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6

고쿠분 고이치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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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분 고이치로의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정말 감명깊게 읽었던지라 저자의 역량을 믿고 샀는데 기대 이상이다. 내가 소수자 담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건 소수자적 관점이란 아무리 그래도 결국 소수자를 위한 담론이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관점에서 볼 때 다수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들 말하지만, 실제 다수자 내부로 파고 드는, 그 내부의 원리에 육박하는 소수자 담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 시대를 풍미한 마르크스주의조차도 '다수자'라 할 수 있는, 기존 사회의 내부로 침투해 자본의 동학 그 자체를 내파하기보다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그것의 병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데 그쳤을 정도 아니던가. 다수가 다수가 된 데는 또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다수의 동학을 설명할 수 있어야 소수자 담론이 보편적 담론이 되는데 그런 얘기를 보기가 힘들다. 소수의 관점에서 다수에 의한 억압, 폭력 등을 강조하는 얘기들이 지닌 어떤 한계가 있다.
 
그런데 고쿠분 고이치로와 구마가야 신이치로는 소수자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간다. 소수자의 자기 내파랄까. '당사자 연구'를 통해 소수자의 자기인식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자기인식을 구성하는 여러 규정들, 이 규정들은 필연적으로 다수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에 대한 반성적인 사고를 일관되게 끌고 나간다. '외재화', '중동태',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 '인책', '임페어먼트', '묶어내기와 간추리기' 등등의 여러 개념들을 접하면서 예컨대 조현병 환자와 같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나에게 어떠한 해를 끼칠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던 장애인들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는 계기를 얻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고 논파해야 할지 항상 고민이었는데 그 논거들을 얻은 듯하여 기쁘다.
'당사자 연구'를 통해 소수자의 소수자성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그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다수자'라는 자기정체성이 해체되고 이들과 같은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놀라운 책이다. 왜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감각을 갖게 되냐면 예를 들어서 책의 1장에서는 '묶어내기'와 '간추리기'는 개념을 제시한다. ASD(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고 있는 아야야 사츠키씨의 당사자 연구에서 나온 가설인데, ASD를 앓고 있는 이에게 세계가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를 탐구하여 우리의 인식의 근본적인 부분을 밝혀낸다.
예를 들어서 아야야씨한테는 '공복감'이 없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공복감'을 느끼지만 아야야씨는 그런 감각을 느끼지 못해서 끼니를 거르기까지 한다고 한다. 실상 우리가 갖고 있는 '공복감', '배고픔' 등의 감각은 그것에 수반되는 여러 감각들, 위가 줄어든다는 느낌이라든지 입에 침이 고인다든지 하는 그런 '공복감'과 관련된 감각들을 무의식적으로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형성되었다. 아야야씨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묶어내기'라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 감각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내고, 그중에서도 '간추리기'를 통해 하나의 감각으로 집약하는 그런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장애를 앓고 있다. 내가 느끼는 이 감각, '지각'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게 안되는 이들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질적인 차이로 느껴졌던 격차가 양적인 차이로 전환되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아야야씨는 지각을 형성하는 프로세스가 우리 일반인보다 다소 '느린'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아, 이게 글로 잘 전달이 안되었을까봐 걱정되는데.. 다른 장애학 관련 책들이 '정상/비정상'의 권력관계를 강조한다면 이 책은 그런 부분도 물론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가 이런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권적 존재,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있을지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책임'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예컨대 '외재화'와 '인책'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강아지도 그렇지만, 특히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데, 나는 처음에 고양이를 키울 때 정말 놀랐던 게 와이프의 태도였다. 고양이가 팔을 할퀴고 어쩌고 해도 화를 안 내는거다. 나는 화가 너무 났거든. 내 몸에 막 상처를 내고 이러는 게 짜증나서 고양이한테 화를 많이 내고, 얘가 나 때리면 나도 얘 머리 콩콩 하고 그랬는데 와이프는 화를 전혀 안 내는거다. 고양이가 밥상 뒤엎고 난리를 쳐도 그냥 아무말 없이 치우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이해가 안됐고 심지어 나는 내 와이프가 좀 모자란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객관적 판단이 안되는 사람 아닐까?
그래서 물어봤는데 와이프가 답하기를 "이건 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완전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고양이의 책임이고 잘못이라 생각했지, 그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훈련(!)'을 통해 고양이의 행동을 "교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와이프 말에 따르면 그건 고양이의 잘못이 아니다. 고양이는 주어진 환경에 그냥 '반응'했을 뿐이다. 그렇게 반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인간의 잘못이라는 게 와이프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납득하기 힘들었는데 고양이와 함께 하다보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내가 이 상황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다. 고양이는 원래 그렇게 반응하는 존재인데 내가 거기에 그렇게 반응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이러다보면 둘다 힘들어진다. 반대로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반응하니까"라고 생각하고 대처를 하면 문제해결이 훨씬 쉽다. 고양이의 행동을 일종의 '재해'라고 생각하고 재해를 탓하지 않고 대안을 만드는 것처럼 다루면 된다. 고양이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고양이가 사고를 쳤을 때 "아이고, 놀랐지? 미안해, 미안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감각을 지니는 게 정말 중요한데, 이 책에서는 그런 걸 "외재화"라고 표현한다. 장애를 지닌 분들이 어떤 실수,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그분들 '개인'의 "책임"이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고 '외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책임을 장애를 지니신 분들도 지게 되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아, 이렇게 행동하면 안되는구나. 그것을 '인책'이라 표현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자신의 책임으로 끌어들여 안는다는 의미이다. 스웨덴 등의 북서유럽 사민주의 체제에서는 조현병을 앓고 있는 이가 어떤 무언가 폭력적인 행동을 범할 것 같으면 그들을 억압하고 제압하기보다는 의료진이 와서 대화를 시도한다고 한다. 계속해서 얘기를 들어주고 이러다보면 또 아무렇지 않게 끝나고 "내일 또 봐요!"하면서 헤어진다고 한다. 대화를 통해 환자도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인 의미의 '돌봄'의 감각의 장착과, '외재화'를 매개로 한 '인책'이 상호작용해야 비로소 '사회'가 구성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는 이렇듯 감각의 전환과 그를 통한 세계인식의 전환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흥미진진한 개념들이 많이 나온다. 다 읽고 나서 책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중동태'와 관련해 좀더 길고 자세한 소개글을 적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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