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4

한말의 유학자들은 왜 대동교를 만들었을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한국종교문화 연구소에서는......                                     newsletter No.229 2012/9/25
한말의 유학자들은 왜 대동교를 만들었을까

19세기 말 조선사회의 변화는 외부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구 사회 팽창의 기운은 중국과 일본을 거쳐 한반도까지 밀려왔다. 이 충격에 대한 변화는 서구 물질문명 세계의 도전을 조선의 정신문화가 겪어야 하는 갈등과 수난의 역사였다. 이 변화는 숱한 혼란을 거듭하면서 진행되지만 결국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전폭적인 서구 문명의 수용이 아니고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을 지켜내는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노력은 성공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끝내는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겪었다. 오늘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비운의 역사를 되집어 보는 까닭은 우리 역사의 시련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기되었던 다양한 방법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는 데 있다. 그 대안의 의미와 한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력을 앞세운 서구 문명이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자 조선의 지식인들의 대응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서구의 물질문명은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보자면 금수에 가까운 무리이므로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위정척사파이다. 이들 가운데는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서 외부와 단절을 선언하고 복벽운동의 일환으로 의병전쟁의 선봉장으로 나선 사람도 있다. 둘째는 서구 문명은 놀라운 것이어서 정면으로 맞서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런 까닭에 하루 속히 서구 문명을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한 개화파이다. 이들은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급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개혁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셋째는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도덕과 윤리 면에서는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동도서기파이다. 이들 가운데 대동교 만들기에 나섰던 사람들은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부국강병한 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원인을 두 가지로 이해하였다. 하나는 실험을 거쳐 입증된 결과를 중시하는 과학이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기독교였다고 보았다. 이들의 주장은 조선도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합리적인 과학정신을 수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민정신을 결집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서양의 기독교보다는 전통적으로 우리의 삶을 규율해 온 유교를 국교로 보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고루하고 완고한 유교계를 실천적이고,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모습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대동교 만들기였다.



대동교 만들기의 배경은 일제의 유림 친일화에 있었다. 일제는 이완용·신기선 등 친일 인사들을 통하여 1907년 대동학회를 조직하고 유교계를 친일화하려고 하였다. 
대동학회는 1907년에 창립된 친일 유교단체로 창립 과정에서 이완용(李完用) · 조중응(趙重應) 등이 일본 황태자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초대 회장으로 신기선이 선출되었는데 그는 취임사에서 학문의 체용(體用)을 잃지 않기 위해 유도(儒道)와 신학문을 결합시키고자 한다고 하였다. 일제는 강연회총회 등을 통해 유림의 친일화를 도모하였다. 대동학회는 1909년 10월 이등박문이 25만원을 지원하여 이름을 공자교로 바꾸고, 일진회에 버금가는 친일행각을 하였다.



이처럼 유교계가 친일화되어가자 박은식·장지연 등은 친일 조직인 대동학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동교를 만들었다. 국민들의 정신을 결집시키기 위해 대동교를 만들고자 하였던 박은식은 종교의 목적을 내세의 구원을 얻는 것 보다는 현실에서 국가 발전의 밑거름으로 이해하였다. 그에게 현실을 타개하는 대안은 부국강병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대동교가 추구하는 대동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대동사회는 그 연원을『예기』와『춘추』에 두고 있다. 박은식은 『예기』의 「예운」편과 『춘추』의 「공양전」에서 대동사상의 근원을 찾았다. 그는 공자의 대도를 대동사상에 있다고 보았다. 『예기』에 나타난 대동세계는 다음과 같다.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평하나니 어진이를 선거하여 정치를 하게 하면 능력자에게 행정이 맡겨지고 믿음에 기초한 사회와 화목한 가정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 아니 한다. 늙은이는 임종할 곳이 있고 젊은이는 쓰일 곳이 있으며, 어린이는 양육 받고 홀아비과부고아늙은이는 모두 부양받을 수 있다. 남자는 해야 할 일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데가 있다. 대도가 행해지는 세상은 재물을 아끼지만 반드시 자기 집에만 저장하지 않으며, 능력을 존중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술수가 사라지고 도적이 없어서 대문이 있어도 잠그지 않고 산다"라고 되어있다. 

대동사회는 인격을 존중하고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사회이다.



이와 같은 대동사회는 치열한 경쟁으로 들끓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이상일 뿐이었다. 이 당시 조선사회가 변해야한다는 주장을 하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였다. 우승열패·약육강식·적자생존을 골자로 하는 사회진화론이 조선에 소개되었을 때 한말의 선각자들은 ‘조선적’인 변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사고 다시 말하면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국가주적인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게 된다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인물들 가운데는 제국주의 침략을 인정하는 논리로 혹은 민족의식의 형성의 기반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진화론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사상적인 분화가능성이 있기도 하였다.



대동교 만들기의 주역들 가운데 두 사람 박은식과 장지연은 1910년 국권을 상실한 이후에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유교를 공부하였고, 똑 같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해석에 있어 차이를 보임으로써 박은식은 국권상실 이후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택하였다. 장지연은 국내에 남아서 좌절을 거듭하다가 끝내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 

박은식은 무한경쟁 이론인 사회진화론을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대동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인식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세계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먼저 조선의 독립이 실현되어야 된다고 보고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반면에 장지연에게 사회진화론은 좌절의 뿌리가 되었다. 그는 국망 이후 술로 세월을 보내며, 통곡하면서 조선과 조선인의 무기력함에 절망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 들였다. 이후 그는 국내에 남아 총독부의 시책을 선정으로 미화하는 일에 나선다. 1911년부터 그는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문》에 일본의 시책을 찬양하는 글을 다수 싣게 된다.

대동교가 지향하였던 사회는 생존경쟁을 넘어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대동교 만들기의 주역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모든 사람이 다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을 ‘대동사회’라고 이름하였다. 대동교 만들기는 결국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상황에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맞게 된다. 대동교는 한말 한반도를 둘러싸고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유교가 실현 가능한 방법으로 접근한 의미있는 구국운동이었다.

김순석_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sskim@koreastudy.or.kr

주요논문으로 〈박은식의 사회진화론 인식과 실업교육관〉,

박은식의 대동교 설립운동〉,

〈한국 근대 불교계의 민족인식〉 등이 있고,

저서로 《대산 이상정의 생각과 삶》, 《한국사상의 재조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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