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능하지 않았지만 유능하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았지만 강하지도 않았으며, 정치감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나지는 못하였으며, 일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핵심이 어디인지 혼동하였으며, 둔하지도 않았지만 민첩하지도 않았고, 인사를 알고 있음에도 인사를 몰랐으며, 자신의 시대가 근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전근대적으로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수십 년 고종 재위기에 조선왕조가 사실상 망했으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이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을 호평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는 우호적인 평가 vs. 암울한 한국근현대사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의 암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까는 쪽의 요지는 민씨 일파의 부패, 그의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부른 일[37]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도 무너뜨려버린 일 등을 꼽는다. 그리고 양무호 구입을 비롯해서 기분으로 밀덕질[38] 하다가 재정 파탄 내 버리고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 이건 당시 대한제국 지도부가 근대전과 그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는 근거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운요호 사건이나 임오군란 등을 보면 소수의 구식군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했다. 일단 자기 몫(내탕금) 챙기는 데만 열심이었을 뿐, 군사예산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고종이 개혁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메이지유신을 보면 천황을 위시한 중앙집권화를 실시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는데, 조선은 상당부분 그러한 제도개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법이 전근대적일 거라 생각해 토지소유권을 재정하려 했으나 조사결과 이미 토지소유권이 있었던 게 대표적 예. <일본 한국병합을 말하다>, <6조 우리역사넷>이하 박문국,기기창, 전환국,동일
고종도 박문국,전환국,기기창을 설치했고 경복궁에 전구를 부설했으나 근대무기 제작에 실패하면서 일본 식민지의 그림자로 다가서게 된다. 국왕이 제도개혁을 게을리해서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 이미 근대화되어있던 기존의 제도가 현실에서 개막장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망했던 것. 고종의 실책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이미 있는 문제를 가속화한 것뿐이다. 그러니 더 비판받야 할 수도 있지만....
광무개혁 등의 개혁도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성과를 따지면 변변찮았고 식민지화를 막아낼 근본적 개혁과는 안드로메다 급 차이가 있었다.
커피나 자동차로 대변되는 자기 취미를 가졌다는 것도 훌륭한 것이 아니다. 송휘종이나 명 4대 암군들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자기 취미에 너무 깊이 빠진 군주는 나라를 말아먹기가 쉽다.
게다가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39] 그런데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을 모으는 데는 능숙했어도 돈을 제대로 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왕실 유지를 위해 걷는 내탕금도 과다해서 여러 개혁 이후에도 국가 세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물론 개혁핑계로 내탕금을 모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했기 때문에, 고종의 개혁정책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물론 반박도 있다. 독립협회는 뚜렷한 권력기반도 없으면서 아예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자 하였고 이를 자랑하며 고종과 유림의 경계를 자초했다. 결국엔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민중까지도 등을 돌려버릴 만큼 과격한 행보를 일삼았으니 독립협회는 고종때문에 몰락한 게 아니라 내부적인 모순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독립협회, 중추원 항목 등을 참조.
동학 농민 운동도 결국 일본군이 아니라 신식무기를 갖춘 관군에게 동학군의 진격이 저지된 것이었지만, 만약 실패했을 경우 도성으로 수십만 반군이 몰려드는 처지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군이 꼽사리 낄 것이란 고려도 못 한 것이니 정신 나간 판단인 건 맞긴 하다.
사실 동학농민운동에서 농민군을 청군으로 진압하겠다는 발상과 이 때문에 일본군이 올 것을 예상했으면서 묵인한 것,[40] 그리고 실제로 동학운동을 진압하면서 일본군의 학살과 진압을 조선관군이 직접적으로 지원해주면서 진압한 것은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에서 할 발상이라고 이해해 줄 여지가 눈꼽 만큼은 있다. 하지만 더 정신나간 문제는 고종이 이런 정치적 문란, 민란이나 농민운동을 겪고서도 그에 대한 후속조치가 더 정신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동학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사태가 종식된 후 1년간 유배형을 가나 곧 고종이 직접 사면하여 법무민사국장에 이어 고등재판소 판사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고등재판소 판사가 된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자 2대교주였던 최시형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동학군이 당시로서는 반군이라지만 탐관오리에게까지 이런 처우를 한 것은 유교적 왕도정치에도 맞지 않은 것이었다.
고종의 이런 용인술은 역시 같은 탐관오리인 조병식을 후에 황국협회에 가담하게 하여 신나게 민권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는 예에서, 그리고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홍종우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고종은 전제군주적인 권력을 위해서라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탐관오리건 누구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상당한 자금지원을 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은 모조리 고종의 밀지나 자금지원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받고 활동했다. 이는 고종의 사망전후까지 이어져서 을미의병부터 1920년대까지의 국내외 대일본투쟁에는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무렵은 아직 전근대라면 전근대인 시기였다.
또한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외국에 힘없이 내준 점도 비난받는 부분이긴 하나, 당시 조선은 근대화 개혁이 표류하면서 스스로는 개발할 기술도 능력도 부족했던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권을 한 나라에게 몰아주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에게 흩뿌려 준 것도, 최대한 많은 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걸치게 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당초 러시아, 청, 일본을 제외한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에서 얻는 이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수준이라, 청나라, 러시아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열강들은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는 걸 쉽게 인정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권을 내주면서 얻은 자금이라도 제대로 쓴 거냐면 위에서 말했듯 그것도 아니었다.
고종은 이권을 통해서 당시 외교관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성공적 매수가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였고, 사실상 실패한 것이 미국공사 호너스 뉴턴 알렌이다. 이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는데, 베베르는 러일전쟁 전까지 주 활약시기였던 러시아 공사였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효과가 아주 컸다. 반면에 알렌은 러일전쟁 패전 이후까지 남아 있었고, 실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기 때문에 고종이 더 이상 이권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등을 돌리고 배신해버렸다.
만일 러일전쟁이 벌어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미국이 승인하는 형태로 결론이 나왔다면, 고종의 매수외교는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뤼순을 점령하는 등의 러시아의 강경화와 무엇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이런 외교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고종의 자금은 고종 본인이 앞장서면서 한 매관매직으로 인해 번 돈이었던 것이 매우 큰 문제였다. 매관매직으로 돈을 모으니 당연히 관리들의 기강이 무너지는 건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민생의 파탄을 불러 와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 어떻게 보면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후에 조선에 미친 제일 확실한 영향으론, 왕비인 중전 민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 시 국상일에 맞춰서 3.1 운동을 일으킬 기회나 주었다는 것 정도. 실제로 33인이라는 인물 중에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거나 고종을 지지하였던 오세창, 이상설, 한용운과 같은 부류 외에도, 독립협회 문제나 동학 관련으로 고종에 불만이 많았던 손병희, 윤치호, 안창호와 같은 부류가 존재했다. 이들이 고종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고종의 영향력 자체는 존재했기 때문에 3월 1일이 된 것이다.[41] 이후 김구 등은 임시정부에서 왕정복고는 주장하지 않았어도 구황실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20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고 러시아 거류 한인들에게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다는 내용의 일본 기밀문서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 책임연구원 신운용은 다른 방계 사료로 그런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 안중근 의거를 병탄의 기회로 노리고 있던 통감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일제 외무성이 고종 배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 고종과 황실이 안중근의 의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에서 성립될 수 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했다.[42][43]
그 외 업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려준 것 정도가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김구 선생의 명성황후 시해관련 일본인 살해 건은 백범일지의 기록과 달리 실제 불투명한 점이 많아 고종이 그를 살려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궁전 내에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서 살려줬다는데, 그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서 살고 있었다.[44]
그 외에 중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학설도 존재하는데, 만일 실제로 임시정부에 고종이라는 구심점(+자금줄)이 존재하였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그 수준을 달리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고종이 확실하게 고평가를 받을 만한 점은,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뒤로는 일본 엿 먹일 궁리를 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면전에서 그 점을 비꼬기도 했다. 일본이 뭐 자기네 힘 과시하려고 고종 끌어내린 게 아니다. 고종이 일본의 계획에 실질적으로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끌어내린 것이다. 즉, 고종이 정말 일본에 저항할 의지도 없었다면 일본이 굳이 순종에게 양위를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고종을 비판했던 수많은 국내의 지식인들과 명사들 중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제에 굴복해서 변절의 길을 걸었다. 고종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거의가 개화파를 잇는 인사들이었고, 이들에게 일본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면서 근대화의 교사라는 양면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고종 역시 일제에 타협하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형태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는 물론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 평가는 최악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반대세력이 과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단적으로 베트남국이 이런 식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의 이전 군주들은 이런 형태로 다루어진 사례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고종이 이런 길을 걸었다면 일제의 조선병합은 한결 수월하였을 것이다. 순종은 비교적 온순한 식민지 군주였지만, 일제에 의해서 옹립되었다는 근원적 문제에 더해서 김홍륙 독다 사건으로 폐인이 되었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어서 큰 의미 부여는 안 되었다. 단적으로 고종이 죽은 이후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군주정(유교적인 전제군주정이든 근대적인 입헌군주정이든)이라는 정치체제를 주장한 단체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끝까지 저항했다는 그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지, 그 저항은 전혀 유효하지 못한, 부실한 방식이었으므로, 국가원수로서 까방권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이전에 이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독립조직인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를 자신의 전제권력에 반한다는 이유로 정치깡패를 동원해 해산시킨 시점에서 고종의 모든 저항관련 행위의 제1 목적은 결국 본인의 전제권력 복권이고, 민족의 해방은 결국 고종에게 이를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했다는 가설을 부정하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고종의 막장 행보가 아니었다면 개화파들이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한일병합 이전 개화파의 행태는 전권을 요구하는 것이었고(입헌군주제) 이는 고종에겐 반역이나 다름 없는 요구였다. 사실 세계적인 추세로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전근대적인 것도 아니다. 당장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라고 불리는 나폴레옹 3세가 고종과 맞물리고,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패전까진 무늬만 입헌군주국인 독일 제국이었다. 러시아 제국도 별반 다른 처지는 아니었고... 대영제국, 미국 같은 나라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다.
과학만 근대적이었지 정치적으로 '근대적인' 국가는 당시에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친청, 친러, 친일, 친미파등 개화세력도 중구난방으로 갈라져 정권 획득을 위한 연줄 만들기에 몰두했고, 자기들끼리 대립했다. 당시 중추원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과욕이나 광무개혁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족한 현실 인식 등을 보면 고종의 레벨로는 무슨 짓을 해도 무리였다. 특히 급진개화파들의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은 위정척사를 외친 유생들보다도 더 이상주의적이라, 일본이 하는 제안은 속내도 의심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었다.
위태한 상황을 타개해 보겠다고 나름 나서던 엘리트 지식인층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다가 나중에 일방적으로 탄압해 버리는 왕에게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 세력을 키워준 건 고종이고 뒤통수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먼저 때렸다. 심지어 이때는 노선이 조금 온건하다고 다른 개화파 세력들까지 다 죽이려 했다.
갑신정변 이 사건으로 개화파는 왕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라 팔아먹으려는 역적집단으로 몰린 터이고 개화파가 고종을 까는 건 사실 자기들의 이런 삽질들을 고종에게 떠넘기려는 측면도 어느 정도 있었다. 게다가 이후로도 개화파는 자기들끼리 반목했고,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 노선이 전혀 다른 대원군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등 이미 막장화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을미사변 때 뒤통수를 쳐 댄 놈들인 건 마찬가지라 도긴개긴이다. 게다가 현대 시각으로 봐도 급진 개화파의 개혁 방안은 취지는 좋을지 모르나 방법론에서는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고종이 권력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대원군은 고종이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려 하지도 않아 민씨 일가와 힘을 합쳐 몰아내야 했고, 친정을 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쿠데타 시도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 대원군은 자신을 복권시킬 세력으론 노선이 완전히 다른 급진개화파, 청나라, 일본, 동학농민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이든 가리지 않고 손을 잡으려고 할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고종으로서는 자기 측근들 빼고는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여겼을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는 했다. 물론 그것이 고종의 실정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망국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하지만.
고종은 전제군주국의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었다. 선진국가라는 유럽의 군주들 역시 대부분 전제군주국인 상황이거나 막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되어가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전제군주 했다고 일방적으로 욕먹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에까지 영향력이 있던 국가 중 영국은 입헌군주국이고 미국은 공화국이었다. 그나마 독일, 러시아가 황제의 권력이 막강했고 이때문에, 고종이 은근히 이들 국가에 친근감을 보여 결국 친러적인 정책을 폈는데, 정작 그 러시아의 상황이 개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 결국 낭패를 보았다. 괜히 러시아에 반감을 가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나쁜 이미지만 심어주는 결과를 자초했다.
그의 저항은 주로 아관파천, 의병 궐기 권유 같은 꼼수나 헤이그 특사, 이권 배분 같은 외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자존심과 목숨까지 버려가며 저항한 전왕조인 고려의 우왕이나 공양왕과 비교된다. 물론 고려 왕족들은 힘이 닫는 한 적극적으로 저항한 탓인지 결국 왕씨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고종의 능력치나 정치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통적 조선의 군주로서는 호포제, 사창제 유지, 유림 제지 등 최악은 아닌 수준이었고 독립협회 개발살내는 때의 꼼수는 혀를 내두를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청나라가 무너지고 일본이 개항되고 서양개항선이 몰려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선 뭐... 서양인 하면 치를 떤 동시대 일본의 메이지 덴노와는 달리 나름 근대화에 관심은 보였지만, 기초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전무한 상황에서 잘 되면 그게 이상한 거고...
종합적으로 보면 좋게 표현해봐야 위기인 상황에서도 대원칙이 없이 임기응변만 한 인물이고, 꼼수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해도 자기도 그걸 타개하지 못 해 꼼수밖에 못 쓰게 된 인물로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수십 년 고종 재위기에 조선왕조가 사실상 망했으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이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을 호평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는 우호적인 평가 vs. 암울한 한국근현대사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의 암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까는 쪽의 요지는 민씨 일파의 부패, 그의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부른 일[37]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도 무너뜨려버린 일 등을 꼽는다. 그리고 양무호 구입을 비롯해서 기분으로 밀덕질[38] 하다가 재정 파탄 내 버리고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 이건 당시 대한제국 지도부가 근대전과 그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는 근거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운요호 사건이나 임오군란 등을 보면 소수의 구식군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했다. 일단 자기 몫(내탕금) 챙기는 데만 열심이었을 뿐, 군사예산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고종이 개혁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메이지유신을 보면 천황을 위시한 중앙집권화를 실시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는데, 조선은 상당부분 그러한 제도개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법이 전근대적일 거라 생각해 토지소유권을 재정하려 했으나 조사결과 이미 토지소유권이 있었던 게 대표적 예. <일본 한국병합을 말하다>, <6조 우리역사넷>이하 박문국,기기창, 전환국,동일
고종도 박문국,전환국,기기창을 설치했고 경복궁에 전구를 부설했으나 근대무기 제작에 실패하면서 일본 식민지의 그림자로 다가서게 된다. 국왕이 제도개혁을 게을리해서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 이미 근대화되어있던 기존의 제도가 현실에서 개막장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망했던 것. 고종의 실책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이미 있는 문제를 가속화한 것뿐이다. 그러니 더 비판받야 할 수도 있지만....
광무개혁 등의 개혁도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성과를 따지면 변변찮았고 식민지화를 막아낼 근본적 개혁과는 안드로메다 급 차이가 있었다.
커피나 자동차로 대변되는 자기 취미를 가졌다는 것도 훌륭한 것이 아니다. 송휘종이나 명 4대 암군들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자기 취미에 너무 깊이 빠진 군주는 나라를 말아먹기가 쉽다.
게다가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39] 그런데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을 모으는 데는 능숙했어도 돈을 제대로 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왕실 유지를 위해 걷는 내탕금도 과다해서 여러 개혁 이후에도 국가 세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물론 개혁핑계로 내탕금을 모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했기 때문에, 고종의 개혁정책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물론 반박도 있다. 독립협회는 뚜렷한 권력기반도 없으면서 아예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자 하였고 이를 자랑하며 고종과 유림의 경계를 자초했다. 결국엔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민중까지도 등을 돌려버릴 만큼 과격한 행보를 일삼았으니 독립협회는 고종때문에 몰락한 게 아니라 내부적인 모순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독립협회, 중추원 항목 등을 참조.
동학 농민 운동도 결국 일본군이 아니라 신식무기를 갖춘 관군에게 동학군의 진격이 저지된 것이었지만, 만약 실패했을 경우 도성으로 수십만 반군이 몰려드는 처지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군이 꼽사리 낄 것이란 고려도 못 한 것이니 정신 나간 판단인 건 맞긴 하다.
사실 동학농민운동에서 농민군을 청군으로 진압하겠다는 발상과 이 때문에 일본군이 올 것을 예상했으면서 묵인한 것,[40] 그리고 실제로 동학운동을 진압하면서 일본군의 학살과 진압을 조선관군이 직접적으로 지원해주면서 진압한 것은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에서 할 발상이라고 이해해 줄 여지가 눈꼽 만큼은 있다. 하지만 더 정신나간 문제는 고종이 이런 정치적 문란, 민란이나 농민운동을 겪고서도 그에 대한 후속조치가 더 정신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동학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사태가 종식된 후 1년간 유배형을 가나 곧 고종이 직접 사면하여 법무민사국장에 이어 고등재판소 판사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고등재판소 판사가 된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자 2대교주였던 최시형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동학군이 당시로서는 반군이라지만 탐관오리에게까지 이런 처우를 한 것은 유교적 왕도정치에도 맞지 않은 것이었다.
고종의 이런 용인술은 역시 같은 탐관오리인 조병식을 후에 황국협회에 가담하게 하여 신나게 민권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는 예에서, 그리고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홍종우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고종은 전제군주적인 권력을 위해서라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탐관오리건 누구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상당한 자금지원을 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은 모조리 고종의 밀지나 자금지원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받고 활동했다. 이는 고종의 사망전후까지 이어져서 을미의병부터 1920년대까지의 국내외 대일본투쟁에는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무렵은 아직 전근대라면 전근대인 시기였다.
또한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외국에 힘없이 내준 점도 비난받는 부분이긴 하나, 당시 조선은 근대화 개혁이 표류하면서 스스로는 개발할 기술도 능력도 부족했던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권을 한 나라에게 몰아주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에게 흩뿌려 준 것도, 최대한 많은 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걸치게 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당초 러시아, 청, 일본을 제외한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에서 얻는 이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수준이라, 청나라, 러시아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열강들은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는 걸 쉽게 인정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권을 내주면서 얻은 자금이라도 제대로 쓴 거냐면 위에서 말했듯 그것도 아니었다.
고종은 이권을 통해서 당시 외교관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성공적 매수가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였고, 사실상 실패한 것이 미국공사 호너스 뉴턴 알렌이다. 이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는데, 베베르는 러일전쟁 전까지 주 활약시기였던 러시아 공사였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효과가 아주 컸다. 반면에 알렌은 러일전쟁 패전 이후까지 남아 있었고, 실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기 때문에 고종이 더 이상 이권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등을 돌리고 배신해버렸다.
만일 러일전쟁이 벌어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미국이 승인하는 형태로 결론이 나왔다면, 고종의 매수외교는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뤼순을 점령하는 등의 러시아의 강경화와 무엇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이런 외교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고종의 자금은 고종 본인이 앞장서면서 한 매관매직으로 인해 번 돈이었던 것이 매우 큰 문제였다. 매관매직으로 돈을 모으니 당연히 관리들의 기강이 무너지는 건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민생의 파탄을 불러 와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 어떻게 보면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후에 조선에 미친 제일 확실한 영향으론, 왕비인 중전 민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 시 국상일에 맞춰서 3.1 운동을 일으킬 기회나 주었다는 것 정도. 실제로 33인이라는 인물 중에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거나 고종을 지지하였던 오세창, 이상설, 한용운과 같은 부류 외에도, 독립협회 문제나 동학 관련으로 고종에 불만이 많았던 손병희, 윤치호, 안창호와 같은 부류가 존재했다. 이들이 고종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고종의 영향력 자체는 존재했기 때문에 3월 1일이 된 것이다.[41] 이후 김구 등은 임시정부에서 왕정복고는 주장하지 않았어도 구황실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20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고 러시아 거류 한인들에게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다는 내용의 일본 기밀문서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 책임연구원 신운용은 다른 방계 사료로 그런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 안중근 의거를 병탄의 기회로 노리고 있던 통감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일제 외무성이 고종 배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 고종과 황실이 안중근의 의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에서 성립될 수 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했다.[42][43]
그 외 업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려준 것 정도가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김구 선생의 명성황후 시해관련 일본인 살해 건은 백범일지의 기록과 달리 실제 불투명한 점이 많아 고종이 그를 살려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궁전 내에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서 살려줬다는데, 그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서 살고 있었다.[44]
그 외에 중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학설도 존재하는데, 만일 실제로 임시정부에 고종이라는 구심점(+자금줄)이 존재하였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그 수준을 달리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고종이 확실하게 고평가를 받을 만한 점은,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뒤로는 일본 엿 먹일 궁리를 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면전에서 그 점을 비꼬기도 했다. 일본이 뭐 자기네 힘 과시하려고 고종 끌어내린 게 아니다. 고종이 일본의 계획에 실질적으로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끌어내린 것이다. 즉, 고종이 정말 일본에 저항할 의지도 없었다면 일본이 굳이 순종에게 양위를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고종을 비판했던 수많은 국내의 지식인들과 명사들 중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제에 굴복해서 변절의 길을 걸었다. 고종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거의가 개화파를 잇는 인사들이었고, 이들에게 일본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면서 근대화의 교사라는 양면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고종 역시 일제에 타협하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형태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는 물론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 평가는 최악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반대세력이 과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단적으로 베트남국이 이런 식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의 이전 군주들은 이런 형태로 다루어진 사례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고종이 이런 길을 걸었다면 일제의 조선병합은 한결 수월하였을 것이다. 순종은 비교적 온순한 식민지 군주였지만, 일제에 의해서 옹립되었다는 근원적 문제에 더해서 김홍륙 독다 사건으로 폐인이 되었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어서 큰 의미 부여는 안 되었다. 단적으로 고종이 죽은 이후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군주정(유교적인 전제군주정이든 근대적인 입헌군주정이든)이라는 정치체제를 주장한 단체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끝까지 저항했다는 그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지, 그 저항은 전혀 유효하지 못한, 부실한 방식이었으므로, 국가원수로서 까방권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이전에 이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독립조직인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를 자신의 전제권력에 반한다는 이유로 정치깡패를 동원해 해산시킨 시점에서 고종의 모든 저항관련 행위의 제1 목적은 결국 본인의 전제권력 복권이고, 민족의 해방은 결국 고종에게 이를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했다는 가설을 부정하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고종의 막장 행보가 아니었다면 개화파들이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한일병합 이전 개화파의 행태는 전권을 요구하는 것이었고(입헌군주제) 이는 고종에겐 반역이나 다름 없는 요구였다. 사실 세계적인 추세로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전근대적인 것도 아니다. 당장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라고 불리는 나폴레옹 3세가 고종과 맞물리고,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패전까진 무늬만 입헌군주국인 독일 제국이었다. 러시아 제국도 별반 다른 처지는 아니었고... 대영제국, 미국 같은 나라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다.
과학만 근대적이었지 정치적으로 '근대적인' 국가는 당시에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친청, 친러, 친일, 친미파등 개화세력도 중구난방으로 갈라져 정권 획득을 위한 연줄 만들기에 몰두했고, 자기들끼리 대립했다. 당시 중추원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과욕이나 광무개혁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족한 현실 인식 등을 보면 고종의 레벨로는 무슨 짓을 해도 무리였다. 특히 급진개화파들의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은 위정척사를 외친 유생들보다도 더 이상주의적이라, 일본이 하는 제안은 속내도 의심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었다.
위태한 상황을 타개해 보겠다고 나름 나서던 엘리트 지식인층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다가 나중에 일방적으로 탄압해 버리는 왕에게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 세력을 키워준 건 고종이고 뒤통수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먼저 때렸다. 심지어 이때는 노선이 조금 온건하다고 다른 개화파 세력들까지 다 죽이려 했다.
갑신정변 이 사건으로 개화파는 왕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라 팔아먹으려는 역적집단으로 몰린 터이고 개화파가 고종을 까는 건 사실 자기들의 이런 삽질들을 고종에게 떠넘기려는 측면도 어느 정도 있었다. 게다가 이후로도 개화파는 자기들끼리 반목했고,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 노선이 전혀 다른 대원군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등 이미 막장화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을미사변 때 뒤통수를 쳐 댄 놈들인 건 마찬가지라 도긴개긴이다. 게다가 현대 시각으로 봐도 급진 개화파의 개혁 방안은 취지는 좋을지 모르나 방법론에서는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고종이 권력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대원군은 고종이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려 하지도 않아 민씨 일가와 힘을 합쳐 몰아내야 했고, 친정을 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쿠데타 시도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 대원군은 자신을 복권시킬 세력으론 노선이 완전히 다른 급진개화파, 청나라, 일본, 동학농민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이든 가리지 않고 손을 잡으려고 할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고종으로서는 자기 측근들 빼고는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여겼을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는 했다. 물론 그것이 고종의 실정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망국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하지만.
고종은 전제군주국의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었다. 선진국가라는 유럽의 군주들 역시 대부분 전제군주국인 상황이거나 막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되어가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전제군주 했다고 일방적으로 욕먹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에까지 영향력이 있던 국가 중 영국은 입헌군주국이고 미국은 공화국이었다. 그나마 독일, 러시아가 황제의 권력이 막강했고 이때문에, 고종이 은근히 이들 국가에 친근감을 보여 결국 친러적인 정책을 폈는데, 정작 그 러시아의 상황이 개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 결국 낭패를 보았다. 괜히 러시아에 반감을 가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나쁜 이미지만 심어주는 결과를 자초했다.
그의 저항은 주로 아관파천, 의병 궐기 권유 같은 꼼수나 헤이그 특사, 이권 배분 같은 외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자존심과 목숨까지 버려가며 저항한 전왕조인 고려의 우왕이나 공양왕과 비교된다. 물론 고려 왕족들은 힘이 닫는 한 적극적으로 저항한 탓인지 결국 왕씨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고종의 능력치나 정치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통적 조선의 군주로서는 호포제, 사창제 유지, 유림 제지 등 최악은 아닌 수준이었고 독립협회 개발살내는 때의 꼼수는 혀를 내두를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청나라가 무너지고 일본이 개항되고 서양개항선이 몰려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선 뭐... 서양인 하면 치를 떤 동시대 일본의 메이지 덴노와는 달리 나름 근대화에 관심은 보였지만, 기초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전무한 상황에서 잘 되면 그게 이상한 거고...
종합적으로 보면 좋게 표현해봐야 위기인 상황에서도 대원칙이 없이 임기응변만 한 인물이고, 꼼수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해도 자기도 그걸 타개하지 못 해 꼼수밖에 못 쓰게 된 인물로 볼 수 있겠다.
3.1. 비교론[편집]
3.1.1. 타국가에 비해 못했다.[편집]
역사를 성찰의 학문이라는 데서 가치를 찾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몇 안 되는 선례에서 건설적인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일본의 유신지사, 태국의 라마 5세,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근대적 과도기에서 나라를 이끌 책임을 맡은 전통적 지배층[45]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종과 달리 세계사적 흐름에 부합하는 시대적 과제를 이뤄냈고, 자신들의 나라를 누군가의 발 아래 종속되는 처지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유신지사들이야, 기본적으로 막부라는 주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2등 내지는 3등 권력인데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국가 원수인 천황의 실질적 권한이 미약했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패기있고 과단성 있는 개혁정책을 발빠르게 이뤄낼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 군주로서의 가치관에서 기어코 벗어나지 못해 그 자신조차 썩 내키지 않아 했음에도 울며겨자먹기로 개혁을 추진했던 고종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태국의 라마 5세의 케이스를 보면 고종이 더 더욱 할말이 없어진다. 똑같이 전근대에 태어나 전통교육을 충실히 받고 자랐음에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정책에 대한 이해도와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혜안이 고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준수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개혁을 빙자하여 전제군주식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라마 5세는 계급 문제·봉건제도 하의 적폐 등 단기간에 전근대적 요소를 청산하는 진정한 의미의 개혁에 성공했다.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겁을 양껏 집어먹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러시아와 영미로 대표되는 선진 서구열강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본을 두고 답없는 친러 몰빵 외교를 시전할 동안[46] 라마 5세는 이미 태국이 완충지대로서 갖는 외교 전략상의 가치를 파악, 궁여지책이 아닌 장기적 안목에서 도출된 합리적 외교 플랜이 마련된 상태였다. 태국이 식민지화를 면하게 된 것에 운적 요소가 매우 큰 것도 사실이나, 군주 본인의 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으며, 조선 또한 역사상 한결같이 대놓고 전략상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태국의 그것에 비해 불운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고종은 개혁 정책에 대한 이해,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 그리고 애민의식, 모든 면에서 라마 5세의 아래였다.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 역시 고종과 비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개혁 정책, 특히 외교와 군사분야에서 매우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 열강도 아니면서 국제연맹의 창설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단기간에 괄목할 수준의 역량을 가진 근대군을 키워내 서구 열강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침략을 저지하는 먼치킨급 업적을 달성했다! 이때 '근대군 그게 뭐에요, 먹는 건가요?' 수준의 고종은 열심히 밀덕질하면서 재정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었다. 광무개혁으로 키워낸 병력이 고작 3만인데 이 3만을 유지하는 데 재정의 40%나 쓰였다. 반면 일본은 육군만 12만이었다.[47][48]
일본의 유신지사들이야, 기본적으로 막부라는 주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2등 내지는 3등 권력인데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국가 원수인 천황의 실질적 권한이 미약했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패기있고 과단성 있는 개혁정책을 발빠르게 이뤄낼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 군주로서의 가치관에서 기어코 벗어나지 못해 그 자신조차 썩 내키지 않아 했음에도 울며겨자먹기로 개혁을 추진했던 고종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태국의 라마 5세의 케이스를 보면 고종이 더 더욱 할말이 없어진다. 똑같이 전근대에 태어나 전통교육을 충실히 받고 자랐음에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정책에 대한 이해도와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혜안이 고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준수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개혁을 빙자하여 전제군주식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라마 5세는 계급 문제·봉건제도 하의 적폐 등 단기간에 전근대적 요소를 청산하는 진정한 의미의 개혁에 성공했다.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겁을 양껏 집어먹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러시아와 영미로 대표되는 선진 서구열강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본을 두고 답없는 친러 몰빵 외교를 시전할 동안[46] 라마 5세는 이미 태국이 완충지대로서 갖는 외교 전략상의 가치를 파악, 궁여지책이 아닌 장기적 안목에서 도출된 합리적 외교 플랜이 마련된 상태였다. 태국이 식민지화를 면하게 된 것에 운적 요소가 매우 큰 것도 사실이나, 군주 본인의 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으며, 조선 또한 역사상 한결같이 대놓고 전략상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태국의 그것에 비해 불운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고종은 개혁 정책에 대한 이해,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 그리고 애민의식, 모든 면에서 라마 5세의 아래였다.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 역시 고종과 비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개혁 정책, 특히 외교와 군사분야에서 매우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 열강도 아니면서 국제연맹의 창설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단기간에 괄목할 수준의 역량을 가진 근대군을 키워내 서구 열강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침략을 저지하는 먼치킨급 업적을 달성했다! 이때 '근대군 그게 뭐에요, 먹는 건가요?' 수준의 고종은 열심히 밀덕질하면서 재정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었다. 광무개혁으로 키워낸 병력이 고작 3만인데 이 3만을 유지하는 데 재정의 40%나 쓰였다. 반면 일본은 육군만 12만이었다.[47][48]
3.1.2. 반론[편집]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일본, 태국, 에티오피아의 사례가 세계사에서도 매우 예외적이고 천운을 타고 난 사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몰라서 침략 당하고 주권을 잃은 게 아니다. 그에 걸맞는 시대적 행운을 타고나지 못 한 것뿐이다.[49]
당장 일본의 경우만 봐도 흑선내항과 메이지 유신 사이 시기에 미국의 국내사정이 개판이었기에 망정이지 재수 없었으면 비슷한 역사를 걸을 뻔했다. 게다가 일본은 인구, 경제적으로는 꽤 큰 나라였다. 또 메이지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과 재정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5% 실제로는 관련 비용 부담이나 지방관 수탈을 포함해 10%이상 정도, 일본은 25~30%[50]가 기본이었다. 게다가 영토와 인구는 거의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51] 그리고 일본은 조선과 달리 서구와의 교역을 한 경험이 풍부했던 나라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개항한 역사가 얼마 되지도 않는 조선이 개항해서 일본처럼 성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조선보다 먼저 개항했던 다른 나라들도 식민지가 되어가는 판국에?
게다가 조선은 개항 이후에도 임오군란 이후 외세가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눈치를 보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일본과 비교하면 조선은 더더욱 불리한 위치였고, 개혁하라고 키운 개화파는 스폰서인 고종을 뒤통수치고 외세나 대원군과 손 잡고 일 벌리는 처지였다. 무엇보다 메이지 덴노도 아니고, 유신지사가 고종과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도대체가...
태국의 경우에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정개혁도 내정개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의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문제가 더 큰 이유였고, 추가적으로 태국은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 일부까지 떼어 줬다.(그렇게 떼준 영토 넓이는 한반도보다도 넓었다) 고종이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를 떼 준다는 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인가?[52]
고종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경상도, 부산 등 조선 영토들을 일본에게 떼어주는 시나리오와 태국이 라오스/캄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건 일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 오히려 그렇게 했다면 더욱 열강들이 적극적으로 식민지화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넘겨준 곳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즉 구한말 당시 조선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같은 섬 지역 영토나 혹은 부산이나 울산 등 경상도 항구 도시 일부를 떼어 일본에게 할양했다 해도(조차지 혹은 정식영토) 일본이 일부 조선 땅을 차지하는 선에서 그치고 조선을 주권국으로 내버려뒀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 영토 전역을 병탄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세력을 확장,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 차라리 러시아에게 부동항을 내준다면 의미가 있을 수는 있겠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따져도 영국과 프랑스의 동남아 식민지와 한반도의 거리는 너무 멀다.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일대가 이미 유럽 국가들의 안마당이나 다름 없었을 정도로 입김이 센데 주변 지역이 전부 유럽 식민지들이라 이곳을 함부로 침범할 경우 본토에도 자칫 외교적 갈등이 퍼질까봐 쳐들아가지 않은 것이 더 크다. 아프리카는 188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가 나눠먹기 시작했고, 여기에 독일과 이탈리아, 벨기에, 포르투갈이 끼어서 난장판이었다. 이것을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당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아프리카를 나눠먹고 있었고, 이 와중에 벌어진 것이 파쇼다 사건이었다. 이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 중이었고, 영국이 에티오피아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점령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오히려 에티오피아를 지원해서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에 진출하려는 것을 막는 등 엄청난 운이 따랐다.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살아남은 곳이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밖에 없는데, 양국은 모두 프랑스와 영국이 완충지대로 남겨놓은 땅이었고, 그나마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통해서 점령해버렸다. 무엇보다 아두와 전투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으로 단련된 군대 10만[53]으로 이탈리아 식민지군 2만을 상대했고, 당시 에티오피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고원지대라는 지형적 이점을 살렸다.
게다가 같은 지리적 요충지라도, 에티오피아와 태국은 열강들이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완충지대를 설정한 곳인 반면, 조선은 주변국 모두가 정면 충돌을 불사해서라도 자국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애시당초 태국과 에티오피아는 저 멀리 떨어진 유럽 열강들이 이해당사자인 반면, 조선은 바로 이웃한 일본, 청, 러시아가 이해당사자였고, 자국 영향권에 넣지 않으면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54]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당시 조선은 이미 개항 이후 내정간섭과 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독립을 유지하던 상황이었고, 서구 열강은 만주와 부동항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를 제외하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일본을 용병으로 내세우는 쪽을 택했던 상황이었다. 이러니 일본, 태국, 에티오피아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고, 심지어 식민지가 된 나라들 중에는 조선보다도 더 기회가 있었는데도 열강에게 삥 뜯긴 사례도 많다.
그리고 조선은 이미 쇄국하고 있던 대원군 시절이면 모를까, 강화도 조약 이후로는 임오군란에서 청나라의 간섭으로 정권이 다시 교체되는 등 내정에서도 외국의 간섭이 심해지고 있었다. 개화 과정에서 내정 간섭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일본도 개항 이후 유신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이후 입헌이 마무리 된 시기까지 또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내전도 몇 번 겪어야만 했다. 내정에서 자유로웠던 일본도 이리 개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미 내정에서 자율성이 크게 제약된 조선 조정이 톈진 조약 이후부터 동학농민운동 이전까지 10여 년간 일본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까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급진개화파들은 자신들에게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반대파나 온건파들에게 칼을 들이대거나 상대의 요구도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그러니 아무리 고종이나 지도층이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처사였다.
그리고 저 시절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국력이 큰 차이가 나던 시기로 크기에 비해 나름 국력이 강한 국가들도 내부문제나 강대국들간의 외교 문제에 따라서는 아차 하는 순간 나라 하나가 사라지는 살벌한 시대였다. 조선의 국력이 신장되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국력차와 개항기간의 차이에서 오는 외교적, 기술적 차이의 역량은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조선 정계가 내정문제에 외세 끌어들이는 걸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만큼 오히려 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에 독립협회도 러시아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 이외 열강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당장 일본의 경우만 봐도 흑선내항과 메이지 유신 사이 시기에 미국의 국내사정이 개판이었기에 망정이지 재수 없었으면 비슷한 역사를 걸을 뻔했다. 게다가 일본은 인구, 경제적으로는 꽤 큰 나라였다. 또 메이지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과 재정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5% 실제로는 관련 비용 부담이나 지방관 수탈을 포함해 10%이상 정도, 일본은 25~30%[50]가 기본이었다. 게다가 영토와 인구는 거의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51] 그리고 일본은 조선과 달리 서구와의 교역을 한 경험이 풍부했던 나라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개항한 역사가 얼마 되지도 않는 조선이 개항해서 일본처럼 성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조선보다 먼저 개항했던 다른 나라들도 식민지가 되어가는 판국에?
게다가 조선은 개항 이후에도 임오군란 이후 외세가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눈치를 보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일본과 비교하면 조선은 더더욱 불리한 위치였고, 개혁하라고 키운 개화파는 스폰서인 고종을 뒤통수치고 외세나 대원군과 손 잡고 일 벌리는 처지였다. 무엇보다 메이지 덴노도 아니고, 유신지사가 고종과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도대체가...
태국의 경우에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정개혁도 내정개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의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문제가 더 큰 이유였고, 추가적으로 태국은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 일부까지 떼어 줬다.(그렇게 떼준 영토 넓이는 한반도보다도 넓었다) 고종이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를 떼 준다는 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인가?[52]
고종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경상도, 부산 등 조선 영토들을 일본에게 떼어주는 시나리오와 태국이 라오스/캄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건 일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 오히려 그렇게 했다면 더욱 열강들이 적극적으로 식민지화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넘겨준 곳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즉 구한말 당시 조선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같은 섬 지역 영토나 혹은 부산이나 울산 등 경상도 항구 도시 일부를 떼어 일본에게 할양했다 해도(조차지 혹은 정식영토) 일본이 일부 조선 땅을 차지하는 선에서 그치고 조선을 주권국으로 내버려뒀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 영토 전역을 병탄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세력을 확장,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 차라리 러시아에게 부동항을 내준다면 의미가 있을 수는 있겠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따져도 영국과 프랑스의 동남아 식민지와 한반도의 거리는 너무 멀다.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일대가 이미 유럽 국가들의 안마당이나 다름 없었을 정도로 입김이 센데 주변 지역이 전부 유럽 식민지들이라 이곳을 함부로 침범할 경우 본토에도 자칫 외교적 갈등이 퍼질까봐 쳐들아가지 않은 것이 더 크다. 아프리카는 188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가 나눠먹기 시작했고, 여기에 독일과 이탈리아, 벨기에, 포르투갈이 끼어서 난장판이었다. 이것을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당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아프리카를 나눠먹고 있었고, 이 와중에 벌어진 것이 파쇼다 사건이었다. 이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 중이었고, 영국이 에티오피아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점령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오히려 에티오피아를 지원해서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에 진출하려는 것을 막는 등 엄청난 운이 따랐다.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살아남은 곳이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밖에 없는데, 양국은 모두 프랑스와 영국이 완충지대로 남겨놓은 땅이었고, 그나마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통해서 점령해버렸다. 무엇보다 아두와 전투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으로 단련된 군대 10만[53]으로 이탈리아 식민지군 2만을 상대했고, 당시 에티오피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고원지대라는 지형적 이점을 살렸다.
게다가 같은 지리적 요충지라도, 에티오피아와 태국은 열강들이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완충지대를 설정한 곳인 반면, 조선은 주변국 모두가 정면 충돌을 불사해서라도 자국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애시당초 태국과 에티오피아는 저 멀리 떨어진 유럽 열강들이 이해당사자인 반면, 조선은 바로 이웃한 일본, 청, 러시아가 이해당사자였고, 자국 영향권에 넣지 않으면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54]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당시 조선은 이미 개항 이후 내정간섭과 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독립을 유지하던 상황이었고, 서구 열강은 만주와 부동항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를 제외하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일본을 용병으로 내세우는 쪽을 택했던 상황이었다. 이러니 일본, 태국, 에티오피아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고, 심지어 식민지가 된 나라들 중에는 조선보다도 더 기회가 있었는데도 열강에게 삥 뜯긴 사례도 많다.
그리고 조선은 이미 쇄국하고 있던 대원군 시절이면 모를까, 강화도 조약 이후로는 임오군란에서 청나라의 간섭으로 정권이 다시 교체되는 등 내정에서도 외국의 간섭이 심해지고 있었다. 개화 과정에서 내정 간섭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일본도 개항 이후 유신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이후 입헌이 마무리 된 시기까지 또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내전도 몇 번 겪어야만 했다. 내정에서 자유로웠던 일본도 이리 개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미 내정에서 자율성이 크게 제약된 조선 조정이 톈진 조약 이후부터 동학농민운동 이전까지 10여 년간 일본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까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급진개화파들은 자신들에게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반대파나 온건파들에게 칼을 들이대거나 상대의 요구도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그러니 아무리 고종이나 지도층이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처사였다.
그리고 저 시절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국력이 큰 차이가 나던 시기로 크기에 비해 나름 국력이 강한 국가들도 내부문제나 강대국들간의 외교 문제에 따라서는 아차 하는 순간 나라 하나가 사라지는 살벌한 시대였다. 조선의 국력이 신장되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국력차와 개항기간의 차이에서 오는 외교적, 기술적 차이의 역량은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조선 정계가 내정문제에 외세 끌어들이는 걸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만큼 오히려 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에 독립협회도 러시아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 이외 열강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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