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리콴유 李光耀 Lee Kuan Yew | |
리콴유(1975년) | |
| 싱가포르의 제1대 총리 | |
|---|---|
| 임기 | 1959년 6월 5일~1990년 11월 28일 |
| 대통령 | 유소프 빈 이샥 벤저민 헨리 시어즈 데반 나이르 위킴위 |
| 후임 | 고촉통(제2대)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923년 9월 16일 |
| 출생지 | 싱가포르 |
| 사망일 | 2015년 3월 23일(91세) |
| 사망지 | 싱가포르 |
| 국적 | 싱가포르 |
| 정당 | 인민행동당 |
| 배우자 | 콰걱추(柯玉芝, 1920-2010) |
| 자녀 | 리셴룽, 리웨이링, 리셴양 |
| 종교 | 불교 → 유교 |
리콴유(영어: Lee Kuan Yew, 1923년 9월 16일~2015년 3월 23일)는 싱가포르의 정치인이자 초대 총리와 인민행동당의 총재(1959년부터 1990년까지)로 재직했다.
정치 생활 초기(1951~1959)
인민행동당 이전
리콴유의 정치인으로서 첫 경험은 친영국적 당인 진보당에서 후보로 나선 그의 상사 존 레이콕을 위해 선거인으로 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이 대중, 특히 중국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리콴유는 결국 당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음을 직감하였다. 이것은 렌델 위원회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 확대했을 때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함으로 인해 더 명확해졌다.(1953년) 결국 무역 노조와 학생 조합에 법률적 조언을 해주면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며 그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중에 그의 인민행동당은 이 역사적인 연결 고리를 파업에서의 협상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인민행동당의 창당
1954년 11월 21일 리콴유는 "맥주 마시는 부르주아들" 이라고 그가 지칭하던 영어를 배운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을 결성하였다. 이 당은 친공산주의적 무역 노조와 정략적인 연계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친공산주의자들의 대량의 지지가 필요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리기 위한 지도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콴유는 이 정략적 연합을 편리를 위한 결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두 계층의 공동의 목적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영국 식민 지배를 끝내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는데 있었다. 창당식은 빅토리아 기념홀에서 1500명의 지지자와 무역 노조들로 가득찬 채로 이뤄졌다. 리콴유는 이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이 직책을 1957년의 잠시간을 제외하고는 1992년까지 유지하게 된다. 창당식에는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의 툰쿠 압둘 라만과 말레이시아중국인연합(MCA)의 탄청록이 신당에 신뢰를 주기 위해 초청되었다.
야당 활동
리콴유는 1955년 선거에서 탄종 파가르 선거구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야당의 당수로서 데이비드 솔 마셜의 노동 전선 연립 정부와 대항한 그는 싱가포르의 미래 정세에 대한 런던에서 열린 두 차례 회의에도 인민행동당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첫 번째 회의는 마셜이 주최하였고 두 번째는 마셜의 후임자인 림유혹이 개최했는데, 이 시기에 리콴유는 이 두 라이벌들과 정치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친공산주의적 측근들은 간혹 폭력적이기도 한 대중 집회에 활발히 참여하였기에 적절한 거리를 둔 반면, 여당의 연립 정부는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종종 그들을 무능력하다고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7년 친공산주의자들이 가짜 당원들을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자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에서의 위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림유혹은 친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구속하도록 명령하였고, 리콴유는 사무총장으로 복직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내 위협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리콴유는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이자 그가 플렌이라고 불렀던 퐁총픽(또는 팡추앙피)과 처음으로 비밀리에 만나게 된다.
국무 총리, 독립 이전(1959~1965)
자치 행정부 - (1959~1963)
1959년 7월 1일 열린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51개 의석 중 43개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싱가포르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국내 문제에 관한 자치권을 갖게 되었으며 리콴유는 1959년 7월 3일에 수석장관(Chief Minister)이었던 림유혹을 대신해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 총리가 되었다. 국무 총리가 되기 전에 리콴유는 림유혹 정부 시절 구속되었던 림친시옹과 데반 나이르의 석방을 요청했다.
리콴유는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이후 교육, 주거, 실업 등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리콴유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주택 건설을 위한 주거 및 개발 위원회(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HDB)를 세웠다.
1961년 7월 21에는 13명의 인민행동당 의원이 당론을 따르지 않으면서 투표를 거부한 내각 불신임 투표가 있었다. 6명의 교역 조합 출신 좌파 지도자들과 함께 이들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당인 바리산 소시알리스를 창당한다. 바리산 소시알리스는 창당시기부터 인민행동당에 버금가는 지지를 얻었다. 인민행동당의 51개 지부중 35개의 지부와 23명의 간사 중 19명이 바리산 소시알리스로 자리를 옮겼고, 이 사건은 1961년의 분당 사태로 알려져있다. 의회에서의 인민행동당은 이제 26석만을 유지해 25석을 유지한 야당에 간신히 다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1년에 인민행동당은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의 패배와 당원들의 탈당, 좌파의 노동운동에 직면했다. 리콴유의 정부는 1962년의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과 관련한 국민투표 전까지 거의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1962년의 투표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임을 시험하는 자리였다.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 및 분리(1963~1965)
말라야 연방의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이 1961년에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 간의 연방을 제안했을 때,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 합병하고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끝내기 위한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리콴유는 70%가 투표에 찬성한 1962년 9월 1일에 열린 국민 투표 결과를 이용해 국민들이 자신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했다.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연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말레이연합 국가조직(UMNO)는 싱가포르에 있는 다수의 화교가 말레이시아에 통합되어 인민행동당이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리콴유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에 반대했고, 이를 주장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연대회의의 "말레이시아 사람의 말레이시아!"라는 유명한 구호를 사용했다. 말레이계는 말레이시아의 토착 민족이고, 말레이시아는 다양한 민족이 통합된 나라를 뜻한다.
1964년의 싱가포르 인종분쟁은 무하마드의 생일(1964년 7월 21일)에 칼랑 가스회사 부근에서 일어났다. 이 분쟁에서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23명이 죽었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그중 중국인이 무슬림 행렬에 병을 던졌다는 설도 있고, 말레이인이 이 분쟁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1964년 9월에는 더 많은 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차량과 상점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툰쿠 압둘 라만과 리콴유는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대중 앞에 나서야 했다.
툰쿠는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쫓아내며 "중앙 정부에 어떤 존경심도 보이지 않은 싱가포르주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리콴유는 연방에 계속 머물기 위한 타협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리콴유는 196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와의 분리 뒤 관계를 다룬 분리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뒤에도 상호 국방과 교역 부문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합병의 실패는 합병만이 싱가포르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던 리콴유에게 매우 중대한 위기를 가져왔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기자회견에서 리콴유는 분리를 발표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기자회견은 리콴유의 지지자들이 리콴유가 말레이시아의 분리를 선동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사용되곤 했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의회는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를 한 주로 인정하던 관계를 끊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싱가포르는 천연 자원과 수자원이 부족해 이런 자원의 공급을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매우 빈약한 국방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싱가포르 정부와 리콴유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말레이시아와의 관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리콴유는 마하티르 빈 모하맛와의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리콴유는 마하티르가 차기 말레이시아 총리가 될 것으로 알게 된 뒤, 1978년에 마하티르를 싱가포르로 초청했다. 마하티르의 싱가포르 방문을 통해 리콴유와 마하티르간의 개인적 및 외교적 관계가 개선되었다. 마하티르는 리콴유가 민주행동당의 화교 지도자와의 친교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마하티르는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에 관한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1988년 6월엔, 마하티르와 함께, 쿠알라룸푸르에서 조호르 강에 링구이댐을 짓는 협정을 맺었다.
서거
2015년 2월 5일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인공호흡기에 약 1달 동안 의존해오다 당해 3월 23일 오전 3시 18분 향년 91세에 서거하였다. 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리콴유의 장례식은 2015년 3월 29일에 국장으로,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엄수되었다.
논란과 의혹
권위주의적 통치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20세기 중반부터 싱가포르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1965년부터 1981년까지의 싱가포르는 야당의 존재를 허용했음에도 싱가포르 의회의 모든 의석을 인민행동당 한 당이 독차지하여 이 시기의 싱가포르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나 다를 바 없었다. 1981년에 있던 보궐선거에서야 야당이 한 선거구에서 승리해 의석을 차지했고 그리고 1984년에 있던 총선에서야 싱가포르의 야당은 79석의 의석 중 무려 2석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의회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싱가포르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렇다 할 부정선거 의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야당에 대한 우회적인 탄압은 상당히 자주 이뤄졌기에 야당이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을 비판하거나 위협하기 어려웠다. 덤으로 리콴유는 이후에도 타 정당이 당선된 국회의원 지역구에는 예산을 깎기까지 했다.
인도의 언론인 T.J.S 조지가 1973년에 저술한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 리콴유의 인권 탄압은 '당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아시아의 나라들 중 싱가포르만큼 분노를 자아낸 데는 없다'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단의 내용들은 이 책에 소개된 리콴유 집권 초기에 있었던 인권탄압 목록들이다.
당시 싱가포르의 정치범들은 가족들과 변호사와의 면회, 독서를 사실상 금지당한 채 독방에 감금당하거나 고문까지 당했고, 심지어 의사가 이들을 치료하는 것도 허용되지 못했으며, 석방된 후에도 경찰의 감시 하에 직업 활동과 외출에도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해외 출국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에 엠네스티가 파견한 영국 국적의 여성 조사관 에스트렐라 카레라스(Estrella Carreras)는 출국 후에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재입국이 금지되는 등 리콴유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외국인들은 언론인, 교수 가릴 것 없이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그리고 리콴유는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치안유지법(Internal Security Act)과 사회안전법(Preservation of Public Security Ordinance)을 오히려 식민지 시절보다도 강화시켜, 정적들과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영장 없이 임의로 체포하고 재판 없이 무기한 감금했으며, 이러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68년부터는 아예 노동자의 파업을 법적으로 금지했으며, 1969년 4월 중순부터 12월까지는 리콴유가 직접 지시를 내려 싱가포르의 개정된 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1970년에 리콴유는 교수들 앞에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외국인 교수들에 대해 '철새들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며 비난하고 '강의 내용이 싱가포르의 국정 방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정치학과, 사회학과, 철학과를 폐쇄하겠다'는 위협까지 가했다. 리콴유에게 반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은 대학교에서 쫓겨났다.
덤으로 사회적으로도 엄격한 통제가 가해져 '소위 히피족이 싱가포르인의 정신을 부패시키고 싱가포르 사회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명목으로 남성의 장발을 금지시키고 이를 외국인 관광객에게까지 적용해 머리가 윗옷 칼라를 넘으면 싱가포르 입국을 제한하거나 비행기가 싱가포르를 경유하기만 할 뿐이라도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했으며, 만약 이들이 장발을 그대로 놔둔 채 싱가포르를 떠나면 몇 달 동안 재입국을 못하게 했다. 게다가 사기업에서조차 장발족에 대한 차별 대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여교사들마저 어깨 밑으로 내려가는 머리와 파마가 금지되었고, 문화부장관은 정부의 두발 정책에 반대하는 대학생에 대한 징집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적어도 1973년부터는 시위를 막기 위해 밖에서 10인 이상이 모이는 것까지 금지시켰으며, 오늘날에도 싱가포르에서는 도심 공원 한 곳에서만 시위가 가능하다. 이 곳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은 시위가 허용된 것이 2000년 9월이었고, 자유로운 시위는 무려 2008년 9월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리콴유가 집권한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은 약 4.69였다. 참고로 전두환 시기 대한민국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약 4.86이었으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기 필리핀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리콴유보다도 높은 약 4.64였다.
현재 싱가포르에서 이권이 따르는 국영기업이나 관변단체의 수장, 또는 정부 요직들은 상당부분 리콴유 일가나 그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으로 싱가포르 여러 대기업의 지주회사이자 전 세계 여러곳에 투자를 하고 있는 국영기업 '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그의 며느리이자 리셴룽 총리의 부인인 호칭(何晶) 여사다. 물론 이들은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업들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도자의 친인척이 국가 공기업 사장으로 있는 것이 적절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언론탄압과 인터넷 검열
정부가 무상으로 보급하는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리콴유 일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과 댓글이 올라오면 바로 조사나온다.
.S.J. 조지가 쓴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 리콴유 시기에 싱가포르의 라디오, TV 뉴스는 교육 계획을 다룬 별개의 코너가 있던 것 외에는 항상 정부의 발표를 인용한 것만 방송할 수 있었으며, 싱가포르의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은 매년 정부로부터 받는 면허를 갱신해야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치안판사에게는 신문사에 직접 들어가 조사를 할 수 있다는 특별 권한이 주어졌다. 심지어 리콴유의 출판 담당 비서가 편집자들에게 직접 어떤 책을 출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여부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법에 의하면 검열을 받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은 '초대장이나 명함, 계산서 서두나 편지지 서두'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리콴유는 지방 신문 기자들이 자신의 공개 연설을 취재할 수 없게 하는 등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까지 통제를 가했으며, 외신 특파원들은 리콴유에게 호의적인 성향의 기자들만 선발되어 싱가포르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심지어 한 뉴욕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 소속 미국인 특파원은 원래 리콴유 정권에 호의적이었음에도 상술한 영국인 엠네스티 조사관 추방 문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거주지가 도청되고 언론인들의 모임에서 쫓겨난 후 싱가포르에서 추방되었다.
태형
리콴유는 태형의 효과에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자서전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그는 1930년대 래플스 학교에서 그의 끊임없는 지각에 학생주임 D. W. 맥레오드씨에게서 매를 맞았던 것을 묘사했다. "나는 의자에 엎드려 바지를 입은 채로 세게 세대를 맞았다. 나는 그가 살살 때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1]
리콴유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사법적 태형을 물려받았지만, 적용되는 범위를 훨씬 더 넓혔다. 영국에서는 태형이 개인적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에 한해 처벌을 위해 일 년에 몇 번의 태형을 선고했다.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 정부는 더 많은 종류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선고할 수 있게 했다.[2] 1993년에는 42개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의무화했고, 42개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적용했다.[3] 법원에서 태형이 자주 선고되는 범죄는 약물 중독이나 불법 이민 등이 있다. 1987년에는 602번의 태형이 선고되었지만, 1993년에는 3,244번으로 증가했고,[4] 2007년에는 6,404번이나 선고되었다.[5]
1994년에 미국 청소년인 마이클 페이가 기물 파괴법 위반 혐의로 태형을 선고받자, 이 사법적 태형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학교 신체형(남학생에게만 해당됨)은 역시 영국에서 물려받은 것이지만, 1957년에 제정된 법에 의해 반항하는 학생들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여전히 많이 쓰인다.[6]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군에도 태형을 도입했고, 싱가포르는 군 규율을 위해 신체형을 사용하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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リー・クアンユー
| リー・クアンユー Lee Kuan Yew 李 光耀 | |
|---|---|
1975年 | |
| 生年月日 | 1923年9月16日 |
| 出生地 | |
| 没年月日 | 2015年3月23日(91歳没) |
| 死没地 | |
| 出身校 | ケンブリッジ大学フィッツウィリアム・カレッジ ロンドン・スクール・オブ・エコノミクス |
| 前職 | 弁護士 |
| 所属政党 | 人民行動党 |
| 称号 | 旭日大綬章(1967年) 桐花大綬章(2015年) |
| 配偶者 | クワ・ゲオ・チュー(1950年 - 2010年) |
| 親族 | リー・シェンロン リー・ウェイリン リー・シェンヤン |
| 在任期間 | 2004年8月12日 - 2011年5月21日 |
| 首相 | リー・シェンロン |
| 在任期間 | 1990年11月28日 - 2004年8月12日 |
| 首相 | ゴー・チョクトン |
| 在任期間 | 1959年6月3日 - 1990年11月28日 |
| 大統領 | ユソフ・ビン・イサーク ベンジャミン・ヘンリー・シアーズ チェンガラ・ヴェーティル・デヴァン・ナイール ウィー・キムウィー |
| 在任期間 | 1954年11月21日 - 1992年11月1日 |
| 後任者 | ゴー・チョクトン |
| 選挙区 | タンジョン・パガーGRC タンジョン・パガーSMC(1955年 - 1991年) |
| 在任期間 | 1955年4月2日 - |
| 得票差 | 無投票当選 |
リー・クアンユー(英語: Lee Kuan Yew, 漢字表記、中国語: 李 光耀、日本語読み:り こうよう、 1923年9月16日(旧暦8月6日) - 2015年3月23日)は、シンガポールの政治家、初代首相。
家族
- 母:チュア・ジム・ネオ(蔡認娘) - 有名シェフ
- 妻:クワ・ゲオ・チュー(柯玉芝) - Lee & Lee法律事務所元共同運営者(1920年12月21日 - 2010年10月2日)
- 長男:リー・シェンロン(李顕龍) - 前陸軍准将、3代目首相
- 妻:ホー・チン - テマセク・ホールディングス元社長
- 次男:リー・シェンヤン(李顕揚)- シングテル元CEO
- 妻:Lim Suet Fern(林雪芬)
- 長女:リー・ウェイリン (Lee Wei Ling) (李瑋玲) - 国立脳神経科学院を運営
自叙伝によると、客家系華人の4世にあたるという。曽祖父のリー・ボクウェン(李沐文)は、同治元年(1862年)に清の広東省からイギリスの海峡植民地であったシンガポールに移民した。本人は自分のことを「実用主義者」「マラヤ人」と称している。不可知論者[1]。
英語を話す家系に生まれたクアンユーは、幼くして英語教育を受けた。祖父のリー・フンロン(李雲龍)からは、クアンユー(光耀)の華名とともに、Harryという英語名も授けられ、家族や親しい友人からは、現在でも“Harry”と呼ばれ親しまれている。このような華人家族は当時のシンガポールでは一握りのエリートで「海峡華人」と呼ばれる。
彼は幼少期には中国語ができず、中国人の友人はほとんどいなかった。 彼が一緒に遊んでいたのはマレー人で、福建語が入り交じったマレー語で話していた。
妻のクワ・ゲオ・チューとは1950年9月30日に結婚し、2男1女をもうけた。「私より優れた頭脳を持つのは妻だけだ」と冗談交じりに発言している。
2人の息子はいずれも国内で高官の地位に就いた経験がある。陸軍准将であった長男のリー・シェンロンは、2004年より首相兼財務大臣の地位に就き(財務大臣は2007年に兼任を解く)、シンガポール政府投資公社の副議長も務めている(クアンユーが議長)。次男のリー・シェンヤンは、国内最大の通信企業であるシングテルのCEOを務めていた。現在は退任している。シンガポール航空やDBS銀行のような政府関連企業の持株会社であるテマセク・ホールディングスが、現在シングテルの株の56%を保有しており、そのテマセク・ホールディングスは、長男シェンロンの妻であるホー・チンが社長を務めていた。国立脳神経科学院を運営している長女ウェイリンは、独身を貫いている。妻のクワ・ゲオ・チューは、以前Lee & Lee法律事務所を夫と共同運営しており、クアンユーの弟であるデニス、フレディ、スアンユーの3人は、同事務所のパートナーだった。他にもモニカという妹がいる。
このような同族支配体制である現状に、クアンユー自身は縁戚者に対する持続的な特恵は存在せず、おのおのの能力に見合った地位に置いているのだと主張している。
青年時代
テロク・クラウ小学校、ラッフルズ学院を経て、ラッフルズ大学で学んでいたが、太平洋戦争中の1942年に日本軍によるシンガポール占領とイギリス植民地政府の崩壊に伴い大学が閉鎖され、学業を中断せざるを得なくなった。その間はタピオカを利用して作った“スティックファス”という接着剤を闇市で売って生計を立てていた。
また、リーによれば、シンガポール華僑粛清事件の際、自身も集合場所に集められ粛清に巻き込まれかけたが、禁区内の友人宅で1日半ほど待機していたところ、審査済とされ難を逃れたという。
さらに、日本語と中国語の学習を始め、翌1943年から1944年までの間、日本側と協働して、昭南特別市の報道部において、連合国の通信を盗聴した内容を翻訳する業務に従事した。
戦後の1945年にイギリスへ留学。ケンブリッジ大学のフィッツウィリアム・カレッジで法律学を専攻し(後に名誉校友となる)、1949年に首席で卒業した後は、短期間ではあったがロンドン・スクール・オブ・エコノミクスにも通い、同年に帰国した後は弁護士資格を取得し、“Laycock and Ong”という法律事務所に勤務した。
政治活動
初期
勤めていた法律事務所の上司ジョン・レイコックが親英政党・進歩党の候補者として立法審議会選挙に立候補した。この時に運動員を務めたことからの政治的経歴が始まる。しかし党が大衆、特に華人系の労働者階級の支持を得られず、リーは党に将来性がないことを直感した。1953年にレンデル新憲法が選挙権をシンガポールで生まれた全ての人々に付与することを決め、中国語話者の有権者が著しく増加した際に、この傾向は特に明確なものとなった。
労働組合や学生自治会の法律顧問として雇われていた際、華人系の住民と繋がりをもつようになり、労働組合の運動指導者にまでなり、これがリーにとって大きな転機となった(後にリーが創設する人民行動党は、この歴史的な絆を、ストライキの際の交渉手段として利用することとなる)。1950年には「イギリスを追い出し独立を達成できるのはマラヤ共産党だけである」と演説している。共産主義には疑問を感じていたが、マラヤ共産党の抗日・反英運動への貢献は認めている。
人民行動党の創設
1954年11月21日、“ビールを飲むブルジョアたち”と称した英語教育を受けた中産階級グループと共に人民行動党を創設した。党の創設は容共的な労働組合との政略的な連携を通じたものだった。これは英語教育を受けた層は容共派からの多くの支持が必要だった一方で、マラヤ共産党が違法とされており、共産主義者たちがカモフラージュするための非共産主義政党を欲していたことに起因する。この連携をリーは“政略結婚”と称した。両派の共通の目的は、自治に賛成する世論を喚起し、イギリスによる植民地支配に終止符を打つことだった。
結党式は、ビクトリア記念ホールで開催され、会場は1500人にも及ぶ支持者と労働組合員たちで埋め尽くされた。リーは党書記長 (Secretary-General) となり、後述する1957年の一時期を除いて、1992年までこの地位を保持する。結党式には、マレー人及びムスリムが支持層の統一マレー国民組織 (UMNO) のトゥンク・アブドゥル・ラーマンや、華人系の住民を代表するマレーシア華人協会のタン・チェンロクが、新党に信頼を与えるためのゲストとして招請された。
当時のムスリムと共産主義者との蜜月は、リーが回顧録で後に制定するシンガポールの国旗の三日月は国内のイスラム教徒に配慮し、五つの星は国内の共産主義者に配慮して中華人民共和国の五星紅旗をモデルにしたと語っていることにもあらわれている[2]。
野党時代
1955年の初当選以降は、野党指導者としてデービッド・マーシャル率いる与党の労働戦線による連立政権に対抗し、ロンドンでマーシャルと彼の後継者であるリム・ユーホクによって二度にわたって開催されたシンガポールの未来に関する会議にも人民行動党代表として参加した。
一方で、リーの容共的な側近たちは、しばしば過激な行動に出る集会に参加したことから、リーは彼らから距離を置くようになったが、その一方で事あるごとに政権与党を無能であると批判し続け、この頃からリーは党内外の政敵たちと戦わざるを得ないようになった。
1957年に容共派が偽の党員たちを利用して党権を掌握すると、リーは一時的に書記長の地位を追われるが、リム・ユーホクが共産主義者たちの一斉検挙を命じたため、リーは書記長に復帰した。
リーが次の選挙に備える間、党内の共産主義による脅威は一時的に取り除かれたが、これと同時期に、リーは共産主義陣営のリーダーであるフォン・チョンピクと初めて密会の席を設けた。
自治政府時代
1959年6月1日の総選挙で、人民行動党は51議席中43議席を獲得した。シンガポールは、国防と外交を除いた国内問題に関する自治権を得るようになり、6月3日にリーは首席長官だったリム・ユーホクに代わって、シンガポールの初代首相に就任した。首相に就任する前には、リム・ユーホク政権下で逮捕されたリム・リンシオンとデヴァン・ナイルの釈放を要求して、実現させている。
リーは教育や住居、失業などさまざまな問題の解決に取り組み、住宅問題に関しては「住居及び開発委員会 (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HDB)」を設立した。
マラヤ連邦の首相であるラーマンが、1961年にマラヤ連邦とシンガポール、サバ州、サラワク州を含む連邦の形成を提案した後、リーはマラヤ連邦との合併を実現するべく、イギリスの植民地支配を終えるための運動を開始した。そのために、1962年9月1日に実施された国民投票の結果を利用し、そこでは、投票者の70%がリーの提案を支持したという結果が出されており、住民の大多数がイギリスからの完全独立を望んでいるということを如実に表していた。
リーはこれらの運動の間に、合併に対して強硬に反対し一説では破壊活動にも関与していたとされる容共派のグループを壊滅に追い込んだ。
マレーシア時代
1963年9月16日、シンガポールは晴れてマレーシアの一部となったが、連邦は短命に終わる。UMNOによって支配されているマレーシア政府は、シンガポールの住民の大多数を占める華人系住民の包含と、マレーシアにおける人民行動党の政治参加に懸念を抱くようになった。リーは公然とブミプトラ政策の「マレー人などの土着民を優遇するマレーシア」に反対し、人民行動党のスローガンとして「マレーシア人のためのマレーシア」を主張した(当時シンガポール島の華人系住民もマレー人も含めて「マレーシア人」であり、マレー人のみへの優遇政策を批判した)。このことから双方の関係は悪化してしまい、UMNOの中にはリーの逮捕を主張する者もいた。
人種間の対立は激しさを増し、預言者ムハンマドの誕生日である1964年7月21日には、マレー人と華人系住民が激突し、23人が死亡、100人以上が負傷するといった事態も発生した[注釈 1]。同年9月にはさらに大規模な暴動が発生し、事態の収拾を図るため、双方のリーダーであるリーとラーマンが、そろって公の場に姿を見せることを強いられた。食糧を含む物資の輸送に著しい困難を来すようになり、物価が劇的に上昇し、国民の生活にさらなる困難を招いた。
事態の解決は絶望的な状況になり、首相であるラーマンは「中央政府への忠誠を示さなかった州政府とは、全ての関係を断ち切る」といった方針から、シンガポールをマレーシアから追放することを決定した。リーは連邦に留まろうと頑ななまでに打開策を考え続けたものの、失敗に終わった。1965年8月7日、リーはマレーシアからの分離に合意する文章に署名した。
このことは、マレーシアとの合併だけが、シンガポールが生き残るために重要と考えていたリーにとって、大きな打撃となった。そして、8月9日にシンガポールの独立を発表するテレビ中継の中で、
私にとって、今は苦渋の時です。生涯、私は二つの領域の合併と統一を信じてきました。私リー・クアンユーは、自由と正義の原則、多くの人々の福祉と幸福の探求、平等な社会を築くことに基づき、本日1965年8月9日に、シンガポールが永久に主権民主主義、ならびに独立国家であることを宣言いたします。— リー・クアンユー
と市民に語り掛けた上で、シンガポールの独立を宣言した。独立自体が、かつてのマレー独立運動の盟友であった、ラーマンからの追放宣言に等しかったこともあって、生放送の最中には、自制心を失って泣きだす場面もあった[注釈 2]。
首相時代
1965年8月9日に、マレーシア議会は、マレーシアの州としてのシンガポールとの関係を断ち切る決議を可決し、これにより、独立国家としてのシンガポールが成立した。天然資源の欠乏や水源の乏しさ、国防能力の脆弱さなど、リーとシンガポール政府が取り組ま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は山積していた。
自叙伝によると、リーはマレーシア時代に不眠症に悩まされ続け、シンガポールの独立直後は、病気で倒れたこともあった。
イギリスのハロルド・ウィルソン政権で、高等弁務官を務めていたジョン・ロブから、シンガポールの国家としての資質について懸念されたこともあったが、その際リーは「シンガポールについて心配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我々は、どんな苦境に置かれたとしても正気でいられる理性的な者たちです。我々は、政治というチェス盤の上でどんな行動を起こす際も、可能な結果を全て導き出します」と国家運営に関する自信を述べている。
多数の死傷者を出した六四天安門事件の中国共産党による鎮圧に対しては「100年の混乱から中国を救うなら私も20万人の学生を撃つ」と述べて肯定した[3]。中華人民共和国(中国)と非公式な関係だった1980年代から、中国の指導者鄧小平とは中華民国(台湾)の蔣経国総統との仲介役を務めるなど、個人的に親しく(1990年11月に中華人民共和国と国交正常化して、中華民国と国交断絶)、蘇州工業園区の設立で鄧小平の改革開放に協力し、2010年にはシンガポールでの鄧小平記念碑の除幕式を当時中国国家副主席の習近平とともに行っている[4]。
国防政策
建国当初のシンガポールは、共産主義者やインドネシア、シンガポールをマレーシアの支配下に置くことをもくろんでいたUMNO過激派など複数の脅威によって、立場が脆弱だった。国防面に関して、リーはスイスを手本として、非同盟と武装中立を国是とすることを宣言した。同時に、ゴー・ケンスイに国軍創設の準備を命じ、他国に指導や訓練、軍事施設の設立などでの援助を要請した。
1967年に、イギリスがシンガポールならびにマレーシアに駐留する軍隊を撤退もしくは削減するとの宣言をしたことに伴い、シンガポール政府は職業軍人以外にも必要兵力を満たすため、2年間の兵役を義務付ける国民役務 (National Service) の実施を発表した。1968年1月にフランス製の戦車であるAMX-13を若干数、1972年には最新式戦車を99台購入した。1969年には、イギリスからBAC 167 ストライクマスターを購入し、テンガ空軍基地でパイロット養成のための基礎訓練を実施した。
言語政策
リーは、ビジネスや行政、異なる人種間における共通語として、植民地時代の遺産である英語(イギリス英語)を使用し続けた。一方で華語(標準中国語=マンダリン)・マレー語・タミル語も公用語として公認した。公立学校における授業では、英語が使用されているが、同時に生徒自身の民族語を習得するための授業も行われている。しかし、この様な言語政策は、奇妙な英語である「シングリッシュ」が使われる素地にもなった。
1979年からは、華人系住民を対象とした華語普及運動(講華語運動、Speak Mandarin Campaign)を開始した。これにより放送では基本的に全ての番組で華語が使われるようになった。この結果、華語以外の中国語方言の伝承が妨げられ、現在では若い世代の大部分は方言を流暢に話すことができず、祖父母の世代の人間と会話をする際に若干の困難を伴うことがある。
家族計画
1960年代後期には、シンガポールの増大する人口が、発展中の経済に負担をかける可能性があるとして、「子供は2人まで」という家族計画を推奨するキャンペーンを展開し、子供のいる夫婦からは不妊手術が受けられるように主張する声が多く上がった。
ほかにも、大卒女性の出産を推奨するなどの優生思想に基づく選別的な教育制度を実践した。回顧録では「多民族社会では、ある民族の知能指数 (IQ) が他よりも低いというベルカーブ仮説は動かしがたい現実だったからです」と主張している。
マレーシアとの関係

マハティール・ビン・モハマドが次期マレーシア首相に就任することが確実となった1978年に、リーはデヴァン・ナイル大統領(当時)を通じて、マハティールにシンガポールを訪問するよう促した。以降も両者は親密な関係を築くようになり、ともに西洋の価値観と対決するアジア的価値観を唱えたことでもこの仲は注目された。マハティールは民主行動党の華人のリーダーとのつながりを絶つようリーに要求し、引き換えにマハティールはマレーシアにおけるシンガポール人の情勢に干渉しないと約束した。
1981年12月に、マハティールは国内を一つの時間帯に統一するため、マレー半島の標準時を変更し(マレーシア標準時)、リーもこれに同調した。マハティールとの関係は1982年以降非常に良いものとなった。
カンボジアとの関係
リーは、1978年のベトナムのカンボジア侵攻に反対した[5]。シンガポールは、1978年から1989年までベトナムの占領軍と戦っていたポル・ポト派に援助を提供し、ベトナムを非難する国際キャンペーンを組織した。リーは回顧録の中で、1982年に「シンガポールはAK-47、手榴弾、弾薬、通信機器をクメール・ルージュに提供した」と述べている[6][7]。
首相退任後
1990年11月、ゴー・チョクトンに首相の座を譲り、上級相となった。2004年8月、ゴーの上級相就任により、内閣顧問となった。人に勧められて警世のために回顧録を著し、『日本経済新聞』の「私の履歴書」に登場した(1999年1月分)。回顧録の日本語版は、日本経済新聞社から出ている。リー・クアンユー回顧録[上]では原爆投下については「広島と長崎に原子爆弾が落とされなければ、数十万人に上るマレーとシンガポールの民間人や、日本人でさえも数百万人が犠牲になっていただろう」と述べている。
2008年5月、フォーブスへの寄稿で「一部の国の指導者が中国の人権問題とチベット問題を理由に、北京オリンピックの開幕式をボイコットすると圧力をかけているが、何の根拠もないものだ」と欧米各国の行動に対して非難し、さらにリーは「チベットに抱く西側の人々のイメージは『ロマンチックな理想郷』であり、『ヒマラヤとダライ・ラマ』の地だ。しかし、中国にとってのチベットは『封建社会』であり、『後進地域』なのだ。中国はチベットを支配して以来、インド的な身分制度や農奴を廃止し、医療施設、学校、道路、鉄道、空港などを作り、少なくともチベットの生活水準を上げてきた」と語ることによって、西側メディアの中国批判を牽制した。
晩年

2011年5月14日には上級相のゴー・チョクトンと、二人同時に閣僚ポストから退く意向を表明した[8][9]。
(今回の選挙で)われわれは新しい政治的状況を知るに至り、そしてそれがどのように未来に影響を与えるか考慮しました。われわれはシンガポールの発展に貢献しました。複雑で難しい状況の中、シンガポールをさらに前進させる若者たちの時代がやって来たのです。首相や彼を支える若い世代のリーダーは、新鮮でクリーンな基盤を持つべきです。若い世代は、汚職がなくしかも実力主義(知的エリート階級の)の政府を持つこと、加えて高い生活水準を享受すること以外にも、自分自身に影響を及ぼす決定により多く携わりたいと願っています。重要な分岐点となる今回の選挙の後、 私たちは、内閣を去る決意をしました。そして、完璧に若返った内閣に、未来のシンガポールを形作りつつあるこの若い世代と前進してもらうことにしました。
しかし、この若い内閣たちは古い世代のためにも存在している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この古い世代は、シンガポールに貢献してきたのであり、十分に省み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リー・クアンユー、ゴー・チョクトン共同辞任声明 日本語訳[10]
肺炎のため2015年2月15日から入院。その後、感染症により容体が悪化したことが同年3月17日に報じられた[11][12]。
2015年3月23日、シンガポール首相府より死去したことが発表された[13]。91歳没。29日にはシンガポール国立大学で国葬が行われた[14]。
評価
1990年11月28日に自ら首相を辞任して以降も、同年にゴー・チョクトン政権の上級相、2004年にはリー・シェンロン政権の内閣顧問を務めるなど、晩年に至るまでにシンガポールにおいて絶大な影響力を保った。
第二次世界大戦に関する対日歴史認識についてリーは、日本軍がイギリスに勝ち、白人神話を打ち砕いたと評価する一方で、日本軍の占領政策は過酷で非人道的だったとし、占領されていた三年半、日本兵が人々を苦しめたり殴ったりするたびに、英国の保護下のほうがよかったと思うようになり、日本人に幻滅したと日本軍の占領政策を批判している[15][16]。
戦後のリーは、過去の占領期の記憶を直視しつつも、日本との協力関係を重視し、未来志向的な関係構築を訴えた。彼は、日本が「歴史の1ページをめくり、隣国との平和のためにその可能性を果たす」と述べ、アジアにおける日本の建設的役割を評価している[17]。また、シンガポール政府はJICAとの連携を通じて「21世紀の日・シンガポール・パートナーシップ」を推進し、産業人材育成や生産性向上などを通じて相互の信頼と協力を深めてきた[18]。こうした一連の姿勢は、過去への批判を単なる感情的反発に終わらせず、歴史を教訓として将来の友好と協調に生かそうとする、国家指導者としての成熟した対応として、シンガポール国内でも高く評価されている[19]。
言語
主な使用言語は英語とマレー語である。自伝によると華語、福建語は演説が可能であるほど話せるが、幼少期には中国語はほとんど話せず、福建語の入り混じったマレー語で会話していた(本人談[要出典])が、前述の通り、太平洋戦争中に学習した。この学習体験は、「Keeping My Mandarin Alive」として、一冊の本にまとめられている(日本語訳なし)。
それでも幼少期から使っていた英語などと比べると、中国語はそれほど得意ではなかったようである。鄧小平と初めて会談した時は、英語を使っている。
脚注
注釈
===
이광유
| 이광유 Lee Kuan Yew 이광광 | |
|---|---|
1975년 | |
| 생년월일 | 1923년 9월 16일 |
| 출생지 | |
| 몰년 월일 | 2015년 3월 23일 (91세) |
| 사망지 | |
| 출신 학교 | 캠브리지 대학 피츠윌리엄 칼리지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 |
| 전직 | 변호사 |
| 소속정당 | 인민행동당 |
| 칭호 | 욱일 대선 장 (1967년) 키리 하나 대선장 ( 2015년 ) |
| 배우자 | 콰 게오 추 (1950-2010) |
| 친족 | 리 셴 론리 웨이 린리 쉔양 |
| 재임기간 | 2004년 8월 12일 -- 2011년 5월 21일 |
| 총리 | 리 쉔롱 |
| 재임기간 | 1990년 11월 28일 -- 2004년 8월 12일 |
| 총리 | 고 청동 |
| 재임기간 | 1959년 6월 3일 -- 1990년 11월 28일 |
| 대통령 | 유소프 빈 이서크 벤자민 헨리 시어스 첸갈라 베틸 데반 나일 위 김위 |
| 재임기간 | 1954년 11월 21일 - 1992년 11월 1일 |
| 후임자 | 고 청동 |
| 선거구 | 탄종 파거 GRC 탄종 파거 SMC (1955년 - 1991년) |
| 재임기간 | 1955년 4월 2일 - |
| 득표 차이 | 무투표 당선 |
리 쿤유 ( 영어 : Lee Kuan Yew , 한자 표기, 중국어 :李光耀, 일본어 읽기:리 이렇게, 1923년 9월 16일 ( 음력 8월 6일 ) - 2015년 3월 23일 )은 싱가포르 정치가, 초대 총리 .
가족
- 어머니: 추아 짐 네오 (蔡認娘) - 유명 요리사
- 아내 : 콰 게오 츄 (고타마 시바) - Lee & Lee 법률 사무소 전 공동 운영자 ( 1920년 12월 21일 - 2010년 10월 2일 )
- 장남 : 리셴롱 (이현룡) - 전육군 준장 , 3대째 총리
- 차남 : 이선양 (이현양) - 신텔 전 CEO
- 아내: Lim Suet Fern
- 장녀 : 리 웨이린 ( Lee Wei Ling ) (이호현 ) - 국립뇌신경과학원 운영
자서전에 따르면, 객 가계 화인 의 4세에 해당한다고 한다. 소조부 이복문(李沐文)은 동치 원년( 1862년 )에 청나라 광동성 에서 영국 해협 식민지 였던 싱가포르로 이민했다. 본인은 자신을 「실용주의자」 「말라야인」이라고 칭하고 있다. 불가지론 자 [ 1 ] .
영어 를 말하는 가계에서 태어난 쿠안유는 어려서 영어 교육을 받았다. 할아버지 이훈룡(李雲龍)에서는 콴유(光耀)의 화명과 함께 Harry 라는 영어명도 주어지며,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는 현재도 ' Harry '라고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이런 화인 가족은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한 줌의 엘리트로 '해협 화인'이라고 불린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중국어를 할 수 없었고 중국인 친구는 거의 없었다. 그가 함께 놀고 있던 것은 말레이인 으로, 복건어가 섞인 말레이어 로 말하고 있었다.
아내인 콰 게오 츄 와는 1950년 9월 30일 에 결혼해 2남 1여자를 벌었다. "나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것은 아내뿐이다"라고 농담 교제에 발언하고 있다.
두 아들은 모두 국내에서 고관의 지위에 취한 경험이 있다. 육군 준장 이었던 장남의 리 셴론 은 2004년 부터 총리 겸 재무대신의 지위에 취임(재무대신은 2007년 에 겸임을 풀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공사 의 부의장도 맡고 있다(쿤유가 의장). 차남 이선양은 국내 최대의 통신기업인 신텔 의 CEO 를 맡고 있었다. 현재는 퇴임하고 있다. 싱가포르 항공 이나 DBS 은행 과 같은 정부 관련 기업의 지주회사 인 테마섹 홀딩스 가 현재 신텔 주식의 56%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테마섹 홀딩스는 장남 쉔론의 아내인 호칭이 사장을 맡고 있었다. 국립뇌신경과학원을 운영하는 장녀 웨이린은 독신을 관철하고 있다. 아내 콰 게오 츄는 이전에 이&리 법률 사무소를 남편과 공동 운영했으며, 콴유의 동생인 데니스, 프레디, 수안 유의 3명은 이 사무소의 파트너였다. 그 밖에도 모니카라는 여동생이 있다.
이 같은 동족 지배체제인 현황에 쿤유 자신은 연계자에 대한 지속적인 특혜는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능력에 맞는 지위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소년 시대
테러크 클라우 초등학교, 래플스 학원을 거쳐 래플스 대학 에서 배웠지만,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일본군 에 의한 싱가포르 점령 과 영국 식민지 정부의 붕괴에 따라 대학이 폐쇄되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타피오카 를 이용해 만든 '스틱퍼스'라는 접착제 를 어둠시 에서 팔아 생계를 세웠다.
또 이에 따르면 싱가포르 화교숙청 사건 때 자신도 집합장소에 모여 숙청에 휘말렸지만 금구 내 친구집에서 하루 반 정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심사 완료로 어려움을 피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어 와 중국어 학습을 시작해 다음 1943년 부터 1944년 까지 일본 측과 협동 하여 쇼난 특별시의 보도부에서 연합국 의 통신을 도청한 내용을 번역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전후의 1945년 에 영국에 유학 . 케임브리지 대학 의 피츠윌리엄 칼리지 에서 법률학 을 전공 하고 ( 나중에 명예교우 가 됨 ) ”라는 법률 사무소에 근무했다.
정치 활동
초기
근무하던 법률사무소 상사 존 레이콕이 친영정당·진보당 후보자로 입법심의회 선거에 입후보했다. 이때 운동원을 맡은 것부터 정치적 경력이 시작된다. 그러나 당이 대중, 특히 화인계 노동자계급 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리는 당에게 장래성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1953년 에 렌델 신헌법이 선거권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하기로 결정했고, 중국어 화자의 유권자가 현저하게 증가했을 때, 이 경향은 특히 명확해졌다.
노동조합 이나 학생자치회 의 법률 고문으로 고용되고 있었을 때, 화인계의 주민과 연결을 가지게 되어, 노동조합의 운동 지도자가 되어 이것이 리에 있어서 큰 전기가 되었다(후에 리가 창설하는 인민 행동당은, 이 역사적인 유대를, 파업시의 교섭 수단으로서 이용하게 된다. 1950년 에는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말라야 공산당뿐이다”라고 연설하고 있다. 공산주의 에는 의문을 느끼고 있었지만, 말라야 공산당 의 항일·반영 운동에의 공헌은 인정하고 있다.
인민행동당 창설
1954년 11월 21일 ‘ 맥주 를 마시는 부르주아들’이라 불리는 영어 교육을 받은 중산계급 그룹과 함께 인민 행동당 을 창설했다. 당의 창설은 용공 적인 노동조합과의 정략적인 연계를 통한 것이었다. 이는 영어교육을 받은 층은 용공파로부터의 많은 지지가 필요했지만, 말라야 공산당이 불법으로 여겨져 공산주의자들이 위장하기 위한 비공산주의 정당을 원했던 것에 기인한다. 이 연계를 리는 "정략결혼"이라고 칭했다. 양파의 공통 목적은 자치에 찬성하는 여론을 환기하고 영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에 종지부를 치는 것이었다.
결당식은 빅토리아 기념홀에서 개최되었으며, 회장은 1500명에 달하는 지지자와 노동조합원들로 가득 채워졌다. 리는 당 서기장 ( Secretary-General )이 되며, 후술하는 1957년 의 일시기를 제외하고, 1992년 까지 이 지위를 유지한다. 결당식에는 말레이인 과 무슬림이 지지층의 통일 말레이 국민조직 (UMNO)의 툰크 압둘 라만 과 화인계 주민을 대표하는 말레이시아 화인협회 의 탄 첸록이 신당에 신뢰를 주기 위한 게스트로 초청됐다.
당시 무슬림과 공산주의자와의 밀월은 리가 회고록에서 나중에 제정하는 싱가포르의 국기인 초승달은 국내 이슬람교도를 배려하고 다섯 별은 국내 공산주의자를 배려해 중화인민공화국 의 오성 홍기 를 모델 로 했다고 한다 .
야당 시대
1955년 첫 당첨 이후는 야당 지도자로 데이비드 마샬이 이끄는 여당의 노동전선 에 의한 연립정권에 맞서 런던 에서 마샬과 그의 후계자인 림 유호크 에 의해 두 번에 걸쳐 개최된 싱가포르의 미래에 관한 회의에도 인민행동당 대표로 참여했다.
한편 리의 용공적인 측근들은 종종 과격한 행동에 나서는 집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리는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그 한편으로 사건마다 정권여당을 무능하다고 비판을 계속해 이 무렵부터 리는 당내외의 정적들과 싸워야 할 수 없게 되었다.
1957년 용공파가 가짜 당원들을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자 리는 일시적으로 서기장의 지위를 쫓기는 하지만 림 유호크가 공산주의자들의 일제검거를 명령했기 때문에 리는 서기장으로 복귀했다.
이가 다음 선거에 대비하는 동안 당내 공산주의에 의한 위협은 일시적으로 없어졌지만 이와 같은 시기에 리는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인 홍정픽 과 처음으로 밀회 자리를 마련했다.
자치정부 시대
1959년 6월 1일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51석 중 43석을 차지했다. 싱가포르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국내 문제에 대한 자치권을 얻게 됐고, 6월 3일 리는 수석장관이었던 림 유호크를 대신해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총리로 취임하기 전에는 림 유호크 정권 하에서 체포된 림 린시온 과 데반 나일 의 석방을 요구하고 실현시키고 있다.
리는 교육 과 주거 , 실업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주택문제에 관해서는 '주거 및 개발위원회(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 HDB)'를 설립했다.
말라야 연방 의 총리인 라만이 1961년 말라야 연방과 싱가포르, 사바주 , 사라왁 주 를 포함한 연방의 형성을 제안한 후, 리는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을 실현하기 위해 영국 식민지 지배를 마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62년 9월 1일 에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를 이용하여, 거기서는 투표자의 70%가 리의 제안을 지지했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어 주민의 대다수가 영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리는 이 운동동안 합병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고 일설에서는 파괴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용공파 그룹을 괴멸에 몰아넣었다.
말레이시아 시대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맑고 말레이시아의 일부가 되었지만, 연방은 단명하게 끝난다. UMNO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말레이시아 정부는 싱가포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화인계 주민의 포함과 말레이시아에서 인민 행동당의 정치 참여에 우려를 갖게 되었다. 리는 공공연히 부미푸트라 정책 의 ' 말레이인 등의 토착민을 우대하는 말레이시아'에 반대하고, 인민행동당의 슬로건으로 '말레이시아인을 위한 말레이시아'를 주장했다(당시 싱가포르 섬의 화인계 주민도 말레이인도 포함해 '말레이시아인'이며, 말레이인만에 대한 우 이 때문에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어 UMNO 중에는 리의 체포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종간의 대립은 격렬함을 늘리고 선지자 무하마드 의 생일인 1964년 7월 21일 에는 말레이인과 화인계 주민이 격돌해 23명이 사망, 100명 이상이 부상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 주석 1 ] . 같은 해 9월에는 더욱 대규모 폭동이 발생해 사태 수습을 도모하기 위해 쌍방의 리더인 리와 라만이 함께 공공장에 모습을 보이도록 강요당했다. 식량을 포함한 물자의 수송에 현저한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어 물가가 극적으로 상승하여 국민의 생활에 더욱 어려움을 초래했다.
사태 해결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총리인 라만은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을 보이지 않았던 주정부와는 모든 관계를 끊는다”는 방침에서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리는 연방에 머물려고 노력할 때까지 타개책을 계속 생각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1965년 8월 7일 , 리는 말레이시아로부터의 분리에 동의하는 문장에 서명했다.
이것은 말레이시아와의 합병만이 싱가포르가 살아남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리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리고 8월 9일 싱가포르의 독립을 발표하는 TV 중계에서
나를 위해, 지금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평생, 나는 두 영역의 합병과 통일을 믿었습니다. 저 이광유는 자유와 정의의 원칙, 많은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의 탐구,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에 근거하여 오늘 1965년 8월 9일에 싱가포르가 영구적으로 주권민주주의, 독립국가임을 선언합니다.— 이광영
라고 시민에게 말한 다음, 싱가포르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자체가 과거 말레이 독립운동의 맹우였던 라만으로부터의 추방선언과 같았던 것도 있고, 생방송 중에는 자제심을 잃고 울기 시작하는 장면도 있었다 [ 주석 2 ] .
총리 시대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의회는 말레이시아의 주로서 싱가포르와의 관계를 끊는 결의를 통과하였고, 이에 따라 독립국가로서의 싱가포르 가 성립되었다. 천연자원 의 부족과 수원의 부족, 국방능력의 취약성 등 리와 싱가포르 정부가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산적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리는 말레이시아 시대에 불면증 에 시달리고 계속 싱가포르의 독립 직후는 병 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영국의 해롤드 윌슨 정권에서 고등 변무관을 맡고 있던 존 롭에게서 싱가포르의 국가로서의 자질에 대해 우려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 때는 "싱가포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곤경에 처해도 정기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이성적인 자들 입니다 .
다수의 사상자를 낸 64천안문 사건 의 중국 공산당 에 의한 진압에 대해서는 “100년의 혼란에서 중국을 구한다면 저도 20만명의 학생을 쏠 것”이라고 말해 긍정했다 [ 3 ] .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비공식적인 관계였던 1980년대부터 중국의 지도자鄧小平이란 중화민국 (대만)의 경경국 총통과의 중개역을 맡는 등 개인적으로 친하게( 1990년 11월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정상화, 중화민국과 국교단절), 소주공업원구 설립 으로 鄧小平의 개혁개방 에 협력해 2010년에는 싱가포르에서의 鄧小平기념비의 제막식을 당시 중국 국가 부주석 의 습근 .
국방 정책
건국 당초의 싱가포르는 공산주의자나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의 지배하에 두는 것을 갖고 있던 UMNO 과격파 등 여러 위협에 의해 입장이 취약했다. 국방면에서 리는 스위스 를 모본으로 비동맹 과 무장 중립 을 국시로 한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고켄수이에게 국군 창설 준비를 명령하고 타국에 지도와 훈련, 군사시설 설립 등에서 원조를 요청했다.
1967년 , 영국이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 또는 삭감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따라, 싱가포르 정부는 직업 군인 이외에도 필요 병력을 채우기 위해, 2년간의 병역 을 의무화하는 국민역무( National Service )의 실시를 발표했다. 1968년 1월에 프랑스 제의 전차인 AMX -13 을 약간 수, 1972년 에는 최신식 전차를 99대 구입했다. 1969년 에는 영국에서 BAC 167 스트라이크 마스터 를 구입하여 텐가 공군기지에서 파일럿 양성을 위한 기초훈련을 실시했다.
언어정책
리는 비지니스 , 행정 , 인종 간의 공통어 로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영어 ( 영국 영어 )를 계속 사용했다. 한편 화어 (표준 중국어 = 만다린 )· 말레이어 · 타밀어 도 공용어 로 공인했다. 공립학교의 수업에서는 영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동시에 학생 자신의 민족어를 습득하기 위한 수업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언어 정책은 이상한 영어인 ' 싱리쉬 '가 사용되는 소지가 되었다.
1979년 부터는 화인계 주민을 대상으로 한 화어 보급 운동 ( 강화어 운동 , Speak Mandarin Campaign )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방송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프로그램에서 화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그 결과, 화어 이외의 중국어 방언 의 전승이 방해되고, 현재는 젊은 세대의 대부분은 방언을 유창하게 말할 수 없고, 조부모의 세대의 인간과 대화를 할 때 약간의 어려움을 수반할 수 있다.
가족 계획
1960년대 후반에는 싱가포르의 증대하는 인구가 발전 중인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하여 ‘어린이는 2명까지’라는 가족계획 을 추천하는 캠페인을 전개해 아이가 있는 부부로부터 불임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주장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그 밖에도 대졸 여성의 출산을 권장하는 등 우생사상 에 기초한 선별적인 교육제도를 실천했다. 회고록에서는 “다민족사회에서는 한 민족 의 지능지수 (IQ)가 다른 것보다 낮다는 벨커브 가설은 움직이기 힘든 현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의 관계

마하틸 빈 모하마드 가 차기 말레이시아 총리 로 취임할 것이 확실해진 1978년 , 리는 데반 나일 대통령(당시)을 통해 마하틸에 싱가포르를 방문하도록 촉구했다. 이후에도 양자는 친밀한 관계를 쌓게 되어, 모두 서양의 가치관과 대결하는 아시아적 가치관 을 주창한 것에서도 이 사이는 주목받았다. 마하틸은 민주행동당 의 화인의 지도자와의 연결을 끊도록 리에게 요구했고, 마하틸은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인의 정세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1981년 12월에 마하틸은 국내를 한 시간대에 통일하기 위해 말레이반도의 표준시를 변경하고( 말레이시아 표준시 ) 리도 이에 동조했다. 마하틸과의 관계는 1982년 이후 아주 좋은 것이 되었다.
캄보디아와의 관계
리는 1978년 베트남 의 캄보디아 침공 에 반대했다 [ 5 ] . 싱가포르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베트남 의 점령군과 싸우고 있던 폴포트 파에게 원조를 제공해 베트남을 비난하는 국제캠페인을 조직했다. 리는 회고록 중에서 1982년에 "싱가포르는 AK-47 , 수류탄, 탄약, 통신 기기를 크메르 루즈 에 제공했다"고 말했다 [ 6 ] [ 7 ] .
총리 퇴임 후
1990년 11월 고청동 에게 총리의 자리를 양보해 상급상이 되었다. 2004년 8월 고의 상급상 취임으로 내각 고문이 되었다. 사람에게 권유되어 경세를 위해 회고록을 저술하고, 「일본 경제 신문」의 「내 이력서」에 등장했다( 1999년 1월분). 회고록의 일본어판 은 일본경제신문사 에서 나온다. 리 쿤유 회고록 [상]에서는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으면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말레이와 싱가포르의 민간인이나 일본인조차도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5월 포브스 기고에서 “일부 국가의 지도자들이 중국 인권 문제 와 티베트 문제를 이유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보이콧한다고 압박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라고 구미 각국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고, 또한 리는 “ 티벳 에 안는 서쪽 사람들의 이미지는 “로맨틱한 이상향”이며, “히말라 야와 달라이 라마 의 땅이다. 그러나 중국에 있어서의 티베트는 「봉건 사회」이며, 「후진 지역」인 것이다 .
만년

2011년 5월 14일에는 상급상의 고청동과 두 사람이 동시에 각료 포스트에서 물러날 의향을 표명했다 [ 8 ] [ 9 ] .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고려했습니다. 우리는 싱가포르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싱가포르를 더욱 전진시키는 젊은이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총리와 그를 지원하는 젊은 세대의 지도자는 신선하고 깨끗한 기초를 가져야합니다. 젊은 세대는 부패가 없고 게다가 실력주의(지적 엘리트 계급의)의 정부를 가지는 것, 게다가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는 것 이외에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더 많이 종사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이번 선거 후 우리는 내각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젊어진 내각에, 미래의 싱가포르를 형성하고 있는 이 젊은 세대와 전진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내각들은 오래된 세대를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오래된 세대는 싱가포르에 기여해 왔으며 충분히 생략해야합니다.— 이광유, 고청동 공동사임 성명 일본어 번역 [ 10 ]
폐렴 때문에 2015년 2월 15일부터 입원. 그 후, 감염증에 의해 용체가 악화된 것이 같은 해 3월 17일 에 보도되었다 [ 11 ] [ 12 ] .
2015년 3월 23일 , 싱가포르 총리부에서 사망한 것이 발표되었다 [ 13 ] . 91세몰. 29일에는 싱가포르 국립대학 에서 국장이 열렸다 [ 14 ] .
평가
1990년 11월 28일 스스로 총리를 사임한 이후에도 같은 해 고청동 정권의 상급상, 2004년 에는 리셴론 정권의 내각 고문을 맡는 등 늦은 해에 이르기까지 싱가포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대일 역사인식 에 대해서는 일본군 이 영국을 이기고 백인신화를 깨뜨렸다고 평가하는 한편 일본군의 점령정책 은 가혹하고 비인도적이었다며 점 3년 반, 일본군이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때릴 때마다, 영국의 보호하 쪽이 좋았다고 생각하게 되어, 일본인에게 환멸했다고 일본군의 점령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 15 ] [ 16 ] .
전후 리는 과거 점령기의 기억을 직시하면서도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중시해 미래지향적인 관계 구축을 호소했다. 그는 일본이 "역사 1 페이지를 넘기고 이웃 나라와의 평화를 위해 그 가능성을 다한다"고 말하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건설적 역할을 평가하고 있다 [ 17 ] . 또 싱가포르 정부는 JICA 와의 제휴를 통해 '21세기의 날·싱가포르·파트너십'을 추진하고, 산업 인재 육성과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상호 신뢰와 협력을 깊게 해 왔다 [ 18 ] . 이러한 일련의 자세는 과거에 대한 비판을 단순한 감정적 반발로 끝나지 않고 역사를 교훈으로 미래의 우호와 협조에 살려고 하는 국가 지도자로서의 성숙한 대응으로서 싱가포르 국내에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 19 ] .
언어
주요 사용 언어는 영어와 말레이어 입니다. 자전에 의하면 화어 , 복건어는 연설이 가능할 만큼 말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중국어 는 거의 말하지 않고, 복건어가 섞인 말레이어 로 회화하고 있었다(본인담 [ 요출전 ] )가, 전술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중에 학습했다. 이 학습 체험은, 「Keeping My Mandarin Alive」로서, 1권의 책에 정리하고 있다(일본어 번역 없음).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사용했던 영어 등과 비교하면 중국어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다.鄧小平과 처음 회담했을 때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각주
주석
출처
- ↑ “Days of reflection for the man who defined Singapore: A transcript of Minister Mentor Lee Kuan Yew's interview with The New York Times” . Today ( Singapore ): pp. 14–17. (2010년 9월 13일).
- ↑ Lee Kuan Yew (1998). The Singapore Story: Memoirs of Lee Kuan Yew. Singapore: Times Editions. pp. 342–343. ISBN 978-981-204-983-4 .
- ↑ “Lee and Li” . 월 스트리트 저널 . (2004년 8월 20일) 2019년 10월 23일에 확인함.
- ↑ “Commemorative marker of Deng Xiaoping unveiled in Singapore” . 중국일보 . (2010년 11월 14일) 2015년 9월 21일에 확인함.
- ↑ Régnier, Philippe (1991). Singapore: A City-state in South-East Asia . University of Hawaii Press
- ^ “ LKY's account shows Singapore supported Khmer Rouge initially before dumping them ”. The Online Citizen (2019년 6월 11일). 2020년 8월 3일 시점의 오리지널보다 아카이브 . 2025년 2월 24일에 확인함.
- ↑ Richardson, Michael ( 2000년 9월 29일). “ Singaporean Tells of Khmer Rouge Aid ” . The New York Times . 2025년 2월 24일에 확인함.
- ↑ “싱가포르, 리 쿤유 고문상이 사임에” . 요미우리 신문 . (2011년 5월 14일) 2011년 5월 14일 열람.
- ↑ “싱가포르의 리콴유 고문상, 각료 포스트 사임을 발표” . 로이터 . (2011년 5월 16일) 2011년 8월 28일 열람.
- ↑ “MM Lee, SM Goh to retire from Cabinet” .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 . (2011년 5월 15일) 2011년 8월 28일에 확인함.
- ↑ “리 쿤유씨, 용체 악화” . 요미우리 신문 . (2015년 3월 17일) 2015년 3월 17일 열람.
- ^ “이광유 전 총리, 용체가 악화=싱가포르 정부” . 로이터 . (2015년 3월 17일) 2015년 3월 17일 열람.
- ↑ 리 콴유 전 총리가 사망,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로이터 재팬 2015년 3월 23일 열람
- ↑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 콴유 전 총리의 국장 AFP 통신 2021년 7월 25일 열람
- ↑ 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 "Transcript of Interview of Mr. Lee Kuan Yew", 17 March 1965
- ↑ George P. Landow, "Lee Kuan Yew's First-Hand Experience of Japanese Brutality", Postcolonial Literature in English, University of Singapore
-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Singapore, "Transcript of PM Lee Hsien Loong's Toast Speech at the Akasaka State Guest House in Tokyo", 2016
- ↑ 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Japan–Singapore Friendship and Cooperation", JICA, 2015
- ↑ 싱가포르 외무부 "Japan-Singapore Relations : A Forward-Looking Partnership",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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