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4

알라딘: 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알라딘: 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정병호 | 권헌익 (지은이) | 창비 | 201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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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이자 냉전사 이론연구로 국제학계에서 기어츠상 등 굴지의 상을 수상해온 권헌익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북한을 열차례 이상 방문하며 남북문화통합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온 정병호가 북한 정치체제 유지의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5년여에 걸쳐 공동 작업한 연구의 결실이다.

3대세습으로 들어선 북한의 정치체제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들은 이를 봉건왕조의 연장이 아니라 현대적 카리스마 정치의 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한에 관한 일면적 관측이 여전히 주를 이루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논쟁을 던져주는 주제로서, 북한만이 아니라 21세기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다양한 상징세습권력의 출현이라는 현상을 분석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서론

제1장 대국상
유격대국가
가족국가
새로운 가족국가
그리움의 정치

제2장 현대적 극장국가
과시적 권력
꽃 파는 처녀
피바다
전통의 재발명

제3장 총대
선군정치이론
총이라는 선물
총대철학
총의 힘, 사랑의 힘

제4장 혁명렬사릉
북한의 국립묘지
혁명열사들을 위한 기념물
만주 빠맃산의 정치적 사후세계
세습적 카리스마의 완성

제5장 지도자에게 바치는 선물
글로벌 조선
국제친선전람관
제3세계의 지도자
북한예외론

제6장 도덕경제
도덕경제
고난의 행군
공존의 윤리

결론


참고문헌
도판 출처
찾아보기
감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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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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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사회인류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석좌교수이다. 런던정경대학에서 재직했고, 서울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있다. 시베리아와 베트남에서 현지조사를 했으며 근래에는 한국전쟁의 현재적 역사에도 관심을 두고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학살, 그 이후』 『또 하나의 냉전』 『극장국가 북한』(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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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일본의 교육과 소수민족에 대한 현장연구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도적 구호활동의 일환으로 여러차례 방북했고, 조·중 접경지역에서 북한 기근과 피해상황을 연구했다. 장기간 탈북청소년 교육지원사업을 하면서 하나원 내의 ‘하나둘학교’ 등을 설립하고, 남북문화통합을 주제로 한 공동연구를 이끌어 『웰컴 투 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한국의 다문화공간』 등을 펴냈다. 현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겸 글로벌다문화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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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나라에 관한 논쟁적인 책이 출간되었다.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North Korea: Beyond Charismatic Politics, 2012년 영어본으로 먼저 출간되고 이후 저자들이 직접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이자 냉전사 이론연구로 국제학계에서 기어츠상 등 굴지의 상을 수상해온 권헌익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북한을 열차례 이상 방문하며 남북문화통합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온 정병호가 북한 정치체제 유지의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5년여에 걸쳐 공동 작업한 연구의 결실이다. 이 책은 현 시기 북한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성과이자 최고의 인류학적 분석으로 손색이 없다.
3대세습으로 들어선 북한의 정치체제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들은 이를 봉건왕조의 연장이 아니라 현대적 카리스마 정치의 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한에 관한 일면적 관측이 여전히 주를 이루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논쟁을 던져주는 주제로서, 북한만이 아니라 21세기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다양한 상징세습권력의 출현이라는 현상을 분석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북한은 언제 그리고 왜 극장국가로 탈바꿈했는가

‘극장국가’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발리 네가라(Negara)의 사례를 통해 제시한 개념으로, 물리적 강제가 아닌 과시의 정치(화려한 의례와 공연)로 통치되는 국가를 통칭한다. 이 극장의 스포트라이트는 그 사회를 넘어 다른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배권력의 힘에 맞춰져 있으며, 그로 인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삶을 초자연적 질서로 받아들이게 된다. 저자들은 ‘극장국가’라는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북한사회에 적용하여 북한의 상징체계와 예술정치를 분석하는 것이다.
북한은 건국 이래 국가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20세기 초 항일무장투쟁의 기억을 끊임없이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켜왔다. 이는 냉전시대의 다른 공산주의국가들의 시도와 일맥상통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국가정치는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전세계에서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단지 북한만이 예외다.
북한의 역사 새로 쓰기는 지도층의 권력유지 특히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세습과 밀접히 연관된다. 저자들은 그 역사가 단순한 서적의 형태를 넘어 음악과 연극 더 나아가 건축 양식의 형태로까지 증폭되어 생산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북한이 언제, 왜 극장국가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지를 밝혀내기 시작한다. 이 책의 제1장과 2장은 국가정치가 역사를 어떻게 발명해내 이를 문화예술 분야에 반영하는지를 다루는데, 저자들은 1994년 대국상(大國喪, 김일성의 사망) 이후 대대적으로 전개된 “추모와 그리움의 드라마”를 주의깊게 살핀다. 북한이 다양한 음악·연극 공연을 선보이고 대규모 건축에 열을 올리며 현대적 극장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시기가 곧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가 한창 진행되던 때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제작배경은 매우 뚜렷하다.
2000년대 북한이 남한에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많은 이들이 참관했던 아리랑축전(제2장)과 혁명렬사릉(제4장), 국제친선전람관(제5장) 등 대규모 스펙터클의 사례들 또한 모두 권력승계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아리랑축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축전은 북한이 외부세계에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 즉 북한 정치체제의 역사적 기원과 미래의 열망을 청소년과 시민-배우의 집단예술공연으로 보여주는 극적 장치, “예술과 정치의 첨예한 결합체”다. 아리랑축전은 북한의 극장국가 정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의 산물로서 북한이 권력을 매끄럽게 승계해내는 데 큰 몫을 해냈다. 이는 또한 공연에 참여한 시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메시지를 몸짓과 목소리로 대변하는 과정에서 “일심단결”이라는 북한 고유의 상징이 그들의 정신과 의식에 스며드는 극장국가의 역학을 보여준다.
북한이 창조해낸 이와 같은 극장국가의 면모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고전적 테마, 즉 혁명적 카리스마의 필연적 종말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카리스마 권력은 위기 시에 등장했다가 언젠가 일상의 질서로 돌아가면 서서히 사라져 전통적 권력이나 합리적-법적 권력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는 베버의 주장은 1989년 구사회주의권이 일제히 몰락하면서 여실히 증명된 바 있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이 극장국가적인 기제를 통해 카리스마의 운명을 진정 극복해낸 것일까.

극장국가 북한은 과연 무엇을 상영하고자 하는가

이 책의 제3장부터 5장까지는 각각 ‘두개의 권총 에피소드’ ‘사라진 전사자묘지들’ ‘김일성이 전세계로부터 받은 선물의 면면’ 등의 흥미롭고 다채로운 서사로 채워진다. 저자들의 체계적인 인류학 연구는 북한의 정보통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문헌·영상·예술작품들을 토대로 그 통제의 벽에 균열을 내면서 내부의 면면을 드러내준다. 이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 결국 저자들이 던지는 물음은 하나로 모아진다. “진정 흥미로운 질문은, 그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지 또는 얼마만큼 진실이 담겨 있는지가 아니라, 왜 그러한 요소들이 이야기에 도입되었는지 또 이 이야기는 이런 가공의 서사적 요소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다.”
북한은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을까. 한편으로 보면 북한은 극장국가적 요소를 통해 감시와 처벌이라는 물리적 강제를 넘어서는 현대적 통치기술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과거 유교사회의 충과 효라는 덕목을 종합적으로 개편하여 카리스마 정치의 철학적 토대까지 마련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메시지의 숨은 뜻, 즉 북한은 왜 통치체제에서부터 시민들의 철학까지를 쉼없이 개혁해냈는가를 물어볼 차례다.
제3장 ‘총대’ 편은 그 숨은 뜻을 드러내주는 장으로, 김형직-김일성 부자의 ‘두 자루의 권총’ 일화와 김일성-김정일의 ‘한 자루의 권총’ 이야기를 들려주며 북한이 선군정치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과정을 차례로 풀어본다. 북한은 냉전종식 후에 스스로가 소련을 대신해 미국의 패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적수가 되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다른 국가들이 빠르게 경제우선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와중에도 홀로 ‘군사우선 사회주의’를 고집했다. 저자들이 보기에 ‘총대’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비단 국가안보만의 문제를 넘어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무엇이 진정한 인간을 만들고 무엇이 윤리적 삶을 구성하며 어떻게 의미있는 정치적 삶을 사느냐”라는 철학적 문제에 가깝다. 이와 같은 철학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북한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세습되는 과정을 준비했는지, 또 차질없이 이뤄내려고 했는가를 낱낱이 드러내준다.
권력세습에 관한 또다른 중요한 사례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체제의 핵심전통인 현지지도다. 이는 극장국가의 연출자가 몸소 변방으로 찾아가 시민을 만나는 방식으로, 김정일은 이를 “선군조선의 모든 기적의 근본원천”이라고 믿었다. 김일성 사후에 이 전통이 강화되면서 특히 그 순례지가 군사시설로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곧 북한의 선군사상과 총대철학이라는 ‘현대적 통치철학’이 결국 ‘총대가문’ 즉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습체제를 완강히 지켜내려는 처절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망라한 체계적 인류학 연구의 결실

1994년 이후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과 대기근이라는 두가지 국가적 재앙에 맞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 위기는 북한이 냉전과 사회주의권 몰락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특히 경제와 국방 중 무엇을 우위에 둘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생긴 결과다. 결국 “정치적 권력의 본성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예술정치”가 맞닥뜨린 현실은, 식량위기에 이은 대규모 아사와 조선로동당의 권위 추락이었다(제6장 참조).
내부의 위기와 외부의 위협은 극장국가적 요소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강력한 드라마와 과시의 정치는 국가의 미래에 여전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재앙에 맞서 진정 혁명적 카리스마의 필멸성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시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채로 전진하는 이 극장국가는 과연 어떤 결말을 준비하고 있는가. 분명한 점은 “북한에 미래가 있으려면 극장국가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매듭지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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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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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  새창으로 보기
리동 ㅣ 2015-06-18 ㅣ 공감(0) ㅣ 댓글 (0)
“북한이라는 국가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랬던 적도 없다. 북한에는 카리스마 권력의 독특한 마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잘 아는 대단히 능란한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책 서문 중.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장 즉각적인 도덕판단을 불러일으키면서 가장 이해 불가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 중 하나는 아마 북한이 아닐까. 북한이 한때 자주의 상징이었던 시기를 지나 2013년 현재. 정말 소수의 몇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북한이라는 존재는 혐오이자 비웃음의 대상이다. 사실 보편적으로 생각해봐도 3대째 국가를 세습하면서 국민을 떼죽음에 이르게 하는 체제를 곱게 봐주고 이해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세상에 무조건 비합리적인 일은 없다. 아무리 신비하거나 우습게 보인다 할 지라도 대상은 언젠가는 해명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영영 이해 불가능한 존재는 없다. 사회적.정치적 판단을 내릴때 도덕적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어떤 합리성에서 도출되느냐 마느냐는 큰 차이를 부를 것이다.

  사실 북한과 합리성은 거리가 먼 단어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국가 북한>은 국민국가의 시대에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인 북한에 대하여 최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도덕적 판단은 정말 이 책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극장국가 북한>은 국가의 권위를 만들어 내는 것은 폭력의 독점 뿐 아니라 대중연설과 순방 같은 공연적 퍼포먼스와 스펙터클을 기반으로 한다는 기어츠의 극장국가론과, 카리스마 권력의 유지와 변화에 대한 베버의 분석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통해 현재의 북한이 김일성 사후의 시점에서 어떤식으로 각종 공연과 의례, 사상교육을 총동원하여 현재의 선군정치 시스템을 정착시켰는지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게 읽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저자들은 언뜻 보면 봉건적으로 보이는 충효일심의 북한의 사상과 체제야 말로 가장 근대적인 행위라고 설명한다. 봉건시대에 별개의 윤리였던 충과 효를 독재자와 국가의 목표를 위해 강제로 통합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통합이 근대에 나타난 전체주의 국가들의 주요한 특징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근대적인 정치행위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최대한 도덕적 판단을 자제하고 거부감이 들 정도로 분석에 집중한다. 북한의 김씨왕조 위주의 역사 왜곡과 선군정치 제도에 대해서도 그것의 허구성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철저히 북한 체제의 내부에서 그것이 어떤 계보와 목표를 가지고 어떤 효과를 북한 내부에 불러왔는지를 더 중요시하는 식이다. 읽다보면 '이거 너무 체제 옹호적인거 아냐?..'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들은 시종일관 북한의 개인숭배 자체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성이 독특한 것이며 북한은 결코 이해 불가의 대상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충분히 분석 가능한 체제임을 증명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인 탐구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책은 북한이 실패했다고 결론 내린다. 김일성 죽음 이후에 선군정치와 김씨일가 숭배 강화로 대표되는 일련의 조치들은 결국 '국민의 역사를 가장해 사회에 강요한 국가의 역사에 불과'하고 제 식구 하나 제대로 먹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오히려 북한에 대해 저자가 도덕적 판단을 최대한 지양하고 수없는 분석을 진행한 끝에 자연스레 도출한 결론이기에 더 설득력있으며 더 도덕적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민감한 존재를 다루고 있기에 그 어느 책보다도 합리와 분석의 힘을 다시금 실감하게 한다. 더불어 읽으면서 나 자신의 북한에 대한 도덕적 혐오가 어느정도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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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두 명의 아버지 나라  새창으로 보기
히드라   ㅣ 2013-12-17 ㅣ 공감(1) ㅣ 댓글 (0)
남한에 ‘고령화 가족’이 있다면 북한은 ‘혁명 가족’이 있다.* 국가 전통성을 식민지 역사와 탈식민 서사를 토대로 한 ‘유격대국가’이자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정치적 아버지를 둔 ‘가족국가’ 북한에서 그 곳 구성원들은 모두 혁명 가족의 일원이다.『극장국가 북한』은 혁명 가족 가장인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에게로 권력 세습이 왜 가능했는지, 개인적 카리스마에서 세습적 카리스마로의 이행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탁월한 연구 성과다. 다시 말해 유격대국가와 가족국가라는 ‘내용’이 김일성 사후에 극장국가(클리퍼드 기어츠)라는 상징 의례를 통해 어떠한 ‘형태’를 부여받아 카리스마 권력의 자연 도태에 저항할 수 있었는가를 탐구하였다. 그러한 결과에 따른 권력 세습은 북한 사회가 김일성이라는 한 명의 아버지에서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두 명의 아버지’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북한 정치질서는 인류학자 이문웅이 정의했듯이 가족국가다. 수령은 전통 사회에서 가장이 했던 역할을 국가 차원에서 수행한다. “실제로 오늘날 북한의 매체는 ‘어버이 장군님을 높이 모신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한식솔이고 내 나라는 어디 가나 친혈육, 화목한 대가정입니다’라고 주장한다.”** 항일 빨치산 활동에 대한 작품을 보더라도 “김정숙과 김일성의 실재하는 가족 관계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극84) 그 대신 “김일성과 친족관계를 맺은 인물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고 갈 길을 잃은 고아 청소년들이며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인민들이 혁명지도자와 친족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려진다.”(극45) 이것은 사적 가족의 아버지를 정치적으로 확장시킨 것이면서 또 한편 원래 아버지의 기원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그러한 북한의 가족 정치체제는 ‘충효일심’을 시민윤리로 강조한다. 이 덕목은 충과 효를 엄격히 구분했던 전통적인 한국 유교 정치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최고 권력에 대한 인민들의 충성에 관한 북한체제의 요구가 효라는 도덕을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정치적인 것과 가족 혹은 사적인 것 간의 기존 경계를 흐리고 해체”(극89)한 것. 그렇기에 지도자와 인민들의 관계는 도덕 경제 혹은 전면적 호혜성에 기반하고 있다. 소위 ‘호래자식’이 안 되려면 김일성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그 정치적 가정의 가장에게 깊은 효성과 충성심으로 보답하고, 가장이 죽으면 한 가정의 조상을 추모하는 것처럼 그의 유훈을 잘 따라야 한다.”(극227~228)

가족국가 북한의 정서적 유대 구조에서 “가장 가치있고 특별한 인간관계는 개인(각자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는)과 최고지도자와의 관계다.”(극128) 프로이트도 말했듯이 집단의 리비도적 결합은 지도자와 구성원 개개인의 관계를 ‘매개로해서’ 파생한 유대감의 결합이다. “집단은 자아 이상을 [지도자라는] 하나의 공통된 대상으로 대치하고, ‘그 결과’ 자아 속에서 자신들을 서로 동일시하게 된 개인들의 집합이다.”**** 프로이트는 이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똑같이 베푸는’ 우두머리에 대한 환상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아버지를 대신한다...그리스도 앞에서는 만인은 평등하고 만인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즉 그리스도가 베푸는 사랑을 통해 형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집102)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했듯이 부모의 자식 사랑은 늘 평등한 것으로 표상되며 정치적 아버지 김일성의 사랑 또한 전체 인민들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으로 여겨진다.

김일성 사후 하나의 정치적 아버지는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두 명의 정치적 아버지로 탄생한다. 우선은 북한 문학, 영화, 집단 체조 등을 통해 김정숙이라는 모성 상징과 총대라는 물적 상징을 발명하고 이로써 국가 건국의 기원에 김정일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기제는 김일성의 자리를 김정일이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정치적 아버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1994년 7월 사망할 때까지 맡았던 국가주석 자리를 그만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영구주석 지위로 개정했다는 결정문을 고지했다.....북한은 김일성의 역사적 카리스마 권력을 헌법상의 초월적이며 개념상의 초역사적인 권력으로 변모시키는 제도적 혁신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 일을 달성한 뒤에야 비로소 김정일은 사망한 지도자를 대신하여 노동당의 최고위직에 선출되었다. 그 결과는 직무의 계승이 아니었다. 새 국가수반이 된 전 국가수반을 대체했다기보다, 헌법 개정으로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새 지도자와 전 지도자가 각각 물리적 국가수반과 형이상학적 국가수반으로서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극장102~104)

한 마디로 말해,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의 공식적인 언어로는 지도자의 육체적 삶의 끝일 뿐 정치적 삶은 계속되는 것으로 표현된다.”(극104) 이러한 논리는 ‘국왕의 두 신체’라는 절대 왕정 시대의 정치 이론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 요점만 말하면, “국왕은 자신 안에 두 개의 신체를, 즉 자연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를 갖는다. 그의 자연적 신체는 소멸할 운명을 지닌 신체이며...그러나 그의 정치적 신체는 보이지도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는 신체로서 정치적 사회와 정부로 구성되어 공공선을 관리하고 인민을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이러한 자연적 신체의 죽음은 ‘Demise’(계승)이라고 불렸고, 그런 측면에서 북한의 유훈 통치는 김일성이라는 ‘정치적 신체’가 김정일이라는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북한은 김일성의 정치적 신체를 물질화시켜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가령 김일성의 (사망일이 아니라) 생일을 태양절이자 최고의 국경일로 지정하거나 그의 시신을 방부처리해서 영구 보전하고 수많은 영생탑을 온 나라에 세웠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김일성이라는 정치적 신체 혹은 형이상학적 국가수반으로의 변모는 상징적 아버지에서 상상적 아버지로의 이행이라 말할 수 있다. 라캉에게서 상상적 아버지는 이상형--상(像), 이미지(Image)--으로서의 아버지다. 필리프 쥘리앵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가 지나고 초자아가 내면화되는 나이, 즉 다섯 살에서 여섯 살쯤 될 때 어린아이는 실재의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로 덮어씌운다. 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다. 그는 (법률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자적 지배자이며 종교에서의 신의 형상의 원형이 되는 전능한 보호자이다. 이것은 프로이트『토템과 터부』에 나오는 원초적 아버지다. 아이의 욕망을 법에 종속시키면서 그 자신도 법에 복종해야 하는 상징적 아버지와 이 인물이 구별되는 점은 그 자신은 법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두 아버지들 모두 정신의 영역에서 초자아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북한은 ‘김일성-형이상학적 국가수반/정치적 신체/상상적 아버지’와 ‘김정일-물리적 국가수반/자연적 신체/상징적 아버지’라는 두 아버지를 가진 혁명 가족 국가인 것이다. 결국 북한 김정은 체제의 운명도 ‘세 명의 아버지의 자리’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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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명관 소설『고령화 가족』에서 사회로부터 쫓겨난 다 늙은 자식들이 더 늙은 엄마 집으로 내몰린다. 직장도 국가도 또 하나의 가족이기를 포기한 남한에서 그들은 혈육으로 얽혀 붙은 자연적 가족에게로 퇴행/퇴출당한 것. 결국 남과 북은 둘 다 가족주의 국가인 셈인데, 최인훈의 이분법을 빌리면 남쪽은 '밀실 가족(주의)', 북쪽은 '광장 가족(주의)'다.

** 『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창비, 2013년, 35p. 이하 인용은 극-쪽수로 표기.

*** “쥘리앵에 따르면, 먼저 아버지는 ‘아이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원래 아버지로 불린 것은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지배자, 즉 국가를 이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일차적인 의미는 ‘정치적?종교적 아버지’였으며, 가족적 의미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종교적 지배자라는 것이 아버지가 갖는 권위의 기원이겠다.”(로쟈, ‘아버지의 역사’, 기획회의-2010. 06. 05)

**** “지크문트 프로이트,『문명 속의 불만』, 김석희 (옮긴이) | 열린책들 | 2004” 에 수록된「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 129p. 이하 인용은 집-쪽수로 표기.

***** 『절대왕정의 탄생』, 임승휘, 살림, 2007년, 30p,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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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을 이해하는 것이 여전히 요원함을 몸소 보여주는 책  새창으로 보기
청루   ㅣ 2013-05-29 ㅣ 공감(4) ㅣ 댓글 (0)
북한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서로 주목을 받고 있는 권헌익?정병호의 『극장국가 북한』을 직조하고 있는 주된 이론가는 막스 베버이다. 폭력의 독점 및 관료제화를 통한 합리적 권력으로 카리스마적 권력이 이행한다는 것은 이 책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합리적 권력에 대한 분석만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상징의 정치적 효과를 포착하기 위한 기어츠의 ‘극장국가’ 개념 역시 사실은 ‘의미’에 대한 베버의 강조에서 유래한 것이다. 베버 이론과의 깊은 공명 속에서 저자들은 소위 “세계에서 가장 격리되고 불가사의한 곳 중 하나”인 북한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나는, 카리스마 권력의 세습을 위해 동원된 예술정치와 극장국가의 기획에 대한 훌륭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북한에 대한 ‘이해’를 산출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카리스마 권력의 일상화 테제를 강조하며 베버로 복귀하는 결론 부분에서 굳어졌다. 저자들은 북한 지도자가 세습적 카리스마를 추구함으로써 군 주도의 정치안보에 집중하며 경제를 경시하게 되었고, 애초의 사회주의적 이상으로부터도 괴리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진단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새 지도부는 현대적인 정치적 권력과 권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예술정치의 힘에는 실제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역사적 교훈과 진실에 대면해야만 한다. 카리스마 권력의 시간적 한계에 대해 그렇게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오만하게 저항하는 것이 인민의 생명뿐 아니라 바로 그 정치적 예술이 영속시키고자 했던 권위 그 자체의 위엄과 전통에도 궁극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 이러한 깨달음은 그 나라의 극장국가로서의 정치적 생명을 끝내는 행동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권헌익?정병호, 2013: 279-280)

나는 이 명료한 주장과 메시지가 북한에 대한 이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명과 이해가 필요한 지점에서 이해의 필요성을 해소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궁금한 점은 왜 그러한 정치체제를 국내외의 압력을 무릅쓰고서라도 계속해서 유지하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북한이 그러한 정치체제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명과 이해의 시도를 가로막았다.

물론 애초에 이 책의 저자들을 이끌었던 물음은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정치체제가 지속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애초의 물음이었다. 그러한 정치체제를 지속하는 이유, 즉 행위에 대한 이해를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런 까닭에 전반적인 설명의 방식은 기능적이고 사후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북한이라는 대상이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제약이 크기는 하지만, 북한의 세습적 카리스마를 가능케 한 극장국가적 요소에 대한 이 책의 설명이 실제로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 극장국가적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지 조회해볼 수 있는 민족지적 자료가 없다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여러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 분석임을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 상징정치와 예술정치에 대한 해석이 고도의 내적 일관성과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혹시 허공에 떠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불식시키기 어려웠다. 실제로 그것이 인민들의 생활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인민들에게는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반응을 산출하고 어떤 효과를 내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큰 한계였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이라는 연구 대상의 특수성이 갖는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제약 때문에라도 좀 더 조심스럽게 제시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의문은 초반에 이 연구가 다소 자명하게 상정하고 있는 지점으로 이어진다. 상징과 기억의 정치에 대한 이 책의 해석에 수긍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카리스마적 권력에 세습에 기여한 정도를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로서의 북한이 대를 이어서 권력의 세습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상징과 기억의 정치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물적 기반과 토대, 재생산 능력을 갖춘 체계의 존재, 제도적 권력에도 공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이라는 정치체제가 오롯이 상징과 기억의 정치에 의해 유지되어온 것이 아니라면, 상징권력과 제도권력 양자의 (시기에 따른) 비중을 고려하면서 분석하는 편이 좀 더 세련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체제 유지에 기여한 물적?제도적 조건을 간과하고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만 주목하게 되면, 북한의 체제 위기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 봉사한) 상징정치에게로 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이 가진 비판 전략을 심하게 훼손시키는 지점이다. 북한이라는 정치체의 존속을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라 규정하고 출발하게 되면, 베버의 권력론을 채택하게 된 이상 결론은 필연적으로 카리스마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무용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위기’ 이전의 북한 정치체제가 보인 나름의 성과는 극장국가적 성격이나 예술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조건과 국내적 권력의 합리화에도 일정부분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 이전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과 예술정치의 성공적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이후 북한의 위기 원인은 극장국가적 성격이나 예술정치의 성격에 집중적으로 귀속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는 북한을 위기로 몰아넣은 데에 일조한 국제정치적 환경이나 인접 국가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거세하였고, 이 작업이 역사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상당부분 휘발시켰다.

북한을 바라보는 이 책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의 그것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거니와, 이는 북한이라는 대상이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일정하게 기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해 이방인 아닌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베버가 말한대로 “시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저일 필요는 없”으며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다(Weber, 1913: 18). 이 연구에서 이방인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북한 외부의 상황은 주어진 것으로 놓고 이에 대한 비판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북한의 선택에만 문제를 제기하는 편파적 태도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를 '해보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나를 이해시켜보라'는 '요구'에 가깝다. 극장국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북한의 지도부는 과연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 지속가능성이 의문시됨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부가 극장국가와 상징정치, 예술정치, 대중동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북한의 정치지도자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하였을까? 설명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고, 이해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인류학의 목적은 곧 인간들 간의 의사소통의 세계를 넓히는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불가해한 듯이 뵈는 사회적 현상들을 밝히는 해석”이다(Geertz, 1973: 25; 13). 하지만 인류학 연구를 표방하는 이 책은 북한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짓을 그만두라고까지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왜 극장국가의 성격을 고수하는 전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고 이해하려 시도하기보다는, 그들이 고집해 온 이상한 선택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이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북한을 이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해의 필요성마저 부정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결론에서 제시되는 강렬한 주장과 권고는, 저자들이 채택했던 막스 베버의 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위반이기도 하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쓴다.

“경험적-역사적 인과연쇄에 대한 마지막까지의 철저한 추적이, 역사학자가 ‘가치판단’을 시작하는 순간 중단되고 이 중단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저서들의 학문적인 성과에 손상을 입히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역사학자는, 가령 역사적 행위자들이 가졌던, 그러나 역사학자 자신에게는 이질적인 이상들의 결과로 나타난 어떤 현상을 이 행위자들의 ‘실수’ 또는 ‘타락’의 결과라고 잘못 ‘설명’하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과업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즉, ‘이해’라는 과업 말이다.”(Weber, 1917: 174-175)

저자들이 북한은 “극장국가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해라는 과업은 중단되며, 이해의 목적인 비판도 불가능해진다(권헌익?정병호, 2013: 276).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의 조우에서 이해와 비판을 시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이해와 자기비판임을 우리는 베버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극장국가 북한』 역시 비판적 실천으로서의 함의를 살리고자 했다면, 궁극적으로 저자들이 서 있는 지점에 대한 이해와 그 지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폐쇄된 공간인 북한 외부에 있는 사람들로서, 어쩌면 지배적인 국제질서 속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시도했다면 어떨까? 북한을 보는 북한 외부의 시선은 어떠한가? 북한에 대한 북한 외부의 행위들은 어떠한가? 이들이야말로 북한의 사회적 행위가 지향되는 행동들 아닌가?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이해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시각 그 자체야말로 인류학적 연구와 이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은 가볼 수 없는 곳, 살아볼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인류학의 난점과 가능성을 우리로 하여금 깊이 고민하도록 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한 연구에 대한 탁월한 저작으로서 이 책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저자 중 한 명인 권헌익 선생이 가진 세계적 명성이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이라면, 우리는 한국 학계의 식민성이라는 식상한 문제를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할지도 모른다. 북한학계와 사회과학계로부터의 진지한 비평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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