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7

북한 방문의 양면성 윤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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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방문의 양면성
윤 봉 춘 / 수필가

[뉴욕 중앙일보] 발행 2016/06/10 미주판 16면
 기사입력 2016/06/09 17:38


국무부는 때때로 북한 방문 여행 경보를 발령한다. 북한으로 여행하는 미국민들에게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어떤 형태의 매체라도 소지하였을 경우 범죄자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자칫하면 억류당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 하다 멈춘 휴전 상태로 아직도 미군이 총구를 북에 향하고 있는 적성국이지만 여행금지 조치는 취하지 않기에 미국에 거주하는 영주권자나 시민권을 소지한 한국인이 자유의 의사로 북한을 수시로 방문할 수 있고 북한에서도 미국인들의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유엔에서 대북제재를 강화하고 있지만 북한을 관광하는 서구인이 대략 매년 1만여 명, 중국인이 9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산가족의 가슴 아픈 사연 말고도 6.25전쟁을 겪은 노년층의 한국인들에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경이롭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행지임에는 틀림없다.

'재미 아줌마' 신은미씨가 한때는 그 감상적인 필치로 한국에서 북한 열풍을 일으키다가 황선씨라는 종북인사와 콘서트를 하다가 한국에서 추방당하는 푸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그분은 후에 또 방북하여 그 "맛있는 대동강 맥주"를 즐기고 있다는 후속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나라를 여행하고 나면 방문국에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생기고 더구나 형편이 어려운 나라라면 연민의 정이 아니 생길 수 없다. 남북 사태가 최악의 대결 시대에 한국으로서는 북한은 국가가 아니고 괴뢰집단이었고 타도해야 할 적국이었다. 6.25전쟁 때 발을 구르며 목이 쉬도록 노래하던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 뿐이다'. 항미원조에 참전한 중공군을 증오하며 그렇게 행군가를 불렀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수교하고 경제적 성장을 함께하는 친선국가가 되었다. 천문학적인 물량으로 무력 공세를 펼치던 적성국가인 월남에게도 미국이 무기를 원조하는 우방국이 된 오늘날 아직도 날 선 대결을 하고 있는 남북 상황이 안타깝다. 언제 통일로 하나가 이루어지는 날이 도둑 같이 오길 기다린다.

북한을 자주 방문하면 친북이 되고 또 칭송하면 종북으로 분류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찬양고무죄'가 아직도 유효하여 수 틀리면 걸려 들게 된 국가보안법이 남아 있다. 북한 여행에서도 북한 당국의 비위에 거슬리면 미국과 협상용 볼모로 잡힐 우려가 있다. 지금껏 십여 명의 미국인이 곤욕을 당하였고 지금도 억류되어 있는 인사가 남아 있다.

2년 전 북한을 방문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돌아온 후 북한 방문기를 조심스럽게 발표한 적도 있었다. 다시 가고픈 여행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 북한 여행 신청을 지난해에 했는데 비행기 표 구입 등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중 사흘 전에야 북한 방문 비자가 나오지 않아 일행과 합류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2차 방북의 기회가 영구히, 아마도 통일이 되기 전에는 북한 땅을 두 번 다시 갈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방북 한다니 당신 사상이 불그스레하다는 비난은 안 듣게 되었다.

그렇다, 한국에서 뼈가 굵어진 이민 일세대에겐 한반도의 통일은 가슴 설레는 바람이다. 1968년 1월 김신조 게릴라 부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참수하러 왔을 때는 한국의 대공기관이 대북 정보 수집에 목말라 눈을 부라리고 헤매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엔 남파간첩이 소지하고 내려왔던 북한의 생필품까지도 대북첩보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었다. 60여 년이 지났어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북한 땅을 밟았으니 모든 것이 멸공과 반공사상의 각도에서 관찰할 편견도 내재하였다.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적개심을 북돋우려 6.25전쟁 중 우리가 불렀던 노래다.

6.25사변 때 인민군 선무공작대가 붙이고 간 붉은 글씨의 선전선동 문구를 평양 시내에서 마주쳤을 때 섬뜩한 긴장을 순간적으로 느꼈었다. 순수한 관광 가이드 옆에 따라 나온 또 하나의 안내원은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라고 은근히 자기 위상을 뽐내는 당원 냄새가 풍기며 그의 형형한 눈빛은 예사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차림새는 고급스러운 구두, 선글라스, 브랜드네임의 벨트, 세련된 말솜씨에서 관광안내원 수준은 아님을 눈치챘었다. "안내원 동무는 북한 사람 같이 안 보이고 남한 사람 같이 보입니다." 당신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같이 안 보인다는, 칭찬일 수도 있고 북한 사람은 남루하게 보여야 한다는 뉘앙스가 내재된 말로 들릴 수도 있는 사려 깊지 못한 농담을 했다.

원산을 가는 길에 오지 마을에도 초가집은 안 보이고 북한식 기와집(그 형태를 뭐라고 지칭하는지 모르지만)만 보이기에 "안내원 동무, 이곳에도 초가집이 안 보이니 새마을운동이 여기까지 있었나 봅니다." 웃어 보려고 농담조로 한 말이었다. 김일성 원수가 참수조를 보내 목을 따러 온 박정회 대통령의 업적을 거기에 대입하였으니 그 열성당원의 불편한 심정을 그때는 느끼지 못하였다. "무자비한 미제의 비행기들이 산골의 가옥까지 모두 공습을 하여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비행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북조선 하늘을 휘젓고 폭격을 할 때 조종사의 얼굴까지 식별할 정도 였으니까요. 지금은 모두 현대식 기와집입니다."

전시장처럼 변한 북측의 판문점, 평양 시내와 김일성의 유물이 전시된 묘향산 친선박물관 등을 제외한 북한의 농촌 풍경은 현대문명이 스며들지 않은 먼 옛날의 시골의 풍경이다. 바퀴 없는 달구지를 게으른 황소가 끌고 가고 고장난 목탄 트럭에서 파르슴한 연기가 피어나는 건 시골길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금강산 구룡폭포 앞 관폭정에 나들이 나온 북한 주민들과의 우연한 조우, 삼일포 입구 구멍가게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주민들의 왜소한 체구에 한가닥 슬픈 연민의 정을 느꼈다. 인도 여행의 시골역 플랫폼 시멘트 바닥에 퍼질러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까무잡잡한 시골 주민을 마주칠 때,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 마주친 가난한 타민족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안쓰러운 감정이 울컥 올라온 것을 느꼈다.

미주에는 굵직한 친북단체가 있다.
민족통신이라는 인터넷 신문을 운영하며 69회 방북하고 마음껏 북한을 홍보하여 학위까지 받은 노길남 박사,
재미동포전국연합을 이끄는 윤길상 목사가 있다.

친북 성향의 인사들 중에 유독 목사 직함을 가진 분들이 많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의 요람인 평양 수복을 고대하며 목사님들이 그렇게 포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남북을 통틀어 통일운동을 하는 분들의 열정은 대단하다. 한 분 한 분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 민족 한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정치가 못지않다. 이념은 같지만 남쪽에 발을 딛고 있느냐, 북쪽을 향한 발을 딛고 있느냐에 따라 사상과 행동은 판별된다.

독일의 경우와 같이 통일로 가는 길은 남북교류가 확대되고 주민과 주민의 접촉이 빈번해져야 한다. 다행히 미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제도에 구애 받지 않고 북한을 방문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많은 방북이 이루어져야 한다. 옛날에 한 국가였던 민족의 동질성을 남북한 국민들이 회복해야 한다. 뉴욕과 LA에 북한 여행을 전담하는 한인 여행사가 있고 미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사도 있다. 북한 문화유적을 탐방하는 미주현대불교에서는 오는 9월에 4차 방문단을 보낸다고 한다. 다만 유념할 것은 북한 체재 중 북한 체제 비방 말고, 그들이 숭배하는 최고 존엄에 대한 예의만 지킨다면 외화를 떨구고 가는 외국인들을 이유 없이 붙들어 억류할 정신 나간 정부는 아닌 것 같다.

이제 몇 밤 지나면 66년 전 겪었던 '육이오'가 온다. 참전 나이에 미치지 못하였던 초등학교 4년생에 비친 전쟁의 참상은 이맘때면 어김없이 떠오른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밞아 오던 날을…'. 그 시절 그 악보에는, '비분강개하게" 부르라는 주문이 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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