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사회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신채호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대동사회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신채호
등록 :2013-12-08 19:47
신채호는 민중 직접혁명을 꿈꾼 아나키스트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뤼순감옥에 복역할 당시의 신채호와 뤼순감옥 내부 모습, 신채호의 아나키즘이 집약된 <조선혁명선언> 책자. 돌베개 제공
진정한 혁명은 국가·계급 철폐
정치 부인해야 무산계급 해방
지도자 아닌 민중의 행동 강조
신채호 다시 읽기
이호룡 지음
돌베개·1만8000원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생의 후반부에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은 학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교과서 등을 통해 주입된 ‘민족주의자’ 이미지가 워낙 강한 탓에, 아나키스트의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사회주의와 함께 반자본주의 운동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아나키즘’에 대해 터부시해온 것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일제시대 아나키즘 연구에 힘을 기울여온 이호룡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쓴 <신채호 다시 읽기>는 신채호의 일대기를 그가 쓴 저서와 신문사설,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저술을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한 평전이다.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신채호 사상의 진면목을 이해하려면 아나키스트로서 그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책은 신채호의 일생을 따라가며, 개화론·자강론에서 민족주의로, 다시 사회주의를 거쳐 아나키즘으로 이어지는 그의 사상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1910년대 전반부까지 신채호는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언론인으로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 민족주의 의식을 높이기 위한 글을 쓰고, <독사신론> <대동제국사 서언> <조선상고문화사> 등의 저술을 통해 민족주의 사학을 개척했다. 민족주의 내부의 두 갈래였던 선실력양성론과 독립우선론 가운데서는 후자의 입장이었다.
지은이는 신채호의 사상 전환의 계기를 러시아혁명과 3·1운동으로 본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목격하면서 점차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사회개조·세계개조론과 결합된 대동사상을 수용하게 되었고, 1919년 3·1운동에서 민중의 힘을 목격한 뒤 민중 해방을 표방하는 사회주의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가 ‘위임통치론’을 펴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임정을 탈퇴해 반임정 투쟁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임정의 독립운동 노선에 맞서,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 운동론, 즉 민중 직접혁명론과 그 방법론으로서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정립해 나가게 된다.
신채호가 꿈꾸었던 사회는 무엇보다 빈부격차와 계급이 없는 ‘대동사회’였다. “최근에 와서 노동·자본 양 계급의 전쟁이 된 바라. … 과학과 공예의 진보된 결과로 일 기계가 백천 철공의 직무를 대행함에 노동자는 호구의 벌이가 어렵고, 경제의 조직이 변천하여 연합회사가 증가함에 소자본가는 입족할 여지도 없도다. … 고로 우리도 미래의 이상세계는 빈부 평균을 주장하노라.”(<신대한> 창간사)
일제로부터 독립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해방 뒤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회가 민족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 신채호는 ‘빈부 평균’의 사회였다는 점에서, 그는 더는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갈 수 없었다. 공산주의 세력은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해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을 추진하지만, 신채호는 이런 연합에 반대하며 신간회 참여도 거부할 만큼 민족주의 세력에 비판적이었다. 지은이는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수용한 1920년대 이후에도 계속 민족해방을 주장한 것은 그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하에서는) 민족해방이 곧 민중해방인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럼 신채호는 왜 사회주의가 아닌 아나키즘을 주장했을까?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결별하는 지점은 국가나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여부다. 아나키즘은 국가는 설사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국가라도 필연적으로 권력 집중과 지배·피지배 관계를 낳는다고 본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이상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조선혁명선언>) “일체의 정치는 곧 우리의 생존을 빼앗는 우리의 적이니, …그들의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 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다.”(<선언>)
혁명을 이끌 ‘전위조직’이나 ‘지도자’ 인정 여부도 중요한 차이다. “신채호는 전위조직의 지도하에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민중 직접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제일의 조건으로 ‘민중의 각오’를 들고, 민중의 각오는 지도자가 아니라 선각한 민중의 직접행동을 통해 이뤄진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 ‘직접행동’은 신채호에게 일제 세력을 겨냥한 암살, 파괴, 폭동 등이었다.
신채호는 아나키스트 국제조직인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운영자금을 확보하려고 1928년 외국환 위조를 시도하다 일제에 검거된다. 감옥에서 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세계어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했다. 이전에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썼던 저술들을 아나키즘 사관에 입각해 수정하기 위해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1936년 만기출옥을 2년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을 때, 그의 유품은 판결문 1통, 상아도장 1개, 작은 수첩 2권, 중국 돈 1원, 10통의 편지, 안재홍의 <백두산 등척기>, 이선근의 <조선 최근세사>, 그리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폿킨의 사상집이었다. “가난과 병은 서로 따라다니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네”라고 생전에 읊었던 가난한 ‘자유인’, 신채호는 아나키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14473.html#csidx58386ac923a01b4be115e1cb489b0ed
대동사회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신채호
등록 :2013-12-08 19:47
신채호는 민중 직접혁명을 꿈꾼 아나키스트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뤼순감옥에 복역할 당시의 신채호와 뤼순감옥 내부 모습, 신채호의 아나키즘이 집약된 <조선혁명선언> 책자. 돌베개 제공
진정한 혁명은 국가·계급 철폐
정치 부인해야 무산계급 해방
지도자 아닌 민중의 행동 강조
신채호 다시 읽기
이호룡 지음
돌베개·1만8000원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생의 후반부에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은 학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교과서 등을 통해 주입된 ‘민족주의자’ 이미지가 워낙 강한 탓에, 아나키스트의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사회주의와 함께 반자본주의 운동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아나키즘’에 대해 터부시해온 것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일제시대 아나키즘 연구에 힘을 기울여온 이호룡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쓴 <신채호 다시 읽기>는 신채호의 일대기를 그가 쓴 저서와 신문사설,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저술을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한 평전이다.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신채호 사상의 진면목을 이해하려면 아나키스트로서 그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책은 신채호의 일생을 따라가며, 개화론·자강론에서 민족주의로, 다시 사회주의를 거쳐 아나키즘으로 이어지는 그의 사상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1910년대 전반부까지 신채호는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언론인으로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 민족주의 의식을 높이기 위한 글을 쓰고, <독사신론> <대동제국사 서언> <조선상고문화사> 등의 저술을 통해 민족주의 사학을 개척했다. 민족주의 내부의 두 갈래였던 선실력양성론과 독립우선론 가운데서는 후자의 입장이었다.
지은이는 신채호의 사상 전환의 계기를 러시아혁명과 3·1운동으로 본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목격하면서 점차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사회개조·세계개조론과 결합된 대동사상을 수용하게 되었고, 1919년 3·1운동에서 민중의 힘을 목격한 뒤 민중 해방을 표방하는 사회주의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가 ‘위임통치론’을 펴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임정을 탈퇴해 반임정 투쟁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임정의 독립운동 노선에 맞서,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 운동론, 즉 민중 직접혁명론과 그 방법론으로서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정립해 나가게 된다.
신채호가 꿈꾸었던 사회는 무엇보다 빈부격차와 계급이 없는 ‘대동사회’였다. “최근에 와서 노동·자본 양 계급의 전쟁이 된 바라. … 과학과 공예의 진보된 결과로 일 기계가 백천 철공의 직무를 대행함에 노동자는 호구의 벌이가 어렵고, 경제의 조직이 변천하여 연합회사가 증가함에 소자본가는 입족할 여지도 없도다. … 고로 우리도 미래의 이상세계는 빈부 평균을 주장하노라.”(<신대한> 창간사)
일제로부터 독립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해방 뒤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회가 민족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 신채호는 ‘빈부 평균’의 사회였다는 점에서, 그는 더는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갈 수 없었다. 공산주의 세력은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해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을 추진하지만, 신채호는 이런 연합에 반대하며 신간회 참여도 거부할 만큼 민족주의 세력에 비판적이었다. 지은이는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수용한 1920년대 이후에도 계속 민족해방을 주장한 것은 그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하에서는) 민족해방이 곧 민중해방인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럼 신채호는 왜 사회주의가 아닌 아나키즘을 주장했을까?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결별하는 지점은 국가나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여부다. 아나키즘은 국가는 설사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국가라도 필연적으로 권력 집중과 지배·피지배 관계를 낳는다고 본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이상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조선혁명선언>) “일체의 정치는 곧 우리의 생존을 빼앗는 우리의 적이니, …그들의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 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다.”(<선언>)
혁명을 이끌 ‘전위조직’이나 ‘지도자’ 인정 여부도 중요한 차이다. “신채호는 전위조직의 지도하에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민중 직접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제일의 조건으로 ‘민중의 각오’를 들고, 민중의 각오는 지도자가 아니라 선각한 민중의 직접행동을 통해 이뤄진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 ‘직접행동’은 신채호에게 일제 세력을 겨냥한 암살, 파괴, 폭동 등이었다.
신채호는 아나키스트 국제조직인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운영자금을 확보하려고 1928년 외국환 위조를 시도하다 일제에 검거된다. 감옥에서 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세계어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했다. 이전에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썼던 저술들을 아나키즘 사관에 입각해 수정하기 위해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1936년 만기출옥을 2년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을 때, 그의 유품은 판결문 1통, 상아도장 1개, 작은 수첩 2권, 중국 돈 1원, 10통의 편지, 안재홍의 <백두산 등척기>, 이선근의 <조선 최근세사>, 그리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폿킨의 사상집이었다. “가난과 병은 서로 따라다니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네”라고 생전에 읊었던 가난한 ‘자유인’, 신채호는 아나키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14473.html#csidx58386ac923a01b4be115e1cb489b0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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