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08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의 삶 - 오마이뉴스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의 삶 - 오마이뉴스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의 삶언론인 정훈씨 저서 <아름다운 유산>서 삶 재조명
04.01.05 21:42l최종 업데이트 04.01.18 09:47l
조호진(mindle21)



▲ 윤치호 전도사와 공생원 아이들

ⓒ HWB제공

전남 목포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 김지하 시인, 가수 이난영 등을 고향이 배출한 쟁쟁한 인물로 꼽는다. 또한 이들과 함께 전쟁고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본 윤치호-윤학자 부부를 목포의 아름다운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목포 유달산 아래 바닷가에 복지시설인 '목포 공생원'이 있다. 일제 치하인 1928년 설립된 이래 지난 75년 동안 모두 3500여명의 원생을 배출한 이곳은 외국 선교사가 아닌 조선인 전도사가 만든 시설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은 곳이다.

고아의 대부인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는 열아홉의 젊은 나이로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뜻의 사회복지 시설 '공생원'을 설립했다. 전남 함평 태생인 그는 열두살 때 부친을 여의고 소년가장이 됐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독학을 하면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전도사가 됐다.

그는 교회 전도사였지만 일제시절 48차례에 걸쳐 연행·구금·고문을 당할 정도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신사참배, 일제탄압에 굴복한 당시 기독교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는 신앙의 진리와 민족정신을 끝내 지킨 보기 드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열두살 때 부친 여의고 전도사 돼 예수의 사랑 실천

그의 아내 윤학자씨는 일본 여성이다. 목포고녀를 졸업한 뒤 목포 정명학교 음악교사로 있던 다우치 치즈코는 공생원에서 교사 겸 보모로 봉사활동을 시작하다가 1938년 10월 윤치호 전도사와 국경을 초월해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 윤학자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에 부랑인들을 초청했다. 부랑인들에게 광목으로 만든 새옷을 입혔지만 정작 자신의 예복을 맞춰 입을 돈은 없었다. 그는 친구의 시계를 전당포에 맞긴 돈으로 국민복을 해입고 예식장에 입장할 정도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자신의 이상을 실천했다.

두사람은 공생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며 예수의 사랑을 실천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고초와 이별을 겪게 된다. 6.25 전쟁이 벌어지면서 인민군이 목포로 몰려오자 주변에서 피난을 강권했지만, 그는 "고아들을 두고 우리 가족만 도망칠 수 없다"며 공생원의 아이들을 지켰다.

이로 인해 인민군 치하에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인민재판에 회부된 그는 부인과 함께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하면서 목포시 죽교동 인민위원장을 맡아 많은 인명을 구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진주한 뒤에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3개월간 군부대에서 심문을 받다가 겨우 무혐의로 풀려났다.

윤치호 전도사. 그는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고아들의 대부로서의 사명을 오래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마흔 둘이던 1951년, 원생들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로 갔다가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 없는 공생원을 지키다 돌아가신 어머니"




▲ 윤치호 전도사의 이야기를 다룬 '아름다운 유산' 표지.

ⓒ HWB제공
윤학자씨는 남편이 행방불명된 뒤 공생원을 외롭게 지키면서 전쟁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이같은 사랑에 대한 평가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1963년), 제1회 목포시민상(1965년), 전남지사 장한 어머니상(1968년)을 수상했다. 그는 1968년 남편의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쉰여섯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없는 공생원을 지키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고아들 속에 나를 넣어 키우는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고생을 하셔서 그런지 56세에 돌아가셨다. 목포 시민들은 개항이래 최초의 시민장을 치려 명복을 빌어주었다."

큰아들 윤기(59)씨는 어머니의 생과 마감을 이렇게 기억했다. 윤기씨가 어머니의 일생을 기록한 <어미는 바보야>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이 원작이 되어 '사랑의 묵시록'이라는 한일합작 영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언론인 정훈(59)씨가 윤치호 전도사의 생애를 다룬 <아름다운 유산-복지순교자 윤치호 이야기>(HWB출판)를 펴냈다. 이 책을 쓴 정훈씨는 한국일보 도코특파원과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언론인이다. 이 책의 판매수익금은 전액 공생복지재단의 복지기금에 쓰인다.

저자는 이 책 후기에서 "목포하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선 김대중 전대통령, 시인 김지하, 가수 이난영 등 헤아리기가 많을 정도로 많은데 윤치호 부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이들의 삶이 처절할 정도 극적이었다"면서 "평범함을 버리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 것, 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 뛰어든 것 등이 범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며 두 사람의 삶을 깊이 평가했다.

소외된 이들의 친구였던 예수는, 가난한 이웃을 돕고 사랑하라는 진리를 남긴 채 십자가에 못박혔다. 참 신앙인으로 평가받는 윤치호 전도사 부부는 전쟁고아를 향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서, 소외된 이웃을 외면한 신앙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주고 있다.

"전쟁의 와중이라 제대로 된 급식도 힘들고 난방도 어려워 원생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도 고아들은 하루에도 십여 명씩 밀려들고 있었다. 자고 있는 원생들의 모습에서 천사를 보았다. 한 녀석은 아마도 꿈속에서 부모를 만난 모양이다. 연신 생글거리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녀석은 무엇인가 맛있게 먹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에서 고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삼 다짐했다. '이 아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안겨주어선 안된다. 나는 길 잃은 어린 양들을 위해 이 보금자리인 공생원을 일궈 나가는데 전 생애를 바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나의 평생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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