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설] 불교계와 그릇된 과거의 청산문제 년/호 /
글 :한상범/동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절망과 좌절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고 종종 솔직하게 털어 놓는 친구를 대하게 될 때마다 나 자신도 사실 마음이 흔들린다.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가. 몇 년전에 세상의 지도급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범죄의 주역노릇을 하는 기막힌 사실이 폭로됨에 따라 ‘민나도로보다(모두가 도둑놈이다)’라고 하는 말이 유행했다. 하필이면 일본말을 써서 세상의 잘못됨을 풍자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우리말로 노골적으로 말하기에는 하도 상스럽고 창피스러워서 서양 꼬부랑말보다 비유하기가 그럴듯한 일본말을 썼는지 어쩐지는 모르나 문제는 우리사회가 그토록 한심하게 자탄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해에는 유달리 사건도 많았고 사회치부도 불쑥불쑥 노출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판사, 검사나 국회의원이라고 하는 ‘명사’들이 깡패들과 같이 술자리를 함께 하고 그들의 후견자 노릇을 하는 일이 신문지상에 보도가 되었던 일이다. 사실, 세칭 ‘깡패’라고 불리우는 사람들과 ‘명사’와의 관계는 일본 자민당 실력자인 가네마루 신의 사건에서 역력하게 드러났듯이 남의 일만으로 돌려 버릴 것만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참으로 한숨밖에 안 나온다고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서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어째서 세상이 이 꼴이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더욱이 한심스러운 것은 말로 입에 담기 힘든 표현이지만 종교계나 교육계까지도 범죄단체에 가까운 병리를 안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서로 입조심할 필요없는 사람들끼리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면, 한마디로 나라가 망한 이래 광복을 이루었다고 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역사에 있어서 참된 비판과 심판이 없는 길을 걸어 왔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아니한가 하는데 귀결이 된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광복이 이루어졌다고 하던 1945년 8.15해방 후에도 남북이 미국과 소련 군대에 의해 점령통치를 받게 됨에 따라 남한의 미군정하에서는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그대로 미군정의 그늘에서 행세했고 건국후에도 미군정을 이어받은 정부는 친일파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고 그들이 관료계와 정계, 나아가서 문화계나 경제계 등 사회전반을 주도하는 실세가 되어 있었고 특히 ‘반공주의’라는 것이 판을 칠 때에는 친일파들은 반공의 투사로 둔갑하에 됨에 따라 일제 잔재에 대한 심판은 생각도 못할 사정이었다.
사회․정치․경제․문화 각계가 친일 세력이 주도하는 판국이 되고 독립운동가의 부류들은 냉대받고 박해받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니 그저 힘센 놈에게 빌붙어서 적당하게 처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는 기회주의와 출세주의가 사회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거기다가 60년대 이후는 군사쿠데타로 하루 아침에 권력을 장악한 부류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일부 약삭빠른 자들이 거기에 아부, 추종해서 그와 동류가 되는 세상이 되니 사회의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그야말로 ‘도로보(도둑놈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탁류속에서 종교계는 어떠했는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종교는 가장 양심적이고 순결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또 그래야만 사회의 탁류속에서 올바른 길을 지시하고 사람이 한없이 탐욕해져 사나워지는 것을 제지해서 어느 정도 사회기풍을 바로 잡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종교계가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일제하에서의 3.1운동은 33인이라고 하는 종교계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비록 그들 중 대부분이 나중에 변절을 해지만 그래도 종교계의 지도자 구실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제하에서 종교계 지도자가 친일 반민족화되어 변절자가 된 것에 대해 해방 후에 도의적 심판을 엄정하게 해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됨에 따라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종교지도자나 종교단체가 이른바 ‘신사참배(神社參拜)’교와 일제침략전쟁에의 부역이란 반역행위를 한 사실이 해방후에도 엄격하게 심판되지 않고 어물쩡 덮어둔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불교로 말하면 이러한 친일 민족반역행위의 상처는 더욱 크다. 구한말 일본과 교류하면서 일본불교가 들어와 친일화를 조장하고 일제강점 후에는 조선총독이라고 하는 식민지 지배권력자가 사찰의 주지 임명과 재산관리의 실권을 장악하는 사찰령이 시행되면서 친일 어용화는 아주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친일화된 불교지도자와 종단의 행적이 심판되지 아니한 채 건국후에도 그대로 방치되어 이어지면서 오히려 비판세력이 거세되고 1950년 6․25 전쟁후에도 사찰, 사암이 전쟁터가 되고 지금도 간첩출몰과 범죄인 도피 우려가 있는 적선지역시되어 오면서 관의 통제하에 있다. 이에 따라 사찰, 사암에 대한 관에 의한 직접, 간접의 통제는 사실상 1980년의 10․27법난 이전이나 이후에나 마찬가지이고, 지금도 관에 의한 규제는 여전하다.
아직도 사찰령에서 불교재산법으로 변신해서 다시 전통사찰보존법으로 탈바꿈한 법령으로 재산관리나 종무행정이 관의 통제아래에 있다. 그러니 한국 불교가 이러한 여건하에서 어용화․친정부화․친여당화되고 세도가나 기득권층 부류쪽에 편양화되어 있다는 지적이 일면 타당할는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역대집권 권세층은 불교계의 재산관리나 신도의 조정에 있어서 이를 오로지 정략적으로 다루어 왔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가 불교정책을 펴나가던 과거의 사례를 생각하게 된다.
일제는 한국에서 종교에 대한 정책에서 종교계의 개혁보다 수구적․반동적 지속을 원했다. 그래서 미신적 성향이나 심지어 사교(邪敎)적 성향까지도 방치․조장했고 종교사이에 또 종단, 종파사이에 분열을 조장했다. 이에 관해선 강동진이 쓴 『일본의 조선지배정책사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구태여 그러한 연구성과가 아닐지라도 일제의 조선지배의 과정을 보면 한국인의 미신과 편견을 조장하고 봉건적 성향을 방치․조장하며 이를 역이용하여 한민족의 각성과 단결을 저지․약화시키려고 했던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 수 있다. 특히 전통종교로서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는 그 개혁의 부재을 최대한으로 악이용하여 친일화시키고 타락화시켰다. 이러한 점을 해방후에나 건국후에조차도 비판하고 반성하지 못한 채 지나온 데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일제 잔재청산의 문제는 불교계에서 가장 근원적 숙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자체진통을 치루지 않고서는 지금 한국불교가 어째서 이처럼 무력하고 기득권세력으로 편향화되고 있는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없으며 자연히 그렇게 되면 발전․진보를 이룩하는 계기조차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처럼 종단이 지역으로 쪼개지고, 스승이나 본사단위로 갈라지고, 신앙의 양태별로, 선교로 나눠지고 있어 전통강원교육과 근대교육파가 서로 통해서 하나로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아무런 큰일도 못한다.
바로 그러한 고질병을 고치려면 뼛속에 스며있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서 생겨난 병균의 뿌리를 도려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러한 종교계의 과거 치욕적이고 악질적 잔재에 대한 청산작업은 물론, 사회 각계의 일제잔재청산의 일부로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아울러 의식해야한다. 결코, 우리 사회가 해방이래 한 번 단추를 잘못 끼워 맞춤으로써 벌어진 잘못됨은 그대로 지나쳐 버림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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