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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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편집]
비무장지대 (DMZ) 군사분계선 상에 있는 구역으로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 측과 공산 측(북한, 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 군사분계선(MDL) 상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600m 장방형의 지대를 뜻한다.
2. 개요[편집]
공식 명칭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영어로는 United Nations Command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Joint Security Area - Pan Mun Jom. 통상적으로는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이라고 짧게 지칭하며, 일반인들은 간단하게 판문점이라고 부른다. 공동경비구역 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하여 유엔측의 ‘자유의 집’ 등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2년 7월 7.4 남북 공동 성명 등으로 판문점은 당시 오천만 한민족의 가슴을 한때 뜨겁게 한 바 있고, 1973년 6월 남북조절위원회가 결렬된 지 6년 반만인 1980년 8월부터는 남북총리회담의 실무회담이 이곳에서 열려 8차까지 거듭한 끝에 북한측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공전(空轉, 없던 일로 됨)된 일도 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2015년 8월 서부전선 포격 사건의 연장선으로 이루어진 남북고위급접촉으로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로 남북간에 (엄밀히 말하면 유엔군vs공산군) 맺어진 휴전상태를 관리하기 위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의와 협상의 장소로 이용되었지만, 1971년 9월 20일에 열리게 된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을 계기로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한을 왕래하는 통과 지점으로 활용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이름만은 잘 알려져 있다.하지만 이 글을 보기전에 JSA가 파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2016년 2월 11일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건으로 인해 북한 측에서 판문점 연락 통로의 폐쇄를 선언한 상태다.
주로 남북간에 (엄밀히 말하면 유엔군vs공산군) 맺어진 휴전상태를 관리하기 위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의와 협상의 장소로 이용되었지만, 1971년 9월 20일에 열리게 된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을 계기로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한을 왕래하는 통과 지점으로 활용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이름만은 잘 알려져 있다.
2016년 2월 11일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건으로 인해 북한 측에서 판문점 연락 통로의 폐쇄를 선언한 상태다.
3. 판문점이라는 이름에 얽힌 사연[편집]
사실 판문점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좀 있다. 6.25 전쟁 중 양측의 휴전회담이 처음에는 개성에서 진행됐으나, 보다 중립적인 장소를 물색하던 UN측이 개성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이곳을 제안하여 여기서 휴전회담이 열리게 된 것인데, 그 장소가 당시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라는 동네에 있는 '널문리가게(주막을 겸한 조그마한 가게)' 앞 콩밭이었다고 한다. 당시 휴전회담은 중국어를 포함한 3개 국어[1]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는데 ‘널문리가게’를 중국어로 표기하기가 마땅치 않아 "판문점"으로 표기하면서 조그만 구멍가게 일대가 오늘의 역사적인 장소가 된 것이다.[2]
4. 설명[편집]
1972년까지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이다. 현재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한 행정구역 상으로는 개성특급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해당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쌍방 어느 쪽의 영토도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에서 서북방으로 62㎞, 북한의 평양직할시에서 남쪽으로 215㎞, 개성으로부터는 동쪽 10㎞ 지점으로 북위 37° 57' 20″, 동경 126° 40' 40″에 있다.
1953년 당시 판문점. 국방색 군용 텐트가 쳐진 방향이 대한민국 문산 쪽 방향. 허허 벌판으로 하얀 건물이 있는 쪽이 전쟁 후 북한령이 되고 만 개성 쪽 방향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헬기의 앞 쪽이 대한민국 방향이다.
6.25 전쟁 전만 해도 지난날의 의주가도(義州街道)와 사천(砂川)내가 만나는 지점의 이름없는 한촌(寒村)으로 초가집 몇 채뿐이었으나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면서 이곳 명칭은 유엔 측과 북한 측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9월 초까지의 포로교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곳이 휴전선보다 북측에 있는 것이 문제였고, 결국 1953년 10월 동쪽으로 약 1 km 이전하여 휴전선 위에 새로운 판문점을 만들게 되었다. 옛 판문점은 "정전협정조인장"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견학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고, 남한에서는 당연히 갈 방법이 없다. 판문점 견학 시에 다리 너머로 보이는 옛 판문점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판문점 서쪽 사천내에 놓여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에는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군에 의한 도끼만행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1953년 당시 판문점. 국방색 군용 텐트가 쳐진 방향이 대한민국 문산 쪽 방향. 허허 벌판으로 하얀 건물이 있는 쪽이 전쟁 후 북한령이 되고 만 개성 쪽 방향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헬기의 앞 쪽이 대한민국 방향이다.
6.25 전쟁 전만 해도 지난날의 의주가도(義州街道)와 사천(砂川)내가 만나는 지점의 이름없는 한촌(寒村)으로 초가집 몇 채뿐이었으나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면서 이곳 명칭은 유엔 측과 북한 측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9월 초까지의 포로교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곳이 휴전선보다 북측에 있는 것이 문제였고, 결국 1953년 10월 동쪽으로 약 1 km 이전하여 휴전선 위에 새로운 판문점을 만들게 되었다. 옛 판문점은 "정전협정조인장"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견학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고, 남한에서는 당연히 갈 방법이 없다. 판문점 견학 시에 다리 너머로 보이는 옛 판문점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판문점 서쪽 사천내에 놓여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에는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군에 의한 도끼만행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5. 주요건물[편집]
연합뉴스에서 만든 간단한 안내도.
남북회담본부에서 만든 공동경비구역 안내도는 여기 참고.
이 항목은 남북회담본부에서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자료자체가 최신의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각 언론의 추가 자료가 나올때 마다 갱신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평화의 집 항목의 경우 남북회담본부 자료에 의하면 1층에 기자실과 소회의실이 있다고 되어 있으나 MBC보도에 의하면 귀빈실과 기자실로 되어 있다고 보도되었다.
5.1. 남측 지역[편집]
5.1.1. 자유의 집[편집]
남쪽인 뒷면에서 본 모습
북측에서 바라보는 자유의 집
북측의 판문각에 대응되는 건물인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판문각에 비해 상당히 초라했다. 2층짜리 조립식 가건물 두 동이 있고 중간에 팔각정이 덜렁 있는 구조였는데, 판문각에 비해 워낙 초라해보이자 1990년대 후반에 기존 건물을 싹 밀고 다시 지었고, 1998년 7월 9일에 재오픈했다. 새로 지은 자유의 집은 지상 4층에 지하 2층 규모로 판문각보다 크고 아름답다. 팔각정은 새로 지은 자유의 집 한켠으로 옮기는 형태로 보존되었다. 사진 좌측에 나온 정자가 바로 팔각정이다. 남양주종합촬영소의 판문점 세트는 새로 짓기 전의 자유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판문점의 옛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각 층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지하의 구성은 알려지는 대로 추가바람.
- 1 층 : 로비/ 기자실/ 편의시설(식당 등)
- 2 층 : VIP실/ 회의실/ 사무실
- 3 층 : 남북연락사무소, 대회의실
- 4 층 : 전망대 및 다용도 공간
- 2 층 : VIP실/ 회의실/ 사무실
- 3 층 : 남북연락사무소, 대회의실
- 4 층 : 전망대 및 다용도 공간
5.1.2. 평화의 집[편집]
자유의 집에서 13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북회담용 석조건물이다. 1989년에 지어진 3층 구조의 건물로 1층에는 귀빈실/기자실, 2층에는 회의장, 3층에는 연회실이 있다. 특이 사항으로 각 귀빈실에는 전용 통신선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곳에서 2015년 8월 22일 부터 24일까지 진행된 남북고위급접촉이 진행되었다.
링크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
일단 남북회담본부의 자료에 따른 각 층별 안내는 다음과 같다.
- 1층 : 기자실, 소회의실
- 2층 : 회담장, 남북회담대표대기실
- 3층 : 대회의실, 소회의실
- 2층 : 회담장, 남북회담대표대기실
- 3층 : 대회의실, 소회의실
5.1.3. 돌아오지 않는 다리[편집]
돌아오지 않는 다리[3] 옛 이름은 널문다리다.
이곳의 거의 모든 장소에는 나름의 사연이 담겨있다. 동명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여 더욱 유명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한국전쟁 포로교환이 이루어진 장소로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화에서는 이 다리 앞에 있는 초소에서 근무를 서다 월북하였으나... 판문점을 기준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가면 공동경비구역 밖이 되므로 이 다리 건너편의 북한군 감시초소는 병력이 많고 중무장 되어 있다. 건너가면 벌집 확정... 반면 그와 대치해야 하는 한국군 감시초소는 공동경비구역 내부에 있어 정전협정에 의거 중무장이 불가능한 관계로[4] 무인 감시장비만을 가동하고 병력은 배치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판문점에 지뢰매설하였는데, 군인들의 탈북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며, 판문점 인근에 지뢰를 매설한 것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5.1.4. 중립국감독위원회 캠프[편집]
중립국감독위원회 캠프 내부에서 촬영된 모습. 미군과 한국군 경비병 외에도 민간인 기자와 캐나다 육군 (검은 베레모에 초록 군복) 의 모습이 보인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인근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 (NNSC,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ttee) 캠프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이곳도 판문점 경비부대의 책임구역이다. NNSC는 정전협정 당시 정전협정 이행 여부를 관리 및 감독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당시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스웨덴과 스위스는 유엔군 측에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군 및 중국군 측에서 선택한 중립국가들이라고 한다. 현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가 친서방 정부인걸 고려하면 아이러니하다(...)[5]
스웨덴과 스위스가 군사분계선 남쪽에 세운 캠프가 바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NNSC 캠프이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캠프는 군사분계선 북쪽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두 나라가 모두 민주화된 이후 중립성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식수 및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체코를 1993년에, 폴란드를 1995년에 축출했다.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중감위 임무에서 완전히 빠졌고, 폴란드의 중립국 감독위원회 임무는 폴란드 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매년 회의에 참석할 때에는 남한 쪽 출입구를 통해 회의장에 들어가고 있다.
현재 북한측 NNSC 캠프 건물은 북한군에 의해 평화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개관되었다는 소리는 왜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니다. 문제의 박물관은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판문점이 현 위치로 이전하기 전에 잠시 주재했던 구 판문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설명한다. 아무래도 북한군이 점거해서 자기네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와전된 듯하다. 참고로 비무장지대 통문에서 판문점으로 향하는 도로와 진입로가 연결되어 있는 시설이 있는데 이게 예전 NNSC 캠프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구글어스로 보면 판문점 인근 북측 지역, 비무장지대 안쪽인데 GP라기엔 왠지 규모가 커 보이고 게다가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비무장지대 북경계선 쪽에 붙어있다. 좌표는 북위 37도 58분 3초, 동경 126도 29분 29초.
캠프에서 공동경비구역으로 지름길로 갈 수 있는 파란색 도보교가 있는데 이 다리는 중감위 관련 인사들만 이용할 수 있어 취재진이나 경비병 등 비(非)중감위 인원들은 이 다리를 쓰지 못하고 반드시 우회해서 다녀야 한다.[6] 그리고...
캠프 자체가 군사분계선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5.1.5. 기타 건물[편집]
- 경비병 막사
- 공동일직장교 사무실
- H128 헬기장
- 4개의 초소
- 검문소
5.2. 군사 분계선[편집]
군사분계선에 걸쳐서 지어져있는 건물들은 관할권이 수시로 바뀐다. 만약 남측 관광객들이 판문점에 와서 회담장에 들어갈 경우 이 건물은 일시적으로 남측의 관할이 된다. 이 때 남측 경비병 중 한 명이 건물의 북쪽 출입문을 걸어잠그고 그 문 앞에 서서 북한군의 돌발행위에 대비하여 경비를 서고 또 한 명은 회담장 한가운데 있는 회담테이블 끄트머리에 서서 경비를 서게 된다. ...라기보다는 관광객들의 사진 모델이 되어준다... 반대로 북한측의 관광객이 같은 건물에 들어오게 될 경우 북한군은 남측 출입문 앞에 두명이 모두 배치된다.
관할권과 별개로 관리 책임은 한쪽에 일임되어 있다고 한다. 파란색 건물은 남쪽에서 관리하고 회색 건물은 북쪽에서 관리한다고.
관할권과 별개로 관리 책임은 한쪽에 일임되어 있다고 한다. 파란색 건물은 남쪽에서 관리하고 회색 건물은 북쪽에서 관리한다고.
5.2.1.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편집]
中立國監督委員會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NNSC)
내부 모습.
가장 최근의 내부 모습.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서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비공개 회의로 진행되기 때문에, 내부 사진이 없다시피 하다. 다만 한국측에서 촬영한 중감위 관련 다큐에서 내부 모습이 잠깐씩 나온다. 구조적으로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과 유사하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과의 외적인 차이로는 건물 자체의 창문이 작게 나있는데, 군정위 회의와는 달리 위에서 말한 대로 비공개 회의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회의실 본채 건물(파란색)이 서쪽의 회색 건물 3채와 연결 통로로 조립이 되어 하나의 세트를 형성하는 형태인데, 이 건물들의 용도와 내부 모습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내부 모습.
가장 최근의 내부 모습.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서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비공개 회의로 진행되기 때문에, 내부 사진이 없다시피 하다. 다만 한국측에서 촬영한 중감위 관련 다큐에서 내부 모습이 잠깐씩 나온다. 구조적으로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과 유사하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과의 외적인 차이로는 건물 자체의 창문이 작게 나있는데, 군정위 회의와는 달리 위에서 말한 대로 비공개 회의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회의실 본채 건물(파란색)이 서쪽의 회색 건물 3채와 연결 통로로 조립이 되어 하나의 세트를 형성하는 형태인데, 이 건물들의 용도와 내부 모습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5.2.2.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편집]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에 서양관광객들이 방문한 모습.[7]
군정위 회의가 공개 회의이기 때문에 창문이 큼지막하게 나 있다. 파란색 건물이며 따라서 남쪽에 관리 책임이 있다.
가운데 있는 회담테이블의 가운데를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있다. 즉, 한국 육군 경비병의 오른쪽 반신은 남한땅에, 왼쪽 반신은 북한땅에 걸쳐있는 셈이다.
5.2.3. 일직장교 회의실[편집]
군정위 회의실 동쪽에 위치한 파란색 건물이며 판문점에서 24시간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상주시키는 일직 장교들의 회의실. 역시 비공개 희의라 창문이 작게 나 있으며, 가끔 다큐에 내부 모습이 나오거나 간혹 가다 개최되는 공식 행사 등 때문에 내부가 공개되기는 하는 중감위 회의실과는 달리 이쪽은 내부 모습 사진이 아예 없다.
5.2.4. 북측 경비병 휴게실[편집]
일직장교 회의실 동쪽에 있는 회색 건물로 이름은 이렇게 알려져 있는데 실제 용도와 내부 모습은 전혀 안 알려져 있다. 유엔군에서 부르는 별명은 The Monkey House.
이 건물 동쪽으로는 건물이 없고 콘크리트 경계석이 조금 더 연장되어 있다가 끝나고 거기서부터는 흰색 말뚝으로 분계선이 표시되는데, 이 콘크리트 경계석 부분이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때 소를 실은 트럭들이 넘어간 통로였다. 정주영 회장 본인은 중감위 회의실을 통해 입북했다.
이 건물 동쪽으로는 건물이 없고 콘크리트 경계석이 조금 더 연장되어 있다가 끝나고 거기서부터는 흰색 말뚝으로 분계선이 표시되는데, 이 콘크리트 경계석 부분이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때 소를 실은 트럭들이 넘어간 통로였다. 정주영 회장 본인은 중감위 회의실을 통해 입북했다.
5.3. 북측 지역[편집]
5.3.1. 판문각[편집]
남한에서 바라본 판문각
조선인민군 육군 경비병들은 보통 한국 육군 경비병들을 경계하며 서 있는 것이 원칙이나, 모종의 이유로 소집할 때에는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로 들어간다. 물론 저 건물 안에서 망원경으로 감시하는 것은 24시간이다. 그러나 2008년에 주 북한 영국 대사를 지낸 존 에버라드의 말에 따르면 인민군들은 군기없이 그냥 막 돌아다닌다고 한다. 건물 자체의 용도는 북측 경비대 지휘소, 판문점대표부[9], 적십자연락대표부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건립은 69년 9월 9일에 120평 규모로 처음 지어졌으나 1994년 12월 1층과 2층을 260평, 3층을 130평으로 증축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다.
5.3.2. 통일각[편집]
5.3.3. 돌아오지 않는 다리[편집]
북쪽에서 바라본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후방모습. 북쪽에서 판문점으로 진입하는 길은 중간에서 72시간 다리와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방향으로 나뉜다. 사진은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72시간다리쪽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쪽으로 향하는 길목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5.3.4. 72시간 다리[편집]
72시간 다리는 말 그대로 72시간 만에 건설된 다리다. 이 다리가 있기 전 본래 북한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사천강을 건너 보급을 받고 있었다.[10]그런데 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공동경비구역 남측의 북한군 출입이 통제되자 보급로가 막히게 되었고, 밥차가 다닐 수 있도록 공동경비구역 북쪽에 급하게 다리를 건설해서 72시간 만에 완성시킨 것.
그 밖에도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이 소몰이(...)를 한 길이나 북한이 대한민국 수해 시 쌀을 지원해줬던 길 등이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큼직한 남북한 교류가 도라산 CIQ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이런 장소들은 말 그대로 역사속의 장소로 남은 상태.
그 밖에도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이 소몰이(...)를 한 길이나 북한이 대한민국 수해 시 쌀을 지원해줬던 길 등이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큼직한 남북한 교류가 도라산 CIQ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이런 장소들은 말 그대로 역사속의 장소로 남은 상태.
5.3.5. 기타 건물[편집]
- 경비병막사
- 7개의 초소 - 이중 6번, 7번 초소는 엄밀히 따지면 공동경비구역 밖에 있는 초소이다.
6. 관광[편집]
재미있는 사실은, 판문점은 원래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고 지금은 남북간의 교류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장소인데, 정작 이 곳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인원들은 일반 민간인 관광객들이라는 점이다. 남북 양측에서도 분단의 상징이라는 점을 내세워 통일/안보관광 자원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그렇다보니 판문점을 경비하는 부대입장에서도 관광객 보호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군사정전위원회, 적십자 등의 정부관련 인원들이야 이 곳을 드나드는 게 일상이다보니 알아서 처신을 잘 하지만, 하루에도 수백명이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일사분란하게 통제하고 돌발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예방하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특히 한여름에 근무복 안에 방탄조끼 받쳐입고 헌병모 쓴 채로 부동자세로 20~30분씩 땡볕 아래에 서 있으면 헬이 따로 없다.
보통 판문점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남측의 패키지를 기준으로, 인근의 도라전망대와 제3땅굴까지 패키지로 둘러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런 분위기의 장소가 전세계적으로 드물기는 하다. 삐까번쩍하는 서울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판문점과 그 일대 비무장지대의 풍경과 분위기가 이 곳을 굉장히 특색있는 관광지로 만들어준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며 현재 휴전 상태에 있는 특수한 지역이다보니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양인데, 실제로 이 곳을 다녀간 외국인 관광객들의 평가는 아주 좋은 편이다.
* 판문점을 관광하려면 우선 국가정보원 http://www.nis.go.kr 에서 국민과 함께 - 견학신청을 하면 된다.
(만 10세 이상의 일반국민, 30인 이상 45인 이하의 단체만 해당)
보통 판문점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남측의 패키지를 기준으로, 인근의 도라전망대와 제3땅굴까지 패키지로 둘러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런 분위기의 장소가 전세계적으로 드물기는 하다. 삐까번쩍하는 서울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판문점과 그 일대 비무장지대의 풍경과 분위기가 이 곳을 굉장히 특색있는 관광지로 만들어준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며 현재 휴전 상태에 있는 특수한 지역이다보니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양인데, 실제로 이 곳을 다녀간 외국인 관광객들의 평가는 아주 좋은 편이다.
* 판문점을 관광하려면 우선 국가정보원 http://www.nis.go.kr 에서 국민과 함께 - 견학신청을 하면 된다.
(만 10세 이상의 일반국민, 30인 이상 45인 이하의 단체만 해당)
6.1. 남측에서[편집]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개인 견학은 불가능하고, 사전 예약을 통해 30인 이상 45인 이하의 단체 견학만이 가능하다. 만약 학교나 회사를 통해 판문점 견학을 갈 기회가 있다면 꼭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단체 견학밖에 안 되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기가 어려운 편이다. 신청은 두 달 이전에 해야 하고,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견학이 가능하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신청을 받는다.
단, 복장 제한이 좀 세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청바지, 미니스커트를 못 입고 오게 한다. 그런데 청바지 중에서는 좀 웃긴 것이 특별히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오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남한이 가난한 나라라고 북한의 선전자료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다. 그런데 반면 남쪽에서도 판문점을 가보고, 북쪽에서도 판문점을 가본 한 외국인의 말로는 북한에서는 복장규제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한군 군관들이 관광객들에게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단, 복장 제한이 좀 세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청바지, 미니스커트를 못 입고 오게 한다. 그런데 청바지 중에서는 좀 웃긴 것이 특별히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오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남한이 가난한 나라라고 북한의 선전자료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다. 그런데 반면 남쪽에서도 판문점을 가보고, 북쪽에서도 판문점을 가본 한 외국인의 말로는 북한에서는 복장규제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한군 군관들이 관광객들에게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여러분 남쪽에서는 판문점에 갈때 아무옷이나 못 입고 갑니다. 하지만 공화국은 자유이기 때문에 복장규제가 없습니다."
한편 귀걸이 등 금속 장신구류는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면 북한 경비병들이 발포로 오인하여 대응사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불허하며, 유사시 신속히 대피해야 하기 때문에 신발은 운동화가 원칙이다.
하지만 의외로 사진기는 휴대가 가능하고, 인솔자의 통제 하에 촬영도 가능하다. 포토 타임도 넉넉하게 주고, 촬영 가능한 범위도 다양한 편이다. 애초에 군사시설이 아닌 남북간의 회담을 위해 만든 장소이기 때문에 촬영 제한이 심하지 않은 편이다. 물론 촬영제한을 두긴 한다. 남측을 향해 찍으면 북에 정보를 유출할 수 있다고 해서 북측을 찍는 것만 허용된다
견학 코스에는 제3땅굴과 도라산 안보전망대, 도라산역 견학도 세트로 들어 있다. 총 견학시간은 5~6시간이고 판문점 견학시간은 그 중 90분을 차지한다. 민통선에서는 당연히 군 검문소에서 헌병의 검문을 받아야 하고, 이 때 받는 출입증은 돌아올 때까지 항상 옷에 달고 있어야 한다.
일단 주차장 안보전시관에서 브리핑을 들은 뒤에 자유의 집, 팔각정,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건물, 돌아오지 않는 다리 등을 관람한다. 여기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창밖으로만 관람한다. 유명한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난 장소인데다, 휴전선에서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미루나무가 잘리고 남은 밑둥도 볼 수 있다.
특히 휴전선을 가로지르고 있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건물 안에서는 선을 넘어 북한 땅을 잠시나마 밟아볼 수 있는 희귀한 기회도 있지만, 북한 쪽으로 나가는 문은 헌병이 철저히 경비하고 있으므로 나갈 수 없다.
참고로 중립국감시위원회 건물은 군정위의 바로 서쪽 옆에 있는 건물로, 남쪽이건 북쪽이건 관광객들은 여기 들어갈 일이 절대 없다. 창문도 큼지막하게 난 군정위 회의실과는 달리 벽 윗부분에 치우쳐서 좁게 나 있는데, 이것은 중감위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반면 군정위 회의는 공개로 진행된다.
견학요금은 무료지만, 제3땅굴은 1인당 1800원을 받는다. 외국인의 경우에는 지정된 여행사를 통하여 견학이 가능하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단체 관광이 기본이기 때문에 통일자문회의/바른생활협의회/자유총연맹 등의 단체에 속한 사람들 또는 단체 견학을 오는 학생[11]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외국인 관광객은 일본관광객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최근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다.
여담으로 코난 오브라이언이 내한 때 판문점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테이블을 가로질러가서 콩트를 진행하기도 했었다고.
6.2. 북측에서[편집]
북측에서는 주로 외국인들의 평양 관광 공식 일정 후반에서 개성 관광의 부수 코스로 강제 선택되며, 남한과 달리 인원 제한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주로 중국 관광객들과 조총련계 일본인들이 단체로 방문하고 있다. 인원 제한이 없는만큼 50명이상이 한번에 올때도 있으며 이럴경우 일부는 회담장견학을 하고 나머지는 판문점 옥상으로 올라가 관광을 실시한다. 대부분 평양에서 개성평양간 고속도로를 통해 이동한 뒤 북방한계선에서 경비대원이 차에 동승해 판문점까지 이동한다. 견학 전에는 전문 강사에게 한국전쟁과 분단 상황에 대한 북한 또는 중국 시점의
7. 군복무지로서의 판문점[편집]
근무자들은 드물게 잠시 파견오는 경우가 아니면 주한미군, 국군과 조선인민군 모두 육군 병력이다. 이들 남북 모두 헌병복장을 착용하지만 실제로 헌병 병과는 얼마 없다. 이 지역을 경비하는 양측의 병력의 규모는 각각 1개 소대씩이며, 국군 경계병력들만 선글라스를 착용하는데 이는 여러가지 실질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적에게 시선을 들키지 않기 위함과 더불어 여름철 강력한 햇볕에 시력이 손상되는 것과 탈진 등을 방지하는 목적이 있다. 실제로 한여름 땡볕 아래에 부동자세로 수십분씩 서있어야 하는 경계병들 입장에서는 선글라스가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차이다. 물론, 적들에 대한 위압감과 간지는 덤이다.
남한측이 휴전협정 조인국이 아닌 관계로 남측 지역은 2005년까지 UN군 산하의 미군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 곳에 근무하는 한국군들도 공식적으로는 유엔군 소속이다. 물론 한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의 실질적 몸통(?)은 미 육군 제8군이기 때문에 JSA 근무병들은 당시에는 카투사처럼 미군식 장비와 훈련을 받고[12] 한국 육군과 미 육군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교차로 지휘하는 편제였다. 즉, 1, 3소대는 미군 소대장+한국군 선임하사, 2, 4소대는 한국군 소대장+미군 선임하사의 편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소대원의 구성은 한국군과 미군이 50:50으로 편성되었다.
즉, 한국 육군으로 입대하여 차출된 다음, 공식적으로는 UN군 사령부 소속으로서 미 육군 시설과 장비를 사용하면서 미 육군과 한국 육군 간부들의 교차지휘를 받는 특이한 형태의 군대였다.[13] 한국 육군으로 경비임무가 완전히 이양된 지금도 JSA는 공식적으로 UN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관할구역이며 단지 한국 육군에게 경비책임을 이양한 형식인 것이다.
아무튼 영어도 배우고 편하게 군생활 하려고 시험쳐서 카투사 입대했는데 유단자라거나 PT테스트 성적이 극도로 좋다거나 혹은 단지 덩치가 좋다는 이유로 JSA로 차출되는 경우는 그저 지못미.
이렇듯 한국 육군으로 이양되기 전까지는 미 육군의 지휘하에 미 육군의 시설과 장비를 사용하는 대신 병력구성은 한국과 미군이 50:50의 비율을 유지하는 독특한 편제였다. 때문에 일반적인 카투사와는 상당히 괴리가 있는 부대였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미 육군의 지휘하에 미 육군 시설에서 미 육군 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냥 카투사 병력이라고 여겨졌는데, 막상 JSA부대원들은 본인들이 카투사로 불리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나마, 카투사 시험을 치고 재수없이(!) 끌려온 부대원들이야 출신성분(?)이 원래 카투사라서 상대적으로 덤덤한 편인데,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차출된 병력들을 카투사라고 불렀다간 상대방의 분노게이지를 끝까지 올라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2004년까지는 미 육군부대와 동일한 시설에서 근무했던 관계로 막사나 식당 모두 미 육군 부대의 시설이었지만, 이제는 온전히 한국 육군 부대가 되었기에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제공하는 짬밥을 즐기게 되었다.
육군 장교들의 경우 이곳이 전군 최고의 진급코스이다. 왜냐 하면 조선인민군과 직접 맞대고 있는 곳인 데다가 군사분계선 지역 중에서도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시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고위인사들과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잦으며 심지어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과도 얼굴을 마주칠 수 있다. 2015년 9월에는 대한민국의 김관진과 북한의 황병서가 이곳에서 만나서 협상을 한 적도 있다.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의 비율이 매우 높고, 전원 선발이며, 선발우선순위도 높다. 특히 소대장의 경우 중위급에서 육군 중위 전체를 대상으로하는 지휘자 선발보직이라는 특수성때문에 높이 평가받는다. 물론 소대장이 아니더라도 엘리트 코스에 속하는 선발보직이다[15]
그런만큼 간부는 정말로 병보다 더 가리고 가려서 또 골라 뽑는다. 왜 그러냐 하면 조금이라도 능력이 부족하거나 성격에 이상이 있는 인원이 이 곳의 지휘관(자)이나 참모로 배치될 경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북한의 성격이 조금만 심기가 불편해도 온갖 트집을 잡는 놈들이라 그런 놈들에게 약점 잡혀서는 안되기 때문에 능력 출중하고 성격에 결함이 없는 사람으로 가려 뽑아야만 하며 미국의 대통령도 가끔 오는 곳이니 만큼 미국의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려서도 안되기 때문에 역시 가려 뽑아야 한다. 거기다 이곳의 군령권을 미국 대통령이 가진다. 때문에 이곳의 장교 신분의 지휘관(자)은 육군 전체에서 가리고 골라서 뽑아다가 배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한 점을 인정받기 때문에 여기에서 복무한 장교는 진급이 육군에서 최고로 잘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버락 오바마 前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나 엄청난 부대이기 때문에 공동경비구역이 육군 최고의 진급코스일 수밖에 없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JSA경비대대는 공동경비구역 이외에도 북한과 닿아있는 대성동 마을과 주변 GP 및 도로까지 모두 담당한다. 특히 대성동 마을은 대한민국 비무장지대내 유일한 민간인 마을로 JSA경비대대에서 그들의 경비 임무를 맡고있다. 참고로 반대편 휴전선 북쪽에 있는 기정동 마을과 대비하여 이 대성동 마을도 선전마을로 아는 사람들이 꽤 되는데, 대성동 마을은 그저 전쟁 이전부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여전히 남아 사는 것 뿐이지, 마을의 거대한 국기게양대 정도를 제외하면 본격 선전마을의 가치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애초에 기정동 마을은 말 그대로 선전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델하우스 마을이다. 채널A의 '이만갑'에 따르면 전형적인 농촌지역에 선전용으로 화려히 만든답시고 도시형 주택을 건설해 놨다고 한다. 그래서 쓸 수가 없게 되자 결국 건물을 버리고 주민들은 이웃한 마을로 보내서 거기서 출퇴근 식으로 일하게 한단다.
한국 육군으로 이관된 이후에도 부대의 포지션이 상당히 특이하게 유지되고 있다. 일단 비정규전 부대는 아니지만 임무의 다양성과 중요성으로 인하여 편제와 장비가 특이하다. 예를 들어 도로관리를 위해서 제설차, 구난차량, 각종 상용 중장비(!), 소방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른 측면들도 흠좀무하기는 매한가지... 덕분에 부대 규모가 대대 치고는 심히 크고 아름답다. 또한 부대원을 100% 선발한다. 지역적 특성상 지원을 받으면 불건전한 동기를 가지고 자원할 수 있다는 것인데, 헛소리라 여겨지겠지만 과거의 사고 경험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더불어 병력선발에 대한 권한이 높아서 특기병이 아니라면 입대한 장병들을 뺑뺑이 없이 데려갈 수 있다. 경비병은 306보충대에서 선발하고, 특기병 및 어학병은 육군훈련소에서 선발하니 생각있으면 골라가자. 어학병 소요는 육군 내부에서도 상당히 많은 편이므로 육군어학병으로 입대한다면 비교적 높은 확률로 굴러들어올 수 있다. 물론 본인들은 대부분 한미연합사나 육군본부를 희망하겠지만 특전사와 JSA 선발관들은 자비가 없다.
다만 이 선발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다. 우선 178cm 이상의 키를 보유해야 하고, 시력에 문제가 있거나 해도 차출이 되지 않는다[16]. 모여 있는 어학병들을 두고 본격적인 심사 전에 간단한 설문 조사를 하는데 가기 싫으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쓰자. 알아서 1차에서 버려진다. 한마디로 가기 싫으면 안 가기도 쉽다.
재미있는 점은 시작하기 전에 부대의 좋은 점에 대해 줄줄이 홍보를 하기 때문에 걸러지면 제발 기회를 달라고 사정 하는 병사들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17]. 물론 주임원사나 인사담당관은 전부 좋다고 설명하지만, JSA 경비대대도 군대인지라 마냥 좋은곳은 아니며, 어학병이나 특기병은 더 편한 복무지도 많다는 정도는 알아두고 선택하면 좋겠다. 좋긴 좋은 부분도 있긴 있다. 나중에 장교로 다시 군대가기엔 장교로의 선발 및 임관 후 진급으로 따지면 여기에서 병으로 복무한 이력이 너무나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거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좋다.
일단 선발된 병력들은 신병훈련기간 중 다시 평가를 받으며, 평가가 나쁘다면 거침없이 짤린다. 나쁜물이 들게 되면 한 기수(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15명 정도까지)가 다 짤리기도 한다. 그 밖에 부대에 전입온 후에도 문제의 소지가 보이면 여지없이 전출이다. 적당히 지내보겠다는 생각으로 밍기적 거려도 전출될 소지가 있으므로 방심은 금물이다. JSA에서는 중간만 하면 안 된다. 잘해야 한다. 어느 정도로 잘해야 하냐 하면 어지간한 다른 부대의 장교보다 더 정예한 병력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냥 잘하는 걸로는 안 된다.
2005년 이전 기준으로 설명하면, 신병이 JSA에 배속되면 신병막사라는 곳에 별도로 수용(or감금)되어 3~5주 정도 부대적응훈련과 신원조회 결과대기를 하게 되는데, 평균 10~20%가 신원조회상의 문제로 전출되며 또다른 10~20% 정도는 적응불능자로 전출되는 편이다.
신원조회로 인해 전출되는 경우는 신원상에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월북이 용이한 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신원조회의 기준치가 엄청나게 높은 것일 뿐 일단적인 군복무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적응불능으로 전출되는 경우 그 사유가 대부분 체력부족 때문이다. 이 역시 JSA에서 요구하는 기준치가 워낙 높아서이다. 그리고 일부는 실제 비무장지대 내에서 근무생활을 해본뒤 생각한 것보다 너무 최전방이란점에 당황+겁먹고 전출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이런 경우 설득을 해 본 후 안 되면 바로 전출시킨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협정에 의거 공동경비구역 내부에서는 오직 1개 소대만의 병력이 권총을 넘어서는 무장은 휴대할 수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소총 이상의 중화기들은 모두 뒤로 빠져있고, 직접 북한군과 맞대고 있는 장병들은 병, 간부 구분 없이 권총만 소지하고 있다. 일단 이곳에 주둔하는 병들이라면 무조건 권총도 함께 지급되기에, 전차 승무원 등과 더불어 군생활 중 육군 병이 권총사격을 경험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 2005년 이전에는 미 육군 장비를 사용했으므로 당연히 M9 권총을 사용했고 지금은 K5를 사용한다.
게다가 항상 실전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9mm 파라벨럼 교탄 중 90%가 JSA 사격훈련에서 소비되고 5.56mm탄도 1개 사단규모를 소비한다. 건물 내 근접전투 훈련(CQB)은 물론, 악조건하 사격(Stress shot), 즉각대응사격훈련이 많고, 특히 소부대 전투에 대한 훈련수준과 교리는 특별하게 뛰어나며 권총을 주무장으로 한 CQB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가장 많은 경험과 훈련량을 자랑한다.
전군 최고 수준의 정예병을 꼽으라면 당연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훈련도가 높다.[18]
그러나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JSA 현지의 특성에 따른 소부대 근접 보병 전투 수준에 한해서다. 전방의 보병 및 기계화보병 연대/여단/사단과 JSA부대는 작전 지역 특성과 임무 등에서 전혀 다른 환경이다. 물론 장병 개개인의 전투력만을 따지자면 분명 수준급인건 맞다.
한국 육군으로 임무가 이양되면서 위수지역 부대인 육군 제1보병사단과의 마찰도 매우 잦은편이다. JSA 작전권을 미 육군 장교인 대대장이 주도하다보니 서로 신경전이 있는 모양이다.
1사단장으로 모 장군이 임명된 이후로 JSA에 대한 간섭이 주된 갈등의 원인으로 생각되어진다. JSA는 육군의 행정편의상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직할로 소속되어있지만 실질적인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부, 실질적으로는 연합사령부에 있으므로 1사단은 어떠한 작전지시를 내릴수 없으며 모 1사단장도 JSA 방문시 부대원에게 자신이 그런 상황은 알고있으니 부대원들 군기같은 작전 이외의 것을 터치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일담이지만 1사단장과 미 육군 제2보병사단장이 JSA작전권에 대하여 서로 언성을 높혀 통역병이 고역을 치룬적이 있다.
원인은 경비병들의 신분 때문인데 JSA경비대대의 군정권과 군령권 중 하나가 한국군에 없어서다. 거기다 경비대대원 모두가 1사단 차출병력이다보니 관할 문제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먼저 JSA경비대대의 군정권을 미군이 아닌 한국군이 휴전이래 보유 중이다. 반면 주한미군은 군령권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작전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한국 육군 1사단장은 군정권을 이유로 미 육군 2사단장은 군령권을 이유로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JSA는 한미 연합군이기 때문에 미 대대장의 요청으로 대대 내의 상황을 다른 부대에 함부로 전파하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타 부대 같은 경우 간부가 병에게 작전상황이나 배치 등을 묻는 경우 다 알려주게 되어 있지만, JSA는 정보과로 그것을 돌리도록 돼있다. 타 부대 간부들이 너네는 한국군 아니냐며 화를 낸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엉뚱한 데 하는 화풀이일 뿐이다
한국 육군으로 이양된 후 어쩔수 없이 JSA 특유의 문화는 많이 사라지고 있는 모양. 과거 요원 중심의 분대전투는 간부 중심의 일사분란한 지휘-분대전술으로 바뀌고 있다. 요원들도 대부분 간부를 잘따르는 모양. 대부분의 간부가 육군 특전사 출신이라는 특성 탓에 특전사 간부들의 영향인지 소대 내부 역할이나 팀 분할 등이 특전사와 유사하다는 후문도 있다.
전방 철책 부대와 마찬가지로, 헌병 완장을 착용하고 근무하나 대부분은 그냥 보병이다. 단, 이 곳에서는 완장 뿐 아니라 근무복과 헌병 헬멧, 행사복 등 육군 헌병의 피복을 전부 지급받고 헌병 병과장도 패용한다. 한 해군 헌병 예비역은 이 곳에 갑자기 인원이 많이 비는 바람에 신병 올 때까지 파견가서 육군 헌병 옷 입고 근무한 적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전투복과 전투모는 특전사 및 해외 파병 부대용 위장무늬로 되어 있었지만, 2015년 하반기에 들어서며 예산 문제로 인해 피복이 육군 통합 전투복으로 전면 전환되었다. 특전복 도입 당시에 베레모 사용을 검토하였는데, 특전사 출신 간부들이 베레모의 한없이 부족한 기능성을 성토하여 전투모가 지급되었다. 어차피 행사시엔 헌병 헬멧이나 근무복에 착용 가능한 육군 공용 베레모를 쓰면 되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특전복을 착용하다 졸지에 일반 신형 전투복을 입게 된 장병들의 심정은 그저 지못미. 육군 베레모는 근무복에만 쓰고 전투복에는 착용하지 않으며, 해공군에서 쓰는 것과 동일한 전투모를 착용하고 있다.
JSA경비대대와 대치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육군 부대의 경우 특수부대로 분류되는 인민무력부 특무대, 폭풍 군단에서 차출된 병력들이라는 것 외엔 자세한 사항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물론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JSA경비대대처럼 이 부대 역시 상당히 엄격한 선별과 강훈련으로 유지되는 정예부대로 추정된다. 보다시피 전원 계급과는 상관 없이 육군 군관용 피복을 입고 있고 구식 철모 대신 중국제 철갑모가 지급되는 등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확실하다. 항시 헬멧을 쓰는 아측 경계병력과 달리, 평시엔 정모를 쓰다 남북간 긴장도가 높은 시기 등에는 위장포 씌운 철갑모를 쓴다.
국군 감시장비에 경계를 나온 북한군의 손에 붕대가 감겨있거나, 벽돌로 손날을 문지르는 등 북한군 특유의 수도(手刀)훈련이 잡히곤한다.
파주시 문산읍의 경제는 이쪽에서 근무하는 우리 육군 장병들의 외박과 휴가가 책임진다고 한다.[19]
8. 이야기 거리[편집]
- 공동경비구역의 설치 이후 구역 내에서는 군사분계선의 효력이 반쯤 소멸되어[20] 남북 쌍방의 관계자들은 구역 내에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76년 8월 18일에 발생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군사분계선의 효력을 완전히 되살리고 기존의 표지판 외에 추가적으로 자재를 들여와 군사분계선을 표시,[21] 이후 상대 영역에 있던 병력들은 모두 철수하였으며 모든 군인들은 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상대측의 지역에 넘어갈 수 없고, 상호간 대화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건 이전에 친분을 다졌던 남북 경비병들이 이후에도 분계선에서 몰래몰래 만나 전역할 때까지 친분을 유지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물론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이런 모습은 대부분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암암리에 있을 것 으로 보인다. 판문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탈북자에 의하면 원래 감시가 심해서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몰래 한국측 병사에게 조심스럽게 껌을 달라고 얘기해서 받았다고 한다.[22]
말걸다 걸리면 영창행
십선반팔삼팔(十線反八三八) - 십(十)자에 반(反)자와 팔(八)자를 합하여 널빤지 판(板))자,
양호역시삼팔(兩戶亦是三八) - 호(戶)자 둘을 좌우로 합하니 문 문(門))자, 무주주점삼팔(無酒酒店三八) - 주점(酒店)에서 주(酒)자를 떼어내면 가게 점(店)자, 삼자각팔삼팔(三字各八三八) - 3글자가 각각 8획이니 3과 8이 되는 것=삼팔선. |
- 이 문서는 판문점 문서를 기반으로 공동경비구역에 있던 내용을 편집한 뒤 공동경비구역이라는 문서 하나로 엮은 것이다. 판문점 문서에 있던 정보를 보고 싶은 사람은 이곳을 참고해 주기 바람.
9. 사건 및 사고[편집]
10. 관련 대중매체[편집]
11. 관련 문서[편집]
[1] 중국어, 한국어, 영어.[2] 널문리라는 이름에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 피신 중이던(…) 하성군 선조가 이곳을 지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자 마을 백성들이 집집마다 대문을 뜯어다가 임시로 다리를 놓아 임금이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이곳은 판자(널)문으로 다리를 놓았던 곳이라 하여 ‘널문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3] 사진의 군사분계선 표지판 0090번은 군사분계선에 설치된 1292개의 표지판들 중 유일하게 군사분계선 상에 설치되지 않은 표지판이다. 분계선이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관계로 다리 한가운데에 꽂는 것이 맞으나 기술적 문제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리 입구에 설치되었다. 남쪽에 설치된 것은 이 표지판의 관리 책임이 남쪽에 있어서로 추측된다.[4] 헌병들은 권총만 소지 가능하다.[5] 세 국가 모두 현재 유럽연합, 북대서양 조약기구로 빼도박도 못할 친 서방국이다.[6] 다만 일반 경비 업무가 아닌 특수임무 및 작전 간은 미군 및 한국군 경비대대가 이용 가능하다.[7] ACU 복장의 미 육군은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투어가이드이며, 헌병 행사복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보병인 대한민국 육군은 경비중대 소속의 경비병.[8] 사진의 인물은 코난 오브라이언(우)과 스티븐 연(좌)이다. 코난의 내한 중 찍힌 장면으로 사진에서 두 사람은 북한 쪽 탁자에 앉아 있다.[9] 북한은 군정위가 철수한 1994년 4월 28일 이후, 동년 5월 24일 이곳에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한다.[10] 그때까지 북한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이다.[11] 대학생의 경우에는 군사나 안보, 통일 및 북한학 관련 학과에 기회가 많이 오는 편이다.[12]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국군 장비나 무장이 모두 미군 장비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때는 카투사로 입대했다가 카투사 교육대에서 JSA로 차출되는 형식이었다. 경비대대 중 본부중대 인원은 대부분 카투사 입대자 중 선발하였고, 경비중대와 민정중대 인원은 대부분 훈련소에서 운동선수 출신, 유단자, 체대, 유도대 출신 등을 적당히 차출해서 카투사 교육대에서 후반기를 받은 후 자대로 보내졌다. 부대원들 내부에서는 통상 전자를 '시험군번'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차출군번'이라고 불렀는데, 시험군번에 해당하는 병들은 아무래도 가방끈이 긴 병력들이고 차출군번들은 대체로 운동경력이 있는 병력들이었다. 이 때문에 양쪽 그룹간에 서로 따로 노는 경향이 있고 서로 갈구는 경우도 있긴 한데 막상 1년쯤 지나고 나면 서로 안 좋은 쪽으로 비슷해진다.[13] 이 때문에 생긴 재미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외박을 나간 JSA 경비병 한명이 술을 마시던 중 사소한 시비가 붙어 어찌어찌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는데, 담당 경찰관이 소속부대를 물어보자 "UN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 소속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다국적군이란 말이지?"라고 다시 물어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속이 소속이다보니 외국군 장교와 마찰을 빚을 수도 있어 사소한 시비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14] 여담이지만, 미군식당에서 미군식사를 하던 시절만 해도, JSA 영내식당의 질은 미8군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미군 입장에서도 최전방으로 분류되어 보급을 잘 받았을 뿐 아니라, 다른 미군 부대와는 달리 한국군 병력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군 입맛에 맞게 조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 특히 근처 대성동에서 제공받는 쌀로 지은 밥은 민간인의 기준에서 봐도 최상급에 속하는 훌륭한 맛이었다. 일반적으로 미군의 식단이 한국군 식단에 비해 엄청나게 화려하고 맛이 좋을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실상 한국군이 먹기에 미군 식단은 사실 고역에 가깝다.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 식당에서는 대부분 밥과 김치도 제공되지만 밥알이 날아다니는 안남미로 지은 밥+양배추 겉절이같은 국적불명의 김치(?)에 미국 특유의 달달느끼하고 텁텁한 메뉴들이 더해진 조합은.....[15] 근데 이 부대를 거쳐간 장교 가운데 한명은 선발이 있을때마다 뽑혀와서 이곳 근무 경력만 수 차례를 가지는 흠좀무한 경우도 있었다.[16] 과거에 몸 상태를 속여서 신체등급을 높여받고 대대에 전입온 경우가 있었는데, 본인이 복무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근무에 지장이 없는 경우라는 소견을 받고 받아준적이 있긴 하다.[17] 사실 선발대상자원의 대부분은 훈련소만 본 상태기 때문에 부대 복무 환경같은 설명은 잘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가고 싶어하는 경우의 상당수는 그냥 마초스러운 분위기에 끌리는 것이다.[18] 다만 어디까지나 전방 메이커 사단급 부대와 비교했을 경우이다. 택티칼포럼이나 비밀 등의 밀리터리 사이트에 올라오는 한국군 이양 전 JSA 경비대대 근무 예비역들의 경험담을 접하면 대체적으로 "옛날엔 보다 실전적이었는데, 한국군 이양 후 다소 비 실전적이고 경직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갔다"며 예비역중 한 분의 말을 인용하자면 'K11 같은 거 주고 디지털 전투복 입혀주는 것보다 시급한' 부대의 전술적, 전투적이던 분위기와 이양 전 전수되어오다 이제는 맥이 끊긴 각종 소부대 전투기술들 추억하며 한탄하는 분위기라고 한다.[19] 그래도 문산읍은 양구에 비해 바가지가 많이 없는 편이다.[20]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다! 도끼만행 이전에도 JSA 내에는 군사분계선이 엄연히 존재하였으며 군사분계선 표지판도 세워져 있었다.[21] 회의장 구역에는 그 유명한 콘크리트 경계석으로, 그밖의 지역에는 일정 간격으로 하얀색 말뚝을 박았다.[22] 현재에도 정전위나 중감위 회의장을 비롯하여 분계선 상에 세워진 가건물 내에서는 군사분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물론 상대 쪽 출입문으로는 절대 나갈 수 없다.[23] 조선시대엔 판문점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은 이 예언이 수록된 격암유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설이 있다.[24] 해외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북한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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