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1

<안철수의 유치한 생각> - 기사 추가 부분

<안철수의 유치한 생각> - 기사 추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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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변침 -거꾸로 쓴 세월호 전복·침몰·구조 보고서名言 속 名言
안철수의 정체(《안철수-박원순의 정체》 추가 부분)
<목차>

1. 멘토들


“워낙 그분(박원순)을 존경하기 때문에
‘폴리테이너’ 김제동-김여진 氏가 멘토
한총련 합법화, 연방제 주장한 법륜
법륜의 친형, 좌익 사건 연루자
법륜, 간첩출신 김낙중과 사진 찍어(274페이지 추가)“진보, 51대 49로 겨우 이겨선 안 된다”
윤여준, “이명박 정부 들어선 후 민주주의 후퇴했다”
“北을 자극할 필요가 있는가”
2. 비판적 안철수觀

최보식 기자, “단지 나이브한 사람”
‘죄의식’에 사로잡힌 지식인은 필요없다
최승노, “그가 이룬 게 과연 무엇인가?”
유치한 안철수 편지: 後進정치의 전형을 보여주다
3. 안보백치? 檢證은 이제부터다
천안함 궤변에 넘어간 안철수(290페이지 추가) 
4.11총선 당시 民家協 출신 인재근 공개지지 
안철수 재단 박영숙 이사장의 正體 
안철수·한명숙의 妙한 종교커넥션
정치는 “인생의 낭비”라 했던 이
정부 비판하면서 정부 일 해
안보문제에 대한 언급 전무
키워드 검색 해 보니 백지인가 백치인가
“전 직원 무상 증여” 주식은 1.5%에 불과
교과서 11권에 실린 ‘검증 안 된 인물’ 안철수
자신이 놓은 ‘상식’ 덫에 걸리다
기부와 동시에 ‘정치 불참’을 선언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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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간첩출신 김낙중과 사진 찍어
金씨, 36년간 固諜(고첩)으로 활동했던 인물
(사진설명) 사진 중앙 인물이 법륜 ‘평화재단’ 이사장이며, 우측에서 두 번째 인물(원형 표시)이 김낙중이다/사진출처: 평화재단 홈페이지
법륜(본명: 최석호) 평화재단 이사장은 건국이후 최대 간첩사건으로 알려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연루자 金洛中(김낙중)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문제의 사진은 현재 평화재단 홈페이지 ‘함께하는 사람들’에 게재되어 있다. 사진 중앙에는 법륜 이사장이 보이며, 우측 두 번째에는 金씨가 서 있다. 사진 배경에는 ‘햇볕정책을 넘어 평화로 통일로’라는 문구가 보인다. 확인결과 당시 행사는 2005년 11월15일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평화재단 1주년 기념 심포지엄’이었다.
법륜 이사장이 金씨와 함께 있는 모습이 사진에 찍힌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2007년 5월24일 자신이 지도법사로 활동하는 정토회 주최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에 金씨와 함께 참석했다. 정토회는 사진설명에서 金씨를 ‘통일운동가’, ‘평화운동가’로 소개했다. 
金씨가 연루됐던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은 건국 이후 최대간첩사건으로 분류된다. 북한은 당시 조선로동당 서열 22위 간첩 이선실(2000년 사망)을 남파, 1995년 공산화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 하에 남한에 조선로동당 하부조직인 ‘중부지역당’ 등을 구축했다. 
  
1992년 안기부가 밝힌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선실은 4·3 제주폭동 유가족을 칭하고 재야단체와 민중당 등에 접근, 민중당 대표 김낙중·민중당 조국통일위원장 손병선 등으로 하여금 운동권과의 연대투쟁 공간을 마련하고, 연방제 통일 실현을 위한 ‘상층부 통일전선공작’에 주력하도록 했다. 이선실은 과거 남로당과 같은 지하당을 구축하기 위해 1980년 舍北(사북) 사태를 주동한 바 있는 황인오를 포섭, 강원 및 충남·북 일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위장명칭·민족해방애국전선·이하 민애전)을 구축했다, 안기부는 북한이 민중당에 침투시킨 간첩 김낙중·손병선 일당 여섯 명과 ‘남한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조직원 400여 명 중 총책 황인오 등 124명을 검거, 이 중 68명을 간첩·反국가단체 구성 혐의 등으로 구속, 송치하고 잔당을 추적 중이다. 同수사과정에서 권총, 수류탄 등 각종 무기류와 무전기, 亂數表(난수표) 및 공작금 100만 달러 등 총 149종 2399점에 달하는 공작금품을 압수했다...(하략)
▲ 간첩 이선실은 80년 3월경부터 90년 10월까지 10여 년 간 남북한 및 일본을 왕래하며 북한에서 직파된 공작원 10여 명과 함께 대남공작을 지휘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는 90년대 초부터 김낙중과 함께 민중당 창당을 주도하며 민중당 내 핵심당원들을 포섭했다. 
 
▲김낙중은 1955년 월북(越北) 후 남파, 36년간이나 고정간첩으로 암약하며 북한에서 총 210만 달러(한화 16억 원 상당)의 공작금을 받아왔다. 이중 쓰고 남은 1백만 달러는 권총·독총 등 공작 장비와 함께 그의 집 장독대 밑에서 발견됐다. 김낙중은 이 공작금을 통해 이우재 등 14대 총선 때 민중당 후보로 출마한 18명에게 선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내 합법적 親北前衛(친북전위)정당 건설을 기도했다. 김낙중은 對南공작의 업적을 인정받아 북한으로부터 91년 10월 ‘김일성 공로훈장’ 91년 12월 ‘민족통일상’을 받았고, 김일성이 특별히 보낸 산삼과 녹용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의 高泳耉(고영구) 前 국정원장은 변호사 시절 金씨를 평화주의자로 美化하며 석방운동을 벌였다.
1998년 4월에는 高씨와 함께, 강만길(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강정구(前 동국대 교수), 김금수(前 노사정위 위원장 ), 리영희(2010년 사망, 前한양대 교수), 박순경(6·15 남측위원회 학술본부 명예공동위원장), 박용길(2011년 사망, 문성근 민통당 前 최고위원), 이장희(한국외대교수), 이창복(前 국회의원), 윤성식(前 사월혁명연구소장), 홍근수(前 향린교회 목사), 박형규(前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32명이 발기해 ‘평화주의자 김낙중 석방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김낙중은 민족화해와 평화적 민족통일의 기수이므로 그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김대중 정권은 1998년 김낙중·황인오 등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주범들을 소위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모두 석방했다.
金씨는 출소 이후 평화주의자, 통일운동가라는 이름으로 각종 모임에 초청돼 강연 활동을 해왔다. 2005년 그의 딸 김선주 씨는 金씨의 자서전 《탐루》를 펴냈다.
김선주 씨는 책을 출간한 그해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아버지는 너무도 고지식했고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가장이자 통일운동가였다”고 회고했다. 김낙중 씨는 2010년 8월 평화통일시민연대 고문 직책으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중단, 천안함 4개국 공동조사 등을 촉구하는 ‘진보원로 100인 시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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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궤변에 넘어간 안철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김근식 경남대 교수로부터 對北정책 스터디를 받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다. 2012년 1월12일자 <중앙일보>는 安교수가 김정일 사망 전후 金교수로부터 수차례 자문 받았다는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金교수는 “安원장 스스로 안보는 ‘보수’라고 했는데 만나기 전 그걸 우려했지만 만나보니 달랐다”며 “내가 햇볕정책을 중심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반박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고 말했다.
  
金교수는 또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해 “범인이 사망하면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 종결이 이뤄진다. 金위원장(김정일)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 문제도 매듭지어야 한다고 설명하니 동의했다”고 말했다.
安교수는 평소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더니 左派성향의 박원순 변호사를 서울시장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이번엔 북한체제를 필사적으로 옹호해 온 김근식 교수에게 對北문제 자문을 받고 있다. 급기야 천안함·연평도 문제에 매듭지어야 한다는 金교수 주장에 동의했다고 한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김근식 교수의 논문은 석ㆍ박사 논문 모두 북한체제에 대한 옹호를 넘어 찬양에 가깝다(2008년 12월5일 ‘자유민주연구학회’ 주관의 ‘방송보도의 극단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세미나)”고 지적했었다. 실제 김근식 교수의 그간 주장은 레디컬(radical)하다. 
  
金교수는 김정일 사망 이후 “그(김정일) 꿈(개혁·개방)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2011년 12월23일 <경향신문>)”며 哀悼(애도) 칼럼을 냈었다. 또 “김정일 위원장의 功過를 논하는 것은 너무도 논쟁적”이라며 90년대 중후반 300만 명을 아사시키고 온갖 수용소 시설에 수백 만 동족을 가두고 학살해 온 도살자를 가리켜 “功過”가 있다고 운운했다.
  
金교수는 천안함 爆沈·연평도 포격도 ‘이명박 정부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해왔다.
그는 2011년 6월17일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주간논평에서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중단하고 제재와 압박을 통해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희망적 사고만을 앞세워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군사적 긴장고조와 북핵문제 악화 그리고 더 심각해진 북한의 강경대응과 도발만을 결과하고 말았다”고 했다.
  
金교수는 또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인 2010년 12월1일 프레시안 기고 칼럼에서 “이명박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최고의 압박 카드 역시 서해상의 군사적 도발과 전쟁 위험성의 가시화이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연평도 일반 주민들에게까지 해안포 사격을 서슴치 않은 것”이라고 했다. 강도가 사람을 죽였는데 강도 대신 경찰을 욕하는 꼴이다.
  
심지어 金교수는 12월22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주관으로 열린 ‘북한정세 인식 긴급좌담회’에서 ‘김정일의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했으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의 公訴權(공소권)도 사라진 것이다. 그가 역사의 부채를 껴안고 죽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大權을 꿈꾸는 자가 먼저 가야 할 곳은 백령도에 외롭게 서 있는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이다. 祖國을 지키다 죽어간 이들의 冤魂을 달래기는커녕 햇볕주술사들이나 불러들이는 안철수 교수는 그런 면에서 자격미달이다. 무엇보다 김정일이 죽었으니 천안함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주장은 46용사를 욕보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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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총선 당시 民家協 출신 인재근 공개 지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지난 4.11총선당시 民家協(민가협, 민주화실천가족운동본부) 출신의 印在謹(인재근, 現 민통당 의원, 김근태 前 고문 부인) 씨를 공개 지지했었다. 印씨는 2012년 3월29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안철수 교수님이 응원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安씨의 글을 링크(link)했다. 安씨는 당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김근태 선생과 인재근 여사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인재근 여사의 사람에 더 이상의 아픔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용기 있고 신념을 가진 여성, 인재근과 함께 도봉의 새로운 미래가 열리기를 희망합니다”라며 印씨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印씨는 1985~1998년 民家協 총무, 1989~1999년 서울민통련(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부의장 및 의장을 거쳐 국회의원이 된 인물이다. 印씨가 몸담았던 民家協은 국보법 폐지와 비전향장기수 등 소위 양심수, 성적소수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 등을 보호하는 데 주력해 온 단체다. 구체적으로 비전향장기수는 간첩·빨치산 출신으로 전향하지 않은 장기 左翼囚(좌익수)를 말한다.
단체는 홈페이지에서 “民家協은 창립부터 지금까지 양심수 석방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양심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석방에 인색했던 정부를 강하게 규탄하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양심수를 사회문제화 시켜냈다”고 적고 있다.
 
民家協은 특히 “1999년 12월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 활동을 벌인 결과 2000년 9월3일 마침내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비전향장기수들의 ‘이념적 고향’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임을 밝히고 있다. 
 
民家協은 ‘국보법폐지국민연대’와 함께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파괴를 기도했던 從北단체 ‘통일연대’ 및 反美폭동을 일으켜 國軍까지 폭행했던 ‘평택범대위’ 등에 참가해왔다. 
 
民家協은 줄곧 국보법 문제와 관련,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등 민주주의와 인권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악법철폐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사회안전법(1989년), 전향제도(1998년), 준법서약서(2003년)가 폐지됐다”고 밝히고 있다.
단체는 또 “국정원, 경찰 대공분실, 검찰 공안부, 공안문제연구소 등 공안수사기구에 대한 감시활동과 문제제기를 해왔으며, 이러한 활동은 2004년 7월, 공안문제연구소 폐지를 이끌어내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여 국가의 對共기능 해체에 앞장서왔다.  
 
民家協 산하에는 양심수후원회(명예회장 권오헌)라는 조직이 있다. 이 조직은 비전향좌익수 송환에 앞장서 왔다. 일례로 2008년 4월27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총회를 열고,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을 반드시 이루어냅시다!”, “6.15, 10.4선언 고수 이행, 국가보안법 양심수 없는 세상을 위해 힘차게 나아가자”는 총회 결의문을 채택 발표했다.
 
權五憲(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2005년 5월28일 전북 회문산에서 열린 소위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전야제’라는 간첩·빨치산 추모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55년 전 우리 先輩(선배)들이 피 흘려 싸웠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적은 55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이다. 산화해 가신 영령들을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해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루는 계기로 삼자”(인터넷 <통일뉴스> 2005년 5월28일자 보도 인용)
 
당시 행사에서 경남지역 빨치산 출신 박순자는 “죽은 同志(동지)들은 외세를 반대해 투쟁했다”며 “해방 60돌, 黨(당) 창건 60돌, 6.15 5돌인 올해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北으로 간다. 통일은 다 됐다”라고 주장했었다. 
 
비슷한 시기 權명예회장은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 조성된 소위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이라는 간첩·빨치산 추모공원 준공식에서도 “이 묘역이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평생 헌신적으로 통일애국운동을 해온 분들을 모신 만큼 이 묘역이 갖는 의미를 어떤 국립묘지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權명예회장은 70년대 최대 공안사건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3년4개월 복역했었다. 그는 ▲6.15/10.4선언 이행 ▲국보법 폐지 ▲한총련 합법화 ▲북한인권법 반대 등을 줄곧 주장해왔다. 2005년 8월2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한총련정치수배해제’ 촉구 발언에서는 “지금까지 정권연장을 위한 전략으로 한총련을 탄압해 왔다. 자기 조국을 사랑했다고 해서 탄압받아야 하는가”라며 利敵단체로 판시된 한총련을 두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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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재단’ 박영숙 이사장의 正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은 2012년 2월6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연구소 지분의 절반을 출연한 공익재단 ‘안철수재단’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운동권 출신의 박영숙 前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이 맡을 예정이다. 朴씨는 국보법폐지 등에 앞장서 온 親김대중 인사이다.
그는 ▲2004년 9월16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각계 인사 공동선언’ ▲2007년 10월17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각계원로 및 대표인사 선언문’에 참가한 데 이어 ▲2008년 12월1일 ‘국가보안법 제정 60년 각계 선언’에서도 “국가보안법의 폐지로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며 “악법은 어겨서 깨뜨려 왔던 전통 위에서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어겨가면서 국가보안법을 끝내 끝장내고야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朴씨는 또 ▲2005년 8월15일 ‘민족의 자주와 평화를 위한 선언’에 참여,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철폐해야 한다”, “종속적 韓美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군 없는 한반도를 적극적으로 준비해가야 한다”, “6·15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자”면서 “제2의 광복 선언”을 주장했다.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은 2012년 2월6일자 보도에서 朴이사장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안 원장이 박 이사장을 초빙한 것에 대해선 정치적 의미를 짚어보는 시각이 많다. 박 이사장은 13대 국회에서 평민당 전국구 1번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평민당 총재권한대행, 국민의 정부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우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인사다. 지난 10.26서울시장 재보선에서는 박원순 후보 캠프 고문을 지냈었다. 그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시절에 ‘100인 기부릴레이’를 주도했고 현재도 재단법인 ‘살림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진보성향의 여성운동 원로인 박 이사장은 평안도 출신으로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민중 신학자인 고 안병무 박사의 부인이기도 하다. 박 이사장은 지난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때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이 언급한 朴이사장의 남편 안병무 박사는 역시 1970~1980년대 反정부 활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의 기독교관은 그가 세운 ‘한백교회’에서 엿볼 수 있다. 아래는 인터넷 매체 <리버티헤럴드>의 2012년 1월21일자 ‘한백교회’ 보도 내용의 일부이다.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한백교회’는 일반교회와 많이 다르다.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닌 ‘무명의 돌’이다. ‘한백의 상징’이라 부르는 이 돌들은 한라산과 백두산에서 가져온 것이다. 교회 이름 역시 민중신학을 기초로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뜻에서 한백교회로 정했다.
소개 책자를 보면 비전향좌익수(6·25사변 당시 국군과 싸웠던 빨치산·인민군 출신으로 국군과 싸우며 끝까지 대한민국 편으로 전향치 않은 좌익사범)박종린 씨와의 소모임을 갖는 활동이 있고, 선교 사업으로 비전향좌익수를 후원한다고 적혀있다. 
  
성탄절 예배 주보엔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가 勞使(노사) 잠정합의 찬반투표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트위터를 싣고 ‘김진숙의 기도’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 그 바로 아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날 피땀으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누가복음 (22:41~45) 본문이 실어, ‘김진숙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에 비유해 놓았다. 
  
주보에는 ‘한백교회’ 신도들의 글이 실려 있다. 한 신도는 성탄절 예수님 탄생과 삶을 ‘옛날 옛날 무력한 핏덩이로 태어나 외면 받은 삶을 살다가 권력의 폭력으로 살해당한 당신의 메시지가...(중략)’라고 적어 놓았다. ‘한백교회’는 주기도문이 없다. 찬송가 뒤에 수록된 교독문도 없다. 교독문 대신 전태일의 일기를 읽거나 김남조 시인의 시를 읽는다. ‘한백교회’ 자체 내에서 만들었다는 신앙고백문은 이렇다. 基長(기장) 교단은 이것을 허용한다고 한다.
  
〈천지 만물 안에 더불어 살아계신 하느님 당신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셔서 생명 넘치는 세상을 함께 만드십니다. 우리가 욕망으로 얼룩진 일상과 타협하며 안주하고 사는 동안 세상은 죽임의 그늘 속에 신음하는 아우성으로 가득하고 그 고통의 하소연은 침묵 속에 묻혀 버립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과 갈릴래아 민중 예수 사건 속에 보이신 해방과 생명의 기운이 우리 안에 넘치게 하십시오. 가려지고 잊혀지는 희생양의 얼굴과 모든 비통한 눈물들을 우리가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일의 희망으로 일어서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공동체로 우리를 모이게 하시고 그 안에서 나눔과 섬김의 자세를 배우며 이를 기리는 예배를 나누게 하십시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살림을 실천하며 모든 것들과 더불어 기쁘게 살겠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가리켜 가난하고 아픈 민중의 대변자, 힘없이 권력에 ‘살해’ 당한 민중혁명가로 고백한다. 한백교회의 ‘신앙’은 많은 의문점을 남긴다. 말씀과 성령 대신 저항과 투쟁, 예수를 소위 핍박 받는 민중을 해방할 혁명가 정도로 각색한 흐름이 ‘무명의 돌’ 사이를 관통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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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한명숙의 妙(묘)한 종교커넥션
안철수 서울대 교수는 ‘안철수재단’ 이사장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고문을 고리로 한명숙 민주통합당 前 대표와 연결된다. 박영숙 이사장 남편 안병무 前 한신대 교수(1996년 死亡)는 1987년 ‘한백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한백교회’를 함께 설립한 사람은 한명숙 前 대표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이다.
박성준 교수는 1967년 통혁당 간첩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1년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인 1994년 일본 릿쿄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딴 뒤 다시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대에서 공부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 소개해왔다. 몇 개의 기사를 인용하면 이러하다.
“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후 3년 간 일본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찾아서’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참다운 크리스천을 만나고 다닌 것이 준비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2001년 季刊 <새길이야기(3호)> 인터뷰 中)”
“朴선생(박성준氏) 순서가 돌아오자 자신은 지나온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고 있다며 기독교인, 맑시스트, 퀘이커, 불교에 막 눈을 뜬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제 그 살아온 내력으로 사람들과 소곤소곤한 만남을 갖고 싶어 마이크를 쓰는 모임, 인터뷰, 텔레비전 출연은 가급적 사양한다.” (주간기독교 2003년 11월 1509호 인터뷰기사 中)
朴씨는 소위 反戰平和(반전평화)운동에 정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심지어 이슬람 지하드(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고 정당화했다. 또 9·11테러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以上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논문 中)고 말했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중략) 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朴씨는 미국의 이라크전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중동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침략”(2003년 3월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으로, 아프가니스탄전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 초토화하는 것”(2002년 3월21일 著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등)으로 비난했다.
그는 1991년 발발한 걸프전에 대해서도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고해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등)”고 주장해왔다.
朴씨는 특히 미국의 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북한정권의 不法행위를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왔다. 2002년 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는 글을 일부 인용해보자.
“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중략) 부시대통령과 미국정부에게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중략) 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外勢(외세)·강대국 미국에 맡겨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反戰論(반전론) 또는 平和論(평화론)의 외양을 띄고 있는 朴씨의 ‘反美’는 정작 평화를 부수는 북한의 테러나 도발에 대한 비판은 없다. 북한의 핵폭탄 비판도 없다. 김일성·김정일의 700만 민족학살이나 정치범수용소·공개처형, 탈북자 강제송환과 영아살해·강제낙태 등 끔찍한 만행에 대해도 침묵한다.
관대한 잣대는 후세인에게도 적용된다. 후세인은 중동의 屠殺者(도살자)였다. ▲1987년 18만의 쿠르드족 독가스학살 등 수십만의 자국민을 처형해왔고 ▲2000년 대통령 및 친인척 비방 시 ‘혀 절단刑’ 등과 전기고문·눈알 뽑기·강간 등을 자행해왔다. ▲후세인의 폭압을 피해 이라크 인구 2300만 명 중 약 4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했다. ▲1980~1988년 이란과 전쟁,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동원한 전쟁과 失政(실정)으로 전 세계 석유 매장량 2위인 이라크는 1천억 달러 빚더미에 올라섰다.
朴씨는 기독교 한 지파인 퀘이커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학”을 공부했다. 퀘이커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朴씨는 퀘이커에 대해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ere is 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정수다”고 정의했다( ‘새길이야기’ 인터뷰).
朴씨는 퀘이커적 ‘깨달음’을 위해 호흡 수련을 강조한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베트남출신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 수련”을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를 수련하라고 권합니다.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 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숨쉬기는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과 깨어있는 의식 사이를 다리 놓아 줍니다...(중략) 처음에는 정상적인 숨을 쉬다가 차츰 숨을 길고 느리게 하여 숨결이 곱고 잔잔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숨의 길이는 꽤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가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mindfulness)’의 상태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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