주주의’에 의구심을 제기한 시민들은,
당시의 ‘정치결착’의 결 과로 김대중의 사형 위기를 초래했으며 이를
다시금 용인하는 것은 일본의 민주주의도 죽이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 지식인 및 시민운동가들에 있어 ‘김대중
구명운동’은 일본의 민주주의의 ‘재생’과 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대중 구명운동’에는
이러한 지식인, 기독자 그룹 뿐만 아니라 노 동운동 그룹, 여성운동
그룹, 그 외 개별적 활동가들의 참여가 있었 다. 개별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수도권의 도쿄수도노동조합
등이 중심 이 되어 1979년말 ‘민중운동’ 측면의
한일연대를 위해 결성된 ‘일한민 중연대수도권연락회의’(이하, 수도권연락회의)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재일한국인‘정치범’구원운동 조직 및 일본 시민활동가 조직 등과 연계하며
1980년 광주 5
18과
김대중 및 관련자들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가 김대중 등 에 대해 군사재판에 넘길 것이라는 정보가 일본에도 전해지자 수도권 연락회는 김대중 등 피고인들의 구명운동과 관련해 ‘100일간
긴급운 동’[6]을
추진,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마! 수도권긴급운동
속보를 발행 하기도 했다. 이 기관지는
김대중 등의 구명운동과 관련해 수도권연 락회의의 논평 및 활동 내용 소개, 그리고 향후 활동 일정 등을 공유 하는 전단지 형태의
소식지다. 1981년 초에 나온 속보 5호는 “전두환 은
1980년 내 처형을 단행하지 못했다! 김대중씨 등 완전석방,
한국 민주화 연대투쟁의 걸음을 나아가자!”라는 논평 보고기사로, 이 기사 는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마! 일본정부는 사형가담을 멈춰라! 10.26 뿌 리파선언 수도권 집회’에
대한 정보가 게재돼 있다. 이날 요요기공원 에 모인 2천명의 사람들은 “뿌리파
선언”을 결의하고 같은 선언이 오 사카, 교토, 큐슈 등에서도
채택되었다고 한다. 이 속보의 뒷면에는 12월 4일~6일의
연속투쟁활동에 대해 “일본 민중은 몸을 던져 몇 번 이나 외무성에 회답을 요구했다”라는 제목으로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 마! 수도권긴급운동 12.6 외무성직접청원행동참가자 일동’의
이름으로 채택된 긴급성명을 싣고 있다.
여성운동 그룹으로는 1977년
3월 1일에 결성된 ‘아시아여성들의 모 임’이
있다. ‘아시아여성들의 모임’은 1970~80년대 당시 ‘원조’라는
이 름으로 행해진 경제 진출 또는 침략에 대해 성찰하고 동남아시아의 여성들의 인권문제, 노동권문제,
환경문제 등과 관련해 정보를 공유하 고 활동한 단체로, ‘김대중 구명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지는 않 았으나 멤버 중 한명인 도미야마 다에코를 중심으로 도미야마 다에코 가 제작한 영화 상영회 등을 통해 광주 5
18과
관련된 ‘일한연대’ 활 동에 참여했다. 기관지
아시아와 여성해방에서는 광주
5
18과
관련 해 제10호(1981년 4월호)에 특집이
실렸다. 제10호의 첫 페이지는 1981년 4월
‘아시아여성들의 모임’의 이름으로 이 특집호의 제작 취지 가 설명되어 있다. “일본
여성들이 이에 연대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
가. 경제대국
군사대국화를 거부하고 분단의 고정화를 꾀하는 일본 체제에 맞서는 투쟁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것이 아닐까. 광주의
사자 들의 죽음을 허황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광주의 피를 열매를 맺는 씨앗으로 바꿔가기 위해 우리들은 이 호를 광주 1주년의
기념호로 한국민중에게 바친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 여성운동 그룹의 경우,
다 른 시민운동 그룹이 ‘김대중 구명운동’을 중심으로 ‘일한연대’
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과 달리, 광주 시민들의 죽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에 대해 일본 여성의 입장에서의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아시아여성들의 모임’의
멤버인 도미야마 다에코는 화가, 판화가로 서 작품활동을 통해 1970년대
이후 ‘일한연대’ 활동에 참여해 왔다.
1921년생의 도미야마는 식민지 만주에서 여학교시절을 보냈으며, 전 후 조선인동창생을 만나기 위해 1970년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도미 야마는 당시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어 나온 김지하의 시에 크게 감명 을 받고 1971년부터
김지하의 시를 모티브로 한 판화를 제작했으며
1976년
이후 이들 시리즈가 묶여진 손의 기도,
밥은 하늘,
비어 등의 슬라이드로
제작되었다(도미야마 다에코, 2009). 1980년의 광주 5
18과
시민 학살에 대해, TV 뉴스 등으로 내용을 알게 된 뒤 6월 중 순부터
거의 2주 만[7]에
제작해 낸 것이 광주를 테마로 한 판화이며 (아시아와 여성해방 1981년 4월호), 이를
슬라이드로 제작해 그 이 미지를 가지고 출간한 것이 쓰러진 자들을 위한 기도
1980년 5 월
광주이다. 이 슬라이드와 관련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다카 하시 유지가 “쓰러진 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레코드(다카하시 유지 작 곡 및 피아노연주 수록)를 제작,
상영 당시 슬라이드와 함께 배경음악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는 1981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도미야마 에 따르면 “마에다 가츠히로씨에 의한 다큐멘터리 뉴스와 나의 광주
시리즈 판화를 조합해 고은 시의 시로 끝나는” 형태로, 영화 자유광
주(1981년, 25분)가
제작되었다고 한다(자료 3). 영화에서도 음악은 다카하시 유지가 맡았으며,
시의 낭독에는 70년대부터 슬라이드 상영

자료 3. 도미야마 다에코의 쓰러진
자들을 위한 기도 – 1980년 5월・광주(왼쪽)와 영화 자유광주(오른쪽).
및 시 낭독회를 통해 함께 활동해
온 재일한국인 지식인 정경모가 참 여했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김지하의 시, 그리고 광주 5
18을
판화 이미지 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한국의 시민, 민중들이 호소하고 있는 것을 일 본 사회에 ‘대변하는
역할’ 즉,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도미야마는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테마로 일본의 전쟁책임,
식민지 책임과 관련된 작품을 제작해 나간다(도미야 마 다에코, 2009).
4. 일본 혁신계
정당 및 조직과 연계한 시민사회운동 기록물 로부터
1980년 7월 4일 이후,
그동안 일한연대운동을 해왔던 기독자 그룹 과 시민운동 및 민중운동의 그룹들이 활발하게 김대중을 포함한 피고 인들의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조직화’된 기존
사 회운동 세력 및 정치정당과도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구명운동을 위한 세력화를 시도했다. 이에 7월
11일에는 사회당, 총평, 공산당, 혁신자
유연합, 사회민주연합, 중립노동조합연락회의,
일조협회, 일한연대연 락회의가 ‘김대중구출긴급각계대표자회의’를
열고, “김대중씨의 신체, 생명의 확보, 군법회의 기소 철회,
즉각적인 석방과 정치 활동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기로 하고, ‘김대중구출일본연락회의’를
발족한다. ‘김대 중구출일본연락회의’는 전국 ‘천만명서명운동’
캠페인을 7월 19일 결정 하고, 매달 ‘김대중을
죽이지마!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천만명서명
운동’은 60년안보개정저지운동, 핵병기폐기운동,
공무원제도개혁반대 운동, 국철분할민영화반대운동에서 결의된 적 있으나, 기본적으로
일 본의 사회운동사에서도 드문 편이다(이미숙, 2018: 130). 이는 그간의 탈권위적
탈중심적 일한연대
활동의 네트워크가 조직중심의 운동세력 의 합류까지 이끌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대중 납치 8주년인
1980년 8월 8일에 열린 제1회 ‘김대중을
죽이지마! 국민대회’에는 1만 5천여명이
참석했다. 와다 하루키의 기록(와다 하루키, 1982)에
의하 면 제2회 9월 17일에는 1만 7천여명,
제3회 11월 13일에는 6천여명,
제4회 11월 27일에는 7천여명,
제5회 12월 5일에는 7천여명,
제6회 12월 22일에는 1만 5천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천만 명서명운동’은 1981년
4월 시점으로 525만 8,819명에 이르렀다.
이는 대략적으로 일본 시민사회의 20명 중 한 명은 김대중 구명운동에 서 명을 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만큼 ‘김대중 구명운동’은 일본 시 민사회 스스로의 운동과제로서 인식되었으며
실천되었다고 볼 수 있 겠다.
5. 광주 5
18과 ‘김대중 구명운동’의
전개과정
이상의 시민사회 기록물을 통해 본 ‘김대중
구명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음 표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표 1> 광주 5・18과 김대중 구명운동 관련 일본 시민사회의 움직임
|
날짜 |
내용 |
|
1980.05.17 |
전국 비상계엄령. 김대중 등 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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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5.18 |
~27 광주 민주화운동 및 시민 학살 |
|
1980.05.18 |
김대중선생구출대책위원회
부활 (1980년 3월 해산했으나 5월 18일 재조직) 한민통
등 주일한국대사관 앞 항의 데모 |
|
1980.05.21 |
한국 계엄사령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발표 |
|
1980.05.23 |
아오치 신 등 15명의 일본 지식인 “성명” |
|
1980.05.28 |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과 일본 마에다 특명전권대사 회견 |
|
1980.06.10 |
재일한국・조선인 “광주대학살규탄・희생자추모집회” |
|
1980.07.04 |
“군사독재정권에 전면대결하는
한국 민중에 연대하고 대한정책의 전환을 요구하는 7.4 집회” 사회당, 노동조합총평의회, 사회당도본부,
도쿄지방평 의회, 일조연대도쿄행동위원회, 통일지지일본위원회, 일한연대수도권연락 회의,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전국회의,
일조국민회의 등으로 구 성된 7・4집회실행위원회가
주최 |
|
1980.07.10 |
일한연대위원회,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 집회 “광주의 사자들・김대중씨 와 우리들”,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서명운동 결의 |
|
1980.07.11 |
사회당, 노동조합총평의회, 공산당, 혁신자유연합, 사회민주연합, 중립노 동조합연락회의, 일조협회, 일한연대연락회의가 “김대중구출긴급각계대표 자회의” 개최,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발족 |
|
1980.07.19 |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1,000만명 서명운동” 결정 |
|
1980.08.08 |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납치사건 7주년,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국민대회” |
|
1980.08.13~14 |
한민통 “김대중선생구출과 한국민주화를 위한 긴급해외한국인대표자회의” |
|
1980.08.22 |
“김대중재판조사일본위원회” 결성 (법률가 107명) |
|
1980.09 |
전국각지에서 서명, 모금, 집회
자발적 조직 및 참가 확대 |
|
1980.09.17 |
김대중 사형판결 (제1심)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제2회 국민대회” |
|
1980.10.05 |
한민통, 김대중선생구출대책위원회
“김대중씨구출・유엔요청단파견 한일연대전국집회” |
|
1980.10.9~10 |
김대중재판조사일본위원회 “김대중재판조사・규탄국민법정” |
|
1980.11 |
국회청원운동 (NCHRK와의 정보공유 및 연계) 개시 |
|
1980.11.03 |
김대중 사형판결 (제2심) |
|
1980.11.13 |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제2심 사형판결항의,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11・13 국민대회” |
|
날짜 |
내용 |
|
1980.11.27 |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제 4회 국민대회” |
|
1980.11.28 |
일한연대위・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가톨릭정의와평화협의회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총결기집회” |
|
1980.12.03 |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마! 수도권긴급행동 “김대중씨 등에 자유를! 광주・중형판결을 허락하지 않는다! 12・3 대집회” |
|
1980.12.04 |
요코하마항만노조 및 시민 “한국화물선 접근저지” 투쟁 |
|
1980.12.05 |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제 5회 국민대회” |
|
1980.12.09 |
안보파기중앙실행위원회, 일조협회 등 “김대중씨사형저지긴급항의집회” |
|
1980.12.10~11 |
일본기독교협의회, 가톨릭정의와평화협의회 “김대중씨의 생명을 우려하는 긴급국제회의” |
|
1980.12.22 |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제 6회 국민대회” |
|
1980.12.20.~25 |
“김대중씨를 죽이지마!” 시민서명운동 – 연속행동 |
|
1981.01.23 |
김대중 사형판결 (대법원) → 무기징역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부당판결규탄! 김대중씨 완전석방요구! 1・23 긴급집회” |
|
1981.04.10 |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 1,000만명 서명운동 → 525만 8,819명 서명집계 |
|
1981.04.18 |
영화 자유광주
완성기념상영회 |
|
1981.05.16~18 |
“한국민주화지원긴급세계대회”위원회 (아오치 신, 우츠노미야
도쿠마, 배동호, 마키에다 모토후미, 오다 마코토, 곽동의 등) 3일간 “한국민주화 지원긴급세계대회” 개최 |
|
1982.12.23 |
김대중 형집행정지 및 미국 출국 |
Ⅳ. 광주 5・18과 ‘김대중 구명운동’으로 본 ‘일한연대’
일본 시민사회 기록물을 조사, 정리한
결과, ‘일한연대’ 활동 참가자 들의 구성, 참가자
그룹간의 연계와 네트워크, 문제의식 등의 측면에 서, 그 자체로 하나의 ‘트랜스내셔널’한
측면이 있었으며, 이는 일본 사회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지향한
운동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1980년의 ‘김대중
구명운동’은 그 성격상 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 건과 당시의 김대중 구출운동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일본 시민사회 에서 그간 주변화되고 차별받았던 재일한국인들이 1960년대
후반 이 후 ‘김희로 사건’과 ‘히타치 취직차별사건’
등을 겪으며 일본 시민들과 연대 활동을 형성해 나가던 와중에 생긴, 1973년 김대중 구출운동은 한편으로는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염원이라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 니는 것과 동시에,
냉전 및 분단체제하 ‘한일유착’을 문제시하고 일본 의 ‘대한원조’의
성격을 의문시하는 일본 시민들과의 ‘연대’라는 경험 을 공유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재일한국인 ‘정치범’구 원운동 및 민족차별철폐운동 등[8]으로
이어졌으며, 1980년의 ‘김대중 구명운동’은 재일한국인
민주세력에게, 한민통의 민족시보가 밝힌 것처럼 ‘일한연대’ 운동으로서
규정되었다.
일본 기독자, 지식인,
문화인 등의 활동가들에게 1980년의 ‘김대중
구명운동’은
납치사건 당사자였던 ‘김대중’에 대한 책임의식과 더불어,
일본 민주주의의의 회복 또는 재생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김대 중’에 대한
책임의식이란, 1973년 김대중납치사건 당시, 2차례에 걸친 ‘정치결착’을
용인하고 말았다는 문제의식, 즉 한국 독재정권과의 ‘우 호’를 우선시하는
일본 정부, 재계, 관료들의 태도, 또 일본
대다수 대 중들이 보인 이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로 인해 이와같은 ‘정치결착’을
용인하고 말았다는 문제의식을 가르킨다. 일본의 기독자그룹이 중심이 되어 열린 ‘김대중씨의
생명을 우려하는 긴급 국제회의’에서의 일본 의 원 및 지식인들의 발언을 통해, ‘정치결착’에
대한 책임에서 김대중 구 명운동이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일본의 민주주의를 지향 하는 운동으로서도
해석되었는데, 위 국제회의에서 와다 하루키가 ‘김 대중씨의 고난’은
‘우리 일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언급이나, 긴 급회의가
김대중 구명운동을 통해 “진실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소중 함”을 배워왔다는
언급은 ‘김대중 구명운동’을 통해 일본 시민들이 김 대중 사형에 ‘가담’하는
일본을 ‘변혁’하려는 운동으로서, 즉,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으로서의 요소를 지녔다는 것으로 보여준다.
한편, 일본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의 ‘김대중 구명운동’에는 ‘일본인’
으로서의 ‘윤리성’ 및 ‘도의성’
회복이라는 측면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 인다. 긴급회의 기관지인 한국통신(1981년
1월 20일자)의 논설 “김 대중씨의
감형을 맞아 생각해 본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씨를 포함해 한국 민주 인사의
투쟁에 마음을 움직여 왔으며 인간으로서의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왔다”며, “‘김대중씨를
죽이지마’의 운동은 일본 인의 도의성 회복의 운동으로서도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사에는 ‘도의성 회복의 운동’의 문맥이
무엇을 뜻하 는 지까지는 설명되어있지 않지만, 한일관계사적인 측면에서 일본 시 민사회가 과거 종주국 일본의 식민지이기도 했던 한국에
대해 가지는 ‘윤리성’과 ‘도의성’
측면의 ‘부채’, 그리고 이에 대한 ‘회복’을 지향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 ‘김대중 구명운동’
당시 에는 식민주의 및 전쟁 책임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일본 시민들의
과거 식민주의 및 전쟁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제기 및 목소리는 1980년대 중후반 이후에야 거론되기 시작했다(이미숙,
2018: 294). 게다가 ‘김대중 구명운동’이
폭넓은 시민사회에서 일어난 것과 비교하면 식민주의 및 전쟁책임에 대한 시민운동은 비교적으로 소규모의 시민사회의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김대중 구명운 동’은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일한연대’ 활동의 긴 흐름 속에서,
1980 년대 중후반 이후의 과거 식민지 청산문제 및 전쟁책임 문제로 이어 지는 길목에서 ‘일본인’으로서의
‘윤리성’, ‘도의성’, 그리고 ‘일본이 걸
어 나아가야 할 길, 일본인의 살아가는 방식 등’(한국통신 1980년 12월 20일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가 함께 작 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한연대운동’에 대한 이미숙(2018)의 연구에 서,
와다 하루키는 1980년의 일본 사회에서의 ‘김대중 구명운동’의
기 반을 김대중이라는 개인에 대한 ‘동정’으로 파악했었으며(와다 하루키,
1981: 27; 이미숙, 2018: 259-262), 김대중 구명운동의 국민집회에 총평 노조를 동원했던 와타나베
데츠로9는 운동에 참여한 노조원들 가 운데에는 ‘문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발적 참가라기보다 많은 경우 ‘동원’된 참가였으며,
광주 5
18과
관련해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즉, 한국의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은 그간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중의 참여 및 동원을 이끌어내기 쉬웠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 외,
일본의 시민운동 그룹에게는 ‘김대중 구명운동’은 1970년
대 이후의 시민운동 자체의 ‘계승’을 위한 하나의 ‘과제’라는 측면도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지금이야말로 자유를!
김대중씨를 구 하자10(30분)라는
영상물 후반의 대규모 집회에서는 ‘김대중 구명운동’ 이 미일안보조약 반대투쟁 등 다양한 이슈
및 과제와 함께 제시되어 있 는데, 이는 일본의 혁신세력 운동 및 시민운동이 각자의 과제 및 이슈 를 중심으로 네트워크형으로
활동했으며 이 가운데 ‘김대중 구명운동’ 은 이들 각자의 운동의 세력 확장 또는 운동 계승을
위한, 단기적으로 결집될 수 있는 하나의 ‘과제’라는 성격도
있었다고 보인다.
![]()
9 와타나베 데츠로와의 인터뷰
(2011년 11월 9일).
상세하게는
이미숙(2018)을 참조.
10 1980년 말 또는 1981년 초 제작 추정으로 1981년 라이프치히국제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요소가 ‘일한연대’
활동의 성격을 중점적으로
규정지었다고는 볼 수 없겠다. 광주 5
18과
‘김대중 구명운동’을 거치 며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들 연대세력이 재일한국인 등의 민족차별 철폐운동, 그리고 식민지배의 과거청산과 전쟁책임 문제와 관련된
활 동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광주 5
18과
‘김대중 구명운동’과 관련된 시민사회 기록물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일한연대’
활동은 한국의 정 치현실과 민주화운동에 자극을 받으면서 형성된, 일본 시민사회의 ‘민
주주의’ 지향의 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Ⅴ. 맺음말
이 논문은 광주 5
18
및 ‘김대중 구명운동’과 관련된 일본 시민사회 의 기록물을 중심으로 ‘일한연대’
활동의 성격과 의미를 분석해 보고 자 했다. 일본에서의 ‘김대중 구명운동’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 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로서 인식된 ‘김대중’과,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한일 정부간의 ‘정치결착’, 그리고
이에 대 한 일본 시민사회의 ‘책임의식’이 그 배경에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80년의 김대중의 생명의 위기에 대해, 일본 시민운동은
일본의 정 부와 제계의 ‘가담’에 대한 ‘책임’, 일본
민주주의의 회복과 재생, 일본 의 ‘도의성’과 ‘윤리성’
회복 등 일본의 나아가야할 길에 대한 문제제 기를 하는 한편, 일반 대중의 차원에서는 김대중 개인에 대한 ‘동정’이
라는 측면부터 시민운동 ‘계승’의 차원 등 다양한 성격이 공존한 것으 로 보인다. 1980년의
광주 5
18과
‘김대중 구명운동’에서 나타난 ‘일한 연대’ 활동은
이후, 일본 민주주의의 근원적 과제인 과거사 청산문제 와 전쟁책임 문제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과거사 청산문제와 전쟁책임 문제가 시민사회의 중요한 의제로서 떠오르는 것은 1980년대
중후반 이후로, 한국의 민주화가 본격화 된 이후인 1990년대
들어서부터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일본 시민사회에 ‘일한연대’라는
운동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한연대’ 운동은 일본의 민주주의 자체가 기존의 형해화된 민주주의가
아닌 근원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 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의 일본의 정치사회, 시민 사회의 변화,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한국의 정치사회, 시민사회의 변화는 1990년대의 국제적인 정치경제구조의 변화 속에 다양한
과제 와 어려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일한연대’의 한계점과
그 성찰, 그리고 1990년대 이후의 한일시민연대의 활동과 성격 등은
앞 으로의 연구과제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가 가진 몇 가지 한계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 저, 1980년 5
18
및 ‘김대중 구명운동’과 관련된 일본 시민사회 자료 를 망라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었 다. 시민사회 기록물은 정부 문서 등과 달리 ‘비공식적’인
자료인 관계 로, 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지 않고, 릿쿄대학 ‘공생사회자료센터’도
‘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 또는 개별 활동가들로부터 이전된 일부의 기 록물만을 보관하고 있는 상태다.
여전히 수많은 시민운동 관련 자료 들은 개별 운동 참가자가 보관하고 있거나 또는 이미 폐기되었을 가 능성도 있다.
또한 본 연구자는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바, 도쿄에서 방 문할 수 있었던 릿쿄대학 센터 및 직접
만날 수 있었던 ‘한국문제기독 자긴급회의’ 관계자, ‘도쿄지방평의회’
관계자, 도미야마 다에코 등으로 부터 개인적으로 입수 또는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를 중심으로 했다 는 점도
한계점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 논문은 ‘탈권위적
탈중심적’
시 민운동이 제작 생산한 기록물이라는 자료대상의 특성과 그 접근의 어 려움 등으로, 위와 같은
한계점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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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민중연대뉴스 봄(일한민중연대수도권연락회의)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마! 수도권긴급운동 속보(일한민중연대수도권연락회의)
아시아와 여성해방(아시아여성들의 모임)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마! 요코스카 1만 명 서명운동 뉴스 (요코스카 시민 운동 그룹)
피의 항쟁의 기록(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 통일사 프로 덕션, 영상물)
쓰러진 자들을 위한 기도
- 1980년 5월
광주(도미야마 다에코, 영상물)
자유광주(도미야마 다에코, 영상물)
지금이야말로 자유를! 김대중씨를 구하자(‘지금이야말로 자유를! 김대중 씨 등을 구하자’ 제작위원회, 영상물) 그 외 소책자, 전단지 자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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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고 |
2019.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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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사 |
2019.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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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정 |
2019.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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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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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apan-Korea Solidarity’ activities in 1980:
Analysis
of documents about May 18 Gwangju Uprising and ‘Save
Kim
Dae-jung Movement’ in Japanese civil society
Misook
Lee
(Assistant Professor, Global Liberal Arts Program, Rikkyo University)
This study
examines the nature and meaning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activities based on materials
produced in Japanese civil society in 1980 related to the May 18 Gwangju
Uprising and the ‘Save Kim Dae-jung movement’.
Today, South Korea-Japan relations was considered the worst; yet the voices
calling for solidarity among citizens have been heard again in both societies.
The examination of the nature and meaning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in Japanese civil society, which
appeared 40 years ago in response to the May 18 Gwangju and a threat to Kim
Dae-jung’s life, could have multiple implications in the analysis of Japanese
civil society, the transnationality of the Gwangju Uprising and the ‘Save
Kim Dae-jung movement’, and the South Korea-Japan
relations shaped by civil society. This study takes a close look at how the
nature of Japanese civil society changed after the “Season of Politics” in the
1960s and discusses the impact of the 1973 kidnapping incident of Kim Dae-jung
on Japanese civil society and the symbolic meaning of Kim Dae-jung for them.
The discussion is followed by an analysis of how the ‘Japan-Korea
Solidarity’ activities unfolded in Japan and
the discourses around it, using the documents and records made by Zainichi(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Japanese Christians, intellectuals, and activists in relation to the Gwangju
Uprising and the ‘Save Kim Dae-jung movement’
in 1980. The analysis revealed that the ‘Japan-Korea
Solidarity’ was a democracy-oriented movement
in Japan with an underlying ethnic movement of Zainichi,
a sense of responsibility of Japanese intellectuals and activists for the
kidnapping incident of Kim Dae-jung, and the ongoing colonial relationship
between South Korea and Japan. Although there were not yet concrete discussions
on the responsibility of the colonial past and war, which are the fundamental
tasks for Japanese democracy, the solidarity activism in 1980 turned out to be
the important foundation for Japanese civil society to continue a democracy
movement.
Key Words :
May 18 Gwangju Uprising, Save Kim Dae-jung Movement, ‘Japan-Korea Solidarity’,
Democracy, South Korea-Japan relations
[1] 정치정당 등이 참여했던 당시 집회에서는 참가자 발언 가운데 ‘문세광 사건’과
관련, 일본이 오히려 ‘피해’를 입었음을 강조하고 한국에서의 ‘반일집회’에
대해 비난하는
[2] “민주화가 선결인가, 통일이 선결인가”하는
논의와 관련해 김대중은 1970년대 초 ‘선민주화, 후통일’
노선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논의는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이뤄 져 왔으며, 한민통
결성시에는 이러한 김대중의 노선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 인다(정재준, 2006:
129). 즉, 민주화운동은 궁극적으로 통일로 나아가는 운동으로 서 파악된 것이다.
[3] 한민통은 1978년 6월 한국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규정된다. 이후, 김대중이 ‘한 민통’의
의장이었던 것을 구실로, 5
18과 관련해
김대중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던 것 이다(이미숙, 2018: 116). 그러나 당시 김대중의 ‘의장’은
한민통에 의해 추대되었던 것으로 실제로는 1980년까지는 김재화 의장대행, 80년
이후는 배동호 의장 등을 중 심으로 조직이 운영되었다.
[4] 긴급회의는 일본 교회협의회 사무실 (니시와세다 기독교회관 2층)
의 한켠에 사무 실을 마련하고 기관지 형태로 한국통신을 매달 발간했다. 또한 해외에 발신할 목 적으로 한국통신의 영어판 Korean
Communique를 발간하기도 했다. 특히, 니시 와세다 기독교회관의 5층에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회 오재식의 사무 실이 있었으며 이는 재일대한기독교총회의 사무실의 맞은 편이었다. 해외선교사들
이 일본에서는 니시와세다 기독교회관을 들렀다가 한국 종로의 한국기독교회관에 들른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니시와세다의
기독교회관이 하나의 정보의 요충지로 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미숙, 2018:
189).
[5] 와다 하루키의 기록에 의하면, 와다는 운동을 지속하는 데 있어 자금 등의 면에서
한계를 느끼게 된 시점에 1978년 10월부터 러시아로 연구차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고
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조직을 ‘일한연대위원회’로 개편하게
되었다고 한다
(와다 하루키, 2013:
184-185).
[6] ‘100일간 긴급운동’은 100일이
거의 다 된 시점인 10월 말, ‘긴급운동’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7] 도미야마 다에코의 2009년 저서에 따르면 거의 3주
만에 제작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도미야마 다에코, 2009: 187).
[8] 재일한국인들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과 지향점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를 더욱 중시하였으며, 또 일부는 일본에서 살고 있다는 것, 즉,
‘재일’하고 있는 현실상황 속에서 민족차별문제에 대한 투쟁을 더욱 중시하 는 시점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식 자체가 대결했다기보다 는 운동의 전략적 측면에서 그렇게 보여진 것으로, 실제 문제의식
자체는 공존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기은 (2006) 및 이미숙 (2018)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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