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opneStrdsoh094m12t1mg530f00c8g7l7mhlguii3fimah3hmmc54419ca43 ·
일본은 근대를 '공부'했고 조선은 근대를 '신앙'했다
> 그러나, 근대 일본에서 주자학과 서양 근대의 소통을 통해 일상 공간 이외의 사상 공간이 활발해지는 현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 계기는 1881년의 정변이었다. 이 정변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메이지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이들은 근세 일본의 사고를 계승하여 사회의 세속화, 즉 비종교화를 문명화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체제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문명으로 이해한 근대 서양이 여전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다는 곤혹스러운 사실에 직면하였다.4)[236쪽]
> 4)渡辺浩: 2005, 392쪽.
강동국・김시덕・김종학・김호섭・신상목・이원덕, 『일본, 한국을 상상하다』(서울: 도서출판 선인, 2021)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근대화를 '탈종교화'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막상 권력을 잡은 후 서양 사상을 면밀히 살펴보니, 서양 사람들은 여전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었고 당혹스러워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조선(이 아니라 정확히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엘리트, 특히 서북 출신의 엘리트에게 이는 당혹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을 통해 근대에 접근했거나 근대화를 향해 다가갔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지배층은 근대화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기존의 신앙을 버리거니 없던 기독교 신앙심을 품을 생각 따위 눈꼽만치도 없었다.
반면 조선의 피지배층 중 일부는 근대화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사실, 조선 지배층이 한 짓을 보면 몹시도 마땅한 이유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유신 지사들의 근대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다면, 이 경우, 오히려 더욱 '근대화'에 다가선 것은 기독교 신자가 되어버린 조선의 피지배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러한 현상을, 일본은 근대를 '공부'했고 조선은 근대를 '신앙'했다고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Seungbyung Chae
약간 거칠지만 의미 있는 요약이라고 생각됩니다.
19세기 후반 구 체제의 한계 상황에서 봉착하여 일본은 어쨌건 정치적인 체제 변혁을 이뤄냈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의 접근이 불필요하지 않았나 합니다. 반면 조선은 계속해서 그런 변혁이 좌절되면서 서구로부터의 구원에 더 집착하게 되었고요. 원래 현실의 벽이 뛰어넘기 어려운 절망으로 번질 때 종교도 힘을 얻기 마련이죠.
23m
Reply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