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2

호주 거주 대북사업가 박용하 회장이 본 북한

호주 거주 대북사업가 박용하 회장이 본 북한

"내가 MB 측 편지 북한에 전달했다
전직들 약속 파기한 대통령이 위기 자초"
[해외리포트] 호주 거주 대북사업가 박용하 회장이 본 북한
윤여문 (sydyoo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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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아닌 이상, 대통령직은 전직과 단절이 아닌 포괄적 승계를 전제로 인계·인수되는 자리다. 특히 전직 대통령들이 대외적으로 약속한 사항들은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의 남북 위기는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당국과 전직 대통령들을 무시해서 생긴 결과다. 지금부터라도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인정하고 이행해야 한다."

"북한은 MB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들은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한 무대응 정책에 크게 실망한 모습이 역력했다."

북한의 대남 선전 담당자가 내놓은 브리핑 자료를 요약한 게 아니다. 호주 시드니에 있는 국제운송업체 PNL의 박용하 회장(67)이 기자와 한 인터뷰 과정에서 쏟아낸 말들이다.

40년 국제운송업... 재호주 동포사업가의 '대북사업'




▲ 재오련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박용하 회장.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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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은 1969년 국제운송업을 시작해 40년 동안 외길을 걸어온 사업가다. 호주로 이민 온 1991년부터는 호주에서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PNL은 주로 컨테이너를 취급하는 회사여서, 시드니 최대의 해상화물 터미널인 보타니 지역에 본사가 있다.



황해도 은율 출신인 박 회장은 여덟 살에 부모를 따라 월남한 실향민이다. 그가 2002년 대 북한 사업에 뛰어든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호주에서는 이미 은퇴할 나이였지만 실향민의 정서 때문에 때늦은 출발을 한 셈이다.



같은 이유로 그는 사업과 관련 없는 또 하나의 직책을 갖고 있다. 2007년부터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련합'(이하 재오련) 4대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 '재오련'의 특징은 북한 관련 단체이면서도 4대에 걸친 회장단 전원이 크리스천이라는 점이다. 목사도 여러 명 있다. 박 회장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재오련'은 1997년 9월 13일 북한 출신 호주동포들을 중심으로 출범한 교민단체로 가족 상봉, 관광, 대북 사업 등을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호주동포들이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호상 간에 안면이나 트자"... '재오련' 등장으로 남북 화해무드







▲ 8.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공동입장.
ⓒ 시드니올림픽 공식웹사이트
시드니올림픽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재오련은 호주 동포사회로부터 오랫동안 조총련과 비슷한 친북단체로 따가운 시선을 받아왔다. 그러나 남북한 선수단이 최초로 공동 입장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계기로 동포사회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평양예술단의 호주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주선해 동포사회와 더욱 가까워졌다. 사상 최초로 열린 북한 예술단체의 호주 공연은 당초 "호상 간에 안면이나 트자"는 북한 측의 요구로 마련됐는데, 매회 매진에다 5회 공연이 7회로 늘어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박용하 회장은 당시 호주공연 준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기자는 그때 박 회장을 처음 만났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명을 받아, "성황 이룬 평양예술단 호주 첫 공연"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신동아> 2004년 7월호에 썼다.



2005년 광복60주년 시드니 행사장에는 사상 최초로 남북한 외교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어서 2007년 시드니에서 열린 '해외한민족공동체대회'에도 남북한 대사가 동시에 참석하여 남북한 외교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재오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 박용하 회장은 2004년 평양예술단 호주공연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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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냉각... MB정부 출범 이후 과거로



호주동포사회의 남북화해 무드는 2007년 12월 28일에 열린 '재오련 송년모임'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동안 '재오련'과 거의 교류가 없었던 시드니한인회를 비롯하여 많은 한인단체 간부들이 '재오련' 주최 행사에 대거 참석한 것.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MB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재오련'은 창립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한인단체들과 교류가 끊어진 것은 물론이고, '재오련' 회원들조차 한국정부와 공관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나둘씩 떠나갔다.



이런 현상을 두고 박용하 회장은 "대통령이 바뀐 것일 뿐인데 왜 이럴까 의아했다"면서 "MB정부가 시작되면서, 지난 10년 동안 사라졌던 '빨갱이' 소리가 다시 등장했고 공관의 감시 또한 10년 전 못지않게 부활했다"고 털어놓았다.



공관의 감시는 '재오련'뿐만 아니라 박용하 회장의 회사업무 및 개인 활동에까지 확대됐다. 결국 박 회장은 "나는 한인동포이면서 호주 시민권자다. 슬픈 일이지만, 시민권자로서 할 일을 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됐다. 호주시민권자로서 보호를 받겠다는 뜻이다.



"2008년에 남북한을 9차례 방문했다"







▲ 2007년 해외한민족공동체대회에 참석한 조창범 대사(왼쪽)와 방성해 북한대사.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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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02년 대북사업을 시작한 박용하 회장은 사업상 만나는 많은 북한 관리들과 호형호제 하면서 지낸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그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남북한 문제를 놓고 격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항상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한다"면서 "그러다 보니 평양에 가면 남쪽을 적극 옹호하게 되고, 서울에 가면 북쪽 현실을 들려주게 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8년에만 남북한을 9차례 방문했다. 내일 아침에 북한으로 출발하는데 올해만 세 번째 방문이다. 그렇게 드나들면서 내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북한 관리들은 남한을 속속들이 아는데 남한 공무원들은 북한의 현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문득 박 회장이 거침없는 발언 때문에 사업상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차례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나는 남북한을 똑같이 나의 모국으로 섬긴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나는 철저하게 비정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다만 재외동포로서 남북한 양측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특히 북한에서 목격하고 들은 얘기를 액면 그대로 전달해주면 남한 정부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현지시간으로 5월 26일 시드니한인회관 분향소에서 한 인터뷰를 시작으로 5월 31일, 그리고 6월 1일에 박용하 회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마지막 인터뷰 다음날인 6월 2일 오전에 북한으로 출장을 떠났다.







▲ 고 노무현 대통령 시드니 분향소에서 조문하는 박용하 회장.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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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남북화해에 큰 업적을 남겼다"



5월 26일, 고 노무현 대통령 시드니 분향소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의 발언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조문을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충격과 슬픔이 크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서민적인 풍모를 좋아해서 일부러 분향소를 찾아왔다. 개인뿐만 아니라 '재오련' 회장으로서도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화해에 어떤 업적을 세웠다고 생각하나?

"그건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과 MB정부 출범 이후를 비교해보면 답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일부 언론에서 '대북 퍼주기 정책'이라고 비난했지만 노 대통령의 결단으로 '평화공존'이라는 대가를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반 없이 남한의 지속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하겠나."



- 특히 '재오련'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위해서 애쓰는 것 같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MB정부 출범 이후, 얼마나 많은 이산가족 노인들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른다. 그건 정책 이전에 인도주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제3국에서라도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도록 일을 벌여볼 생각이다. 그분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내가 MB 측의 편지를 북한에 전달했다"





▲ '재오련' 시드니 사무실에서 북한의 실상을 설명하는 박용하 회장.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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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2차 핵실험 뒤인 5월 31일, 그리고 6월 1일 그를 다시 만났다.



- 북한이 결국 핵실험을 했다. 그것도 노무현 대통령 상중에.

"나도 그 부분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일정 변경이 불가능했던 것 같고, 동시에 이명박 대통령을 추궁하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북한 측에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대화하고 화해정책을 펼쳐온 것이지, 임기가 끝나면 모든 합의사항이 파기되는 허깨비를 상대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언뜻 이해가 잘 안 된다.

"북한은 MB정부 출범 이후에 47일 동안 예의주시하면서 기다렸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북한 관리들한테서 '이명박이 이회창보다 훨씬 났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 북한에서 그렇게 판단할 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후보시절에 MB 측에서 북한과 접촉을 시도했다. MB 측근인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의 지인이 호주에 살고 있는데, 그와 나를 통해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일이 잘 진전되지 않자, MB 측에서 편지를 북한에 전달해 달라고 해서 내가 전달했다. 물론 봉함된 상태였다. 짐작컨대 김정일 위원장 앞으로 보내는 편지 같았다."



- MB 당선 후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나?

"MB 측에서 한국의 경제상황 등을 브리핑하고 싶다는 의사를 호주 주재 북한대사관 박명국 공사에게 전달했다. 성사여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안 된 것으로 짐작한다. 아무튼 MB 측에서 그런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북한에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북한은 MB가 '강부자들'에게 포위됐다고 생각한다"







▲ 재오련 2007년 송년회에 참석한 박용하 회장, 방성해 북한대사, 승원홍 시드니한인회장.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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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은 결국 북한에 무대응 정책으로 일관하지 않았나.

"그래서 북한이 크게 화가 난 것으로 생각된다. 가타부타 얘기가 있어야 남북대화든 남북대결이든 할 터인데, 아무런 대응이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다."



- 그렇다면 북한이 MB정부와 대화를 원했다는 뜻인가?

"당연하다. 북한은 남한과 대화를 지속적으로 희망했다. MB정부라고 해서 달라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의견이 대세인데.

"그건 전적으로 일부 언론의 추측보도일 뿐이다. 내가 만난 북한 관리들은 하나같이 '남한과 대화하는 게 우선이지, 미국 먼저 통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반문한다."



- 혹시 북한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무대응 정책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들은 적이 있나?

"북한에서는 그 이유를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 남한의 부자들, 특히 '강부자들'에게 포위되어서 대북 강경책을 선택한 것으로 짐작한다. 또한 그 상황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대화정책을 잠정적으로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 솔직히 워낙 뜻밖이어서 어리둥절하다. 사실관계 확인도 불가능하고.



"나는 북한에서 들은 얘기를 액면 그대로 전할 뿐이다. 그들이 사실이 아닌 얘기를 했다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듣는 사람의 판단에 맡긴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남북한을 동시에 드나들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감안하기 바란다. 없었던 말을 전하면서 부담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사실 여부는 모른다, 북한에서 들은 얘기들 그대로다"



- 북한에 가면 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가?

"사업 때문에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남한 공무원들이 북한을 잘 모른다고 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북한 주민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만난 북한의 시골 사람들조차 남한 사정을 아주 잘 알고, 국제정세도 웬만큼은 알더라. 나는 주로 고려호텔에 머무는데, 남한 방송 말고는 다 나온다. 나는 주로 CNN을 통해서 국제뉴스를 접한다."







▲ '재오스트랄리아 동포전국련합회' 사무실 현판.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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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경제사정이 아주 나빠서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많은데.

"내가 직접 가서 목격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평양은 하나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활기에 넘치는 모습이다. 북한이 수십 년 동안의 경제봉쇄를 견뎌낸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평양과 북한 고위층만 그런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나는 북한 시골의 주민들을 아무런 제약 없이 만나는데 그들의 정신력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 오랫동안 단련되어서 그럴 것이다. 그들한테서 '끄떡없습네다' 소리를 자주 듣는다."



- 탈북자가 대거 발생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그들을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함께 고생할 각오가 없는 낙오자들로 취급한다. 1994년에 발생한 최악의 식량난도 견뎌낸 사람들이다."



- 한국의 언론보도와 너무나도 다른 답변들이다.

"남한의 기자들이 제대로 취재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본다. 거기에다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북한의 현실을 왜곡보도 한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양측에 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세 차례에 걸쳐 이어진 인터뷰에서 박용하 회장은 예상 밖의 발언들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본 인터뷰 기사는 그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쓴 것이라고 해도 잘못된 말이 아니다.



그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남북한 출장을 다녀온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현재진행의 사안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힌 상태라서 현지의 얘기를 들어봐야 사실관계 확인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는 말도 했다.



박용하 회장을 세 차례 인터뷰하면서, 비록 해외일망정 북한 출신 실향민으로 산다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이는 그의 마지막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그나마 복이 많은 실향민이다. 고향에 가서 친척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로 만족할 수 없다. 더 많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서 나머지 인생을 바치고 싶다."



2009.06.0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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