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5

Park Yuha -윤석민 교수 [朝鮮칼럼]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의 공로

Park Yuha - 짧은 여행으로부터의 귀가길에 여러사람들이 서울대교수의 조선일보 칼럼을 기뻐하면서 보내 주었다.... | Facebook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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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으로부터의 귀가길에 여러사람들이 서울대교수의 조선일보 칼럼을 기뻐하면서 보내 주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언젠가 이철우 교수가 “류석춘을 포함한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서술, 그리고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박유하의 언설을 격렬히 비판한다“며 혐오를 드러내면서도 “그러나 그 이상의 강도로 이들의 말할 자유,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려 한다.“고 했던, 사뭇 관대한 태도를 취해 보였던 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글.
한마디로 하자면 멋대로 읽고, 그러나 그 방종을 용서하겠다는 오만한 글이었다.
부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 축소비평이고 ’강간‘임을 강조하기 위해 쓴 부분을 ’매춘’에 중점을 두어 읽은, 지원단체 비난하면서도 비난내용은 다르지 않아 결과적으로 독자들 오해를 다시 키울 글(사실 관계 틀린 곳도 많고 인용도 거칠고 자의적이다).
수없이 말해 왔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아무말’ 책이 아니다. ‘아무말 책이지만 버텼으니 상줄 만 하다’는 평가를 기뻐해야 하는 걸까. 같은 책에 상을 수여한 내 모교나 마이니치신문사는 ‘아무말’책에 상을 수여했다는 건가.
심지어 나를 미끼로 지원단체에 대한 ”격렬한“ 혐오까지 드러내고 있다.
나는 지원단체를 비판했지만 혐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고발하고 누군가는 ‘정대협에 대한 헤이트스피치를 내가 시작한 것으로 몰았지만(그랬다면 2020년 이후 최종재판종료까지 5년이나 더 걸렸겠는가. 정대협에 대한 혐오를 유발한 건 내가 아니라 윤미향사태다), 아무튼 그렇다.
검열과 삭제로 못보게 하는 것도 나쁘지만 자기식으로 왜곡해서 드러내 혐오를 부르는 방식도 나쁜 건 마찬가지다.
물론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파시스트보다는 자유주의자가 다소 낫다 해야겠지만, 자유주의자의 외피 아래 있는 “내 지도학생이었다면 삭제하라 했을거“라는 식의 ”오빠가 허락한“ 말만 하라는 가부장적 심리가 파시스트의 심리와 크게 먼 건 아니다.
검열과 억압도 일제시대 잔재지만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보호하고 상도 주겠다는 (피지배자에 대한)온정주의도 일제 잔재인 건 마찬가지다.
갈 길이 너무나 멀다.
(물론 기뻐하며 보내 준 분들의 마음엔 깊이 감사한다.)
**조선일보가 만들었을 도표에도 왜곡이 많다. 내가 한 말이 아닌 인용조차 내가 한 말로 나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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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朝鮮칼럼]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의 공로

타당성·완성도와 별개로
시민운동권이 만든 성역에
정면으로 맞선 학술적 성과

이분법적 선악론 넘어
무겁게 닫힌 역사의 문을
박 교수가 힘겹게 열었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입력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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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6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가 본인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취재진에게 심경을 밝히고 있다. /남강호 기자

지난 9월 말 연휴를 앞두고 논란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다시 화제가 됐다. 국내 출판계 대표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에서 그 책의 저자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에게 특별공로상을 주려다 비난 여론이 일자 취소한 일 때문이다.

2014년 나눔의집 고문 변호사 등이 책의 초판본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 아홉 분의 이름으로 명예훼손 및 판매 금지 가처분 소송을 걸며 허위라고 지적한 109곳, 이후 원고 측이 수정 신청한 53곳, 법원의 가처분 인용 결정에 따라 34곳이 삭제된 상태로 출판된 2판본 자료를 구했다. 그리고 긴 연휴를 이용해 그 내용을 살폈다. 2025년 7월 대법원의 최종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읽는 게 내키지 않았으나 무위로 돌아간 출협의 공로상 해프닝이 기어이 필자를 험한 일로 떠밀었다.

예상대로 책의 내용은 불편했다. 그 대목들이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을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으로만 이해했지만, ‘위안’이란 기본적으로는 그 두 요소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은 (중략)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120쪽 19줄) “일본 군인과 연애도 하고 위안을 애국하는 일로 생각하기도 했던 위안부들의 기억이 은폐된 이유는 그녀들이 언제까지고 일본에 대해 한국이 피해 민족임을 증명해주는 이로 존재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190쪽 5줄)


소녀상을 두고도 박유하 교수는 “협력의 기억을 거세하고 하나의 이미지, 저항하고 투쟁하는 이미지만을 표현”(207쪽 10줄)했다고 비판한다. 그 정결한 좌상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필자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답답함이 가슴을 눌렀다.

종합적으로 필자는 ‘제국의 위안부’가 담아낸 역사적 사실들, 인터뷰들, 그리고 그 해석의 타당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책 전반의 내용, 특히 논란이 되었던 초판 삭제 내용들은, 저자가 왜 일본 국가의 책임을 부인하고 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비판을 받는지를 보여주었다. 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더욱 잘 이해시켜 주는지도 의문스러웠다. 일본군과 위안부의 동지적 관계, 심지어 사랑이 싹튼 사례에 대한 서술에서는 문제의 본질인 거시적 맥락을 간과한 채 사실보다 감성을 앞세운 해석의 과잉이 느껴졌다. 지도 학생 논문이라면 그 부분들을 삭제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책을 “학문적 타당성이 결여된 저작물이 노이즈 마케팅으로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절하하는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신화를 구축해온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박유하 교수의 책은 그 타당성 및 완성도와는 별개로, 권력화된 시민 운동권이 성역을 만들어온 위안부 도그마에 정면으로 맞선 학술적 성과물이었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모든 이에게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다층적 현상이다. 합의된 해석이나 금기시되는 주제들에 대한 새롭고, 도전적이며, 심지어 상식을 벗어난 주장들을 통해, 우리의 인식은 확대되고 정밀해지며 실체적 진실에 접근한다. 학문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22조 1항)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 누려온 자유는 제한적이었다. 권위주의 시기에 그 자유를 제약한 일차적 수단이 국가 보안이었다면, 지금은 명예훼손이 주요 수단이 되고 있다.


학자들이 누리는 자유만큼이나 연구 대상이 되는 이들의 명예가 소중함은 물론이다. 문제는, 진영화된 강성 시민단체들이 시대정신·정의·헌신의 명분에다 2차 가해 논리까지 더해, 과거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서의 현재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이분법적 선악론을 벗어난 관점들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명예훼손을 오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역사의 명암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공감의 확대가 아닌 흑백논리식 편 가르기와 반감의 심화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위안부, 4·3, 여순, 광주, 세월호, 이태원 등 그 리스트는 길게 이어진다. 현시점에서 12·3 비상계엄을 둘러싸고 같은 일이 반복되려 하고 있다.

명예는 부당하게 얻어지고 유지되는 평판이 아니라, 개인과 타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평가이다(박용상, ‘신명예훼손법’). 입막음이 아닌 열린 소통이 출발점인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 심부에 위치한 갈등과 분열의 뇌관을 들어내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닫힌 문을 박유하 교수가 힘겹게 열었다. 출협이 그 공로를 기리려 한 것은 온당한 일이었다.
그래픽=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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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https://www.chosun.com/.../11/13/7SBESC4HDRDLBLQNEPTM2ZX4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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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의 공로
[朝鮮칼럼]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의 공로


Park Yuha

한국에서 나를 처음 비판한 이재승 교수 글도 ‘감성으로 쓴 글‘ 이라는 식의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남성은 이성, 여성은 감성/감정의 동물‘이라는 인식은 오랫동안 여성차별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이 ‘이성=문명/감성=야만‘ 도식을 정당화하면서
제국주의도 떠받쳤다.


Do-Eon Kim

저도 아침에 윤석민 교수 칼럼을 읽고 동의가 안 되고 불편해서 고갤 갸웃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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