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2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 김익렬장군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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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렬장군 회고록


사무처추천 0조회 739
15.08.31


김익렬장군 회고록


내가 제주도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47년 9월 초였어.


그 당시 일반 미군관리들이나 국방경비대 장교들이나 모두 다 제주도 제9연대는 가기 싫은 부임지였었어.


왜냐면 대부분의 장교들이 상관과의 경미한 충돌이나, 사고에 연루되어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귀양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었거든. 당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은 독립운동가 출신 송호성 장군이었는데 조금만 자신의 비위에 어긋나면


“넌 제주도로 귀양이다” 호령하고 즉시 9연대로 전근시키곤 했었어.


나만 해도 육사에서 장교 교육을 받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 명동 거리를 산보하다가 꼰대 마눌을 보고 경례를 부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9연대로 추방된 거야. 참으로 시바스런 일이지.





9연대는 연대라 해도 실제 병력은 1개 대대가 조금 넘는 9백여 명 정도였고, 그 중 90%가 경상도 전라도에서


모병하여온 병사들이었는데 일본 하사관 출신들이 많았었어.


당시 제주도 출신 병사들은 군사훈련이 심하거나 군대내 작업이 심하면 달아나기 일쑤였는데


장교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어.


6개월 이상을 복무한 사병은 불과 10명 이내였는데 장교들이 엄청 이뻐 했었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주도 풍속이나 물정을 아는데 이들이 꼭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지.


게다가 니들도 알다시피 제주도 방언이라니... 애네들은 또 제주도 모병하는 문제에선 장교들의 고문 역할을 했고,


군대와 대민 접촉의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해 냈었어.





제주도민들은 전통적으로 배타성이 강해서 우리 장병들을 쪽바리나 코쟁이 취급을 했었어.


대화도 원활치 못하고 풍속의 차이가 크다보니 아무리 조심해도 도민들의 자존심이나 긍지를 해치는 일들이 빈번했었지.


당연히 도민들은 군인들을 백안시하고 교제를 꺼려서 가끔은 외국에서 주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우리 연대는 모슬포에 있는 옛 일본군 항공대가 사용하던 큰 병사를 사용했었는데 도민들의 비협조로 보급 문제가 가장 어려웠어. 연대 군사고문관은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이 겸하고 있었는데 그도 민정에 바빠서


1~2개월에 한번 씩 소위나 중위를 보내 연대장과 상의할 정도였으니 제9연대는 사실상 미군정 고문관도 없는 형편이었지.





연대 장비는 구 왜놈들의 99소총과 대검뿐이었어. 그나마 탄환은 1발도 보유하지 못했고.


믿어지나? 군대에 탄환이 한 발도 없다니...


기관총이나 양놈무기인 M-1이나 카빈총은 숫제 키우지를 않았어.


그런데 경찰은 경비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무장을 하고 있었지.


전원이 카빈 소총에다 왜놈들의 92식 중기관총 코쟁이들의 수송 장비에다 각종 신식 무전기와 통신장비 등 ..





경비대는 당시 평상시엔 빈둥빈둥 놀고먹다, 비상시가 오면 경찰의 보조역할을 하는 미군정의 천덕꾸러기였지.


물론 장차 독립이 되면 국군의 모체가 된다 했지만 그래도 괄시가 심했었어.


수송 장비를 비교해 보자면 연대는 1.5t차량 1대, 0.75t 1대, 지프1대가 부대의 보급과 연락용 전부였고


쪽 팔리게 군대가 무전기도 안 키웠어. 수개월이 가도 급한 연락사항이나 중요한 문제 내지, 긴급을 요하는 일이 없었으니 있어봤자 쓸 일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군대잖아!

그런 중에도 군 훈련과 군기는 엄격했었고 장병 공히 일치단결이 잘 되어 있었지.


나의 연대 통솔 방침은 근무시간에는 열심히 훈련하고 그 밖의 시간은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었지.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여름철엔 바닷가로 나가 해수욕도 하고


겨울철엔 꿩을 잡아 전 장병들 회식시켜 주는게 낙이었던 시절이었어.


물론 걔 중에 더러 영어에 능통한 장교들은, 군정 치하라서 진급이나 출세는 빨랐지만
민족주의 장교들 사이에서 고립되거나 경원시 당하였고,
그러다보니 꼬부랑 말 잘하는 놈들은 양놈들한테 사바사바하여 극렬한 민족주의자를
공산주의나 반미주의로 무고하기도 했고 그래서 희생된 군인들도 있기도 했었던 시절이지.

당시 내가 본 도민들은 해방이나 독립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 같았고, 정치단체나 청년단체가 있기는 했지만 간판뿐이고 실제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해방 직후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 인민공화국 정부가 있었지만,

대부분 공산주의 이념과 거리가 먼 일부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야망에서 나온 것이라 별 문제가 아니었어.

또 도민들이 정치활동에 무관심 했던 것은 운동을 할 만한 똑똑한 청년들이 대부분 육지에서 취업하여 있었고, 도내에는 문맹자나 노인 부녀자 들이 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고, 지식인들이 일부 남아서 정치, 청년 운동을 하고 있으나 중간과 말단 조직은 없는 상부조직, 그러니깐 간판 지키는 놈만 남아 있었던 거지.

제주도는 빈곤한 지역이었지만 지주와 소작인 같은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이 없었고(공산주의 사상이 먹힐 이유가 없잖아) 예전부터 걸인과 도적이 없는 걸로 자랑하던 곳이야. 민심은 순박하고, 정부에 잘 복종하는 전통적인 도민의 기풍을 가졌어.


범법자나 치안을 문란케 하는 위험분자는 거의 전무한 상태라서, 경찰이나 행정관리를 번거롭게 하는 사건은 거의 없었고, 어쩌다 육지에서 들어온 인간들이 술 처마시고 쌈박질을 하거나 교통사고 정도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어.

그러다보니 제주도에선 순사 시키들이 할 일이 없어서 대낮부터 근무지를 이탈, 탱자탱자 술 처마시는 것도 예사였고, 9연대도 군대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없으니 탄환 한 발 없는 빈 총 뿐인데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어. 쪽이야 좀 팔리지만..

서울이나 부산 같은 도시에서 야간이 되면 미군 MP나 경찰의 총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다고 했는데 당시 제주엔 평온 그 자체인 별천지였지.

제주도의 풍습이나 도민들의 배타적인 습성을 무시한 서북 청년단과 도민들 사이의 감정대립, 거기에다 육지 경찰까지 합세하여 도민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소문이 부대의 정보망을 통해서 들어 왔었어.

또한 척박한 환경인 제주도에서 과거 일제시대 때부터 생업이 되다시피 한 일본-제주-육지간의 중간무역에 대한 침해와 위협이 심각하다는 소문도 들려왔었지.
육지로 특히 일본으로 간 사람들이 생필품을 가족들에 보내거나, 도민들이 운영하는 소형선박들로 값싼 상품을 들여와서 제주도와 육지를 다니면서 무역을 하는 것을,
서북청년단과 경찰이 밀수품이라며 압수해서 자기들이 직접 상인들에게 매도를 하며 돈을 챙긴거야.


당시 나와 가까이 지내던 제주도 지식층 인사들이 이런 참상을 미군정장관에게 전해 달라고 내게 수차 요청을 하더라고. 부내대의 정보와 합한 것을 가지고 군정장관에게 이야기를 했었어. 그랬더니 맨스필드가 아주 고마워하면서 그런 정보를 준 친구를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아 그랬더니 이런 새가심 쉑들이 후환이 두려워서 아무도 안 나서더라고. 뒤에서나 나불거리고 찧고 까부는 촉새 새끼들....

며칠이나 지났나? 군정장관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깨졌어.
경찰 감찰청장 김영배를 불러 장관이 문책을 했더니 일체를 부인하며, 연대장이 경찰과 경비대간의 불화를 조장 할 목적으로 중상모략을 했다고 하더란 거야. 그래서 이번엔 제주도 유지 몇몇을 불러서 물어 보았는데 한결같이 사실무근이라 말하더라는 거야. 졸지에 나만 정신 나간 놈이 된 거지.

그 후에 제주 경찰서장 문용채가 날 찾아와서 내가 한 일이 경찰에 대한 군대의 내정간섭이다, 그리고 밀수자를 취체하는 것은 경찰 고유의 임무이니 차후엔 이런 일에 간섭치 말고 신상을 고려해서 자중하라 이러더라고. 
이런 쓰발 나 뭣한 거니? 승질 나서 아예 제주 것들과 왕래를 끊고 한참동안 부대에서 짱 박혀 있었어. 

여기서 특기할 것이 하나있어. 당시 경찰에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경비대에 제공해 주고 있었어.   그것도 아주 정기적으로. 그런데 제주에선 이런 정보의 교환이 전무했어. 왜냐면 제주도엔 공산주의자가 전무했기 때문이지.


뭐 해방 직후 ‘인민공화국’에 가담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건 공산주의 사상의 의미도 모르는 민족주의자들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이 섬에서 축출되어 육지에 살고 있었지.
그래서 외지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순박한 도민들에게 사상교육을 시킬까 감시하는 정도였어.

글고 또 하나, 당시 미군정 부대는 읍내 제주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지 소수의 인원이.
그래서 도정의 대부분은 도지사와 경찰에만 의존하고
한 달에 1~2회 씩 군정관들이 면.지서 소재지를 방문하여 민정을 감독한다지만 상세한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

1948년 3월에 들어서자 연대 정보부로부터 도내 공기가 대단히 험악하고 폭풍전야와 같은 불온한 분위기가 돈다는  보고가 올라오더라고. 또 믿기 어려운 내용들 중엔 경찰이 밀수품 압수를 하자 무역선 출입이 끊어졌고
돈 줄이 끊어지자 과거 밀수 전력이 있는 자들 혹은 가족들을 불러다가 고문해서 돈을 뜯어내고  여의치 못하면 그 집의 가축까지 끌어내어 잡아먹기도 팔아먹기도 한다는 것이야.

또 고문치사가 여러 곳에서 발생했는데 상부에 알려질까 바다에 암장한다는 소문에다 경찰과 서청이 함께 어울려  산간벽지로 다니며 폭행 약탈에 강간까지 자행한다는...

솔직히 믿어지지 않더라고. 동족끼리 그것도 교육받은 경찰이 이민족에게도 못 할 야만적인 불법행위를 한다는 게.



그런데 이런 정보들은 제주 출신 사병들에 의해 연대에 유포되고 있었으며,
장병들이 서청과 경찰의 소행에 대단히 의분을 품고 있길래 장교와 하사관들을 집합시켰어.

이런 유언비어는 경찰과 경비대를 이간질 시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저번에 맨스필드에게 내가 망신당한 이야기도 하면서 선동에 동요치 말라고 훈시를 했었어.

봄꽃에, 봄볕에 물든 제주도의 4월, 오랜만에 제주 읍으로 나들이 할 일이 생겼어.
백선엽 대령이 제주에 휴가 차 들러서 군정장관 사령부에 유숙하고 있었기 떄문이야.

하루를 백대령과 맨스필드와 즐겁게 보내고, 다음날 백대령을 뱅기 태워 보내고 우린 모슬포로 돌아갔지.
우리 일행은 모두 9명이었는데 마치 소풍이나 온양 마음껏 봄날을 즐겼어.
중간 중간 꿩 사냥도 하고 아~ 총알은 쪽바리가 바다 속에 처넣고 간걸 해녀들이 주워온 거야.

간신히 한림까지 왔는데 차 조명등이 나가버렸어 날은 이미 어둑어둑하고.
할 수 없이 하루를 그 곳에서 유숙키로 했어. 사냥한 꿩을 요리해서 배부르게 먹고 나니 피로가 몰려오더라고.
우린 모두 한 방에서 일찌감치 곯아떨어졌었지. 확실한 시간은 모르겠는데 새벽 3시 정도일까?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에 잠이 깨어 난 벌떡 일어났어.

4월 3일 이른 아침 한림에서 구사일생으로 부대로 귀순한 나는 부대에 필요한 조치를 다 취한 후


전순기 대위를 긴급 전령으로 송호성 장군에게 보냈어.


폭동 사건을 보고하고 9연대가 취하여야 할 행동에 관한 명령을 받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탄약고 기타 보급물품을 보충하여 달라고 요청을 했었지.


3일 후 내려 온 전대위는 제주도 폭동은 치안상황이고 경찰의 책임이니 상부 명령 없이는 절대로 행동하지 말며,
절대 경거망동 하지 말고 부대단결과 훈련이나 잘하라는 내용의 지시사항을 갖고 왔었어.


솔직히 다행이지 뭐야, 실탄 사격 경험도 없는 병사들이 대부분이니 사실상 전투는 불가능한 상태가 아니겠어?


근데 경찰 시키들이 저 꼴이니 언젠가는 군대 투입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전투훈련과 정보수집에  전력을 다하였어.

먼저 제주출신 사병들을 민간복으로 갈아입혀 휴가 명목으로 귀가를 시켰어.
애들이 이런 저런 정보를 갖다 주는데 대충 이렇게 판단이 되더라고.


서청과 경찰의 횡포에 대한 보복에서 일어난 것이고 그들의 처음 목적은 구치되어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는  들의 가족을 구하는 것이고 폭도들도 대다수 그들의 가족들이었는데,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던 민족, 공산, 사회주의자들이 편승하여 이들을 조직 지휘한 것이 거의 확실하더라고


폭도의 수는 300명을 넘기지 않는 숫자였어.


최초에는 무기도 곤봉이나 해녀들이 건져낸 쪽바리들의 99식 소총이 편대에 많아야 4~5정이었는데


지서를 습격해보니 경찰 시키들이 너무 무력했던 거야. 그래서 경찰 놈들의 카빈총도 약탈하고 .....





원한에 찬 대중이 무기를 손에 잡으면 걷잡을 수 없이 잔인해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바


이들이 경찰에 협조한 자에 대한 처형은 아주 잔인했었지.


군정과 경찰은 미군과 경비대에 지원요청 없이 육지에 증원군을 요청하고 경찰토벌대를 편성했어.


당시 통역정치의 대명사였던 조병옥이로선 어쩜 당연한 선택이었겠지.


우선 폭동발생의 주원인이 경찰의 실정에 있다는 것이 알려질까 두려웠을 거고,


또 전국의 치안책임자로서 외딴섬 제주에서 일어난 소수민란을 진압 하지 못하면,


체면 손상은 물론 장래 정치적 진퇴문제까지 관계된다고 여겼겠지.


호언장담하며 공안국장 김정호를 제주폭도토벌사령관으로 임명, 경찰의 대병력을 투입했어.





그런데 토벌대는 초장부터 도처에서 패전의 연속이었지 사상자가 속출하고 무기마저 뺏기기가 일쑤 였어.


폭도들의 사기가 충천하여 이젠 백주에도 지서습격을 하는 거야.


난 폭도들의 작전과 교전법을 관찰키 위해 수차에 걸쳐 경찰 토벌대를 따라 가 봤어.


그런데 이 경찰 시키들이 폭도와 조우하면 원거리 사격만 마구 하지, 전진하는 놈이 없는 거야.


오히려 폭도들이 용감하게 토벌대를 향하여 돌격을 하면 토벌대 놈들은 무기를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더라 이거지. 토벌대의 전력은 날이 갈수록 약화되고 ,


엉뚱하게도 폭도들의 무기 제공처가 되어 그들의 무장 강화를 시켜주더라고.





토벌사령관이하 간부들이 헛된 공명심과 허세만 가득할 뿐 실전 준비도, 또한 폭도에 대한 정보도 없이


그들을 얕잡아 보고 성급히 작전을 펼친 것도 하나의 패배 요인일거야.


체면을 구긴 김정호 이하 간부들이 궁여지책으로 수립한 작전이 ‘초토작전이야.


바로 이 작전이 제주도를 대폭동 사건으로 확대시킨 근본원인이야.


이 작전은 국제법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비전투원 학살의 죄목으로 이 작전을 명령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규정 처벌을 받게 되어있었어.


그런데 경찰 책임자와 토벌사령관 김정호는


적국도, 전쟁시도 아닌 조국에서, 동족에게 이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초토작전을 감행한 것이란 말이야.





최초의 작전은 극비리에 조천면과 애월면 일대의 산간부락에서 행해졌어.


제주 미군정장관도, 9연대 정보부도 모르고 당사자들만 알았던 이 사실은 시간이 흐르면서


인접 부락에 알려지게 된 거야.


초토작전을 안 미군정은 강력히 이를 저지하고 현상조사도 상세히 했었지.


김정호는 뻔뻔스럽게 초토작전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라며 주민 피해와 부락 파괴는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변명했었어.


나도 처음엔 폭도들이 최후수단으로 이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었지.


정상적인 경찰이라면 자국민에게 어떻게 초토작전을 벌이겠냐고?


그런데 경찰소행이란 증거가 자꾸 나왔어. 초토작전중인 경찰들의 현장사진과 약탈한 현금과 물품 등....





그런데 이상하게 미군정의 태도가 반대에서 점차 묵인하는, 그러다 오히려 장려하는 태도로 변해 가는거야.


치안책임 관계자는 찬성하고 군사고문은 강력히 반대하는 양상이었지.


미군정의 초토작전 묵인하에 경찰은 공공연하게 한 마을 한마을을 초토화 시켜 나갔어.


이렇게 되자 일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돌변하였지.


대부분의 산간 주민들이 산으로 도망하여 폭도에 가담하기 시작한 거야.


그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수백 수천이 되어 결사적으로 경찰에 대항하기 시작했지.


경찰은 다시 중과부적이 되어 산에서 쫓겨오고. 이렇게 되자 미군정장관인 딘 장군이


경비대를 투입하어 토벌할 결심을 하게 되었어.


즉 경비대 제9연대장 나 김익렬 중령이 제주도 폭도 진압의 책임을 지게 된것이지.





나는 조병옥과 김정호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민족적 양심에서 절대 용서 할 수 없어.


이 기록이 세상에 빛을 볼 때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야.


이 국토에 여하한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던 한국민족의 정부가 들어선다면, 저들이 역사의 비판을 받게 하여


이 국토에 다시는 천인공노할 이런 만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후손들에게 유언을 하는 바야.


악인들도 무리가 많으면 역사에 행세하고 자신의 소행을 정의라는 미명으로 위장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정의는 고독한 것이며 깊은 신념을 가진 용감한 자만이 실행 할 수 있으며,


신념을 가졌더라도 비겁하게 입으로만 주장하는 자는 위선자지.





4.3 사건을 계기로 격앙된 제주의 인상들만 여러 가지 기록이나 논평에 보도되고 있고, 어


떤 전문가라 칭하는 자들은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고도라서, 해방 이후부터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온상지였으며, 자유스럽게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투쟁을 위한 조직과 훈련을 해서


4.3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설도 써 재끼는데


이거야말로 제주도민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자들의 지롤 이단옆차기지.





역사는 어디까지나 정직히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야 후세가 그 역사를 참고하고 반성하고 배울 거 아니겠어?


어느 특정인의 죄악을 은폐시키거나 또는 영웅화시키기 위한 창작물이 되면 그건 바로 사적(史賊)이잖아.


그래서 난 제주4.3 사건은 재편집되고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야.





또 나는 4.3 사건은 둘로 나누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4.3 사건 발생원인과 발생, 또 하나는 발생 후부터의 토벌과 진압까지로 말이지.


이유는 전자는 순수한 민중폭동이었고 후자는 민중폭동이 공산폭동이 된 것이기 때문이야.


나는 전자에 대해 증언 할 수 있는 생존자 중의 유일한 증인이라 생각하는데, 4.3 사건의 실상이 밝혀져도


내겐 하등의 피해나 이익이 생길 일은 없어.


단지 나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진실한 역사 기록이 남기를 바라는 그 뭣이냐?


사명감과 책임감 그런 것 땜에 글을 쓰는 거야.





현재까지 기록된 역사나 戰史에 기록된 제주 4.3 사건의 발생원인은 거의 전부가 허위나 혹은 막연한 추리,


또는 거두절미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기술되거나


정치적인 목적에서 고의적으로 그럴싸하게 허위 날조하여


기술되었는데 이렇게 부정확한 사료가 금일까지 수정되지 않은 것은 몇 가지 까닭이 있다고 봐.





그 중의 하나는 관에서 4.3 사건의 발생 원인과 진상이 사실 그대로 보도되면,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역사에 영원히 남을까 두려워하는 것이고,또 당시의 사건책임자들이


그 후 정부의 고위직이나 정치적 지도자로 상당기간 세력을 가졌던 것이 그 원인이라 생각 해.





또 하나의 원인은 在제주 지식인들의 무능과 무기력인데, 진상을 세세히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 보신을 위해 덮어 둔 것,


그리고 그 당시 사료의 증인이 됨직한 제 9연대의 장교들 대다수가 6.25전쟁 때 전사했고,


나 또한 현역에 장기간 복무한 관계로 언행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사료제공을 꺼렸던 것도 그 원인 중 하나겠지.




















채 1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경찰의 토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내가 토벌의 총책을 맡게 되었어


송호성 사령관은 제주 군정장관 맨스필드의 명령에 절대복종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부산5연대 소속의 진해 주둔 1개 대대가 9연대에 배치되고, 군사작전고문이 파견되고


탄환과 장교들이 보충이 됐어.





부임한 미 군사고문은 내가 광주4연대 작전참모로 재임시 연대고문이었던 드루스 대위였어.


맨스필드와 드루스 나 셋은 다들 과거 한 부대에 근무한 연고로 서로 거리낌 없이 의견을 교환할 수가 있었지


맨스필드는 예전에 내가 제공했던 정보가 정확했다는 것을 이제야 수긍하면서 그때 처리를 잘못해


이런 폭동이 발생했다고 때 늦은 후회를 하더라고.





근데 예상치 못했던 국제 정치 문제를 맨스필드가 털어놓는 거야.


당시 5월에 남한만의 단선을 치르기로 되어있는 상황에서 소련이 4월 유엔에서


“2차 대전 후 미.소 양군의 점령지역에서 소련 점령지역의 주민들은 평화롭기만 한데


미군 점령 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미군의 약탈이 심해서 미군정의 폭정에 대항하는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는데그 좋은 예가 제주도의 폭동사건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미국을 국제무대에서 비난한다는 것이야. 이렇게 되자 미국 정부는 군정장관 딘 장군을 문책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야.


또 소련의 공산주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하여, 제주도 폭동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지어야 한다고 하더군.





나는 이에 대해 그런 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이고, 공산폭동이든 민중의 폭동이든 진압작전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더구나 그건 나의 소관이 아니다 라고 답변을 했었지.


실상 폭도들 중엔 공산, 사회주의자 배타주의자 등 각양각색이 혼합되어 있겠고


나름 투쟁목적을 내세워 떠들어대고 있지만, 내심을 들여다보면 경찰에 대한 원한과 공포가


폭동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난 나름 확신하고 있었거든. 단 ‘공산반란’ 이란 규정을 지으면


폭도들을 공산주의자와 분리시키고 군대가 개입하여 토벌하는 명분은 되겠다 이런 생각은 들더라고.





우리 3인이 심사숙고하여 수립한 작전계획은 1단계 폭도분리작전, 골자는 폭도 중


극렬분자는 불과 200~300명이며 대부분은 부화뇌동한 자들이니,


이들을 분리시켜 극렬분자들만 토벌하자는 것이었어. 해서 1단계 ‘화평 귀순공작’에 돌입했는데


- 우리는 공산주의자 외에는 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죄과의 대소를 불문에 부칠 것이고


공산주의자라도 귀순하면 용서할 것-이라는 관대한 포고령을 내렸지.


각 부대별로 지역을 분할하고 지역 내에 소수의 정찰부대를 파견하여 적정을 수집하되


먼저 공격하기 전에는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도 내렸어.





맨스필드는 자신이 먼저 시도했던 귀순공작의 실패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복안을 제시했어.


초기에 경찰이 저지른 실패로 인해 폭도가 오히려 증가하자 귀순공작의 필요를 느껴 시도해 보았는데


관민의 비협조로 실행되지 못했다며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는 거야.





처음 귀순공작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제주지사 유해진 이었었대.


그러나 군정장관이 폭도들과 약속한 교섭일이 되자 급병을 구실로 불참했었대.


그 다음은 김정호 토벌사령관이 임명됐는데 회담날짜가 되자 급한 출장을 이유로 군정장관의 허락도 안 받고


새벽녘에 민관선박을 이용 서울로 가버렸대.


세 번째는 제주감찰청장 최천 이었는데 회담 당일이 되자 또 급병을 핑계.


네 번째는 민청단장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깃발을 앞세우고 약속장소로 올라가더니


이번엔 폭도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래. 그런데 맨스필드 생각엔 폭도가 약속위반을 한 게 아니고


저것들이 가다가 중간쯤에서 돌아온 것 같다는 거야. 양놈앞에서 내가 얼굴이 뜨뜻하더라고


폭도와 직접 만나 날보고 담판을 지어라며 “너도 회담 일에 일본으로 도망치는 것 아니야?” 농담을 하는 거야.


그러면서 귀순공작의 요점으로 민간인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일러주며, 각자의 성분까지 분석한


제주유지명단을 주더라고. 그 중에서도 도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만 된다며


3인을 추천했는데 제주신보사장과 전 제주지사 박경훈씨 형제였어.





나는 참모들에게 지시해 폭도들과 직접 연락을 닿을 수 있는 민간인을 교섭하기 시작했어.


예상대로 유지들은 한결같이 협조를 거절하더라고.


귀순공작이 실패하면 폭도들에게, 성공하면 화평이 이루어지면 자신들의 죄상이 폭로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을게 뻔하잖아.


그러나 끈질긴 설득 끝에 우린 십여 명의 협력자를 구할 수 있었어.


앞서의 세분과 좌달육씨, 김대용씨와 읍내 천주교 신부와 몇몇 신자들이였지.


우리는 비밀회합 장소를 박경훈씨 댁으로 결정하고 귀순유도를 위한 선무문(宣撫文)과 전단을 작성하고


폭도들과 접촉방법을 연구했었어. 일체의 인쇄는 비밀리에 제주신보에서 했었지.





1 .국토방위와 외적과 전투하는 군은 동족상쟁을 원치 않고 제주도민을 적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다.


2. 무력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도민의 유혈만 조장 할 뿐 해결 방법이 안 된다.


3. 즉시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면 내가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하겠으며, 일체의 전과를 불문에 부치겠으니  이에 대한 요구가 있으면 회담을 하자. 연락하라!


4.계속 무력을 사용한다면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조국독립을 방해하는 민족의공 적으로 규정하고  군은 철저한 무력징벌을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전단을 L-5비행기로 각 부락에 뿌렸어.


다음날 회답 삐라가 각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화평방해자들의 나에 대한 인신공격 전단이었고 모슬포 근처에서 발견된 전단은 폭도들의 것으로 감이 오더라고.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에게 전단 내용을 분석케 하고 즉시 공작에 들어갔었어.

이즈음 나는 또 다른 시련을 겪고 있었지. 맨스필드가 미군 고위층의 명령이라고


미군 CIC에 내가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라고 자신을 밝히더라고 국제정세와 한국 장래 문제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 내로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하더군.


그리고 이일을 신속하게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말하며 내게 의견을 물었어.


한마디로 NO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는데 그가 상부의 명령이니 자기와 의견을 며칠 동안 나누어야한다며


다시 설득을 시작했어.

정의감이 강하고 민족의자이며 애국자이고 훌륭한 군인이라고 나를 붕 한번 띄우더니,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과 손실을 분별할 줄 모른다는 거야.


자기에게도 나와 같은 성질이 비슷한 동년배아들이 있는데, 아비의 충고를 듣지 않아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어느 곳에서 고생을 한다며, 나도 출세와 부를 누릴 일생일대의 기회가 올 텐데  고집만 부린다고 얼리고 뺨치고 온갖 짓을 다 하더라고.


또 내가 초토작전을 벌여서 민족주의자들한테 미움을 받아서 살기가 힘들어지면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며 5만 달러를 준다고 하더군.
반응이 없자 이번엔 10만 달 나중엔 얼마가 필요하냐고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더군.
요점은 10만 달러를 챙겨서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고 미국으로 도망치라 이거잖아?

내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자 그자는 내일 다시 만나 답을 하라고 놓아주더군.
이런 유화와 위협 반반인 설득이 며칠 동안 하루 2~3시간씩 계속되었어.

끝끝내 내가 굽히지 않자 마지막에는 당신이야말로 애국자이며 훌륭한 군인이라며 설득을 포기하더군.

한편 선무 공작은 성공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어.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던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이야.


경비대의 선무에 신뢰와 협조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 했는데, 산간부락에 정찰 나온 군인들이 친절하고


닭 한 마리 곡식 한 톨 요구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야.


군인들은 양식을 가지고 나와서 직접 해결을 했고 간혹 민간에 취사를 의뢰하는 경우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렀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겐 자신들의 양식을 나눠주었고 병자들에겐 약을 주었었지.


처음엔 믿지 않던 주민들이 나중엔 산에서 내려와 군대주둔지 부근에 거주하면서 군의 보호를 원하는 주민들이 나날이 늘어났고 평화분위기가 회복되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어.


이런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제주신보 사장님을 비롯한 제주 유지들의 협조와 헌신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공헌했음을 필히 밝히는 바야.


상당수의 제주 유지들과 지식인들은 보신을 위하여 육지로 피신했지만, 이분들은 도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면서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군과 나에게 협조해 주었던 거지.






회담 당사자의 조건으로 내가 내걸었던 조건은 이 세 가지였어.


1.전도의 폭도의 행동을 결정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실력과 권한을 가진 자


2.본인이 직접 나와야지 대리인은 안 된다.


3.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은 즉석에서 결정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폭도들도 요구 조건을 걸었지 역시 세 가지.


1.연대장이 직접 회담에 나와야 한다.


2.연대장 혼자서 와야지 수행인이 2인 이상이면 안 된다.


3.장소와 시일은 자기들이 결정하되 장소는 폭도 진영이라야 된다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군대의 권위를 얕보는 것 같기도 하고,


딱지치기해서 얻은 연대장도 아닌데 1:1 동등한 입장에서 그것도 자기네 폭도들의 본부라니.





만약에 적의 본부에 연대장이 단신으로 갔다가 살해된다?


군이 받을 타격이 너무 크지 않을까, 당연히 참모들은 폭도들이 연대장을 유인


살해하기 위해 기만술을 쓰는 것 아니냐고 의심을 했어.


폭도들 역시 마찬가지 걱정을 하고 있겠지.


몇 번 실랑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회담하기로 결정을 했어.


4월말, 장소는 두시간 전에 폭도들이 통지하고 자기 쪽 사람들이 안내하는 걸로 하고


맨스필드는 회담에 응할 요령과 이런 지침을 내렸어.


① 제9연대장 김익렬은 평화회담에 미군정장관 딘을 대리하는 일체의 권한행사를 한다.


구체적으로 살인 방화 등의 범법자에 대한 극형을 면할 수 있는 사면의 약속을 하고,


기타 범죄는 불문에 부치는 권한을 준다.


서면으로 조인된 모든 약속의 이행은 딘 장군이 책임진다.


② 우리 측의 요구는 즉시 전투중지, 무장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범법행위의 장소, 일자


범행자 명단 작성제출 (그 외 다른 사람들은 불문에 부쳐 자유로이 귀가시키기 위한 방책)





오랜만에 모슬포 연대본부로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데 어쩜 최후가 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만감이 교차하더군.


가족들이 다 잠든 한 밤중, 6개월 된 장남의 얼굴을 보며


회담에서 해야 할 일들을 숙고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 유서를 작성했어.


상관, 친구, 가족들에게 또 부대의 작전행동 등을 기록해 두었지.


그런데 유서를 작성하다보니 생에 대한 애착과 공포심이 들더라고.


그래도 명예가 생명보다 강하다는 군인정신을 생각하며 약한 마음을 떨쳐냈지.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평소처럼 배웅을 하는 모습이 애처러워


몇 번이고 뒤돌아 봤었지.





오전11시 정도에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가 폭도들의 연락을 가지고 왔어.


시간은 오후1시 장소는 폭도들이 안내하겠다는 거야.


장교와 하사관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만일의 경우 연대장을 대행할 지휘관을 결정하고


처음으로 회담 건을 알렸어,


그리고 오후5시까지 귀대하지 않으면 내가 살해된 것으로 알고 전투작전을 개시하라고


지시한 후에 12시 정각 장병들이 도열한 사이를 걸어서 정문을 나왔어.





수행자는 지프 운전병과 정보주임 이윤락(이 분은 박경훈씨도 동행했다고 증언)이렇게 3명이었어. 부대에서 직선거리


15km지점에 이르렀는데 소를 모는 목동이 돌연 차를 가로막아


제지하더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연대장이냐고 묻더니 황색기를 흔들며 신호를 하고


국민학교로 가라고 안내를 했어.


정문엔 보초가 2명 있었고 10여 명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더라고


학교 안에 들어서자 일본군복, 농민복, 작업복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500~600명으로 보이는 폭도들의 무리가 나를 쳐다보는데


과반수가 여자인 것 같더라고.

안내자를 따라 들어간 방에는 5~6명의 폭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미목이 수려하고 보기 좋은 덩치의 나와 동년배쯤으로 보이는 미청년이 눈에 들어왔었어.


그가 앉기를 권하더니 자기가 대표자 김달삼이라고 하며 방문을 감사하다고 하더라고.


서울 표준어를 구사하는 이 청년은 하얀 얼굴에 아주 빼어난 미남이었어.


게다가 겸손하고 침착하기까지 하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냐?” 그는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었어.


“하도 미남이고 영화배우 같아서 내가 상상하던 살인이나 하는 폭도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래”


주변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그는 미소를 짓더니, ‘당신의 질문의 요지를 알겠다.


애국심과 정신이 중요하지 나이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하더군.


그런데 험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다가오더니


“약속이 비무장인데 당신은 어째 무장을 하고 왔소?”


그러면서 회의 중에는 자기들이 보관할 테니 권총을 내 놓으라고 말하더라고.


내가 웃으며 말했지, “당신들 수백 명이 이 권총 한 자루가 무서우냐? 이 권총은 비겁한자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자기의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한 자살용이니 그리 염려 말라”


김달삼이 즉시 그자를 제지하며 무례에 대한 사과를 하더군.





김달삼과 나는 잠시 동안 서로 허세를 부리며 설왕설래를 하다가 마침내 회담에 들어갔지.


김달삼이 먼저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인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해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소?“ 그래서 내가 답하길,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라고 알려주었지.


그러자 김달삼이, 자기 역시 폭도( 제주도 도민의 의거자라 불렀다)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며 미리 준비했던 노트의 메모를 보면서 약 30분간 열변을 토하더군.


내용은 일제하의 민족반역자인 경찰과, 일제의 고관을 지낸 자들이 자신들의 죄상을 감추고자 미국의 주구가 되어,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시대 보다 더 심한 압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경찰은, 무고한 도민의 재산을 강탈하고,


살인, 강간, 고문치사를 일삼고 있다하며 폭동 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일일이 열거하더라고.





또 만주와 이북에서 악질 경찰이나 민족 반역자 노릇을 하던 놈들이


월남해서 서청을 조직하고 경찰과 합세하여 온갖 악행을 자행한다고 말했어.


이것을 견디다 못한 도민들이 민족반역자와, 친일 악질 경찰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의거를


일으켰는데, 민족 반역자나 일제경찰 서청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하면 순종하겠단 내용을 말하더라고.


은근히 걱정했던 경찰이나 서청의 살인, 고문, 약탈, 강간한 자들을 처벌하라는


요구조건은 하나도 없는 아주 간단한 조건이었어.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기 위하여 넌지시 떠 봤지.


“해방이 되고 3년 동안 나는 미군정하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배웠어. 근데 솔직히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당신도 3년 동안에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해 봤자 얼마나 연구를 했겠냐?


민주주의고 공산주의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 아니겠냐?


현재 믿을 수 있고 아는 한 가지 사실은 민족을 위한 자주독립이니 어서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여 나와 합심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


그러자 김달삼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벌컥 내더니,


“나는 연대장이 정의감이 강하고 선악을 분별 할 줄 아는 자인 줄 알았더니, 민족반역자나 경찰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려고 아무나 공산주의자라고 덮어씌우듯 당신도 우리를 공산주의자라 덮어 씌우냐?”


그러자 주변에 있는 다른 폭도들도 내게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붓는 거야‘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더 이상 회담을 진행할 필요가 없어. 이제는 더 믿을 곳이 없으니,


이북에 연락해서 최후로 소련군에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네”’


분을 참지 못한 김달삼의 자포자기적인 언행에 내가 소련군에 연락할 방법이나 있냐고


물었더니 ’있고 말고‘하며 허세를 부리더라고.





김달삼을 진정시키고 ‘당신들이 진정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회담을 진행하자’ 고 하며


그들과 회담을 이어 나갔지. 그들의 말은 자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도민을 구출하기 위한 살기 위하여 일으킨 의거였고,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어.


나는 먼저 지서습격 등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하라고 말했어.


김달삼의 말로는 전 도에 연락하려면 오늘 당장은 힘들고 최소 5일은 걸린다고 하더군.


김달삼 외에 두목들이 있어서 합의할 시간이 필요해서 5일씩이나 시간을 잡는 게 아닌가?


살짝 의심이 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김달삼은 정말 아니라고, 단지 연락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 이라고 했어.





그리하여 이루어진 합의는, 전투 완전 중지는 72시간 이내에 이뤄져야 하고


기타 산발적인 전투는 연락미달로 간주하되 5일 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


다음 즉각 무장해제는 비무장 주민을 먼저 하산시킨 후 약속이행을 보고 3개월 후에


자유와 안전이 확실히 보장되면 대원들의 무장해제를 하겠다고 우기더군.


결국 단계적인 무장해제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마지막, 범법자의 명단작성과 제출인데 이건 완강히 거절했어.


살인 방화는 정당방위였고 의거 전투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가 이유였고


나는 이유가 어떻게 됐든 법치국가에서 법에 호소하지 않은 살인 방화는 불법이며,


재판을 받아야한다고 했지만 이건 완강하게 거절을 하기에 나중에 토의하기로 하고, 이번엔


김달삼의 요구조건을 물었어.





⑴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행정관리와 경찰을 편성하고, 민족반역자와 경찰, 서청을 추방하라


⑵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제주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현재의 경찰은 해체하라


⑶ 의거에 참가한 그 어떤 사람의 죄도 불문에 부치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


이 세 가지가 김달삼이 내놓은 조건이었어.





⑴ 친일파 민족반역자 관리, 경찰과 서청의 범죄사실이 밝혀지면 해직 추방할 것이나,


행정기구나 경찰을 편성하는 것은 정치적인 일이지 군인인 나의 권한 밖이다.


⑵ 평화회담이 성립되면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경찰은 군대의 보조역할을 할 뿐이니 해체할 필요도 없으나,


인원은 감축 개편한다. 두 번째 요구조건까지 합의가 끝났어.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교전 시 외에 발생한 살인 방화범을 제외하고는 전원 범죄일체를 불문에 부치겠지만,


살인 방화자들과 기타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하면 사형이나 종신형 같은 중형에 처하지는


않겠다는 보장에 김달삼은 완강히 거절했어





시간은 벌써 4시 30분!


5시까지 부대에 돌아가지 않으면 보복의 전투가 시작되니 일단 휴회를 하고 내일 다시 이 장소에서 회담을 계속하자 했더니


갑자기 회담장소에 긴장이 감돌더군.


그는 오늘 내로 회담을 결말짓지 못하면 사실상 회담은 결렬되는 것이라고 하며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 회담이 결렬되는 것이 나도 아쉽고 두려웠지.


그래서 회유책으로 명단은 작성하되 자수나 도망은 자유의지에 맡기겠다.


나 개인적으로 도외나 일본으로 탈출을 위한 배 한척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동의하더라고.


김달삼은, 자신만은 모든 약속이 준수 이행되면 당당히 자수하고, 폭동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 하며 경찰의 압정과 만행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노라고 말하더군,


이런 쾌남아다운 면모가 폭도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으리라.





합의된 귀순절차는 내일 낮12시를 기하여 모슬포 연대본부 내에 1개소,


제주 읍 비행장에 1개소의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되 군대가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어.


이젠 성실한 약속이행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허탈감마저 들었는데 그들은 합의서의


약속이행을 거듭 강조하며 진짜 약속대로 되는 것이냐고 묻고 되물었어.


나 하나만을 달랑 믿고 그들 모두의 목숨을 걸려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의 가족을 인질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했었지.


감격의 함성이 터져 나오고 여자들 중에는 엉엉 우는 사람들, 퉁퉁 부은 젖가슴을 내 보이며 속히 집에 돌아가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도 있었어.

김달삼은 감격하여 눈물어린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송구스러워서 가족 분들을
불편한 산에서 모시진 못하니 연대에 있는 숙소에서 나오셔서 자기가 지정하는 민가로
옮기도록 하고, 일체의 군인배치를 금하고 출입도 금해달라고 부탁했어.
혼쾌히 승낙하고 그들의 애원과 칭송들을 들으며 하산해 부대에 도착, 성공 소식을 알리고  제주 읍으로 나가서 맨스필드를 만나 결과를 보고했지.


맨스필드는 엄청 기뻐하며 칭찬을 하더라고. 그리고 바로 전 경찰은 지서만 수비 방어하고 외부에서의 행동은 일절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더군. 일체의 치안책임은 경비대에 일임되고 전단을 만들어 회담의 내용을 전도에 살포하며 폭도들의 행동을 주시했어.

그들은 약속대로 대정 중문 면 일대에서 그날로 즉각 전투를 중지했어.
그리고 서귀포 한림 제주 읍에 이르는 일대에서도 전투를 완전히 중지했었어.
조천 면 관내 몇몇 곳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으나 그것도 곧 중지되니
오랜만에 제주에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었지.

첫날엔 연소자와 부녀자만 조금 귀순, 점차적으로 늘어나더니 급기야
수용소에 준비한 천막이 부족할 정도가 되었어.
그래서 일부 귀가를 희망하는 자들은 귀가조치를 하고, 병사들은 정신없이 분주해졌지만
신이 나서 천막을 치고 또 선무공작에도 나서며 피곤조차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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