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선각자 윤치호(尹致昊)의 영문일기, “썩어빠진 조선사회에 넌더리가 난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애국가 작사자로 알려진 윤치호(尹致昊)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맞춰 학계에서도 윤치호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윤치호가 일기로 기록한 1883~1943년의 시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시기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명예교수는, 윤치호 일기가 60년간 쓰였다는 점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것일 뿐만 아니라 각 시기마다 국가적, 사회적 현안에 대한 소견이 실려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했습니다. 《월간조선》은 윤치호 영문 일기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 그의 친일 시비와는 별개라는 인식하에 그의 일기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려 합니다. 영문일기의 번역과 해설은 윤치호 선생의 직계 후손인 윤경남(尹慶男)씨가 2013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1895~1906년분을 번역 중입니다. 《월간조선》은 10월호에 1895년 1~2월분을 시작으로 윤치호의 영문일기 연재를 합니다.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각자인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1865~1945)의 영문 일기가 《월간조선》을 통해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1883~1943년의 60년 동안의 이 일기를 윤치호 선생이 처음부터 영어로 쓴 것은 아닙니다. 윤 선생은 1883년 1월부터 1887년까지는 한문, 1887년 11월부터 1889년 12월까지는 한글, 1889년 12월부터 1943년까지는 영어로 작성했습니다.
윤치호 선생은 개화기 중국과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습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영어로 일기를 쓴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글 표현에 한계가 와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지적입니다. 윤치호 선생은 문장가였을 뿐 아니라 1930년 한글학회에 참여해 한글의 아래아(ㆍ)를 없애는 운동도 벌인 한글학자였습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영문학도였기에 쉽게 영어일기를 쓴 것일 수도 있으나, 더 큰 이유는 일제하 비밀유지를 위해 영어로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의 영문일기는 문장, 문법, 어휘 면에서 미국의 중상위층이 구사하는 영어 수준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에게 고된 작업임엔 틀림없으나, 일단 작업에 빠져들면 성경구절을 적절하게 인용한 비유를 구사하는 등 그 문장의 문학성에 매료될 정도입니다.
윤치호가 쓴 1895~1906년의 일기에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독립협회 비사로부터 1905년 을사보호늑약의 현장 이야기까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등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과 고난이 많았던 시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는 윤치호가 상하이 중서학원(中西學院)과 미국 남부 명문 사립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 및 에모리(Emory)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선교의 사명과 꿈을 가지고 귀국한 1895년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꿈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선교사와 토착교회의 역할(The place of the native church by Yun, Chi-Ho)’에 대하여 연설을 하였고, 그로부터 100년 후인 2010년 에든버러-보스턴-케이프타운-도쿄 등의 2010 선교대회에서 선교의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윤치호는 비참한 조선을 문명국으로 개화하려는 사명과 신념에 불타 성직자로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교육자로서 민중을 깨우치고, 정치가로서 부정부패를 척결하여 참신한 개화정책을 실천하려는 신념을 가지고 1895년에 상하이에서 귀국합니다.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각자인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1865~1945)의 영문 일기가 《월간조선》을 통해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1883~1943년의 60년 동안의 이 일기를 윤치호 선생이 처음부터 영어로 쓴 것은 아닙니다. 윤 선생은 1883년 1월부터 1887년까지는 한문, 1887년 11월부터 1889년 12월까지는 한글, 1889년 12월부터 1943년까지는 영어로 작성했습니다.
윤치호 선생은 개화기 중국과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습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영어로 일기를 쓴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글 표현에 한계가 와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지적입니다. 윤치호 선생은 문장가였을 뿐 아니라 1930년 한글학회에 참여해 한글의 아래아(ㆍ)를 없애는 운동도 벌인 한글학자였습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영문학도였기에 쉽게 영어일기를 쓴 것일 수도 있으나, 더 큰 이유는 일제하 비밀유지를 위해 영어로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의 영문일기는 문장, 문법, 어휘 면에서 미국의 중상위층이 구사하는 영어 수준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에게 고된 작업임엔 틀림없으나, 일단 작업에 빠져들면 성경구절을 적절하게 인용한 비유를 구사하는 등 그 문장의 문학성에 매료될 정도입니다.
윤치호가 쓴 1895~1906년의 일기에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독립협회 비사로부터 1905년 을사보호늑약의 현장 이야기까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등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과 고난이 많았던 시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는 윤치호가 상하이 중서학원(中西學院)과 미국 남부 명문 사립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 및 에모리(Emory)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선교의 사명과 꿈을 가지고 귀국한 1895년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꿈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선교사와 토착교회의 역할(The place of the native church by Yun, Chi-Ho)’에 대하여 연설을 하였고, 그로부터 100년 후인 2010년 에든버러-보스턴-케이프타운-도쿄 등의 2010 선교대회에서 선교의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윤치호는 비참한 조선을 문명국으로 개화하려는 사명과 신념에 불타 성직자로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교육자로서 민중을 깨우치고, 정치가로서 부정부패를 척결하여 참신한 개화정책을 실천하려는 신념을 가지고 1895년에 상하이에서 귀국합니다.
1895년 윤웅렬-윤치호 父子와 이범진은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 연금상태에 있던 고종을 구출하려는 춘생문의거를 시도했으나, 이진호 등의 밀고로 실패했다. 춘생문. |
이듬해인 1896년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하여 신변보호는 받았으나, 나라의 운명을 러시아에 의탁하는 처지에 이릅니다. 즉 조선은 청국의 간섭에서 친일세력의 손아귀에 넘어갔다가, 다시 러시아 영향권으로 들어갑니다. 을미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춘생문의거→단발령→아관파천→을사늑약 등 구한말의 처참한 역사로 이어집니다.
춘생문의거를 기록한 《乙未創義錄》. |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절단 활동 중 민영환과 윤치호 사이에 왜 갈등이 생겼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야겠습니다. 민영환은 청렴 강직한 성품이지만 융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외국어를 못하는 자괴감과, 자신의 임무 때문에 늘 강박관념에 짓눌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지냅니다. 대관식이 끝나고 윤치호는 망국지한(亡國之恨)과 객지의 고독을 느끼며 사절단원과 결별하고 프랑스로 떠납니다.
그러나 윤치호와 호흡을 맞추지 못했던 민영환은 파리로 떠나는 윤치호를 따뜻하게 전별하고, 귀국 후에는 둘도 없는 동지가 됩니다.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에서 생긴 일들은 나라를 가슴속 깊이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으나 정치관과 인생관이 서로 달라 다른 길을 걸어간 근대사 두 인물의 비화를 보여줍니다.
1897년 다시 귀국한 윤치호를 친러 진영은 경계합니다. 결국 모든 진영에서 따돌림을 당한 윤치호는 서재필(徐載弼)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주도합니다. 그러나 친구인 서재필 박사가 윤치호를 경쟁자로 여기고 질시합니다. 결국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팔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윤치호와 이상재(李商在) 등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맡게 됩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도하면서 고종 황제를 비롯, 조정 대신들의 오해와 탄압을 받아 5년 동안 유배생활 같은 원산의 지방관리로 쫓겨납니다. 1904년에 다시 외부협판에 기용되어 1차 한일의정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현장에서 일본의 정치고문관인 스티븐슨의 외부대신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교회와 교육사업과 YMCA 운동에 투신합니다. 첨언하면, 1907년 윤치호 선생 자신이 서술한 ‘애국가’와 번역이 든 《찬미가》를 윤치호 역술(譯述)이라고 했기에, 이번에 번역하는 글도 필자의 번역과 서술과 해제(解題)이므로 ‘윤경남 역술’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1부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1895년 1월에 일어난 일들 (주요사건과 인물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역술자가 정리한 것임) ● 중서서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10년 만에 귀국을 준비하다. ● 아내가 소주(蘇州)의 친정에서 첫딸(Laura·尹鳳姬)을 낳았다. ●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가 조선의 개혁방안으로 20개 조항을 제시했다. 1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영 알렌(Young John Allen) 박사: 59세. 상하이 중서서원 교장. 윤치호의 평생 은사. ● 본넬 교수: 중서서원 선생. 윤치호에게 세례를 준 분. ● 리처드슨(Miss Helen Richardson): 중서서원 선생. ● 로호르(Loehr): 중서서원 학장 대리. ● 아내(마시엔숭·馬秀珍): 윤치호가 끔찍히도 사랑했던 마시엔숭(1871~1905)은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를 낳았다. ● 에퐁(E-Fong·韓愛芳) 자매: 아내의 친구. |
1895년 1월 1일 화요일.
상하이 중서서원
윤치호가 끔찍히도 사랑했던 마시엔숭은 슬하에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를 낳고 34세로 요절했다. |
새해의 첫 번째 편지를 어여쁜 내 사랑, 시엔숭에게 써 보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오전에 두 시간 동안 내 책들을 트렁크에 집어넣는 일을 했다. 오늘 아침에, 중국 본토에서 온 조 선생이 내게 중국말로 “장수하시고 아들 낳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장생과자나 교자에 붙인 행운놀이의 글자들이 행운을 비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 소년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뿐 아니라 중국인들은 누군가 아들을 낳으면 붉은 계란을 친구들에게 돌리는 풍습이 있다.
중서서원의 옛날 동창 친구 정문광에게서 편지와 사진 한 장을 받다. 그는 이창(Ichang) 세관 사무실에서 일한다. 그 사람은 내가 10년 전에 상하이에 도착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기억해 둘 만한 인물이다. 헨리 정문광의 형은 그 당시 미국 영사관의 통역관이었다. 헨리는 나의 대학생활 중 3년 반 동안 우리 학교(밴더빌트대-옮긴이) 동급생이었다. 그의 동생인 정문고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동흥양행의 미야게 씨를 방문했으나 못 만나다. 일본 사람 여럿이서 한테이블에 둘러앉아 즐겁게 담소하고 있다. 오늘날 즐거워할 명분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뿐일 터이다.
1월 2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저녁엔 추운 날씨. 상하이 중서서원
오늘 아침에 알렌 박사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서서원 교무처에 사직원을 제출한 것은 잘못한 일일세. 이젠 학교가 자네를 위해 해 줄 일이 아무것도 없다네. 교무처가 자네를 학부에 채용하게 한 계획도 내가 만든 거란 말일세. 본넬 선생은 자네의 사직원서를 수리하지 못하도록 라켓을 던지며 소란을 피웠다네. 자네가 본넬 선생에게 직접 말하게나. 사직원서를 교무처에 제출한 것은 애초부터 절차가 잘못된 일이었다고.”
알렌 박사의 음성은 그의 기분이 아주 언짢은 듯이 들린다. 그의 감정이 그 일에 대해 극도로 격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사직원을 교무처에 냈거나 학장에게 직접 냈거나 내겐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본넬 교수가 어떻게 이런 학장 밑에서 견뎌 왔는가라는 것이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난킨가의 한 가게에서 옛날 우표를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가게 안에서 40센트짜리 조선 우표를 두 장 보았다. 오늘 오후에 에퐁의 여동생이 내게 말하기를, 상하이 기념우표 위에 쓴 중국풍의 우표는 에퐁이 쓴 것이라고 자랑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로호르 씨가 《예수님을 바라보며》라는 교과서를 가지고 진지한 설교를 강의하다. 7시15분에 쑤저우(蘇州)에 있는 캠벨 교수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1894년 12월 31일 밤 9시30분에 내 어여쁜 사랑하는 아내가 딸(윤봉희-옮긴이)을 낳았다는 것이다. 사랑스런 ‘산모’는 아주 산고(産苦)를 잘 견뎌내고 순산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내를 건강하게 지켜 주심을 감사하다. 리처드슨 선생을 방문해서 캠벨 교수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리처드슨은 그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윤애방 로라가 쑤저우에서 1894년 12월 31일 밤 9시30분에 태어나다.
1월 3일 목요일.
바람 불고 추운 날씨. 상하이
윤치호가 선교의 꿈을 키운 에모리대학. 경영학, 의학, 법학 분야의 명성이 높고, 남부의 하버드대로 불린다. |
1. 통치권은 중앙에서 일원화하여 행사할 것. 2. 모든 정치 결정은 국왕이 한다. 다만 국법을 준수할 것. 3. 왕족들의 이해관계를 국정과 구분할 것. 4. 왕족의 한계를 명확히 할 것. 5. 조정의 각부의 업무한계와 권한을 명확히 구분할 것. 6. 국가 재정관리를 일원화할 것, 소위 자원 상납제도를 폐지할 것. 7. 각 부처와 왕족들이 쓸 예산을 세울 것. 8. 군 조직을 재편성할 것. 9. 부정을 은폐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말 것. 10. 법부 조직을 재편할 것. 11. 경찰조직을 일원화할 것. 12. 관료들의 업무기강을 엄격히 할 것. 13. 지방관료들의 권한을 제한할 것. 14. 공직자의 근무체계를 일원화할 것. 15. 정치적 보복을 폐지할 것. 16. 불필요한 공공부서를 재편할 것. 17.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를 재편할 것. 18. 외국의 전문가(專門家) 고문관을 청빙할 것. 19. 유능한 학생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낼 것. 20. 국가 운영 정책을 세울 것.
노욕이 극심한 대원군이 평양에 있는 청나라 장군들과 불충하고 노예근성이 깔린 부당한 교섭을 계약한 꼴이 되었다. 영 알렌 박사 댁에서 저녁을 들다. 알렌 박사와 그의 부인, 로호르 부인과 메리 선생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다. 오늘은 알렌 박사의 생일이다.
양쪽 모두 괴팍하기만 한 두 어른 사이에 끼여 있음은 난처하고 고통스런 일이다. 내가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사이에 끼여 있을 때 대책 없었듯이 알렌 박사와 본넬 교수 사이에 끼여 있는 지금도 똑같은 문제가 생겼다. 나는 알렌과 본넬 두 사람에게 똑같이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 주님이 개입하셔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하게 현재의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는 지혜로운 힘을 내려주소서. 이런 분위기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사람에게 저쪽 사람 이야기를 절대로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1월 4일 금요일.
몹시 추운 날씨. 상하이
리처드 씨를 방문하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이 선량하고 섬세한 하느님의 사자가 말했다.
“어떤 위대한 영국 사람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는 자신에게 다섯 가지 규칙을 세워 놓고 지켰답니다. 그중의 하나는 실제적인 것이었어요. ‘사교(邪敎)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직설적으로 공박하지 마라.’ 내가 믿건대 우리 선교사들은 이 규칙을 조심하기만 한다면 보다 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권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대상을 적대시한다는 반감을 갖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이들은 적대하게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임금보다 더 강력한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당신의 지성이나 감성 속엔 위대한 권세가 역사해 왔고, 앞으로 보다 높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상하이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도 당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기도에 늘 동참할 것입니다.”
내가 리처드 씨에게서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북경가제트》는 세상에서 가장 낡은 소식지라는 것.
2. 그 간행물은 황제의 모든 칙령과 일정한 수준의 기록만 발행한다. 간행물 복사본들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관아(官衙)에 들어간다. 간행물은 목재 타이프기로 인쇄한다. 예수회가 언젠가 보급한 적이 있는 동판 종류다. 그러나 그 목판 글자판을 훔친 관리들의 욕심은 더 비싼 동판 타자기를 사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3. 상하이에 있는 3개의 중국 본토 신문 중에 《신보》와 《읍보》 두 신문은, 외국 자본과 외국인이 운영하는 신문이며, 《신완보》는 외국인이 경영하되 중국 자본으로 운영하는 신문이다. 그 신문들은 모두 돈벌이에만 몰두하고 있다. 사람을 계몽하는 일은 두 번째 목표일 뿐이다. 중국엔 현재 신문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북경 간행물이 있을 뿐이다. 정부가 압류할 것이 두려워서 본토 신문은 아예 한 장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1월 5일 토요일.
춥지만 맑은 날씨. 상하이
오후 4시부터 오후 8시까지 사랑하는 자매, 에퐁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오늘은 자매의 생일이다.
1월 6일 일요일.
억세게 추운 밤이지만 아름다운 날씨. 상하이
알렌 박사 댁에서 가벼운 점심을 들다. 오후 4시 성찬식에 참예하려고 트리니티 교회에 가다. 그 후 트리니티 기숙사의 숙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콜리에르 씨가 5시30분에 리처드슨 선생을 방문하여 서재에서 멋진 저녁시간을 보내다.
리처드슨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비기독교인들을 교육시키는 사역을 아주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는 동양인 가정에 교육받으러 가는 일엔 아주 거부감을 느낍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비싼 교육을 받고도 불량배가 되었거나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 예를 수없이 보았거든요. 심지어는 각자가 선교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기네 중국 사람보다 더 높은 봉급을 요구하는 중국인 보조 사역자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들이 중국 사람에게 더 열심인 마샬 씨를 본받았으면 좋으련만, 중국 보조 교역자들은 중국 사람들과 접촉하지도 않고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답니다. 순 씨를 보세요. 그가 좋은 영향을 끼치기만 바라요. 그 사람은 그가 받은 교육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모르고 있으니까요.”
비록 내가 ‘국내’에서 동양식 선교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리처드슨 선생은 아주 교양 있는 분이기 때문에 나를 파렴치하다거나 동맹 휴학이나 선동하는 자로 여기지는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중서서원 선교부에 어떠한 보수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보수를 받은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내가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대학이나 선교부에서 일했어도 봉급이고 뭐고 받은 것이 없었다.
외국 선교사와 중국 보조인 사이의 끊임없는 마찰을 생각한다면, 봉급에 대한 해결방법은 오직 중국 보조 목회자들이 자급자족하는 것뿐이다. 왜? 본토 교역자들이 품는 불만은 그의 빈약한 보수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는 생계비가 외국 선교사들의 생활방식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호르 씨가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 하인들에게 매달 35달러를 지불한다는 것이다. 매달 8달러씩 주고 4명의 중국인 보조 목회자를 채용할 수가 있는 돈이다. 자, 생각해 보라! 중국인 목회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의 생계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만일에 중국 목회자인 선교사가 친구와 즐겁게 지내야 하는데, 그들과 차 한 잔을 마실 돈도 없어야 하나? 그건 그렇다 치고, 선교사가 적어도 합리적으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목회자만이 생활비나 용돈을 자급자족해야 한단 말인가?
어떤 선교 사역도 시장에서 흥정하듯이 성스럽지 못하게 대가를 치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추구해야 할 임무란 무엇인가?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본토 교회들이 각기 그들의 중국인 목회자를 부양해야 하는 일이다. 성실한 목표를 가지고 선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누구나 외국 선교부로부터 16달러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급자족으로 교회에서 8달러를 받고 만족하는 것이 더 떳떳하지 않겠는가.
‘국내에서 교육을 받은’ 동양인 선교사에 대한 비난은 이런 일들 때문이다;
1. 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일본, 중국, 인도 기타 선교지에서도 볼 수 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고는 오히려 은인들에게 대드는 비열한 젊은이들에 대하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유형은 비교적 아주 적다. 한 명의 선한 니이시마(新島, 동지사 대학 설립자-옮긴이)는 열 명의 배신자들이 저지르는 못된 짓을 막아 낼 만한 영향력이 있다.
2.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동양인은 높은 봉급을 요구한다. 한 젊은이가 고등교육을 바라면서 선교단체에 자원하여 참여했거나 관심을 가졌다면, 아무리 적은 봉급일지라도 아예 보수에 대해서는 절대로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선교부가 외국에서 교육받은 교역자에게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적은 봉급을 지불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처사일까? 그것은 어쩌면 그가 교육받기 이전만 못한 건 사실이다. 그는 선교부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그 교육혜택도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선교부가 그들의 예산을 어디에 쓰는가를 가장 잘 판단할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사실인 것은 물론이고, 그것은 아주 평범한 상식문제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교육받은 한 젊은이가 그들 때문에 왔다고 해도,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칼은 현재 가지고 있는 성능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지 ‘비교육’ 상태인 보통 쇳조각이었을 때의 무게로 판단하는 건 아니다.
3. 국민성의 상실. 외국교육을 받고 와서 우쭐대는 동양인은 썩은 계란보다 더 나쁜 경우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이나 유럽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마치 미국이나 유럽의 모든 영예가 자기 것인 양 알기 때문이다. 그는 뽐내거나 분위기를 꾸며 내고 구미식 음성으로 나불댄다. 자기를 제외한 다른 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을 싫어하고, 그가 런던·보스턴·베를린 등에서 얻은 견문이나 승리감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그는 자기 나라 물건이 특별히 나쁘지도 않은데 외국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 경멸한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나마이키(生意氣, 건방짐)’ 혹은 ‘풋내기’라고 부른다. 남자건 여자건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경멸감이 앞선다. 하지만 때로는 국제화에 대한 비난은 외국에서 교육받은 동양인에게도 던져지는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본토박이에 대한 호감으로 어떤 물건이나 방법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본토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국제화한 것이다. 왜 당신은 가난한 봉급에 만족하지 않는가? 당신은 국제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렇게 국제화해서 어떤 집에서건 살고 싶지 않아진다면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이 모든 일들은 그 사람이 봉급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부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결심이 서 있지 않는 한, 선교부 혹은 동양인의 국내교육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1월 11일 금요일.
구름이 끼고 아주 추운 날씨. 상하이
북풍이 요 며칠을 두고 불어대 난롯불도 소용없게 만든다. 에퐁 자매의 집에서 몇 시간을 즐겁게 지내다. 아,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그 자매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양 터놓고 맡기는구나.
오후 5시에 옌 부인을 방문하다. 옌 부인 집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러 갔다. 시엔숭은 내가 없는 동안 부모와 함께 지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옌 부인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그녀는 자기 둘째 아들을 내게 인사시킨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못쓰게 된 중국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다.
나는 미국 남부에만 있었다고 말했더니, 그는 경멸하는 태도로 “당신은 뉴욕에 가 봤어야 하는데… 남부에는 뉴욕보다 더 큰 도시가 없지요” 하고 말하면서, 난로 앞에 있는 안락의자를 차지하고 앉는다. 발엔 맵시 있는 슬리퍼를 꿰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서. 그의 어머니는 내가 상하이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줄 알고 나를 잘 대접하려고 애쓰면서, ‘희망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에게 말한다. “넌 어째 벙어리처럼 거기 앉아 있는 게냐? 어미보다 네가 영어를 더 잘하잖니? 어서 손님을 즐겁게 해 드려야지.”
아들은 아무 말도 안 한다. 그 젊은이는 내가 영국이나 뉴욕에 가 본 일이 없다고 나를 깔보고 가련하게 여기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도리어 내게는 그가 우습게만 보인다. 그리고 아들이 런던이나 뉴욕에 정말 가 본 것으로 알고 있는 착한 어머니가 측은해 보인다.
리처드 씨와 저녁나절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 나라의 구호를 ‘전진과 박애정신’으로 하면 어떨까요? 난 중국인의 국민성은 별로예요. 기독교 문화에서 좋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 그네들이 선량해서가 아니라 중국이 외국 세력에 스스로 대항하기 위해서라고요.”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머뭇거리더니, 저녁식사로 중국음식을 함께 먹자고 한다. 음식은 쌀밥에 생선과 야채 한 공기를 중국식으로 요리했다. 그는 깡통에 데운 소흥주(紹興酒)를 마셨다. 나는 다루기 힘든 친구와 신경 쓰며 밥상에 마주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간단한 요리를 대접 받은 것이 더 즐거웠다.
1월 12일 토요일.
아주 추운 날씨, 이따금 희미하게 햇빛 나다. 상하이
미야케(三宅) 씨를 방문하다. 대화 중에 그가 내게 물었다. “청국이 조선을 중국의 일개 주(州)로 포함시켰다면 전쟁이 터졌으리라 생각합니까?”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다시 말해 청국이 그렇게 비켜간 것은 나라의 어둡고 쓸모없는 정책이나 방어할 힘조차 없는 조선의 여건 때문이 아니라, 일본과 다른 세력들과 전쟁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도 침략해서 착복하면 조선반도가 공식적으로 손아귀에 들어올 텐데, 청국이 무엇 때문에 아무한테나 감정을 건드리겠습니까?
구걸하는 조선 정부에 돈을 조금 꿔준 후에 관세나 통신기 등의 중요한 것을 담보로 잡고, 저주받고 운명이 다한 조선의 목을 서서히 그러나 지그시 곧장 조여 왔지요. 이런 식으로 조선은 몇 해를 두고 왕과 조정이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청국의 속국이 되고 있습니다. 청일전쟁이 청국의 계획을 깨 버린 거지요.”
“그러면 당신은 청국이 시도한 일들을 일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확신하는 겁니까? 당신은 조선 정부가 일본한테서 500만 엔을 차관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들으셨지요? 조선의 남쪽 3개 도의 쌀을 속국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나는 매우 확신하고 있어요. 일본이 조선의 개혁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한은 조선을 도우리라는 점을요. 일본의 개입이 조선에 고마운 일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전적으로 조선의 조정이 지혜로운 애국심을 발휘할 것인지 아니면 어리석게 이기주의를 택할 것인지에 달렸지요. 조선은 이제 상황을 개선할 좋은 기회를 맞았습니다. 만일 조정과 국민이 올바른 정신으로 성실하게 실천하지 못하면 이 절호의 기회를 모조리 망칠 가능성이 있지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라를 지킨들 무슨 소용입니까?”
F씨가 인도하는 가정기도회 모임에 참석하다. 그 후에 헬렌 선생과 오랫동안 환담을 나누다.
1월 13일 일요일.
상하이
어젯밤엔 무척 추웠다. 대야에 담긴 물이 1인치 이상 바닥까지 거의 얼어붙었다. 주일학교가 종강하게 되어 본넬 교수가 학교를 떠나는 강연을 하다. 그는 많이도 옮겨 다녔다. 그는 가 버렸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는 젊은 제자들에게 좋은 영향과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가 필요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에, 그에게 나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중요한 기념 표시라도 보여줄 힘이 있으면 좋겠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낮잠 자다. 곧바로 중국인 교회의 저녁예배 시간에 참석하다. 알렌 박사 댁에서 저녁을 들다. 친절하고 어머니 같은 모습을 한 알렌 박사 부인을 보고 나는 내 모든 고충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알렌 박사와 그의 가족들과 따뜻한 난롯가에 둘러앉자 나의 귀국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사실이 믿어지질 않는다. 그때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로호르 씨가 내게 영문법을 공부했는가 물었었지. 알렌 박사는 《뉴스》지에 실리지는 않았으나 내가 쓴 〈조선의 대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높이 칭찬해 주었었지.
1월 14일 월요일.
춥고 구름 낀 날씨. 상하이
오늘 아침에 본넬 교수가 내게 편지 한 통을 보여주다. 난킨 대학의 퍼거슨 씨가 그 학교에서 본넬 교수에게 한자리 주겠다고 제안한 내용이다. 본넬 교수가 그 제안을 꼭 받아들이면 좋겠다.
오후 늦게 미야케(三宅) 씨가 나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조선에서 관직을 받는다면 유길준(兪吉濬)보다 낮은 직위를 받지 않도록 충고한다. 그가 중국으로 오기 전, 김옥균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갈 때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내게 말하기를, 김옥균은 비밀특사로서 지낼 만한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쳤던 두 소년이 내게 바나나와 귤을 세 바구니나 가지고 왔다. 나는 그 선물을 아주 고맙게 받았다. 에퐁 자매의 집에서 저녁을 먹다. 자매의 계부 피터 중씨가 와 있었다. 그는 아주 명랑한 사람이다.
1월 15일 화요일.
비교적 갠 날씨, 해가 나다. 상하이
아침 11시에 학교 교사와 장학생들 모두 학기 말 종강예배를 보기 위해 예배실에 모이다. 알렌 박사가 외국인의 시각으로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짧은 인사말을 하다. 그러고는 상금으로 7달러에서 1달러 사이에 해당하는 돈을 각기 다른 학급에 맞게 시상하다.
그 시상제도는 본넬 교수가 도입한 제도였다. 알렌 박사와 L씨는 이번 학기만 지나면 그 제도를 없앨 거라고 한다. 나는 이 제도가 학생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서도 지속이 되어야 할 텐데, 생각한다.
오늘은 에퐁 자매를 두 번이나 봤다. 지난주에 매일 자매를 찾아간 일은 내게 기쁘고 신선한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자매를 보러 갈 때마다 내 발걸음이 빨라진다.
1월 17일 목요일.
거친 바람, 몹시 추운 날씨. 상하이
견딜 수 없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하루이틀이 지나,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내 사랑이 12시경에 맥타이어 홈에 도착하다. 그녀가 온다는 기쁜 소식은 ‘인력거’로 맥타이어 홈으로 달려가는 시간보다 더 빨리 내게 전해졌다. 사랑하는 아내는 개더 부인의 서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아름다운 그녀의 몸이 내 팔 안에 무너지듯 안겨 왔다. 창백한 얼굴, 무척이나 아름답고 고운 모습, 나를 무아경에 빠지게 하는 더할 나위 없는 그 미소를 띠고 안겨 왔다. 내가 10년 만에 귀국하는 계획을 뒤로 돌려놓는 듯한 느낌이다. 오, 하느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 어여쁜 아내와 아기를 다정하게 돌보아 주소서!
오후 2시에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은 북풍이 부는 듯 너무 추워서 난로도 소용없을 지경이었다.
밖에는 한겨울 삭풍이 윙윙거리는데, / 나는 편편찮은 내 방에 앉아 있네. /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 /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지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네. / 나에게 온통 매달려 있는 그녀의 불안함과 고통과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면서, / 내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불확실한 미래와 모험을 깊이깊이 생각해 보네. / 아무도 헤아려 주는 이 없이 오랫동안 / 내 사랑이 나 없이 홀로 겪었을 외로움과 불안감을 깊이 생각해 보았네. /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저런 상념 속에 휩싸여 앉아 있네. / 그 어느 누구도 사랑이 넘치는 ‘시’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으리. / 인생의 ‘산문’이 이런 것임을 알게 되기 이전에는. / 어여쁜 내 사랑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 나는 춥고 배고픈 곳이라도 기꺼이 달려가리라.
헤이굿 선생에게서 즐거운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받다. 하느님, 고귀한 저 여인을 축복하소서!
1월 18일 금요일.
맑은 날씨. 바람이 불고 몹시 춥다. 하루 종일 땅까지 얼어붙다. 상하이
나가미에게서 편지를 받다. 도쿄에 있는 내 사촌 치오가 우편으로 내게 보내준 60달러를 받았음을 알려주다. 우리의 귀여운 친구가 나의 보배인 아내와 함께 하루를 지내다. 아내와 그의 자매 에퐁! 이 두 여인을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오, 하느님, 내 사랑 시엔숭과 그의 자매 에퐁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헬렌 리처드슨 선생을 방문하여 50달러를 꺼내어 맡기다. - 그녀의 이름이 적힌 영수증을 받다.
1895년 2월에 일어난 일들 ● 10년 만에 귀국하다. 빈곤하고 헐벗은 조선을 보며 실망하다. ● 어머니는 아들에게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윤치호는 자신의 ‘선교의 사명’ 을 다짐한다. ● 아버지와 삼촌이 행세(行勢)할 것을 강조하시면서 미국에서 배운 것은 쓸모없는 것이니 모두 잊어버리 라고 하신다. ● 서울의 호레스 알렌 박사,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예방하다. ● 유길준이 찾아오다. ● 김홍집(金弘集)은 자기의 개인비서로 일해 달라고 한다. ● 학부참의(學部參議: 학무국장과 교육감 겸임) 발령받다. 당시 나이 30세. 2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Allen): 37세. 의사이며 외교관. 민영익을 치료해 준 미국 의사. ● 유길준: 37세. 연립내각의 서기장(비서실장 격). 실권자. 어윤중의 문하생. ● 박영효: 34세. 개화파 수장. 내부대신(독판). ● 김홍집: 53세. 총리대신. ● 이노우에 가오루: 59세. 조선전권공사. 원로 정치인. 조선책략의 주역. |
2월 9일 토요일.
좋은 날씨. 나가사키, 벨록스 호
기다리는 일도 끝날 날이 있나 보다. 드디어 제물포로 가는 기선, 벨록스 호가 나타났다. 오후 1시30분에 친절한 MN 가족들과 로호르에게 작별인사를 하다. 그의 여동생이 내게 아주 예쁜 돈지갑을 주었다. 그녀가 오색 비단 조각보로 손수 만든 주머니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왼손으로는 선물을 건네고 오른손으로 내게 악수를 하며 배웅해 주었다. MN과 곤도 씨가 기선을 타는 데까지 배웅해 주다.
꼭 10년 전 오후 2시, 나는 나가사키를 떠나 상하이에 닿았다. 그날 밤은 서늘하고 달빛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밤중의 정적 속에 노 젓는 소리만 구슬프게 뱃전을 때렸지. 정다운 벗들을 멀리하고, 내게 정다웠던 사람들과 황망하게 집을 떠난 나는 비감에 젖어 있었지. 나는 울고 말았지.
오늘 나는 아주 착잡하게 내 성격 속에 10년을 두고 엮어 낸 빛과 그늘의 세월을 안고 귀향하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 미국에, 일본에도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애정과 걱정 어린 마음으로 내 장래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필요할 때 친구가 되어 주고 내 성실함을 알아주는 영원히 감사해야 할 친구들이다. 오! 하느님, 주님께서 선한 길로 예비해 주셨음을 감사하나이다.
승객을 태우려고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아주 초라한 벨록스 호가 저녁 6시30분에 닻을 올렸다. 상하이 사투리는, 내가 따라하기엔 어렵지만 아주 매력 있게 들린다. 내 사랑하는 아내의 언어이기에.
2월 12일 화요일.
좋은 날씨. 조선 제물포
배가 어젯밤 11시경에 제물포에 닿았다. 그런데 날이 너무 춥고 어두워 해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부두에 닿았다. 10년 만에 내 모국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날씨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당연히 나는 행복해야 하고 지금 아주 행복하다. 이곳에서는 내가 어디든지, 언제든지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쩌나! 지금처럼 슬픈 적은 또 별로 없었거늘.
조선의 막노동꾼들은 이상하게 만든 흰 옷감에 새까맣게 찌든 옷을 입고 일하고 있고, 중국에선 아주 지저분해 보이던 집들이 조선의 움막 같은 시골 초가집과 비교해 보니 오히려 궁성 같구나. 사방에 쌓여 있는 쓰레기 썩는 냄새에, 비참하게 가난하고, 천대 받고 사는 무지한 백성들, 보기 흉하게 벌거벗은 산, 무방비 상태의 조선을 잘 보여주는 이 광경들은 조선 사람의 애국심을 병들게 하기에 충분하구나. 절망스런 탄식 말고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구나.
환영하라! 그리스도인이건 다신교도이건, 조선의 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열 번이라도 환영하자! 주님은 내가 도움을 구하는 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가톨릭교회나 영국 성공회 선교부는 깨끗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소서!
타운센드 씨를 방문하다. 10년 전에 내가 그와 헤어졌을 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미국인이다. 그의 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다. 그가 말하기를, 감자 몇 개를 밥상에 올려놓는 일은 제물포에선 이제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이러한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굉장한 참을성이 필요하단 얘기다. NCDN의 유명한 주재원에게서 배운 것은, 영국교회의 선교방침이다.
제물포에서 유일하게 명랑해 보이는 것은 일본 여성들과 일본 아이들뿐이다.
상하이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알렌 부인에게, 본넬 교수와 리처드슨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제물포에서 가장 좋은 호텔방엔-아마도 조선 전국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세 겹으로 된 것이 있다. 종이와 먼지와 매트이다. 고약한 냄새가 온 방 안에 풍기고, 가구는 지린내 나는 찌든 오줌 자국이 그대로 있고, 더러워진 놋그릇이나 나무판대기를 담배 재떨이로 쓰고 있다. 여섯 조각도 더 되는 나뭇조각들을 붙여서 만든 못생긴 목침들….
타운센드 씨의 소개로 김교삼(金敎三)을 만나다. 조선 가톨릭 신자인데 한때 호러스 알렌의 시종이었던 사람이다. 아주 착실한 조선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지만, 알렌 박사와 타운센드 씨의 전적인 신임을 받을 만큼 신실한 사람이다.
2월 13일 수요일.
제물포에서 서울로
어젯밤에 고베야(神戶屋)에서 마에다(前田) 씨와 한방에서 자다. 6시30분에 일어나다. 오전 9시에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 인력거를 타고 가다. 아름다운 날씨이다. 인력거에서 내려 길을 한참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길은 걷기가 아주 나쁘고, 어떤 길은 막일꾼 중의 한 사람이 문제가 생겨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보통 때도 전형적인 건달임을 증명해야만 조선 사람이 된다는 듯이 구는, 조선 막노동꾼 중의 한 사람 때문이다.
집에서 보낸 하인이 강가에 나와서 나를 마중하다. 서울 집에 오후 4시에 도착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어머님이 건강하셔서, 내가 걱정한 것처럼 늙지도 않으셨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와 나는 몇 분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다만 서로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말 없는 사랑의 언어를 나눌 뿐이었다. 아버지는 시골집에 가 계셨다.
어머니는 작년에 아버지께서 귀양 가는 재판 받으신 이야기와 그 가혹한 과정을 간간이 들려주셨다. 나는 어머니께 제발 그만 말씀하시도록 간청했다.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은 끔찍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에 미국 공사관의 비서관인 호레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그는 나를 한없이 반기며 진심으로 환대한다. 언더우드 박사와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조정의 전직 관리들의 몰염치한 탐욕에 대한 정보를 주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립병원은 처음부터 장로교 선교부가 책임지고 시작하였으며, 고종께서 연간 5000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은 한 번도 병원에 들어오지 않았고, 미국 공사가 그 일로 전하를 알현할 때마다, 통역관은 문제가 많은 관리의 횡포가 두려워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이어서 말하기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원군의 손자(이준용-옮긴이)를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에 대해 얘기했다. 그 음모는 민영익(閔泳翊)에게 발각되었는데, 민영익은 전하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미국 공사에게도 통보했다는 것이다.
서광범(徐光範)을 방문하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면서, 현재 조정에 대해 몇 마디 말을 전해 주다. 그의 말은, 내각은 지금 대원군파와 왕당파로 갈라져 있다는 것. 대원군파는 어윤중 탁지부 대신, 김윤식(金允植) 외무대신, 김홍집 총리대신이며, 서광범과 박영효는 왕당파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서광범은, 대원군이 지금 자유주의파 혹은 왕당파에 대적할 음모를 꾸미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주다. 그리고 유길준은 대원군파라는 것이다.
박영효씨는 내가 기대한 것만큼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았으나 친절하게 대해 준다. 그는 뭔가 주저하는 듯하더니, 나를 학부참의(학무국장, 교육감급-옮긴이)로 임명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조정을 자신의 손안에 쥐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참의가 된 것이고 그렇게 여기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게 뭔가! 이것이 남자로서 내리막길에 있지 않고 출세길에 올랐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내가 공직에서 모범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제외하고는 공직에서 더 바라는 건 없다. 그러면 내가 이 직책에서 잘하려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오늘 오후 내내 들은 이야기들은, 결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와서 기쁜 일은 오직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 있는 일뿐이다.
2월 14일 목요일.
좋은 날씨. 서울
1976년 〈The Emory of Magazine〉에 실린 에모리 대학 시절의 윤치호의 모습과 윤치호의 영문일기. 1996년 에모리대학을 방문한 좌옹의 외손자 정태진 박사가 입수해 제공했다. |
김정우씨는 우리 아버님의 좋은 세월이나 어두운 세월에도 변함없이 곁에 머문 사람이다. 그리고 잔인한 동학 무리들이 아버지를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살해하려고 했을 때, 그 동학군에게 눈물로 모면을 간청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이야기는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도록 다짐하신다. 나는 어머님께 범사에 감사하셔야 함을 설명해 드렸다. 만일 앞으로 더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내가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오직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드렸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아울러서 말씀드렸다.
오전 11시에 내각의 서기장인 유길준씨가 나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구당파와 신당파 간에 서로 파멸시키는 정쟁을 막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김홍집 총리대신이 나를 개인비서로 기용하고 싶어한다고 친밀한 듯이 말한다.
오후 1시에 이노우에 백작을 방문하다. 생각했던 대로 그는 매우 오만하다. 내가 조선을 떠나 있던 동안 부모님 집안에 일어난 소란을 이야기하자, 그는 박영효와 서광범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무뚝뚝하게 말한다.
“윤 참의는 당신 아버지가 불만이나 불평하는 일에 같이 휩쓸리지 않도록 하시오. 한 노인네의 푸념일 뿐이오.” 이 대목에 와서 그의 목소리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기어가는 소리를 한다. 그가 소인배가 아니랄까 봐서인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서 박영효와 서광범과 김가진(金嘉鎭)을 들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수치심과 슬픔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감님과 조정 대신들이 실제로 일본 공사의 손에서 꼭두각시놀음밖에 못하는 것이 수치스럽고, 국가를 선도해야 할 대신들이 단합하지 않고 분열되어 가는 위험한 상태가 슬픈 현실이다.
호러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여 그에게 내 신상에 관한 일들을 털어놓다. 지성적인 그분은 성심껏 나를 동정해 주었다. 그는 내가 참의 혹은 개인 비서직을 맡는 일은 여건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박영효의 지각없음을 걱정한다. 즉 박영효는 지난 여름에 500명의 일본군 병사를 거느리고 고종 임금을 억압할 목적으로 경솔하게 제물포에 갔다는 것, 박영효는 미국 공사의 개입으로 그 계획이 무산되자 미국 공사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알렌 박사는 유길준의 태도가 변한 것도 말해 주었다. “나는 유길준에 반대하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적어도 무슨 일이든 명료하게 처리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유길준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미국 공사관에 대해 아주 배은망덕하게 말하더라고요. 미국 공사관은 그에게 언제나 초지일관 아첨하는 친구로만 보이는 모양이죠. 나는 조선과 교류하는 일이라면 어떤 경우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가고 싶습니다. 신문지상을 통해서라도 말입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10년째인데 개선의 여지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현재 내각이 새로 구성되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어요. 그래서 타운센드 씨에게 그 이야기와 관련해서 내 의견을 써 보냈어요. 그의 회답은, 새 내각이 서로 협력할 것이냐가 문제란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은 다시 당파로 갈라서게 된다는 얘기죠.”
아펜젤러 목사와 헐버트 목사를 방문하다. 헐버트 목사는 아주 즐겁게 사업을 운영하는 것 같다.
대원군이 자유당(왕당)파를 소탕하려고 서울과 제물포에 100명이 넘는 자객을 배치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고 있다. 온 나라가 의문투성이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 분위기를 탐색하려고 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포, 의구심, 추측만이 나라 전체를 들끓게 하고 있다.
김홍집 총리를 방문하다. 그는 매우 사려 깊게 나를 대하면서, 자신의 개인비서가 되어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아직은 아무런 공직을 맡고 싶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2월 15일 금요일.
오전 내내 비 오고, 오후에 눈이 내리다. 서울
아주 추운 날씨이다. 내 방을 정하다. 나는 언제쯤, 사랑과 평화가 깃든 가정에서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안심하고 기쁘고 복된 생활에 정착하게 될까!
2월 16일 토요일.
매섭게 춥지만, 아름다운 날씨. 서울
미국 공사 씨일과 알렌 박사가 방문했다. 신뢰감이 넘치는 분들이다. 오후 5시에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을 방문하다. 그는 연전에 상하이에서 조선 사람들이 모두 나를 들짐승 보듯이 피해 다닐 때 내게 15달러를 준 사람이다. 오늘 오후에 내가 방문하자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그와 함께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에서 다음 사실을 알게 되었다.
1. 대원군은 동학군과 청국군을 동원해서 현 조정을 전복하려고 한 일이 실패하자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다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또 다시 악마 같은 음모를 꾸미기에 바쁘다.
2. 왕비가 하고자 하는 방법에 관하여-대신들이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게 만드는 기술적인 방법으로 술책을 쓴다. 왕비의 무기는 중상모략이다. 다시 말해서 왕비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동료를 적대자로 만들거나 아니면 왕비에게 온통 헌신하게 만든다. 왕비의 이기적인 결론으로 왕국의 복지에만 총액을 쏟아붓는 일을 진척시키는 게 일이다. 왕비는 박영효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박영효가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인사들을 신임하도록 했다. 그들은 왕비에 대적해서 ‘신당’을 만든 인사들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람 중의 한 명을 경무사(警務使, 경찰책임자-옮긴이) 직에 올려놓은 것이다. 왕비는 내 아버지가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잘못도 없는데 파직시켰다.
3. 김가진은 이노우에 공사에게 달갑지 않은 이른바 구당파이다.
4. 박영효는 그의 편협함과 완고함과 억제할 줄 모르는 야심 때문에 모든 사람의 신망을 잃었다. 그는 완전히 왕비의 손에 잡힌 바 되었다.
5. 이노우에 공사와 어제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보면, 그는 조희연과 그의 동료들을 김가진이 사사건건 적대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관심사에만 몰두한다. 대원군은 그의 방식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건 모두 죽여 없애 버리려고 한다. 왕비는 악취 나는 일로 그녀의 종말이 되는 천박함이 드러난다 해도, 자신의 세력을 거머쥐고 싶어한다.
박영효는 독재자가 될 만한 강력한 자질도 없으면서 독재자 행세를 하고 있다. 이노우에 공사는 자기 자신의 인격과 상황을 개선하려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지혜로운 어부가 황새와 조개 사이에서 투쟁하는 지혜로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고 있다. 조선의 정치란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집과 같구나. 치욕스럽다! 수치스럽다! 창피하다!
조선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물건들을 비싸게 사 버린다는 점이다. 꼴사나운 모양새를 한 옷들을 보면 손수건 한 장 넣을 주머니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다. 잘 정돈된 집들은 미국의 〈서부의 황야(Wild West)〉라는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집처럼 휑뎅그렁하니 넓기만 하다.
나는 아직도 보편적인 서울의 큰 집들보다는 평균치의 미국 오두막집이 훨씬 더 좋다. 내 집은 여자하인, 남자하인들로 붐빈다. 일본 사람 한 명이나 외국인 하인 한 명이면 너끈히 할 수 있는 일을 그 하인들은 부산스럽게 일을 한다.
정부의 각 부처는 ‘관료’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죽도록 정부의 기계가 막혀 버리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자들은, 시간을 보내거나 그의 정력을 낭비하면서 아침 8시부터 80권 분량의 책을 들고 큰 거위처럼 어기적거리며 학습한답시고 돌아다닌다.
11시에 감리교 학교 아침예배 시간에 참석하다. 어떤 조선 사람이 열 명의 소녀들을 앉혀 놓고 설교한다. 그의 예화는 너무 허풍스럽다. 그러나 내 조국에서 우리 구세주의 평신도 제자 가운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여간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다. 그에겐 사랑스런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이 있다. 알렌 박사와 한 시간가량 함께 지내다. 그는 내게 일본이 워싱턴에 있는 조선 공사관을 폐쇄하도록 요청했다는 정보를 준다. 하지만 그 제안은 미국 선교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오후 3시에 외국인 예배가 있는 교회에 참석하다.
김홍집 총리가 보자고 해서 그를 방문하다. 그는 신구 정당들을 공평하게 이끌기 위해서도 제발 이 내각 안의 직책을 맡아 달라고 사정한다.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올라오시다. 이렇게 아버지를 다시 만나 뵙게 되다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아내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은 것에 실망하신다. 작은아버님(윤영렬-옮긴이)도 뵙게 되어 기쁘다.
2월 18일 월요일.
서울
눈과 비가 밤새 내리더니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온 동네가 ‘흰 눈 산과 얼음 바다’가 되었다.
오전 11시에 박영효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학부의 직책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내가 참의 직을 먼저 받고 나면 곧 협판으로 진급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일본을 방문하는 계획서를 만들어 놓았다. 내가 참의가 되려면 일본의 교육제도를 실습해야만 한다며, 유길준이 나를 자기의 당파로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총리가 유길준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상하이에 있는 영 알렌 박사와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다. 아버지와 작은아버님이 가족회의를 하신 다음 내가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동학당이 아버지를 괴롭혔는데, 돈을 착취하려는 목적 외엔 아무런 명분이나 동기가 없었다는 것. 내가 일본어를 전하에게 강요했다는 것이 그들의 큰 구실이었다. 아버지는 산속으로 도피하시고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 고통스런 세월을 참고 지내셔야만 했다.
2. 동학 혹은 ‘동방 종교’는 최제우(崔濟愚)가 시작한 지 몇 해 된다. 동학은 북학 혹은 ‘북방 종교’와 분리되고, 남학 혹은 ‘남방 종교’와 불교, 서학 혹은 서양 종교 혹은 가톨릭교회와도 구분이 된다. 동학은 유교와 5개의 항목이 연관이 된다. 불교의 선험적 이론은 도교의 이적(異蹟)과 마법에서, 그리고 가톨릭교에서 하느님, 천주 등의 용어와 연관되어 있다. 동학의 이교도적인 양태 속엔 알게 모르게 마호메트교의 강요와 충동적인 실천을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의 종파는 개방된 복수심 속에 억압과 핍박으로 충동을 자극 받는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양반에 대항하는 깊은 증오심을 보여 왔다. 동학군이 양반을 다루는 잔인한 수법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의 고상한 상류층이 당하던 유혈전쟁을 생각나게 한다.
3. 우리 시골집과 가족과 마을 전체가 청국인과 일본인과 동학군의 복수전의 갈등 사이에서 피해가 없이 지켜지게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작은아버님의 지혜와 작은아버님이 평소에 평판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4. 시골집 아산과 근방 마을에 청국 병정들이 가장 야만스런 방법으로 살인과 강탈과 겁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2월 19일 화요일.
매섭게 춥다. 굵은 눈발이 오후 내내 쌓이다.
오전에 이노우에 공사를 방문하다. 조정의 관직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직책의 급여 여부는 중앙정부가 안정된 조직이 되기 전에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의심’하는 일은 조정에서 가장 치욕적임을 말하다.
2월 22일 금요일.
매우 춥다. 서울
너무 추워서 1분 동안 손을 밖으로 내놓았다가는 동태가 되어 버린다. 오전 10시에 김가진을 방문하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유길준이 이끄는 구당파가 제멋대로 구는 바람에 반대파인 신당파 각료들이 결국 퇴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가 중재하여 한 번 더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회의를 소집하여 두 당파 사이에 새롭게 우정을 다지며 협력하기로 했다고 한다.
1. 저녁식사 후에 가족회의를 하다. 아버님과 작은아버님은 ‘행세(行勢)’하는 법, 혹은 세상에 나가 자수성가(自手成家)하는 기술 등에 관해 원탁강의를 하시다. 두 분이 쌍포문을 열어서 내게 말씀하시다. 즉, 나의 비현실적인 언사와 미국에서 경험한 가치관은 조선 사회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내가 ‘행세’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분의 목표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금언(金言)을 들어, 최대한 약삭빠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말씀을 채우고 계셨다. 내 아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비범한 분이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에 의하면, 강자나 뛰어난 명민성만이 한 인간을 어떤 사회에서나 살아남게 만든다는 것이다.
2. 아버지의 관찰력이 대단하신 한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을 떠나 내가 능주(綾州)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었지. 그곳에 언덕이 하나 있더구나. 언덕 위에 서울 집보다 조금 작은 벽이 남아 있더라. 그곳에 살던 원주인은 그 벽이 귀한 골동품인 것을 모르는 거야. 어떤 이들은 그 벽은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세운 거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왕씨 왕국 혹은 고려 시대에 요새로 쓰던 성벽이라고도 하는구나.
나는 그 바위 틈새에서 굉장히 많은 깨진 도자기 조각을 발견했는데, 도기와 자기로 만든 화병 조각들이었다. 그 조각들은 훌륭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지. 연대나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 하지만 내 생각엔, 그 요새는 어떤 약탈자에게서 뺏은 요새 터로 조선 왕조의 창건 이전에 요새화된 것 같았다. 주민들이 그 평야에 다시 정착한다면 조각들을 찾아 다시 재건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주민들의 변화가 그 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도구에도 변화를 가져오겠지.”
3. 조선에 관한 모든 것-조정과 백성과 빈약하기 짝이 없는 집들과 헐벗은 산들을 총망라해서 글로 정확하게 남기기엔 너무나 절망이 앞선다.
4. 작은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동학란이 일어나기 전에 서학 혹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변란이 먼저 일어났다고 하신다. 충청도에 있는 가톨릭교회 외국인 사제들을 추방하고, 동학란 이전 몇 해 동안 억압과 폭력이 횡행했었다고 하신다.
우범선(禹範善)씨가 오후에 방문하다. 그는 말하기를 유길준은 악당이고 분당질에, 야심가에, 이기적이고 질투와 오만의 화신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애퐁 자매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2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눈이 오다. 아주 춥지 않은 날씨. 서울
6인치의 눈. 근래에 가장 큰 눈이라고들 한다. 오후에 외부의 이중응(李中應) 참의가 아버지와 나를 방문하다. 갈등이 생기는 두서없는 이야기들:
1. 오늘 아침에 나는 아버지께, 6법의 예의지방(禮儀之邦)과 행세(行勢)가 조선과 청국을 망쳐 놓았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내 말을 수긍하시면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난해 7월에 일본 공사 오도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전하와 조정에 처음 운을 떼며 한 말은 ‘개혁’이었으나, 조정이나 상감은 무관심하게 들어 넘기셨다. 청국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 조선의 장군들이 그들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 조정은 왜놈을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상감이 대신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신들은 그 자리에 선 채 무슨 말씀인가 하고 멀뚱멀뚱 서로 바라보았다. 나이가 많은 정 대감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오, 전하. 무슨 개혁이나 개화를 하라는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저와 전하의 모든 신하들이 전하의 어명을 복종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당황하신 상감께서 이 당돌한 대답에 그 말의 뜻을 다른 대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으셨다. 이에 한 노 대신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하의 신하는 지금 70세의 노인입니다. 제가 6세 때 처음으로 배운 것은, 부귀와 명예를 위해서는, 세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안 가 14, 15세가 되자 집안이 세도를 펴기 시작했습지요. 그리고 10년이 흘러 처분에 따라서 혹은 어명에 따라서 권력과 금력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습죠. 집안의 광영과 소득은 오직 이 처분에 따라서였습니다. 이 제도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왔지요. 저는 처분대로 세도의 반열에 그리고 노령에 이르렀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는 세상에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 외엔 처분대로 성장한 것입니다.
재능과 덕목은 인간의 성쇠에 달린 게 아닙지요. 그러므로 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향상을 한다거나 학문으로 직분을 높일 걱정을 한 일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오로지 전하의 충실한 종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와서 어떤 계획도 배운 적이 없는 개혁을 한다는 것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개화에 대한 한 가지 소망은, 장차 저희 자손들에게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나 조정과 백성이 개혁을 하도록 할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2.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극약 같은 그리고 파멸을 초래하는 이 ‘행세’가 개인과 국가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 아버님 말씀대로 ‘행세’를 해야 한다면 정직함, 정의감, 고상한 목표와 이상적인 목적들과는 결별해야 하리라. 조선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최선의 길을 가려면 나의 아버님은 내가 아버님과 같은 길을 따르기를 바라신다. 내가 만일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행세’를 하고 싶어한다면, 내 명예와 도덕의 원칙을 모두 내다 버려야 할 것이다. ‘행세’는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정직함과 명예심과 보조를 맞추지는 못할 테니까. ‘행세’함으로써 얻는 것은 오직 영예와 재물 취득뿐이다. 오직 천박하고 사악하기만 한 그 성취를 위한 결말은 조정의 관리가 되는 일 외엔 모두 무의미하단 이야기이다.
3. 박애심, 자기 부정, 정직한 동기, 성실성, 사랑 등 내가 배워 온 숭고한 목표 등에 대해서나, 내가 집을 떠나 있었던 10년 동안 쌓아 올린 공적도 아버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버지는 ‘행세’를 잘하는 법을 배우는 일 외에는 모두 가치가 없음을 강조하실 뿐이다. 너무나 고적함을 느끼면서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 아기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내 아버님은 정말 나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구나.
4. 아버님은 ‘풍속’이라는 관습을 내세워 나를 굴레 씌우려고 하신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로 나를 밀어붙이실 것이다. 하지만 내 이성과 양심에 따라 더 이상 복종할 수가 없구나.
5. 조선 사람은 누구나 똑똑한 사람이나 능력 있는 사람을 쫓아다닌다. 그러나 조선이 원하는 것은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애국심과 정직성뿐이다.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그동안 낭비한 지옥 같은 권모술수 대신에 국가의 복지방향으로 능력과 활력을 돌린다면, 개혁은 앞으로 큰 성공의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6. 서광범이 내 작은아버님께 미국에서 10년 이상 살았어도 자기 아버지의 말을 믿지 못했으리라고 말했다. 거짓말이 하도 성행하므로 누가 정직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 서울 인구 중에 열에 일곱은 식객노릇으로 더부살이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힘깨나 쓰는 사람 집에는 으레 게름뱅이들이 모여들어서 온종일 쓸모없는 소리나 지껄이며 담배 피우고 먹고 자는 것이 일이다. 이런 자들은 세월이 좋을 때는 얻어먹고 입을 것까지 받다가도 주인이 역경에 처하면 잽싸게 떠나 버리거나 비난하기가 일쑤이다.
8. 지각 있는 사람은 일본인들이 조정의 관리직을 맡고 오만하게 지시하는 수모를 견디어 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의 관리들이 백성을 억압해도 하인처럼 아첨하며 길들여지는 것을 본 왜놈들과 되놈들이 이를 본받아 불쌍한 서민을 억압하려 드는 것이다. 개인이건 단체이건 모두 썩어 빠진 조선 사회의 현실에 넌더리가 난다.
2월 27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1. 동학란을 진압하는 관군들이 오히려 무리를 지어 약탈을 일삼다. 어느 장터의 장사꾼이 허세를 부리는 관군에게 물었다 “이번에 재미(돈) 좀 봤어?” 돌아오는 대답은 “그럼 돈 좀 벌었지” 또는 “아무것도 못 건졌어”라는 것이었다. 이 대화는 마치 장사꾼이 멀리 장사하러 갔다 와서 하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관군들이 합법적으로 도둑질하거나 살인하도록 허가해 준 격이다.
2. 대원군이 빠져들어 꾸미는 잔인한 계획은 상상을 초월한다. 김학우를 살해한 자객이 잡혔다. 자객들은 늙은 대원군에게 고용되어 박영효, 서광범, 김홍집, 김가진을 제거하도록 했는데 불행하게도 김학우(金鶴羽)가 당한 것이다.
3. 아버님은 노비 방면이나 사회적 신분을 다른 정책과 연계할 대안도 없이 폐지하는 것을 반대하신다. 아버님은 울산병사(蔚山兵使)로 승진하셨고, 나는 정부참의(政府參議)로 발령이 나다.⊙
1865년 해평 윤씨(尹氏) 웅렬(雄烈)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출생. 1881년 신사유람단원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 1883년 초대 주한공사 푸트 공사의 통역으로 귀국. 1884년 10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통역직 사임. 1885년 상해로 건너가 중서학원에 입학하여 4년간 영어와 수학 등을 배우다. 1888년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입학. 1891년 에모리(Emory) 대학에 입학. 1894년 3월에 상해에서 중국인 마시엔숭(馬秀珍)과 결혼. 1895년 귀국하여 학부참의에 임명. 외부협판(外部協辦). 춘생문사건으로 언더우드 집으로 피신. 1896년 학부협판(學部協辦). 남감리교회를 조직.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의 수행원 으로 러시아에 가다. 1898년 만민공동회 회장. 《독립신문》 사장. 독립협회 탄압과 체포령으로 피신. 1904년 3월 11일 외부협판에 재임명. 1905년 마 부인이 별세한 후에 백매려(白梅麗)와 재혼. 을사늑약 반대하고 외부협판 사임. 1906년 한영서원(韓英書院)을 개성에 설립.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하고 찬미가를 역술. 1908년 평양 대성학교 교장에 취임. 1910년 ‘에든버러 1910 세계선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 1912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소되어 1912년부터 1915년 2월까지 복역. 1917년 YMCA 회장. 1941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장. 1945년 2월 광복 직전에는 귀족원 의원에 선임. 1945년 9월 애국가 친필본을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써서 셋째 딸 문희에게 주다. 1945년 치과 병원에 다녀오다 뇌일혈로 졸도. 개성 고려동 장남 영선(永善) 집에서 12월 6일 오후 9시 별세. 향년 80세. 종교교회에서 장례식 거행하고 아산 선영에 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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